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곤륜마협-48화 (48/569)

48화

더 좋은 그림

정광이 나서자 사람들이 물러섰다.

남궁력은 간절한 눈빛으로 그를 올려다봤다.

‘이 새끼야! 빨리 날 구해!’

마음속으로 외쳤기에 망정이지, 입 밖으로 꺼냈다면 죽지도 살지도 못하는 꼴이 되었으리라.

아니, 그는 이미 그런 상황이었다.

당예지는 진합다향을 그럴 의도로 만들었고 정광에 의해 변형된 독액은 그 성질을 고스란히 가지고 있었으니까.

이를 잘 아는 당예지는 걱정할 수밖에 없었다.

‘조금 전에 변형된 독이야. 아무리 정광 소협이라도 힘들 텐데. 그까지 위험해질지도 몰라.’

그야말로 쓸데없는 걱정이었다.

정광은 남궁력을 해독하기 위해 나선 게 아니었다.

그가 그렇게 좋은 사람일 리가 없지 않은가.

‘좋아. 한번 해볼까.’

정광은 두 손을 비볐다.

칠대세가의 수위를 다투는 검의 명가 남궁세가.

그 적자의 몸을 구석구석 헤집어 볼 기회였다.

정광은 남궁력을 똑바로 앉힌 뒤 억지로 가부좌를 틀게 했다.

“내 내공을 넣을 거예요. 거부하지 말고 받아들여요.”

남궁력은 눈을 깜빡이는 것으로 대답을 대신했다.

피식 웃은 정광은 그의 뒤에 앉아 명문혈(命門穴)에 손바닥을 붙였다.

그리고 상청무상신공을 끌어올려서 천천히 밀어 넣었다.

남궁세가나 곤륜파나 정종심법(正宗心法)을 사용했기에 별다른 이질감 없이 들어갈 수 있었다.

정광은 먼저 진기를 순환하여 남궁력의 내부를 샅샅이 훑었다.

‘폐와 심장은 어느 정도 붙잡고 있군. 나머지가 문제구나.’

원래대로라면 그 나머지를 정광이 맡아야 했으나 그의 목적은 그런 게 아니었다.

-내가 폐와 심장을 보호할 테니까 그 진기를 빼서 다른 곳을 보하세요. 갑니다.

어차피 남궁력은 대답할 수 없는 상황. 정광은 말을 하자마자 내공을 움직였다. 그의 두터운 내공이 폐와 심장을 감싸자 남궁력의 진기가 스르륵 빠져나갔다.

그때부터였다.

여력이 생긴 남궁력은 남궁세가가 왜 정파제일검가(正派第一劍家)라고 불리는지 보여줬다.

창궁대연신공(蒼穹大衍神功)!

푸른 하늘은 크고도 넓었다.

몸 전체에 퍼진 독기(毒氣)를 힘겹게 막아내 왔던 남궁력의 내공이 단전에 모여 그 크기를 키웠다.

그리고 다시 창궁대연신공의 구결을 따라 전신으로 퍼져 나갔다.

“오오. 제대로 되고 있는 건가?”

“보게나. 확실히 그런 것 같네.”

남궁력의 안색이 조금씩 나아졌다. 지켜보던 이들도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당예지만 빼고.

‘이번이 고비야!’

정광에 의해 변형되었다곤 하나 기본적인 성질은 그녀가 만들었던 그대로였다.

힘을 잃고 흩어져 가던 독기가 천천히 뒤틀리며 엉기기 시작했다.

남궁력의 얼굴이 파랗게 변했다.

독의 성분이 다시 합쳐지며 변형된 독기는 너무나 끈적끈적했다.

그것은 그의 세맥(細脈)을 집요할 정도로 파고들어 갔다.

미처 막을 틈도 없었다. 강물을 막고 있던 제방에 균열이 생기듯 겨우 버티고 있던 그의 내부가 무너져 내렸다.

‘빌어먹을! 결국엔 이건가!’

그의 정신도 무너지려는 그때.

-정신 차려요!

정광의 전음이 터졌다.

-계속 운공해야죠! 죽고 싶어요?

어차피 다른 길은 없었다.

남궁력은 홀린 듯 그 말을 따랐다.

그의 진기가 창궁대연신공의 길을 따라 미약하게 움직였다.

그리고.

정광의 내공이 거기에 섞여 함께 흘렀다.

‘말도 안 돼!’

남궁력은 경악했다.

