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7화
악귀의 속삭임
선두에 선 여인은 정광도 아는 권봉 언의진이었다.
그녀도 정광을 알아봤다.
그가 비록 방립을 쓰고 있다 해도 그만의 분위기를 알아챈 것이다.
“……당신은?”
“안녕하세요.”
“……안녕 못 하네요.”
“저런. 힘내요.”
언의진의 이마에 핏줄이 섰다.
둘을 번갈아 보던 호리호리한 청년이 알겠다는 표정으로 정광에게 물었다.
“그대가 요즘 명성이 자자한 곤륜마귀(崑崙魔鬼)요?”
“곤륜은 맞는데 뒤에 건 아닌데요. 누가 날 그렇게 불러요?”
청년이 피식거리며 곁눈질로 언의진을 가리켰다.
그녀는 주위를 둘러보며 딴청을 부리고 있었다.
“어머. 사람 많네. 아. 유 소협도 계셨구나.”
“안녕하십니까, 언 소저.”
“안녕하세요. 혹시 저 사람이랑 같이 오신 건가요?”
정광을 말함이었다.
“그렇습니다.”
“흐으음.”
언의진은 이해가 가지 않았다.
‘유 소협은 진중한 사람인데. 왜 이런 자와 같이 다니지?’
미인 앞에만 서면 강제로 진중해지는 유정풍이 가르침을 받기 위해서였지만 그녀가 알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언니는 또 왜 저 사람이랑 마주 보고 앉아 있는 거야?’
항상 남자들에게 냉랭하게 대하는 당예지였다. 그녀가 이러고 있는 모습을 보자 낯설다 못해 괴이하게 느껴졌다.
‘역시 저 사람은 그냥 마귀가 아닌 걸까?’
처음 보자마자 호기심을 느꼈던, 뭔가 있는 듯한 남자였다.
당예지도 그런 걸까?
언의진은 정말 놀라운 모습을 보게 되었다.
“정광 소협. 시간이 아까운데 자리를 옮길까요?”
“좋죠.”
독봉 당예지가 남자에게 저런 말을 하다니!
“언니!”
“아. 내가 지금 좀 급한 일이 있어서. 미안해 동생. 다음에 보자.”
좀 급한 일이 있어서.
좀 급한 일이 있어서.
좀 급한 일이 있어서.
언의진의 귀에 당예지의 말이 환청처럼 울렸다.
‘뭐가 급한데!’
황당해하는 건 그녀만이 아니었다.
묵직한 목소리가 장내에 울렸다.
“당 소저. 오랜만에 만났는데 본 척도 안 하시는구려.”
호리호리한 청년의 뒤에 있던 잘생긴 청년이었다. 고급스러운 푸른 장포에 고풍스러운 검을 찬 모습은 그가 남궁세가의 자제라는 걸 알려주고 있었다.
아니나 다를까. 당예지가 그걸 확인해 줬다.
“남궁 공자시군요. 제가 경황이 없어서 그만. 미안해요.”
“사과할 것까진 없소이다. 그런데 어디를 가려는 것이오? 오랜만에 모여 차를 마시기로 한 것 아니었소?”
맞는 말이었기에 당예지의 눈에 곤란한 기색이 떠올랐다.
“저자와 무엇을 하려는 거요? 어떤 관계인지도 궁금하오.”
무례한 말이었지만 먼저 잘못한 건 당예지였다.
그녀는 마음을 가라앉히며 답했다.
“독을 논하려 합니다. 정광 소협은 제 지음(知音)이에요.”
“……지음?”
“그렇습니다.”
모두가 놀란 눈으로 정광을 바라봤다.
지음이란 마음이 통하는 벗을 말하는 것. 차가운 그녀가 그런 말을 하다니! 그것도 남자에게!
잘생긴 청년은 매서운 눈빛으로 정광을 노려봤다.
“나는 남궁력이라고 하네.”
“그렇군요.”
“……내 이름을 들어본 적 없나?”
“구룡사봉 중 검룡(劍龍)이었던가? 왜요?”
정광이 의아한 표정을 짓자 남궁력은 긴 한숨을 쉬었다.
