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7화
의외의 족보
몰래 하면 되잖아요-
몰래 하면 되잖아요-
몰래 하면 되잖아요-
백승무는 귓속에서 맴돌던 메아리가 사라지고 나서야 확신할 수 있었다.
‘이 인간, 정상이 아니구나.’
강호 문파의 규율은 엄격하다.
어길 시에는 가혹한 처분이 내려지기 마련. 곤륜파 같은 명문정파라면 정도가 더 심한 게 당연하다.
그런데 몰래 하면 되지 않냐니.
백승무는 혹시나 싶은 마음에 한번 물어보기로 했다.
우선 좀 가벼운 거부터.
“은공. 곤륜 제자가 술…… 아니, 곡차(穀茶)나 고기를 먹었다가 들키면 어찌 됩니까?”
“어린 배분 같은 경우 고기는 눈감아주는데 곡차는 가차 없죠.”
“어떤 처분을 받는지요?”
“참회동(懺悔洞)에 반년 정도 처박혀요.”
“……할 만합니까?”
“전에 정현 사형이 한 번 들어갔다 나왔는데 그 후로 고기나 곡차 냄새만 맡아도 토하던데요.”
“……냄새만 맡아도요?”
“보기만 해도 그랬었던가?”
“…….”
고기와 술만 해도 그 정도란다.
그렇다면 여색(女色)과 관계된 것이면?
백승무는 두려움을 삼키고 용감하게 물었다.
“그…… 여인과 관계를 맺으면 어떻게 됩니까? 혹시나 해서 묻는 겁니다. 혹시나.”
“그건 모르겠네요. 안 그래도 궁금한데 입문해서 직접 해보시죠.”
“……사양하겠습니다.”
“아, 왜요? 입문하세요.”
“……색계를 어겼을 시 어떤 처분을 받게 되는지 궁금해서 저보고 입문하라고 하시는 겁니까?”
“네.”
한순간의 망설임도 없는 대답에 백승무는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후우우우. 괜한 기대를 했군요.”
“무슨 말이에요?”
“제 자질이 쓸모 있어서 입문을 권하시는지 알았습니다. 하하하.”
겉으론 웃었지만 속은 말이 아니었다.
이 정도밖에 안 되는 건가.
구파일방의 제자가 되기엔 턱없이 부족한 자질이었구나.
내 주제에 대협은 무슨.
이제라도 정신을 차리고 현실에 맞게…….
“아예 못 쓸 정도는 아닌데요.”
“정말입니까? 진심입니까? 거짓이 아니겠지요? 은공, 어서 말해주십시오! 제가 곤륜에 입문하길 원하십니까? 제가 왜 필요한 겁니까?”
쾌검술(快劍術)의 달인보다 빠른 백승무의 말에 정광은 솔직하게 대답했다.
“내가 지금 십구 년째 막내로 살고 있거든요.”
“……그런데요?”
“편하게 부려먹을 사제가 필요한데, 그쪽이 딱 적임자 같아서요.”
*
무척 긴 밤이었지만 결국 아무 일도 없이 날이 밝았다.
운학은 떠오르는 해를 보며 턱수염을 쓰다듬었다.
“흐음. 잘된 일인지 아닌지 모르겠군.”
“하하. 어둠 속에서의 싸움을 피한 게 어딥니까? 괜한 사상자가 안 나와서 다행입니다.”
백진환의 위로에 운학이 고개를 저었다.
“우리는 밤에 싸우는 게 자신이 있어 아쉬워서 한 말이오.”
“……?”
정광의 지옥수련은 밤낮을 가리지 않았다는 걸 백진환이 알 수는 없는 일. 의아해하던 그가 미소 지으며 권했다.
“일단 식사부터 하시지요. 진인들께 맞게 소채를 준비했습니다.”
“어허. 진인은 없다니까. 어쨌건 고맙게 먹겠소이다.”
이른 아침 식사가 시작되었다.
생각보다 맛있는 요리에 즐거워하던 곤륜 도사들은 시간이 지날수록 얼굴을 찌푸렸다.
외부에서 들려오는 소음과 커지는 기운 때문이었다.
“방심한 건가? 사람이 모이고 있군.”
“벌써 이 넓은 장원이 둘러싸였소이다. 어찌하시겠소, 사형?”
“손님이 왔으면 나가봐야지.”
