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곤륜마협-28화 (28/569)

28화

일대종사(一代宗師)

사람은 너무 놀라면 침착해진다.

백진환이 지금 그랬다.

그의 머릿속에 ‘조카’와 ‘이모’라는 단어의 의미가 떠올랐다.

‘모친의 자매가 이모지. 자매의 자식이 조카고. 아. 둘이 그런 사이였구나.’

고개를 끄덕이던 백진환은 곧 세차게 저었다.

그런 사이는 개뿔!

정광은 분명 고아였다!

오래전 곤륜에 갔을 때, 갓난아이였던 그가 배를 곯는 게 불쌍해서 허여민이 젖을 물려주지 않았던가!

“조카. 이제 다 컸다고 안기지 않는 거야?”

“어릴 때도 이모가 억지로 안았던 거잖아요.”

“섭섭하네.”

“몸도 안 좋은데 왜 오셨어요?”

“조카 덕분에 많이 좋아졌잖아. 덕분에 산책도 할 수 있어 얼마나 행복한지. 모두 조카 덕분인데, 이번에 하산했다는 소문을 들었어. 내가 어찌 안 나와볼 수 있었겠니?”

백진환은 연 부인에 대한 소문을 기억해 냈다.

‘서녕 대지주의 무남독녀인 연 부인은 어려서부터 몸이 허약하다 했지.’

빼어난 미모를 갖고 태어난 대신 건강을 뺏긴 걸까.

어떤 방도를 써도 유지만 될 뿐 호전되지를 않았다.

결국 마음을 비운 그녀는 곤륜산에 가마를 타고 올라 치성을 드리기 시작했다.

그리고 십여 년 전 새로 부임한 청해성주와 혼인을 하게 되었는데, 그녀를 끔찍이 아끼는 성주가 백방으로 애를 써봤지만 별 소용이 없었다 한다.

그녀는 그 후로도 계속 곤륜산을 오르며 치성을 드렸는데…….

‘아! 몇 년 전부터 건강이 확연하게 좋아졌다고 들었는데 혹시?’

백진환의 생각대로였다.

그녀는 곤륜산에 오를 때마다 갓난아이인 정광을 돌보며 자신을 ‘이모’라 부르라고 했다.

그 후 시간이 흘러 장성한 정광이 의술과 내공을 써서 그녀를 치료한 것이다.

“완치되는 병이 아니라니까요. 찬바람 쐬면 안 좋으니까 그만 가세요.”

“하아. 오랜만에 만났는데 조카는 안 좋은 얘기만 하는구나.”

“아. 장점을 말해야 하는 건가?”

“……?”

“이모, 그간 많이는 안 늙었네요.”

연 부인의 눈이 커졌다.

칭찬 같지도 않은 칭찬이었지만 정광에게 처음 듣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그녀는 손뼉까지 쳐가며 기뻐했다.

“무량수불. 네가 그런 말을 하다니 원시천존께서 도우셨구나. 누구한테 배운 것이지?”

“유모요.”

“산양을 말하는 건 아닐 테고.”

“당연하죠.”

“소개해 주겠니?”

“바로 옆에 있는데요.”

호기심에 찬 얼굴로 듣고 있던 허여민이 화들짝 놀랐다.

“아, 안녕하십니까. 백가상단의 허여민이라고 합니다.”

“아아. 반가워요. 조카에게 좋은 걸 가르쳐 주셔서 고맙습니다.”

“아닙니다. 은공이 본래 선한 분이라 그러신 겁니다.”

“은공이라. 조카가 무슨 도움을 주었나요?”

“실은…….”

자고로 여인은 공통된 관심사를 가진 이를 만나면 끝도 없이 대화를 나누는 법.

그녀들은 정광과의 추억을 얘기하느라 시간 가는 줄 몰랐다.

벌써 둘도 없는 친구가 된 듯한 모습이었다.

백진환은 두 주먹을 불끈 쥐었다.

‘연 부인이 은공과 친분이 있었구나! 게다가 민 매와도 연을 쌓게 되다니 이런 기연이 있나!’

때마침 연 부인의 시선이 그에게 향했다.

“아. 실례했군요. 단주의 말대로 연 대인이 제 부군이십니다.”

“마, 만나 뵙게 되어 영광입니다!”

