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화
짧지만 긴 시간
정광은 원래 친절한 사람이 아니었다.
존대? 그딴 거 없다.
말? 당연히 짧다.
아니, 누가 물었을 때 대답해 주는 것만 해도 과거의 그를 안다면 깜짝 놀랄 일이다.
그런 그가 변했다.
환생하여 십여 년간 도사로 지내온 그는 존댓말이 입에 붙어버렸고 묻는 말에 대답도 잘해줬다.
조금 전에도 그랬다.
그런데.
이놈, 왜 말귀를 못 알아듣지?
그냥 다 보인다니까?
“나를 놀리는 건가?”
“아뇨. 보인다니까요.”
“뭐가 어떻게 보인다는 건가?”
“아, 진짜.”
정광은 잠시 고민했다.
이 멍청한 녀석을 이해시키려면 넓고 깊은 무리를 풀어줘야 한다.
그 귀찮은 짓을 할 이유가 있나?
있을 리가.
그래도 물어보라 해놓고 답을 안 주면 꼴이 우습게 되는데…….
머리를 벅벅 긁는 정광에게 팽강휘가 가라앉은 목소리로 말했다.
“됐네. 내 자네에게 잘못한 만큼 충분히 당했으니 더는 말을 섞지 마세.”
정광의 눈이 빛났다.
“바로 그거죠.”
“……뭐?”
“따라오세요. 알려줄게요.”
“대체 무슨?”
팽강휘는 의아해하면서도 따라갈 수밖에 없었다.
가는 내내 앞서 걷는 정광의 뒤통수를 바라봤다.
도무지 종잡을 수 없는 소년이다.
허청의 말처럼 고금제일천재인가 싶더니 시정잡배 같기도 하고 대마두 같은 살기를 흘리질 않나 진인처럼 선문답도 한다.
게다가 그 무공이란…….
양팔에 소름이 돋았다.
‘구룡의 하나가 되어 세상을 쉽게 봤건만 난 아무것도 아니었구나.’
세상 밖에 세상 있고 사람 위에 사람 있다는 말을 머나먼 곤륜에 와서야 깨닫다니.
‘조금만 더 미리 알았다면, 그랬다면 지금쯤 나는 많이 다른 모습이지 않을까?’
깊은 후회가 그를 잠식했다.
하지만 후회란 아무리 빨라도 늦는 법, 이미 어쩔 수 없는 일 아닌가.
“후우…….”
“땅 꺼지겠네. 다 왔어요.”
“음?”
정신을 차려보니 어제 얻어터졌던 작은 연무장이었다.
“더 늦기 전에 날 만난 게 다행이지, 운 좋은 분이네.”
갑자기 가슴이 설렜다.
“부목 잘 댄 것 같네요. 움직이는 데도 지장 없어 보이고.”
가슴이 설레는 게 아니라 정광에게 부러진 갈비뼈가 욱신거리는 것이었나 보다.
“아까 말 섞지 말자고 했죠?”
무언으로 긍정하자 정광이 고개를 끄덕였다.
“내 말이. 사내가 말을 섞어서 뭐 해, 몸을 섞어야…… 어째 좀 이상하네. 어쨌든.”
그의 눈빛은 진지했다.
“내공 일으켜 봐요.”
“……갑자기 왜?”
“어서 하기나 해요.”
팽강휘는 의아한 눈빛으로 정광을 바라봤다.
‘뭘 하려는 걸까? 악의가 느껴지지는 않는데.’
아까의 설렘이 다시 일어났다.
‘어차피 밑져야 본전이니.’
그는 정광의 말대로 내공을 일으키기 시작했다.
그런 그를 보며 정광이 중얼거렸다.
“일성, 이성, 삼성…… 응? 뭐 해요? 빨리 칠성까지 올려요.”
“어, 어떻게 내가 일으키는 내공의 양을 정확히 아는 건가?”
“말하면 진기 흩어지니까 입 꼭 다물고요.”
