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2화
용봉(龍鳳)
언의진의 눈이 살짝 커졌다.
“……나무껍질?”
“네. 왜요?”
그녀는 정광을 가만히 바라봤다.
정광도 그녀를 바라봤다.
그런 그들을 사람들이 바라봤다.
선남선녀가 마주 보며 서 있는 그림 같은 풍경이었다.
그렇게 시간이 흘렀다.
‘예쁘긴 하네.’
정광은 내심 고개를 끄덕였다.
환생해서 본 여자 중 제일 예쁜 여자였다. 아니, 그의 기준에서 ‘예쁘다’는 것이니 중원에 흔치 않은 미녀이리라.
하지만.
‘제정신이 아닌 애구나.’
쉼 없이 이것저것 묻다가 갑자기 말이 없다. 눈도 깜빡이지 않고 빤히 쳐다보기만 한다.
감정 기복이 심하다는 증거다.
‘천마신교에도 이런 애들이 꽤 있었지.’
기분이 나빠지면 느닷없이 칼춤을 추기 시작하는 그런 놈들이었다.
덕분에 정광은 그런 놈들을 다루는 전문가가 된 지 오래였다.
‘제일 쉬운 건 두들겨 패는 건데.’
안타깝게도 현생에서는 그럴 수 없었다. 발작도 안 했는데 손을 댔다간 곤륜 도사들에게 종일 잔소리를 들을 것이 뻔했다.
‘두 번째 방법으로 가야겠군.’
그런 놈들은 기분 좀 맞춰주면 배를 뒤집고 헥헥거린다.
마침 정광은 유모에게 여자를 대하는 법을 배운 참이었다.
‘좋아. 하자.’
정광이 입을 열려는데 언의진이 먼저 말했다.
“당신은 참 흥미로운 사람이군요. 재밌어요.”
나는 별로 재미없는데.
칭찬해서 빨리 보내자.
그냥 예쁘다고…… 어라?
얼굴보다 더 예쁜 데가 있었네.
“이야. 예쁘네요.”
언의진의 눈이 살짝 흔들렸다. 평소 지겹게 들었던 말이었으나 정광에게 들으니 뭔가 색달랐다.
‘다른 남자들과 확실히 달라.’
하지만 정광은 그녀의 생각보다 훨씬 더 다른 남자였다.
“주먹에 굳은살이 아주 예쁘게 박혔는데요.”
“……!”
순간 그녀의 이마에 핏줄이 섰다.
“……칭찬 고맙군요.”
“뭘요. 손날도 아주 두툼하네요. 수도로 때리면 바위도 깨끗하게 잘리겠어요.”
그녀의 불끈 쥔 주먹에도 핏줄이 섰다.
“고! 마! 워! 요! 그럼 이만!”
정광은 신법을 펼쳐 사라지는 그녀를 멍하니 바라봤다.
‘갑자기 왜 저래? 칭찬이 너무 과했나?’
마음에 안 드는 시선이 느껴져 돌아보니 백승무가 어이없다는 얼굴로 그를 보고 있었다.
“넌 또 왜?”
“……사형. 정말 대단하십니다.”
“뭐가?”
“구룡사봉의 일원인 권봉(拳鳳) 언의진 소저에게 어떻게 그런 폭언을 하십니까?”
아. 저 여자가 권봉이었던가?
뭐, 그건 그거고.
“유모가 가르쳐 준 대로 칭찬했을 뿐이야. 저 여자도 고맙다고 했잖아.”
“……그거, 칭찬이었습니까?”
“당연하지. 권사라는 인간들에 대해 알지? 적수공권(赤手空拳)으로 싸운다는 그 웃긴 자부심 말이야.”
“좀 과도한 자부심을 보이는 면이 있긴 하지요.”
“근데 그러는 놈들 중에 진짜 맨주먹으로 싸우는 놈은 별로 없어. 권갑(拳甲)을 끼거나 원앙월(鴛鴦鉞)을 휘두르곤 하지. 아. 수틀리면 비수를 꺼내 들고.”