“진옥룡수호단의 장로로 활동하고 있는 아녀자일 뿐입니다. 이 나이에 주책이지요?”

무려 청해성주의 부인이다.

황제쯤 돼야 주책맞다고 대답할 수 있지, 누가 감히 그렇다고 할 수 있겠는가?

백진환은 미친 듯이 고개를 저었다.

“천만에요! 절대 아닙니다! 아주 건전하고 뜻깊은 활동이라 믿어 의심치 않습니다!”

“좋게 얘기해 줘서 고맙군요. 부인과 마음이 통해 대화를 더 나누고 싶은데 괜찮을까요?”

“물론입니다! 당연한 일이지요! 얼마든지, 마음껏 그러십시오! 날씨가 차니 따뜻한 곳에서 편히 대화하시는 게 어떻겠습니까?”

그의 마음을 눈치챈 허여민이 연 부인에게 양해를 구한 뒤 장원으로 뛰어갔다.

귀한 손님을 맞이하기 전에 집 안을 정돈하기 위해서였다.

‘하하하. 일이 이렇게 풀리다니.’

백진환의 입은 귀에 걸리다 못해 찢어질 정도로 벌어졌다.

‘성주의 부인이 우리 편이 된다?’

청해성주는 청해성의 왕과 같은 존재이다.

관이 무림을 간섭하지 않는다 하나 영향을 끼칠 순 있다.

성주가 나서서 한마디만 던져주면…….

‘청해성에서 감히 어느 문파가 우리의 사업을 방해할 수 있겠는가!’

한참 장밋빛 미래를 꿈꾸는데 정광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이럴 줄 알았다니까. 이모, 가만히 있어 봐요.”

고개를 돌려보니 정광이 연 부인의 손목을 잡고 진기를 밀어 넣고 있었다.

다소 창백해졌던 연 부인의 얼굴에 혈색이 되돌아왔다.

“고마워, 조카.”

“빨리 장원 안으로 들어가세요.”

“그보다 중원에 간다고 들었어. 그 전에 우리 집에 들를 거지?”

“아니요.”

“왜?”

“사숙조님들이 아저씨 불편해하시는 거 아시잖아요.”

“그이가 전에 보낸 비단 도복 같은 것들 때문에?”

“그런 것들도 그렇고 곤륜을 증축하겠다고 난리를 치셔서 다들 학을 떼세요.”

연 부인은 할 말이 없었다.

성주는 그녀를 치료해 준 정광이 속한 곤륜파에 무지막지한 선물들을 보냈다. 심지어 곤륜산에 산재한 도관들에 금박을 입힐 기세 아니었던가.

“으음. 이번엔 아무것도 못 드리도록 내가 잘 말할게.”

“고집불통 아저씨가 퍽도 그러겠네요.”

“하아. 그럴 것 같긴 하구나. 그렇다고 이대로 보낼 순 없지. 뭐라도 주고 싶은데…… 아. 주가장이라는 자들과 문제가 생긴 거지? 중재해 줄까?”

백진환이 자신도 모르게 ‘네!’라고 외칠 뻔했으나 정광이 더 빨랐다.

“아뇨.”

“어떡하려고?”

“그냥 두들겨 패려고요.”

“공동파가 뒤에 있는 것 같은데? 강호에 무지한 나조차 알 정도로 대단한 자들 아니니?”

“같이 패면 되죠.”

백진환은 두 귀를 의심했다.

팬다고?

공동파를?

구파일방의 한 축이자 감숙성의 패자인 공동파를 말하는 거 맞아?

경악하는 그와 달리 연 부인은 흐뭇한 미소를 지었다.

정광이 고개를 갸우뚱했다.

“왜 웃어요?”

“너다워서.”

“새삼스럽게 무슨.”

“하하하하.”

한동안 웃던 연 부인이 손을 들어 올렸다.

조막만 한 갓난아이였지만 어느덧 훤칠한 장부가 된 정광이었기에, 그녀는 까치발을 해서야 겨우 그의 머리를 쓰다듬을 수 있었다.

“네 뜻대로 하되 항상 몸조심해야 한다.”

정광이 씩 웃었다.

“이모도요.”

백진환의 참담한 얼굴을 배경으로 그들은 오랫동안 미소 지었다.

