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곤륜마협-49화 (49/569)

49화

무림맹(武林盟)

팽수원이 안으려 하자 정광이 한 걸음 물러났다. 멈칫했던 팽수원이 한 번 더 다가가자 정광이 또 물러났다.

“……거참. 무안해지잖나.”

“안녕하세요.”

“……그래. 안녕하네. 조카는 못 본 사이에 훤칠한 장부가 됐군.”

빈말이 아니었다.

신비했던 미소년이 천하제일의 미남자가 되어 그의 앞에 서 있었다.

“허청 그 친구는 안에 있는가?”

“네. 어르신들이랑 같이요.”

“좋아. 들어가세.”

팽수원과 팽가의 무인들이 정광과 함께 객잔으로 들어갔다.

여느 객잔이 그렇듯 연화객잔도 일 층은 식사하는 공간이었다.

팽가의 무인들이 자리에 앉자 정광은 후원의 별채로 소식을 전하러 갔다.

팽수원이 정광의 뒷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는데 옆에 있던 위맹한 얼굴의 장년인이 말을 걸었다.

“숙부께서 가끔 말씀하시던 정광이라는 어린 도사가 저 친구입니까?”

“그렇네.”

“말씀대로 대단한 미남자군요.”

팽가 사내들은 그들처럼 우락부락한 얼굴이 잘생겼다는 잘못된 미남관(美男觀)을 가지고 있었다.

하지만 정광의 얼굴은 그런 미남관을 박살 낼 정도로 아름다웠다.

그리고 애초에 말을 꺼낸 장년인은 제대로 된 안목을 가지고 있는 자였다.

“숙부께서 너무 칭찬하셔서 솔직히 과장이 너무 심한 건 아닌가 생각했었습니다.”

“이해하네.”

“저 친구의 무공도 말씀대로겠지요. 강휘가 껍질을 한 꺼풀 벗게 한 자라…….”

“직접 시험해 볼 생각인가?”

“마음은 그런데 머리가 피하라 하는군요. 하하하. 오면서 들은 소문이 좀 끔찍해야지요.”

너스레를 떨었지만 그의 두 눈은 뜨겁게 일렁이고 있었다.

팽수원은 그의 조카인 팽강웅에게 나직이 말했다.

“내 충고 하나 함세.”

“말씀하십시오. 가슴에 새기겠습니다.”

“절대 저 아이와 척을 지면 안 되네. 알겠는가?”

하북팽가 가주의 적자이자 일공자인 팽강웅은 잠시 침묵하다가 빙그레 웃었다.

“알겠습니다.”

말과 달리 그의 눈에는 묘한 열기가 어려 있었다.

* * *

허청이 제일 먼저 날 듯이 뛰어왔다.

“수원! 이 친구. 왜 이리 늦었나?”

“하하. 일을 확실하게 하려다 보니 그렇게 됐네.”

“그래. 자신은 있고?”

“진인사대천명(盡人事待天命)이라고 하지 않나? 지켜보세.”

허청은 빙그레 웃는 친우를 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신중한 팽수원이 이렇게 말한다는 건 어느 정도 자신이 있다는 말이었다.

“이럴 게 아니라 들어가세.”

“그래. 어르신들께 인사부터 드려야지.”

팽수원을 비롯한 팽가 무인들은 곤륜 도사들과 한참 대화를 나눈 뒤 돌아갔다.

그들을 멀리까지 배웅한 허청은 객잔에 돌아와 정광을 불렀다.

“잠시 얘기 좀 하자꾸나.”

“네. 사부.”

허청은 잠시 생각을 정리한 뒤 입을 열었다.

“그간 비어 있었던 무림맹의 내부 정리가 대충 끝났다. 내일부턴 무림맹에 들어가 지내게 될 것이야.”

“네.”

“여러 문파, 여러 가문의 사람들과 얼굴을 맞대고 지내야 할 터. 네 성격을 안다만 그들을 공기처럼 보지 말고 하나라도 배웠으면 좋겠구나.”

“안 그래도 그러려고요.”

“……!”

너무나 의외의 대답에 허청의 눈이 커졌다.

잠시 눈을 껌뻑이던 그는 기쁜 목소리로 제자를 칭찬했다.

“그래. 아주 잘 생각했다.”

“뭘요.”

허청의 입이 찢어졌다.

‘이리도 대견할 수가 있나.’

