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6화
기인이사(奇人異士)
성주의 집무실에서 나온 정광은 황웅과 마주 앉았다.
“술 안 마셨어? 멀쩡하네.”
“……마시면 죽여 버린다고 하셨잖습니까.”
“죽더라도 마실 줄 알았지.”
“……끄응.”
“얘기는 잘됐어. 네가 의용군 수장이다. 간단하게 의용단주.”
“……짧으면 일 년, 길면 이 년입니까?”
“응. 그 정도면 중앙에서도 책잡지 않을 거야. 의용군이 생겼었다는 게 중요하니까.”
황웅은 불만이 가득한 표정을 짓다가 입을 열었다.
“다시 뵈면 무공 꼭 가르쳐 주시는 겁니다, 사부.”
퍼억!
“어억!”
“이게 미쳤나. 뭐? 사부?”
“으윽. 그, 그럼 뭐라고 불러야 합니까? 아! 스승님? 아악!”
정광은 한참 동안 황웅을 패다가 손을 털었다.
“손맛만 버렸네. 그따위 말 또 꺼내면 검으로 벤다.”
“히끅!”
“사고 치지 말고 알려준 무공이나 갈고닦아. 남이 보고 의심할 일 없으니까 마음껏 쓰고.”
“아, 알겠습니다.”
“내공 생각 안 하고 막 쓰다간 금방 뻗는다. 네가 귀신이 되어 찾아오면 무공을 알려줄 수도 없어.”
“흥. 그깟 오랑캐 놈들한테 제가 당하겠습니까?”
“어쭈. 이게 전장을 우습게 보네. 몽고 기마대가 만만하냐? 금방 화살 꼬치 되겠군.”
“……그렇게 센가요?”
“죽어라 수련해. 그래야 산다.”
황웅의 표정이 심각해졌다.
정광은 말도 안 되는 고수였다.
그런 그가 이렇게까지 말한다는 건 몽고군이 정말 강하다는 얘기였다.
‘그래 봤자 이 인간에 비하면 별것 아니겠지. 정파 주제에 마공까지 알잖아.’
어째서인지 궁금했지만 물어볼 생각 따위는 없었다.
‘그랬다간 죽는다. 발설하면 죽는 것보다 더한 고통을 받는다.’
황웅이 아무리 둔하다 해도 그 정도는 알았다.
‘어차피 다른 길이 없어.’
정광에게 무공을 배워서 더 강해지는 것이 그의 운명일지도 몰랐다.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정광은 그 말을 믿었다.
무공이란 그 무엇보다 중독성이 강하고 귀중한 것이다. 황웅은 이미 정광의 손바닥 안에 있었다.
전생에 합밀오가를 비롯해 몇몇 이들에게 무공을 내려준 것도 다 그런 이유였다.
“좋아. 애들 모아.”
잠시 후, 무림의용군이 모였다.
하나같이 불만이 가득했지만 정광 앞이라 애써 무덤덤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다들 도망가고 싶죠?”
“…….”
“어라? 진짜 그런가?”
정광이 두 손을 매만지자 여기저기서 아니라는 비명이 터져 나왔다.
“도망가도 괜찮아요. 나중에 유람 삼아 찾아가면 되니까. 그때 보죠.”
모두 입을 떡 벌렸다.
세상이 얼마나 넓은데 뭐가 어째?
우리는 천 명이나 되는데 어떻게?
“의용군은 의용단이라고 불릴 거예요. 관군과는 여러모로 다른 점이 있어서 별동대로 편성된 거죠. 편제를 설명할게요.”
단주는 황웅, 군사는 서도한, 부단주는 쌍도비호와 지재원이었다.
천여 명을 열 개의 백인대로 나누고 각각의 백인대는 열 개의 십인대로 나뉘었다.
“지금부터 호명하는 분들은 백인장입니다.”
정광이 열 명을 바라보며 이름을 불렀다. 그들은 얼떨떨한 얼굴로 앞으로 나왔다.
“다음은 십인장이요.”
정광이 백 명을 바라보며 이름을 불렀다. 그들은 경악한 얼굴로 앞으로 나왔다.
‘뭐 이런 괴물이 다 있어?’
‘한두 명도 아니고 어떻게 얼굴과 이름을 다 알지?’
그게 끝이 아니었다.
정광은 나머지 사람들의 얼굴을 하나하나 바라보며 이름을 불렀다. 수가 너무 많아 중간에 그만뒀지만, 사람들은 모두 얼어붙어 숨소리조차 제대로 낼 수 없었다.
“출신이나 고향까지 말하면 너무 오래 걸리니까 여기까지만 할게요.”
“……!”
얼굴과 이름뿐만이 아니라 그런 것까지 다 외우고 있다고?
