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곤륜마협-44화 (44/569)

44화

무아지경(無我之境)

정광은 다른 이들과 함께 객잔 문을 나섰다.

“와. 많긴 많네.”

객잔을 둘러싸고 있던 수많은 청년이 정광을 노려보며 이를 갈고 있었다.

“저, 저…… 후우우.”

“진정하게. 지금은 참아야 해.”

곤륜의 노도사들 때문에 차마 욕설을 하지는 못했지만, 주먹을 불끈 쥔 꼴이 아까 얻어터지고 간 녀석들의 지인들인 것 같았다.

정광은 그들을 둘러보며 물었다.

“내게 용건이 있어서 온 거예요?”

“…….”

“아닌가 보네. 그럼 들어갈게요.”

“잠깐!”

한 청년이 나섰다.

아침에 얻어터지고 실려 간 남궁진영처럼 값비싼 푸른 장포에 검을 찬 모습이 딱 봐도 남궁세가의 자제였다.

“남궁세가의 남궁진도가 곤륜의 정광 도사에게 비무를 청하네.”

“왜요?”

“……비무를 청하는 데 이유가 있는가? 무인이라면…….”

“남궁진영이란 분 때문에 그래요?”

“……부인하진 않겠네.”

“다른 분들도 다 비슷한 이유로 온 거고요?”

“…….”

대답은 없었지만 뻔한 상황이었다.

“사정을 들었으면 내가 잘못한 게 없다는 건 충분히 아실 텐데요.”

“그대가 손을 너무 과하게 써서 오게 된 것이네.”

“말은 똑바로 하셔야죠.”

“무슨?”

“나 혼자 그런 게 아니라 사형들도 같이 팼거든요. 아. 사제도.”

정 자 배 제자들이 겸연쩍은 표정을 지었다. 일방적으로 두들겨 맞은 백승무는 억울한 얼굴이었고.

“알고 있네. 나는 오직 그대에게만 용건이 있어. 다른 이들은 각자 용건이 있는 이와 해결을 보면 될 일. 비무를 받아주시게.”

이쯤 되면 더 사양할 필요가 없었다.

“사숙조님. 들으셨죠?”

“음, 일단 일의 시작부터 끝까지 다 말해보거라.”

정광은 있는 그대로 얘기했다.

운 자 배와 허 자 배 도사들은 얼굴을 찌푸렸다.

‘간단히 말해서 질투심 때문에 벌어진 일 아닌가.’

‘그런 일로 시비를 걸어놓고, 지고 나니 복수를 하겠다고 찾아와?’

혈기왕성한 청년들이라 감정적으로 나선 것까진 이해해줄 수 있었다. 하지만 존장인 자신들이 있는데도 또 찾아와 이런다는 건 곤륜을 우습게 보는 것과 다름이 없었다.

곤륜 도사들의 얼굴에 한기가 맺히자 지켜보던 유정풍이 재빨리 나섰다.

“대체 어르신들 앞에서 뭐 하는 짓인가!”

“유 소협, 저희는…….”

“그만하게! 내가 다 부끄러워지는군! 대체 무슨 생각을 하는 건가!”

“…….”

유정풍은 대답을 듣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중원에서 머나먼 청해성에 자리한 곤륜파였다. 젊은 그들로서는 직접 대면한 일이 없었기에 조금이나마 경시하는 마음을 갖고 있으리라.

근 이십여 년간 지속된 평화가 청년들의 개념까지 앗아간 것이다.

“이렇게 철이 없다니! 썩 물러나게! 내 자네들 사문과 가문을 찾아가 오늘 있었던 일을 똑똑히 말씀드릴 것이야!”

얼굴이 하얘진 청년들이 우물쭈물했다.

물러나는 것도 대드는 것도 아니라 어쩔 줄 몰라 하는 꼴이라니.

유정풍은 그 모습을 보자 더 울화가 치밀었다.

‘겨우 이 정도밖에 안 되는 놈들이 정파의 후기지수란 말인가.’

사마련의 발호 때문에 무림맹이 재결성되는 판이다.

앞으로 피를 보게 될 건 당연한 일, 저런 놈들을 믿고 어찌 싸운단 말인가.

유정풍은 한숨을 내쉰 뒤 곤륜 도사들에게 사과했다.

