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곤륜마협-25화 (25/569)

25화

증거 있어?

공동파(崆峒派)!

곤륜파와 마찬가지로 구파일방의 한 축을 담당하는 명문정파이다.

누구나 인정하는 감숙성의 패자!

하지만 정광에게는…….

“정파 주제에 사파(邪派)보다 더 악랄한 무공을 쓰는 그놈들?”

“으, 은공. 같은 구파일방인데 그렇게 말씀하시는 건…….”

“아니에요?”

허여민은 할 말이 없었다.

실제로 공동파는 정파답지 않은 악랄한 손속으로 악명 높은 문파가 아니던가.

“사막에서 자백했던 그 세작 놈한테 얻은 정보인가요?”

“그렇습니다. 돈에 팔린 자라서 아는 게 많진 않았습니다만 계속 더듬어 가보니 공동파의 속가무문(俗家武門)에 이르더군요.”

“어디죠?”

“주가장(周家莊)입니다.”

감숙성에서 객잔, 주루, 반점 등의 사업으로 부를 쌓은 주가장은 그 무력 또한 공동속가제일을 자랑하는 유명한 무가였다.

백가상단이 많이 성장했다고는 하나 비교가 안 될 정도로 강한 조직인 것이다!

정광이 놀란 얼굴로 되뇌었다.

“주가장!”

“그렇습니다. 그들의 무력은 실로 대단…….”

“강호에 그런 애들도 있었나?”

“…….”

“혈사풍과도 끈이 있단 얘기네.”

“그럴 가능성이 있…….”

“그냥 다 지워 버릴까.”

“……!”

허여민은 두려움을 느꼈다.

정광이 탑극랍마간에서 벌였던 살육이 생생하게 떠올랐다.

‘허여민! 정신 차려!’

그는 두려워하던 그녀에게 ‘내 사람한테는 안 그런다’고 말했었다.

그 말을 믿어야 했다.

“후우우.”

심호흡을 하자 마음이 편해졌다.

“안 돼요. 일이 너무 커집니다.”

“그럼 적당히 죽이면 되겠네. 주가장이란 놈들이 청해성에 들어와서 사업을 시작한 거예요? 도적놈들을 무인으로 받아들이고.”

“은공, 제 머릿속에 계세요?”

“뻔하잖아요. 그 사업이 뭔데요?”

허여민이 대답하려는데 밖에서 큰 고함이 들려왔다.

“부단주님! 큰일 났습니다! 어서 나와보십시오!”

그녀가 급히 문을 열자 구르듯이 달려오는 장한이 보였다.

“노 상두(商頭)! 무슨 일입니까?”

“필요한 물품들을 사러 만화상점에 가셨던 이 공자님이 주연표국 놈들과 시비가 붙었습니다!”

“감히 그놈들이! 그래서 어떻게 됐나요? 사상자는 몇 명입니까?”

“제가 소식을 전하러 떠날 때까지는 대치 중이었는데 지금은 모르겠습니다. 어떻게 할까요?”

백진환이 자리를 비운 지금, 백가상단의 최고 결정자는 허여민이었다.

그녀는 도를 챙기며 외쳤다.

“백룡대(白龍隊) 세 개 조가 갑니다! 먼저 갈 테니 서두르세요!”

“네! 부단주!”

노 상두는 사람을 모으기 위해 뛰어갔다.

허여민이 정광에게 사과했다.

“죄송합니다 은공. 급한 일이 생겨서 가봐야 할 것 같습니다. 금방 다녀올 테니 편히 쉬고 계십시오.”

“이 공자라면 유모 둘째 아들?”

“그렇습니다.”

“그럼 가봐야지.”

정광은 허여민을 번쩍 들어서 그의 왼쪽 어깨 위에 앉혔다.

“앗! 은공! 뭐 하시는 겁니까?”

“빨리 가야 하는 거 아니에요?”

“그렇긴 한데…….”

“안내하세요.”

“감사합니다. 우선 성내로…… 꺄아악!”

눈 깜짝할 사이에 그들의 신형이 사라졌다.

*

‘후우우.’

백승무는 치밀어 오르는 울화를 간신히 억눌렀다.

속으로 열까지 센 그는 눈앞의 텁석부리에게 다시 한번 물었다.

“왜 자꾸 시비를 거는 것이오?”

“시비라니? 아니라니까.”

“계속 우리를 포위하고 있잖소?”

“어허. 친분 좀 쌓자는 걸 그리 곡해하면 어쩌나? 우리가 외부에서 왔다고 무시하는 건가? 이거야 원, 텃세가 보통이 아니구먼.”

