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곤륜마협-24화 (24/569)

24화

보의(保衣)

‘유모?’

‘아저씨?’

‘그게 누군데?’

눈으로 묻는 도사들에게 정광이 대답했다.

“십구 년 전에 저한테 젖을 줬던 유모와 유모 남편이요.”

그걸 기억한다고?

보통 사람이라면 이렇게 되물었겠지만 도사들은 바로 납득했다.

정광이었으니까.

달려오는 두 기수를 바라보던 도사들의 눈에 호기심이 떠올랐다.

‘아직 거리가 꽤 남았는데도 말에서 내려 걷는다?’

‘예를 많이 갖추는군.’

‘몸놀림을 보니 무인이구나. 대단한 수준은 아닌 것 같은데.’

잠시 뒤, 가까이 다가온 두 기수가 정중하게 인사했다.

“곤륜의 선인(仙人)들을 뵙게 되어 영광입니다. 백가상단의 백진환이라 합니다.”

“백가상단의 허여민입니다. 마음이 급해 이렇게 달려왔습니다. 무례함을 용서해 주십시오.”

곤륜 도사들도 예를 표하려고 하는데 정광의 말이 더 빨랐다.

“무슨 일이에요?”

“안녕하셨습니까, 은공. 급히 진인께 말씀드릴 일이 있어서 달려왔습니다. 실례지만 소개해 주실 수 있으십니까?”

진인(眞人)이란 참된 사람.

도가 높은 도사를 일컫는 말이다.

보통 연배가 높은 도사를 공경하는 칭호로 쓰인다.

백진환은 곤륜 일행의 우두머리가 누구인지를 물은 것이다.

하지만 정광은 다르게 받아들였다.

“진인이라 불릴 만한 분은 사조님뿐인데요. 여기엔 안 계세요.”

경악할 정도로 버릇없는 말!

백진환 부부는 눈을 크게 떴다!

‘어, 어찌 그런 말을!’

‘아무리 은공이라 하셔도 사문의 어른들을 욕보이다니!’

정파의 규율은 굉장히 엄하다.

하물며 곤륜은 구파일방의 일원일 정도로 명문 중의 명문 아닌가?

당장 불호령이 떨어질 터!

잔뜩 긴장한 그들은 노도사들을 조심스럽게 살펴봤다.

그런데.

시선이 마주친 노도사들이 겸연쩍은 표정을 지었다.

“흠. 흠. 뭐 그렇긴 하지.”

“운후 사형은 진인이란 이름이 아깝지 않으나 우리는 보통 도사일 뿐이오.”

“사실 진인이라는 게 꼭 좋은 것만은 아니외다. 도사도 사람이니 사람다운 맛이 풍겨야 하지 않겠소?”

백진환 부부는 입을 떡 벌렸다.

명문정파라 하면 그 오만함이 말도 못 할 정도이거늘 뭐 이런 소탈한 자들이 있단 말인가!

오래전 곤륜산에 올랐을 때의 기억을 떠올린 그들은 그제야 이해했다.

‘하긴. 그때도 비슷했지.’

‘그걸 잊고 선입견을 세운 내가 부끄럽구나.’

원래부터 대단한 명성을 가지고 있었지만 일이 년 전에 벌였던 협행으로 청해성 민초들의 추앙을 받는 곤륜파였다.

그 명성에 위축되어 마음의 벽을 세우다니.

부부는 두 손을 다시 한번 모으며 진심으로 말했다.

“과연 곤륜입니다.”

“오늘 보여주신 모습, 잊지 않겠습니다.”

도사들은 더 겸연쩍은 얼굴이 되었고 부부 역시 쉽게 입을 열지 못했다.

이번 중원행을 이끄는 운학이 양쪽의 어색함을 무너뜨렸다.

“그래, 백가상단에서 어쩐 일이오? 단순히 인사를 하려고 찾아온 건 아닌 것 같소만.”

잠시 목을 가다듬던 백진환이 허리를 깊숙이 숙였다.

“선인들께 간곡히 부탁드립니다. 청해성 상인들을 구해주십시오.”

* * *

성으로 향하던 정광 일행은 백진환 부부를 따라 방향을 틀었다.

그러자 성문에 몰려 있던 많은 이들이 깜짝 놀라서 쫓아왔다.

“곤륜의 선인들을 모시고 싶습니다. 잠시만이라도 들려주시지요.”

“진인들께도 나쁜 일이 아닐 겁니다. 제발 제 소원을 들어주십시오.”