“읍!”
팽강휘는 홀린 것처럼 정광의 말을 따랐다.
그리고 내공을 칠성까지 올리자,
딱!
“억!”
정광이 그의 뒤통수를 후려쳤다.
“뭐, 뭐 하는 건가?”
“잘 들어요. 지금부터 십성까지 천천히 올리셔야 해요.”
“머리는 왜…….”
“필요하니까 그러죠. 숨 열 번 쉴 때마다 일성씩. 알았죠?”
“그 전에 왜 머리를…….”
“내공 미세하게 운용할 줄 몰라요? 그냥 무식하게 끌어 올리는 게 끝?”
팽강휘는 이를 지그시 깨물고 정광의 말에 따랐다.
흔히 팽가를 무식하다 욕하지만 정말 무식하다면 상승 무공을 익힐 수도 없는 일, 정광에게 그 사실을 똑똑히 보여주고 싶었다.
그래서 진지하게 내공을 운용하여 팔성에 접어드는데,
딱!
“큭!”
딱!
“윽!”
정광이 계속 뒤통수를 후려갈기는 것 아닌가.
팽강휘의 심정에 변화가 왔다.
‘설마 날 가지고 노는 건가?’
딱!
‘보자 보자 하니까 이놈이 진짜.’
딱!
‘너 이 새끼! 죽여 버린다!’
구성에 이르자 참다못한 팽강휘가 광분하려는데,
“크흑!”
가슴의 기혈이 막히며 통증이 느껴졌다.
동시에 정광의 주먹이 그 기혈을 때렸다.
펑!
“억!”
전날처럼 강한 타격은 아니어서 정신을 잃지는 않았다.
하지만 가슴의 통증이 사라지며 진기가 원활하게 흐르는 것이 느껴졌다.
“이, 이게 대체…….”
“입 다물고! 천천히 십성으로!”
정신이 번쩍 들었다.
즉시 내공을 불러일으켰다.
딱!
“악!”
그와 함께 잠시 멈췄던 정광의 뒤통수 때리기도 다시 시작되었다.
‘왜 때리는지는 이제 알겠는데.’
아무리 그래도 열받는 건 어쩔 수 없었다.
꼭 이런 방법이었어야 했는가!
화가 불같이 일어났다.
“으윽.”
일으킨 내공이 십성이 되어가자 또다시 가슴의 기혈이 막히며 고통스러워진 그때,
정광의 고함이 터져 나왔다.
“아프다고 쫄지 말고 뚫어버려!”
그대로 끌어 올렸다.
쿵!
“커헉!”
목구멍에서 핏물이 올라왔다.
억지로 삼키며 다시 끌어 올렸다.
쿵!
“크흑!”
핏물이 입 밖으로 새어 나왔다.
“쫄았네, 쫄았어. 그게 십성이에요? 네?”
팽강휘는 분노에 휩싸여 그도 모르게 입을 벌려 외쳤다.
“겁내긴 누가 겁낸단 말이냐!”
“그쪽요.”
“이익! 난 겁쟁이가 아니야!”
우우우우웅-
그의 단전에서 진기가 솟구쳤다.
그 막대한 양의 내공이 그의 불완전한 기혈을 향해 미친 듯이 질주했다.
그리고 충돌했다.
쾅!
내부에서는 팽강휘의 내공이.
펑!
외부에서는 정광의 주먹이.
오랫동안 손상되어 막히고 끊기던 기혈을 아예 허물어뜨리듯이 뚫어버렸다.
‘이, 이건!’
순간 가슴속에서 엄청난 열기가 끓어올랐다.
팽강휘의 입이 열리며 웅혼한 외침이 터져 나왔다.
“아아아아아아!”
정광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개파조사 영감이랑 똑같네. 소리 안 질러도 벽을 깬 거 안다니깐.”
다행히 팽강휘는 전신을 휘도는 진기의 움직임에 매몰되어 정광의 말을 듣지 못했다.
