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화
맑고 깨끗했던 눈의 주인
가도 가도 똑같았다.
모래로 된 수평선이 끝없이 이어졌다.
백진환은 내심 한숨을 쉬었다.
‘정말 못 할 짓이군.’
그만 그런 마음이 아니었나 보다.
옆에서 나란히 가던 아내 허여민이 농을 던졌다.
“사막도 계속 걸으면 멀미가 나는 줄 몰랐네요.”
“저런. 등이라도 두드려 주오?”
“벌써 몇 번 토했는걸요.”
“하하. 농을 하는 걸 보니 아직 기운이 있나 보오.”
“어머. 진짠데.”
놀란 백진환이 다급히 몸 상태를 살피려 하자 허여민이 작게 웃었다.
“하하. 농이에요, 농.”
“후우. 놀랐잖소. 정말 괜찮소?”
“물론이죠. 오히려 좋은데요?”
“허어. 이런 사막이?”
백진환의 황당하다는 물음에 허여민의 눈매가 둥글게 휘었다.
“당신과 함께 다니는 게 좋다는 말이에요.”
“당신…….”
백진환은 말끝을 흐리며 아내를 바라봤다.
모래바람 때문에 눈만 빼놓고 천으로 감고 있었지만 그녀가 짓고 있을 미소가 보이는 듯했다.
그래서 마음이 더 아팠다.
“미안하오. 호강을 시키지는 못할망정 이런 곳까지 오게 해서.”
“무슨 말을 그리 하세요? 제가 온다고 떼쓴 건데요.”
“허허. 떼라니. 당신의 무공이 나와 별 차이가 없어 큰 도움이 되는 걸 누구나 알고 있소.”
“흐음. 왜 이렇게 띄우실까? 뭐 잘못한 거라도 있어요?”
“잘해주지 못해 미안해서 그러오.”
백진환의 거듭되는 자책에 허여민이 눈살을 찌푸렸다.
그리고.
파앙!
“커헉!”
남편의 등을 손바닥으로 강타했다.
“왜 자꾸 분위기 깨요? 오랜만에 같이 여행해서 기분 좋은 판에.”
“여, 여행?”
“이럴 땐 달콤한 말 좀 하고 그래 봐요. 평상시에는 잘하면서 왜 밖에 나오면 안 하는지 몰라.”
백진환의 눈동자가 떨렸다.
거의 일 년에 걸친 원행을 여행이라고 말해주는 아내가 너무 고마워서였다.
그는 마음을 다잡았다.
“그래, 여행이었지. 내 잠시 착각했소.”
그녀의 눈매가 다시 둥글게 휘었다.
“이제야 원래의 당신으로 돌아왔네요.”
두 사람은 타고 가던 낙타를 멈추고 빙그레 웃었다.
그리고 서로의 손을 꼭 잡았다.
뒤에서 따라오던 수하들도 멈출 수밖에 없었다.
그들은 휘파람을 불며 짓궂은 농담을 던지긴 개뿔, 짜증을 냈다.
“거참, 빨리 좀 가시죠!”
“이거야 원. 혼인 안 한 사람 서러워서 살 수가 있나.”
“지금 저희 사기 팍팍 깎이고 있는 거 안 보이십니까?”
겸연쩍게 웃는 백진환과 달리, 허여민은 고개를 팩 돌려 그들을 쏘아봤다.
“뭐라고요?”
장대한 체구의 사내들이 어깨를 움츠렸다.
그녀가 계속 노려보자 용기 있는 몇몇이 간신히 대답했다.
“흠. 흠. 얼마 안 남았으니 천천히 가시죠.”
“감사합니다. 두 분 덕분에 저도 반드시 혼인해야겠다고 결심했습니다.”
“으라라랏! 이상하게 기운이 솟는군요!”
피식 웃은 허여민이 백진환에게 시선을 돌렸다.
“그렇다네요.”
“하하하. 나도 들었소.”
“그러니까 당신, 다시는 그런 말 하지 말아요. 오히려 이런 여행은 자주 하고 싶단 말이에요.”
“신경 쓰겠소이다.”
“말은. 겨우 두 번째네요.”
“……첫 번째는 십칠 년 전에 곤륜에 갔던 걸 말하는 것이오?”
“어머. 그것밖에 더 있나요?”
백진환은 얼굴을 가린 천 속에서 쓰게 웃었다.
그때의 일이 기억나서였다.
상단의 우산이 되어주십사 곤륜을 찾아갔던 그 일이.
‘괜한 고생이었지.’
아내는 둘째를 낳은 지 얼마 안 된 몸으로 함께했었다.
서녕(西寧)에서 곤륜산까지 이르는 그 험한 길을.
당연히 처음엔 반대했다.
