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6화
난 또 뭐라고
지재원이 먹구름 가득한 하늘을 가리키며 소리쳤다.
“햇살? 햇사아아알? 보시오! 그런 게 어디 있소?”
“그런가? 그럼 내 얼굴에서 빛이 난다고 하던데 그거였나 보네.”
순간 고개를 끄덕일 뻔한 지재원이 가까스로 정신 줄을 붙잡았다.
“말도 안 되는 소리!”
“아, 진짜. 뭘 말해도 안 믿네. 어쩌라고요.”
“사실을 말하시오!”
“뭘 듣고 싶은데요?”
“그대가 본 표국의 표사들을 해쳤다는 걸 인정하란 말이오!”
“증거 있어요?”
“으아아아아!”
끝없는 말싸움에 지친 지재원이 절규했다.
뭐 이런 놈이 다 있나!
명문 정파의 제자가 무슨 이런 억지를!
‘아니지.’
갑자기 기분이 싸해졌다.
심계가 깊은 놈이다!
말려들지 말고 정신을 차리자!
눈을 감고 크게 심호흡을 하자 마음이 진정되었다.
‘그래. 침착하자. 이대로 가면 결국 내가 이긴다.’
지재원이 눈을 뜨고 다음 공격을 시작하려 하는데.
“어억!”
정광이 코앞에 있는 것 아닌가!
깜짝 놀란 그는 반사적으로 정광의 가슴에 일장을 내질렀다.
터엉!
“끄아악!”
지재원은 정광을 때렸던 손을 부여잡고 깡충거렸다.
내 소오오온!
역시 고수는 다르구나!
그런데 잠깐.
퍽이 아니고 터엉?
경악하는 지재원과 달리 정광은 만족했다.
‘도마뱀 내의가 제법 괜찮네.’
무각사룡의 비늘로 만든 보의를 말함이었다.
원주인인 녀석이 들었다면 뒷목을 잡았겠지만 정광이 붙인 이름은 어쨌든 그랬다.
‘웬만한 놈들 공격은 귀찮게 피하지 말고 그냥 맞는 게 낫겠는데.’
정광에게 있어서 지재원의 일장은 고양이 앞발질과 같았지만 도마뱀 내의는 그것조차 완벽하게 막아낸 것이다.
그건 그렇고.
“으아아아악!”
정광은 뒤늦게 비명을 질렀다.
전혀 아프지 않은 표정으로.
모두가 멍하니 쳐다보는 가운데 정광과 허여민의 시선이 부딪혔다.
상황을 파악한 허여민은 재빨리 장단을 맞췄다.
“주연표국의 표두가 대곤륜파의 제자 진옥룡을 암습했다!”
지재원과 주연표국 표사들의 얼굴에서 핏기가 싹 가셨다.
구파일방과 원한을 맺는 건 자살과도 같은 짓!
그들의 머리에 강호의 유명한 격언들이 떠올랐다.
‘대를 이어 복수하는 구파일방!’
‘될 때까지 복수하는 구파일방!’
대를 잇거나 오래 걸릴 일도 아니었다.
현 강호에 구파일방 중 단 한 문파의 복수라도 견딜 수 있는 단체가 얼마나 있단 말인가!
아니, 주연표국 정도는 진옥룡 혼자서 하품하며 끝장낼 수 있었다.
마침 진옥룡은 그럴 작정이었다.
“유모. 이제 다 지워도 되죠?”
지재원의 안색이 하얗게 질렸다.
“그건 곤란합니다 은공. 진인들께서도 싫어하실 거예요.”
지재원의 얼굴에 핏기가 돌았다.
“아, 진짜. 어쩌라고.”
지재원의 안색은 하얘졌다가 붉어졌다가 왔다 갔다 하다가…….
“은공. 그냥 뼈마디만 어루만져 주시는 게 적당할 것 같습니다만.”
……허여민의 말에 결국 시커멓게 죽어버렸다.
‘뭐 이런 악독한 년이!’
백주 대낮에 그게 말이나 되는 소리인가?
정광도 툴툴거렸다.
“아아. 뭐가 이렇게 복잡해.”
말과 달리 그의 손속은 단순했다.
잡고, 분지르고, 꺾는다.
이게 다였다.
“끄아아아악!”
청해성 하늘에 오랫동안 비명이 울려 퍼졌다.
