소설리스트

곤륜마협-51화 (51/569)

51화

처음 듣는데요

정광은 현협각에서 나왔다.

이마를 좁히며 생각에 잠긴 유정풍이 그와 함께하고 있었다.

“당 소저 어딨어요?”

“…….”

“유 소협!”

“아. 미안하네. 한 번 더 말해주겠나?”

“당 소저 어딨냐고요. 거기 데려가려고 왔던 거 아니에요?”

“아차. 그랬지. 가세나.”

한동안 묵묵히 걷던 유정풍이 발걸음을 멈췄다.

자연히 정광도 그렇게 됐다.

둘의 시선이 마주치자 유정풍이 입을 열었다.

“아우는 강해. 아니, 내 생각보다 더 강할지도 모르지. 그리고 절대 비겁하지 않다는 것도 알고 있네.”

“물론이죠.”

평소의 유정풍이었다면 껄껄 웃었겠지만 지금은 달랐다.

“그런 아우가 합공이나 암습은 물론 도망까지 거론하다니. 그래서 더 아까 한 말을 받아들일 수가 없군.”

정광은 내심 혀를 찼다.

‘사지가 멀쩡한데도 구걸이나 하면서 사니까 쓸데없는 생각이 많네.’

오직 의(義)만을 추구하는 개방에서 자라온 유정풍으로서는 정광을 이해할 수 없는 게 당연했다.

천마신교에서 오랜 세월을 보낸 정광도 그를 이해할 수 없었으니까.

“사람마다 생각이 다른 건데 뭘 고민해요. 그냥 그러려니 해요.”

“후우우. 그래. 내가 쓸데없는 얘길 했군. 아우를 비난한 건 아니니 오해하지 말게나.”

“오해는 무슨. 근데 얼마나 가야 해요?”

당예지를 떠올렸나 보다.

유정풍의 무겁던 표정이 헤벌쭉하게 바뀌었다.

“거의 다 왔네. 어서 가자고.”

그들은 사천당가가 머물고 있는 전각에 도착했다.

문 앞에서 서성이고 있던 당예지가 정중하게 인사했다.

“유 소협. 고마워요.”

“별일 아니니 신경 쓰지 마시오.”

“정광 소협. 와주셔서 고마워요.”

“뭘요. 맛있는 독 많이 준비했어요?”

당예지의 냉랭한 얼굴이 살짝 흔들렸다.

그것은 미소와 비슷했다.

“맛은 모르겠지만 효과는 좋을 겁니다.”

“아. 기대돼.”

“그럼 이쪽으로.”

당예지가 앞장섰다.

정광은 넋을 잃고 그녀를 바라보는 유정풍을 재촉했다.

“뭐 해요? 가요.”

“그, 그래!”

당예지는 그들을 전각 뒤편의 화원에 있는 정자로 안내했다.

그런데 몇 명의 청년들이 기다리고 있는 것 아닌가.

그중 선두에 서 있던 무표정한 청년이 유정풍을 향해 두 손을 모았다.

“오랜만이오, 유 형.”

“하하. 잘 있었소, 당 형?”

“덕분에 그렇소이다.”

청년의 시선이 정광에게 향했다.

무표정한 얼굴과 달리 그의 눈에는 열기가 어려 있었다.

“안녕하시오, 정광 소협. 나는 당오군이라 하오. 누이에게 얘기 많이 들었소이다. 여기까지 와줘서 고맙소.”

지켜보던 당예지가 눈을 약간 크게 떴다.

무뚝뚝한 오라비가 평소와 달리 말을 무척 길게 했기 때문이었다.

‘정광 소협에게 큰 기대를 하고 있구나.’

당오군은 물론 이곳에 모인 당가 청년들 모두가 그랬다.

하지만 정광이 그런 걸 알 리가 있나.

설령 안다 해도 신경 안 썼을 터.

그답게 짧은 대답이 흘러나왔다.

“안녕하세요.”

“…….”

“왜요?”

“……혹 누이가 그대에 대해 무슨 말을 했는지 궁금하진 않소?”

“뭐라고 했는데요?”

당오군의 눈빛이 더 뜨거워졌다.

“정광 소협은 독을 아는 이라 했소. 독을 어떻게 생각하오?”

“흐으음.”

정광은 고개를 갸우뚱했다.

“싫기도 하고 좋기도 한데.”

당오군을 포함한 당가 청년들은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싫은 거야 당연하겠지만 좋기도 하다고?’