‘안 되오. 그 몸으로 어딜 가겠다는 거요?’
‘제 몸은 제가 잘 알아요. 그리고 오라버니도 보고 싶은걸요.’
오래전 출가하여 도사가 된 오라비를 만나고 싶다는 데 할 말이 있나.
그래도 그녀를 말렸건만.
‘제가 직접 가면 오라버니가 곤륜파의 마음을 조금이라도 움직여 줄지 몰라요.’
한창 커나가던 백가상단(白家商團)에는 힘이 필요했다.
그는 말없이 그녀를 꼭 껴안았다.
그리고 곤륜으로 향했다.
하지만.
단칼에 거절당했다.
그것도 믿었던 처남에게.
‘상단에 힘이 되어달라? 미안하지만 본문은 도문(道門), 강호의 사사로운 일에 끼어들지 않소.’
‘도장, 무슨 말씀을 그리하십니까? 같은 도문인 공동파만 하더라도 속가제자를 키우고 사업을 돌봐주지 않습니까?’
‘백 가주. 본문이 속가제자를 안 받은 지도 백 년이 넘었소. 그 이유를 모르시오?’
‘압니다. 과거 진천마 그 악적의 명령으로 마교가 일차 침공을 했을 때, 곤륜의 속가제자들이 사문을 돕기 위해 달려왔다가 봉변을 당했다 들었습니다.’
‘그렇소. 산에 오르기도 전에 모두 마교도들에게 당했지.’
‘하지만 과거의 일 아닙니까? 진천마가 죽은 지금 마교는 자중지란에 빠져 아무것도 못 하…….’
‘과거라. 진천마가 퍼뜨린 악의 씨앗들이 언제 다시 발아할지 모르오. 그들이 또 발호하면 그때의 일이 재연될 터, 본문은 그때를 대비해야 하오. 사사로운 일에 신경 쓸 겨를이 없으니 그리 아시오.’
처남은 생긴 것답게 성격도 꼬장꼬장했다.
나무토막과 대화해도 이보다는 기분 좋았으리라.
‘오라버니! 왜 전보다 더 꽉 막혀 버린 거예요! 내 눈을 똑바로 보고 말해요! 어서!’
화난 아내가 가세하여 쏘아붙였지만 처남은 하얗게 질린 얼굴이 되고서도 물러서지 않았다.
‘……어, 어쨌든 안 된다!’
며칠 더 머물며 설득해 봤지만 요지부동이었다. 오히려 아내만 팔자에도 없던 유모 노릇을 해주다 돌아갔다.
한마디로 괜한 발걸음이었다.
하지만 돌이켜 보면 잘된 일이기도 했다.
거대 문파의 그늘에서 힘을 키우는 여느 상단과 달리 이를 악물고 가문만의 힘으로 사업을 키울 수 있었기에.
결국 백가상단은 서역과의 교역로까지 뚫게 되었다.
많은 통행세를 내고도 마적단의 습격을 걱정해야 하는 천산북로(天山北路)나 천산남로(天山南路)가 아니라 오래전 사장된 서역남도(西域南道)를.
‘힘든 일이었지.’
사막을 관통하는 교역로였다.
탑극랍마간(塔克拉瑪干) 사막은 회흘족(回紇族) 말로 ‘버려진 곳, 들어갔다가 나올 수 없는 곳’이라는 의미였는데 그 말이 무색하게 수십 개의 씨족이 살고 있었다.
이는 샘이 솟고 식물이 자라는 천지(泉地)가 드물게라도 있어서 가능했고, 백진환은 그곳들을 통해 서역과 중원을 드나들기를 원했다.
그래서 과거의 기록과 토박이들에게 구전되는 정보를 토대로 길을 되짚었다.
그리고 결국 서역남도를 재현할 수 있게 된 것이다.
‘사람을 뼈도 남기지 않고 먹어치우는 흉포한 괴물이 있었다지만…….’
전설일 뿐, 근 칠십여 년간 그런 일은 없었다.
지금 걷고 있는 이 길은 그 어떤 길보다 안전한 길이었다.
‘화전(和田), 우전(于田), 니아(尼雅)를 거쳐 약강(若羌)이 코앞이다. 첫 상행을 성공시켰으니 앞으로의 일은 쉬워질 터. 이제…….’
타고난 총명함으로 벌써 관직에 오른 첫째를 지원해 줄 수 있으리라.
무공에 뜻을 둔 둘째에게도 좋은 무사부를…… 아니, 소림이 됐든 무당이 됐든 시주를 듬뿍 하여 속가제자로 넣어줄 수 있으리라.
그리고.
무엇보다 아내를 호강시켜 줄 수 있으리라.
“어머. 당신 또 말도 안 되는 상상했죠?”
“……음? 무슨 말이오?”
