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화
뭐든지 말해라
간혹 나이 든 남자가 자신의 백회혈을 손가락으로 꾹꾹 누르는 것을 볼 수 있다.
그런 이를 유심히 보면 머리가 좀 휑하거나 아예 없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그들이 그러는 이유는 백회혈 지압이 탈모에 무척 좋다는 말이 있어서다.
누를 땐 조금 아프더라도 금세 시원해지기에 괜히 머리털이 무럭무럭 자라날 것 같은 환상이 든다.
하지만 현실은 가혹하다.
지압해서 치료되는 것이면 세상에 대머리가 어디 있겠는가.
강하게 쳤다간 사람 하나 바로 골로 보낼 수 있는 급소가 백회혈이다.
어린아이가 건장한 어른을 죽일 수 있을 만큼 치명적인 사혈(死穴)인 것이다.
그런 백회혈에 내력 듬뿍 담은 정광의 주먹이 내려쳐졌다.
당연히 난리가 날 수밖에!
“뭐 하는 짓이냐!”
“사형! 괜찮으십니까? 사형!”
“저, 정광아…… 정광아…….”
분노하는 운연, 다급히 운후의 상세를 살피는 장문인, 너무 놀라서 덜덜 떠는 허청까지, 그야말로 개판인 상황!
운후와 정광만이 침착했다.
아니, 운후는 정광의 주먹질에 반쯤 정신이 나가 있었으니 오직 정광만이 침착했다.
“사숙조님들. 진기요. 계속 넣으셔야죠.”
“무어라? 지금 이 판국에…….”
“지금 진기 끊기면 사조님 진짜 가버리실 건데요.”
흠칫 놀란 운연과 장문인은 운후의 몸에 진기를 불어넣었다.
하지만 곧 두 눈을 치켜떴다.
“사, 사형의 머리에!”
“이렇게 큰 혹이!”
대체 어떻게 친 것일까?
운후의 정수리에는 엄청나게 큰 혹이 불쑥 솟아 있었다.
정광은 태연하게 고개를 주억거렸다.
“제대로 됐네요.”
“……?”
“사숙조님 몸에서 생기가 제일 많이 빠져나가고 있는 곳이 백회혈이었거든요. 백회혈은 천령혈(天靈穴)이라고도 하잖아요. 하늘의 령(靈)과 통하는 곳이니 당연한 일이죠.”
“……?”
“그래서 때린 거예요. 커다랗게 생긴 울혈로 생기가 빠져나가는 것을 막았으니 혹 정도 생기는 거야 대수로운 일이 아니죠.”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말에 모두가 혼란스러워했다.
“사, 사형께선 괜찮은 것이냐?”
“물론이죠.”
“혹이야 그렇다 치고 그렇게 큰 소리가 났는데?”
“백회혈을 직접 때린 게 아니라 바로 직전에 멈춰서 그래요. 종이 한 장 정도의 공간에서 내공이 폭발해 버리니 큰 소리가 난 거죠. 그 충격파로 백회혈 바로 위쪽의 피부에 울혈을 만든 거고요.”
“…….”
귀찮음을 무릅쓰고 친절히 설명했건만 아무도 이해하지 못했다.
입만 벌린 채 아무 말도 못 하는 이들을 본 정광은 내심 고개를 가로저었다.
떠먹여 줘도 받아먹질 못하다니.
천마신교라면 이 정도는 이해하는 놈들이 있을 텐데.
‘수련을 강화해서 수준을 빨리 끌어올려야겠군.’
정광은 곤륜 도사들이 들었다면 기함할 만한 생각을 하며 가부좌를 틀고 앉았다.
그리고 운후의 배에 두 손을 댔다.
마침 반쯤 나갔던 정신을 차린 운후와 시선이 마주쳤다.
“약속하셨죠? 정신 잃지 않으시겠다고.”
“……그랬지.”
“아프면 아프다고 소리 지르세요. 참는다고 멋있는 거 아니니까요.”
“……허허. 겁이 나는구나.”
“죽음도 안 무서워하시면서 무슨 그런 농담을.”
정광은 상청무상신공(上淸無上神功)을 운기했다.
그의 손에서 한 올, 한 올 풀려 나간 진기가 운후의 깨진 단전을 조심스럽게 건드렸다.