그는 전율했다.
‘아! 이거구나! 이게 내 완전한 진기의 움직임이었어!
정광은 피곤했다.
‘아, 귀찮아. 그만 가서 자야지.’
생각뿐만이 아니었다.
정광은 팽강휘를 내버려 두고 휘적휘적 방으로 향했다.
‘저놈 깨어나면 뭐 달라 할까?’
잠시 뒤 그는 한숨을 쉬었다.
‘됐다. 근근이 먹고 사는 집안에 바랄 걸 바라야지. 게다가 이제야 겨우 몸을 가누는 애한테.’
그에겐 하북팽가와 팽강휘가 그런 존재였다.
* * *
팽수원은 허직을 상대하며 곤륜이라는 존재에 대해 감탄을 금치 못했다.
‘이게 곤륜의 진정한 힘이었구나!’
자연히 그 감탄은 정광이라는 신비한 소년 도사에게 이어졌다.
‘고금제일천재라. 사실일지도 모른다. 어린 소년이 곤륜을 이리 바꾸다니.’
무인으로서는 더 싸우고 싶지만 가문의 일이 더 중요한 터, 비무를 계속할 이유가 없었다.
“덕분에 견식이 높아졌습니다. 제가 졌습니다.”
계속 밀리긴 했지만 졌다 말할 정도는 아니었기에 곤륜 도사들은 모두 고개를 저었다.
그런 데 나오는 말들이 좀 이상했다.
“이제 내 차례인가.”
“사형들은 좀 쉬십시오. 소제가 팽 대협과 어울려 보겠습니다.”
“어허. 내가 제일 먼저 검을 뽑았소. 줄을 서시오.”
비무를 보는 내내 근질거리던 참이었다.
멋지고 우아하며 강한 곤륜 무공이 제대로 통하는 걸 봤으니 누가 가만히 있겠는가.
허 자 배 도사들이 저마다 비무를 하겠다며 나서자 난장판이 됐다.
“그만! 이제 팽가에서 무엇을 원하는지 들어야 할 때일세!”
장문인의 외침에 모두가 조용해졌다.
팽수원은 짧게 심호흡을 한 뒤 입을 열었다.
“십오 년 전, 간악한 마교의 수괴인 진천마가 죽었습니다.”
치가 떨리는 이름이 나오자 도사들이 일제히 두 손을 모았다.
“무량수불. 태상노군께서 도우신 일이오.”
“원시천존. 무림뿐만이 아니라 이 세상의 홍복 아닌가.”
정광이 있었다면 내가 뭘 그리 잘못했었냐고 난리를 쳤겠지만 모두의 생각이 그랬다.
교주도 아니고 소교주인 주제에 그냥 천마도 아니고 진짜 천마라 불렸던 그는 그 별호가 모자란다는 평이 있을 정도로 강했다.
한마디로 천하제일인!
어찌나 강했던지 그 포악한 마교도들조차 진천마 앞에선 숨도 제대로 못 쉬었다고 전해질 정도이다.
그와 비교하면 그 누구도 하찮은 존재가 되어버렸기에 마교에는 이인자가 없었다.
마교가 아직도 다음 교주를 추대하지 못하고 서로 치고받고 있는 건 그의 사후에도 드리워져 있는 그림자 때문이었다.
그런 그를 떠올리자 장내의 분위기가 싸늘하게 가라앉았다.
“그가 죽자 언제 시작될지 모를 마교의 침공을 대비해 모였던 무림맹은 유명무실한 존재가 되었지요.”
팽수원의 말에 장문인이 고개를 끄덕였다.
곤륜파도 무림맹에 파견 나가 있던 이들을 불러들인 지 오래였다.
“그게 문제인가?”
“그렇습니다. 요즘 사파(邪派)의 움직임이 심상치 않습니다.”
“허어. 마교가 잠잠해지니 이번엔 사파가?”
