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1화
피에 절은 나무껍질
잠시 고민하던 운학은 새어 나오려는 웃음을 참았다.
‘녀석. 어지간히도 이곳에서 묵고 싶은가 보군.’
정광뿐만이 아니었다. 정 자 배 모두의 얼굴에 짙은 기대감이 떠올라 있었다.
‘한 번쯤은 괜찮겠지.’
운학이 승낙하자 모두가 즐거워했다. 허 자 배는 물론 운 자 배까지.
“이보게, 운현. 왜 그리 웃는가?”
“크흠. 정광의 말대로 좋은 수련의 기회 아닙니까? 부동심을 닦을 생각에 기뻐서 그럽니다.”
“……용맹정진(勇猛精進)하시게.”
“물론이지요, 사형!”
모두 곤륜이 가난한 탓이었다.
도사도 사람이다.
그들이 언제 이런 곳에 또 묵어보겠는가!
객잔에 들어서자 점소이가 맞이했다. 꽤 나이가 있는 자였는데 순식간에 곤륜 도사들의 차림새를 훑어본 그는 극진한 자세를 취했다.
“귀인들을 뵙습니다. 연화객잔(蓮花客棧)에 오신 것을 환영합니다.”
덕분에 귀인이 된 정광이 물었다.
“후원에 별채 있나요?”
“물론입니다. 지금은 세 채가 비어 있습니다.”
“딱 좋네요. 그거 다 주세요.”
“……네?”
“세 채 다 쓰겠다고요.”
점소이는 물론 곤륜 제자들도 입을 떡 벌렸다.
“송구합니다만 가격이 좀, 허억!”
정광이 내민 전표에 점소이가 경악했다.
‘이, 이게 대체 얼마야! 진짜 귀인…… 어?’
눈 깜짝할 사이에 전표의 금액이 바뀌었다.
“사형. 과합니다. 돈은 제가 쓰기로 했잖습니까.”
“그럼 내가 내기 전에 사제가 먼저 냈어야지. 맨날 나중에 바꿔서 내면서 말은 잘해.”
“죄송합니다. 앞으론 꼭 제가 먼저 내겠습니다.”
백승무는 점소이에게 시선을 돌렸다.
“그것이면 충분하지요?”
“무, 물론입니다. 이쪽으로 오시지요.”
곤륜 도사들은 항렬별로 세 개의 별채로 들어갔다.
“이야! 정말 좋구나! 정광아, 고맙다!”
“하하. 살다 보니 이런 날도 오는군요. 태상노군께서 도우셨습니다.”
“무슨 방이 이렇게 많아? 와! 장문 어르신 방보다 더 좋은데!”
호들갑 떠는 사형들과 달리 백승무는 이곳저곳을 살펴봤다.
‘모두 새것이군. 저건 최근에 보수한 흔적들이고. 무림맹이 다시 결성되어서 그런 것이겠지. 토지 가격은 이미 많이 올랐을 거고…… 아차!’
그는 씁쓸한 웃음을 지었다.
‘나는 곤륜 제자다. 상단의 후계자가 아니야. 아직도 이래서야 어떡하려는 것이냐.’
안 그래도 사형들보다 한참 늦게 입문한 그였다. 가전심법을 소청기공으로 녹여내는 것도 벅찼기에 앞날에 대한 두려움이 커져만 갔다.
‘정신 차려! 사부께선 괜찮다 하셨어! 나는 충분히 강해질 수 있다!’
게다가 정광도 있었다.
그로선 감히 측량할 수조차 없을 정도로 강한 사형, 정광이!
마음이 통했는지 정광이 손짓했다.
“사제. 이리 와 봐.”
“네! 사형! 뭐든지 가르쳐만 주시면…….”
“돈을 좀 불리고 싶은데. 할 수 있지?”
“……사형. 저는 대곤륜의 제자입니다.”
“응. 나도 그래. 어디에 투자하는 게 좋을 것 같아?”
백승무는 이를 악물었다.
대체 나를 무엇으로 보길래!
이러려고 입문을 권유한 것인가!
계속 이런 식으로 나오면 나도 가만있지 않…….
“그리고 소청기공 말이야. 사부님 방식이 정석이지만 속성으로 올리는 요령이 있거든. 알려줄까?”
“사형!”
“응?”
백승무가 정광의 귀에 바짝 붙어 속삭였다.
“분산투자를 하십시오. 뭐니 뭐니 해도 수익보단 안전성이 중요합니다.”
“그 말은?”
