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곤륜마협-13화 (13/569)

13화

너라면

팽수원은 가뿐한 마음으로 삼청전을 나왔다.

‘좋구나.’

팽가가 한 걸음 더 나아갈 기회를 잡았으니 기분이 좋지 않을 수가 없었다.

‘어떤 세가도, 어떤 문파도 머나먼 곤륜까지 와서 지지해 달라 말하진 않을 터. 형님께 고집을 부려서 오길 잘했어.’

그가 파악한 곤륜의 힘이라면 큰 도움이 되리라.

명분은 어차피 다 비슷하니 결국엔 힘의 대결, 팽가와 곤륜의 무력이라면 그 어디에도 뒤지지 않을 게 분명했다.

어차피 세력 간에 전쟁을 벌일 것도 아니고 친선 비무를 통해 힘을 가늠할 터, 오 년 후가 기대되는 팽수원이었다.

‘곤륜뿐만이 아니지. 다른 곳에도 계속 말을 해보고 있으니 최소한 한두 세력은 더 끌어들일 수 있을지도 모른다.’

그렇게 되면…….

‘오만한 남궁세가는 물론 세상 위의 존재인 것처럼 구는 소림과 무당을 제치는 것도 불가능한 일은 아니지.’

삼청전에서 말했듯 일이 제대로 풀리면 맹의 고수들을 청해성으로 보내서 곤륜을 도울 것이다.

모두 반대하겠지만 대의명분을 내세우면 따를 수밖에 없을 터.

‘그들은 맹주 직속의 조직이 될 것이다. 그럼으로써 본가는 더 큰 힘을 가지게 될 것이고.’

꽤 많은 피가 흐르게 될 것이다.

그래도 양심에 거리낌은 없었다.

곤륜에게 해가 되는 일은 아니었으니까.

그의 옆에서 함께 걷던 허청이 어깨를 툭 치며 웃었다.

“그리 기분이 좋나?”

“하하. 그렇네.”

“잘됐으면 좋겠군. 마교로 인해 고통받던 청해성 백성들의 얼굴에 웃음꽃이 피게 말이야.”

“……그래야지.”

순수하게 힘없는 이들만을 위하는 친우의 모습에 얼굴이 조금 뜨거워진 팽수원은 발걸음을 서둘렀다.

“뭐가 그리 급하나? 날씨도 좋은데 천천히 가세.”

“장문인의 승낙을 받았으니 어서 돌아가서 형님께 아뢰야 하네.”

“허어. 벌써 떠나려고?”

“아쉽지만 어쩔 수 있나. 다음에 만나면 전처럼 코가 비뚤어지도록 마셔보세나.”

“흠. 흠. 이 친구, 그런 건 조용히…….”

“응? 하하하. 이거 미안하군. 내가 실수했네.”

숙소로 돌아오니 팽강휘의 모습이 보이지 않았다.

“이런. 몸도 편치 않은 녀석이 어디를…….”

“정광과 있으려나? 가보세.”

정광의 방에 가보니 정광 혼자 자고 있었다.

“정광아. 잠시 일어나 보거라.”

“하아암…… 오셨어요?”

“그래. 혹 팽 소협이 어디 있는지 아느냐?”

“으음. 슬슬 올 때가 됐는데.”

정광의 말에 의아해하는 그때 저 멀리서 강한 기가 느껴졌다.

그 기는 엄청난 속도로 달려오고 있었다.

“채신머리없이 누가…… 응?”

문을 열어 내다본 허청이 두 눈을 치켜떴다.

기의 크기로 봤을 때 무공이 약한 사제들 중 한 명인 줄 알았거늘 아직 약관도 안 된 팽강휘 아닌가.

그의 숙부인 팽수원도 입을 벌린 채 멍하니 바라봤다.

‘이렇게 강한 기라니. 어떻게?’

팽강휘는 자신을 보며 놀라는 두 사람에게는 눈길도 안 준 채 정광 앞에 우뚝 멈춰 섰다.

“왔어요?”

“…….”

“괜히 들떠서 뭐 할 생각 말고 며칠 푹 쉬어요.”

“…….”

“사부님. 팽 소협 왔으니까 다시 자도 되죠?”

“그, 그래라.”

묵묵히 정광만을 바라보고 있던 팽강휘가 다른 이들에게 말했다.

“죄송하지만 잠시 자리를 피해주시겠습니까? 정광 도장과 할 말이 있습니다.”

