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화
그걸 어찌 알았나?
청해성은 대륙에서도 손에 꼽힐 만큼 큰 성이다.
모든 게 크다 보니 제일 큰 호수인 청해호도 이곳에 있다.
곤륜, 당고랍 같이 까마득히 높은 산맥도 여기에 있다.
당연히 춥고 황량하다.
강풍과 모래폭풍은 덤이다.
요약하면 청해성은 땅덩어리는 넓으나 쓸 만한 게 하나도 없는 깡촌이다.
한족(漢族), 강족(羌族), 토욕혼족(吐谷渾族) 등 여러 민족이 뭐 먹을 게 있다고 여기에서 사는지 의아할 정도로.
여러 민족이 함께 살다 보니 자연히 핏줄이 섞이게 되고, 이는 미녀의 탄생으로 이어졌다.
중원의 미녀와는 다른 독특한 분위기의 미녀들이었다.
팽강휘의 머릿속에 아까 봤던 광경이 주마등처럼 스쳐 지나갔다.
이국적인 미녀들이 소년 도사에게 환호성을 지르며 달려들던 모습이었다.
‘꺄아아아!’
‘옥룡님, 내일 또 뵈어요!’
이 몸도 있었거늘 기생오라비 같은 놈이 그런 인기를 얻다니!
왜 이곳의 미녀들은 진짜 남자를 몰라본단 말인가!
그도 모르게 이가 꽉 다물어지며 빠드득 소리가 나야 했건만 그럴 수 없었다.
그는 이미 개처럼 얻어맞으면서 아픔을 참기 위해 꽉 깨물고 있었으니까.
정말 주마등이 보일 정도로 처맞고 있었다.
퍽! 쿵! 빠각!
“으악! 어억! 커흑!”
그 와중에도 도저히 이해할 수가 없었다.
하북팽가의 직계인 그가, 구룡사봉 중 패룡이라 불리는 그가 무명의 소년에게 일방적으로 구타당하다니!
‘아. 무명은 아니구나. 진옥룡이라는 어엿한 별호가 있었지.’
전혀 위로가 되지 않았다.
오히려 더 비참해질 뿐이었다.
“으아아아아!”
비명 같은 기합과 함께 진기를 끌어 올렸다.
일성, 이성, 삼성, 단전에 잠들어 있던 내공이 줄기줄기 솟아올랐다.
팽강휘가 갑자기 내공을 쓰려 하자 허청이 기겁하며 외쳤다.
“내공을 쓰면 안 되네!”
다행히 팽강휘는 이성을 완전히 잃은 상태는 아니었다.
“딱 삼성만 쓰겠습니다! 더도 말고 덜도 말고 딱 삼성만! 꼬마! 너는 십성 다 써라!”
“십성이라니!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를! 정광아! 절대…….”
“사부님. 저도 딱 삼성만 쓸게요.”
“삼성? 아니 된다! 내 친우의 조카를 죽일 셈이냐?”
“그럼 이성?”
“안 된대도!”
사제(師弟)의 말싸움 때문에 비무는 잠시 멈춘 상태, 팽 씨 숙질은 그들을 보며 몸을 부르르 떨었다.
‘가, 감히 나를 무시해?’
‘대체 얼마나 강하기에?’
지금까지 본 것만 해도 정광이 말도 안 되게 강하다는 건 명백했다. 그런데 초식뿐만이 아니라 내공까지 그렇다고?
‘웃기는 소리. 불가능한 일이다.’
‘초식이야 진짜 천재라 그렇다 쳐도 저 어린 나이에 내공이 있어 봤자 얼마나 있겠는가.’
그들의 생각과 상관없이 옥신각신하던 사제는 결국 ‘일성’의 내공만 사용하기로 타협했다.
당연히 팽강휘는 미친 듯이 분노했다.
“일성? 내가 삼성을 쓰는데 네가 일성?”
“음. 그러게요. 일성도 좀 많은 감이…….”
“닥치고 이거나 받아라!”
팽강휘의 움직임이 바뀌었다.
그의 하체가 쉼 없이 움직이며 폭풍 같은 발차기를 쏟아냈다.
얼마나 강한 위력이 담겨 있는지 정광의 머리카락이 흩날릴 정도였다.
“아, 시원해.”
정광은 그 바람을 즐기며 우아하게 보법을 밟았다.
화전민 집 코흘리개 꼬마도 알 정도로 흔하디흔한 삼재보(三才步)였다.
“연환패왕권이 아니네? 뭐예요?”
“철혈백사십팔퇴(鐵血百四十八腿)다!”
“직관적인 이름이구나. 근성으로 백사십팔 번 걷어차는 건가? 한참 걸리겠네요.”
“금방 끝내주마!”
