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화
웅묘(熊猫)
영추자는 어려서부터 욕심 많고 영악한 사람이었다.
그는 무공을 열심히 익혔다. 윗사람들에게는 최대한 숙였다. 사문의 이익을 다투는 일에는 반드시 앞장섰다.
이 모든 것들이 나중에 그의 힘이 되어줄 거라 믿었기 때문이다.
그렇게 많은 시간이 흘렀다.
장문인을 꿈꿨던 그는 수많은 장로 중 한 명이 되어 있었다.
‘이건 말도 안 돼! 내가 저 녀석보다 못한 게 뭐가 있다고!’
그 대신 장문인이 된 이는 사형도 아닌 사제였다.
영추자의 오만한 마음에 한 줄기 균열이 생겼다.
본산에 있는 시간보다 강호 무림에서 보내는 시간이 늘어갔다.
그의 상처받은 자존심은 그곳에서만 치유할 수 있었다.
명문정파인 공동파에서도 영 자 배분이라는 높은 위치.
모두가 그를 공경했다.
누구나 그를 어려워했다.
분명 그랬는데…….
까닥까닥.
“아, 좀 오세요.”
분명 그랬는데……!
까닥까닥.
“그냥 제가 가요?”
감히 그를 시장통 파락호처럼 손가락으로 도발하다니!
진옥룡은 개뿔! 이 버릇없는 애새끼는 대체 뭐란 말인가!
“후우우우우…….”
깊게 숨을 내뱉자 마음이 조금 안정되었다.
이 정도의 도발에 말려들 정도로 그의 수양은…… 아니, 지능은 낮지 않았다.
이유야 어찌 되었든 어린 것과 손을 섞었다고 손가락질 받을 게 뻔한 상황. 이렇게 된 이상 압도적으로라도 이겨야 했다.
지킬 건 지키면서.
“정녕 내게 적수공권으로 덤빌 것이냐? 어서 검을 뽑아라.”
“권법으로 할게요.”
“검을 뽑으래도!”
“뭐 필요해지면 쓰죠.”
영추자의 눈매가 가늘어졌다.
천둥벌거숭이 같은 놈!
감히 내게 맨손으로 덤벼?
뭐, 그래주면 좋고.
“삼초(三招)를 양보하마. 오너라.”
보통 무림의 강자나 선배가 자신보다 약하거나 어린 후배에게 의례적으로 하는 말이다.
이러면 상대는 몇 번 사양하다가 감사의 말을 건네고 공격을 시작하는데, 영추자의 눈앞에 있는 이는 보통 사람이 아니었다.
“제가 삼초를 펼칠 때까지 정말 반격 안 하실 거예요?”
“……내 말을 의심하는 게냐?”
“그럼 아무것도 못 해보고 누우실 텐데 괜찮아요?”
“……이, 이놈이! 그럴 일은 없으니 와라!”
정광은 내심 고개를 저었다.
‘이런 것 때문에 정파 애들은 안 된다니까.’
어쨌든 바로 움직였다.
“일초요!”
우아하게 쏘아져 오는 보법과 멋스러운 권법!
모르는 이라면 겉멋만 든 무공이라 평하겠지만 영추자는 그 속에 깃든 힘을 알아챌 수 있는 고수였다.
‘검을 쓰라 해도 권법을 고집하더니 과연! 저 나이에 이미 훌륭한 권사(拳師)구나! 헌데 곤륜의 무공이 원래 이랬던가?’
이런 대단한 후기지수를 가진 곤륜파가 부러웠다.
‘아니지. 이런 개망나니 녀석은 없는 게 다행이다!’
영추자는 팔방환영보(八方幻影步)를 펼쳐 왼쪽으로 돌았다. 그런데 정광의 신형(身形)이 그의 몸에 붙어 있는 것처럼 따라오는 것 아닌가!
“헛!”
영추자가 헛바람을 들이키며 다시 보법을 밟았으나, 정광의 주먹은 멋들어진 호선을 그리며 지척에 이르러 있었다.
“이초요!”
영추자는 울화통이 터졌다.
이런 예의 없는 놈을 봤나!
어른이 삼초를 양보했으면 살짝 세 번 찔러보고 물러나야 하는 것 아닌가!
그리고 ‘양보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지금부터 어떤 무공을 펼칠 테니 많은 지도편달 부탁드립니다’ 하고 예를 표해야 하는 거 아니냔 말이다!
영추자는 천뢰복마신공(天雷伏魔神功)을 끌어 올려 정역팔괘(正易八卦)의 이치대로 걸음을 옮겼다.
이렇게 정광의 주먹을 옆으로 흘리고 다음 공격을 대비하는데.
