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화
대곤륜의 날갯짓
십 개월이라.
운후가 버틸 수 있는 시간을 대충 그 정도로 예상했기에 빨리 시작해야 했다.
거대한 솥이 준비되고 그 속에 무각사룡의 뿔이 놓인 뒤 깨끗한 물이 가득 담겼다.
날카로운 눈으로 지켜보던 운연이 허청에게 지시했다.
“시작해라.”
“네, 사숙.”
허청이 솥 밑에 장작을 가득 넣고 불을 붙였다. 불씨는 금세 커져 활활 타올랐다.
얼마 안 가 물이 끓기 시작했다.
“그래. 이렇게 팔팔 끓어야 하느니라. 땔나무가 모자라면 안 될 것이야.”
“걱정하지 마십시오, 사숙. 사질들이 나무하러 갔으니 곧 돌아올 것입니다.”
그때 무언가 짊어지고 오는 정광이 보였다.
“오. 왔느냐?”
“네. 근데 뭐 하세요?”
“뭐 하냐니? 네가 말한 대로 물을 팔팔 끓이고 있다.”
“미적지근한데요?”
“……무어라?”
“이러면 백 년이 지나도 안 돼요.”
정광은 들고 온 것을 내려놨다.
풀무였다.
마침 나무를 해 온 도사들도 지켜보는 가운데 정광은 내공을 끌어 올렸다.
풀무를 잡은 그의 두 손이 눈부신 속도로 움직였다.
팡! 팡! 팡! 팡!
불길이 미친 듯이 커지더니 색까지 변하기 시작했다.
적색에서 주황색으로.
주황색에서 황색으로.
황색에서 황백색으로.
황백색에서 백색으로.
이렇게 백색이 되고 나서야 정광은 고개를 끄덕였다.
“이 정도는 돼야죠. 이렇게 십 개월이에요.”
“……!”
모여 있던 모든 이들의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
‘벌써 장작이 다 타버렸잖아! 나무를 얼마나 해 와야 하는 거야?’
‘불꽃을 저렇게 키우려면 내공을 써도 오래 못 버틸 텐데!’
정광이 끓는 물을 손가락으로 찍어서 맛보더니 운연에게 물었다.
“사숙조님. 이거 어떤 물이에요?”
“이왕이면 맑은 물이 좋을 것 같아서 추운봉(秋雲峰)의 샘물을 넣어봤다. 안 되느냐?”
“아니요, 딱 좋아요. 물이 반 이상 졸으면 그만큼 더 넣고 끓여야 하는데 추운봉 물을 쓰면 되겠네요.”
물도 계속 길어와야 한단다.
그것도 옆 봉우리에 있는 샘에서.
모두 망연한 표정을 짓자 허청이 분연히 나섰다.
이대로 뒀다간 사기만 떨어질 터.
아무리 힘들어 보이는 일도 막상 해보면 별것 아니라는 걸 보여줘야 했다.
“내가 한번 해보마.”
정광에게서 풀무를 건네받은 그는 내공을 담아 두 팔을 움직였다.
팡. 팡. 팡. 팡.
부족했는지 삽시간에 불길이 백색에서 황백색으로 죽어버렸다.
“사부님! 설렁설렁 하시면 안 돼요!”
“크윽!”
허청은 이를 악물었다.
비결, 옥심귀일공(玉心歸一功)!
단전에서 내공이 힘차게 솟았다!
“하압!”
팡! 팡! 팡! 팡!
기합과 함께 풀무질이 달라졌다.
점점 커지던 바람은 황백색 불꽃을 백색으로 다시 돌려놓았다.
“그렇죠. 그거예요.”
“하하하! 별것 아니구나!”
호탕한 말과 다르게 그의 이마에서는 굵은 땀방울이 뚝뚝 떨어지고 있었다.
그리고 반 시진 뒤, 허청은 사제인 허욱에게 풀무를 넘긴 뒤 털썩 주저앉았다.
팔을 들어 이마의 땀을 훔치던 그는 주위의 시선을 느끼자 싱그러운 미소를 지었다.
“거참. 열기 때문에 땀 좀 흘렸더니 기분이 무척 상쾌하구나. 하하하.”
상쾌는 무슨.
팔이 부들부들 떨리는 꼴을 보아하니 내일이면 젓가락질도 못 할 게 분명했다.
