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곤륜마협-9화 (9/569)

9화

내 제자가 바꾸었네

팽강휘는 곤륜이 워낙 궁벽한 곳에 있어서 여자도 보기 힘들다고 투덜댔던 자신을 책망했다.

알고 보니 청해성의 여자란 여자는 이곳에 다 모여 있지 않은가. 그것도 나이를 가리지 않고.

‘흐흐.’

그 속에 섞여 있는 미녀들을 보니 마음이 흐뭇해졌다.

하지만 그녀들이 이곳에 온 이유가 아름다운 소년 도사 때문이라는 건 마음에 들지 않았다.

‘흥! 저런 기생오라비 같은 꼬마가 뭐가 좋다고. 자고로 남자라면 기골이 장대하고 사내답게 생겨야지.’

마치 동경(銅鏡)을 보며 자신의 생김새를 묘사하는 듯한 생각이었다.

무리도 아닌 것이 하북팽가의 남자들은 그런 미남관(美男觀)을 가지고 있었다.

유일하게 정상인 건 숙부인 팽수원이었다.

‘허어. 세상에 저런 미소년이 있을 줄이야.’

그는 험상궂기로 유명한 팽가 사내답지 않게 훤칠한 키에 부드러운 인상을 가지고 있었다.

덕분에 어려서 놀림도 많이 당했지만 나이가 어느 정도 차자 가문의 그 누구보다 여자들에게 인기 많았던 것이 그였다.

그래서 소년 도사 정광이 얼마나 말도 안 되게 잘생긴 것인지 잘 알 수 있었다.

‘아직 어린 도사가 저런 외모라니. 더 장성하면 어떻게 될까? 쉽지 않은 삶을 살게 될 게 뻔하군.’

그야말로 파란만장하리라.

모든 남자가 그런 삶을 살길 원할 정도로.

‘게다가 고금제일천재라고?’

허청의 말대로라면 완전무결한 존재이지 않은가.

‘그럴 리가.’

팽수원은 내심 실소를 터트렸다.

자기 새끼는 다 예뻐 보이는 법, 허청도 어쩔 수 없는 팔불출이란 생각이 들었다.

그때 그 팔불출이 웃음 섞인 목소리로 말했다.

“지금 소개해 주고 싶지만 한참 걸릴 테니 기다리세나. 그동안 내 제자 얘기를 좀 하지.”

내심 궁금했던 팽 씨 숙질은 귀를 쫑긋하며 집중했다.

그리고 곧 후회했다.

“……그렇게 태상노군(太上老君)께서…… 아니, 영보천존(靈寶天尊)께서…… 흐음. 뭔가 약한데. 그렇지. 태상노군, 영보천존, 원시천존께서 힘을 합하시어 산속에 홀로 있던 정광과 나를 만나게 해주신 거지. 이게 시작일세. 그리고……”

친우의 체면을 생각해 억지로 견디던 팽수원이 참다못해 말을 끊었다.

“긴 얘기인가?”

“아주 길지. 그럼 본격적인 전개가 시작되는 다섯 살 때 이야기를…….”

“이보게 허청. 먼 길을 오다 보니 많이 지쳤네. 좀 쉬었으면 하네만.”

“이런. 내 정신 좀 보게. 하하. 암, 쉬어서 기력을 보충해야지. 그래야 내 제자 얘기를 마음껏 들을 수 있지 않나.”

팽 씨 숙질이 기겁하여 동시에 말했다.

“아니, 그렇게까진…….”

“아닙니다, 그렇게까진…….”

“자, 자. 이리 오게나. 패룡 자네도 어서.”

허청은 팽 씨 숙질이 지낼 곳으로 안내한 뒤 몸을 씻으러 떠났다.

방 안에 둘만 남은 숙질은 저마다의 생각에 빠졌다.

‘기생오라비 같은 놈. 고금제일천재라고?’