정광이 비록 천재 중의 천재라 하나 무공에 국한된 것이다.

오히려 사람을 대하는 요령은 범재에게도 못 미쳤기에 내심 걱정하던 참이었다.

그런데 다른 이에게 뭔가를 배울 생각을 다 하다니.

‘허허. 그래. 이래야 내 제자지.’

하지만 이건 심각한 오해였다.

정광이 배우겠다는 건…… 아니, 제대로 표현하면 갈취하려는 건 다른 이들의 무공이었다.

‘구파일방에 칠대세가. 그 밑으로 고만고만한 문파들도 많으니 심심하진 않겠네.’

그래도 어느 정도 수준은 되어야 했다.

‘누구부터 할까?’

똥싸개 남궁력을 떠올리던 정광은 내심 고개를 저었다.

‘순서를 정하다니. 이건 아니지.’

덤비는 놈부터 패고 뺏는 게 순리에 맞으리라.

혹시 그런 놈이 없을까 염려할 필요는 없었다.

무림맹이었으니까.

목이 꼿꼿한 명문정파의 무인들이 모였으니 남궁력 같은 놈들은 발에 채일 만큼 많을 게 분명했다.

정광의 입가에 저절로 미소가 걸렸다.

“허허. 녀석. 그리 들뜨느냐?”

“네?”

“네가 이건 알아둬야 할 것 같구나. 맹주 선출 문제로 알력이 좀 있다. 그러니 누군가 날을 세우며 대하더라도 그러려니 하거라.”

“어떻게 되고 있는데요?”

“대충 세 무리로 나뉘었다. 역시나 화산과 종남이 손을 잡았더구나. 남궁세가를 밀고 있어. 그리고 우리처럼 팽가를 지지하는 세력. 마지막으로 관망하는 이들이 있다.”

“구파일방에서는 안 나서나요?”

허청이 빙그레 웃었다.

“명색이 도사요, 승려며, 거지가 아니더냐? 세속의 일에 주도적으로 나서기엔 무리가 있지.”

“그 정도로는 얼굴이 두껍지 않다는 말씀이죠?”

“하하. 그렇게 노골적으로 말하니까 부끄러워지잖느냐. 그래, 지금껏 그래왔고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허청은 한동안 웃다가 무거운 표정을 지었다.

“이번 맹주는 큰 권한을 가지게 될 게야. 전에는 명예직에 가까워서 빠른 결정을 내리기 힘들었다. 그로 인해 마교의 산발적인 침공에 제대로 된 대응을 하기가 힘들었었지.”

“……마교요? 산발적인 침공?”

“너는 잘 모를 것이다. 만악의 근원인 진천마는 중원무림의 피를 말리는 전략을 썼었단다. 한꺼번에 밀고 들어오는 게 아니라 틈만 나면 침공을 했었지. 무량수불. 다시 느끼지만 그가 죽어 정말 다행이구나.”

다시 태어났다니깐.

만악의 근원 타령은 하도 들어서 이제 그러려니 했다.

그래, 본의는 아니었지만 곤륜이 좀 힘들었던 건 알아.

그런데 산발적인 중원 침공?

피를 말리는 전략이 뭐가 어째?

정광은 어이가 없었다.

‘아주 다 내 탓이네. 나도 처음 듣는 얘긴데 무슨.’

항변하려던 그는 가까스로 입을 다물었다.

전생의 그 대신 현생의 그가 반론할 수는 없는 노릇 아닌가.

그렇다고 그러려니 하기엔 께름칙했다.

‘이거 이상한데. 혹시 누군가의 음모 아니야?’

잠시 고민하던 그는 조금 더 들어보기로 했다.

“대체 어떤 놈들…… 사람들이었어요?”

“사람이 아니라 피에 굶주린 악귀들이었다고 한다.”

“……악귀요?”

“그래. 아니, 악귀란 말로도 모자랄 정도로 흉포했다더군.”

허청은 생각만 해도 오한이 드는지 몸을 부르르 떨었다.

덕분에 정광은 확신했다.

‘누군가 뒤집어씌웠구나!’

말이 마교지 거기도 사람 사는 곳이었다.

거칠고 싸가지 없는 놈 천지였지만 악귀라는 말까지 들을 정도의 놈들은 없었던 것이다.

‘그렇단 말이지…….’

상대를 알아야 했다.

“이름이 뭐예요?”

“대충 생각나는 이들만 말해주마.”