*
허여민은 성을 나와 백가상단으로 향하는 길 내내 정광을 칭찬했다.
“그 짧은 순간에 그런 묘수를 생각해 내시다니 정말 대단하십니다! 이제 명분은 우리 것이에요!”
“유모. 지겨우니까 그만 좀 해요.”
“아하하하! 그래도 사실인 걸요!”
자해공갈이 그렇게 대단한 건가?
정광은 전생을 떠올렸다.
어린 시절, 유난히 들이대던 놈들을 해치우며 자연히 익혔던 수법이었다.
삼류 사파나 써먹을 법한 것이었지만 효과 하나는 탁월했다.
‘가만 보면 마(魔), 정(正), 사(邪) 모두 통하는 구석이 있단 말이야.’
정광이 쓸데없는 깨달음에 빠져 있을 때, 백승무는 극심한 혼란을 겪고 있었다.
‘으으. 다시 한번 정리해 보자.’
하나, 어머니가 그 유명한 진옥룡의 유모란다.
둘, 진옥룡은 드높은 명성이 부족할 만큼 잘생기고 강했다.
셋, 그런데 하는 짓은 흑도 주먹패와 다를 게 없지 않은가?
넷, 게다가 그런 그를 협의 가득한 어머니가 칭찬하다니!
‘도저히 이해할 수가 없다!’
그로서는 그럴 만했다.
네 번째 것은 더욱더 그랬다.
하지만.
허여민으로서는 당연한 일이었다.
방법이야 어쨌든 자식을 살려준 은인을 어찌 칭찬하지 않겠는가?
게다가 정광이었다!
한 명도 죽이지 않고 일을 끝내주니 고마운 마음만 가득할 수밖에 없었다.
구원하러 달려온 백룡대와 오래전에 만난 그들은 보무도 당당하게 백가상단에 돌아왔다.
양팔이 부서진 포로들을 이끌고.
“이게 대체 어찌 된 일이오?”
백진환과 곤륜 도사들이 도착하자 난리가 났다.
그간의 사정을 들은 그들은 분노하며 칭찬했다.
조금 다른 방향으로.
“그놈들이 우리를 공격하다니! 용서하지 않겠다! 그리고 승무야! 네가 식솔들을 살리기 위해서 몸을 내던졌다고? 정말 훌륭하다!”
“그렇게 치졸한 수법으로 죄 없는 백가상단을 치다니! 정녕 용서 못 할 자들이로다! 그리고 정광아! 너도 똑같이 치졸한 수를 써서 한 명도 안 죽였다고? 치졸하지만 정말 훌륭하구나!”
어쨌든 잘된 일이었다.
“선인들께서 베푸신 협의 덕분에 저희 상단이 큰 위기를 넘겼습니다.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무량수불. 정파인으로서 당연히 해야 할 일을 했을 뿐이외다. 마음에 담아두지 마시오.”
훈훈한 대화가 오고 간 뒤 곤륜파가 회의를 요청했다.
상인들은 물론 주변 민초들로부터 백진환의 말이 모두 사실인 것을 확인한 곤륜파가 이 일에 적극적으로 나서기로 한 것이다.
당연히 백가상단 측은 쌍수를 들고 환영했다.
“정광아. 네가 생포한 주연표국의 표두라는 자는 뭐라고 하더냐?”
“혹시라도 우리가 돕기 전에 백가상단에 시비를 걸어서 끌어내려고 했다던데요.”
“그리고?”
“항복을 받아낸 뒤 보상금 명목으로 재물을 챙겨서 흩어질 계획이었답니다.”
“그 말이 거짓일 일은 없느냐? 아! 내가 실언을 했구나.”
정광에 의해 양팔 뼈가 바스러지는 고통을 겪은 자들이었다.
정광이 관리하는 수련만 해도 지옥의 고통을 맛보게 되거늘, 작심하고 손을 썼는데도 거짓을 말한다?
만약 그럴 수 있다면…….
‘그건 사람이 아니지.’
노도사들은 저마다의 생각을 중얼거렸다.
“적에게 조력자가 생기기 전에 명분을 만들어서 친다는 거군.”
“강호에서 시시비비를 가리는 가장 효과적인 방법이지요.”
“하지만 이제는 아니지.”
