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곤륜마협-19화 (19/569)

19화

사골 끓이듯이

정광은 이죽거리며 무각사룡을 검으로 팼다.

“미쳤냐? 미쳤어? 미쳤구나?”

쾅! 콰앙! 콰지직!

“꾸워어어어어어억!”

무각사룡은 처참한 비명을 지르며 뒤늦은 후회를 했다.

무슨 이런 바보 같은 짓을!

이 괴물한테 덤비다니!

정광의 말대로 잠시 미쳤던 게 분명했다!

그런데 잠깐.

예전에 비하면 맞을 만한데?

“크롸롸롸뢋!”

무각사룡은 용맹하게 맞섰다.

하지만 정광은 너무 빨랐다.

잔상을 남기며 이곳저곳에 번쩍거리는데 도저히 잡을 수가 없었다.

“시끄러워, 인마. 어쩌라고.”

정광은 검으로 무각사룡을 잘근잘근 다졌다.

근 하루 동안 근성 있게 반항하던 무각사룡은 결국 견디지 못하고 똬리를 틀었다.

“쿠오오오오!”

영력을 끌어 올리자 비늘이 커지며 거대한 몸통을 두껍게 뒤덮었다.

그야말로 영물류 최강의 방어기!

정광은 어이없다는 표정을 지으며 검을 검집에 넣었다.

“그러면 안 아플 줄 아냐?”

두 손으로 패기 시작했다.

검으로 때릴 때처럼 쇳소리가 나는 게 아니라 둔중한 소리가 울려 퍼졌다.

퉁! 투웅! 투확!

“꽈아아아아앙!”

무각사룡은 미칠 지경이었다.

단단한 비늘 덕분에 검은 그나마 버틸 만했지만 비늘을 뚫고 들어오는 침투경(浸透勁)은 정말이지 견디기 힘들었다.

이대로 가다간 얼마 못 갈 것 같아 머리를 쥐어짜는데,

“아, 힘들어.”

정광이 뒤로 훌쩍 뛰더니 가부좌를 틀고 앉았다.

그리고 운기조식에 들어갔다.

무각사룡은 방심하지 않고 한동안 그 모습을 지켜봤다.

정광은 미동도 하지 않은 채 숨만 쉬고 있었다.

기회!

무각사룡은 잽싸게 똬리를 풀고 정광을 덮쳤다.

보통의 무인이라면 운기조식 중이라 당할 수밖에 없는 상황. 설령 급히 중단한다 한들 극심한 내상을 입을 수밖에 없다.

하지만 정광이 누구던가?

뜻이 서면 운기가 시작되고 마음이 원하면 중단할 수 있는 경지의 무인이다.

그의 몸이 사라졌다.

잠시 후 그는 다른 곳에 앉아 운기조식을 하고 있었다.

무각사룡이 다시 쫓았지만 정광은 틈틈이 운기조식을 하며 계속 피하기만 했다.

그리고 어느 정도 내공이 회복되자,

파파파파파팡!

“꾸오오워웍!”

무각사룡을 다시 패기 시작했다.

정광은 노련했다.

때리다 지치면 운기조식, 덮치면 피하면서 내공을 모으다가 다시 패기.

이런 식의 공방이 반복되었다.

무각사룡의 눈에 핏발이 섰다.

이놈, 분명히 기운이 떨어졌다!

이번만은!

파파파파파팡!

“꾸오오워웍!”

이번만은!

퍼퍼퍼퍼퍼펑!

“꿔우우우웍!”

무각사룡은 미칠 지경이었다.

이빨에 스치기만 하면 되는데!

그럼 독으로 녹여 버릴 수 있는데!

왜! 왜! 왜!

……스치질 않니.

정광은 다른 공격을 허용하더라도 독니만큼은 귀신처럼 피하고 있었다.

이렇게 또 하루가 지났다.

결국 몸도 마음도 만신창이가 된 무각사룡은 무릎을 꿇…… 으려 해도 없었기에 머리를 모랫바닥에 처박았다.

쿵!

철저한 복종.

과거의 정광에게 취했던 자세였다.

“진작 그럴 것이지. 괜히 땀만 뺐잖아.”

정광은 내공을 끌어 올렸다.