다른 이가 그랬다면 코웃음 쳤겠지만 정광은 그러고도 남을 괴물이었다.
“여러분은 일시적이지만 군에 입대한 거예요. 관에서 모든 것을 기록에 남긴다는 거죠. 만약 탈영한다, 또는 전투에서 도망만 다녔다?”
모두의 목젖이 크게 움직였다.
“연대책임입니다. 그 사람이 속한 십인대와 백인대가 책임을 지는 거죠. 내가 어떻게 할지 알고 싶어요?”
절대 알고 싶지 않았다.
“아닙니다!”
“여러분을 믿어도 될까요?”
모두 한마음이 되어 외쳤다.
“믿어주십시오!”
“우리가 그렇게 신뢰를 쌓은 사이는 아니잖아요. 만난 지 얼마나 됐다고.”
다들 멈칫했지만 정광을 제일 오래 겪어온 지재원이 피를 토하듯 외쳤다.
“저는 오래됐습니다!”
쌍도비호가 비호처럼 뛰어들었다.
“세월로 따지면 제가 제일 오래되었다고 자부합니다!”
다음은 눈치 빠른 서도한이었다.
“신뢰는 세월이 아니라 마음으로 쌓이는 것이지요!”
여기저기서 고함이 터져 나왔다.
믿어달라고, 절대 기대를 배반하지 않겠다는 말들이었다.
피식 웃은 정광이 두 손을 모아 포권했다.
“여러분의 무운을 빌게요.”
* * *
성주는 경악했다.
말이 의용군이지 언제라도 난동을 부릴 것 같은 이들이었거늘, 삽시간에 십 년은 조련받은 정병처럼 칼날 같은 군기를 보이다니!
“이 정도면 됐죠?”
“훌륭하네!”
“앞으로도 그럴 거니 걱정하지 마세요. 문제 있으면 무림맹으로 서신 보내시고요.”
“고맙네! 정말 고마워!”
“뭘요. 이제 계산하셔야죠?”
“…….”
“다른 성으로 갈까요?”
“하하! 역시 조카는 영웅답게 시원시원하군!”
“제가 왜 조카예요?”
“청해성주 그 친구가 내 친구야! 그러니 내게도 조카지.”
“뭐 그러세요. 근데 에누리는 없어요.”
“크흑…….”
정광과 곤륜파 도사들은 성대한 배웅을 받으며 성문을 나섰다. 그들은 모두 말을 타고 있었는데 정광이 성과급이라며 강탈하듯 받아낸 것들이었다.
덕분에 그들은 허비한 시간을 벌충할 만큼 빠르게 이동할 수 있었다.
“허어. 벌써 섬서성(陝西省)이군.”
“빨리 온 건 좋은데 아직도 아픕니다.”
“사제도 그런가? 허허. 나도 영 익숙해지질 않는다네.”
곤륜파는 도사답게 걷는 걸 선호했다. 조금 더 솔직히 말하자면 말을 키우거나 빌릴 돈이 없었다.
일행 중에 말을 탈 줄 아는 이는 정광과 백승무뿐이었다. 정광도 전생에서나 탔었기에 사타구니가 쓸려서 아픈 건 마찬가지였다.
‘이 부분도 도마뱀 내의로 만들었으면 좋았을 텐데.’
무각사룡을 생각하자 백진환 부부가 생각났고, 연이어 공동파가 떠올랐다.
자신들의 앞마당을 지나고 있으니 나타나서 깽판을 부릴 만도 한데 그렇게까지 멍청하지는 않은 것 같았다.
곤륜파는 지금 모든 이들의 주목을 받고 있었다. 지금 일을 벌였다간 걷잡을 수 없이 커질 것이 명백했다.
‘명분 있는 일로 싸웠다가 깨진 것도 아니고, 본거지에서 그 일을 꺼내봐야 그게 무슨 망신이야. 무림맹에서나 다른 트집을 잡아서 덤빌 것 같은데.’
분명 공동파의 편을 드는 놈들도 있을 것이다.
‘많으면 많을수록 좋지.’
그날이 기대되는 정광이었다.
“사형. 무슨 생각을 하시길래 그리 웃으십니까?”
“내가 웃었어?”
“네. 보기 드물 정도로요.”
“흐음. 내가 많이 쌓였었나 보네.”
“쌓이다니요?”
“그런 게 있어.”
백승무의 표정이 묘해졌다.
정광은 바로 뒤통수를 때렸다.
빠악!
“컥!”
“사제. 도사가 그런 생각을 하면 안 되지.”
“제, 제가 무슨 생각을 했다고 그러십니까?”
정광은 벌게진 얼굴로 항변하는 백승무에게 전음을 보냈다.
-전에 말했던 거. 시험해 볼까?
“……!”
