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곤륜마협-34화 (34/569)

34화

외냉내온(外冷內溫)

산적도 급이 있다.

무공을 익힌 이들이 모인 산채는 얼마 안 됐는데 그들을 녹림칠십이채라 불렀다.

그중 기련채는 변방인 감숙성에 있어서 말석으로 치부되었지만 상당히 강한 전력을 자랑하는 곳이었다.

무엇보다 채주 황웅은 거웅환도(巨熊環刀)라 불리는 고수였다.

머리만 좋았으면. 아니, 보통이라도 됐으면 중원까지 이름을 날리는 고수가 되었으리란 것이 세간의 평이었다.

그의 가장 큰 장점은 야수보다 날카로운 감각이었다.

지금 그 감각이 황웅에게 소리쳤다.

베어! 완벽하게 벨 수 있어!

황웅은 거대한 구환도를 휘두르며 외쳤다.

“죽어라!”

서걱.

깨끗하게 베어지는 소리가 그를 즐겁게 했다.

‘훗. 한칼거리도 안 되는 게…… 어엇?’

흐릿해졌던 애송이의 몸이 다시 뚜렷해졌다.

‘이형환위(移形換位)? 그럼 아까 그 소리는 뭐지?’

왠지 턱이 시원했다.

황웅은 천천히 한 손을 들어 턱을 쓰다듬어 보았다.

‘매끈하다!’

정광은 황웅의 밤송이 같던 수염을 일검으로 베어낸 뒤 만족한 표정을 지었다.

“자르니까 좀 사람 같네. 곰을 끌고 다닌다는 오해는 안 받겠어.”

“……네가 내 수염을 베었다고?”

“그런데요.”

“……믿을 수 없다!”

“그래요 그럼.”

정광은 아무래도 상관없었다.

눈앞의 곰 같은 사내가 마음에 들었기 때문이다.

‘칼질이 쓸 만하네. 좋아. 이놈으로 하자.’

조직을 부리는 건 힘든 일이다.

쓰레기 같은 놈들이면 더 그렇다.

거기에 여러 무리가 합쳐진 조직이라면 더 어려워지는데, 제일 쉬운 방법은 그들 중 최강자를 복종시키는 것이다.

정광에겐 황웅이 그 조건에 딱 들어맞았다.

“가죠.”

“어디를?”

“감숙성주한테요.”

“미친! 죽어!”

구환도가 정광을 세로로 갈랐다.

정광의 몸이 또 흐릿해졌다.

황웅은 바닥에 박히려던 구환도를 억지로 잡아당겨 횡으로 크게 베었다.

정광은 이미 저만치 떨어진 곳에서 두 손을 만지작거리고 있었다.

뭔가 기대에 찬 표정이었다.

“힘 좋네요.”

“젠장! 뭐가 이리 빨라!”

“몸도 튼튼하겠죠?”

“당연하지! 도망만 다니지 말고 제대로 덤벼라!”

정광이 씩 웃었다.

“네.”

기를 머금은 두 주먹이 천천히 움직인다. 허공에 희뿌연 잔상이 떠오르더니 웅대하고 짙은 구름의 형상을 띈다.

곤륜 비전 뇌운권(雷雲拳)!

뇌운은 따가운 소나기를 동반하기 마련. 정광의 두 주먹이 세찬 소나기처럼 쏟아졌다.

두 눈을 부릅뜬 황웅이 구환도의 도면으로 그것을 막아냈다.

쩌쩌쩌쩌쩡!

“으어어어억!”

구환도가 부러질 듯 휘청거렸다.

황웅의 몸이 주르륵 밀려났다.

그 와중에도 그는 호기롭게 외쳤다.

“겨우 이거냐!”

“아뇨.”

짙은 구름 속에서 천둥이 쳤다.

콰앙!

“끄악!”

가슴을 얻어맞은 황웅은 벽을 뚫고 날아가 나뒹굴었다.

정광은 그를 따라 나오며 머리를 긁었다. 영추자와의 일이 생각나서였다.

“이런. 잘 조절해서 때렸는데. 보기보다 약하시네.”

“크흑. 우, 웃기는 소리!”

“오! 바로 일어나셨다. 타고난 강골에 외문기공(外門氣功)을 익히셨구나. 더 세게 때려도 되겠죠?”

황웅의 얼굴이 노래졌다.

