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0화
협의(俠義)
자고로 사람은 먹어야 사는 법.
팽강웅도 그걸 부정하진 않았다.
하지만 왜 하필 지금?
‘……식당이라니. 정말 배가 고픈 건가?’
정광이 먹는 꼴을 보아하니 그런 것 같지도 않았다.
배가 고프면 젓가락질이 바빠지기 마련이거늘, 저렇게 그림처럼 아름답게 먹는 건 또 뭐란 말인가!
‘흥분해선 안 돼. 그걸 노리고 일부러 이러는 건지도 모른다.’
팽강웅은 방립을 벗은 정광의 얼굴을 유심히 바라봤다. 그의 시선을 느꼈는지 정광도 그를 바라봤다.
그리고.
씨익.
“…….”
정광은 같은 남자가 봐도 아찔할 정도로 멋진 웃음을 지었다.
‘……역시 호락호락하진 않군. 직접 알아내 보라는 건가?’
팽강웅은 눈살을 찌푸렸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이를 드러내고 웃어 보였다.
‘좋아. 한번 해보자꾸나.’
한편 정광은 다시 밥을 먹느라 팽강웅의 웃음을 보지 못했다.
아까는 자꾸 쳐다보기에 제대로 패줘야겠다고 다짐하다 보니 웃음이 새어 나왔었지만, 지금은 다른 생각이 머리를 채우고 있었다.
‘풀 쪼가리뿐이지만 괜찮네. 나름 지낼 만하겠는데.’
요리는 훌륭했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게 구파일방은 거지들이 모인 개방을 제외하면, 전부 도문(道門)과 불문(佛門)인 문파들이었다.
그런 문파들이 한 축을 담당하는 무림맹이었다. 풀을 어떻게 요리해야 먹을 만해지는지 잘 아는 숙수(熟手)들이 주방에 포진해 있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고기야 새벽에 들러서 먹으면 되고. 뭔가 입가심할 만한 건 없나? 아!’
정광은 잊고 있던 사실을 깨닫고 품속을 뒤졌다.
잠시 후, 그의 손에는 작은 병이 들려 있었다.
당예지의 진합다향을 먹은 뒤 배출했던 독액이 그 속에서 찰랑거렸다.
“거참.”
맞은편에 앉은 정우가 눈살을 찌푸렸다.
“어제도 그러더니 또 그러는구나. 그걸 꼭 지금 먹어야겠느냐?”
“공복에 먹으면 속 쓰려서요.”
“하아아. 알겠다. 네가 어련히 알아서 하겠냐만 조심하거라.”
“네.”
정광은 병마개를 열고 독액을 입안에 털어 넣었다.
곤륜 제자들은 그러려니 하며 계속 식사를 했는데, 그들을 제외한 이들은 놀라다 못해 경악했다.
정광이 식당에 들어올 때부터 힐끔거리던 다른 문파와 가문의 제자들이었다.
‘저! 저!’
‘단 세 방울만으로 남궁력을 변룡으로 만들어 버린 그 독인가!’
‘그걸 아무렇지도 않게 한입에 다 먹는다고?’
팽강웅도 그들처럼 입을 떡 벌린 채 정광이 하는 짓을 바라봤다.
정광은 눈을 지그시 감은 채 맛을 음미하고 있었다.
‘으음. 알싸한 맛이 좀 약해졌네.’
독에 대한 내성을 키우기 위해 먹는 것이었다.
그래도 맛이 좋으면 더 좋은 일 아닌가.
정광은 아쉬움을 누르며 상청무상신공과 주즉시공을 운기했다.
단전의 진기가 몸 구석구석으로 퍼져나갔다.
독이란 항상 주의해서 다뤄야 하는 것. 먹고 난 뒤에는 더 그렇다.
정광은 신중하게 운공을 거듭했다.
얼마 안 가 진기가 순환하자 여유가 생겼다.
‘역시 괜찮은 독이야.’
그것을 준 당예지의 얼굴이 떠올랐다.
‘무림맹에 있겠지? 이 독이 익숙해지면 다른 독을 달라고 해야겠다.’
정광은 이 정도면 됐다 싶자 빈 병에 손가락을 댔다.