곤륜산맥을 맡은 오조장 운향도 잠시 들러서 보고 있었는데, 슬금슬금 물러나더니 다시 산속으로 사라져 버렸다.
그처럼 조용히 물러나려던 장문인은 정광에게 잡혔다.
“어디 가세요?”
“……산에서 애쓰고 있는 제자들을 도와야 하지 않겠느냐.”
“장문 사숙조께선 이곳을 맡으셔야죠.”
“……이곳? 본문을 말함이렷다?”
설마 했건만 역시나였다.
“아뇨, 솥이요. 불을 백색으로 유지해야 해요. 황백색으로 변하더라도 그 시간이 하루에 반각을 넘으면 안 되고요.”
설명이 이어졌다.
쉽게 말해서 누군가 퍼졌는데 대체할 사람이 없을 시, 장문인이 고강한 내력으로 버텨야 한다는 말이었다.
“허어. 허허허. 사람이 부족해서 큰일이구나.”
“돌아온 조가 도우면 되죠. 몇 조가 왔나요?”
“없다. 아직 소식조차 없어.”
“네?”
어이없어하던 정광은 한 가지 사실을 깨달았다.
이곳은 곤륜파, 융통성이라고는 눈곱만큼도 없는 도사들이 대다수라는 것을.
무공 고하의 문제가 아니었다.
그의 방식으로는 그리 힘들지 않은 일도 도사들의 방식대로 하면 굉장히 힘든 일이 되는 것이다.
‘아아. 하나하나 다 떠먹여 주듯이 말해줘야 했던 건가.’
정광은 미련을 털었다.
어차피 이리된 일, 빨리 해치워 버리면 되는 거였다.
막상 가려니 좀 짜증이 났지만.
“다녀오겠습니다.”
“응? 어딜 말이냐?”
“시달목분지, 황하, 청해호, 당고랍산맥이요.”
“……그, 그래. 고생해라.”
엄청난 양의 일에 질렸던 도사들은 정광을 안쓰럽게 바라봤다.
서서히 묘한 안도감과 투지가 느껴지기 시작했다.
‘차라리 나무 패고 물 긷고 풀무질하는 게 낫구나!’
‘반드시 활활 태우리라! 하얗게!’
정광은 활기가 도는 곤륜을 나와 달리기 시작했다.
첫 번째 목적지는 일조가 맡은 시달목분지였다.
* * *
시달목분지는 높이가 이천장(二千丈)쯤 되는 산들로 둘러싸인 분지였는데 그 길이며 폭이 엄청났다.
그나마 북서쪽은 사막지대였기에 찾아야 할 곳이 줄었지만 그래도 너무 넓었다.
게다가 이 지역에는 푸른 꽃이 너무 많아서 시간이 보통 오래 걸리는 것이 아니었다.
습기 많은 땅조차 단단히 다져져 있었기에 삽질이 아닌 곡괭이질을, 그것도 내공을 써서 해야 했기에 더 힘들었다.
청혈화와 습암균을 각각 한 소쿠리씩 구해야 하거늘 지난 두 달이 넘는 시간 동안 모은 것은 한 움큼도 안 되었다.
출발할 때만 해도 드높았던 일조의 사기는 나날이 꺾이다 못해 사그라들고 있었다.
‘이대론 안 되겠군.’
일조장 운성은 변화가 필요하다는 것을 느꼈다.
‘분위기를 끌어 올려야겠어.’
그때,
꽃을 캐던 조원들이 웃는 소리가 들려왔다.
반색한 그는 재빨리 다가가 그 웃음을 더 키우려 했다.
헌데.
그가 생각한 웃음이 아니었다.
“하하하. 이보게 사제. 내 손톱 좀 보게나. 참 예쁘지 않은가?”
“허허허. 분홍색 꽃물이 참 예쁘게 들었군요.”
“자네는 녹색이구먼. 너무 요란하지 않고 절제된 아름다움이라 무척 보기 좋네.”
“그래도 분홍색만 하겠습니까? 저는 사형이 부럽습니다.”
운성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정신이 나간 상태 아닌가.
이 일을 어찌해야 하나 고민하는데 저 멀리서 곡괭이질 하던 제자들이 떠들썩하게 떠드는 소리가 들렸다.
‘그래. 바로 이런 걸 원했다.’
운성은 그들에게 달려갔다.
그들의 활기참을 다른 이들에게도 전해줘야 했다.
