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1화
잘 지내보자
그 많던 사람들이 흩어지고 나서야 백승무는 움켜쥐고 있던 주먹을 풀었다.
손톱이 파고 들어갔던 손바닥에서 피가 흘러나오고 있었다.
‘아프군.’
손이 아닌 마음을 말함이었다.
‘진옥룡은 저런 위용을 뽐내는데 나는 뭘 하고 있는 건가?’
한창 떠오르는 백가상단의 이공자이자 후계자. 이 배경을 지운다면 청해성에서 이름이 오르내리는 후기지수 중 하나일 뿐이다.
‘후기지수는 무슨. 빛 좋은 개살구일 뿐이지.’
변방인 청해성에 인재가 있어 봐야 얼마나 있겠는가?
‘나도 그처럼 되고 싶다. 하지만 어떻게?’
정광이 했던 말이 떠올랐다.
‘도사가 되세요. 진산제자(眞山弟子)가 되는 거죠. 고기? 술? 여인? 그게 문제예요? 난 또 뭐라고. 몰래 하면 되잖아요.’
말도 안 되는 얘기다.
게다가 백승무는 관직에 나간 형을 대신해 백가상단을 물려받아야 하는 처지였다.
원초적 욕망을 버리고 가문의 굴레도 벗어던질까 생각해 봤지만…….
‘내가 지금 십구 년째 막내로 살고 있거든요. 편하게 부려먹을 사제가 필요한데, 그쪽이 딱 적임자 같아서요.’
이런 이유로 입문하라는데 어느 누가 그러겠느냐는 말이다.
‘하지만…….’
오늘 정광의 무위를 보니 생각이 달라졌다.
입문을 권유받은 이유야 뭐가 됐든 어떠한가. 자신만 제대로 하면 그만인 것을.
마음을 굳힌 백승무는 백진환에게 달려갔다.
“아버님!”
“바쁘니 나중에 얘기하자꾸나.”
백진환은 정말 정신없이 바빴다.
일이 잘 해결되었다곤 하나 세부적으로 마무리 지어야 할 것들이 많았다. 내일 아침이면 떠날 곤륜파의 도사들을 위해 이것저것 준비도 해야 했다.
백승무도 그걸 알았지만 꼭 말해야만 했다.
“중요한 일입니다.”
백진환은 아들을 잠시 바라보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말해보거라.”
“…….”
“허어. 말해보라니까?”
막상 말하려니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백승무는 혀로 입술을 축인 뒤 용기를 내서 말했다.
“곤륜에 입문하고 싶습니다.”
“너도 알고 있지 않느냐? 곤륜은 속가제자를 안 받고 있다.”
“알고 있습니다. 진산제자가 되기를 원합니다.”
“……도사가 되겠다고?”
“네. 허락해 주십시오.”
이번엔 백진환이 침묵했다.
아들이 이러는 이유를 대충 짐작했기에 말을 꺼내기가 더 조심스러웠다.
‘은공은 특별한 사람이거늘, 네가 너무 높은 곳을 보는구나…….’
백진환도 젊었을 때는 큰 꿈이 있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날수록 세상과 부딪히고 깨지며 그 꿈이 깎여 나갔다.
다행히 허여민이라는 좋은 여인을 만나 합심하여 지금의 사업을 일구어냈지만, 과거의 그가 꿈꿨던 것에는 미치지 못했다.
물론 지금은 충분히 행복하고 만족하고 있지만…….
‘승무가 그걸 이해할 리가 없지.’
젊음은 위를 바라본다.
그것은 그들의 권리다.
나이든 아비가 부정하거나 비난할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백진환은 결심했다.
현실을 알려준 뒤 아들의 의지를 존중하기로.
그런데 잠깐.
“민 매에겐 얘기했느냐?”
“아닙니다. 아버님께 먼저 말씀드리려고 왔습니다.”
“그럴 줄 알았다. 말했다면 네 얼굴에 멍자국 몇 개는 찍혀 있겠지.”
부자가 함께 소리 죽여 웃었다.
분위기가 조금 부드러워지자 백진환이 말을 이었다.
“네가 은공의 신위를 보고 그런 결심을 했으리란 걸 안다.”
“…….”
“하지만 네가 모르는 것이 있다. 아까의 신위가 은공의 전부일 것 같으냐?”
“……!”
백승무의 눈이 커졌다.
