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곤륜마협-40화 (40/569)

40화

세상을 위하는 길

후위진은 정광의 말을 되뇌었다.

‘수고료라…….’

현 상황을 꿰뚫어 보는 날카로운 말이어서 큰 도움이 됐지만, 말과 실행은 다른 것이었다.

남의 사업장을 법적인 문제 없이 가로채는 노고는 그렇다 치자.

관이 무림에 간섭한다는 얘기를 피하면서 사파 편을 든다는 말까지 안 나오게 하려면 많은 돈과 인맥을 쏟아부어야 했다.

시간이라도 많으면 좀 나으련만 혼란한 상황이 가라앉기 전에 해치워야 하니 배로 힘든 것이다.

하지만 후위진은 정광의 말이 옳다는 걸 인정했다.

그는 길을 제시하는 것이 제일 중요하다는 걸 아는 사람이었다.

어차피 탈탈 털린 참이었고.

“벌써 다 털어가지 않았느냐?”

“쓸 만한 건 하나도 없던데요.”

“아니다. 네가 모르는 거야.”

정광은 챙겼던 것들을 다시 꺼내 보았다.

고풍스러운 손잡이에 한기 어린 날이 달린 비수 두 자루.

금창약과 내상약이 담긴 상자.

마지막으로 기묘한 청록빛을 띤 옥패(玉牌).

‘여기에도 기린을 새겨놓다니.’

말 그대로 옥기린이다.

‘설마 이건 아니겠지.’

정광도 틀릴 때가 있었다.

“그래. 바로 그거다.”

“이게 뭔데요?”

“나를 상징하는 것이지.”

“버려야겠네.”

“안 돼! 그 귀한 걸 왜 버려! 철혈장(鐵血莊) 알지?”

“어라? 거기 출신이에요?”

“외가다. 현 장주께서 내 외조부 되시지.”

정광은 살짝 놀랐다.

철혈장은 철을 귀신처럼 다루는 장인들의 가문이었는데, 전생에서도 들어봤을 정도로 유명한 곳이었다.

“그걸 보이고 내 친우라 말해라. 좋은 병기를 얻을 수 있을 게다.”

“친우 아닌데요.”

“지금부터 맞다.”

“별로 좋을 것 없을 것 같은데.”

“받고 싶으면 그렇게 말해!”

후위진은 열불이 터졌다.

천하의 옥기린께서 친우로 인정한다는데 제가 뭐라고 자꾸 거절한단 말인가!

‘……뭐, 그럴 만도 하군.’

정광은 추측할 수 없는 강자였다.

게다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도통 알 수 없는 이상한 놈이었다.

‘이 녀석은 어떤 길을 걷게 될까?’

천재라 불리는 그로서도 짐작조차 할 수 없었다.

“벌써 해 뜨네요. 갈게요.”

“하나만 꼭 대답해 다오.”

“뭔데요?”

“넌 앞으로 무엇을 할 것이냐?”

정광은 산 아래를 둘러봤다.

남들은 드넓은 평야라 하겠지만 그에겐 너무 좁았다.

“지금은 땅에 매여 있지만…….”

고개를 들어 하늘을 바라봤다.

끝없이 펼쳐진 것이 그의 마음에 찰 만했다.

“하늘처럼 사는 거죠.”

세상과 얽힌 은원을 정리하고, 정해진 선이 없는 하늘처럼 자유롭게 사는 것.

그것이 정광이 갈 길이었다.

하지만 후위진에게는 무림의 하늘, 천하제일인이 되겠다는 선언으로 들렸다.

“하늘이라…….”

하늘을 올려다보며 무심코 중얼거렸던 그는 속으로 생각했다.

‘……대단한 자신감이군. 안 됐지만 그건 내 자리다!’

그나저나 잠깐.

“어, 어딜 가느냐?”

“또 할 말 있어요?”

발걸음을 옮기는 정광에게 후위진이 사정했다.

“비수들은 좀 놓고 가다오!”

* * *

‘철혈장이란 말이지.’

그곳에서 제대로 만들어낸 병기는 돈만으론 살 수 없다고 들었다. 위협이 통하는 자들도 아니어서 더 구하기 힘들다고 했다.

정광이 위협한다면 얘기가 달라지겠지만 어쨌든 그랬다.

‘시간 내서 한번 들러야겠군.’

