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화
창룡후(蒼龍吼)
열흘 뒤, 삼청전 앞에 스무 명의 도사가 우뚝 섰다.
남게 된 이들은 아쉬움을 감추며 떠나는 이들의 무운을 기원했다.
그들의 마음을 전해 받은 스무 명의 도사는 얼굴이 상기되었다.
곤륜을 대표하여 강호에 나선다는 걸 다시 한번 자각하며 단단히 다짐했다.
‘더 멋지고 우아하면서도 강해진 곤륜을 강호에 보여줄 것이다.’
‘곤륜의 이름에 부끄럽지 않은 협객행을 하는 거다.’
도사이지만 또한 무인이기에 호승심이 끓어오를 수밖에 없는 법.
분위기가 달아올랐다.
그 이유를 짐작한 장문인이 위엄 있는 목소리로 그들의 머리를 깨웠다.
“본문의 이름을 높이려 애쓰지 말게. 어떤 일이든 도리에 맞게 행할 것이라 믿네.”
“네! 장문인!”
뜨거운 대답에 장문인은 내심 헛웃음을 지었다.
‘허허. 더 주의를 줬다간 사기만 떨어질 터. 여기까지만 해야겠구나.’
이번 중원행을 이끄는 운학은 경험이 많고 넓게 생각할 줄 아는 이였기에 장문인은 그를 믿기로 했다.
때마침 운학이 걱정하지 말라는 듯 살짝 고개를 끄덕여서 그 믿음은 더 커졌다.
흐뭇한 미소를 지으며 다른 이들을 바라보던 장문인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시선이 마주친 정광이 살짝 고개를 끄덕여서였다.
운학과 같은 행동이었으나 그와는 반대로 불안감만 커졌다.
장문인은 옆자리의 운후에게 전음을 날렸다.
-사형. 정광에게 따로 주의를 주셨습니까?
-물론이오.
-정확히 뭐라고 하셨습니까?
운후는 대답 없이 빙그레 웃었다.
예전처럼 바르다 믿는 일은 끝까지 지키라는 말이었기 때문이다.
-……어째 사형의 미소를 보니 더 불안해지는군요.
-너무 걱정하지 마시오. 곤륜을 이끌어 나갈 이는 우리 같은 늙은이가 아니잖소? 믿고 맡깁시다.
너무나 정론적인 대답에 장문인은 할 말이 없었다.
그래서 반론하는 대신 정광의 사부인 허청을 바라봤다.
함께 가는 네가 잘 구슬려서 사고 치지 말게 하라는 무언의 압박이었다.
하지만 허청은 그 누구보다 들떠서 일행의 수장인 운학을 재촉하고 있었다.
“사숙. 빨리 가시죠. 강호가 우리를 부르고 있습니다.”
“……이보게, 허청. 지금 장문인께서 자넬 보고 계시네만.”
“아! 장문 사숙! 잘 다녀올 테니 걱정하지 마십시오! 하하. 자, 사숙. 가시죠. 네? 아 어서요.”
“……아, 알았네.”
장문인의 허탈한 눈빛을 뒤로하고 일행은 발걸음을 옮겼다.
그들이 일주문으로 향하는데,
“꺄아아아아!”
“아악! 밀지 마, 이년아!”
“아줌마야말로 뭐 하는 거예요!”
수많은 여도우들이 몰려와 난장판이 되었다.
그야말로 엄청난 혼란!
누구라도 기겁하여 도망갈 상황이었지만 정광은 오래전부터 그를 아껴준 이들을 그냥 지나치지 않았다.
“오랜만에 오셨네요.”
“저, 저를 기억해 주시는 거예요?”
“누님 오 년 전에 감숙성(甘肅省)으로 시집가셨잖아요.”
“네! 진옥룡 님 뵈려고 친정에 왔어요! 그런데 하필이면 오늘 떠나시다니. 흑흑.”
“고맙긴 한데 이제 가정에 신경 쓰셔야죠.”
“할 건 제대로 다 하고 있으니까 걱정하지 않으셔도 되어요. 그나저나 진옥룡 님 힘들어서 어떡해요.”