“아악! 내 등! 너무 아픈 게 갈라지는 것 같습니다!”
“오오. 사제. 등 근육이 아주 그냥 쩍쩍 갈라졌구먼. 역시 등을 키우려면 곡괭이질이야.”
“으으. 맨날 곡괭이질만 하다 보니 상대적으로 가슴 근육이 떨어져 걱정입니다. 어떻게 해야 할까요?”
“으음. 곡괭이질을 반대로 해보면 어떨까? 어깨 뒤로 내리쳐보게나.”
“이렇게요? 많이 불편한데 자세는 괜찮습니까?”
“옳지! 그래! 가슴을 더 모아서! 계속 그렇게 해보게나!”
이쪽도 제정신이 아니긴 마찬가지였다.
운성은 땅이 꺼져라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허어. 어찌 이런 일이.”
“다들 뭐 잘못 드셨어요?”
“그러게나 말이다. 도대체, 응?”
고개를 들어보니 정광이 눈앞에 서 있었다.
“여, 여긴 어떻게?”
“너무 안 오셔서 와봤죠.”
꽃을 캐는 무리와 곡괭이질을 하는 무리를 번갈아 보던 정광이 얼굴을 찡그렸다.
“이래서 어느 세월에 해요.”
“그, 그런가?”
“휴우. 다들 모아주시겠어요?”
운성은 신호용 폭죽을 꺼냈다.
불을 붙이자 ‘펑’ 하는 소리와 함께 하얀 불꽃이 하늘 위로 올라가 터졌다.
반 시진 정도 흐르자 곳곳에 흩어져 있던 곤륜 문도들이 모였다.
“따라오시면서 보세요.”
정광이 시범을 보였다.
먼저 청혈화.
한동안 달리다 푸른 꽃들을 발견한 정광은 망설임 없이 검을 휘둘렀다.
푸른 꽃들뿐만 아니라 주변에 있던 모든 것들이 잘려서 허공에 떠올랐다.
“붉은 진액 없죠? 그럼 다음.”
방법은 같았다.
꽃을 따는 게 아니라 잘라 버렸다.
주변에 뭐가 있든 한꺼번에.
이 짓을 반복하자 삽시간에 주변이 황폐해졌다.
참다못한 운성이 정광을 만류했다.
“너무 거칠지 않느냐? 푸른 꽃만 따야지, 왜 다른 것들까지…….”
“쟤들 어차피 다시 자라는데요.”
“……무어라?”
“잘린 것들은 썩어서 비료가 되니 얼마 안 가 더 짙은 녹지가 될 거고요.”
“아! 생과 사의 순환이라!”
누가 뭘 깨닫든 상관없이 계속 검을 휘두르던 정광은 청혈화 한 송이를 얻을 수 있었다.
“억!”
“벌써?”
경악하는 도사들과 달리 정광의 표정을 담담했다.
“괜히 푸른 꽃만 골라서 베려고 하지 마세요. 세밀하게 내공을 운용하면 심력도 내공도 많이 소모하게 되니까요.”
“전부 다 잘라내는 것도 내공을 많이 쓰긴 마찬가지 아니더냐?”
“다르죠.”
“……?”
“다 베어버릴 것이니 마음에 걸리는 게 없잖아요.”
“……!”
도사들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이는 무인이 가져야 할 기본적인 마음가짐, 까맣게 잊고 있던 것을 반성하게 된 것이다.
“그리고 땅을 왜 곡괭이로 파요?”
“그거야 당연히 효율 때문에…….”
“우리는 무인이잖아요.”
“……그건 그렇다만.”
“낙화검(落花劍) 다들 아시죠?”
알다마다.
곤륜에 입문하면 보통 십 년 내에 배우는 기본 검술 아닌가.
“열여섯 번째 초식, 낙화발아(落花發芽)예요.”
습기가 많은 땅에 선 정광이 높이 뛰어올랐다.
“원래는 허공에서 검을 움직이는 거지만!”
그는 떨어지는 기세를 실어서 바닥에 검을 박아 넣었다.
“쑤셔 넣고 휘두르는 겁니다!”
콰콰콰콰!
“그리고 발경(發勁)!”
콰앙!
축축한 흙덩이들이 폭발하듯 비산했다.
“내공소모가 적은 섬전수(閃電手)로 흙을 치우고요!”