정광은 주먹을 불끈 쥐었다.

‘대체 어떤 놈들이 본 교…… 천마신교를 사칭해! 가만 안 둔다!’

밉든 곱든 친정이었다.

정광은 귀를 쫑긋 세우고 허청이 꺼내는 이름을 머릿속에 새겼다.

“혈면마도(血面魔刀) 한상여.”

……조금만 갈궈도 얼굴이 빨개져서 울던 그 소심한 녀석?

“철혼붕권(鐵魂崩拳) 모경후.”

……하도 멍청해서 제 이름 석 자 쓸 줄 아는 게 평생의 자랑거리인 근육 덩어리?

“환락마녀(歡樂魔女) 소희빈.”

잠깐. 희빈이 걔가 성격이 더러워서 그렇지 나름 정숙한 아인데. 환락마녀는 좀 심하잖아.

움켜쥐었던 주먹은 어느새 힘이 빠져 풀린 상황.

황당해하는 정광과 달리 허청은 진지하다 못해 엄숙했다.

“그들은 정말 강하고 잔인했다. 마교의 최정예를 이끌고 중원을 휩쓸었지. 얼마나 처참했을지 상상이 가느냐? 그때마다 중원무림은 오랫동안 몸살을 앓았다더구나.”

정광은 깨달았다.

‘다 반기를 들었는데 미처 죽이지 못했던 놈들이네.’

전생의 정광은 적을 용서하지 않았다. 덤비면 바로 족쳤는데 그 수가 너무 많아서 도망치는 놈들도 꽤 있었다.

‘그놈들이 중원으로 갔던 건가.’

별호가 좀 이상하게 바뀌었지만 이름이 같으니 맞으리라.

‘나한테 얌전히 맞아 죽지 왜 딴 동네에 기어들어 가서 민폐질이야!’

정광이 마교의 악행 때문에 화났다고 오해한 허청은 얘기를 돌렸다.

“그런 이유로 이번 맹주 선출은 아주 중요하다.”

“팽가주는 어떤 사람인데요?”

“호한(好漢)이지.”

“깔끔하네요. 단점은요?”

“야망이 좀 커.”

의협과 야망을 함께 가진 자라.

그 정도면 나쁘지 않다는 생각이 들었다.

허청도 사심을 숨기지 않았다.

“본문과 청해성의 민초들을 위해서라도 그가 맹주가 되었으면 좋겠구나.”

* * *

다음 날 아침, 곤륜파는 팽가와 함께 무림맹으로 향했다.

생각보다 이동하는 데 시간이 걸렸는데 모두 곤륜파 때문이었다.

정확히 말하면 그들을 본 사람들이 몰려들어서 그랬다.

“아아. 신선 어른. 제 노모가 오늘내일하는데 축원을 해주시면 안 되겠습니까?”

“선인들을 뵙습니다. 어디서 부정을 탔는지 하는 일마다 잘 안 되는데 제를 부탁드려도 될는지요?”

곤륜 도사들은 절박하게 달라붙는 사람들을 아예 모아버렸다.

“무량수불. 시간이 없어 짧게 해야 하니 이해해 주시오.”

“태상노군께서도 정성을 중요히 여기시니 기꺼워하실 겁니다.”

사람들에게 양해를 구한 그들은 귀찮은 티 하나 없이 할 일을 했다.

일일이 축원을 하고 약식으로나마 제를 올린 것이다.

자연히 사람들은 곤륜을 칭송했다. 곤륜 도사들은 겸양할 뿐, 절대 우쭐하거나 오만한 모습을 보이지 않았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팽강웅은 내심 감탄했다.

‘대단하군. 진짜 도사들이구나.’

문득 생각이 나서 시선을 돌리자 정광도 방립을 쓴 채 얌전히 사람들을 대하고 있었다.

‘종잡을 수 없는 성격이라 들었는데 제법 도사다운 면이 있는 건가?’

정광에 대한 소문을 더듬는데 동생인 팽강휘의 말이 떠올랐다.

‘그는 진정 도를 품고 있는 사람입니다. 그가 세상에 나오면…….’

뒷말을 잇던 팽강휘의 얼굴에는 시원시원한 미소가 걸려 있었다.

‘……그의 이름만이 사람들의 뇌리에 들어차게 될 겁니다.’

아우의 말을 곱씹던 팽강웅은 그도 모르게 주먹을 움켜쥐었다.