정광은 젊은 처자들보다 나이 있는 유부녀들에게 더 친절했다.
하지만 아무도 의아해하거나 질투하지 않았다.
그가 갓난아기 때 아이 키우는 방법을 전혀 몰랐던 곤륜 도사들에게 일일이 가르쳐 준 사람들이란 것을 아는 것이다.
정광의 기억력은 귀신같았기에 한 명, 한 명의 사정을 정확하게 말하고 있었다.
“누나는 무릎도 안 좋은데 좀 적당히 오세요.”
“어머니는 잘 계세요? 얼굴 뵌 지 오래됐네. 무리하지 마시고 건강 회복되면 오시라 전해주세요.”
“무량수불. 할머니 제사 다가왔네요. 올해도 어르신들이 신명을 다해 제를 올릴 테니 안심하세요.”
이런 모습들을 바라보던 처자들은 감동의 눈물을 줄줄 흘렸다.
그리고 결심했다.
‘나도 열심히 활동해서 저런 따뜻한 말씀을 받아야지.’
‘온 가족이 라마교에서 도교로 갈아타게 하고야 말겠어.’
‘진옥룡께서는 나이도 외모도 안 보시는구나. 저리도 공평무사하실 수가.’
사실과 좀 다른 건 정광이 외모를 안 보는 건 아니란 것이다.
정광도 사람이기에 봤다.
다만 전생에 그의 주위에는 경국지색(傾國之色)의 미녀들밖에 없었기에 그 외의 여자들은 다 비슷비슷해 보여 똑같이 대할 뿐이었다.
만약 털 북슬북슬한 남자들이 그에게 달라붙었다면 진천마가 곤륜에 부활했을지도 모를 일, 어쨌든 보통 여자들에게 공평해서 다행인 정광이었다.
“그만 갈게요. 잘들 계세요.”
“흑흑. 안 가시면 안 돼요?”
“그만하고 보내 드립시다. 우리 때문에 도사님들이 난처해하시잖아요.”
“아예 떠나시는 게 아니에요. 기쁜 마음으로 보내 드리고 우리는 곤륜을 지키면 됩니다.”
진옥룡수호단이 슬퍼하는 이들을 달래고 나서야 정광 일행은 일주문에 이를 수 있었다.
벌써 많은 시간이 흐른 상황.
하지만 일주문은 수많은 인파로 인산인해를 이루고 있었다.
근 일 년간 곤륜파가 청해성에서 벌인 협행들로 곤륜산을 오르는 도우들이 많아진 것이다.
이번 중원행은 알음알음 소문이 퍼진 상태였기에 미리 산에 올라 기다리던 도우들이 떠나는 도사들을 축원했다.
“부디 조심해서 다녀오시길.”
“세상의 힘든 이들에게 힘이 되어주실 거라 믿습니다.”
그들에게 예를 표하는 도사들과 달리 정광은 두 눈을 가늘게 떴다.
익숙한 냄새를 풍기는 이들이 섞여 있는 것 아닌가.
‘이것들이 미쳤나.’
황하에서 썰었던 수적.
당고랍산맥에서 부셨던 산적.
청해호에서 갈아버렸던 흑도까지.
정광은 내심 한숨을 쉬었다.
‘그냥 다 죽일걸.’
정광의 눈빛에 시릴 듯한 한기가 어렸다.
살기는 아니었고 짜증의 발현이었지만 그와 시선이 마주친 몇몇 이들은 안색이 하얗게 질려 버렸다.
그들의 머릿속에 비슷한 생각이 떠올랐다.
‘서, 설마!’
‘들킨 건가?’
‘말도 안 돼! 어떻게 아는 거지?’
정광이 당황하는 그들을 보며 ‘그냥 다 죽여 버려야겠다’라고 마음을 굳힌 그때,
운후의 전음이 들려왔다.
-허허. 힘든 발걸음을 하신 도우들께서 축원을 해주시는데 피를 볼 생각이냐?
-안 되나요?