‘과장한 거겠지만 자질이 뛰어난가 보군. 그 아이를 시험해 보면 현 곤륜의 수준을 알 수 있을지도…….’

둘의 생각이 거의 처음으로 일치했다.

‘혼 좀 내주마.’

‘강휘와 비무를 시켜봐야겠어.’

* * *

허청이 사람 좋은 미소를 지으며 권했다.

“거친 음식이지만 들게나. 맛은 그리 나쁘지 않을 걸세.”

팽 씨 숙질은 탁자 위를 물끄러미 바라봤다.

정말 거칠다 못해 황량했다.

‘이런 풀 쪼가리를 먹으라고?’

‘도문이라 해도 무척 검소하군.’

먹어보니 의외로 괜찮은 맛이었다.

하지만 그래 봤자 풀이다.

팽강휘는 젓가락질을 몇 번 하다가 한숨을 쉬었다.

바로 팽수원이 나무랐다.

“뭐 하는 게냐? 예의를 지켜라.”

“하지만 숙부님, 이런 걸 어떻게…….”

“어허! 이런 거라니. 어디서 그런 버릇없는 말을 하느냐.”

“…….”

“어서 사죄드리거라. 어서.”

계속 다그치는 팽수원을 허청이 말렸다.

“그만하게. 뭐 그리 큰 잘못을 했다고.”

“미안하네. 조카가 버릇이 없으니 이해해 주게나.”

“하하. 아니네. 사실 산의 음식이라는 게 먹기 힘든 것들뿐이잖나.”

말과 달리 허청은 걸신들린 사람처럼 열심히 먹고 있었다.

“……자네 식욕이 많이 늘었군.”

“움? 구뢨낭? 다들 구런댕.”

입안에 가득 찬 음식 때문에 발음도 제대로 안 됐지만 팽수원은 용케 알아들었다.

‘다들 그렇다고?’

주위를 둘러본 팽수원은 살짝 놀랐다.

다른 도사들도 노소를 가리지 않고 미친 듯이 퍼먹고 있는 것 아닌가.

‘괴이한 일이군. 도인이 이렇게 먹는 모습을 보게 될 줄이야.’

지금 이 식당에서 도사답게 먹고 있는 이는 허청의 제자인 정광뿐이었다.

젓가락질 한 번.

오물오물. 꿀꺽.

젓가락질 또 한 번.

오물오물. 꿀꺽.

어찌나 우아하게 먹는지 아까의 여자들이 여기 있었다면 또 비명을 지르며 난리가 날 판이다.

‘거참. 먹는 모습까지 아름답다니.’

사실 정광은 그저 맛이 없어서 깨작거리는 거였다.

그래도 이 정도면…….

‘조금이나마 먹을 만해졌네.’

곤륜에 치열한 수련을 도입하며 이것저것 많이 바꿔야 했지만 가장 문제가 됐던 건 식단이었다.

육식을 통해 떨어진 기력과 과부하가 걸린 근육을 회복시켜야 하거늘 풀 쪼가리만 먹다니.

‘고기 먹죠.’

도사들은 극렬하게 반대했다.

‘그것만은 안 된다!’

‘왜요?’

‘곤륜은 도문이니라!’

‘어차피 몰래 먹고 있지 않나요?’

‘크흠! 그거야 몸이 다 자라지 않은 어렸을 때나 그러는 것이지!”

‘실력도 다 자라지 않았으니까 먹어야죠.’

‘……어, 어쨌든 안 돼!’

뭐 어차피 정광 자신만 먹으면 되기에 그래도 상관없었다.

‘그래요 그럼. 이대로 드시죠.’

‘……그, 그래. 이, 이대로…….’

어제 일처럼 뚜렷이 기억났다.

안도하는 것치곤 어찌나 쓸쓸한 눈빛이던지.

다행히도 진옥룡수호단의 한 단원이 우리 옥룡께서 이런 거만 먹고살다간 큰일 난다며 얼마 전부터 숙수(熟手)와 요리 재료들을 지원해 줬다.