격산타우(隔山打牛)의 수법으로 뇌를 곤죽으로 만들어 버리리라.

천천히 손을 내미는데,

‘응?’

손에서 핏물이 떨어지는 것이 보였다.

‘……내가 피를? 다쳤다고?’

이게 대체 얼마 만인지.

몸을 살펴보니 옷은 이미 넝마가 된 지 오래, 찢기고 베인 상처는 물론 시커멓게 멍든 자국이 가득했다.

정광은 오랫동안 잊고 있던 ‘창피함’이라는 감정을 느꼈다.

‘이거 진짜 옛날 같지 않네.’

뱀 한 마리 잡는데 이 꼴이 되다니.

만약 제대로 된 무인을 만나면?

그의 기준으로 제대로 된 무인이란 많지 않았지만 어쨌든 있지 않은가.

기분이 조금 싸했다.

‘그렇다고 무공을 완성할 때까지 곤륜에 박혀 있기는 싫고.’

마침 방법이 있었다.

바로 눈앞에.

머릿속의 지식이 떠올랐다.

‘살아 있는 상태로 꺼내야 효과가 더 좋은 거였지.’

정광은 마음을 굳혔다.

“죽기 싫지?”

“……뀨웅.”

“미친. 이게 어디서 귀여운 척을.”

“…….”

정광은 검을 다시 뽑았다.

검신에 내공이 맺히며 차가운 빛을 발했다.

“살고 싶으면 가슴 내밀어.”

“……?”

“내단(內丹) 좀 가져가마. 반만.”

“……!”

무각사룡으로선 받아들일 수 없는 일이었다.

어떻게 수련해서 키운 내단인데!

그걸 내놓으라니 말이나 되는 소리인가!

아니, 내단이 무슨 만두도 아니고 반으로 갈랐다간 죽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무각사룡은 처절하게 반항했고,

당연히 처절하게 쥐어 터졌다.

“걱정하지 마. 안 죽을 테니까 가만히 좀 있어.”

“끄르르륵…….”

정광은 검에 내공을 담아 무각사룡의 몸을 톱질하듯 썰었다.

무각사룡은 끔찍한 비명을 질렀지만 움직일 힘도 없었기에 그대로 몸이 갈라지게 되었다.

“어라? 여기가 아닌가?”

정광의 잘못이 아니었다.

이렇게 긴 뱀의 몸통에서 가슴이 어디인지 어찌 알겠는가?

몇 번의 삽질 끝에 결국 정광은 가슴을 가르는 데 성공했다.

정확히 말하면 갈라놓고 보니 가슴이었지만.

정광은 주저하지 않고 아이 머리통만 한 크기의 내단을 반으로 잘라 꺼냈다.

“꾸웨에에엑!”

“좋아. 싱싱하네.”

내단을 이리저리 돌려보던 정광은 흡족한 미소를 지었다.

전생의 그에게는 아무런 쓸모가 없었지만 지금은 필요한 것. 강호에서 손에 꼽힐 정도로 귀중한 내상약(內傷藥)을 가지게 된 것이다.

이때 무각사룡은 바닥을 뒹굴며 비명을 지르고 있었는데 그 모습을 본 정광은 눈이 살짝 커졌다.

“어? 진짜 안 죽었어?”

“……!”

무각사룡의 비명이 뚝 그쳤다.

뭐? 진짜 안 죽어?

내단을 자르면 죽을 거라 생각했다는 말 아닌가!

분노가 솟기보단 서러웠다.

대체 뭘 잘못했다고 이런 꼴을 당해야만 하는지.

그저 눈물만 흘리는데 정광이 덕담을 건넸다.

“부지런히 수양해서 내단 키워라. 그래야 나중에 또 가져가지.”

뭐 이런 악랄한 놈이!

“아. 몇백 년은 지나야겠지? 역시 그냥 죽일까?”

이 자식이 진짜!

무각사룡은 냉정하게 대응했다.

눈부신 속도로 자신의 꼬리를 잘랐다. 그것을 입에 물고 공손히 내밀었다.

마치 흑사회(黑社會)의 악소(惡少)들이 자신의 손가락을 잘라 충성을 맹세하는 듯한 모습이었다.