“근데 왜 시작하기 전에 무공 이름 말 안 했어요?”
“……모, 몰라! 맞아라! 익! 익!”
정광의 눈에 짜증스러운 기색이 떠올랐다.
그 모습을 본 허청은 마음이 다급해졌다.
그는 자기 제자의 성격이 보통이 아님을 알았기에 재빨리 전음을 보냈다.
-적당히! 제발 적당히 때려라!
-양쪽 발모가지만 부러뜨릴까요?
-헉! 아, 안 돼! 뼈는 안 돼!
-시작하자마자 갈비뼈 하나 부러뜨렸었는데요.
설마설마했던 허청도 정광의 말을 듣고 나서야 확신했다.
비무를 시작하자마자 들렸던 ‘뽀각’ 소리는 뼈 부러지는 소리였던 것이다.
‘허어. 고통이 극심할 텐데도 계속 달려들다니. 하북팽가야말로 투사의 가문이라더니 명불허전이구나.’
그는 곧 고개를 홱홱 저었다.
이 판국에 감탄해서 뭐 하겠는가.
그 투사가 이미 개처럼 처맞았고 또다시 처맞기 직전인데.
한편, 딱딱하게 굳은 얼굴로 지켜보던 팽수원도 마음이 급해졌다.
‘모양새가 안 좋지만 여기서 멈춰야 한다.’
그는 즉시 내공을 실어 외쳤다.
“그만!”
웅혼한 외침이 장내를 울렸다.
하지만,
“익! 맞아라! 익! 죽어!”
“백사십팔퇴라했죠? 백 한 번 남았어요.”
“저, 정광아! 제발 살살!”
아무도 신경 쓰지 않았다.
얼굴이 벌게진 팽수원이 내공을 더 끌어 올리며 다시 한번 외치려 하는데,
“아, 귀찮아. 잘 가요.”
“뭐?”
펑!
북이 울리는 듯한 소리와 함께 팽강휘가 훨훨 날아갔다.
“안 돼!”
비명도 지르지 못한 채 바닥에 처박히려는 그를 팽수원이 재빨리 받았다.
“강휘야! 괜찮느냐? 강휘야!”
잠시 의식을 잃었던 그가 간신히 눈을 떴다.
“수, 숙부…….”
“그래. 내상이 심한 것이냐? 내 도울 테니 어서 운기조식을…….”
“지쳤어요…….”
“……뭐?”
“이제 그만 잘게요…….”
이 무슨 하늘이 무너지는 소리란 말인가!
팽수원의 머릿속에 분노한 가주의 얼굴이 떠올랐다.
“안 된다 강휘야! 눈을 떠 이놈아! 이렇게 널 보낼 수는 없…….”
“드르렁…….”
“…….”
진짜 잤다.
혹시나 싶어 맥을 짚어봐도 자는 게 맞았다.
팽수원은 천천히 고개를 들어 앞을 바라봤다.
옷에 묻은 흙먼지를 툭툭 털어내던 정광이 그의 시선을 느끼고 물었다.
“왜요?”
“……어떻게 한 것이지? 왜 강휘가 잠들었는지 말해주게.”
정광은 입을 열려다 멈췄다.
당신 조카가 광분해서 날뛰다가 가슴의 기혈이 막혀 답답해하길래 내가중수법(內家重手法)으로 때려서 깔끔하게 풀어주니 온몸이 더없이 편안해져서 꿈나라로 가버렸다고 설명하기엔 너무 귀찮지 않은가.
게다가 선의로 그런 게 아니라 마침 팽강휘가 그런 상태가 됐고, 귀찮아져서 빨리 끝내려고 거기를 친 것일 뿐인데.
생각 끝에 나온 답은 간결했다.
“많이 피곤했나 보죠.”
* * *
팽강휘는 눈을 뜨자마자 정광부터 찾았다.
“소형제! 소형제!”
“강휘야! 정신을 차린 게냐?”
“아, 숙부님. 그 소도사는 어디 있습니까?”
“네 몸부터 신경 써야지. 별 이상은 없는 것 같다만 어떻느냐?”
팽강휘는 가부좌를 틀고 앉아 진기를 움직여 봤다.
아무런 이상도 느껴지지 않았다.
“괜찮습니다. 오히려 피곤이 풀려서 가뿐합니다.”
“다행이구나. 너는 하루 만에 눈을 떴어. 앞으로는 조심하거라. 이번 일만 해도…….”
숙부의 잔소리가 길게 이어졌지만 팽강휘의 머릿속에는 정광뿐이었다.
‘절대로 우연이 아니었어.’
마지막 일격을 맞기 전, 정광의 시선이 향하던 곳이 떠올랐다.
