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6화
백아(伯牙)와 종자기(鍾子期)
독봉 당예지는 눈앞의 청년을 바라봤다.
방립을 쓰고 있어서 확실하진 않았지만 왠지 웃고 있는 것 같았다.
‘싸우자고? 당가 사람인 나한테?’
비무는 어느 한쪽이 피를 보게 되면 멈추는 게 보통이다.
하지만 사천당가는 아니었다.
그들은 상대를 죽이거나 치명적인 상해를 입히고 나서야 싸움을 멈췄다.
이는 독과 암기를 절기로 삼기에 어쩔 수 없는 일. 그들의 악명은 높아만 갔고 감히 비무를 청하는 이들은 없다시피 했다.
‘많이 쌓인 것 같다고 했지. 용케도 알아봤구나.’
사천당가 가주의 영애요, 빼어난 미모와 무공으로 독봉이라 불리는 그녀에게 누가 싸움을 걸겠는가?
안 그래도 항상 불만인 터였는데 그것을 해소해 줄 자가 나타나다니.
‘하지만…….’
뜨거워졌던 그녀의 눈이 천천히 식었다.
‘별다른 기운이 느껴지지 않아. 쓸데없는 만용을 부리는 자군.’
그녀는 결국 고개를 가로저었다.
“본가에는 생사결(生死决)만 존재할 뿐, 비무란 건 없습니다. 그만 물러나세요.”
“내 말이. 제대로 싸우려면 역시 목숨을 걸어야죠. 뭘 좀 아시네요.”
“……!”
장내의 모든 이가 경악했다.
특히 당예지는 더 그랬는데 다른 이들과 다른 점을 느껴서였다.
‘거짓이 아니구나.’
상대의 자세, 목소리, 태도 등 모든 것이 그렇다 말하고 있었다.
‘내 외모를 보고 접근한 시시껄렁한 사람이 아니야.’
그녀를 무인으로 바라보며 모든 것을 쏟아부어 자웅을 겨루려고 하는 자였다.
‘자신이 있는 걸까?’
아니면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 진정한 무인일 터.
당예지의 식었던 눈이 다시 뜨겁게 타올랐다.
그녀도 죽음을 두려워하는 이가 아니었다.
“생사결. 받아들이겠…….”
“잠깐!”
순간 유정풍이 끼어들었다.
평소 정중하게 인사만 하고 돌아서는 과묵한 이였기에 다른 이들과 더 비교되어 호감을 느끼던 자다.
그런 그가 이렇게 다급한 모습을 보일 줄이야.
어찌나 놀랐는지 말까지 더듬거렸다.
“아, 아우! 뭐, 뭐 하는 건가!”
“싸우려고요.”
“안 돼! 절대 안 돼!”
“왜요? 유 소협이 당 소저와 싸우기 싫다고 나도 그래야 해요?”
“당연하지!”
잔뜩 흥분한 유정풍의 귀에 옥구슬이 얼음 위를 굴러가는 듯한 당예지의 목소리가 들렸다.
“유 소협. 이해가 가지 않네요. 왜 우리의 싸움을 막는 거지요?”
듣기는 무척 좋았으나 그 내용은 야속했다.
남몰래 사모해 온 세월이 얼마인데 이렇게 몰라주니 마음이 상한 것이다.
하지만 유정풍은 곧 후회했다.
‘정풍아, 정풍아. 네가 지금 누굴 원망하는 것이냐?’
마음이란 보여줄 수 없다.
최소한 입 밖으로 꺼내서 전해야 상대도 알 수 있는 것이건만, 지금껏 벙어리처럼 지내와 놓고 이 무슨 추한 생각이란 말인가.
‘개방의 후개라는 옷을 입고도. 의룡이라는 과분한 별호를 가슴에 품고 살면서도 이렇게 못난 짓을!’
부끄러워서 얼굴이 뜨거워졌다.
그와 동시에 가슴속에 간직해 왔던 감정도 끓어올랐다. 그것은 마침내 그의 목을 타고 올라와 입 밖으로 터져 나왔다.
“당 소저가 다치는 건 보기 싫으니까 그렇소!”
이 짧은 말에 다관이 얼어붙었다.
마치 시간이 멈춘 듯 그 누구도 움직이지 않고 말도 꺼내지 않았다.
정광만 빼고.
-드디어 말했네. 잘했어요.
-……저, 정말 잘한 건가?
-어쨌든 직접 말했잖아요. 앞으로도 그렇게 좀 솔직해지세요. 이제 계약 끝.
자신이 말해놓고도 당황하던 유정풍은 정광의 말을 듣자 조금 위로가 되었다.
‘그래. 해낸 거다. 최소한 내 마음은 전했으니 후회는 없어!’