“아. 거기 두 사람은 도망가지 마세요. 그러면 내가…… 아니지. 지금이 기회예요. 빨리 뛰세요.”

튀려던 서도한과 쌍도비호가 얼음처럼 굳었다.

정광은 감히 움직일 생각도 못 하는 그들에게 용기를 줬다.

“죽이진 않을 거니까 안심하세요.”

“…….”

“어서 해봐요. 아, 어서. 거기 쌍칼 찬 분. 전에 한 번 도망치셨잖아요. 그때처럼 할 수 있어요.”

쌍도비호가 조상님 대하듯 공손하게 대답했다.

“제가 어찌 감히. 그땐 귀찮으셔서 놓아주셨다는 걸 잘 알고 있습니다. 한 걸음도 안 움직이고 진옥룡님의 처분을 기다리겠습니다.”

정광은 한숨을 쉬었다.

“하아. 이렇게 패기가 없어서야. 산적은 어쩔 수 없는 건가?”

쌍도비호와 같은 산적인 황웅이 발끈했다.

“더 세게 때린다 했지? 와봐! 네놈의 솜방망이 같은 주먹, 기꺼이 맞아주마!”

“좋아! 아주 좋아요!”

“난 네놈이 싫다!”

“그럼 더 좋죠! 무인은 그런 투지로 먹고사는 거 아닙니까. 자, 갑니다!”

“와라! 어? 어? 억!”

신이 난 정광이 두 손을 휘둘렀다. 마치 번개가 내리치는 듯한 수공(手功), 섬전수(閃電手)였다.

쩍! 뻑! 빠각!

“끄아아아악!”

황웅은 정광의 기대를 배반하지 않을 만큼 튼튼했다. 비명을 지르면서도 절대 쓰러지진 않았다.

“이것도 버티시네? 하하.”

“크흐흑. 아, 아무렇지도 않다!”

“그럼 이것도 받아보세요!”

“이 마귀보다 나쁜 놈아!”

정광의 무공은 끝이 없었다. 장법인 운학장(雲鶴掌)에서 지법인 태허지(太虛指)로, 각법인 운룡각(雲龍脚)까지 넣어가며 수많은 종류의 무공들을 풀어냈다.

황웅은 온몸이 너덜너덜해지는 와중에도 날카로운 눈빛으로 기회를 노렸다. 그만큼 그는 강하고 끈질긴 사내였다.

하지만.

기회가 있을 리가 있나.

계속 두들겨 맞았다.

혼이 빠져나갈 정도로.

그와 반대로 정광은 기분이 무척 좋은 상태였다.

이렇게 꿋꿋하게 버티다니!

기특할 정도의 맷집 아닌가!

황웅으로서는 죽을 맛이었지만 정광이 알 바 아니었다. 지금 이 순간, 때리는 족족 맞으면서도 쓰러지지 않고 있다는 사실만이 중요했다.

하다 보니 욕심이 났다.

“내공 조금만 더 올릴게요!”

“잠깐! 그랬다간…… 끄아악!”

“하하. 해내실 줄 알았다니깐요. 그럼 조금만 더!”

“안 돼! 제발 그만…… 쿠허헉!”

“거봐요. 하면 되잖아요. 그럼 또 올립니다! 조금 위험할지도 모르니까 감추고 있는 거 다 꺼내세요! 아. 보는 눈이 있어서 못 쓰고 있던 거예요?”

“……뭐?”

정광이 사라지더니 서도한과 쌍도비호의 뒤에 나타나 뒤통수를 후려갈겼다.

따닥!

“억!”

“컥!”

둘을 기절시킨 정광은 눈 깜짝할 새에 황웅의 앞에 다시 나타났다.

“이제 됐죠? 아. 기대돼.”

이건 사람이 아니었다.

‘마, 마귀!’

황웅은 정신이 번쩍 들었다. 이대로 가다간 개죽음밖에 안 될 터, 정광의 말대로 숨겨왔던 절기를 펼쳐야만 했다.

‘영감! 나 죽기 직전이라 쓰는 거야! 뭐라 하면 안 돼!’

황웅은 그가 어렸을 때 무공을 전수해 준 늙은이를 떠올렸다. 목숨이 위험할 때만 쓰라 했으니 그의 말을 어기는 것은 아니었다.

“이 기생오라비 같은 새끼야! 이거나 먹어라!”