“마지막 삼초요!”
정광의 주먹이 날아왔다.
그것도 수십 개가.
‘이 정도였던가!’
대경한 영추자는 소양검법(小陽劍法)을 펼쳤다. 순간적으로 그의 전면에 수없이 많은 검선으로 얽힌 검망(劍網)이 생겼다.
지켜보던 모든 이가 놀랄 만한 검법이었다.
‘아아! 역시 공동파의 장로구나!’
‘대단하긴 하다만 너무 과하지 않은가!’
공격이 아닌 방어였지만, 정광이 그대로 주먹을 뻗으면 팔이 조각나버릴 악독한 수법!
영추자의 입가에 가는 선이 생긴 그때, 수십 개였던 정광의 주먹이 하나로 합쳐지며 검망 한가운데를 때렸다.
쩡!
“크윽!”
신음을 뱉으며 한 걸음 물러난 영추자가 두 눈을 크게 떴다.
‘이럴 수가! 그 많던 허초(虛招)를 순간적으로 버리고 하나의 실초(實招)로! 게다가 검날이 아니라 검면을 쳐?’
검을 쥔 손이 찌르르 울렸다.
야단났다 싶어 검을 다른 손으로 옮기려 하는데, 정광이 그를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는 것 아닌가?
“……왜 그러느냐?”
정광의 입가에 맺혀 있던 미소가 조금씩 번지더니 얼굴 전체에서 활짝 피었다.
그것은 무서울 정도의 아름다움이었다.
“그래. 이거지.”
“무슨 뜻이냐?”
“이 정도는 받아줘야 싸울 맛이 난다고요.”
건방진 말에 버럭 화내려던 영추자는 이상한 느낌을 받았다.
정광의 활짝 웃는 얼굴이 그의 몸을 조여오는 것 아닌가!
‘이, 이놈! 대체 뭐 하는 물건이지?’
약관도 안 된 청년에게서 평생 겪어보지 못한 두려움을 느끼다니!
‘이 내가 그럴 리가 없다!’
영추자가 전신을 옭아매는 두려움과 맞서 싸우는 그때, 정광은 오랜만에 즐거움을 느끼고 있었다.
‘삼초로 끝낼 생각이었는데 버텨?’
곤륜이 답답해서 떠나고자 했다.
넓은 세상에 나가 즐기고자 했다.
전생에 안 해본 것이 너무나 많아 닥치는 대로 다 해보려 했건만. 역시 그의 마음을 가장 끌어당기는 것은 싸움이었던가.
‘역시 산에서 내려오길 잘했어.’
공동의 영 자 배분이면 곤륜의 운 자 배분과 같은 항렬이다.
정광이 운 자 배분의 도사들과 수많은 비무를 했지만 서로의 목숨을 노리는 싸움을 할 수는 없는 노릇. 영추자는 정광이 환생한 뒤에 싸운 상대 중 가장 강한 고수였다.
“쓰러지지 마세요. 오래 놀고 싶으니까.”
“……크윽. 이런 살기를 뿜으면서 뭐가 어째?”
“네? 살기는 안 일으켰는데요?”
“……!”
이게 살기가 아니었던가!
되물으려던 영추자는 입을 다물었다. 왠지 그 말이 사실일 것 같았다.
‘살기가 아닌데도 공포심이 느껴지는 기세라. 마치 죽어버린 그의 얘기 같군.’
누군가의 이름을 떠올렸던 영추자는 내심 고개를 저었다.
‘내가 죽을 때가 된 건가? 어린 녀석에게 겁을 먹고 진천마를 떠올리다니.’
확인하고 싶어졌다. 정광에게 이 싸움이 비무인지, 아니면 생사결(生死決)인지.
몇 번이나 입술을 달싹거리던 그는 간신히 입을 열어 전음을 보냈다.
-날 죽일 셈이냐?
-하는 거 봐서요.
영추자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어졌다.
‘하는 거 봐서? 감히 나한테?’
사제가 장문인이 되었을 때 그의 마음에 생겼던 균열이 시큰거리기 시작했다. 그 통증은 점점 커지더니 마침내 마음 전체로 퍼졌다.
영추자는 인정할 수 없었다.
‘갈! 내가 장문인이 돼야 했었다!’
거짓말처럼 균열이 메워지며 그의 갈라졌던 마음을 단단하게 붙였다. 새롭게 굳어진 그 형태는 그가 어렸을 때부터 지녀온 오만함이었다.
“좋아! 한번 해보자!”
그의 밑도 끝도 없는 말에 정광이 씩 웃었다.
“좋아요. 진작 이랬어야죠.”