무림인 대부분은 독과 암기를 사용하는 건 비겁한 짓이라 생각했다.

그 독과 암기로 유명한 가문이 사천당가였기에 무림인들이 당가를 바라보는 시선은 그리 곱지 않았다.

당가가 꾸준히 협행을 하고, 강대한 힘을 가졌으며, 원한을 백배로 갚는 독종이 아니었다면 사파 취급이나 당하다가 멸문당했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그런데 좋은 점이 있다?

‘확실히 이 친구는 뭔가 다르군.’

당가 청년들을 대표해서 당오군이 물었다.

“무엇이 좋다는 것이오?”

“독만큼 효과적으로 사람을 죽이거나 살릴 수 있는 게 또 있나요?”

“……없지.”

“쓰는 사람 마음에 따라 뭐든 할 수 있잖아요.”

“……맞소이다.”

“당가는 의술로도 유명하죠? 좋은 일 많이 한다고 들었는데.”

“내 입으로 말하긴 좀 그렇군.”

“돈 많이 들 텐데 대단하네요.”

“당연히 해야 할 일일 뿐이오.”

대화가 오갈수록 당오군을 비롯한 당가 청년들의 가슴이 넓게 펴졌다.

“근데 모르는 놈들이 꼭 말이 많더라고요.”

“내 말이!”

“독이 얼마나 좋은 건데 폄하나 하고 말이야.”

“그러게나 말이오!”

“당해봐야 정신을 차리지 원. 근데 그런 놈들한테는 쓰기도 아깝죠.”

“하하하!”

정광을 바라보는 당가 청년들의 시선이 변했다.

호기심과 경계심에서 완전한 호감으로 바뀐 것이다.

항상 무표정한 당오군의 얼굴에도 미소가 떠올랐을 정도였다.

“누이가 그대를 일컬어 지음이라 하더니 과연. 나이 차가 좀 있으니 말을 편하게 해도 되겠소?”

“그러세요.”

“하하하! 아우, 이리 오게나.”

독에 대한 거부감은 나이가 어린 정파 무인일수록 강했다.

이렇게 제대로 된 시각을 가진 이를 또 어디서 만나겠는가.

정광은 격한 환영을 받으며 당가 청년들에게 둘러싸였다.

“내 아우를 만났으니 선물을 좀 하지. 꽤 오랫동안 공을 들인 독일세.”

“잠깐만요, 오라버니.”

“왜 그러느냐?”

“지금 새치기를 하시는 겁니까?”

“……그게 아니라…….”

“아니라……?”

당예지가 눈썹을 치켜뜨자 당오군은 꼬리를 말았다.

“……미안하다. 기다리마.”

당예지는 자신의 작품들을 꺼내서 정광에게 내밀었다.

“별것 아닙니다만 잘 부탁드립니다.”

“뭘요.”

먹고 찔리고 마시고 흡입하던 정광이 두 눈을 끔뻑거렸다.

“와. 황당하네.”

“많이 부족한가요?”

냉정한 얼굴을 지우고 다급히 묻는 그녀에게 정광이 대답했다.

“진합다향이 최고라 했잖아요. 이것들도 꽤 괜찮은데요?”

“……진심이십니까?”

“그럼요. 이건 호흡이 턱 막히고, 저건 바로 내장이 탈 것 같고, 요놈은…….”

정광이 독 하나하나의 증상을 얘기하자 당예지는 정신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흐음. 다 나름의 특색이 있어서 좋은데 좀 아쉽긴 하네요.”

“말해주십시오. 부탁드립니다.”

“이 세 개는 섞으면 더 복합적인 해를 끼칠 수 있을 것 같고, 저것은 둘로 나누면 더 치명적일 것 같아서요. 왜냐하면…….”

당예지는 정광의 말을 작은 책자에 적어나갔다.

간혹 질문도 했는데 대화가 길어질수록 그녀의 얼굴은 밝아졌다.

“어라? 당 소저. 방금 말한 그 생각. 좋은데요.”

그리고 정광이 칭찬을 할 때마다 꽃보다 화려한 미소가 피어났다.

“커헉!”

옆에서 그녀를 지켜보던 유정풍이 마치 독에 당한 것처럼 가슴을 움켜쥐었지만 아무도 신경 쓰지 않았다.

모두 정광에게 자신의 독을 먹이고 싶어 안달이 나 있는 상황.

당예지 다음은 당오군이었다.

