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곤륜마협-35화 (35/569)

35화

의용군(義勇軍)

일방적인 싸움이었기에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는 않았다.

“휴우. 끝났군.”

“안 다치게 하려니 꽤 힘드네.”

“다친 이들은 치료를 해주고 한데 모으세.”

곤륜 도사들이 녹림도들을 수습하는 사이, 정광은 혼이 나간 얼굴로 서 있는 황웅에게 다가갔다.

“따라오세요.”

황웅은 아무 대꾸 없이 정광을 따랐다. 정광은 비어 있는 방에 들어가서 바닥에 주저앉았다.

“말해봐요.”

“……무엇을 말이오?”

“그 도법. 누구한테 배웠어요?”

“……가전무공(家傳武功)이오.”

정광은 어이가 없었다.

“가전무공?”

“그렇소만.”

“천마신교 무공인데?”

“……!”

정광의 표정이 차가워지다 못해 소름 끼치는 살기를 뿜어내기 시작했다.

황웅은 온몸을 떨었다.

정광의 일검에 쓰러지면서도 느끼지 못했던 죽음이 그에게 다가오고 있었다.

“아. 이러다 애 잡겠네.”

황웅을 옥죄던 살기가 거짓말처럼 사라졌다.

정광은 공포에 질린 황웅을 바라보며 또박또박 물었다.

“네가 천마신교 칠대가문(七大家門) 중 합밀오가(哈密吳家)의 사람이라고?”

“허억!”

“꼴을 보니 무공의 근원도 몰랐나 보네?”

황웅은 간신히 입을 열었다.

“……처, 천마신교의 것일 거라곤 짐작하고 있었지만 그렇게나 대단한 무공이었습니까?”

“영 못 써먹을 만한 건 아니지.”

“아니, 방금 마교 칠대가문의 무공이라 하셨잖습니까?”

“그러니까 아주 엉망은 아니라고.”

언제부턴가 정광은 반말을 하고 있었다. 황웅은 당연하다는 듯 받아들이며 존댓말을 쓰고 있었다.

정광이 내뿜었던 기세가 그것을 당연하게 했다.

“말해봐. 있는 그대로.”

황웅은 말주변이 없는 사내였다.

두서없고 뒤죽박죽인 얘기가 이어졌지만 정광은 모두 이해할 수 있었다.

“정리하면 중상을 입은 노인을 구했더니 몇 년간 무공을 가르쳐 줬다 이거지? 그 노인이 누군지는 모르고.”

“그, 그렇습니다.”

“어떻게 생겼는데?”

“누구한테 당했는지 얼굴이 하도 엉망이어서…….”

“네가 아는 게 뭐냐?”

“죄, 죄송합니다! 제발 용서해 주십시오!”

정광은 잠시 생각에 잠겼다.

황웅이 그 노인을 만난 건 전생의 정광이 죽고 얼마 안 된 시점이었다.

‘합밀오가가 다른 가문들한테 밀려난 건가? 뭐 그럴 만도 하지.’

그들의 힘은 다른 가문들과 비슷했으나 자금력만큼은 훨씬 더 뛰어났다. 정광이 사라지자 다른 가문들이 힘을 합쳐 그들의 재산을 나눠 가졌으리라.

‘뭐 그건 그거고.’

정광은 눈앞에 엎드려 있는 황웅을 뜯어봤다. 때려보니 제법 피부도 두껍고 투지도 있는 놈이라 조금만 손보면 써먹을 수 있을 것 같았다.

‘심령을 제압해서 우두머리 시키는 것보단 훨씬 낫지.’

황웅 정도면 지금껏 잡은 놈들의 우두머리로 충분했다. 몽고군과의 싸움에서 경험을 쌓고 살아남는다면 제법 괜찮은 무인이 될 수도 있었다.

‘내 개인적으로 부릴 만한 놈들을 만들어두는 거다.’

생각을 굳힌 정광은 황웅이 절대로 거절하지 못할 제안을 했다.

“무공 필요하지? 마음껏 써도 천마신교에게 쫓기지 않고 중원무림에서도 공적으로 찍히지 않을 그런 거.”

“……!”

“가르쳐 줄까?”

“……가, 감사합니다! 정말 감사합니다!”

“근데 공짜론 안 돼.”

“아! 제가 무엇을 하면 될까요?”

“그건 차차 얘기하고. 네 내공부터 좀 보자.”

정광은 황웅의 단전에 손을 댔다.

황웅이 공포에 질린 눈빛으로 바라봤으나 개의치 않고 진기를 불어넣었다.