“그렇죠! 바로 그 기세예요!”

황웅은 움켜쥔 구환도에 필생의 공력을 몰아넣었다. 구환도가 기이한 소리를 토하며 끈적끈적한 검은 기운으로 물들었다.

“어?”

뭔진 모르지만 재밌겠다며 기대하던 정광이 황당한 표정을 지었다.

그가 아는 무공 아닌가!

‘이게 왜 여기서 나와? 많이 어설픈데 겉모습만 닮은 건가?’

구환도가 머금고 있던 검은 기운을 토해내기 시작했다. 그 기운은 거대한 그물이 되어 정광의 몸을 옥죄어 왔다.

‘맞잖아! 대체 어떤 새끼가!’

어설퍼 보였던 건 황웅의 경지가 낮아서 그런 것일 뿐, 분명 그 무공이었다.

어이가 없어 가만히 바라보던 정광은 노곤한 표정을 지었다.

‘아. 포근해. 오랜만이라 그런가?’

얼마 안 가 그는 끈적한 검은 기운에 온몸이 꽁꽁 묶여 버리고야 말았다.

“크흐흐! 끝이다!”

황웅은 득의양양한 얼굴로 구환도를 치켜들었다. 그리고 그대로 내려찍었다.

구환도에서 넘실거리던 검은 기운이 세상을 갈라 버리려던 그 순간!

쿠와아아아!

정광의 허리에서 황금색 용이 튀어나왔다!

* * *

‘후욱. 후욱. 잘 보았느냐?’

‘우와아! 진짜 멋지다! 그 무공 이름이 뭐예요?’

‘알 것 없다. 익히기만 해라.’

‘쳇. 맨날 밋밋한 것만 가르쳐 주더니 이제야 강해 보이는 걸 내놓네. 진작 좀 이러지!’

‘쿨룩쿨룩. 다 너를 위한 거였다. 명심해라. 이 무공은 절대로 남들에게 보이면 안 돼.’

‘왜요?’

‘만약 알아보는 이가 있으면 네 목숨이 위험해진다. 그러니 죽을 위기에만 써. 목격자도 모두 죽이고.’

‘미친. 차라리 안 쓰는 게 낫겠네.’

‘네 말대로다. 그게 최선이지.’

‘그냥 쓸래요. 덤비면 덤비는 대로 다 죽여 버리면 되니까.’

‘…….’

‘히익! 농이에요, 농!’

‘네가 날 살려줬고, 네 자질이 아까워서 그러는 것이다. 반드시 그러겠다고 맹세해라.’

‘……거참. 노친네 눈빛 하고는. 몇 년 내내 곧 죽는다고 엄살 부리더니 순 거짓말…… 흐윽! 알겠어요! 맹세할게요!’

허구한 날 피를 토하고 기침이나 해대던 노인의 기세가 아니었다. 말로만 듣던 무림고수가 소년의 눈앞에 서 있었다.

그런데 노인은 얼마 안 가 정말로 죽어버렸다.

황웅은 노인과의 약속을 지켰다.

그가 신의를 지키는 자여서가 아니었다. 강호에서 구르다 보니 그가 배운 무공이 얼마나 위험한 것인지 짐작할 수 있게 되어서였다.

‘빌어먹을! 차라리 안 익혔으면 좋았을 것을!’

그 무공만 쓴다면 이길 수 있는 상대에게서도 도망쳐야 했다.

그 무공을 들키게 될까 봐 두려워 숨어야만 했다.

황웅은 결국 산적이 되었다.

하루하루 울분이 치솟았다.

자신의 모든 것을 쏟아내고 싶은 갈망은 날이 갈수록 커져만 갔다.

그러다 곤륜파의 신성이라는 진옥룡을 만났다.

명불허전이라는 말도 부족했다. 진옥룡은 정말 강했다. 황웅으로서는 감히 쳐다볼 수조차 없을 정도로 대단한 고수였다.

그래도 그 무공을 사용하면 한 칼 정도 먹일 수 있을 거라 자신했건만…….

그 빌어먹을 금룡(金龍)!

“커헉! 헉. 헉.”

정신을 잃고 있던 황웅이 두 눈을 번쩍 떴다. 벌떡 일어나 주위를 두리번거리자 서도한과 쌍도비호가 쓰러져 있는 모습이 보였다.