색계를 어기면 어떤 처벌을 받는지 궁금하니 시켜보겠다는 말이었다.
-……절 죽이시려는 겁니까?
-사제는 아직 도호(道號)도 없잖아.
도호는 곤륜에 돌아가서 제대로 된 의식을 해야지만 받을 수 있었다.
-사제는 지금 속인(俗人)인 거지. 진산 제자이긴 한데 아직 도사가 아닌 존재. 이해했어?
-아무리 그래도…….
-아주 싫다고는 안 하네?
-절대 안 됩니다! 파문당해요!
-해봐야 알지.
-사형!
정광은 내심 혀를 찼다.
‘사내가 이렇게 배포가 없어서야.’
한심하지만 어쩌랴. 사제인 것을.
배포를 키워주는 것 정도는 사형 된 이로써 해줄 수 있었다.
‘술을 먹여야겠군.’
술 생각을 하자 고기가 떠올랐다.
‘섬서성 요리는 어떤 맛일까?’
전생에 신강성(新疆省)에서 신처럼 군림했었지만 중원으로 나와본 적은 없었다.
이번 생에는 각지의 유명한 요리를 모두 맛볼 계획이었다.
한편, 정광과 백승무가 전음을 나누는 기색을 알아챈 노도사들은 빙그레 웃었다.
막내 생활만 19년을 해온 정광이 새로 생긴 사제와 돈독하게 지내는 것으로 오해해서였다.
객잔에 도착하자 운 자 배와 허 자 배 도사들이 모였다.
앞으로의 일정에 대한 논의가 끝나자 운학이 입을 열었다.
“급한 일은 대충 마무리 지었으니 미루어두었던 일을 얘기해 보세.”
백승무에 대한 이야기였다.
“상재가 뛰어나다지만 본문과는 별 상관이 없으니 젖혀두겠네. 그간 지켜본바 조금 융통성이 없긴 하나 협의가 있고 성실한 것 같더군.”
도사들이 모두 고개를 끄덕였다.
“나이가 있으니 더 늦기 전에 무공을 배우게 하는 게 좋을 터. 혹 원하는 이가 있는가?”
여덟 명의 허 자 배 도사들은 백승무를 떠올렸다. 운학의 말대로 좋은 심성을 가진 아이였으나 다른 제자들에 비해 처지는 자질이 마음에 걸렸다.
‘너무 늦게 입문했어. 제대로 이끌어줄 자신이 없구나.’
모두 대답이 없자 운학이 허직에게 물었다.
“허직. 자네는 어떤가?”
“헉! 저, 저 말씀입니까?”
“그래. 심성이 닮은 점이 있어. 자네라면 잘 키울 것 같아 하는 말일세.”
허직의 표정이 복잡해졌다. 안 그래도 누이에게 미안한 점이 있어 그럴까 생각도 해봤지만 큰 문제가 있었다.
“승무는 제 질자(姪子)입니다.”
“자네는 세속의 연을 끊은 몸이거늘 그게 무슨 문제인가?”
“제 수양이 부족하여 그 아이를 공평하게 대할 자신이 없습니다.”
“으음. 그렇다면 어쩔 수 없지.”
운 자 배 도사들이 고개를 주억거렸다.
허직이 스스로의 부족함을 알고 핏줄 섞인 아이를 편애하게 될까 봐 걱정하는데 더 뭐라 하겠는가.
“그럼 어쩐다…… 아!”
운학의 시선이 허청에게 향했다.
“자네가 맡게.”
“네? 제가 말입니까?”
“그래. 자네는 허 자 배 대사형이면서도 정광 한 명만 거두지 않았나? 그것도 사제들보다 늦게.”
“그렇긴 합니다만…….”
“자네라면 그 아이를 잘 가르칠 수 있을 게야. 그리고 자네에게도 큰 도움이 될 걸세. 어떤가?”
허청이 고민하는데 정광의 전음이 들려왔다.
-사부님, 받아들이세요.
-허어. 엿듣고 있었더냐?
-지금 그게 중요한 게 아니잖아요. 꼭 받아주세요. 네?
허청은 내심 웃음을 흘렸다.
어릴 적 무공을 가르쳐 달라고 떼를 썼던 것 외에는 부탁이란 걸 모르던 제자였다. 그런 녀석이 이러는 걸 보니 백승무와 정이 들어도 단단히 들은 것 같았다.
‘더 가까이 지내고 싶겠지. 그래, 내 너를 위해 뭘 못하겠느냐?’
더 가까이 지내며 제대로 부려먹기 위함이었지만 허청이 알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사숙의 말씀에 따르겠습니다.”
“좋아. 누가 나가서 승무를 데려오게.”
잠시 뒤, 백승무는 허청에게 구배지례(九拜之禮)를 올렸다.