“텃세는 무슨! 없는 일을 지어내지 마시오!”

“어라? 이젠 위협까지? 이 보게들, 백가상단의 이 공자께서 이렇게 나오시는데 우리가 어찌해야겠나?”

텁석부리의 수하들이 병장기를 꺼내 들며 외쳤다.

“살기 위해서 싸워야죠!”

“백가상단이 먼저 싸움을 걸었는데 그냥 앉아서 죽을 수는 없지 않습니까!”

텁석부리가 백승무를 보며 어깨를 으쓱했다.

“그대가 우리를 위협해서 이 사달이 일어난 걸세.”

“말도 안 되는 소리!”

“자! 자! 다들 똑똑히 들었소? 선량한 우리한테 백가상단이 어떤 짓을 했는지! 지켜보고 있던 그대들이 증인이 되어줘야 할 것이오!”

그가 부탁 같은 협박을 하며 주위를 노려봤다.

구경꾼들은 겁먹은 얼굴로 그의 시선을 피했다.

참고 참던 백승무가 폭발했다.

“선량한 우리? 산적질에 수적질이나 하던 놈들이 뭐가 어째?”

“자네! 선을 넘는군! 어릴 때부터 표사의 꿈을 키워온 우리보고 도적이라니! 증거 있는가? 있어?”

“그따위 것 없어도 청해성 사람들 모두가 알고 있지! 주연표국은 도적놈들을 그러모은 집단이다!”

“하아아. 증거도 없이 우릴 핍박해? 얘들아! 우리가 선량한 양민이라는 증거를 보여줘라!”

“네!”

험상궂은 장한들이 품에서 호패를 꺼내 높이 들었다.

“이보게 이 공자. 잘난 집안에서 태어나셨으니 글은 알지? 저 호패들에 뭐라 쓰여 있는가?”

백승무는 몸을 부들부들 떨었다.

호패 따위야 관리에게 돈 좀 찔러주면 원하는 문구를 새겨서 당일에 발급받을 수 있는 것 아닌가!

다시 한번 받아치려는 그때, 백승무를 호위하던 무인이 전음을 보냈다.

-이 공자. 상대가 너무 많습니다.

-알고 있소.

-노 상두가 원군을 끌고 오기엔 시간이 촉박합니다. 여기까지 하시지요.

백승무는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그의 눈에 어려 있던 분노가 천천히 사라졌다.

약관도 안 된 나이치고는 대단한 평정심이었다.

가만히 지켜보던 텁석부리는 속으로 혀를 찼다.

‘쯧쯧. 이래도 안 넘어와? 애송이 놈의 팔 정도는 잘라서 전면전을 벌여야 하는데. 억지를 부려서라도 빨리 끝내야겠군.’

텁석부리가 눈짓하자 건너편에 있던 청년이 백승무에게 달려들었다.

“으아아아! 나 같은 선량한 표사를 모함하다니! 이 나쁜 놈아! 차라리 날 죽여라!”

“무슨 말 같잖은 소리를! 어?”

백승무가 손으로 밀치자 청년이 피를 토하며 나뒹굴었다.

일 푼의 공력도 안 썼기에 잠시 어리둥절해 하던 백승무가 분노해서 외쳤다.

“대체 무슨 수작이냐!”

“어이쿠! 나 죽네! 백가상단의 이 공자가 죄 없는 양민을 죽인다!”

무공을 아는 이라면 누가 봐도 뻔한 자해였다.

하지만 지켜보던 양민들은 알 수가 없는 노릇.

텁석부리에겐 그거면 충분했다.

“백승무가 암수를 썼다! 모두 자신을 보호하라!”

“우와아아!”

보호라는 말과 안 맞게 주연표국 무리는 백가상단 무인들을 공격했다.

머릿수가 몇 배나 차이가 났기에 백가상단은 밀릴 수밖에 없었다.

투지를 일으켜 싸웠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패색이 짙어졌다.

백승무는 이를 악물었다.

‘겨우 여기까지인가.’

어릴 적, 검을 처음 잡았을 때부터 꿈꿔왔다.

구파일방에 들어가 신공절학(神功絶學)을 배우겠다고.

그리고 강호를 질주하며 협을 행하는 대협이 되리라고.

어느 정도 나이가 차자 부모를 졸라서 공동파에 찾아갔다.

속가제자가 되기를 청했으나 돌아온 것은 차가운 거절이었다.

자질만큼은 자신이 있었건만 그곳에는 그에 못지않은 수많은 기재가 있었다.

그것도 모두 명문가 출신.

