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곤륜마협-39화 (39/569)

39화

옥기린(玉麒麟)

“사마련으로 와라. 너는 정파보다 이쪽이 어울려.”

후위진의 말에 정광은 얼굴을 찌푸렸다.

“으음. 조금 그런 감이 있죠.”

“다시 한번 생각해 봐라. 너는…… 뭐? 진심이냐?”

“사실인걸요.”

후위진은 어안이 벙벙했다.

‘이럴 수가! 이렇게 쉽게?’

하지만 정광은 쉬운 남자가 아니었다.

“그래도 그쪽은 싫어요.”

“……어째서?”

정광은 이해가 안 갔다.

‘왜 당연한 걸 묻지?’

귀찮지만 말해줘야 떨어져 나갈 것 같았다.

“어중간하니까요.”

정파는 협을 위해 심신을 단련한다.

사파는 이익을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다.

마교는 힘을 신봉하며 그 힘으로 기분 내키는 대로 행동한다.

전생에 마교의 정점에 섰었고 현생엔 정파에 몸담은 정광이었다. 두 개면 충분했지 이도 저도 아닌 어중간한 사파에까지 가고 싶은 마음은 추호도 없었다.

그런 그의 마음을 알 리가 없는 후위진은 비릿한 미소를 지었다.

“어중간하다? 우리보고 협의 없이 이익만 좇는 소인배라고 하지만 결국엔 네놈들도 똑같은 놈들 아니냐? 겉으론 점잖은 척하면서 뒷구멍으론 재물과 권력을 탐하는 위선자들인 주제에 뭐가 어째?”

“내 말이. 진짜 왜 그러나 몰라요.”

“닥쳐라! 네놈도 똑같은 위선자…… 잠깐. 지금 뭐라 했지?”

“못 들었어요? 그쪽 말이 맞다고 했는데. 아. 우리 곤륜은 빼고요. 진짜 가난하거든요.”

“……나도 곤륜은 그렇다고 들었다.”

“하아아. 속가문파도 없어, 사업을 하는 것도 아니야. 하다못해 돈놀이라도 하면 좋을 텐데 그것도 싫대. 아니지, 그럴 밑천조차 없구나.”

어느새 후위진의 눈빛에 담겨 있던 비웃음은 사라지고 뜨거운 열기가 피어났다.

‘내가 제대로 찾아왔군. 이 녀석, 낮에 봤던 게 진짜였어.’

그의 머릿속에 서안사분을 날려 버리던 정광의 모습이 떠올랐다.

‘좌포정사(左布正使), 안찰사(按察司), 도지휘사(都指揮使), 그런 거물들의 자식들이어서 마음에 안 들어도 지켜볼 수밖에 없었거늘.’

하지만 정광은 망설임 없이 해치웠다. 그놈들은 죽진 않았지만 최소한 일이 년은 침상에 누워서 지내야 하리라.

‘비록 놈들의 정체를 모르고 저지른 일이었다곤 하나 알고 나서도 당당했지.’

게다가 화산과 종남의 짓으로 꾸미는 머리까지!

그에게는 신선한 충격이었다.

강호는 넓고 사람은 많다더니 정파에도 인재가 있었던 것이다.

‘사부가 붙여준 이가 아니라 온전한 내 사람이 필요해. 명문정파의 제자인 녀석을 끌어오면 내 명성도 더 높아질 것이다.’

협의가 있다는 건 의리도 있다는 것. 안심하고 쓸 수 있다.

말보다 손이 먼저 나가는 과감함도 있으니 사파에 제격이다.

배짱도 두둑한 데다 교활하기까지 하니 일은 또 얼마나 잘할 것인가!

후위진의 얼굴에 미소가 떠올랐다.

“역시 너는 우리 쪽이야.”

“싫다니까요.”

“왜!”

“어중간하니까. 자꾸 귀찮게 할래요?”

후위진의 전신에서 살기가 일어났다.

“내가 두 번이나 청했거늘, 감히 거절을 해?”

그는 가지지 못하면 망가뜨리는 사람이었다.

“교육을 좀 해줘야겠구나.”

“나도 그쪽 병을 고쳐줄게요.”

“……병? 그건 또 무슨 소리냐?”

“잘되려나 모르겠네. 어쨌든 조용한 곳으로 가죠. 어르신들 깨면…… 으으. 또 들들 볶일 거거든요.”

“훗. 좋을 대로.”

그들은 작은 야산에 도착해 마주 보고 섰다.

“검을 뽑아라.”

“그쪽은요?”

후위진은 두 주먹을 들어 보이며 미소 지었다.

“남자는 주먹이지.”

“음. 생각보다 증세가 심각한데.”