“죄송합니다. 철이 없어 그런 것이니 넓은 마음으로 이해해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괜찮네. 괜히 자네만 욕을 먹게 생겼구먼.”

운학은 잠시 생각을 정리했다.

‘이대로 돌려보내도 앙금만 남게 될 터. 차라리 그럴 바엔…….’

마침 정광의 전음이 들려왔다.

-사숙조님. 다신 못 기어오르게 그냥 지금 패죠.

-……표현이 좀 그렇구나. 교훈을 주는 거로 하자.

-네.

-단! 한 달 안에서 끝내는 거다.

-한 달 안에 무덤에 가게요?

-아니! 침상에서 최대 한 달만 누워 있게!

-어디 부러뜨리지도 못하겠네요. 노력해 볼게요.

정광은 몇 차례 잔소리를 더 듣고 나서야 앞으로 나설 수 있었다.

“비무합시다. 오세요.”

“……!”

남궁진도가 검을 뽑아 들고 정광에게 다가갔다.

‘진영이의 말로는 기습에 당해서 쓰러졌다 했지. 녀석의 허풍이 심한 걸 감안하더라도 그리 대단한 실력은 아닐 것이다.’

그렇다고 방심할 생각은 전혀 없었다.

동생이 당했는데 그까지 쓰러지면 어떻게 얼굴을 들고 다닐 수 있겠는가.

“검을 뽑게.”

“맨손이 편한데요.”

“계속 나를 모욕할 셈인가?”

그냥 한 대 날리려던 정광은 마음을 바꾸었다.

그간 신경을 쓰지 않고 있던 중원무림의 무공이 궁금해서였다.

‘정파밖에 없지만 이게 어디야. 검으로 받아주면서 구경이나 해볼까.’

검이 경쾌한 소리를 내며 검집에서 빠져나왔다.

“뽑았어요.”

“좋아. 나는 남궁세가의 남궁진도라 하네. 섬전십삼검뢰(閃電十三劍雷)와 창궁비연검(蒼穹飛燕劍)을 펼칠 테니 조심하게나.”

평소의 정광이라면 무공명을 알려주며 비무하는 걸 싫어했겠지만 이번만큼은 달랐다.

“하나씩 따로 펼쳐주면 안 돼요?”

“……후우. 그러지. 섬전십삼검뢰부터 가겠네.”

“나는 유룡검(遊龍劍)을 쓸게요.”

“……더 상위의 검법을 쓰지 그러나?”

“검법에 상위가 어딨고 하위가 어딨어요. 알맞게 쓰면 되지.”

“……검도 혀만큼 날카로운지 한번 보겠네. 받으시게!”

남궁진도의 검이 번뜩였다. 어찌나 빠른지 검초가 펼쳐지고 나서야 우레 같은 파공음이 터져 나왔다.

정광은 검을 움직여서 막아내며 남궁세가의 검법을 감상했다.

‘뇌기를 담아 공간을 갈라서 나는 소리군. 섬전이라 하긴 좀 그런데.’

섬전은 순간적으로 떨어지는 번개다. 무공명과 검초의 특징대로라면 남궁진도의 검은 한순간의 기회를 노려 급박하게 날아와야 한다.

하지만 그의 검은 쉬지 않고 움직이고 있었다.

‘이건 섬전이 아니라 소나기잖아.’

섬전십삼검뢰의 무리는 대충 알게 되었으나 쓰는 상대가 영 엉망이었다.

‘더 볼 것도 없네. 그만…… 아.’

아직 하나 남았다.

“이제 창궁비연검 써주세요.”

“……이익! 받아봐라!”

이십여 초가 넘어가도록 공세를 펼쳤는데도 우위를 점하지 못해 초조해하던 남궁진도였다.

정광의 도발 아닌 도발에 그의 검식이 완전히 변했다.

쉴 틈 없이 최단거리로 쏟아지던 빠른 검격이 허공을 이리저리 배회하다 재빠르게 들이닥쳤다.

‘자유로운 변초에 쾌를 가미했구나. 들었던 대로 남궁세가는 하늘을 기본으로 삼는군.’

제대로 쓸 줄 아는 이라면 제법 재밌는 검초를 풀어낼 수 있으리라.

정광이 무심코 고개를 끄덕이는데 남궁진도가 발끈했다.