‘이거 장난이 아니네.’
깨지다 못해 박살이 나버린 단전은 수많은 파편이 되어 흩어져 있었다.
‘그래 봤자지.’
얼마 전까지의 그라면 무리였겠지만 지금의 그에게는 아니었다.
정광은 운후의 배를 갈라도 보이지 않을 이 무형의 파편들을 신중하게 더듬었다.
“크흑! 으윽!”
운후가 계속 억눌린 신음을 흘렸지만 개의치 않았다.
그저 집중하며 진기를 계속 운용할 뿐이었다.
그렇게 시간이 흘렀다.
‘얼추 알겠네.’
결국 모든 파편의 위치와 형태를 파악했을 때, 운후는 정신을 잃기 직전이었다.
“끄으…….”
“약속했잖아요!”
“헉! 미, 미안하구나. 내 잠시…… 아!”
간신히 정신을 차린 운후의 두 눈이 커졌다.
정광의 온몸이 땀으로 흠뻑 젖어 있지 않은가!
거의 탈진에 가까운 모습이었지만 눈빛만큼은 여전히 또렷했다.
“이제 더 아파질 거예요.”
“…….”
“사조님의 깨진 단전을 제 진기로 다 꿰어 맞출 거거든요.”
“…….”
“그러니 한 번만 더 참으…….”
“정광아.”
“네?”
“되었다.”
운후는 더없이 자애로운 미소를 지었다.
“너는 할 만큼 했어. 아니, 과할 정도다.”
그의 시선이 방 안에 있는 모두를 훑어봤다.
모두의 눈빛 속에 담긴 염려와 간절함을 보자 그의 얼굴에 허허로운 미소가 맺혔다.
“나는 이만 가마. 곤륜을 부탁한다. 아니지. 그냥 너희가 즐겁게 살았으면 좋겠구나.”
운연과 장문인이 침통한 표정을 지었다.
“사형…….”
허청의 눈에서 눈물이 흘렀다.
“사부님…….”
정광은 한숨을 쉬었다.
“휴우. 아 몰라.”
그의 단전에서 거대한 내공이 일어나 두 손에 모였다.
우우우우웅-
그것은 수백 개의 가는 줄기가 되어 운후의 단전을 꿰어갔다.
“끄아아아악!”
신선 같던 운후가 처참한 비명을 질렀다.
모두가 경악하여 난리를 쳤지만 정광의 귀에는 들리지 않았다.
그는 그만큼 집중하고 있었다.
운후의 배 속에 산재한 단전의 파편들을 하나도 놓치지 않고 꿰어나갔다.
그것들을 원래의 형태로 그러모아 어떻게든 붙여 나갔다.
어느 순간 정광의 입에 희미한 선이 그어졌다.
좋아. 거의 다 됐다.
이 조각만 맞추면…….
정광은 고개를 갸우뚱했다.
어라? 이게 아닌가?
아, 진짜. 처음부터 다시.
수십 가지의 조합을 맞춰보았다.
안 맞네.
그럼 이렇게?
이때 운후는 숨이 거의 넘어가고 있었다.
정광이 운연과 장문인을 갈궜다.
“진기요!”
“헉!”
“아, 알았다!”
운연과 장문인은 미친 듯이 내력을 쏟아부었다.
그래 봐야 얼마 버티지 못할 터, 정광은 다시 한번 집중하여 파편을 맞춰 나갔다.
그리고 또 한참의 시간이 흐른 후.
정광이 뒤로 넘어가며 중얼거렸다.
“아아. 겨우 됐네.”
운연, 장문인, 허청이 시끄럽게 소리쳤다.
하지만 탈진한 정광은 그대로 잠들어 버렸다.
거의 반나절이 걸렸던 사투.
정광은 운후의 깨진 단전을 임시로 붙이고 그 안에 진기 한 톨을 심을 수 있었다.
* * *
눈을 떠보니 익숙한 천장이었다.
옆을 흘깃 보자 운후가 잠들어 있었다.
꽤 기분 좋은 꿈을 꾸는 것인지 그의 얼굴에는 미소가 걸려 있었다.
정광은 몸을 일으키다가 인상을 찡그렸다.
‘에구구, 삭신이야.’
간만에 너무 무리했나 보다.