가문의 비전심법(秘傳心法)이었다.

그런데 타인이 그 길을 알다 못해 자연스럽게 운공까지 한다?

그것도 남의 몸에서?

-집중! 잡념 버려요!

머리를 한 대 얻어맞은 듯 멍하니 있던 남궁력은 다시 운공에 몰두했다.

뭐가 됐든 우선 살아야 했다.

어떻게 창궁대연신공을 아는지 이유를 알아내고, 입을 봉하는 건 그다음 일이었다.

한편, 정광은 나름 놀라고 있었다.

‘쓸 만한 내공심법이잖아, 이거.’

천마신교의 것들은 오직 강함을 추구했기에 불안정한 것투성이였다.

정광이 뛰어난 자질로 그것들을 안정적으로 재정립했지만, 아무래도 오랜 세월 동안 쌓아온 정종무공은 그의 것과 궤를 약간 달리할 수밖에 없었다.

‘무당의 태극 늙은이 것도 괜찮았지. 곤륜의 것도 좋고. 이것도 꽤 괜찮은데.’

창궁대연신공을 짧은 시간 동안 관조하며 그 진체(眞體)를 깨달은 정광은 욕심이 생겼다.

‘요렇게 틀어볼까?’

진기의 방향을 조금 바꿨다. 자연히 그의 진기에 섞여 함께 움직이던 남궁력의 내공도 같은 곳으로 방향을 틀었다.

“쿨럭.”

남궁력이 피를 토했지만 정광은 신경 쓰지 않았다.

‘이번엔 이렇게?’

똑바로 가던 진기를 회전시켰다.

“끄아아악!”

남궁력이 비명을 질렀으나 정광은 신이 난 상태였다.

‘둘 다 합치면 어떻게 될까?’

아예 진기의 방향을 틀며 회전까지 시켜 버렸다.

그 결과는…….

“카아아악! 쿨럭. 쿨럭.”

미칠 듯한 비명과 피의 폭포였다.

“아우! 진기가 딸리는가? 내가 돕겠네!”

“정광 소협! 뭐가 문제죠? 독기에 소협까지 다친 건가요? 그럼 우선 이거라도!”

유정풍과 당예지가 내공을 넣겠다, 해약을 주겠다, 호들갑을 떨자 정광도 현 상황을 인식했다.

‘일단 살리고 나중에 제대로 해보는 게 낫겠네.’

행인지 불행인지 알 수 없는 일이었지만 정광이 마음먹었으니 남궁력은 살아야 했다.

“아뇨, 아뇨. 곧 끝나니까 준비하세요.”

준비?

뭘?

모두가 의아해했지만 정광은 이미 손을 쓰고 있었다.

“읏차.”

가벼운 기합과 함께 그의 진기가 남궁력의 내부를 휩쓸었다.

그것은 앞을 가로막는 끈적끈적한 독기들을 집어삼키며 미친 듯이 달렸다.

“끄아아아아아아!”

남궁력이 비명을 지르든 어쩌든 상관없었다.

한동안 계속되던 기의 질주는 엄청난 폭음과 함께 끝이 났다.

뿌지지지지직!

“……!”

뭔가 세상으로 힘차게 튀어나왔다.

정광의 몸이 흔들리는가 싶더니 이형환위(移形換位)의 신법으로 다관 구석에 나타났다.

푸르르르륵. 픽. 피익-

“……!”

엄청난 냄새가 장내를 가득 채웠다.

그제야 상황을 깨달은 사람들은 코를 막으며 미친 듯이 물러났다.

삽시간에 아수라장이 된 다관.

그 한가운데 주저앉은 남궁력은 넋이 나간 얼굴로 주변을 둘러봤다.

“…….”

모두가 그의 시선을 피했다.

다른 이들은 그렇다 치고 그 냉정한 당예지가 얼굴을 찌푸리며 외면하는 모습을 보자 억장이 무너졌다.

‘설마. 아닐 거야. 절대 아니야.’

이미 사타구니에서 느껴지는 감촉으로 알고 있었지만 직접 보기 전까지는 인정하기 싫었다.

남궁력은 천천히 고개를 내렸다.

그리고.

자신의 사타구니를 확인한 그는 속으로 비명을 지르며 혼절했다.

‘정광! 이 마귀새끼야아아아아!’

* * *

엄청난 소문이 하남성을 뒤덮었다.