공동파에 막대한 기부를 할 수 있는 자들이었다.

집으로 돌아온 백승무는 속으로 절규했다.

‘나는 왜 명문가에서 태어나지 못했는가!’

‘하늘은 왜 이런 어중간한 자질을 주었는가!’

며칠 동안 방에 틀어박혀 있던 그는 가슴이 터질 것처럼 답답하여 집을 나섰다.

성내를 돌아다니던 그는 얼마 안 가 큰 충격을 받았다.

끼니도 제대로 챙기지 못하는 수많은 사람을 본 것이다.

집으로 돌아온 그는 묵묵히 가전무공을 수련했다.

미안하여 안절부절못하는 부모들에게 괜찮다는 모습을 보였다.

시간은 빠르게 흘렀다.

그는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리는 후기지수가 되어 있었다.

변방인 청해성 내에서만 통하는 이름이었지만 그래도 그게 어딘가.

‘그래. 그게 어디야.’

머리는 분명 그렇게 생각했는데.

가슴속에서 뭔가 솟아올랐다.

‘도적놈들 따위에게 죽기 직전인 지금 이런 생각밖에 안 들다니!’

이렇게 죽자고 살아왔던 삶이 아니었다.

대협으로 죽고 싶었다.

거의 말라 버린 단전에서 내공을 쥐어짰다.

“길을 열 테니 모두 피해!”

그의 검 끝에서 하얀 꽃송이들이 피어났다.

가전절기, 백화십팔검(白花十八劍)이었다.

“으아아악!”

“빌어먹을! 아직도 힘이 남아 있었나!”

네 명의 표사가 쓰러졌다.

백승무는 계속 전진하며 검을 휘둘렀다.

포위망이 갈라지고 실낱같은 길이 열렸다.

그의 눈이 반짝였다.

“지금이다! 어서 뛰어!”

“감히 어딜!”

멀찍이서 지켜보고만 있던 텁석부리의 몸이 솟구쳤다.

그의 얼굴만큼 칙칙한 쇠몽둥이가 백승무의 머리로 떨어져 내렸다.

콰직!

“큭!”

백승무가 급히 들어 올린 검이 텁석부리의 쇠몽둥이에 분질러졌다.

그게 끝이 아니었다.

텁석부리의 연환공격에 다급히 적수공권으로 맞서던 백승무는 어깨에 일격을 얻어맞고야 말았다.

쾅!

“커억!”

쓰러진 백승무가 급히 일어서려 했지만 텁석부리의 쇠몽둥이가 그의 머리를 겨누고 있었다.

“이 공자!”

“그만! 한 발짝이라도 움직이면 이놈은 죽는다!”

달려들려던 백가상단 무인들은 텁석부리의 위협에 굳어져 버렸다.

피식 웃은 백승무가 텁석부리를 노려보며 씹어 먹듯 말했다.

“죽여라.”

“어허. 무슨 그런 끔찍한 말을 하시나. 우리 애를 다치게 한 책임만 지면 되네. 자네 어깨, 아직 멀쩡한 것 같은데 그것만 부수고 끝내지.”

텁석부리가 쇠몽둥이를 치켜들었다.

백승무는 눈도 깜빡하지 않고 그의 눈을 노려보고 있었다.

‘허어. 어린놈이 대가 세구나. 빨리 잡길 잘했어.’

내심 감탄하던 텁석부리는 마음 한구석이 켕겼다.

지시받은 대로 백승무를 병신으로 만들어야 했지만 독종으로 이름 높은 백가상단의 원한을 그가 직접 받아내긴 싫었다.

텁석부리는 뒤로 물러나며 부하에게 명했다.

“어깨를 부숴.”

“제, 제가요?”

말없이 노려보자 지목당한 부하는 재빨리 철퇴를 들어 올렸다.

그가 속으로 텁석부리를 욕하며 철퇴를 내려치려는 그때!

“은공! 제 아이입니다!”

“아저씨가 아니라 유모 닮아서 다행이네.”

“그렇죠? 아차! 그보다 죽이면 안 돼요!”

“하아. 유모 진짜 까다로워.”

알 수 없는 대화와 함께 눈부신 섬광이 터졌다.

번쩍!

그리고.

세상이 갈라졌다.

*

백승무는 눈부심을 이기지 못해 감았던 눈을 떴다.

그의 앞에는 눈부신 외모의 청년 도사가 서 있었다.

넓은 어깨에 어머니를 앉힌 채.

“어, 어머니?”

“승무야. 괜찮으냐?”

“네. 헌데 여긴 어떻게…… 그보다 이분은?”