“오오. 너 직접 자를 수도 있었냐? 뱀이 아니고 도마뱀이네?”

영물 중의 영물인 자신을 한낱 미물로 폄하하는 말에 발끈해야 하건만 무각사룡은 여전히 공손했다.

정광의 지랄 맞은 성격을 뼈저리게 느꼈기 때문이었다.

역시나.

“근데 너무 짧다?”

무각사룡은 눈물을 삼키며 한 덩이를 더 잘랐다.

누가 봐도 진심을 인정할 만큼 빠른 행동이었다.

정광만 빼고.

“잘라봐야 다시 자라잖아.”

무각사룡은 영혼으로 외쳤다.

손발이 없으니 자를 데가 거기밖에 없다고!

제발 믿어달라고, 충성을 다하겠다고!

정광은 잠시 생각했다.

이놈을 써먹을 일이 있는지.

‘곤륜으로 이사시켜서 일주문이나 지키게 할까?’

기각.

뜨거운 사막에서 모래찜질이나 하며 살던 놈이 곤륜의 매서운 추위를 견딜 리가 없다.

‘돈이나 벌어오라고 해?’

기각.

그딴 게 가능할 리가 있나.

정광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뭐 이런 쓸모없는 놈이 다 있지.’

역시 묵혀뒀다가 내단이나 또 꺼내는 게 제일 나으리라.

‘그러려면…….’

이대로 보내주는 건 미련한 짓. 그는 무각사룡의 노란 눈을 들여다봤다. 그의 의지가 놈의 눈을 통해 뇌리로 들어갔다.

마령제혼술(魔靈制魂術)!

영물인 무각사룡의 이지를 제압하긴 부족하지만 경고하기에는 충분한 술법이었다.

-야.

무각사룡은 몸을 부르르 떨며 고개를 바닥에 박았다.

정광이 그 모습을 보며 하얗게 웃었다.

-앞으로 잘해라.

* * *

오랫동안 격전을 벌였기에 정광의 운기조식은 길었다.

꼬박 하루가 지나고 나서야 본래의 내공을 회복한 그가 눈을 떴다.

길을 지나가던 백가상단의 무인들이 그를 중심으로 원을 그린 채 주위를 경계하고 있었다.

의미 없는 일이었지만 그를 위하는 마음이 느껴졌다.

이미 알고 있던 정광은 천천히 일어서서 엉덩이를 털었다.

그 모습을 본 허여민과 백진환이 다급히 달려왔다.

“은공!”

“괜찮으시오?”

“네.”

부부는 안도의 표정을 지었다.

“아아. 다행이네요.”

“근데…… 저건 무엇이오?”

정광은 백진환이 조심스럽게 가리키는 것을 봤다.

무각사룡이 남기고 간 거대한 꼬리 두 덩이였다.

“아. 도마뱀 꼬리요.”

“……도마뱀?”

“네.”

백진환이 망설이다가 침을 꿀꺽 삼킨 뒤 물었다.

“이 사막에서 저만한 크기라니. 전설로 전해지는 쌍각사룡의 꼬리인 것 같소만.”

“전설은 무슨. 도마뱀이죠.”

쌍각사룡의 것이 맞다는 말 아닌가!

백진환과 허여민이 서로를 바라보며 경악했다.

실제로 있었다니!

아니, 그보다 어떻게 저걸?

정광의 이어지는 말에 그들은 더 놀라게 됐다.

“가지고 싶어요?”

당연하지.

누가 저 귀물을 거부하겠는가.

하지만 가지고 싶다 한들 저걸 줄 리가…….

“그럼 가져요. 옛날에 나 먹이느라 고생했는데.”

“……네?”

정광은 말뿐만 아니라 백진환 부부의 발치에 무각사룡 꼬리 두 덩어리를 던졌다.

그야말로 기연!

“갈게요.”

정광의 몸이 사라졌다.

놀란 백진환 부부가 주위를 둘러보니 저 멀리 점이 되어 사라지고 있었다.

떨리는 눈으로 무각사룡의 꼬리를 바라보던 백진환은 조심스럽게 비늘을 만져봤다.

의외로 무척 얇았는데 그 단단함과 서늘함이 천고의 기물이라 부를만했다.