마지막은 얼마 전에 상대했던 옥기린을 말함이었다.
“저 여잔 순수하게 주먹을 단련했잖아. 손날도 그런 걸 보면 손바닥도 마찬가지일 게 뻔해. 꽤 기특하지 않아?”
모두 고개를 주억거렸다.
가만히 듣자니 칭찬이 맞긴 했다.
그래도 멍청한 짓이었다는 건 마찬가지였지만.
백승무는 내심 탄식했다.
‘이 얼굴에 가공할 무공도 지녔으니 어디 한 군데는 비어 있는 게 그나마 말이 되겠지.’
전생의 정광 주위에는 그를 경배하거나 두려워하는 여인들만 있었다.
현생의 정광 주위에는 그를 갓난아이 때부터 봐와서 모든 걸 감싸주는 여인들만 있었다.
곤륜을 떠나 처음 보게 된 여인들이 그를 이해할 수는 없는 노릇.
정광 역시 마찬가지였다.
그에게는 시간이 필요했다.
‘내가 도와야 한다.’
여자 바보 정광이 안타까웠던 백승무는 자세히 설명하기 시작했다.
“사형 말씀대로 그녀의 손은 뼈를 깎는 수련을 했다는 증거입니다. 칭찬받아 마땅할 만큼 아름다운 것이지요.”
“내 말이.”
“그런데 순서가 조금 틀렸습니다.”
“무슨 말이야?”
“먼저 얼굴을 칭찬한 뒤에 손을 칭찬했어야 합니다. 그래야 아름답지만 무공을 위해 그 일부를 희생한 훌륭한 무인. 이런 그림이 나오는 것 아니겠습니까.”
정광이 턱을 쓰다듬다가 중얼거렸다.
“으음. 뭔가 좀 그럴듯한데?”
“그렇게 말씀하셨으면 그녀도 무척 기뻐했을 겁니다.”
“사제가 여자 좀 아는구나?”
백승무가 머리를 긁으며 쑥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하하. 부끄럽습니다.
“많이 만나봤어? 몇 명이나?”
순간 백승무의 얼굴이 굳었다.
정광의 시선을 피하던 그는 결국 고개를 떨궜다.
“사제. 왜 대답 안 해? 너무 많아서 셀 수가 없어?”
“…….”
“설마 전혀 없어서 셀 수 없는 건 아니지?”
“……흐윽.”
지켜보던 정 자 배 제자들은 숙연한 얼굴로 ‘무량수불’을 중얼거렸다.
지금 여기, 도호도 받지 못했지만 이미 훌륭한 도사인 자가 있었다.
* * *
다음 날 아침, 운 자 배와 허 자 배는 무림맹으로 향했다.
정 자 배가 신이 난 건 당연한 일. 이 소중한 시간을 어떻게 보낼까 논의하는데 점소이가 다급히 달려오는 모습이 보였다.
“죄, 죄송하지만 좀 나가보셔야겠습니다.”
“무슨 일이오?”
“손님들이 찾아오셨습니다.”
“손님? 대체 누구기에?”
“너무 많아서 누구라고 말씀드리기가…….”
“알겠소. 일단 나가봅시다.”
정우는 사제들을 이끌고 객잔 밖으로 나갔다. 그곳에는 많은 청년 무인이 그들을 기다리고 있었다.
“곤륜의 정우라 하오. 그대들은 본문에 일이 있어 찾아온 것이오?”
정우의 물음에 한 청년이 나섰다.
값비싼 푸른 장포에 고풍스러운 검을 찬 걸 보니 제법 있는 집 자제 같았다.
알고 보니 과하게 있는 집 자제였다.
“이른 아침부터 실례를 저질러 미안하오. 나는 남궁진영이라 하오.”
“남궁 소협이셨구려. 무슨 일로 오셨소?”
“어제 귀파의 제자 중 정광이라는 이가 권봉 언 소저에게 무례를 저질렀다 들었소. 그 이유를 따지러 온 것이외다.”