-행여나 도우들이 다치실까 봐 불안하구나.
-아. 그건 걱정 마세요. 저깟 놈들 죽이는 건 한 호흡도 안 걸리니까요.
운후의 전음이 다급해졌다.
-너는 더 크고 넓게 보는 아이 아니었더냐?
-아! 중원에 가기 전에 저놈들 본거지에 들려서 다 썰란 말씀이죠?
-……으음. 조금 더 넓게. 피를 안 흘리고도 해결할 방법이 있단다.
정광의 이마에 주름이 생겼다.
다른 이가 이렇게 복잡한 얘기를 했다면 귓등으로 흘리고 칼춤을 벌였겠지만…….
운후의 말이었다.
‘피를 안 흘리고도 해결할 수 있다고? 어떻게?’
잠시 고민하던 정광은 결론을 내렸다.
‘그건 불가능하지.’
강호는 철저한 약육강식의 세계.
힘이 곧 정의다.
나의 정의를 지키기 위해선 상대를 죽여야 한다.
한번 틈을 보이면 물어뜯기게 되고, 싹을 밟지 않으면 언젠가 자라기 마련.
저놈들이 그 증거다.
처음 원한을 맺게 되었을 때 깡그리 죽여야 했거늘, 손에 사정을 봐줬더니 여기까지 기어 올라와서 수작질을 부리지 않는가.
-사조님. 그냥 죽이는 게 편할 것 같은데요.
잠시 정광을 바라보던 운후가 다시 전음을 보내왔다.
-본문에 해를 끼치려는 게 아니라 정황을 보려고 왔을 수도 있지 않느냐. 마음에 안 든다고 다 죽이다 보면 네 걸음걸이마다 시체가 쌓이게 될 터, 세상을 위해서도, 너를 위해서도 그러지 말아다오.
긴 설명이었지만 정광에게는 별 의미가 없는 내용이었다.
하지만 맨 마지막에 나온 ‘너를 위해서도 그러지 말아다오’라는 말.
정광은 머리를 벅벅 긁었다.
-겁만 줘서 쫓아내란 말씀이죠?
-허허. 그래, 잘 알면서 왜 그리 늙은이를 힘들게 하느냐?
-하아. 알겠어요. 그렇게 할게요.
정광이 검을 뽑으려는데 운후의 전음이 귀에 꽂혔다.
-이왕이면 곤륜에 용이 날았으면 좋겠구나.
-……네?
-그리하면 저들이 어찌하겠느냐? 두려워서 다신 오지 않겠지. 너를 아끼는 도우들께도 큰 선물이 될 것이다.
정광의 얼굴이 구겨졌다.
이렇게 많은 사람 앞에서 그런 쪽팔린 짓을 하라니, 아무리 운후의 부탁이라 해도 그건 안 될…….
-네가 내게 보여준다고 했었지.
-……!
-지금 해다오.
-…….
침묵하던 정광이 탄식했다.
그는 약속을 철저하게 지키는 남자였다.
“하아아. 미치겠네.”
정광이 투덜대며 검을 빼 들었다.
그의 눈치를 보던 정탐꾼들의 얼굴이 시커멓게 죽어갔다.
하지만 정광의 검은 그들에게 향하지 않았다.
그의 상대는 하늘.
정광의 몸이 허공으로 솟구쳤다.
아무도 없는 그곳을 용이 된 정광이 자유롭게 날았다.
그의 검은 용의 발톱이 되어 쏟아지는 햇살을 갈랐고,
그의 손은 용의 꼬리가 되어 하얀 구름을 흐트러뜨렸다.
사람들은 그 모습을 보며 두 손을 모으거나 무릎을 꿇었다.
아름다웠다.
그러면서도 강했다.
곤륜에 진실로 아름다운 용이 있나니.
진옥룡이 왜 진옥룡인지 모두가 알게 되었다.
-허허허.
여기서 끝났으면 좋으련만, 운후의 전음이 정광에게 향했다.
-녀석. 창룡후도 해야지.
-하아아…….
