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3화
본능과 이론
무림인들은 보통 ‘개방’하면 의혈(義血)과 정보력을 떠올린다.
개방은 거지가 됨으로써 모든 욕심을 버리고, 정의를 위해 목숨을 바치는 의로운 무리였다.
천하에 산재한 그들은 수많은 정보를 모을 수 있었으며, 그것을 삿된 용도가 아니라 정의를 위해 사용하는 데 주저하지 않았다.
의룡 유정풍은 그런 수십만 방도 중에서 다음 대 방주로 내정된 지고한 신분이었기에 지금 이 상황이 잘 이해가 가지 않았다.
“왜 안 받으세요? 너무 적어요?”
“…….”
“아. 현물로 드려야 하나? 이리 오세요. 밥이나 같이 먹죠. 어? 안 가요? 부끄러워 말고 가요.”
유정풍은 얼떨결에 정광에게 이끌려 객잔 안으로 사라졌다.
사람들은 멍하니 그 모습을 바라보기만 했다.
객잔 안에 들어간 정광은 탁자 앞에 앉으며 점소이를 불렀다.
“여기요. 이분 드실 만한 것 좀 내줘요. 거지시니까 많이요.”
“……네. 알겠습니다.”
연화객잔은 고급 객잔이었기에 평소라면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하지만 재신 정광의 주문 아닌가?
유정풍의 기세도 범상치 않았기에 점소이는 군말 없이 물러났다.
“왜 계속 말이 없어요?”
“……나를 거지로 대하는 이는 처음이라 좀 놀랐네.”
“거지를 거지로 대하지 그럼 뭐로 대해요.”
“흐음. 맞는 말이긴 하군. 그럼 나는 자네를 도사로 대하면 되겠는가?”
“저는 무늬만 도사인데요. 그냥 하고 싶은 대로 하세요.”
잠시 침묵하던 유정풍이 예의 그 시원시원한 미소를 지었다.
“좋아! 자네 덕분에 배 좀 채워보지. 나는 무척 많이 먹네. 각오하게나.”
“얼마든지요.”
정광은 전생에도 수하들에게 먹는 것만큼은 풍족하게 베풀었다. 먹어야 힘이 나고 먹는 게 삶의 낙 중 하나라는 것을 잘 알고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뭐 이리 많이 먹어? 이게 사람이야?’
개방의 후개라더니 과연 남달랐다. 수많은 거지 중 이인자라는 사실을 증명하려는 듯 엄청나게 먹어댔다.
“저기요. 좀 씹고 삼키시죠.”
“우걱우걱. 걱정하지 말게. 내 위장은 철포삼(鐵袍衫) 같은 외문기공(外門奇功)을 익힌 거나 마찬가지야.”
바깥일을 정리하고 들어온 정 자 배 제자들이 주위 탁자에 앉았다. 그들의 눈은 호기심으로 반짝이고 있었다.
어느새 탁자 위의 요리를 모두 삼켜버린 유정풍이 아쉬운 표정을 지었다.
“여기까지만 할까. 사실 내가 자네를 찾아온 건 구걸을 하러 온 것이 아닐세.”
“그렇다기엔 너무 많이 먹었는데요.”
“뭐 겸사겸사. 좀 조용한 곳은 없나? 술이나 한잔 마시면서 얘기하면 좋겠군.”
지켜보던 정 자 배가 웃었다.
정광도 피식 웃었다.
유쾌할 만큼 넉살 좋은 거지였다.
“그러죠.”
정광과 유정풍은 후원으로 자리를 옮겼다. 수많은 연꽃이 피어 있는 연못 앞의 정자였다.
점소이가 차와 술을 내려놓고 사라졌다.
정광은 찻잔에 들어 있는 차를 들이켰다. 그리고 빈 찻잔에 술을 따랐다.
그걸 또 전부 마셨다.
“말해보세요. 무슨 일이에요?”
유정풍은 눈을 살짝 크게 뜨며 물었다.
“자네 지금 뭐 한 건가?”
“술 마셨는데요.”
“도사가?”
“아까 무늬만 도사랬잖아요.”
“으하하! 그랬지. 내 깜빡했네.”
유정풍은 술병을 들어 자신의 입에 부었다.
