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7화
주즉시공(酒卽是空)
정광이 화산파를 보며 어이없어하고 있을 때, 화산파는 곤륜파를 보며 황당해하고 있었다.
‘무슨 도복이 저렇게 고급스럽지?’
‘청옥으로 도관을 만들다니! 돈이 넘쳐나는가!’
‘검자루와 검집이 황금빛이잖아! 설마 순금?’
그럴 리가. 도금이었다.
청해성주가 아무리 허세가 넘쳐도 돈을 그렇게 쓸 정도로 바보는 아니었다.
화산파 도사들의 수장 자엽은 눈을 가늘게 떴다.
‘풍기는 기운은 곤륜파와 흡사한 것 같은데…… 아!’
마침 아는 얼굴이 있었다.
“무량수불. 운학 도우를 여기서 뵙는구려.”
“오랜만이오. 이십 년은 된 것 같소.”
“하하하. 하마터면 못 알아볼 뻔했소이다. 신수가 훤해졌소?”
운학은 자신의 차림새를 내려다보며 쓴웃음 지었다.
세상에 이렇게 입고 다니는 도사가 어디 있겠는가.
‘그래서 화산파가 경계했었군.’
농을 던지려는데 객잔에서 흰색 도복을 입은 자들이 나왔다.
‘종남파(終南派)?’
한 노도사가 운학을 보고 흠칫하더니 너스레를 떨었다.
“어허! 곤륜의 고고한 학이 속세에 내려오셨군. 그간 강녕하셨소?”
“덕분에 잘 있소이다. 구성 도우께서는 어떻소?”
“할 일이 없어 밥만 축내며 이리저리 돌아다니고 있소이다.”
“화산과 종남이 이리도 친한 줄은 몰랐구려.”
“하하. 사해(四海)가 동도(同道)이거늘 같은 성에 있는 우리로선 당연한 일 아니오?”
운학은 내심 고개를 가로저었다.
‘뭔가 있군.’
호랑이 두 마리가 한 산에서 살 수 없듯이, 두 거대 문파가 한 성에서 사이좋게 지낼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무림맹 일로 손을 잡은 건가?’
놀랄 만한 일이었으나 운학에게는 별 의미가 없었다.
“반가웠소. 숙소를 잡아야 하니 다음에 또 봅시다.”
자엽과 구성이 시선을 교환하더니 운학을 잡아끌었다.
“무슨 그런 섭섭한 소리를. 다관(茶館)에서 차나 한잔합시다.”
“숙소라면 이 객잔이 좋소. 본문의 속가 문파에서 운영하는 곳인데 무척 조용하고 깨끗하다오.”
“폐를 끼치고 싶지는 않소이다.”
“허어. 섬서성에 오셨는데 이리 보내면 강호동도들이 무어라 하겠소?”
“우리를 손가락질할 게 뻔하니 체면을 세워주시면 고맙겠소이다.”
운학은 속으로 실소를 흘렸다.
‘이것저것 떠보고 설득하려는 거군. 본문의 전력도 살펴보고.’
의도가 뻔히 보였지만 틀린 말은 아니었기에 승낙할 수밖에 없었다.
무엇보다 운학은 그들이 어떻게 나오든 상대할 자신이 있었다.
“그럼 신세를 지겠소이다.”
“하하하. 고맙소. 자, 갑시다.”
* * *
백승무는 창밖을 내다본 뒤 한숨을 쉬었다.
“화산파와 종남파 제자가 객잔 주위에 서 있군요. 우리를 살펴보는 것 같습니다.”
“응.”
“사형은 신경 쓰이지 않습니까?”
“별로.”
태평스럽게 침상에 누워 있는 정광을 보며 백승무는 고개를 저었다.
“저들이 무슨 일을 꾸미는 것 같은데 어찌 그리 무덤덤하십니까.”
“대단치 않은 일이니까.”
“네? 그걸 어떻게?”
정광은 백승무를 보며 혀를 찼다.
꽤 똘똘하다 생각했거늘 완전 허당 아닌가.
“사제 말은 평소 사이가 좋지 않던 두 문파가 회동하는 듯한 모습을 보였다, 이건 뭔가 큰일을 벌이려는 것이다, 이런 의미지?”
“당연한 것 아닙니까?”
“응. 아니야.”