정광의 입에서 곤륜산맥을 뒤흔드는 창룡후가 터져 나왔다.
아아아아아아아아아!
산천이 울고 구름이 사라졌다.
구파일방 중 하나요 도교의 성지인 곤륜파!
그 문을 열었던 개파조사의 재림!
운후를 비롯한 곤륜 제자들은 가슴 벅찬 희열을 느꼈다.
곤륜을 찾은 도우들은 경외감에 몸을 떨었다.
정황을 살피러 왔던 정탐꾼들은 오줌을 지렸다.
진옥룡이 자신의 존재를 세상에 알린 첫 번째 전설이었다.
‘미친. 허세 쩌는 개파조사 영감이랑 똑같아져 버렸잖아.’
정광에겐 흑역사로 남을 뿐이었지만 어쨌든 그랬다.
* * *
“아아아아아아아! 쿨럭. 쿨럭.”
누군가 정광의 창룡후를 흉내 내다가 밭은기침을 토했다.
듬직한 성격과 성실함으로 신망을 받는 정 자 배의 대사형 정우였다.
“후아. 내 내공으론 흉내도 못 내겠군. 막내야. 비슷했냐?”
평소의 그라면 이런 장난을 안 쳤겠지만 입문 후 처음으로 하산했기에 기분이 무척 들뜬 상태였다.
다른 이들도 그의 마음을 이해했기에 기분 좋게 웃었다.
정광 역시 미소 지었다.
미소였지만 가슴이 시릴 정도로 차가운 미소였다.
정우는 재빨리 목을 움츠렸다.
“크흠. 흠. 부러워서 그러는 거다. 그렇게 무섭게 보지 말아다오.”
“그저 봤을 뿐인데 왜 그러세요? 대사형이 찔려서 그런 거 아니에요?”
“어허. 찔리다니. 네 눈빛이 진짜 무서웠으니까 그러지. 동경이라도 보여줄까?”
“대사형이 그런 마음을 품고 보니 그렇게 보이는 것 아닌가요? 선한 마음으로 보셨으면 선하게 보였을 텐데요.”
“윽. 내가 졌다. 네 도가 나보다 높구나.”
길을 걸으며 말싸움을 듣던 도사들이 빙그레 웃었다.
정우의 말이 빈말이 아닌 게 정광은 제법 도사다운 언행을 보이고 있었다.
‘허허. 이리도 대견할 수가 있나.’
‘무공은 높지만 아직 아이라 생각했거늘 이제 다 컸어.’
곤륜산을 내려온 지 벌써 많은 날이 지났다. 그들은 청해성(靑海省)의 성도(省都)인 서녕(西宁)으로 향하고 있었는데 가는 곳마다 극진한 환대를 받았다.
곤륜파 본연의 명성에 근 일 년 동안 있었던 협행이 더해진 결과였다.
곤륜 제자들은 여정 와중에도 민초들과 함께 제를 지내고 축원을 하는 등 바쁜 하루하루를 보냈는데 어색해하던 정광도 그들을 따라 민초들을 돕기 시작했다.
정광이 갓난아이였을 때부터 지켜봐 온 곤륜 도사들은 뿌듯함을 느낄 수밖에 없었다.
일행을 이끄는 운학이 웃음 띤 얼굴로 외쳤다.
“자! 곧 서녕에 도착하니 모두 몸가짐을 바로 하게!”
“네!”
얼마 안 가 서녕성이 보이기 시작했다.
그곳을 바라보던 운학의 눈에 의아한 빛이 떠올랐다.
“허어. 성문에 웬 사람들이 저렇게 많은고?”
그의 말대로 성문 주위에는 사람들이 바글바글했다.
“어? 누군가 말을 타고 달려옵니다.”
“두 필인데요?”
두 명의 기수가 엄청난 속도로 달려오고 있었다.
“어라? 저 사람들이 왜?”
정광의 혼잣말에 운학이 물었다.
“아는 이들이더냐?”
“네.”
“어떤 이들인고?”
이어진 정광의 말은 더욱 아리송했다.
“유모랑 아저씬데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