기분 좋게 객잔으로 돌아오니 그의 침상에 운학이 앉아 있었다. 수혈을 짚어 재웠던 백승무는 그대로 자고 있었는데, 운학은 그 모습을 보며 한숨을 쉬더니 시선을 정광에게 돌렸다.

“몰래 어디를 갔다 오는 게냐?”

정광은 당황하지 않았다.

“아침 수련이요. 사숙조님도 같이 하실래요?”

“아니다. 아니다. 괜히 네게 짐만 되지. 그래, 잘했다. 밥 먹고 출발해야 하니 준비하거라.”

“그럼 가면서 하죠.”

“어허! 괜찮대도!”

운학이 허겁지겁 나가자 정광은 백승무의 수혈을 풀었다.

“사제. 일어나야지.”

“……헉! 죄, 죄송합니다. 제가 먼저 일어났어야 했는데.”

“알면 됐어. 짐 챙기자.”

“네!”

짐이라 할 만한 것도 없었다.

보퉁이를 맨 그들은 일 층으로 내려가 아침을 먹었다.

“자. 이제 그만 가보자.”

“네!”

운학과 곤륜 제자들은 객잔을 나왔다. 말에 오르려는데 이른 아침부터 분주하게 움직이는 이들이 보였다.

‘화산과 종남이 왜?’

그들은 길거리의 사람들에게 이것저것 묻고 있었는데, 귀를 집중해서 들어보니 서안사수와 관계된 일이었다.

‘관에서 매섭게 추궁하는가 보구나. 저런다고 찾을 순 없을 텐데.’

속으로 혀를 차던 운학은 낯익은 얼굴을 발견했다.

사숙조인 자엽에게 혼나서 눈물을 글썽거렸던 화산 제자가 상인을 붙잡고 질문을 던지고 있었다.

“무량수불. 혹 최근에 푸른 도복과 흰 도복을 입은 도사들을 본 적이 없습니까?”

“있습지요.”

“아! 어디서 보셨습니까?”

“지금 도사님들이 그렇게 입고 있는뎁쇼.”

“……거기에 방립을 쓴 걸 더해야 합니다.”

“방립이라. 그런 사람은…… 아!”

고개를 젓던 상인이 자신 있게 말했다.

“있습니다. 있어요.”

“누굽니까? 어디서 본 것입니까?”

“저기 있습니다요.”

다급히 상인이 가리키는 곳을 보자 백색 도복을 입은 도사들이 보였다.

‘잠깐. 곤륜파잖아.’

그런데 그들 중에 정말 방립을 쓴 이가 하나 있는 것 아닌가!

‘아니야. 저들이 그런 일을 할 리가 없지.’

그래서 예를 표하고 돌아서는데.

자엽이 나타나서 전음으로 으르렁거렸다.

-네 이놈! 내 한 명도 빼먹지 말고 확인하라 하지 않았더냐!

“사, 사숙조님. 그게 아니라…….”

-이 멍청한 녀석! 전음으로 해야지! 이렇게 눈치가 없어서야 원.

어제는 눈물이 핑 돌았지만 오늘은 살짝 흘러내렸다.

자엽은 상원을 보며 혀를 끌끌 찬 뒤 운학에게 다가갔다.

“무량수불. 벌써 떠나는 것이오?”

“그렇소이다. 헌데 무엇을 하고 계시오? 본산으로 돌아가셨을 줄 알았건만 아직도 계실 줄은 몰랐소이다.”

“크흠. 악독한 이들이 본문에 누명을 씌웠소. 무고함을 밝히기 위해 그들을 찾는 중이외다.”

“그렇소이까? 그럼 수고하시오.”

“잠깐. 저 방립을 쓴 제자는 누구요?”

“무슨 일로 그러시오?”

“이상해서 그러오. 왜 홀로 저러고 있는지 모르겠구려.”

“그럴 만한 이유가 있소이다.”

자엽의 눈매가 가늘어졌다.

“좀 알고 싶소만.”

운학의 눈매가 찌푸려졌다.

“설마 본문의 제자를 의심하는 것이오?”

“그냥 궁금해서 그러는 것이외다. 왜 과민반응하시오? 설마……?”

“그만. 지금 선을 넘으셨소이다.”

“허어. 누가 넘었는지 모르겠군.”

“지금 시비를 거는 것이오?”