“우선 토지를 매입하십시오. 저렴한 자투리땅을 모으는 겁니다.”
* * *
다음 날 아침, 운학은 곤륜 제자들에게 하루간의 휴식을 주었다.
모두가 기뻐한 것은 당연지사. 특히 정 자 배 제자들은 남양을 둘러볼 생각에 들떴는데, 운학이 허청을 인솔자로 붙이자 울상을 지었다.
“왜? 허직이 함께 가는 것이 낫겠느냐?”
“아닙니다! 그럼 다녀오겠습니다!”
정 자 배 제자들은 우렁찬 대답과 함께 객잔을 나섰다.
중원이다.
그것도 중심 중의 중심 하남성!
하루 동안 많은 것을 보고 배우리라!
그런데.
청해성 촌놈들이 지리를 알 리가 있나. 남양에 뭐가 있는지는 더더욱 몰랐다. 그저 어미를 따라가는 새끼 새들처럼 허청을 따라 일렬로 걸을 뿐이었다.
이 모습은 당연히 사람들의 눈에 띄었다.
‘촌구석에서 올라온 도사들이군.’
‘정신없이 둘러보는 꼴이 참 우습네. 저러다가 목 부러지는 거 아니야?’
원래대로라면 이렇게 반응해야 했지만 전혀 아니었다.
‘허어. 도복 한번 우아하고 멋지구나!’
‘청옥으로 만든 도관이라. 품위가 느껴지는군!’
‘검 손잡이와 검집이 황금빛이야! 날은 얼마나 예리할까?’
옷이 날개였다.
그것은 곤륜 제자들이 남양의 번화함에 놀라 정신없이 둘러보는 게 아니라, 어려운 이들을 도우려고 주위를 살피는 모습으로 보이게까지 만들었다.
“무량수불. 선인들을 뵙습니다.”
“태상노군의 뜻이 함께하시길 빕니다.”
사람들은 두 손을 모으며 공손히 인사했다. 곤륜 제자들은 그 인사를 일일이 받으며 축원까지 했다. 이 모습은 남양 사람들의 마음을 크게 울렸다.
‘곤륜파라고 했지? 대단하구나.’
‘말이 도사지 오만하기가 하늘 같은 인간들과는 격이 아예 달라.’
정광은 방립 틈 사이로 그들을 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유동 인구가 꽤 많네. 사제 말대로 토지부터 매입해야겠어.’
거리를 오가는 사람 중에는 무인들도 꽤 있었다. 나름 몸가짐을 조심하는 게 정파가 아주 개판은 아닌 것으로 보였다.
‘저들이 제일 중요한 고객이지. 좋아, 사제를 굴리자.’
이렇게 백승무의 운명이 정해졌다.
반나절 동안 구경을 다닌 곤륜 제자들은 시장 거리에 이르렀다.
많은 장사꾼이 좌판을 깔고 간단한 요리들을 팔고 있었다.
곤륜 제자들은 좌판에서 풍겨오는 향긋한 향기에 코를 벌름거렸다.
‘특이한 냄새군.’
‘저건 어떤 음식이지?’
중원이 워낙 넓다 보니 성마다 요리 재료와 조리법에 많은 차이가 있었다. 그중 제일 뛰어나다고 평을 받는 성은 산동, 사천, 광동, 강서 등이었는데 하남은 이보다 한참 밑이라는 게 중론이었다.
하지만 하남성 요리가 아무리 별로라 한들 청해성 것보다 못하겠는가.
입에 저절로 침이 고였다.
일행의 수장인 허청 또한 마찬가지였다.
“간단하게 뭐라도 먹도록 하자.”
“네! 사백!”
대부분의 좌판에는 비슷한 면 요리가 놓여 있었다.
“이건 무엇이오?”
“하남의 명물 회면(烩面)이라 합니다.”
“안에는 무엇이 들었소?”
“양고기를 끓인 육수에 황화채, 목이버섯을 넣고 만든 것입지요.”
양고기라.
허청은 혀를 찼다.
다른 좌판 상인들에게 물어봐도 종류만 달랐을 뿐 고기 육수가 들어간 건 마찬가지였다.
“허어. 이를 어쩐다?”
허청과 정 자 배가 난감해하는 그때, 정광은 구석빼기에 좌판을 깐 노파에게 다가가 물었다.
“무량수불. 할머니. 이건 고기 안 들어 있죠?”
“아아. 소신선님. 부끄럽지만 그렇습니다.”
사정을 모르는 이라면 신선 같은 통찰력이라 했을 것이다.