‘분명히 내 가슴의 기혈이 막힌 그 일점(一點)이었다.’
본래 화급한 성격의 그였지만 극심히 분노할 때면 가슴의 기혈이 막히곤 했는데 이번에도 그랬다.
그것을 처음 만난 정광이 정확히 보고 해소까지 한 것이다.
‘어떻게? 왜?’
정녕 고금제일천재일까.
그렇다면 곤륜 무공을 뜯어고치고 있다는 게 거짓이 아닐지도 모르지 않는가.
한참 고민하는데 팽수원의 잔소리가 평소 신경 쓰이던 부분에 이르렀다.
“……강휘야. 안 그래도 안팎에서 너를 끌어내리려는 자들이 많다. 좀 더 조심해야 하지 않겠느냐.”
팽강휘는 입술을 지그시 깨물었다.
숙부의 말대로 가주의 서자(庶子)인 그를 음해하는 이들은 많았다.
평소 그의 행실이 부족한 탓도 있었으나, 무림칠대세가(武林七大世家) 중 하나인 하북팽가의 후계권이 걸려 있었기에 그 정도가 무척 심했다.
‘형…….’
대부분이 가주의 적자(嫡子)인 팽강웅을 지지했다.
적자인 신분에다 무공, 학식, 인품, 뭐 하나 빠지지 않는 팽강웅이었기에 팽강휘의 편은 없다시피 했다.
그나마 있다면 지금 옆에 있는 숙부였지만 팽강휘로서는 그도 완전히 믿을 수 없었다.
혹시라도 가슴 기혈에 문제가 있다는 소문이 퍼졌다간 그의 화급한 성격을 성토하는 말들이 난무할 터.
그래서 숨겨왔건만…….
‘정광!’
그 소년을 만나야 했다.
“숙부님, 지금 당장…….”
팽강휘는 말끝을 흐렸다.
숙부의 눈에 담긴 염려를 보자 자신이 부끄러워졌다.
한참 어린 소년에게 쓸데없이 시비를 걸고 얻어터지기까지 했으니 고개를 들 수가 없는 노릇 아닌가.
그는 팽수원에게 고개를 숙여 진심으로 사과했다.
“죄송합니다, 숙부님. 앞으로는 주의하겠습니다.”
“……허어. 그래, 바로 그거다. 네가 이런 모습을 보이니 무척 기쁘구나.”
“송구스럽습니다. 잠시 나가서 바람을 쐬어도 되겠는지요.”
“허허. 나도 곤륜의 어르신들을 뵈러 가야 하니 나가자꾸나.”
그들은 밖으로 나와 각자의 길로 헤어졌다.
“조심해야 한다.”
“걱정 마십시오. 주의하겠습니다.”
“허허. 그래. 내 믿으마.”
팽수원은 크게 기꺼웠다.
평소 가볍기만 했던 조카가 진중해진 모습을 보니 여기까지 데려오길 잘했다는 생각이 절로 들었다.
‘허청에게 고맙다 해야겠군. 그리고…….’
정광이라는 신비한 소년 도사가 있었다.
‘좋아.’
팽수원은 마음을 굳혔다.
한 가지만 더 확인해 본 뒤 그 기준에 맞는다면 곤륜을 밀기로.
그가 빠른 걸음으로 사라지자 팽강휘도 발걸음을 옮겼다.
‘오늘도 그곳에 있으려나.’
정광을 처음 봤던 연무장 근처에 이르자 마침 또랑또랑한 목소리가 담 너머로 들려왔다.
“손님도 오셨겠다, 오늘은 여기까지 하죠.”
“우와아아아아아!”
우렁찬 함성과 함께 익숙한 광경이 펼쳐졌다.
“하압! 운룡무궁(雲龍無窮)!”
“무량수불. 용비구천(龍飛九天)!”
“으라랏! 천룡두린(天龍抖鱗)!”
눈이 퀭한 노도사들이 운룡대팔식을 펼쳐 도망치듯 날아갔다.
“…….”
“…….”
“…….”
말할 힘도 없어 보이는 중년 도사들이 미친 듯이 경공술을 펼쳐 사라져 갔다.
그리고 시체처럼 쓰러진 젊은 도사들 사이로 정광이 걸어 나왔다.
“소, 소형제! 내 자네에게…… 커헉!”
급한 마음에 재빨리 다가가던 팽강휘는 이번에도 진옥룡수호단에게 튕겨 나갔다.
“꺄아아아악!”
“진옥룡님!”
재빨리 일어나서 여자들을 뚫고 들어가려던 팽강휘는 사방에서 꽂히는 살기에 얼음처럼 굳어버렸다.
“뭐야 이건! 줄 서!”
“웬 산적같이 생긴 놈이 감히 진옥룡님을 노려?”