뭐 하나 싶어 지켜보던 정광이 어이가 없어 나섰다.
“칭찬했었는데요.”
남궁진영을 비롯한 청년들의 시선이 정광에게 모였다. 그들은 곧 하나같이 입을 떡 벌렸다.
‘세상에! 뭐 저런 얼굴이!’
‘젠장! 싸우기도 전에 졌잖아!’
남궁진영은 겨우 입을 열었다.
“……누군가 했더니 그대였군. 그 일을 목격한 이가 수도 없이 많소. 대체 왜 그런 짓을 한 것이오?”
“칭찬했다니까요.”
“거짓말하지 마시오!”
정광은 문득 궁금한 점이 생겼다.
“근데요. 그게 그쪽이랑 무슨 상관이에요?”
“그야 당연히…….”
말끝이 흐려지며 무거운 침묵이 깔렸다.
정광은 알겠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아무 사이도 아니다?”
“……언 소저에게 사과하시오.”
“잘못한 거 없는데.”
“정말 안 하실 것이오?”
“네.”
“그럼 답은 하나지.”
남궁진영이 포권을 하며 말했다.
“남궁세가의 남궁진영이 곤륜의 정광 소협에게 비무를 청하오.”
“귀찮으니까 그냥 한 번에 다 덤비세요.”
다들 잘못 들은 줄 알았다.
하지만 정광이 확인시켜 줬다.
“뭐 해요? 어서 오세요.”
폭발한 청년들이 소리를 질렀다.
“대체 우리를 뭐로 보고!”
“내가 먼저 너와 겨루겠다!”
“비키게! 내가 먼저 할 것이야!”
청년들이 정광에게 몰려들자 정우와 곤륜 제자들이 기겁하며 막아섰다.
“흥분을 가라앉히시오! 이래서 좋을 것이 없소이다!”
“자신을 중히 여기셔야 하오!”
생각해서 한 말이었건만 흥분을 가라앉히긴커녕 끓는 기름에 물을 부은 격이 되어버리고 말았다.
“그건 대체 무슨 의미요?”
“우리가 질 것이란 말인가!”
“어디 한번 해봅시다! 줄 서서 차례를 기다리기도 그러니 그대들도 나서시오!”
청년들은 곤륜 제자들에게 비무를 요청했다. 말이 요청이지 당장 싸우려는 기세였다.
몇 번이나 사양하던 정우와 사제들은 어쩔 수 없이 비무를 받아들였다.
정광에게 두들겨 맞아 반 폐인이 되느니 자신들이 적당히 상대하는 게 낫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이미 정광의 앞에 서 있는 남궁진영은 어쩔 수 없었지만.
-정광아. 행여나 죽이거나 불구로 만들면 안 된다.
-대사형. 저를 대체 뭐로 보시길래 그런 말씀을 하세요?
뭐로 보긴.
너로 보니까 그러지.
-믿으마!
정우와 정 자 배 제자들은 두 손을 모아 정중히 포권했다.
“손속에 사정을 두시면 고맙겠소.”
“단순한 비무일 뿐이니 의기가 상할 정도로는 하지 맙시다.”
청년들은 반발했다.
“흥! 어서 시작합시다!”
“비무는 말이 아니라 검으로 하는 것이오!”
비무가 시작됐다.
곤륜 제자들은 아까의 점잖은 말과는 다르게 청년들을 찰지게 패기 시작했다.
정광에게 받은 지독한 수련이 그들의 몸을 그렇게 움직이게 만든 것이다.
“으아악!”
“그, 그만! 커헉!”
정광은 고개를 저었다.
“더 찰지게 때릴 수 있으면서 왜 저러시지?”
남궁진영은 경악했다.
“이럴 수가! 곤륜이 이리도 강했던가!”
싸움은 길지 않았다.
곤륜 제자들은 청년들을 보며 두 손을 모았다.
“무량수불. 그래도 크게 안 다쳐 다행이오.”
청년들이 바닥에서 꿈틀거렸다.