곤륜파의 제자인 정광을 주연표국의 표두가 암습한 모양새가 됐으니 곤륜이 끼어드는 건 당연한 일이었다.
주연표국은 백가상단과 곤륜파를 동시에 상대해야 했다.
“말이 표국이지 백가상단을 치기 위해 만든 사석(捨石)이었군.”
운학의 말에 백진환이 씁쓸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그리되면 저희는 재기불능의 타격을 받게 되니 서역을 드나드는 상단은 원래의 감숙성 길을 이용하게 되겠지요.”
“무량수불. 백 단주, 이제 어떡하실 계획이오?”
“진인의 고견을 듣고 싶습니다.”
“허어. 여기에 진인은 없소. 어쨌든 노도(老道)의 생각을 말하리다. 주연표국을 먼저 치는 게 어떻소?”
“……주연표국은 주가장의 사업장입니다만 괜찮으십니까?”
“한 가지만 묻겠소. 공동파도 이 일에 끼어 있는 것이오?”
방 안의 분위기가 가라앉았다.
잠시 주저하던 백진환이 나직하게 대답했다.
“그럴 가능성이 큽니다.”
“무량수불…….”
운학은 눈을 지그시 감았다.
모두가 묵묵히 기다렸다.
잠시 뒤, 눈을 뜬 운학이 천천히 입을 열었다.
“곤륜을 내려오기 전, 장문인께서 이리 말씀하셨소. 본문의 이름을 높이려 애쓰지 말라. 어떤 일이든 도리에 맞게 행하라.”
“…….”
백진환은 내심 쓰게 웃었다.
‘이름을 높이려 하지 말라는 건 쓸데없는 시비에 끼어들지 말라는 의미 아닌가. 도리에 맞게 행하라는 것은 시류에 맞게 좋게 좋게 대응하라는 말일 터. 그래. 그럴 수밖에 없겠지.’
곤륜에게도 지켜야 할 선이 있을 것이다.
그 선은 주연표국에서 끝날 것이 분명했다.
‘이번은 무사히 넘어간다 해도 공동파와 주가장은 물러서지 않을 것이다. 이 일을 어찌해야 한단 말인가.’
그의 깊은 고민은 운학의 이어지는 말에 깨어졌다.
“우리는 장문인의 말에 따를 것이오. 본문의 이름을 높이기 위해 이득을 따지는 짓은 하지 않을 것이고 도리에 맞게 본연의 협을 행할 것이오.”
“……그, 그 말씀은!”
운학은 백진환에게서 시선을 돌려 곤륜 제자들을 바라봤다.
“혹시라도 내 말에 반대하는 이가 있다면 손을 들게.”
모두가 웃는 얼굴로 대답했다.
“당연히 없습니다.”
운학이 고개를 끄덕인 뒤 다시 백가상단의 사람들을 바라봤다.
백진환이, 허여민이, 백승무가 감격에 찬 얼굴로 눈물을 글썽거리고 있었다.
운학은 그들에게 쐐기를 박았다.
“우리는 백가상단과 함께 끝까지 싸우겠소.”
*
백승무는 벌써 몇십 번이나 되뇌었던 말을 다시 한번 떠올렸다.
‘우리는 장문인의 말에 따를 것이오. 본문의 이름을 높이기 위해 이득을 따지는 짓은 하지 않을 것이고 도리에 맞게 본연의 협을 행할 것이오.’
되뇌일 때마다 가슴이 벅찼다.
그가 꿈꾸던 대협의 기상이 이 말속에 오롯이 녹아 있었다.
‘말만 하는 것이 아니라 직접 행동으로 옮긴다. 곤륜파야말로 구파일방이란 이름이 아깝지 않은 곳이구나.’
공동파와 너무나 대비되는 모습.
백승무는 곤륜에 흠뻑 취해 버렸다.
그도 그 일원이 되고 싶었다.
‘하지만 곤륜은 속가제자를 받지 않고 있는데…….’
그는 주위에 있는 이들을 둘러봤다.
적의 야습을 대비해 조를 나눠서 경계를 서고 있는 상황.
백승무의 조에는 허여민, 정광, 허직이 있었다.
망설이던 그는 그나마 편해 보이는 정광에게 물었다.
“은공. 한 가지 물어봐도 되겠습니까?”
“뭔데요?”