“무슨 말이냐?”

“말해도 인정 안 할 거예요. 그 병 걸린 사람은 그렇거든요. 나도 맨손으로 하죠.”

“무리하지 마라. 후회할…… 흡!”

정광은 비룡축전(飛龍逐電)을 펼쳐서 다가가 선운비뢰장(仙雲飛雷掌)을 내질렀다. 헛바람을 들이킨 후위진은 피하지 않고 손바닥을 내밀었다.

퍼엉!

“큭!”

정광은 뒤로 한 걸음 물러난 후위진을 칭찬했다.

“제법이네요?”

“젠장! 아무리 방심했기로서니 내가 밀리다니! 너 이 녀석, 반로환동(返老還童)이라도 했느냐?”

아니. 환생했는데.

그렇다고 말해줄 수는 없는 일, 정광은 계속해서 손발을 날렸다.

“헉! 너야말로 제법이구나!”

후위진은 두 눈을 빛내며 정광의 공격을 막았다. 밀리면서도 악착같이 반격을 하곤 했는데 아주 훌륭한 대응이었다.

정광은 속으로 휘파람을 불었다.

‘이 녀석, 나이에 비해 잘하네. 구룡사봉 중 하나라던 팽강휘보다 훨씬 나은데?’

팽강휘는 정광에 의해 무공이 비약적으로 증진됐었다. 그리고 지난 몇 년 동안 더 발전했겠지만 후위진보단 못할 게 분명했다.

무엇보다 한 치도 물러서지 않으려는 투지! 이렇게 싸우는 이는 절대 흔하지 않았다.

칭찬에 인색한 정광이었지만 자신도 모르게 또 칭찬을 했다.

“사파는 안 어울리네요. 마교에서 태어났으면 좋았을 것을.”

“웃기는 소리! 그런 악독한 놈들 틈에서 어찌 살란 말이냐!”

뭐?

정광의 이마에 핏줄이 돋았다.

생각보다 안 악독하거든!

물론 상상을 뛰어넘는 놈들도 많지만 아닌 애들도 조금은 있단 말이다!

정광의 손발에 힘이 들어갔다.

후위진의 손발은 어지러워졌다.

“네 이놈! 힘을 숨기고 있었구나!”

“더 꺼내요?”

“하! 허세 한번 대단하군! 헉!”

이제는 정광의 공격이 제대로 보이지도 않았다.

정신없이 물러나던 후위진은 양손을 소매 속에 넣었다 뺐다. 번뜩이는 빛과 함께 두 개의 비수가 튀어나와 허공을 어지럽게 그었다.

“응? 남자는 주먹이라더니?”

“남자는 비수이기도 하다!”

후위진은 자신이 진짜 남자라는 걸 증명하듯 용감하게 전진했다.

하지만 정광은 어느새 그의 뒤로 돌아가 있었다.

따악!

“커억!”

정광의 주먹에 뒤통수를 맞은 후위진은 정신이 아득해졌다.

‘정신 차려! 이러다 죽는다!’

간신히 정신 줄을 잡았건만 그의 눈에 정광의 주먹이 확대되고 있었다.

후위진은 지체 없이 나려타곤(懶驢打滾)의 수법으로 땅바닥을 뒹굴었다.

만약 이 자리에 정파 무림인이 있었다면 수치도 모르는 행동이라고 비난했을 터. 하지만 후위진은 수치 따위는 모르는 훌륭한 사파인이었고, 정광은 ‘이게 웬 떡이냐!’ 하며 신나게 발길질을 해대고 있었다.

퍽! 뻑! 퍼억!

“억! 악! 으억!”

후위진은 정광의 발에 차여 이리저리 굴러다니면서도 한순간의 기회를 노렸다.

‘허점! 허점이 있을 것이다!’

허점 없는 무인과 무공은 없다.

하지만 그의 경지로는 정광에게서 바늘만 한 틈도 찾을 수 없었다.

‘빌어먹을! 이대로 끝인가!’

순간 그의 머릿속에 정광의 허점이 떠올랐다.

‘아! 콩을 싫어했지!’

그게 마지막 생각이었다.

퍼엉!

* * *

후위진이 정신을 차렸을 때, 정광은 그의 몸을 탈탈 털고 있었다.

“……뭐 하는 거냐?”

“아. 깼어요? 몸은 좀 어때요?”

“……내 몸보다 네가 털어간 것이 더 걱정이다.”

“별것 없던데요. 사마련으로 오라기에 높은 위치에 있는 줄 알았더니 말단 무사인가 봐요?”

“으하하하! 쿨럭. 쿨럭.”

기침하던 그가 씩 웃었다.