“네? 왜요?”
“중요한 일이라면 비밀스럽게 해야지, 사람 미어터지는 성도에서 만나겠냐?”
“나무를 숨기려면 숲에, 사람을 숨기려면 사람 속에 숨기는 것 아닙니까?”
정광은 누운 채로 고개를 저었다.
“말도 안 되는 소리. 사람을 숨기려면 잘게 썰어서 나눠 묻어야지.”
“……잘 못 들었습니다?”
“어쨌든 저들이 서안에서 만났다는 건 남이 봐도 상관없다는 의미야.”
“그 말씀은……?”
“일이 이미 끝났다는 거지.”
아마도 맹주 선출 건일 것이다.
곤륜파를 붙잡은 건 자신들의 세를 과시해서 배를 바꿔 타도록 바람을 넣으려는 것이고.
하다못해 곤륜이 이기기 힘든 싸움이라는 걸 보여줘서 하북팽가를 지원하는 데 전력을 다하지 않도록 하려는 의도일 게 뻔했다.
‘사숙조가 넘어갈 리가 없지.’
정광은 운학을 떠올리며 피식 웃다가 벌떡 일어섰다.
“아차. 지금 이게 중요한 게 아니지. 옷 갈아입자.”
“그 평범한 도복들은 뭡니까?”
“나가서 놀려면 이래야지.”
“놀다니요! 근데 변복을 하려면 평복으로 하시지 왜 또 도복입니까?”
“하아. 이번 생에는…… 아니, 평생 도복만 입다 보니 다른 옷은 못 입겠더라. 그러고 보니 억울하네. 너도 입어.”
정광이 강제로 도복을 입히자 백승무는 버둥거리며 입을 놀렸다.
“안 됩니다! 이 판국에 어딜 갑니까? 화산파와 종남파가 지켜보고 있습니다.”
“그게 뭐? 사제는 내 가르침을 벌써 잊은 거야?”
백승무는 머리가 아파 왔다.
‘날 가르쳤다고? 뭘?’
아무리 생각해 봐도 사기, 갈취, 협박 정도밖에 안 떠올랐다.
“어떤 걸 말씀하시는 건지……?”
이어지는 정광의 대답에 백승무는 모든 걸 내려놨다.
“안 들키면 된다니까.”
* * *
백승무는 눈앞에 있는 삼 층 건물을 멍하니 바라봤다.
‘서안일미(西安一味)’라고 쓰여 있는 큰 현판이 인상적이었다.
“기녀원이 아니어서 실망했어? 거긴 저녁에 가고 일단 점심부터 먹자.”
“……여기까지 어떻게 왔는지 영문을 몰라서 그렇습니다.”
“내가 사제 업고 뛰어왔잖아.”
“……그러니까 그걸 모르겠다는 말입니다.”
정광의 등에 업히자마자 시야가 확대되었다. 세상이 미친 속도로 밀려났고 그는 결국 정신을 잃어버렸다.
정광이 찰싹찰싹 뺨을 때려서 눈을 떠보니 이곳이었던 것이다.
“뭐 해? 들어가자.”
문 앞에 서 있던 점소이가 공손히 허리를 숙이며 인사했다.
“서안일미에 오신 걸 환영합니다.”
“지나가다 현판 보고 왔어요. 서안에서 제일 맛있는 요리를 하는 거 맞나요?”
“가격은 좀 비싸지만 맛만큼은 최고라 자부하고 있습니다.”
“기대되네. 우선 여기요.”
정광이 전표를 꺼내 내밀자 넋을 잃고 있던 백승무가 귀신처럼 낚아챘다.
“사형! 너무 과합니다!”
“응? 그런가?”
“하아아. 돈은 제가 쓸게요. 사형처럼 하다가는 금방 길거리에 나앉습니다.”
“그래, 그럼.”
백승무는 은자를 꺼내서 점소이의 손에 쥐여주었다.
“안내를 부탁하네.”
전표에 적힌 금액에 경악했던 점소이는 간신히 정신을 차렸다.
‘재신(財神)이 왔구나!’
진정한 신분은 전표로 말하는 법. 평범한 도복에 허름한 방립을 쓰고 있었으나 보통 손님들이 아니었다.
점소이는 더없이 공손한 모습으로 그들을 안내했다.