그 결과 훨씬 나아진 밥상이 이것이었다.

안 그래도 극심한 수련으로 배고픈 데다가 맛도 좋아지니 도사들이 환장하고 먹을 수밖에.

‘멧돼지라도 잡아서 먹을까.’

마음을 굳힌 정광이 젓가락을 놓았다.

팽강휘는 속으로 투덜거렸다.

‘이 녀석도 거의 안 먹었는데 왜 나만 갖고 그래.’

적의가 더 커졌다.

생긴 것부터 시작해서 마음에 드는 게 하나도 없지 않은가.

그때 팽강휘와 정광의 시선이 마주쳤다.

‘어쭈, 눈 안 깔아?’

팽강휘가 눈에 힘을 줘도 정광은 시선을 돌리지 않았다.

‘이런 어이없는 놈을 봤나. 산에만 처박혀 있다 보니 무서운 걸 모르나 보군.’

그는 이를 드러내며 웃었다.

‘역시 좀 맞아야겠어.’

하지만 곧 마음이 바뀌었다.

패기엔 너무 작고 어리지 않은가.

그냥 버릇만 고쳐주기로 했다.

‘그러려면 먼저 사과부터…….’

자리에서 일어나 허청에게 고개를 숙였다.

“버릇없이 굴어 죄송합니다.”

“하하. 아닐세. 오히려 제대로 된 음식을 대접 못 해서 미안하네.”

지켜보던 팽수원의 눈매가 날카로워졌다.

‘저 오만한 녀석이 시킨다고 순순히 사과를?’

즉시 전음을 보냈다.

-뭐 하려는 게냐?

-곤륜의 무공을 견식하고 싶어 부탁드리려는 참입니다.

-……그것도 좋겠지.

-……네?

-대신 크게 다치게 해선 안 된다.

의외의 허락에 팽강휘는 어안이 벙벙했다.

하지만 곧 득의양양한 마음이 되었다.

‘내 무공을 곤륜에 보이고 싶어 하시는구나.’

이제는 거칠 것이 없지 않은가.

그의 입에서 당당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하북팽가의 팽강휘가 곤륜 무공을 견식해 보길 청합니다.”

“음. 여기까지 힘든 길을 왔는데 거절할 수야 있나. 좋아. 몇 초 어우러져 보세.”

“도장께 드리는 말씀이 아닙니다.”

“응? 그럼……?”

팽강휘는 의아해하는 허청에게서 시선을 돌려 정광을 노려봤다.

“소형제. 비무(比武)를 요청하네.”

“뭐라? 정광에게?”

놀란 허청이 말리려 하는데 정광이 냉큼 답했다.

“그러죠.”

* * *

작은 연무장.

정광과 팽강휘가 마주 섰다.

‘허어. 이 일을 어쩐다?’

안절부절못하는 허청의 귀에 팽수원의 전음이 들려왔다.

-걱정 말게. 설마 강휘가 자네 제자를 해치겠는가. 도를 안 쓰고 권으로 상대하려고 하잖나.

친우를 안심시킨답시고 전음을 날리고 보니 내심 부끄러웠다.

그의 조카는 정광과 나이 차이도 꽤 나는 데다 무림제일후기지수인 구룡 중 하나였기에 조금 심한 감이 있다고 생각한 것이다.

그래도 허청이 입에 침이 마를 정도로 칭찬한 정광의 실력을 확인하고 싶었기에 지켜보기로 했다.

‘곤륜의 힘을 보여다오. 강했으면 좋겠구나. 그래야 내가 여기까지 온 보람이 있다.’

개인적 호기심과 임무 모두를 위해 그래야 했다.

하지만 허청이 걱정하는 이유는 그런 것이 아니었다.

-이보게, 수원.

-말하게.

-나는 지금 자네 조카를 걱정하는 걸세.

-……?

한편 정광은 하북팽가에 대한 정보를 떠올리고 있었다.