하지만 노파의 남루한 행색이나 지저분한 좌판을 보면 고기를 넣을 형편도 안 되는 것을 금세 알 수 있었다.
“사부님. 여기서 먹죠.”
어차피 선택의 여지가 없는 일.
“그래. 그렇게 하자꾸나.”
정광을 포함한 열 명의 곤륜 제자들이 좌판을 둘러싸고 앉았다.
“지, 진인들께서 저 같은 것이 만드는 걸 드셔도 될지…….”
“우리 진인 아닌데요.”
“어이구. 무슨 그런 말씀을. 알겠습니다. 정말 감사합니다.”
노파는 연신 굽실거리며 국수를 말기 시작했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백승무는 속이 거북해짐을 느꼈다.
‘우욱. 이렇게 더러울 수가 있나.’
검은 때가 들러붙은 손으로 면을 만지고 더러운 소매로 그릇을 훔치는 모습이라니.
백가상단의 이공자였던 그로서는 도저히 참을 만한 것이 아니었다.
‘하고많은 곳 중에 하필이면 왜 여기란 말인가. 이런 걸 대체 어떻게 먹는다고…… 아!’
백승무는 그의 사부와 사형들의 모습을 멍하니 바라봤다.
그들은 노파에게 정중히 두 손을 모아 보인 후 국수를 삼키고 있었다.
‘……심지어 정광 사형마저!’
그랬다.
그 악독한 정광마저 아무 불평 없이 더러운 국수를 먹고 있었다.
게다가 어찌나 우아하게 먹는지.
방립을 쓰고 있는데도 그야말로 신선이 따로 없는 모습 아닌가!
주위의 상인들과 손님들이 감탄해서 수군대는 소리가 들려왔다.
“곤륜의 도사님들이라 했지? 이제껏 많은 도사님을 봐왔지만 저런 분들은 처음일세.”
“내 말이. 저 할멈이 불쌍해서 몇 그릇 사주시는가 했는데 저걸 참고 드실 줄은 상상도 못 했네그려.”
“허허. 거참. 대단한 분들이군. 정말 대단한 분들이야.”
백승무는 눈을 지그시 감고 탄식했다.
‘승무야, 승무야. 네가 흠모하던 곤륜은 여전히 곤륜답거늘, 운 좋게 그 일원이 된 너는 아직도 철없는 한량일 뿐이구나.’
백승무의 눈빛이 한결 깊어졌다.
그는 거친 나뭇가지를 잘라 만든 젓가락으로 국수를 집어 입에 넣었다.
‘허억! 이 맛은!’
더럽게 맛없었다.
면이 어찌나 흐물흐물한지 노파의 거친 주름이 더 탱탱해 보일 지경이었다.
‘구, 국물은 낫겠지.’
한 모금 마신 그는 그대로 뿜어낼 뻔했다.
‘안 돼! 버텨!’
태상노군께서 도우셔서 간신히 참은 그는 다른 이들을 바라봤다.
‘이럴 수가! 이걸 태연한 얼굴로 드시다니!’
사부와 사형들에 대한 존경심이 커져갔다.
하지만 그가 몰랐던 것이 있었으니, 곤륜 제자들은 이런 형편없는 맛에 익숙했다.
과거 진옥룡수호단이 정광의 건강을 염려해서 숙수를 보내주기 전엔 이보다 못한 맛의 요리들도 군말 없이 먹었던 그들이었다.
오히려 노파의 요리는 그들에게 오래전의 추억을 불러일으키고 있었다.
‘정말 오랜만이군.’
‘그래. 바로 이 맛이야.’
더러운 것도 크게 문제없었다.
반선단의 재료를 구하느라 청해성 전역을 구르며 해 먹었던 것들은 이보다 더했으니까.
정광은 그들과 조금 다른 추억에 잠겨 있었다.
‘쥐새끼들이 부른 포달랍궁(布達拉宮) 땡중들에게 포위됐을 때였지. 놈들의 피에 절은 나무껍질을 벗겨 먹으니까 났던 그 맛이네.’
덕분에 신경 끊고 있던 일이 생각났다.
‘서장(西藏)으로 넘어가서 다 쳐 죽이지 못했었는데 나중에 시간 나면 한번 가야겠군.’
정광의 입가에 미소가 맺혔다.
방립 아래로 보이는 그것은 무척이나 아름다웠다.
정광처럼 방립을 쓴 여인이 그 모습을 유심히 바라보고 있었다.