“감사합니다. 이쪽으로 오시지요. 시간이 일러 삼 층에는 손님이 거의 없으니 편하게 즐기실 수 있을 겁니다.”
잠시 뒤, 정광과 백승무는 삼 층에 올라 경치 좋은 창가 자리에 앉게 되었다. 조금 떨어진 곳에 한 무리의 손님들이 있었는데, 그중 눈이 번쩍 뜨일 만큼 잘생긴 청년이 정광을 노려보고 있었다.
정광은 고개를 갸웃했다.
‘저 못생긴 건 뭐야? 분위기가 칙칙한 게 그쪽 놈인데.’
소란을 일으키긴 싫어서 ‘눈 깔아 이 새끼야’라고 말하려는데 점소이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대인들께 여쭙니다. 어떻게 준비해 올리면 되겠습니까?”
“자신 있는 요리로 몇 개…….”
“사제, 내가 주문할게. 삼피사(三皮絲), 내탕과자어(奶湯鍋子魚), 호로계(葫蘆鷄), 구기돈은이(枸杞炖銀耳), 양금전발채(釀金錢發菜), 수정연채병(水晶蓮菜餠), 일단 이렇게 주세요. 술은 서봉주(西鳳酒) 한 병이요. 그게 제일 비싼 놈 맞죠?”
“……!”
잠시의 정적 뒤, 점소이가 두 손을 비비며 굽신거렸다.
“역시 대인이십니다. 서안을 대표하는 요리와 명주를 전부 알고 계시군요. 숙수에게 특별히 맛있게 요리하라고 전하겠습니다.”
백승무는 정신이 나간 상태에서도 점소이에게 은자를 주었다. 신이 난 점소이가 바람처럼 사라지자 그의 눈에 초점이 돌아왔다.
“사형! 그 많은 것들을 대체 어떻게 아시는 겁니까?”
“책에서 봤는데.”
“이름만 들어도 고기투성이네요! 게다가 술이라니요!”
-쉿. 다른 사람들도 있는데 전음으로 말해야지.
-아. 죄송합니다. 제가 실수를…… 어쨌든 대답해 주세요!
-사제는 아직 도사 아니잖아. 기분 좋게 먹고 마셔.
-……사형은요?
-나도 같이 즐겨야지.
-……저도 이제 모르겠습니다.
요리는 맛있었다.
술도 아주 훌륭했다.
정광이 만족스러운 얼굴로 술잔을 연신 비우자 백승무가 걱정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사형. 취하시면 안 됩니다.
-난 안 취해.
-무슨 도사가 술까지 셉니까? 술 냄새는 또 어쩌시려고요.
-다 날리면 되지.
-네? 그런 게 가능해요?
-주즉시공(酒卽是空). 술이 곧 공이 되는 신공이 있어. 취기도 주향도 다 돼. 사형들께는 예전에 가르쳐 드렸는데 너도 배워볼래?
-……사제 된 이로서 사형의 소중한 가르침을 외면할 순 없죠. 어떻게 하는 겁니까?
정광은 구결을 알려준 뒤, 운기해 보라고 말했다.
-……해봤는데 잘 모르겠군요. 정말 효과가 있는 겁니까?
-술을 마신 뒤에 해야지.
-아! 제 생각이 짧았습니다.
백승무는 술을 몇 잔 마신 뒤 정광의 가르침대로 운기를 했다.
“헉! 진짜 되네!”
-전음! 그럼 거짓말인 줄 알았냐?
-아, 아닙니다. 신기해서 그럽니다.
-이제 마음껏 마셔. 언제 또 이런 기회가 있을지 모르니까.
-네! 사형!
한참 부어라 마셔라 하는데 점소이가 손님들과 함께 올라왔다.
네 명의 청년들이었는데 하나같이 차림새가 부유해 보였다.
‘너무 과해서 천박할 정도군.’
오만한 표정과 거들먹거리는 걸음걸이까지. 딱 봐도 행세깨나 하는 집안의 파락호들 아닌가.
백승무는 그들에게서 시선을 돌렸다. 엮여봐야 좋을 게 없어서였다.
하지만 그들이 시비를 걸었다.
“허어. 서안일미도 다 됐군. 삼 층에 저런 궁핍한 도사들을 받아? 어라? 고기랑 술? 이거 완전 사이비 아니야?”