“후우우우. 그대가 당 소저의 지음인가?”
“그렇다네요.”
“……듣던 대로 사람 속을 긁는 말투군.”
남궁력은 정광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정광도 마찬가지였다.
‘이놈은 또 뭐야?’
눈빛이며 자세며 오만함이 철철 넘쳐흐른다. 벌써 이 정돈데 나이가 들면 얼마나 나댈지 궁금해질 정도였다.
‘무공은 남궁진영이랑 남궁진도라던 놈들보다 낫긴 한데.’
정확히 말하면 훨씬 나았다.
패는 맛이 있겠다 싶어 입맛을 다시는데 남궁력이 물었다.
“독을 잘 아는가?”
“조금요.”
“흥. 당 소저가 논담을 청할 정도면 조금이 아니겠지. 어느 정도길래? 독을 맛있게 먹는 수준인가 보지?”
“아. 아까 당 소저가 준 건 꽤 괜찮았어요.”
잔뜩 비꼬던 남궁력은 잘못 들은 줄 알았다.
“……무어라?”
“맛이 괜찮았다고요.”
“……당 소저의 독을 먹었단 말인가?”
“네.”
“말도 안 된다!”
남궁력은 고개를 돌려 당예지에게 물었다.
“이 말이 사실이오?”
“그렇습니다.”
“……자세히 들을 수 있겠소?”
그녀가 아까 있었던 얘기를 하자 남궁력의 얼굴이 굳어졌다.
‘사천당가의 독을 먹고도 멀쩡하다고? 하!’
불가능한 일이었다.
아니, 폐관수련(閉關修鍊)하듯 안전한 곳에 박혀서 오랜 시간 동안 운기행공을 하면 가능할지도 몰랐다.
그런데 이 자리에서 바로 배출까지 했다?
결론은 하나였다.
‘별것 아닌 독이었다는 말인데.’
당예지가 정광에게 그런 독을 건넨 의도를 이해할 수 없었다.
‘혹시 명성을 올려주려는 걸까? 그렇다면 왜?’
문득 정광에 대한 소문이 떠올랐다.
‘세상에 둘도 없이 잘생긴 얼굴이라 했지. 설마…….’
아니. 아닐 것이다.
‘나의 당 소저가 그럴 리 없어!’
직접 확인해야 했다.
“방립을 좀 벗어주겠나.”
“왜요?”
뭐 이런 얄미운 놈이!
남궁력은 치밀어 오르는 울화를 간신히 참았다.
“이렇게 만난 것도 인연인데 얼굴은 보며 얘기해야 하지 않겠는가.”
“흠. 그러죠.”
정광이 방립을 벗었다.
순간, 다관 내부가 환해지는 듯한 착각이 들었다.
“흥.”
입술을 삐죽이는 언의진을 제외한 모두가 경악했다.
남궁력이 곁눈질로 보니 당예지도 커진 눈으로 정광을 보고 있었다.
‘저놈이 좀 생겼다고 명성을 올려주는 건가!’
좀이 아니라 아주 많이였지만 남궁력의 생각은 그랬다.
‘나와 무슨 큰 차이가 있다고!’
호감을 품고 있다는 걸 대놓고 보여줘도 모른 척하던 당예지였다.
그런데 겨우 이런 놈에게 호의를?
남궁세가 가주의 적자요 무림제일 후기지수 중 하나인 그가 언제 이런 취급을 받아봤겠는가.
방계(傍系)인 아우들을 두들겨 팬 정광이었지만 평소 한심하게 보던 놈들이었기에 상관 않으려 했다.
하지만 지금은.
‘……가만두지 않겠다.’
질투심이 극심한 분노로 바뀌었다.
당장에라도 베고 싶었지만 보는 눈이 너무 많았다.
‘먼저 해야 할 일을 하자.’
그를 무시한 당예지에게 똑똑히 보여줘야 했다.
그가 왜 검룡으로 불리는지!
저런 놈과는 비교도 안 될 정도로 강한 사내라는 것을 말이다!
남궁력은 분노를 가라앉히며 당예지에게 물었다.