“눈꼬리가 접히는 게 딱 그런데요? 솔직히 말해봐요. 뭐예요?”
“하하하!”
“웃지만 말고 말해보라니까요.”
그들은 또 아웅다웅하며 정을 쌓았다.
당연히 수하들의 얼굴은 일그러졌다.
그때,
“엇!”
“아!”
백진환과 허여민이 동시에 고개를 돌렸다.
그들은 누가 먼저라 할 것 없이 똑같은 말을 외쳤다.
“전투 준비!”
수하들은 반사적으로 병기를 뽑아 들었다. 그리고 부부가 보고 있는 곳으로 시선을 돌렸다.
그들의 눈매가 일그러졌다.
저 멀리서 엄청난 모래 먼지가 피어오르고 있었다.
“제기랄! 아닐 거야!”
“제발! 제발!”
안타깝게도 맞았다.
지축을 울리는 소리를 내며 달려오는 수많은 낙타가 보였다.
그 위에는 거대한 반월도(半月刀)를 꼬나 쥔 사람들이 타고 있었다.
“혈사풍(血沙風)!”
“빌어먹을! 천산남북로에서 활동하는 놈들이 왜 여기에!”
혼란에 빠진 수하들을 백진환이 진정시켰다.
“조용! 짐을 실은 낙타를 가운데 두고 원진을 그린다!”
허여민이 뒤이어 외쳤다.
“다들 단창을 꺼내서 조립하세요! 나아가지 말고 지켜야 합니다!”
수하들은 즉시 명령에 따랐다.
원진을 이룬 그들은 대나무 단창을 연결해 일장(一丈)이 넘는 장창으로 만들었다. 그 손잡이 부분을 땅에 꽂고 창끝으로 앞을 겨누었다.
두려움에 손을 떠는 이는 있어도 도망가는 이는 없었다.
그만큼 부부의 명은 지엄했기에.
어차피 마주친 이상 사막에서 혈사풍을 피해 도망갈 수는 없었다.
어느새 가까워진 혈사풍은 고삐를 늦추지 않고 그대로 덮쳤다.
콰직!
“끄악!”
대나무 장창에 낙타와 함께 꿰인 혈사풍 도적이 비명을 질렀다.
서걱-
반월도에 베인 백가상단 무인의 머리가 허공에 떠올랐다.
처절한 비명이 바람을 가르고 엄청난 피가 모래를 적셨다.
백가상단은 이를 악물고 저항했다.
하지만 혈사풍은 노련한 사냥꾼이었다.
처음에 짓쳐 들던 기세와는 다르게 서두르지 않고 조여 들어왔다.
그리고 파악했다.
백가상단의 우두머리를.
“흐음.”
한동안 지켜보던 혈사풍의 부대주가 반월도를 내밀어 두 사람을 가리켰다.
“검을 쓰는 놈과 도를 휘두르는 놈이다.”
“네!”
도적들은 즉각 대답한 뒤 백진환과 허여민에게 달려들었다.
여러 개의 도가 한꺼번에 내려쳐졌다.
까강!
“큭!”
까앙!
“악!”
부부는 분투했지만 상처가 점점 늘어났다.
백가상단의 무인들은 돕기는커녕 자기 목숨도 부지하기 힘든 상황.
얼마 안 가 허여민은 얼굴을 베이고 말았다.
“아악!”
“여보!”
놀란 백진환이 돌아봤다. 다행히 그녀는 얼굴을 감싼 천만 베인 상태, 오히려 한눈을 판 그가 어깨에 한칼을 맞았다.
“크흑! 이놈들이!”
분노한 그가 눈부신 속도로 검을 놀렸다.
가문의 비기, 백화십팔검(白花十八劍)이었다.
“큭!”
“이 새끼가!”
“어억! 내 팔!”
세 명에게 상처를 입혔으나 그게 끝이었다.
분노한 도적들이 백진환을 몰아쳤다.
그리고.
맨얼굴이 드러난 허여민을 희롱했다.
“호오. 놈이 아니라 년이었군. 좀 늙었지만 봐줄 만한데?”
“하하. 생포할까요?”
“그래. 오늘 밤에 맛 좀…… 컥!”
음담패설을 늘어놓던 한 놈의 얼굴에 도가 꽂혔다.
허여민이 던진 도였다.
“이, 이년이!”
“왜? 네놈도 꽂아줄까?”
허여민이 이죽거리며 등에 메고 있던 다른 도를 잡았다.
“와봐. 어서. 아, 뭐 해? 겁먹었니?”
“……죽여!”
네 개의 반월도가 허여민을 덮쳤다.
정신없이 막아내던 그녀는 얼마 안 가 진기가 바닥나 버리고 말았다.
‘이렇게 끝인가.’