“곤륜은 속가제자를 안 받고 있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네.”
“그 방침은 변할 예정이 없는지요?”
“그런 복잡한 건 몰라요. 사숙한테 여쭤보세요.”
백승무는 허직의 눈치를 살폈다.
지금 나눴던 얘기를 들어서 그런지 그의 표정은 평소보다 더 까칠해 보였다.
“저…… 도장. 한 가지 여쭤봐도 되겠습니까?”
“안 되네.”
“……혹시 안 되는 이유를 알 수 있겠는지요?”
“그것도 안 되네.”
철통같은 방어에 백승무의 어깨가 축 처졌다.
그러자 아까부터 귀를 기울이고 있던 허여민이 눈썹을 치켜세웠다.
그녀는 허직에게 얼굴을 바짝 들이밀며 날카롭게 따졌다.
“대체 뭐 하는 거예요!”
“뭐, 뭐 하냐니…….”
“안 되는 거 알아요! 그 이유도 잘 알고요! 그런데 꼭 말씀을 그런 식으로 하셔야 합니까? 왜 그리 성격이 까칠해요!”
“나, 나는…….”
“하아. 됐습니다. 차라리 나무토막에 하소연하고 말지. 승무야, 저런 사이비 도사와는 말을 섞지 말거라.”
“내, 내가 왜 사이비…….”
“아, 시끄러워욧! 저리 가욧!”
“흡!”
허여민의 엄청난 폭언에 백승무가 헛바람을 들이켰다.
‘어, 어머니가 갑자기 왜? 큰일 났구나! 곤륜의 중진인 허직 도장에게 이런 무례를 저지르다니! 이건 엄청난 폭풍이 될 것이야!’
그의 절망적인 예상과 달리 허직은 양어깨를 늘어뜨린 채 자리를 벗어나기 시작했다.
‘대, 대체 왜?’
혼이 반쯤 날아간 백승무가 머리를 움켜쥐고 고민하는데 떠나가던 허직의 발걸음이 멈췄다.
그의 입에서 아주 작은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여민아. 미안하다.”
“시끄럽다니까! 십구 년 전에도 곤륜에서 그래놓고 또 뭐? 다신 나한테 말 걸지 마세요, 오라버니! 어라? 안 가? 아우 진짜. 그냥 확!”
허여민이 도를 뽑자 허직은 빛의 속도로 사라졌다.
덕분에 백승무는 깨달았다.
여민아?
오라버니?
비밀이 풀렸다!
잔뜩 흥분한 백승무가 허여민에게 물었다.
“어머니! 허직 도장께서 제 외숙이셨습니까?”
“너도 시끄러웟!”
“넵!”
허여민이 씨근덕거리며 자리를 떠났다.
정광과 단둘이 남은 백승무는 참지 못하고 입을 열었다.
“은공께서도 알고 계셨습니까?”
“아뇨.”
“……근데 별로 놀라지 않으시는 것 같습니다?”
“놀라야 하나요?”
“아니. 그건 아닌데…….”
백승무는 감탄했다.
이런 부동심이라니!
과연 고수는 뭔가 달라도 다르지 않은가!
사실 정광은 그런 인간관계에 관심이 없을 뿐이었다.
그의 관심은 다른 데 있었다.
“곤륜 제자가 되고 싶어요?”
“그, 그렇습니다. 혹시 방법이 있습니까?”
“있죠.”
“무, 무엇입니까?”
정광이 말을 잇자 환희에 젖었던 백승무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도사가 되세요. 속가제자가 아니라 진산제자(眞山弟子)가 되는 거죠.”
“그, 그건 좀…….”
“왜요?”
“그…… 도, 도사가 되면…… 술이랑 고기도 못 먹고 그…… 여, 여인들과도 아무것도…….”
백승무 스스로도 한심한 말이었지만 거짓을 말할 순 없는 일 아닌가.
그는 피가 끓는 사내였다!
“그게 문제예요?”
백승무는 목을 움츠렸다.
무인이 그런 사소한 것들에 연연하다니, 네가 정녕 정신이 있는 놈이냐 없는 놈이냐!
하는 일갈이 정광의 입에서 터질 줄 알았건만.
“난 또 뭐라고.”
무림의 떠오르는 신성 진옥룡은 역시 뭔가 달라도 달랐다.
“몰래 하면 되잖아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