“그 독. 아직 있소?”
“그것뿐이었습니다.”
“할 수 없군.”
“네?”
남궁력은 정광에게 손을 내밀었다.
“자네가 배출했다는 독을 주게나.”
“이거 귀한 건데.”
“……사례할 테니 주게!”
“뭐 하려고요?”
남궁력이 무시무시한 얼굴로 대답했다.
“나도 먹으려고 그러네.”
* * *
정광은 자신의 손 위에 놓인 금원보들을 보며 고개를 갸우뚱했다.
‘이거면 적당한 건가?’
금원보 한 개가 더 놓였다.
‘사제를 데려올걸.’
한 개가 또 더해졌다.
‘그냥 가만히 있자.’
남궁력은 환장할 지경이었다.
벌써 몇 번째란 말인가?
“……이게 마지막일세.”
금원보 한 개가 더 놓였다.
정광은 선심 쓴다는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내가 손해 보죠 뭐.”
“……고맙군!”
“뭘요.”
정광은 병마개를 열어서 빈 찻잔에 독액을 따랐다.
병아리 눈물만큼.
“드세요.”
“……장난하는가?”
“아뇨. 주신만큼 넣은 건데. 당 소저. 안 그래요?”
“……진합다향을 만드는데 들어간 재료, 시간, 인건비를 고려해도 조금 적은 것 같군요.”
정광은 얼굴에 철판을 깔았다.
“내가 다른 독과 합쳐서 배출한 수고료도 넣어야죠.”
“……그걸 미처 생각 못 했습니다. 그런데 남궁 소협. 정말 그걸 먹을 건가요?”
“그렇소.”
“위험합니다.”
“……이자는 되고 나는 안 된단 말이오?”
“당신을 모욕하려는 게 아닙니다. 정광 소협이 특별한 거예요.”
정광이 ‘특별’하다는 말에 남궁력은 이성을 잃었다.
“나야말로 특별한 사람이오!”
그는 찻잔을 거칠게 들어서 입에 대고 털었다.
그런데.
독액이 너무 적었다.
찻잔 안에서 느릿하게 흘러내릴 뿐, 한 방울도 입속으로 떨어지지 않았다.
“익! 익! 왜 안 떨어져!”
정광이 친절하게 충고했다.
“혀 내밀어서 핥으세요.”
“나보고 그런 추한 짓을 하란 말인가! 더 내놓게!”
“이거 비싸다니까요.”
“다 가져가! 다!”
남궁력이 전낭을 통째로 던졌다.
그 속을 확인한 정광은 신중한 얼굴로 찻잔에 독액을 부었다.
똑.
똑.
똑.
“……세 방울?”
“네.”
“……너무한 것 아닌가?”
“돈이 문제가 아니에요.”
정광의 표정이 진지해졌다.
“그 정도면 죽기 충분하거든요.”
“감히 나를 뭐로 보고!”
당예지까지 거들었다.
“위험합니다. 그만두세요.”
“위험? 똑똑히 보시오!”
남궁력은 독액을 삼킨 뒤 찻잔 안에 남은 자국까지 혀로 핥아먹었다.
“크헉!”
바로 신음을 터뜨린 그는 재빨리 가부좌를 틀고 앉아 창궁대연신공(蒼穹大衍神功)을 운기했다.
삽시간에 단전의 내공이 폭발적으로 일어나 그의 내부를 휘돌았다.
하지만.
‘뭐야 이거!’
시작은 가슴이었다.
폐가 꽉 막히는 듯한 느낌과 함께 호흡이 가빠졌다.
그는 즉시 내공을 움직여 봉안혈(鳳眼穴), 봉미혈(鳳尾穴), 입동혈(入洞穴), 장태혈(將台穴)을 보호했다.
‘크으윽. 어쨌든 잡아냈군. 이제 이대로 밀어내면…… 어?’
다음은 사지였다. 손발 끝이 저릿해지더니 감각이 사라지기 시작했다.
그것은 파도가 몰아치듯 그의 사지를 내달려 심장으로 향했다.
‘안 돼!’