‘곤륜마귀가 독에 중독된 검룡(劍龍)을 구해서 변룡(便龍)으로 새롭게 태어나게 했다!’

남궁세가의 체면을 생각해서 좀 순화된 표현이었는데, 쉽게 말해 정광이 남궁력을 똥싸개로 만들었다는 말이었다.

당연히 이 소문은 무림맹에서 숙소로 돌아오던 곤륜 도사들의 귀에도 들어갔다.

운학은 즉시 정광을 불러 앉혔다.

“네 별호가 왜 곤륜마귀가 된 것이냐?”

운학의 사제 운영이 정광을 두둔했다.

“보나 마나 정광에게 당한 청년들이 악의적인 소문을 퍼뜨린 것 아니겠습니까? 너무 나무라지 마십시오, 사형.”

“그걸 내가 몰라서 이러겠나?”

운학은 정광에게 나직이 말했다.

“너무 뛰어난 이는 시기를 받는 법이다. 네 능력의 삼푼(三分)은 숨기거라.”

이는 강호의 유명한 격언으로, 시기를 피하기 위함보다 자신의 힘을 숨겨 언젠가 목숨을 구하기 위한 것이었다.

물론 정광에겐 기본이었다.

“훨씬 더 많이 숨기고 있는데요.”

“……조금 더 숨겨.”

“네.”

운학은 헛기침을 한 뒤 아까 들은 소문이 사실인지를 물었다.

정광은 적당히 말했다.

가만히 듣고 있던 운학은 얘기가 끝나자 정광을 칭찬했다.

“잘했다. 용케도 참았구나. 상대의 적의를 은혜로 갚아주었다니 네 도가 무척 높다.”

“하하. 정광도 이제 어엿한 도사가 되었습니다, 사형.”

“마음이 놓이는군요. 모두 원시천존께서 돌봐주신 덕분이겠지요.”

운 자 배와 허 자 배가 흡족한 표정을 지었다.

그 좋은 분위기에 초를 칠 수는 없는 일. 정광은 남궁력에게 생긴 후유증을 얘기 안 하기로 했다.

“정광이 훌륭하게 대처했으나 남궁세가 쪽에선 앙심을 품은 이가 있을지도 모르네. 앞으로 그들을 대할 때면 주의해야 할 것이야.”

“허어. 우리에게 화풀이를 할 거란 말씀입니까?”

“어디까지나 만약을 얘기하는 걸세. 조심해서 나쁠 것은 없지 않은가?”

무림맹에서 만나며 대해본 남궁세가의 고수들은 예전보다 더 오만하고 호전적인 면이 엿보였다.

모두 수긍하자 운학이 손뼉을 쳤다.

“자. 그만 방으로 돌아가 푹 쉬게. 오늘도 수고 많았네.”

“무량수불. 모두 수고 많으셨습니다.”

도사들은 각자의 방으로 흩어졌다.

정광도 나가려는데 운학이 붙잡았다.

“단둘이 있으니 말해 보거라. 검룡 그 아이는 완전히 치유된 것이냐?”

늙은 생강이 맵다더니.

정광은 솔직하게 대답했다.

“아주 사소한 증상이 남았는데 큰 지장은 없을 거예요.”

“그게 무엇이냐?”

정광이 대답하자 운학의 표정이 묘해졌다.

“……허어. 그래, 알았다. 너도 돌아가서 푹 쉬거라.”

“네. 사숙조님.”

정광은 방으로 돌아와 침상에 누웠다. 남궁력에게 받은 금원보들을 세고 있는데 백승무가 문을 열고 들어왔다.

“사제. 왔어?”

“……네. 그 금원보들은 또 어디서 구하신 겁니까? 오다가 이상한 소문을 들었는데 혹시…….”

“응. 변룡이 준 거야.”

“푸훗! 죄, 죄송합니다.”

“괜찮아. 일은 잘됐어?”

백승무는 여러 서류를 꺼낸 뒤 그림을 그려가며 설명했다.

“……이런 식으로 대충 윤곽을 잡아봤습니다.”

“흐음. 그럴듯한데?”

“그런데 급하게 서두를 일은 아닌 것 같습니다. 주위 사정도 계속 변할 것이고, 그에 맞춰 착실히 준비하는 게 낫지 않겠습니까?”

“역시 사제는 상인이 어울려.”

“사형! 제발 그런 말씀은 하지 말아주십시오!”

“그래, 그래. 돈 버는 무인으로 하자. 한 손에는 검, 한 손에는 금. 멋지지 않아?”