허청은 감격하여 눈물을 글썽거리는 백승무에게 나직이 말했다.
“오랜 시간이 지난 후에야 본산으로 돌아가 도호를 받게 될 것이다. 하지만 너는 이미 본문의 제자다. 곤륜과 네 자신에게 부끄럽지 않은 이가 되어주길 바란다.”
“반드시 그리하겠습니다! 사부님!”
정광 이후로 근 이십여 년 만에 입문한 제자였다. 모두의 얼굴에 웃음꽃이 피었다.
특히 정 자 배 제자들은 신이 난 나머지 작당하여 모의하기에 이르렀다.
“대사형. 이렇게 똘똘한 사제가 생겼는데 오랜만에 달려야 하는 거 아닙니까?”
“쉿. 소리를 죽여. 사제들의 마음은 알았다. 한번 추진해 보자.”
듬직한 성격과 성실함으로 신망을 받는 대사형 정우의 선언에 젊은 도사들이 속으로 환호성을 질렀다.
“이런 쪽으로는 정현 사제가 고수지. 사제, 방법이 있나?”
과거 고기와 술을 먹다가 들켜 반년 동안 참회동(懺悔洞)에 처박혔던 정현이었다. 그 후 냄새만 맡아도 토하곤 했으나 이제는 괜찮을 것 같았다.
‘명예회복의 기회다! 반드시 해내야 해!’
잠시 고민하던 정현이 환한 미소를 지었다.
“곧 섬서성의 성도인 서안(西安)입니다. 그곳에 도착하면 여러 무가에서 어르신들을 초청할 터. 그때가 기회예요.”
“우리까지 같이 가자고 하시면 어떡하지?”
“흐흐. 다 방법이 있지요.”
정현의 시선이 정광에게 향했다.
“막내…… 아니지. 사제, 네가 나서야 한다.”
백승무를 부려먹을 일들을 정리하느라 조용히 있던 정광이 되물었다.
“저요? 어떻게요?”
“서안에 도착하면 그간 소홀했던 무공을 수련해야 한다고 말씀드려. 어르신들은 어마 뜨거라 하고 도망치실 거다. 어떠냐? 완벽하지?”
모두 정현의 잔머리에 탄복했다.
정광만 빼고.
“어라. 그러고 보니 수련을 너무 오래 쉬었네요.”
“……!”
“당장 지금부터 하죠.”
“사, 사제! 사제님! 왜 이러세요!”
지옥 같은 수련이 다시 시작됐다.
백승무는 한 시진도 안 되어 몸살로 앓아누웠다. 다른 이들은 어느 정도 익숙해져 버린 몸을 원망하며 비지땀을 흘렸다.
그리고 며칠 후, 그들은 서안에 도착했다.
정광은 방립(方笠)을 써서 얼굴을 가린 상태였다. 그들이 말을 타고 와서 그런지 아직 곤륜파와 진옥룡의 소문은 서안까지 퍼지지 않은 것 같았다.
“하하하. 앞으로 계속 이런 식으로 이동해야겠습니다.”
“그러게 말일세. 정광이 조금 불편하겠지만 소란을 피할 수 있어 다행이야.”
나이 든 도사들이 허허거리는 동안 정광과 정 자 배 제자들은 주위를 둘러보느라 정신이 없었다.
감숙성이야 청해성과 큰 차이가 없었지만, 섬서성의 서안은 엄청난 대도시였기 때문이다.
‘좋아. 역시 나오길 잘했어.’
고개를 끄덕이던 정광은 한쪽을 바라봤다. 푸른 도복을 입은 도사들이 객잔에서 나오고 있었다.
뒤늦게 그들을 발견한 운 자 배 도사들이 두 눈을 빛냈다.
푸른 수실이 매달린 장검.
소맷자락에 수놓은 홍매화(紅梅花).
모두의 머릿속에 한 문파의 이름이 떠올랐다.
‘화산파?’
곤륜파를 본 그들이 칼날 같은 기세를 뿜어내기 시작했다.
‘화산과 본문의 사이는 그리 나쁘지 않거늘, 어째서?’
중원 오악(五岳) 중 서악(西岳)인 화산(華山)에 자리한 도교의 성지.
구파일방에서 항상 세 손가락 안에 드는 명문 중의 명문.
매화검법(梅花劍法)을 필두로 한 절기들로 강호에 위명을 떨치는 화산파(華山派)!
모두 어떤 연유인지 생각하는데, 정광은 속으로 감탄하고 있었다.
‘와. 저게 화산파? 안 믿었었는데 들었던 것과 똑같잖아.’
중원은 넓고 기인이사(奇人異士)는 많다더니 정말 그랬다.
직접 보지 않았다면 믿지 못할 장관이었다.
‘사내새끼들이 꽃을 수놓고 다니다니. 안 창피한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