고개를 돌리자 그를 뚫어져라 보고 있는 당예지가 보였다. 그녀의 붉은 입술이 열리며 아름다운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근데 그 내용이…….
“내가 질 거라는 말인가요?”
“……그, 그게 아니라…….”
“어떻게 확신하죠? 내가 그렇게 약해 보이나요?”
“……나, 나는…….”
원래부터 차갑던 당예지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었다. 모욕을 당한 무인의 얼굴이었다.
그녀의 입에서 북풍한설보다 차가운 목소리가 새어 나왔다.
“언젠가 유 소협과도 겨뤄봐야겠군요. 그때도 그런 말을 할 수 있을지 기대하겠습니다.”
“커흑!”
유정풍의 사랑은 꽃이 채 피우기도 전에 얼어 죽어버렸다.
정광은 가슴을 움켜쥔 채 얼어버린 그를 지나 당예지의 앞에 섰다.
당예지가 자리에서 일어서 포권을 하며 자신을 소개했다.
“사천당가의 당예지입니다.”
“곤륜파의 정광이에요.”
그녀의 눈이 커졌다.
“……당신이 그 사람이었군요.”
“저 알아요?”
“진 동생에게 들었습니다.”
“그게 누군데요?”
“……권봉 언의진.”
“아. 굳은살 예쁜 분.”
당예지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정말 듣던 대로군요.”
“그분이 안 좋은 얘기 했어요? 나는 칭찬 많이 했는데.”
“…….”
이쯤 되니 의구심이 들었다.
‘……정신이 좀 나간 것 같은데.’
유정풍이 말렸던 것도 정광이 좀 모자라서 그런 것일지도 몰랐다.
‘하지만 그렇다면 내가 다칠 거라고 자극할 이유가 없었겠지.’
생각이 정리됐다.
시험을 해보기로.
“독이 사람에게 작용하는 방식은 여러 가지예요. 호흡을 통해 들어와 폐를 망가뜨리거나 피부에 닿는 것만으로도 해를 끼치죠. 상처에 침입해 피를 굳게 하는가 하면 요리나 술에 섞여 내장을 망가뜨립니다.”
“효율적이고 멋진데요.”
“……그중 제일 알아채기 힘들고 위험한 게 먹는 거죠.”
호흡이야 중간에 멈추면 피해를 줄일 수 있다. 몸에 묻거나 상처에 닿았을 땐 그 부위를 바로 베어내거나 빨아내면 조금이나마 나아진다.
하지만 먹으면 방법이 없다. 바로 토한다 해도 이미 체내로 퍼져 나간 독은 어떻게 할 방법이 없는 것이다.
그녀는 차박사에게 찻잔을 가져오라 했다.
빈 찻잔이 놓이자 찻물을 따른 뒤 요대 주머니에서 작은 단환을 꺼내 그 속에 넣었다.
그리고 정광 앞으로 밀었다.
“그걸 마시고도 멀쩡하면 싸움을 받아들이죠.”
“……!”
지켜보던 이들 모두가 놀랐다.
“치명적인 독은 아니에요. 당가의 이름으로 보장합니다. 단지 당신이 싸울 만한 사람인지…… 아!”
정광은 찻물을 냉큼 마셨다.
한 방울도 남김없이.
“아아. 따뜻해.”
“…….”
“더 센 놈으로 주실래요?”
“……독을 무시하는군요.”
“아뇨. 그 좋은 걸 왜.”
“……그럼 본가를 무시하는 겁니까?”
“설마요. 정파 최고의 독공을 지닌 가문이잖아요.”
정광을 노려보던 당예지는 찻잔에 찻물을 따르더니 요대 주머니에서 이것저것 꺼내 넣었다.
그리고 정광에게 다시 밀었다.
“여기 있습니다.”
“잘 먹을게요.”
정광은 이번에도 미련 없이 입에 털어 넣었다.
“크으…….”
그가 기묘한 신음을 내며 몸을 떨자 당예지의 눈에 후회스러운 기색이 떠올랐다.
“늦어지면 위험하니 빨리 졌다고 말해요. 해독약을 드리죠.”
“…….”
“어서요!”
일촉즉발의 순간. 정광이 갑자기 입술을 벌렸다.
“휘유우.”
“…….”
“아, 미안해요. 나도 모르게 그만.”
정광의 입 바람을 그대로 맞고 흠칫하던 당예지는 멍한 표정을 지었다.
‘……이럴 수가! 독기가 없어? 설마 배 속에서 다 흡수한 건가?’
말도 안 되는 일이었다.
“다른 거 또 있죠?”
“…….”
“아까워하지 말고 좀 주세요.”
“……손발이 마비되고 숨이 가쁘지 않나요?”
