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화
옛날 같지 않네
이건 싸움이 아니었다.
일방적인 살육이었다.
정광이 움직일 때마다 팔다리가 날아가고 피분수가 솟구쳤다.
백가상단 사람들은 이런 생각을 했다.
혈사풍, 지금에 딱 어울리는 이름이라고.
그들의 피가 누런 모래를 붉게 물들였다.
그 위를 정광이 바람처럼 휩쓸었다.
차라리 웃으면서 살육을 벌이면 소름이 덜 끼치련만.
정광의 표정은 담담했다.
그저 할 일을 하는 모습이었다.
그 모습이 더 두렵게 다가왔다.
“으아악! 도망가!”
“응. 안 돼.”
“커헉!”
아직 살아 있던 자들이 사방으로 흩어져 달아났다.
이미 죽은 자들의 반월도가 날아가 그들을 꿰거나 깨트렸다.
모두 정광이 던진 것들이었다.
“어라? 벌써 끝인가?”
정광은 사지를 바스러뜨려 놨던 혈사풍 부대주에게 다가갔다.
“크흑. 사, 살려주십시오.”
“내가 왜?”
“처, 천…… 끄윽!”
정광은 혀를 차며 부대주의 심장을 발로 으깨버렸다.
‘대체 관리를 어떻게 하길래 이렇게 나불대는 거야?’
부대주라는 놈이 끌고 온 걸 보니 지금 죽인 놈들은 혈사풍 전체 인원의 오분지 일도 안 될 것이다.
그럼 대충 계산해도 총원이 사백 명이 넘는다는 얘기.
너무 많았다.
어차피 다 쓸어봤자 새로운 놈들이 기어들어 올 게 뻔했기에 가끔가다 한 번씩 숫자를 줄여줬었건만 이렇게 많다고?
‘교에 무슨 일이 있긴 한가 본데.’
생각은 짧았다.
‘뭐 내가 알 바 없고.’
간만에 손맛을 봤으니 그거면 족했다.
정광은 검에 묻은 피를 털어내고 세심하게 닦았다.
‘만약 사부가 핏자국을 본다면…….’
폭풍 같은 잔소리가 이어질 터, 생각만 해도 몸이 부르르 떨렸다.
“으으. 소름 끼쳐.”
정광은 검을 검집에 넣은 뒤 허여민에게 다가갔다.
그가 다가간 만큼 그녀가 뒤로 물러났다.
“왜 그래요?”
“…….”
“아. 내가 유모 해칠까 봐? 걱정 마요. 내 사람한테는 안 그러니까.”
내 사람.
진옥룡수호단의 단원이 들었다면 죽어도 여한이 없는 말이었지만 그녀는 아니었다.
그래도 조금은 안심이 되었다.
“……정광 소협, 감사합니다.”
“으으. 소협은 무슨.”
그가 양팔을 북북 긁는 모습에 그녀의 마음이 이상하게 편해졌다.
그때.
정광이 그녀를 부축하고 있던 장한의 목을 움켜잡았다.
“끄륵.”
“아, 안 돼요!”
“놓으시오!”
“그는 우리 사람이오!”
놀라서 외치는 사람들에게 정광이 말했다.
“세작인데요.”
“……!”
잠시 충격에 빠졌던 그들은 이내 정신을 차렸다.
“대체 무슨 근거로?”
“억측이 아니라 확실한 사실이어야 하오.”
정광이 어깨를 으쓱했다.
“에이. 내가 설마 감으로 그러겠어요?”
“…….”
모든 이가 정광이 세작으로 지목한 장한을 의심스러운 눈빛으로 바라봤다.
이렇게 자신 있게 말하니 마음이 흔들리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정광이 자신만만하게 설명했다.
“이놈, 세작 냄새나요.”
“…….”
“응? 표정이 다 왜 그래요? 진짜 나는데.”
“…….”
백진환이 심호흡을 해서 감정을 추스른 뒤 물었다.
“……그게 감 아니오?”
“감이 아니라 냄새라니까요.”
“……내 말이! 그게 감 아니냔 말이오!”
“아, 진짜.”
감과 냄새는 완전히 다르다.
감이 여러 가지 정황과 본능을 조합하여 판단하는 것이라면 냄새는 상대가 풍기는 특색을 느끼는 것이다.