그제야 자신의 처지를 자각한 허여민이 정광에게 부탁했다.

“은공. 이제 내려주세요.”

“웃차.”

허여민을 내려놓은 정광이 고개를 갸우뚱했다.

“유모. 생각보다 더 무거운데?”

“은공! 좋은 점만!”

“아. 무거운 덕분에 진각을 따로 밟을 필요가 없어서 좋았네요.”

“하아아. 칭찬 감사합니다.”

허여민은 짧은 한숨을 내뱉은 뒤 백승무와 상단 무인들의 상태를 살펴봤다.

사지의 힘줄이 잘린 주연표국 표사들이 바닥에서 꿈틀거렸지만, 사막에서 그보다 더한 일을 경험했던 그녀는 침착했다.

하지만 다른 이들은 아니었다.

“허억! 뭐, 뭐야!”

“표사들이 병신이 됐어!”

“대체 어떻게? 아니, 누가?”

텁석부리는 두방망이질치는 가슴을 간신히 진정시켰다.

‘마침 물러나 있지 않았다면…….’

그 역시 바닥에 쓰러진 이들과 같은 꼴이 되었을 것이다.

그의 시선이 허여민을 지나 정광에게 꽂혔다.

‘허여민 저년이 이런 신위를 보일 수는 없고. 저 도사 놈이 했다는 말인데…… 어?’

청년 도사.

절세 미남.

절세 무공.

어디서 많이 듣던 사람 아닌가!

‘고, 곤륜파의 진옥룡?’

텁석부리는 확신했다.

저런 인간이 세상천지에 또 있을 리가 만무했다.

‘침착하자. 침착해. 우선 여기를 벗어나 이 일을 알려야 한다.’

텁석부리는 두 손을 모으며 정중하게 읍했다.

“처음 뵙겠소, 진옥룡. 나는 주연표국의 표두 지재원이라 하오.”

“표두?”

“그렇소이다.”

“생긴 건 산적인데?”

어떻게 알았지?

멈칫했던 지재원은 애써 태연하게 되물었다.

“허어. 초면에 무슨 무례요?”

“딱 봐도 그쪽은 산적, 저쪽은 수적, 이쪽은 흑도인데요.”

“……도사인 이가 생김새로 사람을 판단하다니. 그대의 높은 명성을 흠모해 왔거늘, 솔직히 조금 실망했소이다.”

정광이 오히려 황당하다는 듯 되물었다.

“누가 그렇게 생기래요?”

지재원은 철퇴로 가슴을 얻어맞은 것 같았다.

그라고 산적처럼 생기고 싶어서 생겼겠는가?

외모 덕분에 산적질 하기는 편했지만 그렇게 생긴 건 그도 화가 나는 일이었다.

‘후우. 참자. 저 괴물한테 덤벼선 안 돼. 정파 놈이니만큼 체면을 따질 터. 논리적으로 나가야 한다.’

지재원은 치밀어 오르는 욕설을 삼키며 말했다.

“됐소이다. 그보다 사람이 크게 다쳤소. 대체 이 일을 어쩔 것이오?”

정광은 짜증이 나기 시작했다.

산적 놈 따위와 이런 쓸데없는 얘기를 해야 하다니.

버릇이 들어 존대로 답해주긴 한다만 존댓말을 써주기도 아까웠다.

‘그냥 다 죽여 버릴까?’

그의 눈빛이 서늘해지는 걸 본 허여민이 급히 전음을 날렸다.

-은공. 보는 눈이 너무 많습니다.

-역시 유모야. 알았어요, 깡그리 다 죽이죠.

-아뇨! 그 말이 아니에요! 은공께서는 명문정파인 곤륜파의 제자! 많은 이들이 지켜보고 있으니 논리적으로 나가셔야 해요!

정광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대체 뭐가 이렇게 복잡한지, 정파는 정말 알 수 없는 족속들이었다.

‘귀찮아 죽겠네. 빨리 끝내자.’

정광의 입이 열리고 모두가 기함할 만한 말이 흘러나왔다.

“내가 저들을 다치게 했다? 증거 있어요?”

“……이 참상은 그럼 누구의 소행이란 말이오!”

“내가 어떻게 알아요? 와보니 자기들끼리 알아서 쓰러지고 있던데.”

“말도 안 되는 소리! 그대가 나타나며 섬광이 터졌소이다. 검광이 분명하지 않소?”

정광이 콧방귀를 뀌었다.

“검광은 무슨. 따가운 햇살이지.”

모두 하늘을 쳐다봤다.

먹구름만 가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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