“이게 내 최고의 작품이네. 이름은 삼보쇄혼(三步碎魂)이라 붙였지.”

“세 걸음 안에 혼을 부순다? 좀 거창하네요.”

“흠. 흠. 완성되는 순간 너무 기뻐서 좀 과한 이름을 짓긴 했네. 이해해 주게나.”

“일단 먹어보죠.”

정광은 삼보쇄혼을 입에 털어 넣은 뒤 걸음을 옮겼다.

한 걸음.

두 걸음.

세 걸음.

네…….

“어라?”

“아우! 어떤가? 왔는가?”

정광이 손뼉을 쳤다.

“이야. 왔어요, 왔어. 느낌 죽이는데요.”

“으하하하! 다행이군! 정말 다행이야!”

정광은 가부좌를 틀고 앉아 운기행공을 했다.

당가 청년들은 그를 둘러싸고 주위를 날카로운 눈빛으로 경계했다.

지켜보던 유정풍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독을 먹여놓고 호법을 서다니. 뭐 이런 경우가 다 있단 말인가.’

여기 있었다.

잠시 뒤, 정광이 눈을 뜨며 당오군을 칭찬했다.

“후우우. 정신이 번쩍 드네. 당 소협. 아주 좋았어요.”

“좀 구체적으로 말해주겠나?”

“우선 빈 병 좀 주시겠어요? 이거 배출 좀 하게요.”

“아차. 여기 있네.”

독을 먹고,

견딘 뒤에,

배출하고,

품평한다.

이런 식의 흐름이 계속되었다.

“와. 너무 많은데요 이거.”

“괜찮네, 괜찮아. 사양 말고 편히 드시게.”

청년들은 독을 아낌없이 바쳤다.

당가 비전의 독이라면 해선 안 되는 짓이었으나 그들이 개인적으로 연구 중인 것들이기에 아무런 거리낌이 없었다.

“당오상 소협이라 했죠? 이거 상당히 괜찮네요.”

“그, 그런가?”

“네. 피를 굳히는 속도도, 내공을 흩어내는 기세도 화끈한데요.”

음침한 인상의 청년이 뒤통수를 긁으며 수줍어했다.

“당오건 소협은 방향을 잘못 잡으신 것 같은데.”

“그, 그게 무슨 소리요?”

“산공독(散功毒)이 아니라 마비독에 가깝잖아요. 솔직히 말해보세요. 원래 마비독으로 시작했죠?”

“……마, 맞소. 헌데 나타나는 증상이나 용법이 산공독 쪽에 맞는 듯하여…….”

“에이. 우연한 효능을 보고 방향을 트는 것도 나쁘진 않지만 이왕이면 끝을 한번 봐야죠. 바꾸는 건 그다음에 해도 늦지 않잖아요.”

순한 얼굴의 청년이 몸가짐을 바르게 하며 고개를 숙였다.

“내 오늘 그대 덕분에 크게 깨달았소이다. 정말 고맙소.”

“뭘요.”

이렇게 시간이 흘렀다.

어느새 정광의 앞에는 수십 개의 병이 놓여 있었다.

모두 그가 먹은 뒤에 배출한 독액이었다.

정광은 그것들은 분류하며 입을 열었다.

“당예지 소저, 당오군 소협, 당오현 소협, 당오상 소협.”

호명된 이들이 얼결에 손을 들었다.

정광은 그들에게 병을 내밀었다.

“더 개량해 주세요.”

“……개량? 너무 부족하단 말인가?”

“아뇨. 더 좋아질 가능성이 큰 것들이라서요.”

병을 돌려받은 이들은 함박웃음을 지었다.

그중에서도 무려 세 병이나 받은 당오군은 아주 입이 찢어질 기세였다.

정광은 그런 그를 보며 물었다.

“당 소협 같은 분이 왜 구룡에 못 들었어요?”

“내가 모자라서 그렇네.”

“아닌데. 아. 명성보다 독 연구하는 데 몰두하셨구나.”

“…….”

잠시 정광을 바라보던 당오군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오늘 아우와 친분을 쌓게 되어 정말 다행이야. 적으로 만났다면…… 생각하기도 싫어지는군.”

“마음만 통하면 적도 좋죠.”

“……무슨 말인가?”

“별호가 독비천망(毒匕天網)이라면서요. 독 묻힌 비수를 던져서 하늘에 그물을 만든다. 상대가 적이어야 독기를 품고 제대로 펼칠 수 있는 거 아닌가요?”