“아. 더러워. 예의 없게 뭐 하는 거예요?”
“한 병 더 시키면 되잖는가.”
“아. 그렇지.”
정광은 아예 술을 여러 병 시켰다. 물론 전부 유정풍의 앞에 몰아놓는 건 잊지 않았다.
“크으으. 송하량액(宋河粮液)인가? 끝내주는군. 오 년 전 양 대인 칠순잔치 때 얻어 마셔봤지.”
“괜찮네요.”
“그렇지? 자네가 돈이 많아서 다행이야. 으하하.”
껄껄 웃던 그가 넌지시 물었다.
“내 부탁 하나만 해도 되겠는가?”
“들어보고요.”
“흐음. 쌀쌀맞기는. 좋아. 내 말 하지. 아니, 술을 더 마셔야 물어볼 수 있겠어.”
유정풍은 남은 술을 전부 다 들이켰다. 정광은 어이가 없어 가만히 그 꼴을 바라봤다.
“후우우. 좋아. 이제 됐어.”
불콰한 얼굴로 더운 숨을 내쉰 유정풍이 정광을 노려보며 말했다.
“자네는…… 어찌 그럴 수 있나?”
“뭘요?”
“……어떻게 그런 식으로 말할 수 있냐는 걸세.”
“아. 내 말투요? 버릇없다고 혼도 많이 났는데 원래 그래서 어쩔 수 없어요.”
“아니! 그게 아닐세!”
유정풍이 눈을 질끈 감고 외쳤다.
“어떻게 언 소저 같은 미녀에게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이 말을 던질 수 있냐고!”
“네?”
유정풍의 얘기는 꽤 길었다.
정광은 시간이 지날수록 황당해졌다.
“그러니까 여자와 말을 하는 게 힘들다?”
“……그렇네.”
“특히 미인 앞에서는 한마디도 꺼낼 수가 없다?”
“……왜 나를 두 번 죽이는가?”
정광은 아예 혀라는 칼로 그를 잘근잘근 다졌다.
“연애는 해봤을 거 아니에요.”
“…….”
“입은 맞춰봤죠?”
“…….”
“하다못해 손이라도……?”
“…….”
“이야. 그 나이에 숫총각이에요? 우화등선보다 어려운 업적을 이뤘네요.”
“으아아아악!”
유정풍은 머리를 두 손으로 감싸 쥐고 울부짖었다.
“도저히 이해가 안 가네요. 거지 노릇도 하면서 뭐가 두려워요?”
“다르지. 완전 다른 문제야. 나는 태어나면서부터 거지였거든.”
“어? 나도 그런데?”
둘 사이에 유대감이 더 진해졌다.
“어쨌든 안 돼. 차라리 도산검림(刀山劍林)에 뛰어들면 뛰어들었지, 입이 안 열리는 걸 어쩌란 말인가?”
정광은 전생을 떠올려 봤다.
별의별 놈들이 다 모인 천마신교에도 이런 머저리는 없었다.
“언 소저는 자네가 방립을 쓰고 있을 때부터 흥미를 느꼈다더군. 잘생겨서 관심을 가진 게 아니란 거지. 그리고 대화도 꽤 오래 했다면서?”
“별걸 다 조사했네요.”
“직업이 그런데 어쩌겠나. 어쨌든 자네에겐 어떤 매력이 있어. 그 매력은 화법과도 관련이 있을 것이라는 게 내 결론일세. 그걸 배우고 싶네.”
“잘못 짚으신 것 같은데요. 난 그냥 말하는 거예요.”
“원래 자기 자신은 모르는 법. 사실 난 자네에 대해 많은 걸 들었지. 그래서 더 믿네.”
“누구한테 뭘 들었는데요?”
유정풍이 씩 웃었다.
“팽강휘 알지? 자네 칭찬을 많이 하더군. 팽 아우를 도와준 것처럼 나도 좀 도와주게나.”
“어? 둘이 친해요?”
“그럼! 아주 친하지!”
“그냥 그렇게 사세요.”
“강호의 도리가 땅에 떨어졌구나! 아우! 이 형 좀 살려주게!”
“지금껏 그렇게 잘 살아왔잖아요.”