진옥룡의 무위가 비무에서 보여준 것보다 더 높다는 의미 아닌가!
“비무 중에 진인들께서 이런 말씀을 하시더구나.”
“무엇이라 하셨는지요?”
“곤륜에서 항상 사정을 봐주며 비무해야 했던 은공이 맘껏 패도 되는 상대를 만나 신이 난 것 같다 하셨다.”
그러고 보니 정광은 비무 내내 활짝 웃고 있었다.
“그런 마음으로 그 대단한 혈투를 벌이셨다니 정말 놀랍군요.”
“혈투라…….”
“아닙니까?”
“은공께서는 단 일검으로 영추자의 절초를 가르셨다. 그리고 단 일권으로 그를 기절시키셨지.”
“그래도 그 전까지는 굉장히 치열한 공방 아니었습니까?”
“아니다. 영추자가 쓰러졌을 때 은공이 어떤 표정을 지었었는지 떠올려 봐라.”
백승무는 기억을 더듬었다.
“뭔가 좀 뚱한 표정이었던 것 같습니다.”
“그래. 진인들께서는 이렇게 표현하시더구나. 맛있는 군것질거리를 손에 넣은 아이가 아껴 먹으려다 실수로 떨어뜨린 격이라고.”
“……그 말씀은?”
“은공께서는 영추자에게 기대를 거셨던 거다. 이 정도는 버틸 수 있을 거라고. 그러나…….”
백진환은 자신도 어이없다는 듯 피식 웃었다.
“……그는 은공의 기대에 미치지 못했던 거지.”
백승무는 입을 떡 벌렸다.
공동파의 장로가 부족했다고?
그게 말이나 되는 소리인가!
못 믿겠다는 표정을 짓자 잠시 고민하던 백진환이 입을 열었다.
“네가 모르는 얘기를 해주마.”
그의 입에서 탑극랍마간에서 있었던 일들이 흘러나왔다.
꽤 긴 얘기였는데 듣는 내내 벌린 입을 다물지 못하던 백승무는 말이 끝난 뒤에도 한참 동안 멍한 표정을 지었다.
백진환은 그 모습을 보며 내심 탄식했다.
“은공은 그런 사람이다. 아니, 사람이라 말하기도 힘든 존재지. 그래도 그와 같이 되고 싶으냐? 자신은 있고?”
여러 차례 변하던 백승무의 눈빛이 마침내 굳은 결의로 빛났다.
“그의 등을 보며 조금이라도 쫓아가고 싶습니다.”
“…….”
“자신은 없지만요.”
“……하하하하.”
어이없다는 듯 웃는 백진환에게 백승무가 머리를 조아렸다.
“죄송합니다.”
“아니다. 자신 없다 하니 오히려 더 믿음이 가는구나.”
잠시 침묵하던 백진환이 고개를 크게 끄덕였다.
“어차피 네가 걸을 길이니 네가 정하는 게 옳겠지. 단! 그 길에 무엇이 나타나고 어떻게 갈리든 네 스스로 헤쳐 나가야 한다는 사실만 명심해라.”
“감사합니다! 그렇게 하겠습니다!”
“귀 따갑다. 곤륜의 허락을 받은 것도 아닌데 웬 소란이냐? 후원금을 많이 낸다고 받아줄 이들이 아니다. 무척 어려운 일이 될 게야.”
“하하. 알고 있습니다, 아버님. 그래도 기분이 너무 좋습니다.”
기뻐서 펄펄 뛰던 백승무가 흥분을 가라앉히고 조심스럽게 물었다.
“헌데 제가 도문(道門)에 들면 가문은…….”
“이제 와서 걱정하는 척하지 말거라. 가문의 대야 네 형을 들볶아서 빨리 이으라 하면 되고, 사업은…… 할 만큼 하다가 접은 뒤 민 매와 펑펑 쓰며 살면 된다.”
백승무의 고개가 더 숙어졌다.
그의 부친이 백가상단을 위해 얼마나 노력해 왔고 애착을 갖고 있는지 뻔히 알기 때문이었다.
마음속에서 부친에 대한 죄송스러움과 고마움이 더 커져만 갔다.
“아. 그리고 말이다.”
“네! 아버님!”
“민 매에게는 네가 허락을 받아라. 혼자 가서.”
백승무의 가슴을 가득 채우고 있던 감동이 박살 나버렸다.