곤륜 도사들과 백가상단의 무인들은 단단히 채비한 뒤 대문을 열었다.
주인인 백진환이 성큼 나서며 쩌렁쩌렁한 목소리로 외쳤다.
“본 장에 방문하신 것을 환영하오! 무슨 일로 이 아침부터…… 엉?”
백진환은 물론 모든 이의 눈이 커졌다.
전혀 의외의 사람들이 장원을 포위하고 있는 것 아닌가!
“꺄아아아악! 진옥룡 님!”
“제발 여기 좀 봐주세요!”
“아악! 어서요! 나 죽어!”
새까맣게 깔린 인파에서 사분지 삼은 여인들이었다.
그녀들 사이에선 ‘진옥룡수호단’이라고 쓰인 깃발들이 간간이 나부끼고 있었다.
“허어…….”
“뭐, 뭐야 대체?”
백가상단 사람들은 벌어진 입을 다물지 못한 채 멍하니 바라보기만 했다.
하지만 곤륜파는 달랐다.
바로 정신을 차리고 정리를 하기 시작했다.
“무량수불! 찾아와 주신 도우들께 감사드립니다!”
“정광에게 일러 도우들을 맞이하도록 할 테니 조용히 해주십시오!”
“그래주시면 더 많은 시간을 함께하실 수 있으실 겁니다!”
거짓말처럼 소란이 멎었다.
게다가 도사들의 안내에 따라 질서정연하게 줄을 서기까지!
곤륜에서 이와 같은 일을 수도 없이 겪어온 도사들이었다.
그들은 경악하는 백가상단 사람들을 놔둔 채 바쁘게 움직였다.
허 자 배의 대사형인 허청은 한 여인을 보며 반갑게 인사했다.
“아! 진옥룡수호단 격이목(格爾木) 지부장 영화 도우도 계셨군요. 먼 길 오시느라 고생하셨습니다.”
“무량수불. 진인들의 청정을 방해해서 죄송합니다.”
“하하. 방해라니요.”
“진옥룡께서 세상에 나오셨으니 큰 혼란이 일어날 것은 당연한 일. 질서를 잡는 데 미력한 도움이나마 될까 싶어 염치불구하고 오게 되었으니 양해해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천만의 말씀. 천군만마를 얻은 기분입니다. 근데 단주님께서는 안 보이시는 것 같습니다?”
“단주는 진옥룡께서 다시 돌아오실 때까지 곤륜에 남아 힘을 보태기로 했습니다. 그것이 진정 진옥룡을 위한 일이고 그분을 키워주신 곤륜에 조금이나마 보답하는 것이라 하더군요.”
“무량수불. 단주님을 비롯한 여러분의 마음에 깊이 감사드립니다. 오늘도 잘 부탁드리겠습니다.”
“당연히 해야 할 일일 뿐입니다. 그보다 도장께서는 산에서 내려오시니 안색이 더 좋아지셨군요.”
“이런. 그렇게 티가 납니까? 허어. 이 일을 어쩐다? 하하하.”
허청과 격이목 지부장은 물론 곳곳에서 곤륜 도사들과 진옥룡수호단원들이 웃음꽃을 피웠다.
자연히 분위기는 화기애애하게 변해 갔고 다른 무리들은 그들의 통제와 안내에 따라 질서정연하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하지만 정광이 나타나자 여기저기서 균열이 생겼다.
“진옥룡 님! 천 리 길을 달려왔습니다! 부디 한 말씀만 해주시와요!”
“제발 그러지 좀 말라니깐! 여러분! 모두 저년을 제압하세요!”
“네!”
“아, 안 돼!”
난입을 시도하던 처자는 진옥룡수호단의 철통같은 방어 앞에 무력화되었다.
“곤륜파의 진인들을 뵙게 되어 영광입니다! 소생은 서녕제일무관 와룡관의 관주 황일비라 합니다! 오늘 이렇게 찾아온 것은 다름이 아니옵고…….”
“아, 뭐래 진짜! 아저씨, 왜 그리 개념이 없어요?”
“새치기하지 말고 줄 서세요! 아 빨리요!”
“헉! 아, 알겠소이다!”
곤륜파와 연을 만들려던 서녕의 유력자들은 수많은 여인의 살기에 찌그러졌다.