정중하게 거절한 곤륜 도사들은 한참을 걷고 나서야 백가상단에 이르렀다.

“오. 유모네 집 꽤 크네요?”

정광이 살짝 놀랄 정도로 거대한 장원이었다.

“은공 덕분에 얼마 전 터를 옮겼습니다. 사람과 화물의 이동이 전보다 빈번해져서 성 외곽으로 옮길 수밖에 없었지요.”

거대한 장원에 들어선 그들은 분주하게 움직이는 사람들의 모습에 한 번 더 놀랐다.

백가상단은 분명 상단이거늘 병장기를 찬 무인들로 가득한 것 아닌가.

“이쪽입니다.”

정광 일행은 백진환 부부를 따라 안으로 들어갔다.

다들 자리에 앉자 지금껏 침묵하던 운학이 물었다.

“그대들이 정광과 연이 있어 일단 따라왔소만, 청해성 상인들을 구해달라니 대체 무슨 말이오?”

“저희 백가상단은 은공의 도움으로 중원과 서역을 잇는 서역남도를 복구했습니다. 그러자 기존의 천산남북로를 이용하던 자들이 견제를 시작했습니다.”

“서역남도를 복구했다? 허어. 정광이 그 일을 도왔단 말이오?”

“곤륜의 덕이 저희를 비춘 것이지요. 산에 올라 감사를 표하려 했지만 그들의 견제로 정신없는 나날을 보내야 했습니다. 이 자리를 빌려 죄송하단 말씀을 드립니다.”

“무량수불. 아니오. 계속 말해보시오.”

처음에는 단순한 견제였지만 백가상단이 중소 상단들을 끌어모아 서역남도를 이용하자 불만의 목소리가 나오기 시작했다.

“여기까지는 그래도 큰 문제가 아니었습니다. 사람과 조직은 자신의 이익을 위해 싸우니까요. 이익을 나눠주고 규모를 키움으로써 해결할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그건 청해성의 조직 간에나 가능한 일이었다.

다른 성의 이들과 문제가 생긴 것이다.

“감숙성(甘肅省)의 상단들? 그들이 왜?”

“서역을 드나드는 상단은 옥문관(玉門關)이나 가욕관(嘉峪關)을 통해 기련산맥(祁連山脈) 위쪽 길을 지납니다. 그리고 감숙성의 성도인 난주로 향하는데, 쉽게 말해 감숙성을 관통하는 것이지요.”

백가상단은 그들과 다르게 기련산맥 아랫길을 지나 청해성을 거쳐 성도인 서녕(西宁)에 이르는 길을 택했다.

서녕에서 다시 감숙성의 난주(蘭州)로 가야 하는 것은 마찬가지였으나 그 중간 과정이 감숙성에서 청해성으로 바뀐 것이다.

여기에는 백가상단이 개척한 길이 감숙성 쪽보다 조금이나마 시간을 단축할 수 있다는 이유가 있었다.

“사람과 물자가 드나드는 곳은 번영하기 마련입니다. 객잔(客棧)과 반점(飯店)이 세워지고 이익을 얻는 이들이 생기게 되지요.”

백가상단은 동업자들을 규합해서 새로운 길에 막대한 투자를 했다.

새롭게 올린 깨끗한 시설과 저렴하게 책정된 가격. 기나긴 여정에 지칠 대로 지친 상단에게는 무척 구미가 당기는 것이었다.

“덕분에 서역남도뿐 아니라 기존의 천산남북로를 이용하던 중소 상단들도 청해성을 통해 움직이기 시작했습니다.”

“이해가 가는군. 감숙성의 이들이 불편해할 만하오. 헌데 궁금한 점이 있소.”

“말씀하십시오.”

“서역을 통해 들어오는 사치품의 가치가 막대하여 그 이동 경로에 있는 관(官)은 상당한 뇌물을…… 흠. 흠. 수입을 얻는다 들었소.”

“그렇습니다.”

“그렇다면 백가상단이 걱정해야 할 것은 감숙성의 상인들이 아니라 관의 인물들 아니오? 그 반발이 만만치 않을 텐데?”

만만치 않다뿐이랴.

이권을 빼앗긴 악랄한 관리들이 가만히 있을 리가 만무했다. 하다못해 청해성에서 감숙성으로 들어온 상단에 엄청난 불이익을 주는 것 정도는 당연한 일인 것이다.

하지만 다 방법이 있었다.

“은공께서 주신 보물을 관의 유력자에게 선물해서 무마시켰습니다.”