그녀만을 아끼며 살아온 남편 또한 피투성이로 변해가고 있었다.
전시(殿試)에 합격해서 관직을 얻고도 한미한 가문 출신이라 무시당하는 첫째 아들이 떠올랐다.
지금 이 순간에도 검을 휘두르며 대협의 꿈을 키워가고 있을 둘째 아들도 생각났다.
‘이번 일이 끝나면 다 함께 모여서 밥이라도 먹고 싶었는데.’
두려웠다.
곧 다가올 죽음보다는 더 이상 그들을 못 본다는 사실이.
‘다들 제발 천천히 왔으면…….’
그녀는 두 눈을 부릅뜨고 짓쳐 드는 칼날들을 바라봤다.
그때,
“영차.”
묘한 기합 소리와 함께 눈부신 빛줄기들이 폭발했다.
“윽.”
눈이 부셔서 순간적으로 감았다가 뜨니 그녀의 코앞에 누군가 서 있었다.
“앗!”
모래바람에 찌든 남루한 의복을 입은 남자였다.
“오랜만이네요. 여기서 뭐 해요?”
“……네?”
“어라? 웬 존댓말?”
“누, 누구……?”
“아, 그렇지.”
그가 얼굴을 가리고 있던 천을 걷었다.
눈부시게 아름다운 얼굴이 드러났다.
처음 보는 미소년…… 아니, 미청년이 그녀에게 물었다.
“이제 알겠죠?”
“……대, 대체 누구신지……?”
미청년이 어이없다는 듯한 표정을 지었다.
“와아. 많이 늙지도 않았으면서 나 기억 못 해요?”
“느, 늙어?”
“그래도 곱게 늙어서 다행이네요. 춘양이 누나는 폭삭 늙어버렸는데.”
“대체 무슨 말을…….”
당황하던 그녀는 주위를 둘러본 뒤 경악했다.
잘게 잘린 도적들의 시체가 그녀를 중심으로 반원을 그리고 있었다.
“이, 이럴 수가! 어떻게!”
“검으로 썰었는데요.”
“아, 아까의 그 빛은 검광?”
“네.”
“……하하. 아하하.”
그녀만 혼란스러운 것이 아니었다.
모든 이가 미청년의 옆구리에 걸려 있는 검을 노려보고 있었다.
‘무슨 말도 안 되는!’
‘뽑기는커녕 넣는 것도 못 봤다고!’
수하들이 동요하는 게 느껴지자 혈사풍의 부대주는 이를 악물었다.
‘사술(邪術)이다! 아무리 대단한 술법이라 해도 숫자 앞에서는 의미가 없는 법. 기세를 끌어 올려야 한다!’
생각을 정리한 그는 내공을 담아 외쳤다.
“네놈은 누구냐! 감히 우리가 누군지 알고 이런 짓을!”
“누구신데요?”
“혈사풍이다! 이제라도 알았으면 썩 물러나…….”
“아. 그 좀도둑들?”
탑극랍마간을 휩쓰는 악명 높은 혈사풍을 좀도둑이라니?
모두 입을 떡 벌린 가운데 미청년이 투덜거렸다.
“뭐 이리 많아? 요즘은 숫자 정리도 안 하나 보네.”
혈사풍 부대주의 눈이 튀어나올 듯 커졌다.
‘수, 숫자 정리? 설마 마교……?’
잠시 혀를 차던 미청년이 허여민을 바라봤다.
“유모. 어떡할까요?”
“유, 유모? 저, 저요?”
“네. 나한테 젖 줬으니까 유모죠.”
허여민은 경악했고 백진환은 분노했다.
“저, 젖? 내, 내가?”
“이보시오! 아무리 은인이라 해도 어찌 남의 아내를 희롱하는 게요!”
“아. 아저씨도 오랜만이네요.”
“……아, 아저씨? 나를 아시오?”
“아, 진짜. 사람들 기억력이란.”
미청년은 한숨을 쉬었다.
“휴우. 곤륜에서 봤잖아요.”
한동안 기억을 더듬던 부부는 누가 먼저라 할 것 없이 한 사람의 얼굴을 떠올렸다.
“아!”
너무나 작고 귀여웠던 아기 도사.
도사들의 부탁으로 젖을 먹였던 기억.
먹이는 내내 잊지 않겠다는 듯 그들의 얼굴을 빤히 쳐다보던 눈.
그 맑고 깨끗했던 눈의 주인이 그들 앞에 서 있었다.
기억이 맞다면 그 이름은…….
“……정광?”
미청년 정광이 고개를 끄덕였다.
“이제야 기억하시네. 근데요, 제가 지금 좀 바쁘거든요.”
정광은 빙긋 웃으며 양해를 구했다.
“그냥 다 죽일게요. 괜찮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