“사흑맹(邪黑盟)이 중원 마인들까지 끌어모아 사마련(邪魔聯)이란 조직을 만들려 한다는 정보가 있습니다.”
“무량수불. 또 힘없는 민초들이 고생하겠군. 그래서 무림맹의 재건을 추진하는 건가?”
장문인의 날카로운 혜안에 팽수원은 감탄했다.
천상 도인이라 생각했거늘 짧은 설명에도 냉정하게 상황을 파악하는 모습이라니.
“그렇습니다. 그래서 곤륜까지 오게 되었습니다.”
잠시 생각에 잠겼던 장문인이 물었다.
“맹을 재건한다면 맹주를 선출해야 할 터, 팽가주께서 그 자리에 앉으시려나 보군.”
“……!”
“팽가는 본문의 지지를 끌어내려는 것이지? 그래서 자네가 이 먼 곳까지 온 것이고.”
“……그렇습니다.”
“또 어느 곳의 지지를 받기로 했는가?”
여기까지 꿰뚫어 보다니.
팽수원은 일문의 장문인이란 자의 통찰력에 새삼 감복할 수밖에 없었다.
“아직 정해진 곳은 없습니다.”
“본문은 중원과 멀리 떨어져 있어 그리 도움이 못 될 텐데?”
“곤륜의 이름만으로도 큰 힘이 됩니다.”
“이름만 빌려주면 된다?”
“진인 몇 분과 도장들께서 무림맹에 머물러주시면 더할 나위 없지요. 송구스럽지만 곤륜의 무공을 견식하고 깊이 감복했으니 그 정도만 도와주셔도 충분할 것 같습니다.”
쉽게 말해 많은 전력은 필요 없으니 무력시위를 할 만한 고수 몇 명만 보내달라는 말이었다.
“물론 그냥 부탁드리는 것은 아닙니다.”
“말해보게.”
“일이 뜻대로 되면 맹에서 고수들을 뽑아 청해성으로 보낼 것입니다.”
“그 말은?”
“마교의 발호를 막기 위함입니다. 지금껏 곤륜이 홀로 피를 흘려왔는데 사실 이는 잘못된 일 아닙니까.”
많은 이들이 고개를 끄덕였다.
마교가 조용해진 지 좀 됐지만 언제 다시 패악을 부릴지 모를 일, 그들의 강대한 힘을 곤륜만으로 막기에는 벅찼다.
‘이제 마교의 ‘마’ 자만 들어도 토할 것 같다.’
‘우리만 피를 흘리는 건 억울하지 않은가.’
‘맹에서 도와준다면 헛되이 흘릴 피도 줄이고 힘없는 민초들도 더 구할 수 있다.’
비록 많은 수양을 쌓았지만 그들도 사람이었기에 팽수원의 제안은 무척 달콤한 것이었다.
이는 곤륜을 이끄는 장문인과 천상 도인인 운후도 마찬가지였다.
애초에 무림맹주 같은 허명에는 관심도 없었다.
곤륜의 희생을 줄이고 민초들을 더 구할 수 있다는 것 자체로 충분했다.
두 사람의 눈이 마주치고 고개가 끄덕여졌다.
“본문으로선 환영할 일이네. 그 시기를 언제쯤으로 보고 있는가?”
장문인의 승낙에 팽수원의 얼굴이 밝아졌다.
“이런 말씀 드리긴 뭣하지만 여러 문파와 가문이 명분이며 실리며 이것저것 따지게 될 것입니다.”
“허허. 사람으로서 당연한 일이니 괘념치 말고 말하게나. 우리도 사람일세.”
“그렇게 말씀해 주시니 감사합니다. 빨라도 대략 삼 년 후로 보고 있습니다.”
“삼 년이라…….”
“짧은 시간은 아니지요.”
“많은 것이 변하고 성장할 만한 시간이지. 뛰어난 이라면 더 그럴 것이고…….”
장내에 있는 모든 이들의 머릿속에 한 사람의 얼굴이 떠올랐다.
정광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