“흐음. 마암공(魔暗功)이구나. 네게 무공을 가르친 놈이 그래도 머리는 있네. 마공 티가 거의 안 나는 내공을 가르쳤어.”

기초가 제법 탄탄하니 큰 무리는 없으리라.

“도법을 펼칠 때 내공을 움직이는 혈도들 있지? 원래 쓰던 경로는 잊고 내가 가르쳐 주는 쪽을 기억해. 칙칙한 기운 걷어내고 밝게 쓸 수 있게 될 거다.”

번거롭게 새로운 무공을 가르칠 생각 따윈 없었다. 황웅이 익힌 것을 변형시킬 생각이었다.

무공을 아는 이라면 말도 안 되는 짓이라고 소리쳤겠지만…….

‘이렇게 할까? 아니지. 이게 더 낫겠네.’

흑도살망(黑刀殺罔)은 전생의 정광이 창안하여 합밀오가에 내려줬던 무공이었다.

그리고 현생의 정광은 그것을 정사 중간의 무공처럼 보이게 꾸밀 능력이 있었다.

물론 약간의 시행착오는 감수해야 했지만.

“어? 이쪽이 아닌가?”

그것은 정광이 아니라 황웅이 감수해야 했다.

“끄아아아악!”

* * *

감숙성주는 초조한 얼굴로 방 안을 서성거렸다. 오늘만 그러는 게 아니었다. 벌써 며칠 동안 이러고 있었다.

‘대체 언제 온단 말이냐? 청해성주가 거짓을 말했을 리는 없는데.’

청해성주가 전령을 통해 보냈던 서신의 내용은 놀라운 것이었다.

중앙으로 돌아가고 싶지만 별다른 방법이 없었던 감숙성주에게는 가뭄에 단비가 내린 것과 같은 격이었다.

그런데 예상했던 시일보다 며칠이나 지나 버렸다. 감숙성주의 속은 까맣게 타들어가고 있었다.

‘설마 오는 길에 무슨 일이 생긴 걸까?’

병사들을 풀어서 어떻게 된 일인지 알아보려는 그때, 그의 심복이 다급히 달려왔다.

“성주님! 왔습니다!”

“드디어! 곤륜파가 맞느냐?”

“도사들이 선두에 서 있으니 그럴 것입니다! 어서 나가보시지요!”

“알았다! 몇 명이나 왔지?”

“생각보다 많습니다!”

신이 난 성주는 재빨리 성문을 향했다.

천여 명쯤 되어 보이는 사내들이 보였다.

그들 사이사이에 ‘진충보국(盡忠報國). 황제폐하만세(皇帝陛下萬歲). 무림의용군(武林義勇軍)’이라 쓰인 깃발이 나부끼고 있었다.

‘아! 무인이 이렇게나 많이!’

관부라고 무인이 없는 것은 아니었다. 당장 무림에 나가도 명성을 떨칠 고수가 수두룩했다.

하지만 무공의 고하에 상관없이 무림인 천여 명이 의용군을 조직했다는 건 놀라운 일이었다.

무림인이란 본디 구속받길 싫어하는 존재다.

그런 그들이 자원하여 국가와 황제를 위해 싸우겠다고 나서는 건 세상이 깜짝 놀랄 만한 사건이었다.

‘전투에서 얼마나 공을 세우느냐는 나중 문제다. 이들이 감숙성에서 군에 지원했다는 것만으로도 나는 중앙으로 돌아갈 수 있게 된다!’

지방관이란 황제의 은덕을 세상에 비추기 위한 존재다. 그는 그 임무를 충실히 해낸 이로 황궁에 보고될 것이다.

성주는 기쁨에 겨운 표정을 감추지 않고 호탕하게 외쳤다.

“하하하! 곤륜의 선인들과 의용군을 환영하오!”

성대한 연회가 열렸다.

성주는 곤륜 도사들을 상석에 모시고 그들의 공을 연신 치하했다.

“내 곤륜의 드높은 명성은 익히 들어왔으나 이런 훌륭한 일을 해내실 줄을 몰랐소. 황상께서도 크게 기뻐하실 것이외다.”

“무량수불. 대단치 않은 일을 그리 칭찬해 주시니 불편합니다.”

“어허. 대단치 않다니요? 당금 무림에서 곤륜이 아니면 누가 이런 일을 해내겠소이까? 지나친 겸양은 오히려 비례이니 마음 편히 연회를 즐겨주시오.”

상대의 공을 추켜세워 주고 마음도 편하게 해주는 노련한 화법이었다.

하지만.

도사가 고기를 먹을 수 있는 것도 아니요, 술을 마실 수 있는 것도 아니다.

