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화
떠나는 이, 남는 이
정광은 정말 화난 상태였다.
죽어라 고생해서 살렸더니만 누구 마음대로 가버리려고 한단 말인가!
적조차 허락 없이 죽는 건 용납하지 않았던 그였다.
오랫동안 고통을 주다가 귀찮아지면 죽인다는 말이었지만 어쨌든 그랬다.
하지만 다른 이들이 보기엔 말도 안 되는 짓이었다.
장문인과 운연이 안 떨어지는 입을 억지로 벌려 물었다.
“……사형이 네 동의 없이 우화등선하시는 게 싫어서 그랬다고?”
“……우리가 잘못 들은 것이지? 어서 그렇다고 말해다오.”
뭔가 깊은 속사정이 있겠지.
복잡한 얘기일지도 모르니 끝까지 참고 들어주자.
이렇게 마음먹었건만 정광의 대답은 간결했다.
“곤륜엔 사조님이 필요해요.”
“무량수불…….”
“허어…….”
장문인과 운연은 물론 우화등선을 놓쳐 버린 당사자인 운후 역시 황당했다.
틀린 말은 아니다만 도문 최고의 목표인 우화등선을 방해하다니.
어린 시절, 동경하던 곤륜에 입문한 후 수많은 세월을 보낸 운후였다.
도경을 읽고 제를 지내며 마음을 닦았다. 무공을 수련하여 몸을 단련했다.
그 모든 것은 협의와 도 때문.
살아생전 협의를 지키고, 도를 닦아 우화등선하는 것이 그의 목표였다.
무공을 상실한 후 그간 지니고 있던 욕심을 놓게 되었지만, 눈앞에 다가왔던 우화등선의 꿈이 사라져버리자 노기가 치밀어 올랐다.
깊이 심호흡을 해서 화를 가라앉히려고 하는데,
“……!”
악취가 느껴지는 것 아닌가.
고개를 내려보니 임독양맥 타통의 잔여물들이 눈에 들어왔다.
운후는 머리를 한 대 맞은 듯한 기분을 느꼈다.
‘화가 났을 때는 냄새를 못 느꼈거늘 풀려고 하니 나는구나!’
도사의 몸으로 헛된 욕심에 사로잡혀 정광을 원망했던 그였다.
이 그릇된 마음이 그의 오감까지 가려 버린 것이다.
‘이게 끝이 아니지.’
곤륜 제자 전원이 그를 살리기 위해 동분서주했음은 그도 잘 알고 있었다.
그의 건강이 회복되기를 바라서였고, 건강해진 그가 곤륜을 지탱하는 기둥이 되어주길 원했을 것이다.
물론 우화등선한다면야 다들 기뻐해 주겠지만 마음 한편에 남을 허탈함은 어찌할 것인가.
돌이켜 생각해 보니 그 자신만 생각했기에 화가 난 것이었다.
‘허허. 멀었구나. 나이만 먹었을 뿐 한참 멀었어.’
스스로 도가 제법 높다고 생각했거늘 그 역시 보통의 사람이었다.
이제야 자신을 남김없이 받아들이게 된 그는 정광을 바라봤다.
갓난아기 때부터 함께했던 시간을 떠올리자 아까의 행동을 이해할 수 있었다.
‘누구 마음대로 가느냐고 했었지.’
운후 본인의 욕심만 생각했음을 정광 또한 알아차렸으리라.
‘아닐 수도 있지만.’
그러면 또 어떠한가. 정광 덕분에 커다란 깨달음을 얻었는데. 아니, 애초에 정광이 아니었다면 찾아오지도 않았을 우화등선이었다.
운후의 얼굴이 천천히 변했다.
예전보다 훨씬 더 자애로운 표정이었다.
“이리 오너라.”
“네?”
“오랜만에 안아보자꾸나.”
“갑자기 간지럽네요.”
“허허. 그래도 그러고 싶구나.”
단호하게 싫다고 말하려던 정광은 한숨을 쉬었다.
그를 업고 키워온 운후 아닌가.
“하아아.”
떨어지지 않는 발걸음을 억지로 옮기는데…….
언제였더라? 문득 전생의 일이 떠올랐다.