허청과 팽수원은 어이가 없었다.

이제 겨우 열다섯 살인 정광을 도장이라고 부르다니?

제일 황당한 건 당사자인 정광이었다.

얘가 왜 이러지?

깨달음이 지나쳐서 주화입마라도 걸렸나?

팽강휘는 여전히 허청과 팽수원에게 고개를 조아리고 있었다.

“부탁드립니다.”

잠시 팽강휘를 바라보던 팽수원이 전음을 보냈다.

-일이 잘 성사됐으니 곧 떠나야 한다. 무슨 일인진 모르지만 빨리 끝내거라.

-아! 수고하셨습니다. 그렇게 하겠습니다.

미미하게 고개를 끄덕인 팽수원이 허청을 잡아끌었다.

“이보게 허청. 잠시 나가세.”

“그, 그러지.”

그들이 나가고 단둘이 남자 팽강휘가 허리를 깊숙이 숙였다.

“고맙소.”

“뭘요.”

“정말 고맙소.”

“뭘요.”

팽강휘는 허리를 펴서 눈앞의 소년 도사를 바라봤다.

어린 얼굴에 어울리지 않는 떨떠름한 표정마저 신비하게 느껴졌다.

오랫동안 고민해 왔던 문제를 단번에 해결한 능력.

그런 대단한 일을 하고도 자신을 내세우지 않는 초연함까지.

‘반로환동(返老還童)한 고수일까? 아니면 태상노군의 현신?’

말도 안 되는 생각에 내심 고개를 저었다.

정광은 구룡의 일인인 그로서도 재단할 수 없는 놀라운 존재였다.

“도장이 아니었다면 나는…….”

“저기요. 그 도장이라는 말 좀 빼면 안 돼요?”

“불편하다면 그리하겠소. 소협이 아니었더라면…….”

“으으. 소협도 빼시죠.”

정광이 손사래를 치자 팽강휘의 입가에 미소가 떠올랐다.

이리도 소탈한 모습이라니, 진정한 도사가 이런 모습일까.

평소에는 기이하나 이것이 그의 진면목이리라.

‘도사이자 기인이로구나.’

그의 오해와는 다르게 정광은 도장, 소협이라 불려서 온몸이 간지러운 상태였다.

전생에 위선자라 비웃었던 호칭을 자신이 듣게 될 줄이야 상상이나 했겠는가.

“그럼 편히 말하겠소. 그대 덕분에 큰 근심을 덜게 됐소. 이 은혜, 반드시 갚겠소이다.”

“너무 무리하진 마시고요.”

“하하. 팽가의 힘은 그리 약하지 않소. 그대에겐 하찮은 경지겠지만 내 힘도 그렇고.”

잠시 말없이 정광을 바라보던 팽강휘가 전음을 보냈다.

-곤륜파에서 무림맹으로 나올 때 그대도 꼭 와주시오.

정광은 팽강휘와 달리 곤륜과 팽가의 협의에 대해 전혀 몰랐기에 황당한 표정을 지었다.

그 표정을 오해한 팽강휘는 진한 미소를 지었다.

이 어린 은거기인(隱居奇人)은 세상에 대한 욕심이 전혀 없어 보이지 않는가.

-계속 곤륜에 숨어 도를 키울 생각이셨소? 그건 불가능하오.

누구보다 곤륜을 뛰쳐나가고 싶어 하는 게 정광이었다.

-낭중지추(囊中之錐)라는 말이 괜히 있겠소. 감추려 한다고 감춰지는 것이 아니외다.

겸손과는 담을 쌓아도 한참 쌓은 게 정광이었다.

-그대 같은 영웅은 강호의 부름을 받을 수밖에 없는 운명이지.

너무나 간지러운 말이라 정광은 잘못 들은 줄 알았다.

-……누가 누굴 부른다고요?

“하하하하.”

육성으로 한 차례 웃은 팽강휘가 무거운 표정을 지었다.

-팽가를 꼭 찾아주시오.

-왜요?

-작으나마 보답을 하고 싶어 그러오. 선물을 준비해 놓겠소이다.

-다른 거 또 해달라고 하려는 건 아니고요?

누가 봐도 귀찮아하는 표정과 말투였다.

팽강휘는 헛웃음을 흘렸다.

명문세가에서 태어나 구룡의 일원이 되어 떠받들어진 그를 누가 이렇게 대했겠는가.

