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곤륜마협-38화 (38/569)

38화

정광에게 어울리는 곳

운학은 시간이 지날수록 마음이 불편해지고 있었다.

화산파의 장로 자엽과 종남파의 장로 구성 때문이었다.

“생각을 돌릴 순 없는 것이오? 팽가는 승산이 없소이다.”

“결과가 뻔한 일인데도 배를 갈아타지 않는다니. 나중에 섭섭하다 하지 마시길 바라오.”

운학은 자신도 모르게 씁쓸한 미소를 지었다.

‘만악의 근원 진천마가 죽기 전, 무림맹이 제구실을 할 때만 해도 협의가 있는 이들이었거늘…….’

지금은 사문의 이익과 권력을 위해 감언이설과 협박을 늘어놓는 소인배들일 뿐이었다.

그들의 탐욕스러운 얼굴을 보고 있자니 자신의 얼굴은 남에게 어떻게 보일지 궁금해졌다.

‘아직은 괜찮겠지.’

깨끗하다고 할 순 없으나 저렇게까지 변질되진 않았으리라.

‘허허. 오만한 생각을 했구나. 정광에게 한번 물어봐야겠어.’

녀석이라면 솔직하게 말해주리라.

아주 지나칠 정도로 솔직하게.

‘……꼭 물어볼 필요는 없을지도.’

운학은 자리에서 일어나 포권을 했다.

“본문은 팽가와의 약조를 지킬 것이오. 이만 가보겠소이다.”

“크흠. 곤륜의 뜻은 잘 알았소이다. 분명 후회할 것이오.”

“무림맹에서 봅시다. 그땐 어떻게 나올지 궁금하군.”

운학이 묵묵히 발걸음을 옮기려는 그때.

화산파 도사가 뛰어들어 왔다.

“장로님! 큰일 났습니다!”

“갈! 무슨 소란이냐! 허둥대지 말고 무슨 일인지 말해라!”

“서, 서안사분…… 아니, 서안사수가 크게 다쳤습니다!”

청해성이나 감숙성처럼 국경에 있는 성들은 성주가 전권을 틀어쥐고 외세의 침략에 기민하게 대응한다.

하지만 중원의 성들은 달랐는데 승선포정사사(承宣布政使司), 제형안찰사사(提刑按察使司), 도지휘사사(都指揮使司)라는 세 기구를 만들어 각각 재정, 사법, 군정을 담당하게 했다.

앞에서는 서안사수라 불리고 뒤에서는 서안사분이라고 까이는 망나니들은 섬서성을 쥐락펴락하는 이 세 기구의 수장과 대부호의 자제를 말함이었다.

자엽과 구성은 얼굴을 찌푸렸다.

망나니가 망나니인 것엔 이유가 있는 법. 그들의 아비들이 개차반이기에 그랬다.

비위 맞추기 힘든 그 늙은이들이 길길이 날뛸 것을 생각하니 벌써 머리가 아파왔다.

“자기들끼리 싸웠을 리는 없을 테고. 누구와 시비가 붙은 것이냐?”

자엽의 물음에 화산 제자가 조심스럽게 대답했다.

“그, 그것이…… 두 명의 청년 도사라 하는데…….”

화산 제자는 말끝을 흐리며 운학을 힐끔 바라봤다.

운학은 갑자기 온몸에 소름이 끼쳤다. 정광이 빙긋 웃는 모습이 머릿속에 떠오른 탓이다.

‘서, 설마?’

화산 제자와 운학을 번갈아 보던 자엽과 구성은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

‘곤륜파 제자인가? 꼴좋군.’

‘그 더러운 늙은이들에게 어디 한번 시달려 봐라.’

두 사람은 화산 제자에게 동시에 외쳤다.

“이유야 어찌 되었든 무공도 모르는 이들을 그렇게 만들다니! 그것도 섬서성에서!”

“우리를 우습게 본 게야! 어서 말하게! 누군진 모르지만 용서치 않겠다!”