소교주였던 시절, 외부에 나가 있던 그에게 교주인 아비가 사람을 보냈었다.
‘소교주님!’
‘왜?’
‘반란입니다! 교주님께서 묵영대(黙影隊)와 함께 막고 계시나 오래 버티시지는 못할 겁니다! 어서 가시지요!’
‘싫은데.’
‘속하가 안내하겠습…… 네?’
‘영감이 약하긴 하지만 그 정도로 약하진 않잖아.’
‘이번에는 다릅니다! 교의 팔대 무력대와 칠대 가문이 손을 잡고 파죽지세로…….’
안 그래도 가기 싫은데 떼거리로 덤비고 있다니 더 가기 싫었다.
하지만 어쩌랴. 빌어먹을 천륜 같으니.
교로 향하는 내내 몰려드는 쥐새끼들을 썰어대느라 팔이 뽑힐 지경이었다.
그리고 마침내 엄청난 수의 쥐새끼들에게 포위된 천마전(天魔殿) 앞에 이르자 이런 생각이 들었다.
지금이라도 돌아갈까?
영감이 죽으면 자유다.
내 마음대로 살 수 있어.
하지만 그의 발은 앞으로 나아가고 있었다.
사방에서 짓쳐 드는 쥐새끼들을 분쇄하며.
‘내가 미쳤었지.’
정광은 머리를 세차게 저어 전생의 기억을 떨쳐냈다.
그는 이미 운후 앞에 서 있었다.
“오랜만이구나. 허허허.”
운후가 그를 안으며 너털웃음을 흘렸다.
“잡아줘서 고맙다. 아직 할 일이 남았다는 걸 잊고 있었구나.”
“알아차리셨으면 됐어요.”
운후는 말없이 빙그레 웃었다.
버릇없는 말과 달리 안고 있는 정광의 몸에서 따뜻한 기운이 느껴져서였다.
‘네가 특이하다고는 하나 이렇게 따뜻한 몸과 마음을 가진 사람이다. 세상이 너를 오해하지 않도록, 네가 상처받지 않도록 도우마.’
운후는 정광이 마음껏 날 수 있도록 뒷받침하기로 결심했다.
새로운 곤륜.
대곤륜의 시작이었다.
* * *
대연무장에 모인 도사들에게 운후가 정중한 예를 표했다.
“모두 고생하게 해서 미안하네. 새롭게 얻은 생을 의미 있게 쓰도록 애쓰겠네.”
완전히 치료됨은 물론 무공까지 높아진 운후였다.
도사들이 기쁨의 함성을 질렀다.
운후는 빙그레 웃으며 정광을 바라봤다. 정광이 한 걸음 나서자 도사들은 정광을 연호하기 시작했다.
“정광! 정광! 정광! 정광!”
진옥룡수호단보다 더 크고 거센 외침이었다. 곤륜에 내려앉은 운무가 그 뜨거운 열기에 흩어질 정도였다.
하지만 정광의 말에 분위기는 급속도로 차가워졌다.
“수련 시작하죠.”
“정광! 정…… 뭐?”
지독한 수련이 시작되었다.
지금껏 해왔던 것들은 가벼운 몸풀기라 생각될 정도로.
그렇다고 힘들다는 말을 했다간 더 괴로운 수련으로 바뀔 것이 분명할 터. 정광의 성격을 아는 그들은 군말 없이 수련에 임했다.
그리고 장렬히 쓰러져 갔다.
‘후회는 없다. 할 만큼 했어…….’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럼이 없을 정도로 태웠도다…….’
안타깝게도 불가.
예전 같았으면 정신 차릴 때까지 쉴 수 있었겠지만 이번엔 아니었다.
“일어나세요! 겨우 이 정도로 쓰러지시면 어떡해요!”
뭐? 겨우 이 정도?
“지난 일 년간 무엇을 하신 겁니까? 기초체력은 물론 정신력까지 극한으로 몰아붙였었는데 부족했던 겁니까!”
생기가 빠져나갔던 도사들의 눈에 독기가 어리기 시작했다.
드넓은 청해성을 구석구석 누비고 다니며 희귀한 영약 재료들을 탈탈 털었던 시간이 떠오른 것이다.