“아, 아니 그게 아니라…….”
“저리 가! 분위기 깨지 말고!”
“쯧쯧. 물을 흐려도 유분수지 원.”
팽강휘는 축 처진 어깨로 비틀비틀 물러났다.
많은 실전을 겪은 그였다.
이처럼 위축된 적이 있었던가?
단연코 없었다.
분명 힘없는 보통 여자들이건만.
‘다, 다르다.’
무공 문제가 아니었다.
기세 자체가 달랐다.
팽강휘는 조금 떨어진 곳에 주저앉아 양팔로 무릎을 감쌌다.
왠지 모르게 울적해졌다.
그런 그를 흘깃 보며 정광은 속으로 혀를 찼다.
‘쯧쯧. 청승맞기는. 뭐 하는 거야?’
원래 다 가진 자는 없는 자의 마음을 모르는 법, 한참의 시간이 지나고 나서야 진옥룡수호단에게서 벗어난 정광은 팽강휘를 그냥 지나쳐 걸었다.
“소, 소형제!”
나?
“자, 잠시만 기다려 주게. 할 말이 있네.”
싫은데.
계속 무시하며 걷자 팽강휘가 앞을 가로막았다.
정광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이 새끼가 덜 맞았나?
그럼 더 때려줘야겠네.
어디 보자, 더 못 덤비게 그냥 척추를 반대로 접어주…….
“자, 자네와 가까워지고 싶네.”
“……네?”
“자네와 가까운 사이가 되고 싶다고 말했네만, 싫은가?”
좋을 리가 있나.
팽강휘를 쥐어팰 때도 고급 무공을 쓰지 않았던 정광이 비룡축전(飛龍逐電)을 펼쳐 번개처럼 뒤로 물러났다.
“왜 그러나? 나는 순수하게…….”
황망한 얼굴로 또 따라붙으려는 팽강휘에게 정광이 살기 어린 목소리로 경고했다.
“더 오면 죽인다.”
“크흑!”
팽강휘는 몸을 떨었다.
저릿저릿한 살기에 숨조차 쉬기 힘들었다.
‘실로 대단한 살기구나. 이건 마치 말로만 듣던 마교의…….’
흠칫 놀란 그가 고개를 저었다.
‘마교라니. 곤륜의 제자에게 무슨 말도 안 되는 의심을.’
그는 사과의 마음을 담아 진심으로 말했다.
“으윽…… 자, 자네와 친구가 되고 싶네. 안 되겠는가?”
몸을 욱죄던 살기가 씻은 듯이 사라졌다.
“아. 그거였어요?”
“……?”
“그것도 싫은데요.”
“이, 이유가 뭔가?”
“알면서.”
“……?”
정광은 가던 길을 계속 갔다.
팽강휘가 다급히 그 뒤를 따랐다.
“아, 왜요?”
“친구가 되고 싶을 뿐이네. 왜 싫다는 건가?”
“됐고요. 원하는 게 뭐예요?”
“……지금 뭐라 했나?”
“친구는 무슨. 원하는 게 있으니까 이러는 거잖아요. 그게 뭐냐고요. 흠. 뭐 뻔하긴 하네.”
팽강휘는 머리를 한 대 얻어맞은 것 같았다.
‘원하는 게 있으니까 이러는 거 아니냐고?’
맞았다.
한참 어린 소년을 이용하려고 친구가 되자고 한 것이다.
그것도 자신을 쥐어팬 뒤 더는 관심도 주지 않는 소년에게.
‘하하. 비참하군. 형편없어.’
지난날들을 되돌아보게 됐다.
자신을 비난하는 이들을 욕해왔건만 비난받을 만큼 형편없지 않은가.
멍하니 서 있는 그를 보며 정광이 투덜거렸다.
“멍석 깔아주니까 말을 안 하네. 이제 귀찮게 하지 말…….”
“미안하네. 더는 귀찮게 안 하지.”
“……네?”
“이만 가겠네. 자네도 푹 쉬게.”
팽강휘는 쓸쓸히 멀어져 갔다.
어이없어 쳐다보던 정광도 제 갈 길로 갔다.
얼마 못 가 짜증이 솟았다.
뭐 저런 싱거운 놈이 다 있나.
사내가 칼을 뽑았으면 자기 살이라도 썰어야지, 저게 뭐 하는 짓이냔 말이다.
결국 그는 팽강휘에게 버럭 소리를 질렀다.
“가슴의 기혈이 막힌 걸 어떻게 알고 풀었는지 궁금한 거죠?”
힘없던 팽강휘의 발걸음이 우뚝 멈췄다.
“그걸 어찌 알았나?”
돌아선 그의 두 눈은 크게 떠져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