검을 잡지 않은 왼손이 눈부신 속도로 흙덩이들을 날렸다.
“그리고 반복!”
낙화검과 섬전수를 번갈아 펼치자 얼마 안 지나 일장 깊이의 구덩이가 파였다.
아쉽게도 습암균은 없었지만 지금까지 고생한 것이 무색하게 굉장히 빠른 속도로 파낸 것이었다.
이쯤 되니 도사들은 열광하기 시작했다.
“낙화검을 그런 식으로 펼칠 수도 있구나!”
“흙을 튀어 오르게 해서 섬전수로 후려치니 따로 삽질하고 옮길 필요가 없어졌다!”
무인의 마음가짐과 무공초식의 응용에 대해 다시 한번 생각하게 된 도사들에게 정광이 덧붙였다.
“이인 일조로 하시면 더 쉬울 거예요. 한 분은 검, 한 분은 권으로요.”
“그렇군. 그게 효율적이겠어.”
“마치 협공을 하는 것 같군.”
정광은 도사들을 이끌고 시달목분지를 질주했다.
처음 쓰는 수법이라 어색해하던 도사들은 시간이 지날수록 익숙해졌고 며칠 더 지나자 완숙하게 펼쳐내게 되었다.
지난 두 달 동안과는 비교가 안 될 정도로 많은 청혈화와 습암균이 모였다.
“어렵지 않죠?”
“물론이지!”
“저 가도 금방 끝내실 수 있죠?”
“당연하다!”
“그럼 빨리 모으시고 곤륜에 복귀하셔서 오조에게…….”
오조에게 도움을 주라고 하려던 정광은 말을 살짝 바꿨다.
“……오조에게 자랑하세요!”
“와하하하!”
“바로 그거지!”
“좋아! 가자!”
사기가 높아지다 못해 하늘을 찌를 정도!
그들은 상상조차 할 수 없었다.
곤륜에서 그들을 기다리고 있는 건 끝없는 노동뿐이라는 것을.
* * *
시달목분지, 황하, 청해호, 당고랍산맥 순으로 곤륜파를 상징하는 하얀색 폭죽이 터졌다.
그때마다 놀라운 일이 벌어졌으니.
시달목분지의 땅이 갈아엎어졌다.
황하를 지배하는 황하수로연맹(黃河水路聯盟) 중 제일 잔인한 악릉채(顎陵寨)가 불타올랐다.
청해호에서 흉맹을 떨치던 청해사흉(青海四凶)의 목이 날아갔고.
산사태 때문에 막혀 있던 당고랍산맥의 길이 어느 날 갑자기 뚫리게 되었다.
청해성의 민초들은 신이 나서 떠들었다.
“곤륜파의 신선들께서 이 쓸모없는 땅을 개간해 주셨다! 덕분에 올해를 무사히 넘길 수 있어!”
“허구한 날 통행세를 뺏고 수틀리면 칼질하던 수적 놈들이 사라졌으니 이 얼마나 고마운 일인가!”
“청해사흉 그 악적들은 또 어떻고! 듣기로는 아름다운 소신선께서 일검에 다 꿰어버리셨다 하네!”
“당고랍산맥 길이 다시 뚫린 걸 아나? 그것도 곤륜파 신선님들이 해주신 일이라더군!”
다른 정파들도 수적이나 마두를 처단하곤 한다.
하지만 대부분 본인과 사문의 명성을 위한 것, 민초들을 위해 이렇게까지 애쓰는 문파는 없었다.
청해성 전체에 곤륜파의 이름이 되새겨졌다.
멋지고 우아하면서도 강한 협객(俠客)의 모습으로!
대곤륜이 다시 날갯짓을 시작한 것이다!
한편, 곤륜파의 도사들은 곤륜산맥을 죽어라 뛰어다니며 마지막 재료들을 모으고 있었다.
“으아아아!”
“다 끝났다!”
“우리가 해냈어!”
모든 것이 준비되었다.
정광은 그것들을 무각사룡의 뿔이 끓고 있는 솥에 남김없이 넣었다.
그리고 다시 한 달이 지났다.
지난 열 달 동안 새하얗게 타오르던 불이 마침내 꺼졌다.
“오오! 이것인가?”
“이렇게 신묘한 모습이라니!”
모두가 감탄했다.
정광도 만족스러운 얼굴로 솥 안을 들여다보다가…….
고개를 갸우뚱했다.
“어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