-하하. 뭐 그럴 수도 있고.

그는 화급하던 전과 달리 마음에 여유가 생겼다.

무공에서의 깨달음뿐만 아니라 마음의 변화도 얻은 것이다.

-그럼 이만. 그때 봅시다.

팽강휘는 포권을 한 뒤 방문을 열었다.

문에 바짝 달라붙어 있던 허청과 팽수원이 겸연쩍은 얼굴로 웃었다.

“험. 험.”

“버, 벌써 끝났느냐?”

“네, 숙부님.”

“몸은 괜찮고?”

“물론입니다.”

잠시 뒤, 팽 씨 숙질은 허청과 정광의 배웅을 받으며 그대로 떠났다.

“허어. 이리도 빨리 가버리다니. 한동안 가슴이 허전하겠군.”

산 아래를 내려다보며 아쉬워하는 허청에게 정광이 말했다.

“허전한 느낌 없게 해드릴 테니 걱정하지 마세요.”

“……제자야. 설마…….”

팽 씨 숙질이 떠나고,

“으허허헉!”

“크아아악!”

곤륜에서는 또다시 지옥 수련이 시작되었다.

* * *

정광은 나른한 얼굴로 주저앉아 하늘을 바라봤다.

구름이 바람에 밀려 빠르게 움직이는 모습을 보자 세월도 그만큼 빠르게 흐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진천마로 살 때는 이렇게까지 빠르진 않았던 것 같은데.

그때보다 지금이 더 바쁘게 살고 있는 걸까?

피식 웃은 정광은 자리에서 일어나 기지개를 켰다.

“으라라랏.”

뭐 아무렴 어떤가.

전생보다 재밌으면 됐지.

사람 키우는 게 이리 재밌을 줄이야.

전생의 그는 제자로 받아달라는 놈들은 자근자근 밟아줬다.

‘소, 소교주님! 대체 왜 안 받아주시는 겁니까?’

‘너무 멍청해서.’

‘크흑. 소교주님을 기준으로 생각하시면 안 그런 자가 천하 어디에 있다고…….’

‘게다가 귀찮아.’

‘해보시면 마음이 바뀌실 겁니다. 자고로 군자의 세 가지 즐거움 중 하나가 제자를 받아 가르치는 것…….’

‘군자? 본교에서 군자가 뭐 어째? 너 무림맹 세작이냐?’

‘허걱! 저, 절대 아닙니다! 저는 단지…….’

‘아, 시끄러. 좀 더 맞아라.’

‘끄아악!’

돌이켜 보니 쥐어 패는 게 더 귀찮은 짓이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역시 사람은 해보기 전엔 모르는 거라니까.’

고개를 내려 정면을 바라봤다.

수많은 도사가 구슬땀을 흘리며 무공을 펼치고 있었다.

우아하고 멋지며 강하기까지 한 곤륜무공이었다.

“차합! 와룡출세(臥龍出世)!”

“하압! 진류오행(眞流五行)!”

도사들이 시끄러운 기합과 함께 초식명을 외치며 훨훨 날아다녔다.

겉멋이 좀 심하게 든 거 아닌가 하는 생각도 잠깐 들었지만 자기들이 좋다는데 뭐 어쩔 것인가.

그래도 상관없을 만큼 강한 무공이었으니 그러려니 해야지.

실제로 그들은 이 년 전과 비교가 안 될 만큼 강해져 있었다.

정광의 완벽한 지도 덕분이기도 했지만 그들이 그만큼 치열하게 수련한 결과였다.

이 년 전, 하북팽가에서 방문한 팽수원과의 비무를 통해 확신을 얻은 곤륜 도사들은 정광의 가르침을 충실히 따랐다.

물론 쉬운 일은 아니었다.

‘으흐흐흑. 근육통 때문에 아파서 잠을 잘 수가 없구나.’

‘엄마…… 아니, 원시천존이시여. 제발 저와 곤륜을 구하소서.’

밤마다 베개를 눈물로 적셨다.

하지만 아침이 오면 언제 그랬냐는 듯이 눈에 불을 켜고 수련에 집중했다.

경쟁이 붙어서였다.

‘하하. 사형. 해가 지나니 기력이 좀 떨어지신 것 같습니다.’

사제의 도발에 눈물을 삼키고.

‘허허. 사제. 많이 좋아졌지만 아직 갈 길이 멀군. 뭐, 수고해 보게나.’