“막지만 말고 공격을 해라!”

“그러려고 했어요.”

“흥! 한번 실력을 보지.”

아플 텐데.

정광의 검이 꿈틀거리며 창궁을 희롱했다.

푸르기만 했던 하늘에 용이 나타나자 먹구름이 끼기 시작했다.

“어억! 앗!”

결국 창궁은 지워지다 못해 한 자루 검으로만 남았다.

그리고 그것조차 정광의 검에 부딪혀 바닥으로 추락해 버렸다.

“이, 이럴 수가! 내가! 남궁이!”

“남궁이 아니라 그쪽이 엉망인 건데요. 이빨 꽉 깨무시죠.”

“뭐?”

콰직!

“끄악!”

검면에 얻어맞은 남궁진도는 훨훨 날아가다가 땅바닥에 나뒹굴었다.

“한 명 끝났고.”

정광이 청년들을 둘러보며 말했다.

“다음 분이요.”

* * *

청년들이 보기에 정광은 강했으나 깰 수 없는 벽과 같은 느낌은 아니었다.

남궁진도와 사십여 초가 넘게 겨루다가 한순간의 방심을 틈타 이겼다고 이해한 것이다.

자신이 남궁진도보다 강하다고 자부하는 이는 없었으나 차륜전(車輪戰)을 펼치면 승산이 있다고 믿었다.

“철검문(鐵劍門)의 양기탁이오. 이번엔 내가 하겠소.”

“네.”

문파 이름 그대로 철로 제련한 검을 휘두를 뿐 별것 없었다.

빠각!

“커헉!”

“다음요.”

“산서(山西) 광풍도가(狂風刀家)의 탁천립이네.”

“이름 멋진데요.”

미친바람이라기에 기대했더니 부채질만도 못했다.

콰창!

“아악!”

“다음요.”

“……신양문(神陽門)의 이연회요. 내가 익힌 무공은 팔극패도(八極覇刀)뿐이오.”

한 가지 무공만 수련했다?

여러 가지를 수박 겉핥기처럼 익힌 것보다야 훨씬 낫겠지.

그런데.

팔극을 아우르긴커녕 제자리에서 빌빌대는 도법이었다.

“어휴.”

따악!

“커흑!”

“다음요!”

청년들은 머뭇거리면서도 계속 도전했다. 시간이 지날수록 자신들이 유리하다고 확신해서였다.

하지만.

다음요.

다음요.

다음요.

정광은 시간이 지날수록 상대를 빨리 패대기치고 있었다. 남궁세가의 검법처럼 봐줄 만한 것은 거의 없었기에 빠르게 마무리를 짓는 것이었다.

“다음요.”

“…….”

“또 없나요?”

“…….”

정파무림의 무공은 대충 견식했다.

저마다의 특색이 있고 꽤 그럴듯한 것들도 있었지만 펼치는 이가 잘못 이해하고 있는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예전의 팽강휘는 그래도 자기가 뭘 하는 줄은 알고 싸웠었는데. 최소 구룡사봉 정도는 되어야 생각이 있는 건가?’

정광은 흥미가 떨어졌다.

“그럼 이만. 잘 가세요.”

“잠깐!”

위맹한 고함과 함께 한 사내가 정광 앞에 내려섰다.

떡 벌어진 어깨에 훤칠한 키.

사내다운 각진 얼굴에 큼직큼직한 이목구비.

강호의 협객이란 이런 모습이라고 온몸으로 외치는 듯한 장한!

하지만 어디서 봤던 그림.

개방의 후개 유정풍이었다.

“지켜보자니 피가 끓어올라 도저히 참을 수가 없군.”

정광이 낮에 남궁진영을 한 방에 날려 버릴 때만 해도 이렇진 않았다.

차륜전으로 달려드는 청년들을 여유 있게 패대기치는 모습을 보자 팽강휘가 했던 말이 가슴 절절히 이해됐다.

유정풍은 눈을 지그시 감고 그가 했던 말들을 떠올렸다.

‘진옥룡이 얼마나 강하냐고요? 상상도 못 하실 겁니다.’

‘후기지수라 자처하는 놈들은 상대도 안 되죠. 제가 그렇게 두들겨 맞았는데요.’

‘겨우 열다섯 살이었다니까요. 그 나이에 제게 길을 보여줬습니다.’