‘내가 있건만 뭐가 어째?’

정광을 만나서 새로운 경지에 들어섰다는 팽강휘였다.

그래 봤자 뭐가 그리 대단할까 싶었지만 팽강휘와 비무를 한번 해본 뒤론 생각이 바뀌었다.

‘상대도 안 되는 녀석이었거늘. 간신히 이길 수 있었지.’

그 뒤로 부친의 관심이 아우에게 쏠리는 것을 느낀 팽강웅이었다.

‘그래. 네 말이 사실이겠지.’

정광은 특별한 자이리라.

팽강휘의 무공을 올려줬을 뿐만 아니라 패룡이라는 허명에 취해 오만하게 굴던 녀석을 호협(豪俠)하게 바꿨을 정도로.

하지만…….

‘나는 팽강웅이다.’

전대(前代) 구룡사봉 중 한자리를 꿰차고 강호를 질주했던 도룡(刀龍)이 바로 그였다.

‘절대 뺏기지 않아.’

하북팽가는 그의 것이었다.

‘절대 밀리지 않을 것이다.’

강호를 울릴 이름은 그의 것이면 충분했다.

‘어떤 수를 써서든…….’

팽강웅은 그럴 자신이 있었다.

한편 정광은 그의 집요한 시선을 느끼며 속으로 투덜대고 있었다.

‘저놈부터 패고 싶은데. 같은 편이라 그럴 수도 없고.’

투쟁심을 발하면서도 살기까지는 뿜지 않는 걸 보면 제법 자신을 다스릴 줄 아는 자였다.

게다가.

‘호오. 이것 봐라?’

팽강웅의 기운은 과거의 팽강휘는 물론 지금 같이 있는 팽가 무인들과도 미약하게 달랐다.

이건 무공이 높다고 알 수 있는 게 아니었다.

정광이 전생부터 가지고 있는 육감이 그것을 가능케 했다.

‘재밌는 놈이네.’

방립 틈으로 빤히 바라보자 팽강웅이 씩 웃었다.

누가 봐도 기분 좋아질 만큼 커다란 미소였다.

정광만 빼고.

‘좋아. 저 녀석도 언젠가 남궁력처럼 속을 한번 뒤져보자.’

둘이 이렇게 다른 생각을 하는 사이, 일행은 어느덧 무림맹에 도착했다.

활짝 열린 거대한 대문 좌우로 엄정히 서 있는 무인들이 보였다.

그들 사이에서 학창의(鶴氅衣)를 걸친 청수한 인상의 중년인이 걸어 나왔다.

“곤륜과 팽가가 함께 오셨군요. 무림맹에 오신 걸 환영합니다.”

“제갈 대협이시군요. 반갑습니다.”

중년인은 칠대세가 중 하나요, 지모로 이름 높은 제갈세가의 제갈문형이었다. 딱 봐도 머리가 좋아 보였는데 그는 실제로 제갈세가를 이끄는 자 중 하나였다.

분분히 인사가 오고 간 뒤 제갈문형이 그들을 안내했다.

정광은 발걸음을 옮기며 주위를 면밀히 훑어봤다.

‘수비를 위한 배치군. 꽤 넓은데.’

수많은 전각이 오행(五行)에 팔괘(八卦)를 배합한 방위에 따라 늘어서 있었는데, 잠깐만 봐도 무림맹의 규모가 대단함을 느낄 수 있었다.

제갈문형은 운학, 팽수원과 잠시 얘기를 나눈 뒤 곤륜의 정 자 배와 팽가의 청년들에게 말했다.

“우리는 바로 회의에 참석해야 할 것 같네. 사람을 한 명 붙여줄 테니 소협들은 무림맹 안을 둘러보게나.”

장년의 문사가 그들을 안내했다.

“어디를 보고 싶으십니까?”

다들 서로를 바라보자 팽강웅이 말했다.

“진옥룡. 자네가 말해보게.”

“나요?”

“그렇네. 어디를 가고 싶은가?”

팽강웅은 정광의 입술을 노려봤다.

‘숙소부터 갈 것이냐? 태만하다는 의미지. 연무장? 무공광일 것이다. 설마 전체를 둘러보며 다른 세력을 살필 의중인가?’

팽강웅은 고개를 갸웃하는 정광을 보며 속으로 부르짖었다.

‘어디 말해봐라! 네 그릇을 보마!’

정광은 배가 고팠다.

“식당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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