먹기 전보다 더 옅어진 노란색 독액이 병 속으로 한 방울씩 떨어졌다.
똑. 똑. 똑…….
그 소리에 맞춰 지켜보던 이들의 가슴도 세차게 뛰었다.
‘보기만 해도 남궁력처럼 쌀 것 같구나.’
‘설마 만독불침은 아니겠지? 미친. 무슨 그런 말도 안 되는 생각을.’
검룡이라 추앙받는 남궁력조차 버티지 못한 독이었다. 그것을 꿀처럼 먹는 모습을 보니 두려움과 경외심이 동시에 느껴졌다.
하지만 팽강웅은 달랐다.
‘원래 대단한 놈인 건 알고 있었다.’
그래도 약점이 없는 사람은 없는 법. 팽강웅은 그것을 찾을 때까지 인내할 수 있는 사내였다.
그가 그런 생각을 하든 말든 정광은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었다.
‘입가심도 했겠다, 숙소만 괜찮으면 되겠네.’
정광의 좋았던 기분은 숙소에 도착하자 사그라들었다.
‘……내가 곤륜에 다시 왔나?’
그런 착각이 들 만했다.
곤륜파의 것들과 자웅을 겨룰 수 있을 정도로 낡은 전각이 을씨년스럽게 서 있는 것 아닌가.
여기까지 안내를 한 문사도 좀 민망했는지 헛기침을 했다.
“흠. 흠. 조금 고풍스럽지요?”
고풍?
조오오금?
황당해하는 정광과 달리 대사형 정우는 껄껄 웃었다.
“하하. 괜찮습니다. 비를 피할 만한 지붕과 바람을 막아주는 벽이 있는 것만 해도 호사지요.”
다른 정 자 배 제자들도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물론 정광은 아니었다.
그런 그를 유심히 지켜보던 팽강웅이 말을 건넸다.
“들어가 보면 마음이 바뀔 걸세.”
“뭔가 아시나 보네요?”
“하하하. 우리도 이만 숙소로 가겠네. 다음에 보세나.”
팽강웅은 팽가 무인들을 이끌고 떠났다.
그의 머릿속은 조금 전 정광이 지었던 표정으로 가득했다.
‘혼자 웃지 않았어. 숙소가 마음에 안 든다는 뜻이렷다. 듣던 것과 달리 세속적 욕망이 있을지도.”
그의 눈이 빛났다.
‘만약 그렇다면 다룰 방법이 없는 건 아니지.’
욕망이 있는 자에겐 그 욕망을 쥐여주면 된다.
그 또한 그랬기에 잘 아는 사실이었다.
한편 정광은 전각에 들어가고 나서야 팽강웅의 말을 이해했다.
‘뭐야? 멀쩡하잖아.’
낡은 외관과 달리 안은 제법 괜찮았다. 연화객잔처럼 화려하지는 않았지만 무림맹이라는 이름에는 어울릴 정도였다.
‘밖의 시선을 의식한 건가?’
무림맹쯤 되면 무인뿐만 아니라 각양각색의 신분인 사람들이 드나들게 되어 있다.
그런 그들에게 청빈함을 보여주기 위해 외관을 낡게 유지하고, 내부는 이런 식으로 만든 것이리라.
‘명불허전(名不虛傳)이군.’
겉과 속이 다른 정파의 모습을 여실히 보여주는 구조 아닌가.
뭐 덕분에 불편하지 않게 지낼 수 있게 되었으니 나쁜 일은 아니었다.
백승무도 마찬가지 생각인 듯 방을 둘러보며 피식거리고 있었다.
“사제.”
“네, 사형.”
“지금 그럴 시간이 있어?”
“아차! 죄송합니다.”
백승무는 재깍 가부좌를 틀고 앉아 소청기공을 운공하기 시작했다.
그는 허청의 자상한 가르침과 정광의 악귀와 같은 지도 덕분에 하루하루가 다르게 성장하고 있었다.
정광은 백승무의 명문혈에 손을 대고 진기가 움직이는 모습을 관찰했다.
‘흐음. 뭐 이 정도인가?’