사형의 무시에 이를 갈았다.

게다가.

‘오오. 많이 늘었구나. 하하. 장하다, 장해. 역시 내 제자야.’

‘……감사합니다.’

‘음? 이 기쁜 날 표정이 왜 그러느냐?’

‘……제자의 성취보다 사부님께서 연로하셔서 힘이 떨어지신 것 같아 슬퍼서 그럽니다.’

‘……아, 아니 나는…….’

‘흐윽. 이만 물러나겠습니다.’

‘제, 제자야! 그게 아니라…….’

아직 쌩쌩한 사부를 늙었다고 걱정하는 비뚤어진 공경심까지 더해지니 사부로서는 미친 듯이 수련을 할 수밖에.

이 모든 것들이 상호작용을 일으켜 수련 광풍이 불었고 정광도 만족할 만한 결과를 불러오고 있었다.

게다가 정광 자신도 지난 이 년간 부단히 수련했다. 비정상적으로 높았던 내공에 맞춰 다른 부분들을 끌어올릴 수 있었으니 무엇을 더 바랄까.

“하하하! 상쾌하군!”

“그러게 말이오. 수련이 몸에 익어서인지, 하면 할수록 힘이 솟구치오.”

껄껄 웃는 도사들을 보며 정광은 고개를 끄덕였다.

생각보다 잘 따라와 주는 모습을 보니 마음이 흐뭇했다.

그래서 관용을 베풀기로 했다.

“수고하셨어요! 오늘은 여기까지만 하겠습니다!”

“하하! 벌써? 너도 수고했다.”

“우리 때문에 어린 네가 고생이 많구나. 껄껄.”

밝은 얼굴로 대답하는 도사들에게 정광이 고개를 가로저었다.

“뭘요.”

그의 입에서 청천벽력 같은 소리가 튀어나왔다.

“내일부터는 다음 단계로 나갈게요.”

훈훈하던 연무장에 싸늘한 정적이 내려앉았다.

넋을 잃은 도사들 중 장문인만이 간신히 입을 열었다.

“……다음 단계?”

“네.”

“……그게 무엇이냐?”

“말 그대로 다음 단계죠. 꽤 힘들어질 테니 오늘은 푹 쉬세요.”

“…….”

정광은 원시천존 잃은 표정으로 주저앉는 도사들을 지나쳐 자신의 방으로 갔다.

침상에 드러누우니 잠이 솔솔 몰려왔다.

얼마 안 가 잠이 든 그는 꿈속에서 한 신선을 보았다.

익히 알고 있는 얼굴이었다.

그래, 그라면 신선이 되는 게 당연할지도 모르지.

그는 무척 행복해 보였다.

그래서 정광은 그를 부르지 않았다.

왠지 그랬다간 그가 영영 사라져버릴 것만 같았다.

대신 다른 이가 정광을 불렀다.

-정광아!

사부?

-정광아!

설마 사부도 신선이 된 것일까?

그러기에 사부는 좀…….

그의 생각대로 허청은 신선이 되어 꿈속에 나타난 게 아니었다.

현실에서 정광의 몸을 흔들어 깨우고 있었다.

“……으으. 왜 그러세요?”

“정광아! 어서 일어나라! 사, 사부님께서! 사부님께서!”

운후?

그 양반이 왜?

신선이 되어 잘 살고 있던…… 아!

“갑자기 쓰러지셨다!”

이어지는 허청의 말에 정광은 상황을 이해했다.

꿈이 맞나 보다.

안색이 좀 안 좋아진 것 같더니만 결국 갈 날이 온 건가?

원래 사람은 멀쩡하다가도 갈 때가 되면 갑자기 가버리곤 한다.

전생의 아비도 그랬고 그도 그랬다.

천수를 다하고 가는 거니 뭐 어쩔 수 없는 일.

진짜 도사인 운후라면 꿈속에서처럼 신선이 될 수 있을지도.

축하하오, 잘 가시오.

그간 부대낀 정이 있으니 내가 제례에는 영 소질이 없으나 제사라도 가끔 지내주…… 엉?

그의 손목을 허청이 낚아챘다.

눈썹을 꿈틀거린 정광이 입을 열려는데 사부인 허청이 더 빨랐다.

“가자!”

어리둥절해하는 그에게 허청의 확신에 찬 눈빛이 꽂혔다.

“너라면…… 너라면 사부님을 살릴 수 있을 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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