아리따운 무희를 외면하며 풀만 씹고 있는 형편이었다. 그런 그들이 연회를 무슨 수로 즐기겠는가?

그들과 달리 치열하게 즐기는 자들이 있었으니, 바로 무림의용군이었다.

“크흐흑. 이렇게 써먹으려고 무공을 가르쳐 줬다니…….”

“씨발! 배 터지게 먹고 죽자!”

“아, 몰라! 마셔! 마시자고!”

무슨 일인지도 모르고 끌려왔다가 전장에서 굴러야 한다는 말을 듣고 탈출을 시도했던 그들이었다.

결국 정광과 곤륜 도사들에게 두들겨 맞고 포기하게 되었지만 그 속이 오죽하겠는가.

마지막 만찬일지도 모르니 죽어라 먹고 마시는 게 당연한 일이었다.

“어? 이 새끼야! 손 안 치워? 내가 먼저 먹으려 했다!”

“미친! 저승부터 먼저 보내줄까?”

거친 욕설이 터져 나오며 분위기가 흉흉해졌다. 도열해 있던 병사들은 땀에 젖은 손으로 창을 다잡았다.

‘이것들, 의용군 맞아?’

‘흑도 패거리 아니면 도적놈들 같은데? 칼부림 일으킬 기세잖아!’

그들이 잔뜩 긴장한 그때, 청아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적당히 드세요. 기분 좋을 정도로 만요. 사고 치면 알죠?”

놀라서 고개를 홱 돌려 보니 엄청나게 잘생긴 청년 도사였다.

병사들의 안색이 더 어두워졌다. 딱 봐도 흉악한 놈들을 자극해서 뭘 어쩌려고!

그런데 더 놀라운 일이 일어났다.

“네! 알겠습니다!”

“물론이죠! 술이란 기분 좋아지려고 마시는 것 아니겠습니까!”

난장판이었던 분위기가 삽시간에 정리되었다.

“하하. 미안하네. 자네가 먼저 드시게나.”

“허어. 그게 무슨 소린가. 자네부터 마셔야지. 자, 자. 한잔 받게나.”

심지어 화기애애해지기까지.

감숙성주는 정광을 유심히 뜯어보며 청해성주의 서신을 떠올렸다.

‘잘난 조카니 섭섭하지 않게 대해달라 했지. 잘나긴 한 것 같군.’

하지만 그건 그거고 일은 일이었다. ‘섭섭하지 않게’라는 기준은 사람마다 다른 것이다.

성주는 정광에게 눈짓을 한 뒤 자리를 옮겼다. 자리에 앉자 정광이 평복을 입은 청년과 함께 들어왔다.

“왜 혼자 오지 않았는가?”

“아. 제가 산에서만 살아서 세상 물정에 어두워서요.”

“이 소협이 누구기에?”

“제 사제예요.”

“흠. 존장을 모셔오지 않고 왜?”

“사제가 시장 시세에 밝거든요.”

“……시장? 시세?”

“네.”

이게 도사의 입에서 나올 말인가?

성주는 어처구니없었으나 내색하진 않았다. 그래도 괘씸한 마음이 드는 건 어쩔 수 없는 일, 정광을 돌려서 책망했다.

“자네는 좀 특별하군. 도사답지 않아.”

“그렇죠.”

“……인정하는가?”

“누가 봐도 그럴 건데요 뭐. 이제 일 얘기를 할까요?”

성주는 마음을 단단히 먹었다.

나이가 어려 낮게 봤건만 만만치 않은 상대인 게 분명했다.

“일 얘기라니? 의용군을 안내해서 와준 건 고맙네. 다른 일도 있는 건가?”

“그럼 안녕히 계세요. 다른 성으로 가볼게요.”

“잠깐! 거참 성격 급하기는. 아니지, 시원시원하고 좋구먼. 그래, 무엇을 원하는가?”

“잠시만요. 사제.”

“여기 있습니다, 사형.”

백승무가 두꺼운 책자를 꺼냈다.

겉면에는 ‘의용군 청구명세서(請求明細書)’라는 글이 쓰여 있었다.

“……청구명세서?”

“네. 사제가 합리적으로 잘 잡았으니 마음 편히 보세요.”

편히 볼 수 있을 리가 있나.

이딴 걸 내밀 줄은 상상도 못 했던 성주였다.

“그럼 어디…….”

책자를 훑어보던 그는 입을 떡 벌렸다.

이곳까지 이르는 동안 썼던 모든 경비가 기록되어 있는 것은 물론 어떤 이유로 이윤을 덧붙였는지, 왜 그 금액이어야 하는지 빼곡하게 적혀 있었다.