뭐 어쨌든 잠깐이라도 목숨을 붙잡았으니 된 것 아닌가.
이제 그 뒤의 일을 해야 하는데…….
그의 표정에 귀찮음이 묻어났다.
그래도 어쩔 것인가.
시작했으면 끝을 봐야지.
정광은 억지로 일어나 서고로 향했다.
무슨 거창한 비급을 보러 가는 게 아니라 잡서가 모인 일반 서고였다.
그곳을 관리하는 허 자 배 도사가 정광을 보자 반색했다.
“오오. 이제 일어났느냐? 이렇게 움직여도 괜찮고?”
“네.”
“다행이다. 네가 큰일을 해줬어.”
“잠깐 시간을 번 것뿐인데요 뭐.”
“허허. 그것만 해도 고맙지. 도사의 몸으로 이런 말 하긴 그렇다만 사백님을 되도록 오래 뵙고 싶단다.”
그가 겸연쩍어하며 하는 말에 정광이 피식 웃었다.
곤륜 도사들의 이런 모습이 그리 나쁘지 않았다.
“그래, 여긴 무슨 일로 왔느냐?”
“의서를 좀 보려고요.”
“허어. 무공을 수련하는 것만 해도 힘들 텐데 의술까지?”
“들어가도 될까요?”
“그래. 쭉 들어가다가 오른쪽 열두 번째 서가에 있을 게다.”
정광은 예를 올리고 서고 안으로 들어갔다. 중년 도사가 일러준 대로 가보니 상당히 많은 의서가 빼곡히 꽂혀 있었다.
천금익방(千金翼方), 영추경(靈樞經), 금궤요략(金匱要略), 침구갑을경(鍼灸甲乙經), 태평성혜방(太平成惠方)…….
‘이런 건 됐고.’
무림은 물론 민간에도 유명한 의서들이었다. 제목만 보고 지나치던 거침없는 발걸음이 한 서가 앞에서 우뚝 멈췄다.
소녀경(素女經), 음양화합서(陰陽化合書), 옥방비결(玉房秘訣)…….
말로만 듣던 고전들이다.
어떤 내용일까?
천마신교의 것들과 비교하면 어떤 점이 다를까?
홀린 듯 서가로 향하던 그의 손이 멈칫했다.
그는 이딴 것 없어도 강한 남자였기 때문이다.
잠시 후, 그는 무림인이 쓴 의서가 가득한 서가 앞에 서 있었다.
활선비록(活仙秘錄), 신의진경(神醫眞經), 무림화타내경(武林華陀內經) 등등 무림인다운 허세가 제목에서부터 풀풀 풍겼다.
정광은 그것들을 몽땅 꺼내서 바닥에 깔았다.
그리고 그 가운데에 주저앉아 한 권, 한 권 읽기 시작했다.
말이 읽는 것이지 책장을 스르륵 넘기는 수준이었다. 그렇게 그는 고개를 끄덕이거나 가로저으며 하나하나씩 분류해 나갔다.
이건 좀 더 봐야겠고.
이건 더 볼 필요 없고.
오랜만에 의서를 보니 누군가의 얼굴이 떠올랐다.
그의 아비였다.
‘아들. 왜 그런 눈으로 보냐?’
‘올해에는 가실 겁니까?’
‘어허! 가다니! 백 년은 멀었다!’
‘백 년을 사셨는데 또 백 년 더 사시겠다고요?’
‘암. 그 정도는 살아야지. 네 동생도 만들어줄까 생각 중…… 잠깐. 아들아. 검은 왜 뽑는 것이냐? 어? 어허! 잠깐! 잠깐만요, 아드님!’
차마 벨 수는 없어서 검을 부러뜨린 뒤 천마서고에 틀어박혔다.
그리고 수많은 의서를 읽었다.
아비가 언제 죽을지 알기 위해.
대체 왜 안 죽는지 알기 위해.
일 개월 뒤, 오랫동안 햇빛을 받지 못해 창백한 얼굴로 나온 그의 표정은 허탈했다.
그의 아비가 죽지 않는 이유는 그냥 타고난 체질 때문이었다.
‘내가 이대로 포기할쏘냐.’
아직 희망은 있었다.
정광은 천마신교의 최고 명의들인 생사마의(生死魔醫)와 일생십사(一生十死)를 불렀다.