백승무의 자질을 생각하면 대단한 성취였다.
하지만 그것도 기초를 쌓는 과정에서나 가능한 것.
백승무는 부족한 자질 때문에 곧 한계에 맞닥뜨릴 것이다.
‘사형들의 자질 정도만 돼도 괜찮을 텐데 말이야.’
정광의 기준으로는 다 고만고만했지만 세밀히 나누면 엄연한 격차가 있었다.
‘자질이 모자란 자가 위로 올라가기 위해선 필요한 게 있는데.’
백승무는 그것이 없었다.
만약 녀석이 그걸 알게 된 뒤에 실행까지 할 수 있게 된다면…….
‘언젠가는 제법 봐줄 만한 무인이 될지도.’
고개를 주억거리던 정광은 잊고 있던 사실을 떠올렸다.
‘잠깐. 그냥 무인이 되어버리면 이 녀석의 상재(商才)가 아깝잖아.’
역시 돈을 불리는 일을 계속 시켜야 한다.
‘그럼 상재도 꽃을 피우게 될 것이고…….’
재밌는 무인이 강호에 나타나리라.
한 손엔 금, 한 손엔 검을 휘두르는 무인이.
‘금권검마(金權劍魔)…… 이런. 천마신교가 아니라 곤륜파지. 그럼 금권검협(金權劍俠) 백승무?’
돈도 협도 다 들어가니 녀석도 불만은 없으리라.
괜찮은 그림이 그려지자 흡족해하던 정광은 익숙한 기운을 느꼈다.
유정풍이었다.
“이보게 아우! 거기 있는가!”
“네.”
“기껏 무림맹에 와놓고 안에 박혀 있으면 어떡하나! 나와보게!”
놔뒀다간 종일 떠들 기세였다.
정광은 방문을 열고 나갔다.
유정풍이 반가운 얼굴로 서 있었다.
“계약 끝났는데 왜요?”
“허어. 사람 참 정 없긴. 내 고마워서 그러지.”
“잘되고 있어요?”
“흐흐. 그래도 당 소저에게 말은 할 수 있게 되었네.”
“혹시 당 소저가 나 데려오라고 했어요? 독 먹인다고?”
찔끔한 유정풍이 화제를 돌렸다.
“하하. 그건 그거고. 어디 가고 싶은 곳은 없나?”
“뭘 알아야 있죠.”
“그래서 내가 온 것 아닌가! 내가 안내해 주지. 가세나.”
“어디를요?”
“음…… 역시 무림맹에 왔으면 현협각(顯俠閣)부터 가봐야겠지.”
그게 뭔데?
정광이 어리둥절한 표정을 짓자 유정풍도 똑같은 얼굴이 됐다.
“……설마 모르나?”
“네.”
유정풍은 고개를 절레절레 젓다가 정광을 잡아끌었다.
“가세. 정파인(正派人)이라면 꼭 가야 하는 곳이야.”
전생엔 마도(魔道)의 지존(至尊)이었고, 현생엔 무늬만 정파인 정광에겐 관계없는 곳이란 얘기였다.
“별로 안 내키는데요.”
“여기서 아무것도 안 하고 있는 것보단 나을 것 아닌가.”
틀린 말은 아니었다.
‘한번 구경이나 해볼까.’
정광은 유정풍을 따라 걸음을 옮겼다.
* * *
‘현협(顯俠)’이라 함은 협(俠)을 높이 드러낸다는 뜻이다.
‘이름을 듣고 혹시나 했더니.’
그 뜻 그대로였다.
현협각(顯俠閣)은 중원무림을 지키다가 스러져 간 협객들을 기리는 전각이었다.
유정풍은 엄숙한 표정을 지은 채 정광에게 설명했다.
“이건 전전전대 맹주님의 것이지. 마교 무리를 막아내며 흘리신 피로 물든 장포일세. 그 옆의 것은 마교의 우두머리였던 혈면마도(血面魔刀) 한상여의 도(刀)일세.”
정광은 어이가 없었다.
정말 그 소심한 녀석의 칼 아닌가.