복마전(伏魔殿) 중의 복마전인 천마신교에서 백 년 넘게 뒹굴며 수많은 세작과 배신자를 잡아냈던 정광이었다.
그런데도 안 믿는다고?
“그냥 빠른 길로 가죠.”
정광은 손가락으로 장한의 머리통을 찔렀다.
그의 눈이 툭 불거지며 찢어질 듯한 비명이 터져 나왔다.
“끄아아아악!”
모두가 눈을 부릅떴다.
다짜고짜 고문이라니.
어떻게 이런 짓을!
정광이 은인이고 측량할 수 없을 만큼 강하다고 하나 이건 아니지 않은가!
장한과 동고동락한 동료들이 병기를 뽑으려 하고 백진환 부부도 소리쳐 제지하려는 그때.
“끄으윽! 그, 그만! 내가 세작 맞소! 제발! 제발 그마아아안!”
“거봐요. 맞죠?”
“…….”
상단 무인들은 뽑으려던 병기를 슬그머니 밀어 넣었다. 백진환 부부는 벌렸던 입을 간신히 닫았다.
“돈이! 돈이 필요했습니다! 아악! 그런데 혈사풍의 사람이 찾아와서…….”
장한은 묻지 않아도 알아서 떠들었다.
자신이 어떤 나쁜 짓을 했는지.
갖고 싶은 것은 무엇인지.
취미와 좋아하는 여자는 물론,
모래바람에 상한 피부가 걱정이라는 얘기까지.
얼마 안 가 백가상단의 사람들은 장한의 어릴 적 흑역사까지 다 알게 되었다.
“아, 시끄러.”
정광은 장한의 머리통에 박았던 손가락을 뺐다.
울부짖으며 모든 것을 토설하던 장한은 어안이 벙벙한 표정을 지었다.
머리에 난 구멍에서 피를 줄줄 흘리며.
“……어? 안 아프네?”
정광이 그를 백가상단의 무인들에게 던지자 그는 다시 아파졌다.
무인들에게 몰매를 맞았기 때문이다.
“혈사풍이 어찌 알고 여기에까지 나타났나 했는데!”
“네가 어떻게 그런 짓을!”
얼마 안 가 그는 기절해 버렸다.
“그만! 살려서 더 자세한 얘기를 들어야 한다!”
백진환의 외침에 세작을 패던 무인들이 하나둘 주저앉기 시작했다.
혈사풍과의 싸움에서 입은 부상과 메말라 버린 체력이 그제야 느껴졌다.
그리고.
“정삼! 눈을 뜨게! 제발!”
“으흐흑. 신오! 신오야아아!”
무인들은 죽은 동료들을 부둥켜안고 절규했다.
치열했던 전투였지만 사망자는 최초 돌격에서만 나왔다.
혈사풍이 백진환 부부를 잡는 데 집중하느라 중상을 입은 자들도 거의 없었다. 백진환 부부의 부상이 제일 심한 상태였다.
“어디 봐요. 흠. 살짝 긁혔네.”
정광의 말에 부부는 황당한 표정을 지었다.
‘뼈가 보일 정도인데 뭐?’
‘정말 알 수 없는 자구나.’
정광은 그들이 입은 상처 부위의 혈도를 짚은 뒤, 금창약(金瘡藥)을 꺼내 덕지덕지 발랐다.
“아아.”
“이럴 수가.”
두 사람이 감탄했다.
신기하게도 바르자마자 통증이 가라앉고 시원한 느낌이 드는 것 아닌가.
그들의 안색과 상처를 살피던 정광은 만족했다.
‘부작용이 없네?’
곤륜산맥을 주파하며 채집한 약초들로 대충 만든 것이었는데 꽤 쓸 만해 보였다.
“고맙소.”
“고마워요.”
부부에게 고개를 까딱이던 정광이 눈살을 찌푸렸다.
“아, 이놈이 진짜.”
난데없는 말에 부부가 깜짝 놀라는데,
파앗-
정광의 몸이 사라졌다.
“헉!”
“어, 어디로?”
주위를 둘러보던 백진환이 놀라서 외쳤다.
“저, 저기!”
정광은 벌써 지평선 너머로 달리고 있었다.
* * *
안 그래도 사막의 뜨거운 열기와 텁텁한 모래바람을 싫어하는 정광이었다.