*
정광은 잠자리에서 일어나 기지개를 켰다. 방문을 열고 나와 보니 따뜻한 햇볕이 내리쬐는 아주 좋은 날씨였다.
‘아. 배불러. 간만에 제대로 조리된 걸 먹었네.’
지난 새벽, 주방에 침입해서 몰래 먹은 고기는 맛이 꽤 괜찮았다. 폭식해서 그런지 배가 아직도 불룩했다.
좋은 날씨와 기분 좋은 포만감.
단 한 방에 기절해 버린 영추자 때문에 났던 짜증은 어느새 사라지고 없었다.
‘오늘 아침은 거르고 싶은데…….’
세상이 그를 도와주지 않았다.
“막내야. 아침 먹으러 가자.”
“배 안 고픈데요.”
대사형 정우가 정광의 어깨에 손을 올리며 걸음을 재촉했다.
“무슨 큰일 날 소리를. 빨리 가자꾸나. 아, 어서.”
곤륜파는 도우들의 시주로 먹고사는 집단이기에 항상 감사한 마음으로 식사하는 기풍이 있었다.
그런 그들에게 끼니를 거르는 것은 도우들의 정성을 무시하는 것으로 치부됐기에 절대 해서는 안 될 행동이었다.
어쩔 수 없이 식당으로 끌려갔지만 식욕이 있을 리가 만무한 상황. 정광은 깨작깨작 먹는 척만 했다.
그런데 그 모습이 오히려 백가상단 사람들에게 더 크게 다가왔다.
‘대단하군! 먹는 모습마저 저리 아름답다니!’
‘비무할 때는 천신이요, 식사할 때는 신선이로다!’
‘열심히 만든 보람이 있구나. 새벽부터 조리한 고기가 없어져서 화가 났거늘, 마음이 평안해졌어.’
식사가 끝나자 곤륜 제자들은 떠날 준비를 했다. 짐이라 해봤자 보퉁이 정도였기에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는 않았다.
운학을 비롯한 운 자 배 도사들을 내실로 모신 백진환은 백가상단을 대표해 깊은 감사를 표했다.
“감사합니다. 곤륜의 은혜, 평생 잊지 않겠습니다.”
“무량수불. 마땅히 해야 할 일을 했을 뿐이외다.”
빙그레 웃던 운학은 뭔가 이상함을 느꼈다.
백진환이 입술을 열었다 닫았다 하는 모습을 보니 뭔가 꺼내기 어려운 말이 있는 것 같았다.
“백 단주. 할 말이 있으면 편히 하시오.”
“……그럼 염치없지만 말씀드리겠습니다. 제 차자(次子)가 곤륜에 입문하길 간절히 바라고 있습니다. 가능할는지요?”
“허어. 미안하오. 본문은 속가제자를 안 받고 있소이다.”
“진산제자를 말씀드리는 겁니다.”
뜻밖의 말에 운학은 백승무를 떠올렸다.
‘수하들을 살리기 위해 목숨을 걸었다 했지. 심성은 옳은 것 같은데 자질이 관건이구나.’
약관(弱冠)이 코앞인 나이도 문제였다. 무공 수련은 물론 여러 면에서 어려움을 겪을 게 뻔했다.
‘게다가 시기도 안 맞지.’
허 자 배가 거두기엔 너무 늦었고 정 자 배가 거두기엔 너무 빠르지 않은가.
사제들의 표정을 보니 그들의 생각도 크게 다르지 않은 것 같았다.
‘역시 거절해야겠군.’
백진환은 눈치가 비상했다. 거절당할 낌새가 보이자 즉시 입을 열었다.
“부탁드립니다. 거절하시더라도 아이를 한 번만 봐주신 뒤 그래주시면 안 되겠습니까?”
“……그럽시다.”
백진환은 내심 한숨을 쉬었다.
‘아비는 할 만큼 했구나. 이제부터는 네게 달렸다.’
아들의 상태가 마음에 걸렸지만 다른 방법이 없었다.
“승무야. 들어오너라.”
문이 열리며 허리를 깊이 숙인 백승무가 보였다.
“안녕하십니까. 백가상단의 백승무가 곤륜의 선인들을 뵙습니다.”
“허허. 반갑네. 자네의 헌앙한 모습을 보니 백가상단은 아무런 걱정이 없…… 어?”