*

곤륜 제자들과 진옥룡수호단원들이야 연 부인에 대해 이미 알고 있었지만 다른 이들은 아니었다.

여인들은 연 부인의 정체를 듣자마자 옆의 이들과 귓속말을 나누며 호들갑 떨기 시작했다.

귓속말은 거품을 물고 달리는 말보다 빠르게 공터에 있는 모든 이들의 귀에 전해졌다.

주환설 무리는 그 누구보다 경악했다.

‘성주의 부인!’

‘그런 이가 곤륜의 진옥룡과 연이 있었던가!’

한참 머리를 굴리는 주환설의 귀에 공동파 진산제자들의 수장인 영추자의 전음이 들렸다.

-일이 이상하게 돌아가는군. 어떻게 할 건가?

듣기만 해도 짜증을 유발시키는 칼칼한 목소리.

주환설은 애써 공손한 표정을 지으며 대답했다.

-놀랍지만 걱정할 일은 아닙니다, 사백.

-어째서?

-우리의 상대는 곤륜이 아니라 백가상단입니다. 게다가 성주 부인이 중재할 뜻을 내비쳤으나 진옥룡이 거부했지 않습니까? 관의 개입은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진옥룡이라? 흥. 오만한 별호군.

-나이는 어리나 청해사흉을 비롯하여 황하와 당고랍산맥의 도적들을 처단한 고수입니다. 얼마 전에는 하늘을 날아오르는 신위를 보였다더군요.

-청해사흉이야 나도 들어본 마두들이지만 곤륜 제자들이 합공해서 잡았을 터. 도적놈들은 자네가 표국에 몰아넣은 쓰레기들 아닌가. 그리고 하늘을 날아? 허허. 곤륜이 신성을 만들려고 아주 애를 쓰는구먼.

물론 주환설도 소문이 많이 과장되었을 거라 생각했다.

생긴 건 오히려 소문이 부족할 지경이었지만.

-이대로 기다려야 하는가?

영추자는 사람들을 둘러보며 인상을 찡그렸다. 그는 기다림이 익숙한 신분이 아니었다.

-차라리 잘되었습니다.

-그게 무슨 뜻이지?

-곤륜이 표사들을 잡아갔으니 진옥룡을 암습한 죄는 마무리된 것이나 마찬가집니다.

-저들이 이대로 끝낼 순 없다고 강짜를 부리면?

-어차피 서로 간에 이견이 있을 수밖에 없으니 얘기가 길어질 겁니다.

-자세히 말해보게.

-곤륜은 무림맹 재창설 건으로 하남성으로 향하던 중입니다. 이곳에서 많은 시간을 보낼 여유가 없지요.

-오호라. 계속 밀고 당기면서 시간을 끌겠다?

-그렇습니다. 시간이 촉박한 그들은 얼마 안 가 떠날 겁니다. 그때 백가상단을 상대하면 됩니다.

-괜찮군. 아주 괜찮아. 곤륜이 하북팽가를 밀기로 했다는 소문이 있던데 이 기회에 아예 발목을 잡아버리는 게 좋겠어.

-본산에서는 어디를 지지하기로 하셨습니까?

-……자네가 알 일이 아닐세. 신경 쓰지 않는 게 좋겠군.

내친김에 슬쩍 물어봤다가 본전도 못 찾은 주환설은 재빨리 고개를 조아렸다.

“주제넘은 짓을 해서 죄송합니다, 사백.”

“큼. 알면 되었네. 앞으로 조심하게나.”

“물론입니다.”

찌푸렸던 표정을 풀은 영추자는 사람들의 머릿수를 가늠하며 물었다.

“두세 시진만 더 기다리면 되겠지?”

“그 정도면 충분할 것 같습니다. 조금만 참으시지요.”

*

조금만 참기는 무슨.

천막을 괜히 친 게 아니었다.

사람이 너무나 많았기에 천막에서 쪽잠을 자며 차례를 기다리던 여인들은 한 명도 빠짐없이 정광의 축원을 받게 되었다.

그사이 곤륜 도사들은 연을 쌓기 위해 찾아온 서녕의 유력자들을 위해 제를 지냈다. 너무나 정성스럽게 지냈기에 삿된 마음을 품고 왔던 유력자들은 곤륜에 대한 존경심을 가슴 한편에 심게 되었다.