그래서 후딱 끝내고 돌아가려 했건만 이놈이 한 달 가깝게 도망칠 줄이야!
결국 지쳐서 퍼져 버린 놈을 오늘에야 따라잡았는데, 하필이면 그 자리에 아는 얼굴들이 있었다.
죽는 걸 두고 볼 수는 없어서 잠시 도왔거늘…….
‘그사이에 튀어버려?’
놈을 추격하던 정광은 까끌까끌한 모래가 잔뜩 섞인 침을 뱉었다.
“퉤! 이 새끼, 안 서?”
놈은 서기는커녕 방향을 정신없이 틀었다.
“이게 보자 보자 하니까!”
비룡축전(飛龍逐電)을 펼쳐 달리던 정광이 바닥을 박찼다.
“네 기운을 못 느낄 줄 알았냐!”
비붕신법(飛鵬身法)이었다.
그는 붕새처럼 허공을 날아가다가 방향을 세 번이나 바꿔서 떨어져 내렸다.
그의 손에 들린 검이 손잡이까지 모랫바닥 속에 박혔다.
“합!”
막대한 내공이 검신을 타고 땅속으로 흘러가 폭발했다.
콰앙!
동시에,
“꾸웨에에엑!”
모랫바닥이 터지며 거대한 무엇인가가 튀어나왔다.
“아, 눈 따가워.”
정광이 손바닥을 휘젓자 세찬 바람이 일어나 모래 먼지를 밀어냈다.
곧 그것의 모습이 드러났다.
팔장(八丈)이 넘는 길이.
아름드리나무보다 두꺼운 몸통.
그 몸을 감싼 모래색 비늘.
마치 전설 속의 용처럼 보이는 영물, 쌍각사룡(雙角沙龍)이었다.
“잘 있었냐?”
그것은 정광의 인사에 대답하긴커녕 꼬리를 들어 머리 위를 가렸다.
“어쭈. 안 치워?”
“크르르르…….”
“그냥 목을 베어줄까?”
“…….”
쌍각사룡은 울화가 치밀었다.
인간 따위가 협박을 하다니!
그냥 확 통째로 삼켜 버려?
하지만.
쌍각사룡은 영물이었다.
사람처럼 대상을 눈으로 판단하지 않았기에 정광의 진정한 정체를 알고 있었다.
그래서 더더욱 필사적으로 도망쳤던 거고.
쌍각사룡은 오래전 정광에게 잡혀 고초를 당한 거로도 모자라 지정해주는 장소에서 기다리라는 명령을 받았었다.
한동안 그 말에 따랐던 건 그를 거역할 생각조차 못 했기 때문이었다.
근 칠십여 년간 찾아오지 않기에 죽은 줄 알았는데…….
헛된 바람이었던가.
쌍각사룡은 힘없이 꼬리를 내렸다.
쌍각이라는 이름이 무색하게 달랑 하나만 남은 뿔이 드러났다.
다른 하나는 예전에 정광에게 뺏긴 상태였다.
“역시 반은 남겨두길 잘했어.”
흡족해하던 정광이 눈살을 찌푸렸다.
“근데 꼴이 왜 이래?”
가만히 뜯어보니 쌍각사룡의 온몸에 상처가 가득했다. 생긴 지 오래되지 않아 보이는 것들이었다.
정광은 바로 상황을 이해했다.
“감히 내 걸 가로채려 해?”
쌍각사룡이 있던 곳을 아는 이는 그를 제외하면 단 두 명이었다.
“생사 돌팔이냐, 일생 장의사냐?”
쌍각사룡은 정광에게 개처럼 끌려다니던 생사마의와 일생십사의 얼굴을 떠올렸다.
그리고 재빨리 고개를 저었다.
“그럼 누군데?”
“…….”
“하아. 말 안 하시겠다?”
“……!”
안타깝게도 쌍각사룡은 말을 할 줄 몰랐다. 얼마나 억울하고 답답한 지 눈물이 흘렀다.
마음이 통한 걸까?
정광이 이해했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 두 놈은 아니고, 처음 보는데 좀 하는 놈이었나 보다?”
끄덕끄덕.
“그래서 도망쳤구나?”
쌍각사룡(雙角沙龍)은 맹렬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정상참작을 해줘야 한다고, 내 의지가 아니었다고.
정광이 지정한 장소에 있으려 했으나 어쩔 수 없이 피해야만 했다고 눈으로 항변했다.