“으랏차차!”
“끄아아앗!”
도사들은 비명 같은 기합을 지르며 몸을 일으켰다.
전신이 부들부들 떨렸지만 눈빛만큼은 눈부시게 빛났다.
그들은 다시 수련에 집중했다.
땀에 절다 못해 소금기로 허옇게 번들거렸지만 그 누구도 우는소리를 하지 않았다.
운후는 그 모습을 바라보며 흐뭇한 미소를 지었다.
“허허. 진정한 무인이 되었군.”
“사조님도 그러셔야죠.”
“허허. 그래, 나도…… 응?”
정광은 운후를 몰아붙였다.
새롭게 태어나다시피 한 육신과 단전에 똬리를 튼 막대한 양의 내공을 제대로 사용할 수 있도록.
멋지고 우아하면서도 강한 곤륜 무공을 주입식으로 때려 박는 것도 잊지 않았다.
그렇게 시간이 흘렀다.
한 해가 지나자 많은 것이 바뀌어 있었다.
곤륜 도사들의 무공은 나날이 늘어갔고, 운후는 늘어나는 걸 넘어 훨훨 날 지경이었다.
그래도 정광은 멈추지 않았다.
떠나기 전 마지막 담금질이었다.
참다못한 모두가 분연히 떨치고 일어서려는 그때,
“장문인! 중원에서 전갈이 왔습니다!”
“누가 보낸 것인가?”
한 도사가 누군가를 데리고 왔다.
청해성을 대표하는 표국, 청류표국(靑流鏢局)의 표두였다.
그가 내민 서신에는 힘찬 필체로 ‘하북팽가’라는 네 글자가 쓰여 있었다.
장문인의 명으로 삼청전(三清殿)에 모든 제자가 모였다.
“장문인, 어떤 내용입니까?”
“흐음. 사 년 전에 했던 약속을 지킬 때가 되었다고 하오.”
장문인이 서신의 내용을 전부 읽자 도사들이 웅성거리기 시작했다.
“무림맹 창설이라. 결국 이렇게 되는군.”
“빠르면 삼 년 정도 걸릴 거라더니 사 년째가 되고서야 정리가 되었나 봅니다.”
“장문인, 몇 명이나 보낼 생각이시오?”
“글쎄요. 스무 명 정도면 적당하지 않겠소?”
너무 적지도 많지도 않은 인원.
도사들은 서로를 바라보며 고개를 주억거렸다.
“인원을 어떻게 구상할지는 생각하셨습니까?”
“아직이오. 운 자 배가 네 명은 있어야 성의 표시가 될 것 같고…… 허 자 배 여덟에 정 자 배 여덟을 보내는 건 어떻겠소?”
잠시 생각하던 도사들이 하나둘 입을 열었다.
“본문의 중진인 허 자 배와 젊은 정 자 배의 숫자를 맞춰 일대일로 보살피자는 말씀이군요.”
“정 자 배도 강호를 경험해 볼 때가 됐지요.”
“좋은 생각입니다, 장문인.”
모두 동의하자 장문인이 말을 이었다.
“그럼 그렇게 하는 거로 합시다. 남은 건 누구를 보내느냐인데…….”
거의 모든 도사가 눈부신 속도로 손을 들었다.
어찌나 힘차고 빠른지 하늘을 무너뜨릴 기세였다.
“장문 사제! 내가 가겠소!”
“장문 사백! 소질 허량! 강호 정의를 위해 한목숨 바칠 준비가 되어 있습니다!”
“장문 사숙조님! 강호에 나가 곤륜의 이름을 드높이는 것은 소손 정현이 갖고 태어난 숭고한 의무이옵니다!”
오랜 세월 동안 명경지수(明鏡止水)처럼 갈고 닦아온 도는 어디에 내팽개친 걸까?
배분을 가리지 않고 엄청난 경쟁이 벌어졌다!
객잔(客棧)의 명운을 걸고 호객행위 하는 점소이들이 고개를 처박을 정도로 살벌한 기세!
그 기세를 한 몸에 받게 된 장문인은 두 눈을 가늘게 떴다.
‘가고 싶어도 맡은 직책 때문에 말도 못 꺼내고 있거늘. 그런 나를 겁박한다?’