이 모든 일은 꼬박 하루가 지나고 나서야 끝이 났다.

‘이제야 다 떠났구나!’

기다리다가 폭발한 영추자에게 종일 시달렸던 주환설은 기쁨의 눈물을 흘릴 뻔했다.

그는 바로 백진환에게 회담을 요청했다.

양측은 텅텅 빈 천막들 옆에서 마주 보고 앉았다.

먼저 포문을 연 건 주환설이었다.

“그럼 하나하나 따져봅시다.”

설움과 독기가 쌓여서일까.

그는 정말로 많은 것들을 따지기 시작했다.

문제의 핵심으로 들어가기는커녕 언저리만 뱅뱅 도는 그의 화법에 상대는 짜증을 내야 했건만…….

‘……담담해?’

주환설이 의아해하는 그때, 정광이 한 무리의 사내들을 데려왔다.

부러진 양팔에 부목을 댄 주연표국 표사들이었다.

‘무슨 수를 쓰려는 건지 모르겠지만 패착을 둔 거다.’

말이 표사지 본질은 도적이다.

곤륜파에 사로잡힌 그들이 기댈 곳은 주가장밖에 없었다.

‘저들을 시켜서 백가상단을 성토해야겠군.’

주환설은 그들의 우두머리인 지재원에게 전음을 보냈다.

-자네가 진옥룡을 암습했다는 게 사실인가?

-절대 아니오!

-그럴 줄 알았네. 그래도 살았으니 다행일세. 백가상단이 그대들을 얼마나 위협했나 말하게나. 그래야 자네들을 구해줄 수 있어.

-…….

-뭐 하는가? 어서 말하게.

-……미안하오. 이해해 주시오.

-이해해 달라고? 무엇을?

곧 알 수 있었다.

지재원과 표사들이 한목소리로 외쳤다.

“저자의 지시로 백가상단을 공격하고 진옥룡을 암습했습니다!”

“……!”

표사들의 손가락 끝은 주환설을 가리키고 있었다.

“……지금 뭐 하는 건가!”

주환설은 황당했다.

백가상단을 공격하도록 한 거야 사실이긴 하지만 진옥룡이라니?

백진환이 느긋한 표정으로 추궁했다.

“주연표국이 이번 일의 원흉으로 주 대협을 지목하는구려. 해명해 보시겠소?”

“이보시오, 백 단주. 대체 저들을 얼마나 겁박했길래 있지도 않은 사실을 말하는 것이오?”

주환설은 운학에게 시선을 돌려 정중하게 해명했다.

“진인께서는 저들의 말을 믿지 마십시오. 저는 그런 지시를 한 적이 없습니다.”

“나는 진인이 아니네.”

“……!”

주환설은 머리를 한 대 얻어맞은 듯했다.

스스로 진인이 아니라니!

얼굴에 철판을 깔고 억지를 부리겠다는 의미 아닌가!

‘일이 힘들게 됐구나.’

터무니없는 오해를 하는 그에게 진짜 힘든 일은 지금부터였다.

정광이 앞으로 나서며 그를 바라봤다.

“빨리 실토하시죠.”

“……무슨 말인가?”

“저를 암습하게 했다면서요.”

“터무니없는 소리! 나는 절대 그런 짓을 시킨 적이 없…….”

표사들이 한목소리로 외쳤다.

“저자가 시킨 게 맞습니다!”

“내가 언제…….”

“어제 시켰습니다!”

주환설은 미칠 지경이었다.

“이보게 진옥룡! 그대가 저들을 협박했는가? 그러지 않고서야 저런 모함을 할 리가 없잖은가!”

대답은 표사들이 했다.

“협박받은 적 없습니다! 사실을 말했을 뿐입니다!”

많은 사람이 상황에 맞춰 똑같은 말을 동시에 외치는 건 불가능한 일이다.

‘분명 누군가의 지시를 받고 하는 것일 텐데 대체 어떻게? 설마 전음?’

전음이란 내공을 입에 모아 상대의 귀에 기파를 보내는 것이다. 한 명에게만 보낼 수 있기에 이건 아닌 게 분명했다.

하지만 그가 상상조차 못 하는 것이 있었으니.

전생의 정광은 진천마.

일대종사(一代宗師)였다.

여러 사람에게 동시에 보내는 전음술을 창시했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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