하지만 상대는 정광이었다.
“나중에 알게 되면 손봐줘야겠네. 어쨌든 너, 내가 거기 가만히 있으라 했지?”
“…….”
벌써 칠십 년 전의 일이다.
“게다가 내가 온 걸 알면서도 도망을 쳐?”
“…….”
당연한 것 아닌가?
누구나 수긍할 만하건만 정광은 이해심 많은 남자가 아니었다.
그는 손에 든 검을 빙글빙글 돌렸다.
“머리 대.”
“…….”
“꼬리 또 잘라줄까? 거긴 잘라봐야 또 자라니 역시 목을 베는 게 나으려나?”
쌍각…… 아니, 사실은 예전에 독각사룡이 된 녀석이 몸을 잘게 떨었다.
처참하게 당했던 기억이 주마등처럼 떠올랐다.
하지만 모두 과거의 일.
영력을 높여서 자세히 보니 정광의 기운은 과거와 비교도 안 되게 작았다.
이쯤이면 해볼 만하지 않을까?
아니, 이길 수 있다!
그놈이긴 한데 과거의 그놈은 아니라고!
그냥 콱!
“호오. 해보자고? 좋아! 한 달 내내 쫓느라 울화통이 터졌는데 그렇게 하자!”
정광의 몸에서 소름 끼치는 기운이 흘러나와 일렁거렸다.
그가 진심으로 살기를 일으킬 때의 모습이었다.
“귀찮으니까 네가 와.”
“크라라랏!”
독각사룡은 눈부신 속도로 머리를 내밀었다.
더없이 공손한 자세였다.
“쓸데없이 시간 쓰게 하네.”
정광은 대충 검을 그었다.
캉!
“꾸억!”
“어? 안 잘려?”
까앙!
“꾸웩!”
“하아. 나도 늙었…… 너무 어리구나.”
꽈앙!
“끄롸악!”
“아 씨. 네가 질겨진 거 아니야?”
정광은 소매를 걷고 두 손으로 검을 잡았다.
그리고 도끼질하듯 독각사룡의 뿔을 찍어댔다.
콱! 콰작! 콰직!
“꽉! 끄악! 꽈칵!”
“조금만 참아! 곧 끝나!”
아니었다.
그로부터 한참의 시간이 지나서야 독각사룡의 뿔이 잘렸다.
이제는 무각사룡(無角沙龍)이 된 녀석이 뒤돌아 흐느꼈다.
정광은 뿔을 봇짐에 넣으며 피식 웃었다.
“그간 수양 좀 했나 보네. 덤비려고 움찔거리다가도 끝내 참고 말이야.”
어쨌든 반선단의 주재료를 구했기에 정광은 기분이 좋아졌다.
“살려줄까?”
끄덕끄덕.
“막상 그러면 또 죽이고 싶은데.”
무각사룡은 필사적으로 고개를 저었다. 어찌나 강하게 젓는지 머리통이 멀리 날아가 버리지 않을까 걱정될 정도였다.
“흠. 생각해 보니 귀찮네. 나중에 또 쓸 일이 있을지도 모르고.”
잠시 고민하던 정광은 통 크게 살려주기로 했다.
“전에 지정해 준 곳에서 대기해. 또 도망가면 몸통을 비틀어서 쥐어짜 주마.”
무각사룡은 바닥에 머리를 격하게 박았다.
정광은 자신보다 큰 녀석의 머리를 두드려 준 뒤 몸을 돌렸다.
순간 무각사룡의 눈빛이 흉악하게 변했다.
바로 지금이다!
이제껏 참은 건 모두 적의 방심을 끌어내기 위한 물밑작업!
입을 크게 벌리고 소리 없이 뒤에서 덮쳤다!
콰직!
흐흐. 한입거리도 안 되는 놈이.
득의양양한 표정으로 정광을 꿀꺽 삼키려던 무각사룡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입안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미쳤냐?”
무각사룡은 천천히 뒤돌았다.
소름 끼치는 살기를 발산하고 있는 정광의 모습이 보였다.
무각사룡은 영물 중의 영물.
떨리는 몸을 억지로 다잡으며 최대한 귀여운 표정을 지었다.
“……뀨웅.”
하지만 헛된 노력.
정광은 애교가 통하는 남자가 아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