유정풍의 얼굴이 진지해졌다.
“얼마 전까지는 아무 상관 없었지. 여인에게 관심이 없었거든. 하지만 연모하는 이가 생겼네.”
“언 소저?”
“아니, 아니. 다른 사람이지.”
그의 얼굴이 몽롱하게 변했다.
“아아. 상상하기만 해도 행복하군. 어쨌든 날 좀 살려주게. 응?”
정광은 그를 물끄러미 바라봤다.
‘호쾌하고 협의도 있어 보이긴 하는데 뭐에다 쓰지?’
이런 종류의 사람은 한번 인연을 맺으면 절대 배반하지 않는다. 알아두면 최소한 해는 안 되는 인물이었다.
‘쓰긴 뭘 써. 그래 봐야 거지인데…… 아!’
개방 거지니까 쓸모가 있었다.
“아는 한도 내에서 알려 드릴 테니 그쪽도 날 좀 도와줘야겠어요.”
“정말인가! 좋아! 그렇게 하지. 단! 협의에 어긋나는 일이면 안 돼.”
“나도 나름 정파예요. 근데 술 취한 것 같은데 괜찮아요? 취기 몰아내는 거 가르쳐 줄까요?”
유정풍이 호기롭게 대답했다.
“됐네. 아까운 술을 마셔놓고 취기를 날리면 어쩌는가? 그보다 어서 말해보게. 내가 무엇을 하면 되나?”
* * *
유정풍은 술이 확 깼다.
“……나보고 그걸 해달라고?”
“네. 협의에 어긋나는 일도 아니잖아요.”
“……그렇긴 하네만. 부합되지도 않지.”
“어쨌든 나쁜 일은 아닌데. 뭐 싫으면 말고요.”
정광의 말이 맞았다. 게다가 유정풍으로서는 다른 길이 없었다.
“좋아! 그렇게 하지. 대신 아우도 약조를 지켜야 해.”
“물론이죠.”
정광은 객잔에 처음 왔을 때 맞이했던 나이 든 점소이를 불렀다.
“늦어서 죄송합니다. 혹 불편하신 점이라도…… 헉!”
그는 정광이 쥐여준 금원보를 보며 부들부들 떨었다.
“남양 최고의 거간꾼들을 모아주세요. 지금 바로.”
유정풍이 몇 사람의 이름을 말했다.
“아, 알겠습니다! 바로 조치하겠습니다!”
거간꾼들이 모였다.
정광은 또 금원보를 꺼냈다.
“남양에서 저평가된 자투리땅을 사려고 하거든요. 거래를 성사시켜 주세요.”
유정풍이 몇 군데의 지명을 말했다.
놀란 거간꾼들에게 정광이 으름장을 놨다.
“터무니없이 높은 가격이면 알죠?”
정광의 손에 들린 금원보들이 시뻘겋게 달아오르더니 녹아내렸다. 정광은 그것을 주물러 하나로 합쳐 버렸다.
“뭐 그래도 상관없어요. 몇 배로 다시 받아내면 되니까.”
“……!”
채찍 다음엔 당근이었다.
“내가 자투리땅을 사서 뭐 하겠어요? 무림맹이 커지고 상권이 활성화되면 팔거나 다른 땅을 더 사서 합치겠죠? 그때도 여러분에게 일을 맡길 테니 잘 생각하세요.”
정광은 거간꾼들의 손에 금원보들을 쥐여줬다.
그들이 고개를 숙이며 외쳤다.
“맡겨만 주십시오! 대인!”
거간꾼들은 즉시 사라졌다.
유정풍도 한숨을 내쉬며 일어섰다.
“다녀오지.”
“수고하세요.”
정광은 거간꾼들을 믿을 정도로 순진하지 않았다. 그래서 유정풍이 확인을 하러 가는 것이었다.
하남성 전역은 물론 남양의 정보에도 능통한 그라면 방도들을 이끌고 충분히 해낼 수 있는 일이었다.
여기서 끝이 아니었다. 정광은 백승무를 불러 지명을 말해주고 주변을 수소문해 시세를 알아보라 했다.
“……크흑. 저 아파서 걷기도 힘듭니다.”
“사형들이 치료해 줬잖아.”