“원시천존께서 도우셨소이다. 그만 돌아가서 푹 쉬시길.”
청년들은 꿈틀거릴 뿐 일어날 엄두조차 못 냈다.
“아! 막내야! 너는 왜 거기 누워 있느냐?”
무공이 약해서 청년들에게 두들겨 맞다 쓰러진 백승무는 서러움에 눈물을 흘렸다.
입을 떡 벌린 채 그 모습을 보는 남궁진영에게 정광이 말했다.
“우리도 해야죠.”
“자, 잠깐! 하압!”
남궁진영은 약하지 않았다.
장검으로 웅혼한 검격을 펼쳐 자신의 몸을 물샐 틈 없이 방어했다.
유구한 세월 동안 무림칠대세가의 수좌를 다퉈온 안휘성(安徽省)의 패자 남궁세가(南宮世家)! 그들의 위대한 검술이 남궁진영의 검에서 줄줄이 흘러나왔다.
문제는 그의 경지가 낮다는 것.
정광은 남궁진영이 만들어낸 검막을 뚫고 주먹을 내질렀다.
뻐억!
“크헉!”
턱이 돌아간 남궁진영이 이장 넘게 날아가 쓰러졌다.
승부가 갈렸다 생각한 정우가 정광을 부르려고 하는데.
“멈! 추! 시! 오!”
위맹한 고함과 함께 한 사내가 정광 앞에 내려섰다.
떡 벌어진 어깨에 훤칠한 키.
사내다운 각진 얼굴에 큼직큼직한 이목구비.
강호의 협객이란 이런 모습이라고 온몸으로 외치는 듯한 장한!
‘어라?’
정광은 그를 보며 고개를 갸우뚱했다.
‘이 거지는 또 뭐야?’
그랬다.
그는 거지였다.
그것도 아주 멋있는 거지.
“누구세요?”
장한이 대답하기도 전에 여기저기서 경악에 찬 목소리가 터져 나왔다.
“유, 유정풍!”
“개방(丐幇)의 후개(後丐)!”
“구룡사봉 중 의룡(義龍) 아닌가!”
실로 대단한 신분이었지만 유정풍의 눈빛에는 티끌만 한 오만함도 섞여 있지 않았다.
“저들의 말대로 내가 바로 유정풍일세.”
정광은 바로 이해했다.
‘잘나가는 거지구나.’
구파일방 중 일방인 개방은 엄청난 거지떼였다. 하도 수가 많아 인원이 몇인지 자기들도 모를 정도였는데, 그중 다음 대 방주로 내정된 후개라면 제법 능력 있는 거지이리라.
“자네가 정광 소협인가?”
“소협 빼면 맞는데요.”
“들은 대로군. 제대로 왔어.”
“……?”
그가 손을 들어 쓰러져 있는 청년들을 가리켰다.
“고하가 가려졌으니 그만 보내는 게 어떤가? 쓸데없이 일이 커지는 건 피하는 게 좋을 걸세.”
“그러고 뭐 하려고요?”
유정풍의 입가에 시원시원한 미소가 걸렸다.
거지라는 신분이 아까울 정도로 멋진 미소였다.
“자네에게 부탁할 것이 있네.”
“아하. 잠깐만요.”
“……?”
정광은 전낭에서 전표 한 장을 꺼냈다. 쓰러져 흐느끼고 있던 백승무가 화들짝 놀라 소리를 질렀다.
“사형!”
“아, 실수. 좀 많네.”
정광은 전표를 도로 집어넣고 다른 것을 꺼내 내밀었다. 원래는 백승무가 해야 할 일이었으나 그럴 만한 상황이 아니었다.
“이거면 되지?”
“…….”
금액이 문제가 아니지 않은가.
‘개방의 후개에게 적선을 한다고?’
백승무는 어이가 없어 멍하니 바라봤다.
유정풍 역시 어이가 없어 멍하니 서 있었다.
정광은 유정풍의 손에 전표를 쥐여주며 당부했다.
“얼마 안 되니까 아껴 쓰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