“후우우. 이건 전전대 맹주님의 검이네. 보게나. 날의 이가 다 나갔지 않은가? 이 지경이 될 때까지 얼마나 많은 악적들을 베어내셨을지.”
그 옆에 있는 권갑(拳鉀)에 더 눈이 갔다.
중원에선 철혼붕권(鐵魂崩拳)으로 불렸다던 모경후, 그 무식한 놈의 것이 맞았다.
유정풍은 정광을 이끌며 현협각의 이곳저곳을 돌아다녔다.
정광이 아는 녀석들의 병기가 드문드문 눈에 띄었다.
정파의 입장에선 전리품이었다.
“이보게 아우. 아까부터 계속 말이 없군. 마음이 아파서 그런가?”
아니.
열 받아서.
그냥 나한테 뒈지지!
죽은 뒤에도 이런 꼴이나 당하려고 도망쳤냐!
정광의 이마에 핏줄이 서자 그 이유를 오해한 유정풍이 어깨를 두드렸다.
“그래. 그래야지. 데려온 보람이 있군. 아우가 조금 별나긴 하나 피가 끓는 정파인이었어.”
아니. 그게 아니라…….
“자. 가세. 현협각은 넓다네.”
넓긴 진짜 넓었다.
이곳은 천마신교와의 전쟁에서 죽은 이들만 기리는 곳이 아니었다.
색마(色魔)나 살귀(殺鬼) 같은 놈들과 싸우다 쓰러져 간 협객들의 유품도 전시되어 있었다.
‘꽤나 정성을 들였구나.’
문득 전생에서 썼던 병기들이 생각났다.
‘그것들은 어떻게 됐을까?’
정광은 피식 웃었다.
‘보나 마나 뻔하지.’
눈이 벌게진 수하들이 박 터지게 싸워서 나눠 가졌을 것이다.
‘좀 아깝네.’
입맛을 다시는데 유정풍의 목소리가 들렸다.
“역시 아우는 다르군.”
“뭐가요?”
“주변 사람들을 한번 보겠나? 그들과 자네의 차이가 느껴지지?”
정광은 주위를 둘러봤다.
눈물을 흘리는 이가 부지기수였다.
최소한 붉어진 눈을 끔뻑거리든가.
오직 정광의 눈만 또랑또랑했다.
“울어야 해요?”
“……꼭 그런 건 아니네만.”
유정풍은 어깨를 으쓱한 뒤 말을 이었다.
“내 아우를 안 지 얼마 안 됐지만 알 건 알아. 아우는 청해성에서나 여기에서나 도리에 어긋난 일은 한 적이 없네. 방법이 거칠긴 하지만 협의(俠義) 있는 일들을 해왔어. 하지만 여긴 무림맹일세.”
“……?”
“정파라면, 무인이라면 반드시 어떠해야 한다. 이런 식의 케케묵은 생각을 가진 이들이 득실대는 곳이란 말이지.”
정리하자면 특이한 사고방식과 표현 방법을 가진 정광이 앞으로 많은 오해를 받을 거란 내용이었다.
“그러니 다른 사람들과 좀 비슷한 척이라도 해보는 게 좋을 거야.”
정광은 고개를 저었다.
“사실 잘 이해가 가지 않아요.”
“뭐가 말인가?”
“여기만 해도 그렇죠. 좋은 일을 하다가 죽은 분들을 기리는 건 좋아요. 근데 그분들은 왜 죽은 거죠?”
“그야 당연히 협의를 위해 한목숨 바치신 것 아닌가.”
“유 소협도 그럴 거예요? 상대가 유 소협보다 더 강한데?”
유정풍이 허리를 꼿꼿이 세웠다.
“물론. 협의를 위해서라면 그럴 것이네.”
“나라면 안 그럴 건데.”
“……뭐?”
“이기지 못할 적한테 왜 덤벼요. 사람을 모아서 같이 치거나 암습을 하고 튀든가 해야지.”
유정풍의 입이 크게 벌어졌다.
“……무, 무슨 그런 말을…….”
정광이 그의 말을 끊고 단호하게 말했다.
“일단 내가 살아야죠. 그리고 살아야 앞으로 또 다른 협행을 할 수 있는 거 아닌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