누가 먼저라 할 것 없이 둘의 신형이 격돌했다.
콰앙!
“크흑!”
짧은 신음성과 함께 한 발자국 물러난 영추자가 손가락 하나를 들어 정광을 가리켰다.
“소양지(小陽指)!”
날카로운 지풍(指風)이 날아가 정광의 미간을 꿰뚫었다. 하지만 그것은 잔상일 뿐, 용형보(龍形步)를 펼쳐 영추자의 오른쪽에 나타난 정광이 주먹을 내지르며 외쳤다.
“무공 이름 따윈 접어두고 하죠!”
“좋다!”
영추자는 대답과 동시에 갈지자걸음으로 주먹을 피해내는가 싶더니 손에 쥔 검을 현란하게 휘둘렀다.
공동파의 절기, 복마검법(伏魔劍法)이었다.
“하하. 시원시원하네요!”
차갑고 괴이한 살기로 똘똘 뭉친 기괴한 검초들이 쏟아졌다.
비룡축전(飛龍逐電)을 펼쳐 전후좌우로 움직이며 틈을 노리던 정광은 영추자의 검이 계속 그를 따라다니자 방법을 바꾸었다.
그의 몸이 하늘 높이 날아올랐다가 영추자의 머리 위로 내리꽂혔다.
“어딜 감히!”
영추자는 두 다리를 태산처럼 디딘 채 하늘을 향해 검격을 쏘아댔다.
허공에서 떨어지던 정광은 검에 꿰이기 직전, 두 팔을 넓게 벌리며 허리를 틀었다. 놀랍게도 그의 몸은 허공에서 방향을 바꿔 영추자의 뒤로 이동했다.
지켜보던 모든 이가 부르짖었다.
“운룡대팔식(雲龍大八式)!”
곤륜파의 비전 경공술은 그 엄청난 명성답게 한 번의 움직임으로 끝나지 않았다.
영추자가 그의 뒤로 떨어져 내리는 정광에게 검을 찔렀으나 정광은 다시 한번 방향을 틀어 다시 영추자의 뒤로 떨어져 내렸다.
“소용없다!”
영추자가 검을 휘두르고 정광이 신형을 틀어 방향을 바꾸는 공방이 이어졌다. 그 수는 운룡대팔식의 초식인 여덟 번을 넘어 열 번이 되어서야 끝이 났다.
“받아라!”
힘을 잃고 떨어지는 정광에게 영추자의 검이 쇄도했다.
그 순간.
정광이 허공을 밟더니 영추자의 검을 피해 다시 날아올랐다.
“아아! 허공을 차고 움직여? 답허성실(踏虛成實)의 묘리구나!”
“순간적으로 저런 신공을 펼치다니!”
“사질이 저런 경지였던가?”
정광이 갓난아이일 때부터 함께해 왔던 곤륜 제자들도 벌어진 입을 다물지 못했다.
그가 강하다는 것이야 알고 있었지만 어렴풋하기만 했던 그의 경지가 눈앞에서 생생하게 펼쳐지고 있었다.
다른 이들의 놀라움은 더 컸는데 표사들과 주가장 무인들은 물론이요, 공동 제자들 또한 경악하고 있었다.
저 나이에 저런 경지라니, 생전 듣지도 보지도 못한 기사 아닌가!
“진옥룡 님! 최고입니다!”
“곤륜파는 청해성의 얼굴! 청해성의 자존심을 지켜주십시오!”
정광의 엄청난 무공에 넋이 나가 있던 무인들은 난데없이 들려오는 고함들에 정신을 차렸다.
주위를 둘러보니 어느새 많은 구경꾼이 모여 있었다.
허청은 그의 제자가 고금제일천재이며 절대로 지지 않을 거라 믿고 있었기에 여유가 있었다. 그는 옆에서 열심히 소리치며 응원하는 장한에게 물었다.
“여긴 어쩐 일로 오셨소?”
“네? 아! 성문에서 나오는데 이쪽에서 크고 하얀 새가 훨훨 날아다니며 춤을 추는 것 아닙니까? 그래서 뭔가 하고 와봤더니 그 유명한 진옥룡이셨습니다!”
다른 이들도 비슷한 대답을 했다.
아직도 많은 사람이 달려오고 있었다.
정광의 별호, 진옥룡을 연호하며!
가슴이 울컥한 허청은 두 눈을 지그시 감았다.
‘제자야. 무공이라곤 일초반식(一招半式)도 모르는 민초들이 너를 이렇게 칭송하는구나. 네가 걸어가는 길에서는 또 어떤 일이 일어날꼬?’
싸움은 막바지에 이르고 있었다.
