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5화
정광, 추근대다
시간이 얼마나 지났을까.
무아지경에 빠져 있던 백승무가 눈을 떴다.
그의 앞에는 정광이 심드렁한 얼굴로 앉아 있었다.
“늦어. 뭐가 이렇게 오래 걸려?”
백승무는 엷게 웃었다. 그의 눈은 예전보다 더 깊이 가라앉아 있었다.
“사형. 정말 감사합니다.”
소청기공의 요령만을 깨달은 게 아니었다. 정광이 새긴 길로 운기를 거듭하던 그는 가전심법으로 쌓아온 내공을 소청기공으로 완전히 녹여낼 수 있었다.
‘하룻밤 만에 한 걸음 나아갔다.’
그렇다는 건.
‘앞으로도 가능하겠지.’
정광을 바라보는 그의 눈은 깊은 신뢰로 빛나고 있었다.
‘나는 강해질 수 있다. 어디까지일지는 모르지만, 사형의 뒤를 보며 계속 따라갈 수 있어!’
그렇게 힘을 키워 항상 꿈꿔왔던 협객이 되리라.
대협이 되어 세상의 어려운 이들을 도우리라!
백승무는 벅차오르는 감정 때문에 몸을 떨었다.
“사제. 아침이야.”
“아! 벌써 그렇게 됐습니까?”
“응. 이제 땅 굴릴 생각 해야지.”
“……네?”
“샀다고 끝이 아니잖아.”
그렇긴 하다.
“멀리 보고 샀지만 값이 오를 때까지 그냥 놀려?”
무슨 그런 비효율적인 짓을.
“직접 보면서 머리 좀 써봐.”
맞는 말이긴 한데.
‘그건 상인이 할 일이잖아!’
무공이라는 넓은 세상에서 한발 나아간 이때 이런 말을 듣다니.
안 될 말이다.
백승무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어졌다.
“사형. 저는 무공에 전념…….”
“용형보(龍形步) 수련하면서 헤매던데 다녀와서 잡아보자.”
“이러고 있을 시간이 없지요! 빨리 다녀오겠습니다!”
“괜히 시비를 거는 놈들이 있을지 모르니까 옷 갈아입고 방립 써. 대사형께는 적당히 둘러대고.”
“물론이지요!”
운 자 배와 허 자 배는 오늘도 일찍 무림맹으로 간 상태였다.
정광은 백승무를 보낸 뒤 침상에 드러누웠다.
‘좋구나.’
고급객잔이라 요리도 괜찮았다.
방은 넓은 데다 깨끗했고 침상도 편했다.
정광은 눈을 지그시 감았다.
지난 이틀 동안 상대했던 자들의 무공이 머릿속에 떠올랐다.
너무 엉망이라 도저히 답이 안 나오던 권각술(拳脚術).
어설펐으나 방향을 틀면 제법 괜찮아질 도법.
꽤 좋아 보였으나 시전자의 경지가 너무 낮아 아쉬웠던 검법까지.
‘그래도 남궁은 남궁인가.’
수많은 무공 중 남궁세가의 검법이 제일 인상적이었다.
‘제대로 흉내라도 낼 줄 아는 이였으면 좀 더 재밌었을 텐데.’
문득 공동파의 영추자가 떠올랐다. 지금껏 만난 자들 중 제일 그럴듯한 무공을 익혔고 나름 쓸 줄 아는 자였다.
‘하지만 마음껏 패도 되는 상대를 만난 기쁨에 조절을 못 했었지.’
또 그런 실수를 할 순 없었다.
‘누가 좋으려나.’
이곳은 중원이었다. 정광의 배분으로 나이 많은 고수에게 비무를 청했다간 시끄러워질 게 뻔할 터. 그나마 동년배라 할 수 있는 구룡사봉이 그의 궁금증을 해소해 줄 수 있는 자들이었다.
‘마침 한 명 오는군.’
익숙한 기운이 다가오고 있었다.
유정풍이었다.
“아우. 잘 있었나?”
“어떻게 들어왔어요?”
“하하하. 내가 이래 봬도 구룡 중 의룡 아닌가.”
거지가 고급 객잔에 몰래 들어오려면 구룡쯤은 되어야 하나 보다.
“아우에게 아침 일찍 오겠다고 했던 약조를 지키는 걸세.”
“그거 배우려고요? 사제 아까 나갔는데.”
“아. 그 친구는 됐어. 아무리 봐도 나와 별반 다를 게 없어 보이더군.”
개방의 후개라더니 과연.
유정풍은 사람 보는 눈이 있었다.
“내가 연모하는 그녀가 마침 근처에 있네.”