‘아! 내 구환도!’

구환도는 깨끗하게 두 동강이 난 채 바닥에 놓여 있었다.

진옥룡의 허리에서 뽑힌 검이 그를 옭아매고 있던 기의 그물을 가르고 황웅의 구환도까지 절단해 버린 것이다.

‘그런 쾌검이 있다니! 왜 날 죽이지 않았지? 어디로 간 거야?’

흐트러졌던 오감이 조금씩 돌아왔다. 목책 너머에서 병장기 부딪히는 소리와 비명이 울려 퍼지고 있었다. 황웅은 비틀거리는 발걸음으로 그곳을 향해 다가갔다.

목책 밖을 바라본 황웅의 눈이 툭 불거졌다.

“미친!”

하얀 도복을 입고 청옥 도관을 쓴 도사들이 황금색 검을 검집째로 휘두르며 훨훨 날아다니고 있었다.

펄럭이는 도복에 수놓인 금빛 구름이 햇빛을 받아 아름답게 반짝였다.

‘진옥룡과 같은 차림새잖아?’

정광을 봤을 땐 몰랐는데 다른 도사들이 걸친 걸 보니 엄청나게 비싸 보였다. 정광이 너무 잘생겨서 묻혔던 것이리라.

하지만 지금 중요한 건 그게 아니었다.

‘뭐가 이렇게 강해?’

수하들이 추풍낙엽처럼 쓰러져갔다. 도사들의 멋지고 우아하면서도 강한 무공 앞에서 황웅이 일궈온 모든 것들이 무너져 내리고 있었다.

‘대체 뭐 하는 놈들…… 아!’

원래도 대단했지만 근래 들어 엄청난 명성을 떨치는 한 문파가 떠올랐다.

“고, 곤륜파!”

* * *

정광은 산채 주위를 바쁘게 뛰어다녔다. 도망치려는 놈들이 하도 많아서 그럴 수밖에 없었다.

지금껏 잡아온 이들에게 산채를 포위하게 했지만, 그들이 악에 받친 녹림도들과 싸우는 건 기대도 하지 않았다.

반면 그들의 생각은 달랐다. 어떻게든 정광을 도와 녹림도들을 막아내려 했다.

‘내가 금수보다 못한 놈이지만 갚을 건 갚아야지!’

‘뿐이랴! 내 무공을 시험해 볼 기회다!’

처음엔 포승줄로 꽁꽁 묶인 채 끌려다녔으나 얼마 안 가 그들은 자유롭게 움직일 수 있게 되었다.

정광은 어리둥절해 하던 그들에게 무공을 가르쳤다. 대단한 절기는 아니었으나 잘못된 습관을 고쳐주고 효과적인 살초를 알려줬다.

게다가 소규모부터 대단위까지 이르는 합격술까지.

그들이 비록 세상을 좀 먹는 쓰레기라 해도 무공을 조금이나마 익힌 무인들이었다. 무공은 그 무엇보다도 소중한 것. 아낌없는 가르침을 내리는데 누가 미쳤다고 도망가겠는가?

원한이 호감으로 바뀌는 데는 그것만으로도 충분했다.

나아진 무공을 쓰고 싶어 근질근질하던 그들에게 이번 싸움은 좋은 기회였다.

“막지만 말고 치자!”

“좋아! 다들 가자!”

모두가 살기를 키우며 달려들려는 그때, 정광이 버럭 소리를 질렀다.

“지금 뭐 하려는 거예요!”

“미, 미력하게나마 도움이 되고 싶어서…….”

“당장 물러나세요! 여러분은 다치면 안 되는 소중한 존재예요!”

화아악-

사람들은 순간 먹구름이 걷히며 눈부신 햇살이 쏟아지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

‘아아! 진옥룡이여!’

‘그렇게까지 우리를!’

‘외냉내온(外冷內溫)! 겉은 차갑지만 속은 따뜻한 남자였구나!’

감동한 사람들이 물러나자 정광은 고개를 끄덕였다.

‘한 명도 잃을 수 없어. 어떻게 주워 모으고 가르치기까지 했는데.’

상하면 안 되는 건 기련채의 녹림도들도 마찬가지였다. 정광과 곤륜 도사들은 그들을 검집으로 패서 기절시켰다.

되도록 실력 있고 많은 인원을 감숙성주에게 팔아…….

아니, 제공해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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