“높은 자리의 사람은 아무것도 안 들고 다니는 법이다.”

“아. 그랬지.”

전생의 그도 그랬기에 정광은 바로 이해했다.

“사마련주의 제자쯤 돼요?”

“하아. 그걸 이제야 알다니. 옥기린(玉麒麟)이라는 별호를 들어본 적이 없는 것이냐?”

정광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우와. 스스로 옥기린이래. 말기 중의 말기였구나.’

자신이 진옥룡인 건 당연하지만 후위진이 옥기린인 건 말도 안 된다 생각하는 정광이었다.

“안 부끄러워요?”

“후후. 비록 방심했다지만, 겨우 종이 한 장 차이였지만 진 건 진 거지. 승패는 병가지상사(兵家之常事). 전혀 부끄럽지 않다.”

그의 얼굴은 당당하다 못해 빛이 났다.

정광은 탄복하지 않을 수 없었다.

‘대단하구나! 사제가 이 녀석의 반만 얼굴이 두꺼웠으면 사숙조가 추궁도 안 했을 텐데.’

뭐 그건 그거고.

‘이거 어떻게 처리하지?’

정광의 달라진 눈빛을 본 후위진은 갑자기 온몸에 소름이 돋았다.

“이, 이놈이! 지금 날 죽이려는 것이냐!”

“먼저 궁금한 것부터 물어보고요. 서안은 화산과 종남의 텃밭인데 왜 왔어요?”

“지나가던 길이다.”

“그냥 어디 팔아버려야겠네.”

“……팔아? 나를? 어디에?”

“글쎄요. 음. 사형제가 몇 명이에요?”

“……네 명인데. 왜?”

“사마련은 사파니까 후계 싸움이 좀 노골적이죠? 죽고 죽이고.”

“……!”

정광은 얼굴이 하얗게 질린 후위진을 뜯어보며 중얼거렸다.

“그중 한 명한테 팔면 얼마나 받을 수 있을까?”

“무슨 그런 말도 안 되는 소리를! 얼마 못 받을 거다!”

“아! 사형제들 모아놓고 경매에 부치는 게 낫겠네요.”

“이, 이놈이!”

“마지막으로 물을게요. 서안에 왜 왔어요?”

“…….”

잠시 침묵하던 후위진의 입이 천천히 열렸다.

“말하마. 대신 너도 내 물음에 답해다오.”

“싫은데요.”

“……좋아. 이렇게 하자. 들은 뒤에 답하고 싶으면 하고, 싫으면 안 해도 돼.”

“그래요 그럼.”

후위진은 억지로 상체를 일으켜 앉았다. 코피를 비롯하여 얼굴에 묻은 피를 닦으니 퉁퉁 부은 얼굴이 드러났다.

“젠장. 이빨이 흔들리잖아.”

침을 뱉자 어금니 하나가 튀어나왔다. 그것을 소중히 챙긴 후위진은 정광을 노려봤다.

“너는 내 이빨을 부러뜨린 유일한 무인으로 무림 역사에 남을 거다.”

“더 털어줄까요?”

“어차피 내일이면 알게 될 일이니 말해주지. 나는 사부의 명으로 섬서성에 분타(分舵)를 열기 위해 왔다.”

정광은 어이가 없었다.

“화산과 종남이 버티고 있는 이곳에 발을 들이민다고요?”

“구파일방 중 셋이나 모여 있는 사천성보다는 낫지 않느냐?”

“그렇긴 한데…….”

정광은 전생에 알던 사파의 세력권을 떠올렸다. 정파가 득세하는 북부에 사파나 마인이 아주 없는 건 아니었다.

하지만 대부분 귀주성, 호남성, 강서성, 절강성, 광서성, 광동성, 복건성 등의 남부에 몰려 있었다.

그런데 사마련이 결성되자마자 섬서성에 분타를 만든다는 건.

“정파무림에 인사를 하는 거네요.”

“후후. 바로 알아듣는구나.”

무림맹은 섬서성 바로 옆인 하남성에 있었다. 사마련은 무림맹의 코앞에 비수를 들이밀어 시비를 거는 것이다.

‘이런 자리에 제자를 보냈다?’

정광의 눈에도 괜찮을 정도로 후위진은 뛰어난 인재였다.

그런 그를 무림맹과의 최전선에 밀어 넣은 건 능력을 믿거나, 또는 희생양으로 쓰려는 것이거나 둘 중 하나이리라.

‘사파 습성대로라면…….’

정광은 후위진의 어깨를 다독거리며 위로했다.

“사석(捨石)이었구나. 힘내요.”

“나를 묘수(妙手)로 쓰신 거다.”

“사석 같은데?”