“시비라니. 그대가 의심스럽게 행동하고 있지 않소이까?”

삽시간에 분위기가 차가워졌다.

같은 구파일방이었기에 검을 뽑거나 하는 일은 없었지만 양측 제자들의 표정이 딱딱하게 굳었다.

여기에 구성을 비롯한 종남 제자들도 합세했다.

지켜보던 구경꾼들이 슬금슬금 물러나기 시작했다. 혹시라도 휘말렸다간 어떻게 죽었는지도 모른 채 삼도천을 건널지도 모를 일이었다.

이렇게 뒤숭숭한 분위기였지만 정광만은 태연했다.

“이거 벗으면 돼요?”

“정광아. 가만히 있거라.”

“사숙조님. 보여주고 빨리 가죠. 아니면…….”

운학이 기겁해서 전음을 보냈다.

-그냥 패자고? 안 된다.

-그럼 죽여요? 그건 좀 그런데.

-좀 그런 게 아니라 절대 안 돼!

운학은 한숨을 내쉬며 자엽을 바라봤다.

“후우우. 이런 일로 관계가 상할 수는 없는 일. 확인시켜 드리리다.”

운학이 한발 물러나자 자엽도 머리가 식었다.

‘이런. 너무 몰아붙였구나. 모양새가 영 안 좋게 됐어.’

어제 내내 제형안찰사사(提刑按察使司)에 불려가 시달림을 당하다 보니 신경이 날카로워졌다.

오늘도 또 가야 했기에 어떻게든 범인을 잡고 싶었고, 다급한 마음이 실수를 부른 것이다.

‘아니지. 서안사분이 그렇게 오랫동안 행패를 부려왔어도 이런 일은 없었다. 곤륜이 오자마자 이 사달이 났으니 의심이 드는 게 당연한 일 아닌가.’

자엽은 두 손을 모았다.

“이해해 줘서 고맙소이다. 이렇게까지 할 일은 아니었으나 그만큼 다급해서 그랬소. 내 나중에 다시 한번 사과드리리다.”

사과 같지 않은 사과에 좋게 넘어가려던 운학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대신 뒷일은 화산에서 책임져 주시오.”

“뒷일이라니? 무슨 의미요?”

“보면 알 것이외다.”

“허어. 그렇게 합시다. 방립 하나 벗는 게 뭐 그리 대단한 일이라고.”

“정광아. 들었느냐?”

“네.”

“그렇게 하거라.”

정광이 방립을 벗었다.

모든 사람이 입을 떡 벌렸다.

잠시의 정적 뒤, 구경하던 여인네들이 웅성거리며 모여들었다. 중원에서 손꼽히는 대도시답게 그 수가 보통이 아니었다.

“헉! 뭐, 뭐야!”

화산과 종남은 도가 문파다.

당연히 여인과의 접촉은 금지다.

무공이고 뭐고 다 소용없었다. 다가오는 여인네들에게 밀려 우왕좌왕할 뿐이었다.

“이래서 방립을 쓰는 것이오.”

“이, 이런 말도 안 되는…… 아! 진옥룡!”

“이제 가도 되겠소이까?”

“……그리하시오.”

“그럼 부탁하겠소.”

“……무엇을 말이오?”

운학은 여인네들을 가리켰다.

“약조대로 저들을 막아달란 말이오. 그래야 우리가 갈 수 있지 않겠소?”

자엽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 * *

허청은 백승무를 바라보며 빙그레 웃었다.

“허허. 내가 네 덕을 톡톡히 보는구나.”

“무슨 말씀이신지 모르겠습니다.”

“신경 쓸 것 없다. 네 성취에만 집중하거라.”

서안에서 벗어나 하남성으로 방향을 잡자 정광의 지옥 수련이 다시 시작되었다.

백승무를 가르치는 덕분에 수련에서 빠진 허청은 마냥 행복했다. 자연히 의욕이 솟구쳤고 성심성의껏 백승무를 가르치고 있었다.

그런데.

“……이해 못 하겠느냐?”

“죄송합니다, 사부님. 제자가 우둔하여…….”

“아니다. 다시 한번 해보자꾸나.”

마찬가지였다.

새 제자는 전혀 따라오지 못했다.

“허어…….”

백승무는 부끄럽다 못해 쥐구멍에라도 들어가고 싶었다.

답답해하는 사부를 보자 대역 죄인이라도 된 듯한 기분이 들었다.