“혹시 그분, 사봉이에요?”
“그렇네. 내가 그녀와 대화하는 걸 봐줬으면 해. 그리고 뭐가 문제인지, 어떻게 해야 하는지 알려주게.”
사봉이라. 안 그래도 궁금했는데 잘된 일이었다.
‘생각보다 약하면 힘 빠지는데.’
마침 좋은 기준이 눈앞에 있었다.
정광은 유정풍을 빤히 바라봤다.
근골, 서 있는 자세, 풍기는 기운.
정광은 이 정도만 봐도 그를 판단할 수 있었다.
‘나이치곤 괜찮은 편이지.’
유정풍보다 나은 자들이 있을까?
그거야 물어보면 될 일.
“구룡사봉이 우리 배분에서는 최고죠? 유 소협은 그중 어느 정도 수준이에요?”
무례한 물음이었지만 유정풍은 개의치 않았다. 잠시 턱을 쓰다듬으며 생각하던 그가 입을 열었다.
“이 말부터 해야겠군. 구룡사봉을 정파 최고의 후기지수들이라 칭하지만 사실 말도 안 되는 일일세.”
중원은 넓었다. 수많은 문파에 산재한 무인들의 순위를 매기는 건 불가능한 일이었다.
“문파나 가문의 이름값이 많이 반영된 걸 부정할 수 없지. 중원 무림에 큰 영향력을 행사하는 곳들뿐이지 않나.”
그 예로 곤륜이나 점창, 공동처럼 먼 곳에 있는 문파의 인물들은 한 명도 없었다.
“그리고 구룡사봉 중 내 위치라. 그들 중 겪어본 이도 있고 아닌 이도 있는데…… 중간 정도? 아마 그쯤이겠지. 그 이하일지도 모르겠군.”
그 정도면 됐다.
“잘됐네요. 가죠.”
“무슨 의미인가? 어째 좀 이상한데.”
“기분 탓이에요.”
“하하. 뭐 그렇다 치지. 그럼 방립부터 쓰고 옷도 좀 갈아입게. 아우는 너무 눈에 띄어.”
“네.”
정광은 유정풍과 함께 대사형인 정우에게 갔다. 정우는 몰래 숨어들어 온 유정풍을 보고도 당황하지 않았다.
유정풍의 눈이 가늘어졌다.
‘알고 있었단 말인가? 정 자 배에서 정광만 인물인 게 아니었군.’
정우가 정광에게 진중한 목소리로 말했다.
“사조님의 말씀 기억하지?”
“네. 대사형.”
“우리에게는 네 행동을 너무 얽매지 말되 책임을 지우라 하셨다. 그 의미를 아느냐?”
정광은 특별한 존재다.
곤륜의 큰 어른인 운후는 정광이 바르다 믿는 길을 걸으라 했다. 그 끝에 무엇이 있든, 도에 어긋나지 않는 것일 거라 믿었다.
혹시 잠깐 엇나갈 수도 있지만 그 책임은 정광이 오롯이 져야 하는 것.
정광이 고개를 끄덕이자 정우도 고개를 끄덕였다.
“널 믿으마.”
“걱정 마세요.”
정우는 솔직히 걱정됐다.
그의 시선이 유정풍에게 향했다.
“유 소협. 이 녀석을 부탁하오.”
“하하. 진옥룡을 내게 부탁하다니요. 그 반대가 맞지 않겠습니까?”
정우가 물끄러미 바라보자 유정풍의 표정이 진지하게 바뀌었다.
“사고 안 치게 최선을 다하겠소.”
“믿겠소이다.”
두 사람이 서로의 손을 굳게 잡았다.
정광은 어이가 없어 항의했다.
“아니. 내가 뭘 어쩐다고 그래요?”
정우와 유정풍은 서로의 손을 더욱 세게 잡으며 뜨거운 눈빛을 교환했다.
* * *
오늘도 밖에는 몇 명의 청년들이 있었다. 하지만 정광과 유정풍이 지나가도 노려보기만 할 뿐, 다른 행동을 하지는 않았다.
‘피를 안 보니 계속 오네.’
전생이었다면 다시 올 생각도 못 하게 만들었을 것이다.
말 그대로 생각이란 걸 할 수 없게 죽음을 내렸을 테니까.
하지만 현생에서도 그럴 수는 없는 일. 그간 겪어온 정파의 생리를 생각하자 대충 방법이 나왔다.
‘명성을 높여야겠구나.’
혈기 왕성한 청년들이 덤비긴커녕 알아서 피할 정도의 명성이 필요했다. 어제 왔던 남궁세가의 쭉정이들 말고 진짜 고수를 이겼다는 명성이.