‘그 후로 사 년이나 흘렀죠. 그런 이에게 사 년이라는 시간은 어떤 의미일 것 같습니까?’

유정풍도 어렵지 않게 상상할 수 있었다.

‘괴물이 더한 괴물이 되어 나타나기에 충분한 시간이겠지.’

그 괴물이 지금 그의 앞에 있었다.

‘연애상담은 둘째다. 사실 너의 무공을 견식해 보고 싶었거든.’

유정풍은 눈을 번쩍 뜨며 외쳤다.

“개방의 후개 유정풍이 곤륜 제자 정광에게…… 이보게, 아우! 어디 가는가!”

정광은 이미 객잔 안으로 들어가고 있었다.

“사숙조님들께 끌려가는데요.”

“그, 그럼 어쩔 수 없지. 내일 아침 일찍 오겠네!”

“싸우려고요? ‘그거’ 배울 시간도 부족할 텐데.”

유정풍은 얼굴을 굳히며 입을 열었다.

그의 목소리엔 꺾을 수 없는 강한 의지가 서려 있었다.

“물론 그걸 배우려고 올 것이란 말일세!”

* * *

정광은 운학 앞에 무릎을 꿇고 앉았다.

“손속에 사정을 둬야 한다.”

“네. 마침 그러고 있어요.”

“더. 더 둬야 해.”

“얼마나요?”

“아까 말한 것처럼 최대 침상에서 한 달이다.”

“그건 조금…….”

“오랜만에 같이 도경이나 읽어볼까?”

“한 달이면 딱 좋죠. 그렇게 하겠습니다.”

“믿으마. 그만 나가봐라.”

“네, 사숙조님.”

정광은 운학의 방에서 나와 정 자 배가 머무는 별채로 갔다.

“사제. 고생했다.”

“많이 혼났지? 기분 풀고 쉬어라.”

정광의 입가에 미소가 맺혔다.

‘그러고 보니 벌써 십구 년인가.’

그리 긴 시간은 아니었지만 짧은 시간도 아니었다. 십구 년 동안 매일같이 봐온 사람들이 아직도 그의 곁에 있었다.

‘뭐, 나쁘지 않네.’

전생에는 상상도 못 했던 일이다.

그런 상상을 할 이유도 없었다.

그의 곁에 있던 이들은 차례차례 쓰러져 갔으니까.

그럴 수밖에 없는 당연한 일이었다.

“저…… 사형.”

정광은 상념에서 벗어나 고개를 돌렸다.

얼굴에 멍 자국이 가득한 백승무였다.

“왜?”

“소청기공 속성 연공법 말입니다.”

“그래. 지금 알려줄게.”

“……네?”

“그러기로 했잖아. 가부좌 틀고 앉아. 구결 알려줄 테니까.”

“……네! 알겠습니다!”

지난 십구 년 동안에는 없었으나 앞으로 함께할 사제를 강하게 만들어야 했다.

‘내 앞에서 죽는 꼴은 못 보지.’

전생과 같은 일은 없을 것이다.

정광은 그렇게 할 자신이 있었다.

그런데.

“……이게 이해 안 간다고?”

“사, 사형. 제가 부족해서…….”

이런 멍청한 놈이 있나.

할 수 없지.

몸에 새겨줄 수밖에.

“……사, 사형? 왜, 왜 그러십니까? 으아아아악!”

정광은 백승무의 몸에 진기를 주입해서 길을 억지로 새겼다.

일부러 아프게.

“이래야 잘 외어져! 정신 잃지 말고 외어!”

“끄르르륵…….”

따악!

“어억!”

“정신 안 차려? 강해지는 게 어디 쉬울 줄 알아?”

“외, 외우겠습니다!”

백승무는 죽을 것 같은 고통을 느끼면서도 필사적으로 집중했다.

‘외워서 내 스스로 운기를 해야 해! 그래야 이 고통이 끝난다!’

속성이고 나발이고 다 때려치우고 싶었지만 일단 살아남아야 했다.

‘기해(氣海), 음교(陰交), 중완(中脘), 기문(期門)…….’

어느 순간 그는 무아지경(無我之境)에 빠졌다.

생존을 위한 집념과 무공을 향한 갈망이 그것을 가능하게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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