‘은공의 명성이 높은 건 알았지만 이 정도였던가!’
백진환을 비롯한 백가상단 사람들은 정광의 얼굴을 새삼스레 바라봤다.
떨떠름한 얼굴로 서 있던 정광은 허청이 밀자 한 걸음 나설 수밖에 없었다.
“무량수불. 오셨어요?”
그가 두 손을 모으며 한 말에 천지가 무너질 듯한 대답이 들려왔다.
“네!”
“음. 너무 많이 오셨네요.”
“네!”
티 없이 맑은 대답에 정광은 내심 고개를 저었다.
‘아직도 더 오고 있잖아.’
사람이 계속 모이고 있었다.
심상치 않은 자들도 다가오고 있었는데 무거운 기세를 풍기는 백여 명의 무인들이었다.
선두에 선 날카로운 눈매의 중년인은 북적대는 인파를 보며 인상을 찡그렸다.
그가 눈짓하자 수하들이 손을 휘저으며 고함을 질러댔다.
“길을 비켜 주시오! 급한 일이오!”
“주가장에서 백가상단과 담판을 지으러 왔소! 미안하지만 먼저 좀 지나가겠소!”
“협조를 부탁드리오! 주가장은 도움을 잊지 않소이다!”
백여 명의 무인이 내공을 실어 외치니 장내가 쥐죽은 듯 조용해졌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어이가 없어서 잠시 말문이 막혔던 여인네들은 악다구니를 질렀다.
“이건 또 뭐에 쓰는 개뼈다귀들이야!”
“주가장이 뭐! 그게 벼슬이냐?”
“입 닥치고 줄이나 서요! 어휴, 진옥룡 님께 별 이상한 홀아비들이 꼬이네.”
멈칫했던 무인들에게서 점점 살기가 일어났다.
그러나.
여인네들의 살기도 만만치 않았다.
“뭐! 노려보면 어쩔 건데! 엉?”
“쳐봐! 쳐보라고!”
“오호라. 우릴 다 죽이시겠다? 그런다고 진옥룡 님을 지키는 우리의 마음마저 벨 수 있을 줄 아냐!”
여인들이 한 치도 물러서지 않고 맞서자 무인들의 눈에 당황의 빛이 떠올랐다.
선두의 중년인은 내심 탄식했다.
‘완전히 밀렸군.’
대충 봐도 군중 속에는 서녕에서 방귀깨나 뀐다는 인물이 수두룩했다.
‘여기까지라면 그래도 할 만하지만…….’
더 큰 문제는 여인들이었다.
딱 봐도 고급스럽게 치장한 이들이 많았는데, 이는 보통 가문에 속한 이들이 아니라는 얘기였다.
서녕 유력자들과의 다툼이야 이해관계를 조금씩 양보하면 매듭지을 수 있지만 여인들은 아닌 것이다.
‘혹시라도 다치게 했다간 그 여인의 아비, 형제, 남편, 자식이 목숨을 걸고 달려들 터. 여기선 굽혀야 한다.’
중년인은 뒤에 있는 누군가에게 허락을 받은 뒤 포권을 하며 외쳤다.
“소생은 공동파의 속가제자인 주환설이라 하오! 경황이 없어서 무례를 저질렀소이다! 강호제현(江湖諸賢)들께 사과드리니 아무쪼록 탓하지 말고 받아주시오!”
주환설!
공동파의 수많은 속가제자 중에서도 무명이 높은 고수이자 강호 명문 주가장의 중진!
감숙성을 넘어 인근 성들에도 명성이 퍼진 대단한 고수 아닌가!
하지만 여인들에게는 짜증 나는 불청객일 뿐이었다.
“공동파니까 알아서 꿇으라고?”
“사내가 웬 말이 이렇게 많아?”
“됐으니까 줄이나 서세요!”
“……알겠소이다.”
주환설은 분노를 억누르며 수하들과 함께 줄을 섰다.
한편 상황을 지켜보던 백가상단의 인물들은 헛바람을 들이켰다.
‘주, 주환설? 공동속가제일고수라 불리는 그 냉면잔검(冷面殘劍)?’
‘주가장이 이렇게 노골적으로 나서다니! 모두 기세가 엄정한 게 정예 무인들만 뽑아온 것 같구나!’