정광은 유정풍에게 물었다.
“내 소문이 중원에는 얼마나 퍼졌어요?”
“나는 좀 알지. 하지만 개방의 후개인 나니까 아는 거야. 청해성에서 있었던 일이 하남성까지 들리려면 꽤 오랜 시간이 필요하거든.”
맞는 말이었다.
“내 솔직히 말하겠네. 아우가 그분을 이긴 건 대부분의 사람에게 크게 와닿지 않을 거야. 약관도 안 된 이가 공동파의 장로를? 말도 안 돼. 다들 이렇게 생각할걸? 너무 허황된 얘기잖나.”
“흐음. 역시 같은 항렬의 최고수들을 눕혀야 하는 건가.”
“잠깐! 나는 빼주게. 중간쯤밖에 안 된다니까.”
역시 이 거지는 눈치가 빨랐다.
“아우는 명성을 높이려는 건가?”
“쭉정이를 거르려면 그래야겠어요. 그래도 덤비는 자는 한 수가 있다는 거니까 지루하진 않겠죠.”
담담한 어조라 더 당연하게 들렸다. 상대가 누구든 간에 이길 수 있다는 절대적인 자신감이 느껴졌다.
“연모한다는 분. 세요?”
유정풍은 온몸에 소름이 돋았다.
“그녀는 안 돼!”
“덤비지 않으면 안 싸울게요.”
“그녀를 넘보지 말란 말일세! 방립을 더 눌러써!”
“그거였어요? 나 도사인데.”
“휴우우. 그랬지.”
“아직까지는요.”
“……잘못 들은 것 같네. 다시 한번 말해주겠나?”
“근데 어디로 가는 거죠?”
그들은 이미 목적지에 도착해 있었다.
고급스러운 다관(茶館)이었다.
“우리는 서로 모르는 사이야. 어느 정도 떨어져서 오게.”
“네. 이해했어요.”
그들은 다관에 들어갔다.
차박사(茶博士)는 유정풍을 아는지 공손하게 이 층으로 안내했다.
정광은 유정풍이 연모하는 이가 누구인지 바로 알 수 있었다.
그만큼 눈에 띄는 미녀였다.
‘냉기가 뚝뚝 떨어지네.’
주변에 있는 청년들은 힐끔거리기만 할 뿐, 감히 다가갈 엄두조차 못 내고 있었다.
-아우. 내가 어떻게 하는지 잘 보고 조언을 해주게.
-그러죠.
정광은 비어 있는 탁자에 앉았다.
유정풍은 잠시 호흡을 고르더니 그녀에게 성큼성큼 다가갔다. 그리고 그 앞에 우뚝 서더니 포권을 했다.
“안녕하십니까, 당 소저.”
“유 소협이시군요. 반가워요.”
“…….”
“…….”
“……그럼 이만.”
“네.”
그게 끝이었다.
유정풍은 당당히 걸어서 정광 근처의 탁자에 앉았다.
-어떤가? 뭐가 문제지?
-……장난해요?
-아니! 진지해! 그 어느 때보다 더! 당 소저의 티 없이 맑고 깨끗한 눈을 보니 가슴이 터질 것 같아서 더는 대화를 나눌 수 없었네! 어서 말해주게! 어떡해야 하는가?
정광은 어이가 없었다.
‘티 없이 뭐가 어째? 그냥 차가운 눈이잖아.’
백승무의 말처럼 유정풍이 거지인 게 제일 큰 문제라고 생각했었다.
하지만 알고 보니 유정풍은 그 존재 자체가 문제였다.
-내가 어떻게 말하라고 하면 그대로 할 수 있겠어요?
-……솔직히 자신 없네.
-그럼 방법은 하난데.
-무엇인가? 말해주게! 어서!
-입으로 대화가 안 되면 몸으로 대화해야죠.
-……아직 그런 관계까지는…….
-무슨 말이에요. 차라리 비무를 신청해서 싸우라고요. 몸으로 부대끼다 보면 마음이 통하고 말도 나올지 몰라요.
말이 안 되는 것 같으면서도 또 되는 것도 같은 요상한 말이었다.
귀를 쫑긋거리며 고개를 주억거리던 유정풍은 곧 한숨을 쉬었다.
-그건 불가능하네.
-왜요?
-그녀와 싸우면 몸을 부딪칠 틈도 없거든. 게다가…….
잠시 말을 끊었던 그가 몸을 부르르 떨었다.
-……목숨을 걸어야 해.
그때 한 청년이 그녀에게 다가가는 모습이 보였다.