운학은 굳은 얼굴로 화산 제자를 바라봤다.

화산 제자는 두 눈을 질끈 감으며 대답했다.

“본문과 종남파의 제자가 그랬다 합니다!”

“…….”

“…….”

사람은 너무 황당하면 헛웃음이 나오곤 한다.

지금의 자엽과 구성이 그랬다.

“허허. 사손이 무척 재밌는 농을 하는구려.”

“하하. 항상 이런 식으로 모두를 즐겁게 하는 기특한 녀석이외다.”

“하지만 조금 과한 면이 없지 않아 있소.”

“그러게 말이오. 상원아. 이제 그만 말해보거라. 누가 그런 만행을 저질렀느냐?”

화산 제자 상원은 무슨 말이냐는 듯 두 노도사를 바라보더니 굳은 얼굴로 입을 열었다.

“정말 사실이옵니다. 본문과 종남파의 제자가 서안사수를 폭행…….”

“갈! 누가 그런 헛소리를!”

“어떤 놈이냐? 내 당장 주리를 틀 것이야!”

“……바, 바로 옆에서 본 점소이와 손님들이 그랬습니다. 길가에 있던 사람들도 증언했습니다. 본문과 종남처럼 푸른 도복과 백색 도복을 입은 청년 도사 둘이…….”

“이런 고얀! 계속 내 귀를 더럽힐 참이냐?”

“자네는 대체 무슨 생각으로 그런 허튼소리를 하는가?”

상원은 억울했다.

그저 들은 그대로 전하는 것뿐인데 그가 왜 이런 소리를 들어야 하는가.

그때 그의 귀에 자엽의 전음이 들렸다.

-이 멍청한 녀석. 사실이고 아니고를 떠나서 곤륜파의 운학이 옆에 있는데 왜 입을 놀렸느냐?

-그, 그래서 아까 힐끔 눈짓을…….

-전음을 했어야지! 전음!

-눈짓하고 전음을 드리려고 했는데 두 분이 다그치셔서…….

-닥쳐라! 어디서 말대꾸냐!

서러움에 눈물이 핑 돌았다.

‘빌어먹을. 상원아, 울면 안 돼. 원래 이런 늙은이잖아.’

자엽은 호통치고 다그치고 쥐어짜는 걸 성명절기(姓名絶技)로 하는 고약한 늙은이였다.

그 절기를 인정받아 화산에서 중책을 맡고 있지만 밑에 있는 제자들은 하루하루가 죽을 맛이었다.

대충 사정을 짐작한 운학이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허어. 이유야 어찌 되었든 무공도 모르는 이들을 그렇게 만들다니. 그것도 본산이 있는 섬서성에서.”

아까 자엽이 곤륜파의 소행인 줄 알고 상원을 다그칠 때 했던 말을 조금 바꾼 것이었다.

얼굴이 벌게진 자엽과 구성은 운학에게 포권한 뒤 상원을 끌고 나가버렸다.

운학도 즉시 움직였다.

‘화산과 종남이 미치지 않고서야 그런 일을 저지를 리가 없다. 하지만 정광이라면…… 아니지. 그 아이가 조금 손발이 빨리 나오긴 해도 이유도 없이 그랬을 리는 없어.’

그의 생각이 맞았다. 길가의 사람에게 물어보니 서안사분은 쓰레기 중의 쓰레기였다.

곧장 곤륜파가 묵고 있는 객잔으로 뛰어 들어간 그는 다짜고짜 정광부터 찾았다.

“정광아! 정광은 어느 방에 있느냐?”

“아! 사숙조님. 위층 세 번째 방에 있습니다.”

“정우야. 솔직히 말하거라. 정광이 밖에 나가지 않고 안에 있는 게 확실하냐?”

“그렇습니다. 본문의 제자 중 나간 이는 아무도 없습니다.”

운학의 몸이 사라지더니 위층 세 번째 방 앞에 나타났다. 잠시 심호흡을 한 그는 떨리는 손으로 문을 열었다.