“허어. 보물이라? 정광아, 대체 그게 무엇이더냐?”

모두 기대에 찬 눈빛으로 정광을 바라봤다.

“그냥 도마뱀 꼬린데요.”

“……그건 나중에 자세히 묻기로 하고. 이보시오, 단주. 무슨 말인지는 이해했소. 청해성의 상인들이 위험하다? 새롭게 생긴 이익이 사라지면 무척 힘들어질 테지. 하지만…….”

운학의 말이 이어질수록 밝아지던 백진환 부부의 얼굴은 ‘하지만’이라는 단어에 굳어졌다.

“……상인들 간의 경쟁에 본문 같은 도문이 끼어드는 것은 바람직한 일이 아니외다. 무슨 뜻인지 아시겠소?”

곤륜 도사들은 고개를 끄덕였다.

상인들의 이익을 건 싸움이었다.

곤륜이 나설 이유도 명분도 없는 것이다.

하지만 백진환은 그들의 마음을 돌릴 만한 대답을 가지고 있었다.

“선인들의 협행 덕분에 무너진 수적, 산적, 흑도 무리가 있습니다.”

“알고 있소.”

“그들이 감숙성 상인들의 지원을 업고 본 상단을 공격하려고 합니다. 기존의 터전을 잃었으니 새로이 먹고살 길을 도모한 것이지요.”

곤륜 도사들의 눈이 커졌다.

정광이 그들의 마음을 대표해서 요약했다.

“상인들 간의 정당한 경쟁에서, 놈들이 쫄리니까 강호의 쓰레기들을 끌어들였다는 말이네요. 그냥 다 죽일걸 그랬네.”

운학의 입에서 한숨 같은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무량수불…….”

* * *

운학은 상황을 정확하게 파악하기 위해 백진환과 함께 청해성 상인들을 만나보기로 했다.

다른 운 자 배의 도사들은 각각 제자들을 이끌고 백가상단의 평판과 현황을 인근 민초들에게 듣기 위해 나갔다.

정광은 오랜만에 만난 허여민과 못 다한 얘기를 하라고 남겨졌는데.

‘뭘 얘기하라는 거야?’

할 말이 없었다.

일 년 전에 봤는데 뭘 또?

하지만 허여민은 무척 할 말이 많았다.

“은공. 그사이 또 훌쩍 성장하셨군요. 이제 완연한 장부가 되셨습니다. 이는 원시천존께서 보우하사…….”

“유모. 그냥 편하게 말해요.”

“네?”

“그런 성격 아니잖아요.”

“무, 무슨 말씀을…….”

“멍청하고 꽉 막힌 도사들 같으니. 갓난애를 이렇게 굶기면 어쩌자는 거야!”

“……?”

“옛날에 젖 먹일 때는 이렇게 말했었는데.”

“……!”

커진 눈으로 정광을 바라보던 허여민이 웃었다.

“아하하. 그래요, 은공 앞이니 솔직해져야죠.”

“이제야 옛날 유모로 돌아왔네. 그때만큼 예뻐진 것 같은데요?”

“아하하하!”

빈말이 아닌 게 시원시원하게 웃는 그녀의 얼굴은 나이에 안 어울리게 젊고 아름다웠다.

한참을 웃던 그녀는 웃음기를 지우고 방 한편에 있는 상자를 가져왔다.

“뭐예요?”

“직접 열어 보세요. 마음에 드실 겁니다.”

상자를 여니 누런빛의 비늘로 만들어진 옷이 있었다.

무각사룡의 비늘로 만든 보의(保衣)였다.

“그놈 꼬리로 만든 거예요?”

“그렇습니다. 단단함과 질김이 천하제일이라 할 만하니 긴요한 순간에 도움이 될 겁니다.”

“불편할 것 같은데.”

“도복 속에 입으셔도 될 정도로 부드럽습니다. 한번 입어보세요.”

고개를 갸우뚱거리던 정광이 도복 상의를 훌렁 벗었다.

떡 벌어진 어깨와 촘촘히 박혀 있는 근육이 드러났다.

진옥룡수호단이라면 비명을 지르다 기절했겠지만 허여민은 손뼉을 치며 감탄했다.

“와아! 외공도 단련하셨나요?”

“무인이니 당연하죠.”

“아아. 그 작았던 갓난아이가 이렇게 늠름하게 크다니.”

“유모도 조금 살쪘는데.”

“아하하. 여자한테 그런 말은 실례예요.”