‘소, 소교주님. 어인 일로…….’
‘네놈들, 돌팔이냐?’
‘아, 아닙니다!’
‘너는 죽고 살리는 걸 꼴리는 대로 정하고, 너는 하나를 살리면 열을 죽일 정도로 형편없다던데?’
‘아닙니다! 꼴리는 대로가 아니라 상황 봐서입니다!’
‘저도 아닙니다! 열을 죽이는 건 그냥 취미로 그런 겁니다!’
‘흐음. 그렇단 말이지? 너희, 당분간 나랑 같이 다녀야겠다.’
‘……네?’
그들을 끌고 다니며 수많은 환자를 만나고 치료했다.
그렇게 일 년이 지났을 때 그는 마도 제일의 명의가 되어 있었다.
기세등등하게 교주전으로 들어간 그는 도망가려는 아비를 강제로 진맥하고 나서야 확신하게 됐다.
‘미친. 백 년은 무리여도 오십 년은 끄떡없겠군.’
그의 예상대로 아비는 오십 년 뒤에야 세상을 떠났다.
장장 백오십 살을 살다 간 아비 때문에 그는 자신의 수명에 미련이 없었다.
그래서 일 년 뒤에 아비를 따라 죽은 것일지도.
어쨌든 마도 제일의 명의인 그는 명문정파의 의서까지 읽어가며 운후를 살릴 방안을 모색했다.
그리고 결론을 내렸다.
“되긴 될 것 같은데.”
그의 입에서 탄식이 흘러나왔다.
“피똥 싸야겠네.”
* * *
서고 밖, 도사들이 모여 웅성거리고 있었다.
그중 정광의 사부인 허청은 어쩔 줄 몰라 하며 입구 주변을 왔다 갔다 하고 있었다.
‘서고에 들어간 지 벌써 칠 주야째인데 아직도 나올 생각을 안 하다니, 이를 어쩐다?’
지켜보던 장문인이 허청의 어깨를 두드렸다.
“똥 마려운 강아지처럼 뭐 하는 짓인가?”
“아! 오셨습니까?”
“정광은 아직도 나오지 않았나?”
“그렇습니다. 나오라 해도 듣질 않습니다. 그래도 넣어준 요깃거리는 꼬박꼬박 먹고 있으니 너무 걱정하지 마십시오.”
“걱정은 자네가 하고 있으면서 무슨.”
“……죄송합니다. 사부님께선 어떠신지요?”
“운후 사형은 잠들어 계시네. 하루에 한 시진 정도는 눈을 뜨시지만 앞으로 어떻게 될지…….”
근심스러운 표정을 짓던 장문인이 희미하게 웃었다.
“사형께선 이미 하늘로부터 받은 수명을 다 쓰셨네. 나는 오히려 정광이 걱정이야. 그 어린 나이에 칠 주야씩이나 자지 않고 의서를 읽고 있다니…… 아! 나왔군.”
그의 말대로 창백한 얼굴의 정광이 서고에서 나오고 있었다.
허청은 뇌전보(雷電步)를 펼쳐 눈 깜빡할 새에 정광을 껴안았다.
“괜찮느냐? 어디 아픈 덴 없고?”
“네.”
“다행이다, 정말 다행이야. 왜 이리 무리한 짓을 하느냐?”
“사조님 살리려고요.”
“이 녀석. 네 건강도 생각해야지. 너는 할 만큼 했다. 어차피 더 이상은 방법이 없으니 그만 푹 쉬어라.”
“있는데요.”
“……뭐?”
“사조님 살릴 수 있다고요.”
“……참말이냐?”
정광이 고개를 끄덕이자 주위에서 지켜보던 도사들이 환호성을 질렀다. 심지어 장문인마저 주먹을 불끈 쥘 정도였다.
정광이 장문인을 발견하고 다가가 입을 열었다.
“필요한 게 있어요.”
“그래. 뭐든지 말해라.”
“정말요?”
“물론! 무엇이냐?”
곤륜의 기둥뿌리를 뽑아서라도 무엇이든 마련해 주겠다는 장문인의 의지는 정광의 이어지는 말에 사그라들었다.
“전 문도가 수련할 때보다 더 바쁘게 뛰어야 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