그런 그를 보며 허청은 자신을 책망했다.

‘사람마다 자질이 다른 법. 이런 일로 실망감을 보이다니 나는 정말 멀었구나.’

어떡하면 빨리 배우게 할 수 있을까 고민하던 그는 문득 이상한 느낌을 받았다.

‘잠깐. 승무가 정말 느린 건가?’

곰곰이 생각해 보니 아니었다.

‘이럴 수가! 정광 때문이구나!’

백승무는 열을 알려주면 셋 정도는 알았다.

‘그래. 이 정도만 해도 나쁘지 않은 자질이야.’

하지만 첫 번째 제자인 정광은 열을 알려주면 백이나 천을 알았기에 백승무가 답답하게 느껴졌던 것이다.

‘비교하면 안 돼. 승무는 승무다.’

허청은 마음을 비우고 가르쳤다. 간혹 답답하고 허탈할 때도 있었지만 백승무는 이를 악물고 따라왔다.

시간이 지나자 허청의 마음이 변하기 시작했다.

“사, 사부님. 죄송합니다. 어제 알려주신 소청기공(小淸氣功)의 운용에서 막히는 부분이…….”

“오! 잘했다! 어느 부분이냐?”

“……네?”

“뭐가 이해 안 가는지 말해보거라! 이 사부는 너를 가르칠 준비가 되어 있느니라!”

허청의 격한 반응에 백승무는 얼떨떨해졌다.

사실 허청으로서는 당연한 일이었다. 정광이라는 천재를 제자로 두어 가르치는 재미를 못 느꼈었던 그였다. 그런 그에게 백승무라는 범재는 하늘이 내린 최고의 제자였던 것이다.

“자! 이렇게 하는 거다, 제자야!”

“죄송합니다. 아직도 이해가…….”

“으하하! 사람다워서 좋구나! 걱정하지 말고 천천히 따라 해봐라.”

“네, 네! 알겠습니다!”

모두에게 충실한 시간이 흘렀다.

그들은 어느덧 하남성(河南省) 남양(南陽)에 도착했다.

목적지인 무림맹이 있는 곳이었다.

“예정보다 조금 빨리 왔군.”

“차라리 잘됐습니다. 며칠 푹 쉬고 팽가를 만나 일을 논의하시지요.”

“사형. 저도 그게 좋을 것 같습니다.”

운 자 배의 의견이 하나로 모이자 운학이 입을 열었다.

“객잔부터 잡기로 하세. 적당한 곳이 있으면 좋으련만…….”

남양은 하남성의 성도(省都) 개봉(開封)이나 고도(古都) 낙양(洛陽) 같은 곳보다는 작았으나 청해성과는 비교가 안 될 정도로 그 규모가 대단했다.

당연히 운학이 원하는 소박한 객잔은 찾기가 힘들었다.

정광은 눈앞에 있는 화려한 객잔을 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꽤 오래 묵어야 하는데 이 정도는 돼야지. 좋아. 여기로 하자.’

그런데 운학이 말머리를 돌리는 것 아닌가.

“외곽 쪽으로 가는 게 낫겠군. 가자.”

어림도 없는 소리.

“사조님. 그냥 여기에서 묵죠.”

“너무 비싸 보이는구나.”

“돈이 있으면 써야 합니다. 그게 세상을 위하는 길이잖아요.”

“세상을 위한다? 어찌 그렇느냐?”

“돈을 쓰면 다른 이가 돈을 벌죠? 그 사람이 쓰면 또 다른 이가 벌고요. 이렇게 계속 사람들이 이득을 보게 되니 돈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안 쓰는 건 세상에 미안한 일 아닐까요? 사제도 말씀 좀 드려. 내 말 맞지?”

“그, 그렇습니다.”

백승무까지 그렇다 하자 운학이 피식 웃었다.

“아주 좋은 핑계구나. 그래도 너무 과하다.”

“도사 된 이로써 과한 것도 겪어봐야죠. 청빈하게만 살면서 닦는 도가 무슨 소용이겠어요? 과함 속에서도 흔들리지 않는 수양을 쌓는 게 진짜 도사 아닐까요?”

“허어. 거참…….”

운학이 망설이자 정광이 쐐기를 박았다.

“모든 것은 마음에 달린 법. 노숙한다고 생각하고 들어가시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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