의례적인 인사말을 건네던 운학이 두 눈을 치떴다. 허리를 펴자 드러난 백승무의 얼굴이 엉망진창인 것 아닌가.
“자네 혹시 싸웠는가?”
“아닙니다.”
“음. 역시 그렇군. 누가 봐도 일방적으로 두들겨 맞은 얼굴이야.”
영추자가 한쪽 눈두덩이만 검게 물든 어설픈 웅묘였다면, 백승무는 양쪽이 다 검게 멍든 진짜 웅묘였다.
“그건 그렇고 내 묻겠네. 자네는 왜 본문의 제자가 되고 싶은가?”
“그건…….”
“꾸미지 말고 진짜 이유를 말하는 게 더 좋을 걸세.”
당황한 백승무의 귀에 백진환의 전음이 들려왔다.
-괜찮다! 아비가 일러줬던 그대로 말해! 곤륜 선인들처럼 도를 구하고 싶다고! 그리고 협행을 통해 어려운 이들을 돕고 싶다고!
백승무는 잠시 고민하다가 작은 한숨을 내쉬었다.
‘진인께서 저렇게까지 말씀하셨는데 거짓된 이유를 말하면…… 입문하게 된다 해도 내 어찌 가슴을 펴고 살겠는가.’
그는 결국 마음속에 담겨 있는 말을 그대로 꺼냈다.
“곤륜과 진옥룡이 멋있어서, 저도 그렇게 되고 싶어서입니다.”
*
꽤 오랜 시간이 지났지만 백승무는 아직도 어안이 벙벙했다.
‘내가 진짜 곤륜 제자가 된 건가? 어떻게? 왜?’
치기 어리다 못해 한심한 대답을 했을 뿐이었다.
그가 말해놓고도 부끄러워 얼굴을 붉혔건만, 운학을 비롯한 노도사들은 크게 기꺼워했다.
‘멋있어서라. 오랜만에 듣는 말이군. 나는 마음에 들었네. 사제들은 어떤가?’
노도사들도 찬성하자 운학이 결론을 지었다.
‘백 단주. 그렇게 합시다.’
‘……네?’
‘승무야. 네 사부가 될 이는 차차 정하마. 이제 떠나야 하니 어서 준비하거라.’
‘……네?’
귀신에 홀린 것 같았다.
정신을 차려보니 보퉁이를 어깨에 멘 채 모친인 허여민의 품에 안겨 있었다.
“흑흑. 결국 이렇게 되는구나. 항상 몸조심해야 한다. 어려운 일이 있으면 은공과 꼭 논의하고. 어이구 내 아들. 이렇게 보내긴 싫은데…….”
그녀는 그의 얼굴을 매만지며 닭똥 같은 눈물을 뚝뚝 흘렸다.
‘도사가 되겠다고? 네 녀석이 가문도 버리고 부모도 버리고 아주 미쳤구나!’라며 두들겨 팼던 그녀도 자식을 걱정하는 어미일 뿐이었다.
백승무는 한참의 시간이 지나고 나서야 그녀의 품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대체 뭐가 어떻게 되는 거야?’
어느새 그는 곤륜 도사들에게 둘러싸여 축하를 받고 있었다.
그 모습을 보며 시원섭섭한 표정을 짓던 백진환이 크게 외쳤다.
“곤륜 선인들의 무운을 빕니다!”
백가상단 사람들도 따라 외쳤다.
“곤륜 선인들의 무운을 빕니다!”
곤륜 제자들은 두 손을 모아 예를 표한 뒤 대문으로 향했다. 백진환이 엄청난 양의 선물들을 안겨줬으나 모두 거절했기에 몸도 마음도 가벼웠다.
백승무의 옆에서 걷던 정광이 묘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환영해요, 사제. 앞으로 잘…… 하아. 미치겠네. 이놈의 존댓말, 완전히 입에 붙어버렸잖아.”
“……은공?”
“은공이라니. 사형이라 불러. 앞으로 잘 지내보자. 아주 잘.”
백승무는 온몸에 소름이 돋았다.
이유는 몰랐지만 어쨌든 그랬다.
“선인들께서 나가신다! 문을 열어라!”
백진환의 외침에 거대한 대문이 활짝 열렸다.
그러자 한 남자의 모습이 드러났다.
“오오. 이제야 나오시는군. 그간 잘들 있었소?”
그의 얼굴을 본 곤륜 도사들이 일제히 굳어버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