“왜요?”

“음…… 그런 말을 듣고 기분 좋은 여자는 없으니까요.”

“그럼 날씬해졌다고 거짓말해야 해요?”

허여민은 내심 고개를 저었다.

이 어린 은공은 추측할 수 없을 정도로 높은 무공과 세상을 꿰뚫어 보는 혜안을 가지고 있지만…….

‘평범한 부분에서는 어수룩해.’

너무 솔직하다고 해야 하나?

악의 없이 내뱉는 말이지만 받는 이들은 아닐 것이다.

‘외모도 이렇게 아름다우니 적을 더 많이 만들게 되겠지.’

허여민은 정광을 돕고 싶었다.

하지만 자신을 과신하진 않았다.

도가 높은 곤륜 도사들과 부대끼면서도 이렇게 자라난 그를 고칠 자신은 없었다.

‘그래도 내가 도사님들보다 나은 면이 있어서 다행이네.’

도사라면 늦게 도문에 들지 않는 이상 숫총각인 것이 당연한 일.

그들은 여자를 모른다.

그렇기에 여자인 그녀는 정광을 도울 수 있었다.

“은공. 여자를 대할 때 솔직한 건 좋은 일이에요.”

“아까는 거짓말하라고 하지 않았어요?”

“음. 그런 게 아닙니다. 상대의 단점이 아니라 장점을 말해주세요. 평소 말하듯 솔직하게요.”

고개를 갸웃거리는 정광에게 허여민이 물었다.

“제 장점이 뭐죠?”

“내 유모.”

“……그거 말고요.”

“으음. 곱게 늙은 거?”

“앞말은 좋은데 뒷말은 싫네요. 또 없나요?”

“똑똑하고 시원시원해요.”

허여민이 두 손을 번쩍 들었다.

“바로 그거에요! 그렇게 장점을 말해주면 모두가 기뻐하죠!”

“나는 안 기쁜데?”

“아하하하. 주위 사람들이 기뻐하면 은공도 기분 좋아지는 순간이 있을 거예요. 안 그런가요?”

정광은 기억을 더듬었다.

새로운 곤륜 무공을 선보이자 천재라고 치켜세우며 누구보다 기뻐하던 사부.

하늘을 날아올라 무공 수위를 드러내자 곤륜에 다시 용이 나왔다며 눈시울을 붉히던 사조.

그들의 반응을 봤을 때 어땠더라?

“음. 그랬던 것 같기도 하고.”

“그렇죠? 하하. 잔소리는 여기까지. 어서 입어보세요.”

정광은 보의를 입었다.

생각보다 가볍고 몸에 착 감기는 게 괜찮은 느낌이었다.

‘도마뱀 놈의 비늘이라…….’

정광은 손가락에 내공을 담아 보의를 튕겼다.

쩡!

청량한 소리가 방 안을 울렸다.

손가락으로 때린 비늘은 아무런 변형 없이 맑은 광택을 흘리고 있었다.

‘삼성 공력을 썼는데 멀쩡해?’

생각해 보면 당연한 일이었다.

무각사룡을 잡을 때도 검으로는 힘들어서 침투경을 쓰지 않았던가?

‘전생의 어린 시절에도 이게 있었으면 고생을 좀 덜 했겠네.’

정광은 고개를 끄덕였다.

“제법이네요.”

“그렇지요?”

“잘 쓸게요.”

“마음에 드셔 하니 제가 기쁘네요.”

“꼬리 두 덩이 중 하나로 이거 만든 거죠? 남은 한 덩이로 만든 건 아까 아저씨가 말했던 관의 유력자한테 준 거고.”

“은공의 통찰력에 두 손 들었습니다.”

“그놈들 배후가 누구예요?”

두 손을 든 채 장난스럽게 웃고 있던 그녀의 얼굴이 굳어졌다.

“……무슨 말씀이신지?”

“상인들이 밀어준다고 수적이나 산적 놈들이 성도까지 들어와서 날뛸 수는 없잖아요. 관은 최소한 중립을 지키게 한 것 같고. 감숙성의 문파인가?”

잠시 침묵하던 허여민이 낮은 목소리로 대답했다.

“그렇게 짐작하고 있습니다.”

“짐작이 아닌 것 같은데?”

“아직 확실한 게 아닌지라…….”

“그럼 대충 말해봐요.”

한참을 망설이던 그녀가 간신히 입을 열었다.

“……공동파(崆峒派)가 아닐까 의심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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