“그래서 겨우 여기까지나마 온 겁니다.”
정광은 백승무의 혈도 몇 군데를 찌르고 금창약을 덕지덕지 발랐다.
“이제 됐지?”
전혀 됐지 않았지만 그나마 조금 더 나아졌다.
“……소청기공의 속성 연공법은 언제…….”
“아. 아직 안 알려줬었나? 이 일이 끝나면 바로 시작하자.”
아픔 따위는 무공에 대한 욕망을 이길 수 없었다.
일은 일사천리로 진행됐다.
거간꾼들은 빠른 협상 끝에 적정한 금액을 받아왔고 유정풍이 사실임을 증언했다. 마지막으로 백승무가 큰 문제가 없다고 말하자 정광은 전표를 뿌렸다.
결국 반나절만에 정광은 상당한 양의 토지를 매입할 수 있었다.
그것도 객잔에 편히 앉아서.
* * *
“아우. 이제 자네가 나설 차례네.”
“아. 일단 소개부터 할게요. 사제. 인사드려. 개방의 후개인 유정풍 소협이셔.”
얼결에 인사가 오갔다.
“음. 이걸 뭐라 설명해야 하지? 아. 무공 있잖아요. 본능적으로 펼치는 고수가 있고 이론을 정립한 뒤 체계적으로 만드는 고수가 있죠?”
유정풍과 백승무가 고개를 끄덕였다.
“내가 여인들에게 저절로 호감을 받는 사람이라면 사제는 어떡하면 호감을 받을 수 있는지 아는 사람이에요. 그렇지 사제?”
“제, 제가요?”
“그럼. 언 소저와의 일도 그랬잖아. 굳은살 말이야.”
정광은 유정풍에게 언의진이 떠난 뒤 백승무가 했던 말들을 전했다.
의심쩍은 얼굴로 듣던 유정풍은 나직한 감탄성을 내뱉었다.
“아! 얼굴을 칭찬한 뒤에 손을 칭찬한다! 아름답지만 무공을 위해 그 일부를 희생한 무인! 그렇지. 그래야 제대로 된 칭찬이 되는 거지. 백승무라 했나? 자네 대단하군.”
“하하. 부끄럽습니다.”
“아닐세. 여인은 몇 명이나 만나봤는가? 셀 수도 없겠지?”
백승무가 자신도 모르게 울상을 지으려는데 정광과 시선이 마주쳤다.
-사제. 셀 수도 없는 건 사실이잖아. 당당하게 대답해.
……그렇긴 했다.
백승무는 딱딱하게 굳은 얼굴로 웃었다.
“하하하. 물론이지요.”
유정풍은 바보가 아니었다.
아니, 개방의 후개가 되었을 정도로 무척 총명한 사람이었다.
‘이거 수상하군. 많이 수상해. 혹시 모르니 좀 들어나 볼까?’
그는 백승무의 어깨를 친근하게 두드렸다.
“의심해서 물은 게 아니니까 기분 풀게나. 내가 자네 아니면 또 누구를 믿겠나? 하하하. 아. 궁금한 게 있는데. 나한테 제일 큰 문제가 뭔지 좀 알려주게.”
백승무는 모든 걸 내려놨다.
‘나도 모르겠다. 될 대로 돼라.’
마음을 비우자 유정풍을 똑바로 바라볼 수 있었다.
“유 소협은 거지이신 게 제일 큰 문제입니다.”
거지보고 거지인 게 문제라고?
유정풍이 어이가 없어 한마디 하려는 순간, 운학이 운 자 배와 허 자 배를 이끌고 나타났다.
“정광, 네 이 녀석. 대체 무슨 일을 벌인 것이냐?”
토지를 산 걸 들킨 걸까?
‘그럴 리가.’
이제야 무림맹에서 돌아온 운학이 알 리가 없다.
‘대충 짐작이 가네.’
아까부터 사람이 모여드는 기척이 느껴지던 참이다.
얼굴이 하얗게 질린 백승무와 달리 정광은 담담히 물었다.
“손님이 왔나요?”
운학은 한숨을 쉬면서 담 밖을 가리켰다.
“나가서 직접 보거라. 너와 비무를 하겠다고 얼마나 많이 몰려왔는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