“아직 그럴 나이는 아닌데요.”
“……구토감은?”
“아. 그러고 보니 밥 안 먹었구나. 배고프네요.”
당예지는 멍한 얼굴로 정광을 바라봤다.
독은 추출하는 대상에 따라 광물독, 초목독, 동물독으로 나누어지는데 그 안에서도 수많은 갈래가 있다.
아무리 독에 능통한 자라 해도 수없이 많은 독을 전부 알고 해독할 수는 없는 일, 이는 사천당가의 사람들도 마찬가지다.
아니, 독을 알기에 그 무서움과 어려움을 더 잘 알았다.
‘뭐 이런 괴물이!’
허세가 아니었다.
정광은 보채는 표정으로 기다리고 있었다.
당예지의 눈이 뜨거워졌다.
‘그래. 그렇단 말이지?’
가슴도 뜨거워졌다.
‘이 사람이라면…….’
그녀는 품속에서 작은 상자를 꺼내며 중얼거리듯 말했다.
“독을 잘 아는 것 같군요. 아니면 익숙한 건가요?”
“음. 둘 다 조금?”
“독이란 강하기만 하다고 좋은 게 아닙니다.”
“그럼요. 시전자가 통제할 수 있어야 하죠.”
“네. 자신에게 위험하지 않게 사용할 수 있게. 펼친 뒤 해독할 수 있게. 본가에서는 이 조건을 충족시키지 못해서 폐기되는 독이 부지기수입니다.”
그녀의 목소리에서 씁쓸함이 묻어나왔다.
“거기에 하나가 더 추가되죠. 비용문제입니다. 효과에 비해 너무 큰 비용이 들면 역시 폐기돼요.”
“당가는 돈 많잖아요.”
“내게 할당되는 자금은 얼마 안 됩니다.”
“가주의 영애인데?”
“본가에서 가장 중요한 건 연륜과 경험. 나처럼 낮은 배분에는 투자하지 않죠.”
당예지는 야망이 있었다.
오랫동안 끊겨온 독후(毒后)라는 별호를 이어받을 사람은 그녀밖에 없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당장은 요원한 일.
“지금으로선 이게 내 최선이에요.”
상자의 덮개를 열자 손가락 한마디만 한 작은 병이 들어 있었다.
당예지의 손놀림이 신중해졌다. 조심스럽게 마개를 뺀 그녀는 그 속에 들어 있던 것을 찻잔에 부었다.
화사할 정도로 노랗게 번들거리는 독액. 사천당가 가주의 영애요 무림에서 독봉으로 이름 높은 그녀가 모든 것을 쏟아부어 만든 극독!
“진합다향(塵合多響)이라 이름 지었습니다. 기존의 독들과는 그 궤가 조금 다르지요.”
“말 끝나려면 멀었어요?”
“……아니요. 다 했습니다만”
“아. 참느라 힘들었네.”
정광은 찻잔을 들고,
“잘 먹을게요.”
그대로 들이켰다.
* * *
기대 이상이었다.
정광의 입가에 저절로 미소가 걸릴 정도로.
하지만 그의 얼굴은 파랗게 물들어가고 있었다.
‘아주 괜찮은 합성독이잖아.’
흔히 독이라 하면 내공을 흩어지게 하는 신선폐(神仙廢)나 바로 죽음을 내리는 학정홍(鶴頂紅)처럼 한 가지 목적에 특화된 것들이 유명하다.
그런데 진합다향은 달랐다.
모든 동식물에는 양의 차이만 있을 뿐 독이 있다. 그래서 어떻게 얼마나 사용하느냐에 따라 독이 되거나 약이 되곤 한다.
‘티끌을 모아 다양하게 울린다더니. 이름 그대로구나.’
하나하나가 세상을 놀라게 하는 독은 아니었다. 별것 아닌 것과 강한 것이 섞여 있었는데 그것들이 상호보완을 하고 서로를 끌어 올려 대단한 충격을 주었다.
“쿨럭!”
상청무상신공을 운기하고 있었지만 입에서 검은 핏물이 흘러내렸다.
‘고삼(苦蔘), 석산(石蒜), 우아칠(芋兒七), 칠보사(七步蛇), 흑설섬여(黑舌蟾蜍), 황철석(黃鐵石)…… 모르는 것도 꽤 있네.’
워낙 잡다한 것이 모여 있다 보니 성분 하나하나를 세어보는 것도 재밌었다.
그와는 반대로 지켜보는 이들은 안절부절못하고 있었다.
“소협! 못 견디겠으면 말해요!”
“그만! 당 소저! 지금 승부가 문제요? 아우! 내공을 불어넣어 줄 테니 긴장하지 말게!”