정광 일행이 떠난 뒤, 그녀는 노파에게 다가가 국수 한 그릇을 주문했다. 잠시 망설이다가 한 입 먹었는데 곧바로 뱉어낼 수밖에 없었다.
“우웩! 이걸 어떻게 먹어!”
깜짝 놀란 노파가 어쩔 줄 몰라 쩔쩔맸다.
“어이구, 이를 어째. 죄송합니다, 아가씨. 정말 죄송합니다.”
“아뇨. 괜찮아요. 아, 이거.”
“네? 헉! 이, 이렇게 많이!”
노파는 손에 쥐어진 은화를 보며 부들부들 떨었다.
“가, 감사합니다. 정말 감사…… 앗! 아, 아가씨?”
방립을 쓴 여인은 어느새 점으로 보일 만큼 멀어지고 있었다.
그쪽은 정광 일행이 간 방향이었다.
* * *
정광 일행은 이곳저곳을 더 돌아다니다가 연화객잔으로 돌아왔다.
“어라? 사람이 많아졌잖아?”
“대부분 무인이군요.”
“우리가 조금 일찍 왔잖습니까. 다른 문파와 세가에서도 올 때가 됐습니다.”
정 자 배 제자들이 주위 사람들을 둘러보며 얘기하는데, 그 사람들도 곤륜파를 보며 수군거리고 있었다.
‘빨리 들어가는 게 좋겠군.’
강호 경험이 많은 허청은 혈기왕성한 정 자 배가 쓸데없는 시비에 휘말릴까 염려됐다.
“뭣들 하느냐? 들어가자.”
“네. 사백.”
하지만 그럴 수 없었다.
호리호리한 체격의 중년인이 허청에게 다가오고 있었다.
“이게 누구신가.”
“오오. 산동악가(山東岳家)의 악 대협이시구려. 오랜만이외다.”
“이십 년은 된 것 같군. 그간 신수가 훤해지셨소. 하하하.”
“허어. 지금 안 어울리는 옷을 입었다고 타박하는 것이오?”
“그럴 리가. 칭찬이오, 칭찬.”
“그 무서운 얼굴로 그러니 아무리 생각해도 칭찬 같지 않소이다.”
“이런. 내가 한 방 먹었군.”
허청이 빙그레 웃으며 그를 잡아끌었다.
“여기서 이럴 게 아니라 들어가서 얘기합시다.”
“좋소. 간만에 밥이나 같이 먹읍시다.”
그들이 객잔으로 들어가자 정 자 배 제자들도 그 뒤를 따랐다.
정광도 발걸음을 옮기려는데 어떤 여자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저기요. 하나 물어봐도 될까요?”
정광은 목소리의 주인을 바라봤다. 적당한 키에 방립을 쓴 여인이었다.
“뭔데요.”
“아까 시장에서 노파의 국수를 먹더군요.”
잠시 말을 끊었던 그녀가 물었다.
“왜 그랬죠?”
“저기요.”
“네?”
“근데 누구세요?”
“아. 내 정신 좀 봐.”
그녀가 쓰고 있던 방립을 벗었다.
지켜보던 남자들은 입을 떡 벌렸다.
주위가 환해지는 듯한 착각과 함께 아름다운 얼굴이 드러났다.
“무례를 저질렀군요. 진주언가(晋州彦家)의 언의진이라 해요. 그쪽은 어떻게 되시죠?”
“정광인데요.”
그녀는 정광의 방립을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벗으라는 시늉을 했다.
“귀찮은데.”
“그럼 내가 보죠, 뭐.”
“네?”
그녀의 신형이 흔들리더니 정광의 앞에 나타났다.
정광은 반사적으로 턱을 후려갈기려다가 멈췄다.
그녀는 허리를 숙여 정광의 얼굴을 올려다보고 있었다.
“뭐 하는 거예요?”
언의진은 대답 없이 휘둥그레진 눈으로 정광을 바라봤다.
이렇게 아름다운 남자는 처음이어서였다.
“……됐어요. 아주 좋아요. 이제 왜 그 국수를 먹었는지 답해주시겠어요?”
“고기 안 들은 국수가 거기밖에 없어서요.”
“단지 그 이유였나요?”
“흐음. 배고파서?”
“그 국수는 배고프다고 먹을 수 있는 게 아니던데…… 어떻게 그걸 먹으면서 웃기까지 한 거죠?”
“아. 그거.”
정광은 별것 아니라는 듯 대답했다.
“피에 절은 나무껍질보단 낫거든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