‘이것들이 감히 나를 뭘로 보고!’

백성들을 수탈하거나 값비싼 보물을 후려쳐서 뺏는 능력은 무림고수를 아득히 능가하는 성주였다.

하지만 지금 아쉬운 건 그였다. 정광에겐 청해성주라는 뒷배까지 있는 상황. 되도록 좋게좋게 풀어야 했다.

“……포승줄까지 청구하나? 다시 쓸 수 있을 텐데?”

백승무가 다소 긴장한 얼굴로 대답했다.

“워낙 단단히 묶어서 결국 다 잘라내야 했습니다. 포함되는 것이 당연하지요.”

“……피해 백성 보상비? 이건 또 뭔가?”

“저들에게 피해를 본 백성들에게 최소한의 보상을 해준 금액입니다.”

“……위로비는?”

“보상한들 마음은 어찌 치유하겠습니까. 제를 지내고 축원을 하여 마음의 응어리를 푸는 데 조금이나마 도움을 준 비용입니다.”

제? 축원? 마음의 응어리를 풀어?

경악하는 성주에게 정광이 덧붙였다.

“도사로서 당연히 해야 하는 일이니 인건비는 뺐어요. 제단에 올리는 제물 비용만 넣었죠.”

“……상세한 설명 고맙네.”

“뭘요.”

성주는 울화를 삼키며 책장을 넘겼다. 마지막 장을 덮은 그는 애써 부드러운 표정을 지으며 물었다.

“흑도 문파를 무너뜨리고 녹림채를 불태웠다 했지? 그럼 많은 재물을 얻었을 것 아닌가. 그 정도면 충분할 것 같은데 왜 이리 큰 금액을 청구하는 건가?”

“그건 기타소득(其他所得)으로 잡힙니다. 다른 일에 쓰일 것입니다.”

“기타…… 뭐? 아니, 그런 용어는 됐고 뭐에 쓰려 하는가?”

“사형의 비…… 흡!”

순간 정광의 비자금이라고 말할 뻔했던 백승무는 기지를 발휘했다.

“……비밀을 요하는 일이라 말씀드리지 못함을 용서하십시오.”

“하하. 사제, 입조심해야지. 대인. 무림의 비밀을 많이 아셔봤자 좋으실 게 없죠. 안 그런가요?”

“……생각해 줘서 고맙군.”

“당연한 일인데요 뭐. 자. 어떠세요? 합리적인 금액이죠?”

성주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그는 포기하지 않고 세부적인 것들을 파고들었다.

하지만 백승무는 강했다. 한 치도 밀리지 않고 하나하나 짚어가며 열변을 토했다.

승부의 무게 추는 점점 백승무 쪽으로 기울어지고 있었다.

정광은 그를 바라보며 흐뭇한 미소를 지었다.

‘전생에선 이런 걸 따질 필요가 없었지만 현생에선 다르지. 일 처리가 꽤 깔끔한걸. 입조심만 시키면 되겠어.’

색계(色戒)를 어기면 어떻게 될지 궁금해서 시켜보려 했는데 잠시 보류해야 할 것 같았다.

“하아아. 지치는군. 이보게, 진옥룡. 자네 사제는 너무 까탈스러우니 자네와 얘기하겠네. 타협의 여지가 조금도 없는 건가?”

“깎아드리는 건 어려운 일이 아닌데 확실하게 하려면 그 가격이에요.”

“무슨 의미인가?”

“말이 의용군이지 전직 아시잖아요. 탈영하는 게 문제가 아니라 사고나 안 치면 다행이죠.”

성주의 눈이 깊어졌다.

아닌 게 아니라 중요한 일이었다.

‘저들이 공을 세우면 좋지만 아니더라도 큰 문제는 없다.’

사상 초유의 무림의용군이라는 이름만으로도 그는 중앙으로 돌아갈 것이 확실했다.

‘하지만 그 뒤가 문제지.’

혹시라도 사고가 터지면 차기 성주가 얌전히 뒤집어쓸 리가 없다. 어떻게든 그를 엮어서 죄를 덜려고 할 것이다.

반대로 의용군이 공을 세운다면 그가 차기 성주를 압박해서 공을 빼앗을 것이었다.

‘저만한 이들을 이렇게 빨리 모아오는 건 분명 대단한 일이다. 뒷마무리까지 제대로 할 수만 있다면 터무니없이 과한 금액은 아니야.’

마음을 굳힌 그가 입을 열었다.

“……방법이 있는가?”

정광이 고개를 크게 끄덕였다.

“당연한 말씀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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