‘아아. 이 일을 어쩔꼬. 이번 일은 길(吉)보단 흉(凶)이 많을 게 분명하다.’
주가장이 대단한 가문이라 하나 곤륜에 맞서기에는 많이 부족했다.
그런 그들이 이렇게 당당하게 나온다?
공동파를 등에 업고 끝장을 보겠다는 말 아닌가!
그걸 증명하듯 무인들 후미에 흑색 도복을 입은 도사들이 몇 명 보였다.
‘공동파가 직접 오다니!’
마음이 급해진 백진환은 운학에게 전음을 보냈다.
-진인! 공동파입니다!
-알고 있소.
-공동파가 이렇게 대놓고 나설 줄은 몰랐습니다! 그들이 이번 일의 주체인 게 확실히 드러났는데 이 일을 어찌합니까!
-먼저 여기까지 찾아와 주신 도우들께 성의를 보여야지요.
-……네?
운학은 눈만 끔뻑거리는 백진환을 놔둔 채 입을 열었다.
그의 담담한 목소리가 모든 이의 귀에 선명하게 꽂혔다.
“무량수불. 이제껏 하던 대로 진행해도 괜찮겠습니까?”
그의 의미를 알 수 없는 말에 진옥룡수호단이 일제히 화답했다.
“감사합니다, 진인! 그렇게 부탁드립니다!”
“진인이라니요. 턱없이 부족한 늙은이일 뿐입니다.”
“무량수불!”
“도우들께서 많이 방문해 주셔서 시간이 제법 걸릴 듯합니다. 본산이 아닌지라 백가상단에 폐를 끼쳐야 할 것 같은데 도우들께서 도움을 주셨으면 합니다.”
“물론이지요, 진인! 그리하겠습니다!”
마치 한 편의 잘 짜인 경극 같은 대화가 끝났다.
운학은 멍하니 서 있는 백진환에게 말을 건넸다.
“단주. 천막이 많이 필요하오. 도우들께서 섭섭지 않게 값을 치를 터이니 준비를 부탁하오.”
“……네? 네. 알겠습니다.”
운학의 지휘하에 제단이 쌓이고 약소하나마 제물이 올려졌다.
그때쯤 백가상단은 가지고 있던 천막들을 몽땅 가져와서 넓은 공터에 치고 있었는데 어찌나 많은지 실로 장관이었다.
‘이게 대체 뭐 하는 짓인가?’
자신이 지시해 놓고도 황당한 백진환이었다.
그런 그에게 ‘와. 돈 좀 있는 집안이구나’라는 말이 절로 나오는 여인들이 다가왔다.
그녀들 중 면사를 쓴 귀부인이 주먹만 한 비단 주머니를 내밀었다.
“폐를 끼쳐서 미안합니다. 약소하나마 성의를 표하니 받아주시면 좋겠군요.”
“이, 이게 무엇이온지…….”
“손부끄럽습니다. 받아주세요.”
“그, 그럼…… 어억!”
비단 주머니를 슬쩍 열어본 백진환이 비명을 질렀다.
“이, 이건 전부 다 보석!”
“급히 오느라 그 정도밖에 못 챙겼습니다. 조만간 귀 상단에 도움이 되는 일을 의뢰하여 오늘의 폐를 보상하는 거로 하지요.”
백진환은 입을 떡 벌렸다.
‘급히 오느라 대충 챙긴 게 이 정도라고? 대체 뭐 하는 여자이기에…….’
순간 바람이 불며 그녀의 면사가 젖혀졌다.
‘어? 서, 설마?’
백진환의 눈이 툭 불거졌다.
언젠가 한번 봤던 여인 아닌가?
그도 모르게 말이 새어 나왔다.
“……여, 연 부인?”
“어머. 나를 아세요?”
“……머, 멀찍이서 뵌 적이 있습니다. 처, 청해성주이신 연 대인의 부인 되시는…….”
그때, 정광의 신형이 귀신처럼 나타났다.
“헉! 으, 은공!”
정광은 백진환을 신경 쓰지 않고 경천동지(驚天動地)할 말을 내뱉었다.
“이모. 여긴 웬일이세요?”
백진환의 고개가 목이 부러질 듯 세차게 돌아 연 부인을 향했다.
그녀는 환하게 웃으며 두 팔을 벌리고 있었다.
“웬일이긴. 조카를 보러 왔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