방 안을 확인한 그의 두 눈이 휘둥그레졌다.

“사숙조님, 오셨습니까.”

“무슨 일인진 모르지만 몇 번 두들기고 열어주셨으면 좋겠네요.”

백승무와 정광이었다.

운학은 안도의 한숨을 내쉰 뒤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내 마음이 급해 실수했구나. 푹 쉬거라.”

그는 문을 닫고 발걸음을 옮기며 자신을 나무랐다.

‘무량수불. 내 믿음이 이렇게 약해서야 어찌할꼬. 아무리 정광이라 해도 그런 짓을 저지를 리가 없지 않은가.’

오히려 늦게 입문한 백승무를 챙기느라 정신없을 정광이었기에 미안함이 커졌다.

‘잠깐. 그래도 정광 아닌가?’

운학의 신형이 흔들리더니 아까 나왔던 문 앞에 다시 나타났다.

벌컥!

“사, 사숙조님?”

“아아 진짜. 문 좀 두들기시고 열어주시라니까요.”

“……정말 네가 한 게 아니지?”

“뭘요?”

“서안사수라는 청년들을 때린 것 말이다.”

운학의 날카로운 눈빛이 백승무를 향했다. 하얗게 질려 있는 걸 확인한 그는 시선을 다시 정광에게 돌렸다.

“승무를 보니 대충 짐작이 가는구나. 네가 했느냐?”

보통 사람이라면 다 텄구나 싶어 한숨을 내쉬었을 것이다.

하지만 정광은 다른 이유로 한숨을 쉬었다.

‘저 녀석 얼굴을 두껍게 만드는 무공을 전수해 줘야겠군.’

생각해 보니 없었다.

뭐 그럼 만들면 되고.

“그렇게 무섭게 노려보시는데 사제가 어찌 견디겠어요.”

“……정말 그런 짓을 한 적이 없는 게냐?”

“당연히 아니죠. 대체 서안사수가 누구예요?”

정광은 떳떳했다.

그가 때린 건 서안사수라는 훌륭한 청년들이 아니라 서안사분이라는 똥덩어리들이었으니까.

한동안 정광을 노려보던 운학의 표정이 풀렸다.

정광의 눈은 정말 맑고 깨끗했다.

‘허허. 사조 되는 이가 사손을 못 믿어서야 어찌하겠는가.’

운학은 정광의 어깨를 다독였다.

“알았다. 내가 괜한 소리를 했구나. 내려가서 식사하고 푹 쉬거라.”

그가 나가자 백승무가 다급히 전음을 보냈다.

-사형. 정말 이래도 괜찮은 겁니까?

-응.

-사숙조님을 속이다니요. 사형이 서안사수를 때려놓고 아니라 하시면…….

-나는 서안사분은 알아도 그런 애들은 몰라.

-……정정하지요. 서안사분을 때리셨잖습니까?

-내가 언제?

-……네?

-걔들이 내 주먹을 때렸잖아.

-……그, 그런 궤변을…… 하아. 그건 그렇다 치고 화산과 종남의 제자라고 거짓말을 하신 건 사실이잖습니까?

-사제. 나랑 같이 있었던 것 맞아? 왜 자꾸 사실을 호도하는 거야?

정광은 입을 떡 벌린 백승무에게 조곤조곤 따졌다.

-사실대로 곤륜파라고 말하려고 했어. 먼저 구파일방 아느냐고 물었던 건 여기가 섬서성이고 무림인이 아닌 점소이라 본문을 모를까 싶어서 그랬던 거야.

-점소이가 호, 혹시 화산파? 종남파? 이럴 때 왜 곤륜파라고 안 하셨습니까?

-귀찮아서.

백승무는 이상할 정도로 납득이 됐다.

정광이라면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내가 꿈꾸던 곤륜은 이런 게 아니었는데…….’

혼란스러워하는 그에게 정광이 덧붙였다.

-마침 화산과 종남이 마음에 안 들기도 했고.