진기를 신도혈(神道穴), 영대혈(靈臺穴), 전중혈(膻中穴)로 보내 심장을 가까스로 감쌌다.
‘그, 그래! 이제 이대로…….’
내력을 쏟아부어 밀어냈다.
그러자 폐를 보호하고 있던 진기가 흩어지며 또 숨이 가빠오는 것 아닌가!
‘망할 놈의 독 같으니!’
미친 듯이 운기행공을 한 그는 폐와 심장을 동시에 지켜낼 수 있었다.
그런데 이게 끝이 아니었다.
혀, 식도, 위장에서 기이한 느낌이 일어났다.
간지러운듯하면서도 따가운 느낌.
그것은 곳 극렬한 통증으로 변해 그의 내부를 삼켰다.
“크아악! 쿨럭!”
입에서 핏물이 터져 나왔다.
시커멓게 죽은 검은 피였는데 짙은 선홍색 피가 그 뒤를 따라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우, 웃기지 마! 내가 이대로 갈 것 같냐!’
끊어지려는 진기를 억지로 붙잡으며 견디는데 주위 사람들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더는 두고 볼 수 없군! 당장 해약을 내놓게!”
남궁력과 함께 온 호리호리한 청년이었다.
“없는데요.”
“……무어라?”
“당 소저의 독들을 좀 전에 섞어서 배출한 건데 있을 리가 없잖아요.”
호리호리한 청년이 망연한 표정을 짓는데 당예지가 나섰다.
“안 되겠군요. 큰 도움은 안 되겠지만 이것들이라도 먹여야겠어요. 남궁 소협의 입을 벌리세요.”
“아, 알겠소!”
남궁력의 입이 벌어졌다. 그 속으로 당예지의 해약들이 쏟아져 들어갔다.
“후우우우…….”
남궁력의 표정이 조금 편해졌다.
역시 독의 명가 사천당가!
그들의 명성답게 효과가 있었다.
아주 잠깐이었지만.
“끄아아아악!”
남궁력은 비명을 지르며 데굴데굴 굴렀다.
그야말로 지랄발광!
주위를 둘러싸고 있던 이들의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
‘나, 남궁세가의 대공자가 죽는다!’
‘무림에 피바람이 불 게 틀림없어!’
하지만 냉정히 생각해 보면 모두 남궁력이 자초한 일이었다.
남궁세가로서는 분노할 일이었지만 그 책임을 물을 이가 없는 것이다.
남궁력도 자신의 처지를 알았다.
눈에서 후회의 눈물이 흘러내렸다.
‘이렇게 가는 건가? 내가? 나 남궁력이 겨우 독 따위에!’
그때 정광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도와줄까요?”
“……!”
“아. 대답하지 마요. 그럼 진기가 흩어져서 바로 죽으니까.”
“…….”
“싫으신가 보네. 검룡이라더니 역시 뭔가 달라도 다르구나.”
대답하지 말라며!
남궁력은 환장할 지경이었다.
다른 이들도 그랬나 보다.
“아우! 그를 구해주게나!”
“맞습니다. 당신이라면 할 수 있어요. 내 독도 몰아내지 않았습니까?”
“이제 마귀라 안 부를게요. 그러니 빨리 하세요. 어서요.”
남궁력의 마음속에서 유정풍, 당예지, 언의진에 대한 호감이 급상승했다.
그리고.
“무량수불. 생(生)은 티끌만 한 시간 뒤에 공(空)이 되기 마련이니 남궁 소협도 미련이 없을 거예요.”
정광에 대한 살의가 하늘을 뚫을 기세로 치솟았다.
‘이 망나니 새끼! 내 모든 걸 걸고 네놈을 조각조각 내주마! 반드시! 죽어서라도!’
죽으면 할 수 없는 일이었다.
하지만 그는 그런 걸 따질 수 없을 만큼 제정신이 아니었다.
죽음.
그 앞에서 당당할 수 있는 이는 드물었기에.
그때, 정광이 싱긋 웃으며 입을 열었다.
무척 청량한 목소리였으나 남궁력에게는 악귀의 속삭임처럼 느껴졌다.
“지금부터 내가 하라는 대로 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