부유한 옷차림에 건장한 몸을 보니 한가락 하는 무가의 자제 같았다.
“실례하오, 소저. 한 가지 여쭤봐도 되겠소이까?”
그녀는 말없이 청년을 바라봤다.
청년은 붉어진 얼굴에도 불구하고 입을 열었다. 최소한 유정풍보다는 몇 수 위인 게 확실했다.
“나는 태원(太原) 초가장의 장자인 초상영이라 하오. 소저를 보고 개안을 하게 되어 실례를 무릅쓰고 이렇게 왔소이다. 폐가 안 된다면 소저와 합석을 하는 영광을 베풀어주시겠소이까?”
정광은 아까 내렸던 평가를 수정했다. 차라리 유정풍처럼 벙어리인 게 낫지, 이놈은 느끼하기 짝이 없지 않은가.
그녀도 그랬나 보다.
“폐가 맞으니 자리로 돌아가세요.”
“……소저. 내 체면을 봐서…….”
“많이 봐드린 겁니다.”
청년의 얼굴이 더 붉어졌다.
아까와는 달리 분노해서였다.
“크흠. 너무 무례하구려. 어찌 그리 매몰차시오?”
“무례한 건 당신이에요. 초면에 대뜸 합석을 강요하는 건 무슨 경우죠?”
“내 호의로 그랬거늘, 보자 보자 하니까 말이 너무 심하지 않소? 어서 사과하시오!”
“싫다면요?”
“검으로 시시비비를 가릴 수밖에!”
그녀가 자리에서 일어나 두 손에 사슴 가죽 장갑을 끼기 시작했다.
청년의 얼굴이 점점 시커메졌다.
“서, 설마 독봉(毒鳳)?”
“나는 그 별호를 좋아하지 않습니다.”
“미, 미안하오! 내 미처 몰랐소이다. 그럼 이만!”
청년은 두 손을 모아 연신 흔들더니 다관 밖으로 뛰쳐나갔다. 그런 그를 차가운 눈으로 보던 그녀는 다시 자리에 앉아 찻잔을 기울였다.
‘독봉이라고?’
정광은 그녀를 바라봤다.
손끝까지 뒤덮는 짙은 녹의(綠衣).
허리춤에 찬 요대에는 크고 작은 여러 개의 주머니가 달려 있었다.
중원이 넓다 하나 저런 차림새로 다니는 건 단 한 가문의 사람들밖에 없었다.
암기(暗器)와 독(毒)으로 사천성은 물론 중원까지 명성을 떨치는 가문. 은혜는 두 배로, 원한은 백배로 갚는다는 독종 중의 독종.
‘사천당가(四川唐家)구나.’
아까 유정풍이 했던 말이 이해됐다. 암기를 던지니 손발을 부딪칠 틈이 없고 독을 쓰니 생명을 걸어야 하는 것 아닌가.
정광의 두 눈이 빛났다.
‘잘됐네. 아주 잘됐어.’
암기도 그렇지만 독이야말로 아무나 다룰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제대로 된 독을 채집하고 배합해서 만들려면 엄청난 비용이 들뿐더러 오랫동안 쌓인 지식과 경험이 필요했다.
그렇게 만들어진 독을 자유자재로 다루는 독공(毒功)의 고수는 거의 없었다. 헌데 마침 딱 맞는 이가 바로 눈앞에 있는 것 아닌가.
정광에겐 독이 필요했다. 그것도 제대로 된 것으로 많이.
‘슬슬 필요하다 싶었는데 일이 이렇게 되네.’
전생에서도 나이가 들고 나서야 만독불침(萬毒不侵)의 경지에 올랐던 그였다.
그때보다 터무니없이 약한 지금, 독은 정광에게 무척 위험한 것이었다.
‘지금부터라도 내성을 키워야지. 좀 꿍쳐두기도 하고.’
바로 자리에서 일어나 그녀에게 다가갔다.
유정풍이 ‘어? 어?’ 하는데 정광은 이미 그녀의 앞에 서 있었다.
“저기요.”
그녀는 내심 한숨을 내쉰 뒤 정광을 바라봤다. 방립을 눌러써 나이를 알 수는 없으나 목소리만 들어도 청년임을 알 수 있었다.
“추근대지 말고 돌아가세요.”
“추근댄다? 아. 그런 건지도 모르겠네.”
“……무슨 의미죠?”
정광의 맑은 목소리가 그녀의 귀를 울렸다.
“그쪽과 싸우고 싶거든요.”
“……!”
“보아하니 많이 쌓인 것 같은데. 어때요?”
그녀의 차가운 두 눈에서 열기가 피어올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