내공을 많이 소모해 버린 영추자의 움직임이 느려지고 있었다.
하지만 그의 오만함은 그것을 용서치 않았다.
“그만 끝내마! 받아라!”
장로가 되어야 익힐 수 있는 칠십이로 복마신검(七十二路 伏魔神劍)!
영추자의 검에서 으스스하고 사이(邪異)한 검기가 줄기줄기 얽히며 뻗어 나왔다.
그것들은 마치 고슴도치처럼 날카로운 가시를 세워 정광을 향해 쏘아졌고.
지켜보던 무인들이 놀란 음성을 토했다.
“저건 칠십이로 복마신검!”
“과연 마(魔)를 굴복시킬 만한 무공이로다!”
경악하는 그들과 달리 정광은 피식 웃었다.
‘하. 복마(伏魔)는 개뿔.’
마(魔)하면 천마신교 아닌가.
정광이 천마신교를 싫어한다곤 하나 어쨌든 그의 본가였다.
그런데 공동파 따위가 굴복시킨다고? 저런 형편없는 무공으로?
천마신교를 굴복시킬 수 있는 건 정광 본인뿐이었다.
그는 눈앞에 있는 ‘복마’라는 이름을 지우기로 했다.
허리에 찬 검을 뽑고 상청무상신공(上淸無上神功)을 일으켰다. 검신이 그 기운을 오롯이 머금어 희미하게 빛났다.
정광은 검을 횡으로 그었다.
일체의 변식도 없는 단순한 초식. 하지만 그 결과는 놀라웠다.
촤아아아악-
비단이 찢어지는 듯한 소리와 함께 고슴도치처럼 찔러오던 검들이 갈라졌다.
그 틈으로 영추자의 하얗게 질린 얼굴이 드러났다.
“궈, 권법으로 하겠다 했잖느냐!”
정광은 한 손을 들어 주먹을 쥐며 대답했다.
“하도 검 쓰라 하셔서 필요해지면 쓴다 했잖아요.”
아. 그랬었지.
이게 영추자의 마지막 생각이었다.
뻐억!
*
잠시 기절했던 영추자는 정신을 차렸다. 고개를 돌려보니 정광이 뚱한 얼굴로 쭈그리고 앉아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내가 졌군.”
“네.”
“……내가 졌지 공동이 진 게 아니다!”
“그런가요.”
“…….”
잠시 침묵하던 영추자는 몸을 일으켰다. 순간 현기증이 돌았으나 강인한 정신력으로 꼿꼿이 일어섰다.
그의 시선이 운학과 마주쳤다.
영추자는 한 자씩 씹어뱉듯 말했다.
“공동은 이 일에서 손을 떼겠소.”
“주가장은 어떻소?”
주가장의 수장인 주환설은 성내의 의방에 누워 있는 상황. 크게 한숨을 쉰 영추자가 고개를 끄덕였다.
“주가장도 마찬가지요. 이제 되었소?”
“됐소이다.”
영추자는 다시 시선을 정광에게 돌렸다. 뭐가 그리도 아쉬운지 두 손을 주무르던 정광이 그의 날카로운 시선에 반색했다.
“더 하실래요?”
“……내가 몇 대를 맞은 거지?”
“눈두덩이에 한 대요.”
영추자는 시꺼멓게 멍들은 자신의 오른눈을 매만지며 중얼거렸다.
“……볼만하겠군.”
“아뇨. 웅묘(熊猫:판다) 같기도 하고 그렇게 흉하진 않아요.”
“……한 가지 물어봐도 되겠느냐?”
“그러시죠.”
모든 이들의 시선이 영추자의 입에 몰렸다. 강호말학(江湖末學)이라 할 수 있는 정광에게 패한 그가 어떤 점을 물으려 하는지 궁금했던 것이다.
하지만 그의 입에서 흘러나온 말은 전혀 의외의 것이었다.
“왜 계속 두 손을 어루만지고 있지? 설마 더 때리지 못해 아쉬워서 그런 게냐?”
“와. 어떻게 아셨지?”
뭔가 안 좋은 상상을 한 듯 파랗게 변했던 영추자의 얼굴이 차갑게 굳었다.
“잊지 않으마. 다음에 보자.”
“어? 괜찮겠어요?”
한차례 몸을 떤 영추자는 공동 제자들과 주가장 무인들을 이끌고 떠났다.
그때까지 겨우 참고 있던 사람들이 두 팔을 높이 들며 외쳤다.
“진옥룡 만세!”
“곤륜파 만세!”
모두가 환호하는 그때, 멀리서 정광을 바라보며 두 주먹을 불끈 쥔 사람이 있었다.
‘나도! 나도 언젠가는 반드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