“이봐, 점소이. 밥맛 떨어지니 빨리 쫓아내. 우리가 저 자리에 앉겠다.”
“고, 공자님. 손님께 그럴 수는 없습니다. 죄송합니다만 다른 자리에 앉으시지요.”
“뭐? 지금 안 된다는 거야?”
“제발 부탁드립니다. 다른 자리도 좋으니…… 어이쿠!”
점소이가 파락호의 주먹에 얻어맞고 나뒹굴었다.
파락호들은 점소이를 밟으며 욕설을 내뱉었다.
“이 자식이 감히 누구한테 말대꾸를!”
“우린 서안사수(西安四秀)다!”
“천한 것들은 걸핏하면 이렇게 기어오른다니까!”
“기분 잡쳤군. 죽어 이 새끼야!”
“여기요! 서봉주 한 병 더요!”
“내 말이! 서봉주 한 병 더…… 뭐?”
순간 장내가 얼어붙었다.
파락호들의 시선이 창가 쪽으로 향했다. 피를 철철 흘리고 있는 점소이도 마찬가지였다. 백승무도 입을 떡 벌리고 정광을 바라봤다.
“사형! 지금 뭐 하시는 겁니까!”
“응? 술 더 안 마실 거야?”
“그 말이 아니잖아요!”
사형제가 옥신각신하는 사이, 파락호들이 탁자를 둘러쌌다. 그중 기골이 장대한 청년이 정광을 노려보며 물었다.
“방금 네놈이 말한 게냐?”
백승무가 한숨을 쉬며 상황을 정리하려는 그 순간.
빠바바박!
“끄아아악!”
파락호들이 창밖으로 날아가 길바닥에 처박혔다.
“으아악! 사람이 떨어졌다!”
“어머! 이를 어째!”
놀라서 당황하던 사람들은 파락호들의 얼굴을 보자 쥐죽은 듯 조용해졌다.
‘서안사분(西安四糞)이잖아!’
‘똥 같은 짓만 저지르면서도 떵떵거리던 놈들이 이런 꼴이 될 줄이야!’
사람들의 눈에 희열의 빛이 떠올랐다.
‘이 개새끼들! 꼴좋다!’
‘그리 행패를 부리더니 천벌을 받았구나!’
‘어? 그런데 왜 입안에 콩이 가득하지?’
사람들은 고개를 들어 서안일미 삼 층을 바라봤다. 그곳에는 방립을 눌러쓴 두 사내가 아래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하지만 곧 그들은 다시 창 안으로 사라졌다.
백승무가 정광의 소맷자락을 끌어당긴 것이었다.
“사형! 콩은 또 언제 쑤셔 넣으셨습니까?”
“본문의 제자는 음식을 함부로 버리면 안 돼.”
“그런 문제가 아니잖습니까! 그냥 좀 드세요!”
“콩은 싫단 말이야! 음식 식겠다. 빨리 먹자.”
“그럴까요? 아!”
정광에게 말려들어 잠시 정신이 나갔던 백승무가 두 눈을 부릅떴다.
“이제 어떡하실 겁니까?”
“뭘 어떡해? 나쁜 놈들을 손봐줬을 뿐이야. 다들 좋아하잖아.”
“아니, 그렇긴 하지만…….”
“걱정하지 마. 내가 한 일은 내가 책임지니까.”
정광은 아직도 쓰러져 있는 점소이의 혈도를 눌러 지혈을 했다. 직접 만든 금창약을 바르니 금세 부기가 가라앉았다.
점소이는 바닥에 쓰러지듯 엎어지며 울부짖었다.
“대인! 저들이 저 꼴이 났으니 가문의 사람들이 나와 난리를 칠 겁니다! 이제 저는 어쩌면 좋습니까? 제발 살려주십시오!”
“불만 있으면 나한테 오라고 하세요.”
“……네?”
“그럼 됐죠?”
점소이가 침을 꿀꺽 삼킨 후 조심스럽게 물었다.
“실례지만 뉘신지……?”
정광이 빙긋 웃으며 대답했다.
“무량수불. 구파일방 알아요?”
점소이의 눈이 찢어질 듯 커졌다.
지켜보던 잘생긴 청년의 눈은 호기심으로 물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