“……그렇지.”

“그러고 보니 암기술을 못 봤네.”

“하하하! 아쉬워하지 않아도 되네. 난 언제라도 준비가 되어 있으니까. 말 나온 김에 지금 어떤가?”

당예지가 끼어들었다.

“잠깐만요.”

그녀의 얼굴은 차갑다 못해 얼음이 서린 것 같았다.

“정광 소협. 왜 나는 두 개밖에 안 되는 거죠?”

“진합다향 합치면 세 개인데요.”

“아.”

“다 합쳐서 따지면 진합다향이 최고였어요.”

당예지의 얼굴에 기쁜 기색이 떠오르는 것과 달리 당오군의 얼굴은 찌푸려졌다.

곧 둘은 서로를 바라보며 경쟁심을 불태웠다.

그러든 말든 정광은 자리를 털고 일어섰다.

“생각보다 늦었네. 그만 갈게요.”

“아우. 내 하나 물어봐도 되겠는가?”

“그러세요.”

잠시 머뭇거리던 당오군은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그 주즉시공이라는 운기법 말일세. 혹 알려줄 수 있는 건가?”

“당연히 안 되죠.”

“……역시 그렇지. 미안하군. 내 실언을 했네.”

당오군의 얼굴이 달아올랐다.

비전무공을 전수해 달라니 욕을 먹어도 할 말이 없는 일 아닌가.

하지만 정광의 주즉시공은 그만큼 탐나는 무공이었다.

독으로 강호에 명성을 떨치는 당가로서는 반드시 알고 싶고, 남이 사용하는 건 막고 싶은 절기였던 것이다.

“나도 참 멀었군. 이런 멍청한 짓을 하다니.”

자책하는 당오군에게 정광이 말했다.

“어차피 주즉시공의 기본 원리는 당가의 내공심법과 안 맞아요.”

“그렇겠지.”

“당가에 독기를 몰아내는 운기법쯤은 있지 않나요?”

“물론 있네. 하지만 아우의 것만큼은 못해.”

“그럼 그걸 발전시키면 되잖아요.”

“……!”

“설마 당가가 그것도 못해요? 아닐 것 같은데.”

생각해 보니 그랬다.

그들이라고 못할 게 무엇인가.

당예지와 당가 청년들의 눈에 불이 붙었다.

* * *

‘재밌는 녀석이군.’

한 노인이 정광을 보며 웃었다.

‘청해성에서는 진옥룡이라고 불린다 했던가.’

꽤 먼 사천성까지 이런저런 얘기가 들려오더니 과연.

저렇게 제대로 된 시각으로 독을 바라보다니 기특한 녀석이었다.

‘근데 저 거지 녀석은 왜 예지 곁에서 알짱거리는 거야?’

유정풍이 당예지에게 쓸데없는 말을 건네고 있었다.

정광은 홀로 화원을 벗어나 멀어지고 있는 상황.

‘거지는 나중에 손봐주고.’

지금은 그의 흥미를 끈 정광이 우선이었다.

‘놀아볼까.’

전각 지붕에 있던 노인의 신형이 사라지더니 한참 떨어져 있는 정광의 앞에 나타났다.

“아이야. 잠시 시간 있느냐?”

“아뇨.”

“그래. 내가 온 건…… 무어라?”

정광은 이미 노인을 지나쳐서 걷고 있었다.

잠시 멍하니 서 있던 노인이 다시 정광의 앞에 나타났다.

“아 또 왜요?”

“내 이름은 당기황이다. 이제 생각이 좀 바뀌느냐?”

“처음 듣는데요. 유명하세요?”

“……독존(毒尊)을 모른다고?”

“아. 독존.”

“후우. 그래. 내가 바로 독존이다.”

정광은 두 팔을 벅벅 긁었다.

“우와. 독존이래. 듣는 제가 다 부끄럽네요.”

“……강호동도(江湖同道)들이 그렇게 부르는데 어쩌란 말이냐! 나도 네 별호를 안다. 그거야말로 너무 과하지.”

“진옥룡이요?”

“그래.”

“그게 왜요?”

당기황은 정광을 보며 입을 떡 벌렸다.

너무나 당연하다는 표정 아닌가!

‘뭐 이딴 놈이 다 있어?’

속으로는 그렇게 생각했지만 정광의 외모는 눈이 부셨다.

과연 진옥룡이라 불릴 만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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