기분이 상당히 안 좋았다.
“그만. 지금부터 말하는 이는 이번 중원행에서 뺄 것이오.”
“허허. 탁월한 혜안이십니다. 이리도 시끄러워서야 어찌 도사라…….”
“운형 사형, 나가주십시오.”
“……네? 저는 단지…….”
“나. 가. 주. 십. 시. 오.”
억울해도 어쩌랴.
장문인의 명은 지엄한 것이었다.
상처받은 운형은 비틀거리며 삼청전을 나갔다.
장문인은 위엄 있는 목소리로 선언했다.
“중원행에 나설 이들을 정하겠소. 지금부터 호명하는 이들은 내 뒤에 서시오.”
남은 이들은 숨소리조차 내지 않고 장문인의 입을 바라봤다.
자신의 이름이 불리길 빌며.
‘어찌한다.’
장문인의 머릿속이 복잡해졌다.
넓은 세상에 나가 자신의 무공을 시험해 보고 싶은 마음은 누구나 같을 터.
누구는 보내고 누구는 안 보내는 것은 무척 힘든 결정이었다.
‘마교가 언제 또 발호할지 모른다. 운후 사형은 남으셔야 할 테고 정광은…… 음?’
정광이 보이지 않았다.
한참을 두리번거리던 그는 혹시나 싶은 마음에 뒤를 돌아봤다.
정광이 서 있었다.
“……언제부터 있었느냐?”
“…….”
“……쫓아내지 않을 테니 말해라.”
“뒤에 서라고 하실 때요.”
어차피 곧 떠나려던 정광이었다.
무림맹도 구경해 볼 수 있는 기회인데 어찌 놓치겠는가.
어이가 없어 고개를 절레절레 젓던 장문인은 다른 도사들을 바라봤다.
정광이 새치기와 같은 행동을 했는데도 아무런 불만이 없어 보였다.
‘생각해 보면 당연한 일이군.’
대부분의 인원이 곤륜에 남게 된다. 그런 판국에 정광이 있으면 지옥 같은 수련을 계속해야 하지 않는가?
정광은 어떤 일이 있어도 중원행에 포함되어야 하는 것이다.
장문인의 생각도 마찬가지였다.
곤륜의 현재이자 미래인 정광에게 경험과 명성을 쌓을 기회를 준다.
곤륜에 남게 된 장문인은 편한 생활을 즐기고!
결국 정광을 중심으로 중원행에 나설 인원들이 정해졌다.
가게 된 이는 환호했다.
“무량수불! 감사합니다!”
남게 된 이는 좌절했다.
“원시천존이시여…… 어찌 이런 일이…….”
그나마 위안이 되는 건 정광이 없기에 쉴 수 있다는 것이었다.
‘그래. 오랜만에 유유자적한 삶을 사는 것도 나쁘지 않겠지.’
‘어찌 보면 잘된 일이다. 무(無)로 돌아가 자연과 하나가 될 기회야.’
직설적으로 말하자면 아무것도 안 하고 뒹굴뒹굴하겠다는 거였다.
하지만 그들의 생각을 이미 간파한 이가 있었으니…….
“사조님. 부탁드릴 게 있는데요.”
“무슨 일이냐?”
“제가 없는 동안 사조님께서 지도해 주실래요?”
정광의 부탁에 운후는 눈을 감았다.
다른 제자들보다 훨씬 더 치열하고 고통스러웠던 나날들이 떠올랐다.
‘나니까 견딘 거다.’
정광이 얼마나 악독하게 몰아붙였던지 반선에 가까운 심성을 가진 그가 아니었다면 칼부림이 일어나도 몇 번은 일어났을 게 분명했다.
그의 입에서 초탈한 도사다운 웃음소리가 흘러나왔다.
“허허허.”
그래도 덕분에 엄청난 무공을 쌓지 않았는가?
그 경지를 혼자 느끼는 게 갑자기 미안해졌다.
운후는 서서히 눈을 떴다.
그의 눈에는 태산보다 무거운 의지가 자리하고 있었다.
“그래. 온 힘을 다해 지도하마.”
남게 된 도사들의 얼굴이 시커멓게 죽어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