-……잠깐 봤을 뿐인데 무엇이 그리 마음에 안 드셨습니까?

-이 객잔 말이다. 서안 같은 고도(古都)에 왔는데 이런 허름한 곳에서 자야 한다니 말이 돼?

-그게 대체 무슨 상관이라고…….

-걔들 때문에 여기 묵게 됐잖아.

* * *

밤이 늦자 정광은 침상에 벌렁 드러누웠다.

“으아아. 자자. 사제.”

“……잠이 오십니까?”

“안 졸려? 아. 기녀원에 가자고?”

“……바로 자겠습니다.”

백승무는 눈을 감았다.

오랫동안 뒤척였으나 도저히 잠을 이룰 수가 없었다.

그러다 까무룩 잠이 들었다.

정광이 수혈(睡穴)을 짚어서였다.

평상시대로라면 뒤통수를 때려서 기절시켰겠지만, 운학의 추궁에도 입을 다물고 있었던 게 기특해서 봐준 것이었다.

정광은 자신도 자려다가 창밖을 바라봤다.

그의 눈에 짜증스러운 기색이 떠올랐다.

“아까 그 인간 기운이잖아. 여긴 어떻게 알고 온 거야?”

정광의 몸이 사라지더니 멀리 떨어진 누각의 지붕 위에 나타났다.

그곳에는 서안일미에서 봤던 잘생긴 청년이 서 있었다.

그의 입에 실선이 맺혔다.

“왔느냐?”

“왜 몰래 보는 거예요? 예의 없게.”

“내 너를 위해 그 자리에 있던 수하들을 시켜 화산과 종남이 서안사분을 때렸다고 증언하게 했다. 그런데 너무 쌀쌀맞게 대하는구나.”

“그쪽도 얻는 게 있어서 그런 거 아니에요?”

“그렇긴 하지. 하지만 네가 재밌어서 그런 이유가 제일 커. 요즘 한참 촌구석에서 명성을 떨치는 곤륜파일 줄은 몰랐다.”

“청해성이 시골이긴 하죠.”

“하하하. 역시 재밌어. 네가 진옥룡이지?”

“그런데요. 어떻게 아세요?”

“아. 착각하지 마라. 너는 아직 그렇게까지 안 유명해. 나니까 아는 거다.”

자신의 가슴을 툭툭 친 청년이 정광의 얼굴을 유심히 뜯어봤다.

“나 못지않다더니 꽤 잘생겼군. 흐음. 난형난제(難兄難弟)인가.”

“예의만 없는 줄 알았는데 양심도 없네요.”

“무어라? 네가 나보다 잘났다는 말이냐? 으하하. 진짜 재밌구나.”

청년은 재밌는지 몰라도 정광은 어처구니가 없었다.

‘이놈 이거 그쪽 계열 병자인가?’

자부심이 넘치다 못해 자신의 한계를 가볍게 뛰어넘는 병.

아무리 봐도 그런 것 같았다.

‘치료가 불가능한 건데 안 됐네.’

전생에 천하제일의(天下第一醫)였고 지금도 그런 정광이었다.

그런 그조차 완치를 장담하지 못하는 병이었기에 먼지 한 톨만 한 동정심이 일었다.

전생의 그였다면 일단 패고 봤겠지만 십구 년간 산에 처박혀 곤륜 도사들의 협의에 물들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근데 누구세요?”

“사마련(邪魔聯)의 후위진이다.”

“사마련? 사흑맹(邪黑盟)이 사파와 중원 마인을 끌어모아 만든 그거요?”

“그래. 알고 있었구나.”

“몇 년 전에 만들려고 한다고 들었었죠.”

“후후. 얼마 전에 결성되었다.”

“따끈따끈하네요. 근데 왜 나를 찾아왔어요?”

“한 가지 제안을 하려고.”

“뭐죠?”

후위진의 표정이 진지해졌다.

“사마련으로 와라. 너는 정파보다 이쪽이 어울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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