자신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이려던 백승무는 속으로 비명을 질렀다.

‘이럴 수가! 내가 돈독에 물들었구나! 이를 어떡한단 말인가!’

상인 가문에서 태어나 근 이십 년을 살아왔으니 당연한 일이리라.

백승무는 이를 지그시 깨물었다.

‘나는 무인이다. 그렇게 살아야 해!’

마음을 추스른 그는 정광에게 정중히 청했다.

“사형. 다녀오면 제 용형보를 봐주신다고 하셨지요? 지금 바로 부탁드립니다.”

“그래. 후원으로 나가자.”

정광의 가르침은 가혹했다.

백승무는 반 시진도 안 되어 상인의 길이 자신에게 맞는 게 아닌지 진지하게 고민하게 되었다.

그리고 또 반 시진 뒤.

정광은 기절한 백승무를 둘러메고 방으로 돌아왔다. 침상에 대충 던진 뒤 다른 침상에 누운 그는 아까 경험했던 남궁세가의 창궁대연신공을 떠올렸다.

‘창궁(蒼穹)이라. 그러고 보니 남궁세가는 하늘에 환장한 애들이네.’

얼마 전 상대했던 검법도 그랬다.

섬전십삼검뢰(閃電十三劍雷), 창궁비연검(蒼穹飛燕劍) 등 모두 하늘의 이치를 담고 있는 것들이었다.

‘푸른 하늘엔 하얀 구름이 떠 있는 법. 용도 있으면 더 좋은 그림이 될지도.’

마침 곤륜은 구름과 용에 미친 문파였다.

‘양쪽 무공이 나름 어울릴 것 같긴 한데. 아니, 어울린다.’

정광은 머릿속에 거대한 백지를 펼쳤다.

그리고 그 위에 곤륜과 남궁의 무공들을 늘어놨다.

‘이놈이랑 요 녀석이랑 놓고. 아, 쟤도 가져와야겠다.’

어울리는 건 모으고 이질적인 것은 치웠다. 하나하나 조각내 아귀를 맞추다 보니 빈틈이 생겼다.

‘흐음. 여기엔 내 식대로 욱여넣고. 옳지. 대충 들어맞네.’

남궁세가라는 청색 밀가루와 곤륜이라는 흰색 밀가루가 그의 머릿속에서 합쳐져 반죽이 되었다.

‘이제 다듬어볼까?’

밀대로 한번 평평하게 밀자 아쉬운 부분이 또 보였다.

‘이것도 넣어보자.’

이렇게 반죽했다가 밀고, 다시 반죽했다가 밀자 제법 괜찮은 모양이 잡혔다.

‘그럴싸한데?’

하지만 정광은 곧 고개를 저었다.

‘말 그대로 그럴싸할 뿐, 부족해.’

청색과 흰색이 합쳐지면 하늘색이 되어야 하건만, 알고 있는 남궁세가의 무공이 적었기에 반죽은 거의 흰색이나 마찬가지였다.

‘곤륜 무공이 주가 되어야 하니까 두 개를 완전히 합칠 필요는 없지. 그래도 좀 아쉬운데.’

다음에 남궁력을 만나면 으슥한 곳으로 끌고 가서 족치면 되리라.

‘이거라도 한번 펼쳐보자.’

침상에서 일어나 문을 열었더니 벌써 해가 떠올라 있었다.

‘어라? 벌써 아침이야?’

정광은 피식 웃으며 방을 나섰다.

후원에 나가 숨을 크게 들이키자 상쾌한 공기가 폐를 가득 채웠다.

‘자. 간다.’

기분 좋게 무공을 펼쳐보려고 하는 그때, 점소이가 달려오는 모습이 보였다.

“선인을 뵙습니다.”

“누가 또 시비 걸러 왔어요?”

“그런 건 아닌 것 같습니다만, 손님들이 찾아오셨습니다.”

“손님들?”

시비를 걸러 온 것도 아닌데 여러 명이 왔다?

고개를 갸우뚱하던 정광은 점소이를 따라 객잔 문을 열고 나갔다.

여러 명이라더니 과연.

건장한 사내들이 늘어서 있었다.

그 틈에서 익숙한 얼굴이 걸어 나오며 두 팔을 벌렸다.

“조카! 이게 얼마 만인가!”

사 년 전, 곤륜산에 찾아왔던 하북팽가의 중진, 팽수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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