“묘수라니까!”

버럭 소리를 지르면서도 시선을 돌리는 걸 보니 그도 정광과 비슷한 생각인 것 같았다.

‘사마련주가 미는 제자가 있거나 다른 복잡한 문제가 있는가 보네.’

뭐가 됐든 정광이 알 바는 아니었다.

“그래서. 어떻게 하려고요?”

“이번엔 내가 물을 차례야. 너는 누구냐?”

“정광요.”

“그 말이 아니잖아! 네 나이에 나보다 뛰어난 무공을 가질 순 없다. 정말 반로환동한 고수냐?”

환생이라니까.

뭐 어쨌든.

“통과.”

“……뭐?”

“대답 안 한다고요.”

정광은 부들부들 떠는 후위진을 아랑곳하지 않고 아까의 물음을 던졌다.

“앞으로 어떻게 할 건데요?”

“……후우우. 버틸 것이다.”

“련주의 생각이 바뀔 때까지? 너무 잘 버텨도 문제일 텐데.”

“귀신같은 놈. 그래도 다른 방법이 없어.”

“흐음. 어차피 팔아먹지도 못할 판이었네요.”

“꼭 그런 건 아니지. 사형들은 빠르고 확실한 걸 좋아하거든. 사부가 임무를 내렸든 어쨌든 자기들 손으로…… 잠깐.”

어깨를 으쓱하며 중얼거리던 후위진은 눈을 가늘게 떴다.

“너 이제 보니 질문 아닌 척하면서 돌려 묻는 재주가 있군.”

“자기가 대답해 놓고는.”

“이번엔 내 차례다. 어? 어? 어디 가느냐?”

“가서 자려고요.”

“잠깐! 그냥 간다고? 왜?”

“흥미가 없어져서요.”

“흥미? 야! 나는 죽을 판이야!”

“무량수불. 잘 가시고 그곳에선 평안하시길.”

“이놈이! 재주가 아까워서 거둬주려고 했더니 그런 망발을 해?”

“자기 앞가림도 못 하면서 누굴 거둬요?”

뼈를 얻어맞은 후위진은 할 말이 없었다.

정광은 그대로 몸을 날리려다가 우뚝 멈췄다.

“아, 저기요.”

“……?”

“내가 서안사분 팬 거. 화산과 종남 짓이라 증언했다고 했죠?”

“……그렇다만.”

“그 망나니들 가문. 그러니까 섬서성의 높은 분들은 화산과 종남이 자식들을 팼느냐 안 팼느냐 상관없이 들들 볶겠네요.”

정광은 권력을 가진 자들의 속성을 잘 알았다. 그들이라고 부정(父情)이 없는 건 아니지만 부정은 부정, 기회는 기회였다.

“트집거리가 생겼으니 평소 원했던 것을 뜯어내려고 할 게 뻔하네. 관이 무림에 관여치 않는다 해도 화산과 종남이 가진 이권에 군침을 흘리지 않는다면 관리가 아니죠.”

“……그게 그렇게 쉬운 일이겠느냐?”

“그렇긴 하죠. 부정할 수 없는 확실한 증거가 있는 것도 아니니 두 문파가 호구처럼 내줄 리도 없고. 아마 꽤 오랜 시간 동안 밀고 당기겠네요.”

“……대체 무엇을 말하고 싶은 게냐?”

“사마련은 그사이에 서안에서 많은 일을 할 수 있겠죠? 그러려면 일단 관의 높으신 분들을 찾아가야겠지만.”

“……!”

확실히 정광의 말대로였다.

혼란스러운 상황을 이용해 시간을 끌려고만 했던 자신이 부끄러웠다.

후위진의 눈빛이 바뀌고, 머릿속이 맹렬히 회전했다.

‘그래. 관이 아무리 욕심을 낸다 한들 화산과 종남의 것을 노골적으로 뺏을 수는 없다. 관에서 그들을 들쑤시는 사이에 내가 대신 먹으면 돼. 그중 일부분을 관에게 주고 상황을 굳혀 버리는 거다.’

구대문파 중 둘이 아니라, 그 둘의 속가무문이 경영하는 사업장을 먹는 것이다.

칼질은 필요 없다. 사파에는 관의 높으신 분들이 불편해하지 않게, 합법적으로 그런 일을 할 수 있는 전문가들이 수두룩했으니까.

‘피를 안 흘리고 분타의 기반을 단단히 다질 기회야. 사부도 흥미를 느끼고 더 지켜보겠지.’

희미했던 길이 조금씩 뚜렷해지는데.

정광의 손바닥이 눈앞에 나타났다.

“내 덕이니까 수고료 줘요.”

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