그의 머릿속에서 여러 생각이 오가다 정리되었다.

그는 그것을 허여민에게 말했다.

“아. 좋은 생각이군요.”

“당신 생각도 같다니 기쁘오. 이로써 가문을 반석에 올릴 수 있을 것이오.”

허여민은 정광의 상처투성이였던 몸을 떠올리며 중얼거렸다.

“은공께도 도움이 될 선물을 드릴 수 있고요.”

“하하. 이 얼마나 기쁜 날이오.”

“상공…….”

“부인…….”

부부는 서로 마주 보며 웃었다.

그리고 두 손을 잡았다.

천고의 기연에 놀라던 상단 무인들은 또다시 표정을 구겼다.

아주 사골 끓이듯이 오랫동안 사랑을 키워가는 부부였다.

* * *

정광은 엄청난 속도로 곤륜을 향해 달렸다.

그런데 좀 멀어야지.

사막을 벗어난 뒤에도, 해와 달이 여러 번 바뀌고 나서야 곤륜산에 도착할 수 있었다.

피곤함에 찌든 얼굴을 억지로 펴며 일주문 앞에 서 있던 정현이 두 눈을 부릅떴다.

“마, 막내야!”

“사형! 잘 있었어요?”

“그, 그래! 대체…… 응?”

정광은 바람처럼 그를 지나쳐 안으로 사라졌다.

그리고 장문인의 처소로 가던 중, 마침 밖으로 나오던 장문인과 마주쳤다.

“장문 사숙조님!”

“아! 정광이구나!”

반가워하던 장문인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아끼고 아끼는 사손이 거지꼴이 되어 돌아왔다.

넝마가 된 옷 사이로 보이는 수많은 상처가 그의 마음을 아프게 후볐다.

대체 어떤 일을 겪었길래!

다급히 살펴보려는데 정광이 더 빨랐다.

“사조님은 어떠세요?”

“하루에 한 시진 깨어 있을 때마다 네가 심어드린 기를 운공하며 버티고 계시다.”

“똑같으시단 말이죠?”

“그렇지.”

“알겠어요. 일단 전 좀 잘게요.”

“……무어라?”

정광의 몸은 이미 자신의 처소를 향해 달리고 있었다.

방에 도착한 그는 침상에 대자로 쓰러졌다.

이리도 따뜻하고 편할 수가 있나.

정광은 그대로 잠들었다.

오랜만의 꿀잠이었다.

하루가 지나서야 눈을 뜬 정광은 방문을 박차고 운연에게 달려갔다.

“사숙조님!”

“아! 일어났느냐?”

반색하던 운연이 정광의 몸을 훑어봤다.

그의 표정이 어두워졌다.

장문 사형에게 들은 대로 상처투성이인 것이 심한 고초를 겪은 게 분명하지 않은가.

어찌 된 일인지 물으려는 그에게 정광이 거대한 뿔을 내밀었다.

운연의 눈이 찢어질 듯 커졌다.

“이, 이건!”

“반선단 주재료요.”

“쌍각사룡이 정말 있었구나!”

“응? 안 믿으셨었어요?”

“그, 그렇다기보단 너무 놀라운 일이라…….”

운연은 고개를 획획 돌려 정신을 차렸다.

어린 사손이 목숨을 걸고 가져온 재료를 연단해야 하는 것이다!

“고생했다! 어떻게 하면 되느냐?”

비장하게 묻는 운연에게 정광이 설명했다.

“큰 솥에 푹 고아서 국물을 내야 해요.”

“……구, 국물?”

“네. 사골 끓이듯이 오랫동안요.”

운연은 입을 떡 벌렸다.

이게 대체 말이나 되는 소린가?

이런 영물의 뿔로 고작 사골 끓이듯이 국물을 내라니!

하지만 운연은 도사다운 이였다.

‘무량수불. 정광을 의심하다니 나는 아직도 멀었구나.’

그는 흔들리는 마음을 강한 부동심으로 가라앉힌 뒤 물었다.

“그래, 얼마나 끓이면 되느냐?”

“음. 십 개월 정도?”

“……시, 십 개월?”

“네.”

정광이 덧붙였다.

“팔팔 끓는 물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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