독을 건넨 당예지도, 어느새 정신을 차리고 그를 구하려 하는 유정풍도 호들갑을 떨었다.
정광은 피식 웃으며 말했다.
“쉿. 시끄러워서 집중 안 되니까 조용히 해주세요.”
“지금 그게 중요하…… 네?”
“당황하지 마! 내 내공을…… 뭐?”
당예지와 유정풍을 포함해서 주위의 모든 이들이 한 대 얻어맞은 표정이 되었다.
‘……운기조식을 하면서 말을 해?”
‘……그러고도 주화입마에 안 걸린다고?’
정광은 가능했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상청무상신공으로 내부를 보호함과 동시에 주즉시공(酒卽是空)을 끌어올렸다.
어린 시절부터 수많은 암습에 시달렸던 그에게 제일 컸던 위험은 독이었다.
주즉시공은 원래 술이 아니라 독을 몰아내기 위해 창안한 무공이었던 것이다.
“당 소저. 하나 물어봐도 돼요?”
정광의 말에 당예지가 멍하니 대답했다.
“네.”
“이거, 상대를 죽지도 살지도 못하게 하려고 만든 독이죠?”
“……네.”
그녀는 솔직히 말해놓고 입술을 지그시 깨물었다.
정파의 시선으로 보면 악독하기 그지없는 독이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녀도 할 말이 있었다.
“그렇게 만든 이유는…….”
“이야. 이거 효율적인데요.”
“……네?”
“죽이면 그걸로 끝이고 원한만 쌓이지만 이걸 쓰면 상대가 속한 가문을 힘들게 할 수 있잖아요. 보살피고 보상하느라 허리가 휘겠네. 아. 협상의 여지도 생기니까 피를 덜 볼 수도 있겠죠.”
“……마, 맞아요! 오히려 큰 싸움을 막을…….”
“비용도 많이 줄일 수 있겠는데요. 비싼 재료를 넣는 게 아니라 수없이 많은 싼 재료로 복잡한 배합을 하는 거잖아요. 돈이 아니라 사람을 갈아 넣는다. 맞죠?”
“……그, 그걸 어떻게!”
당예지의 눈동자가 세차게 떨렸다.
그녀가 언제 이렇게 마음이 통하는 이를 만나봤겠는가?
정광은 턱짓으로 독이 들어 있던 빈 병을 가리켰다.
“그 병. 내가 가져도 돼요?”
그녀는 홀린 듯 고개를 끄덕였다.
“웃차.”
정광은 빈 병을 들어 그 주둥이에 손가락을 댔다.
잠시 후, 손가락 끝에서 옅은 노란색 액체가 한 방울씩 떨어졌다. 병에 가득 차자 마개를 덮은 정광은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었다.
“……설마 진합다향을 배출한 건가요?”
“조금 다른데.”
고개를 갸웃하던 정광이 설명했다.
“거기에 아까 주셨던 것들도 섞었어요.”
“……어떻게 그게 가능…… 아니. 그럼 효력은 어떻게 바뀐 건가요?”
“글쎄요. 써봐야 알겠는데. 당 소저가 워낙 잘 짠 독이라 오히려 조금 못해졌을걸요.”
정광으로서는 드문 칭찬이었다.
그를 잘 모르는 당예지였지만 언의진에게 했던 ‘주먹에 굳은살이 아주 예쁘게 박혔는데요’와 비교하면 대단한 칭찬이라는 걸 바로 알 수 있었다.
“생각해 보니 아깝네. 그냥 이것만 따로 뽑아낼걸.”
“…….”
당예지의 얼굴이 천천히 변했다.
눈에서부터 시작된 변화는 얼굴을 타고 내려와 입가에 곱게 맺혔다.
그것은 눈이 부실만큼 아름다운 미소였다.
“……혹시 시간 있으신가요?”
“네? 왜요?”
정광의 의아해하는 얼굴과 달리 유정풍의 얼굴은 시커멓게 죽어갔다.
누가 봐도 호감을 느껴서 식사라도 같이하자는 의미 아닌가?
하지만 당예지는 보통 여인이 아니었다.
“다른 독도 있는데 드셔보고 감평을 해줬으면 해서요. 아, 향을 들이키고 찌르기도 해야 할 것 같은데…….”
이건 숫제 죽을 때까지 독을 퍼붓겠다는 말 아닌가!
모두가 경악했지만 정광도 그녀처럼 보통 사람이 아니었다.
“오오. 나야 좋죠. 팍팍 주세요.”
그때, 다른 사람들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언니! 늦어서 미안해요.”
“당 소저. 오랜만이외다.”
정광을 비롯한 사람들의 시선이 계단으로 향했다.
그곳에는 여러 명의 남녀가 올라오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