‘두 가지로 유명하다 했지.’

첫째는 타고난 신력과 장대한 체구, 그리고 화급한 성격이다.

눈앞의 팽강휘를 보니 ‘과연’이라는 생각이 절로 들었다.

백도 무림 중 가장 호쾌한 가문이라 불린다 했던가?

뒤로는 무식한 근육 돼지들이라고 까이고.

둘째는 도법이다.

오호단문도(五虎斷門刀)를 필두로 하여 혼원벽력도(混元霹靂刀), 건곤연환탈백도(乾坤連環奪魄刀) 등 수많은 절기를 자랑하는 도법의 명가이다.

그들의 패도(覇道)적이고 실전적인 도법은 무림 일절로 그 적수가 없다고 하는데…….

잠깐.

그건 고수일 때 얘기지 이 녀석은 그냥 애송이 아닌가.

곤륜에 있다 보니 쓸데없이 생각이 많아진 것 같아 머리를 긁었다.

그런 그를 팽강휘가 도발했다.

“소형제. 살살 할 테니 걱정 말게나. 흐흐.”

살살 한다면서 뒤에 따라붙는 음침한 웃음이라니.

기분이 상할 법도 하지만 정광은 솔직히 반가웠다.

아까부터 느꼈지만 천마신교 애들과 조금 비슷한 냄새가 나는 녀석이었다.

마음에 안 드는 놈에겐 시비를 걸고 치고받는 그런 냄새 말이다.

이런 녀석들은 쥐어 패야 정신을 차리기에 비무 요청을 승낙했다.

솔직히 말이 비무지 간만에 손맛이나 보려는 욕심이다.

얼마나 패줄까.

사부 친우의 조카면 너무 멀다 못해 남이나 마찬가지니 사지를 꺾는 것 정도는 괜찮겠지.

곤륜에서 이런 기회가 자주 있는 건 아니니 살점을 얇게 저며줄까?

“나는 연환패왕권(連環覇王拳)을 펼치겠네. 소형제는 무엇으로 상대하겠나?”

팽강휘의 말에 흥이 식어버렸다.

정파라는 것들은 싸울 때도 자기가 어떤 무공을 사용할지 알려주고 상대에게 묻기까지 하니 답이 없는 놈들이다.

근데 지금 그도 정파에 속해 있으니 그 자괴감이 오죽하랴.

저놈을 죽기 직전까지 패서 아픈 마음을 치유하겠다 다짐했다.

“추운권(追雲拳)요.”

정광은 한쪽 다리로 삐딱하게 서서 한 손을 우아하게 들어 올렸다.

그리고 검지를 펴 까닥거렸다.

“오세요.”

팽 씨 숙질은 어이가 없어서 입을 떡 벌렸다.

잠시 후, 당사자인 팽강휘가 간신히 입을 열어 물었다.

“……지금 뭐 하는 짓이냐?”

“기수식(起手式)인데요.”

“…….”

팽강휘의 이마에 핏줄이 불끈 솟았다.

모름지기 기수식이란 싸우기 전 상대에게 예를 표하고 본인 무공의 특성을 드러내는 것이거늘 저런 시정잡배 같은 짓이라니?

팽수원도 같은 생각이었기에 자신도 모르게 중얼거렸다.

“저게 기수식이라고?”

“……크흠. 마, 맞네.”

허청의 말에 더 어이가 없어져 물끄러미 바라보니 그가 변명하듯 열심히 입을 놀렸다.

“자, 자세히 보게나. 자네가 생각하는 그것과 달라.”

확실히 다르긴 달랐다.

뭔가 여유롭고 자유로워 보이는 멋이 풍겼다.

하지만 ‘자네가 생각하는 그것’이라 말한 건, 허청도 저게 시정잡배의 그것과 비슷하다는 걸 알고 있다는 얘기였다.

“이보게, 허청. 내가 알기로 추운권은 신속하며 무거운 권법이네. 기수식도 그에 어울리게 날렵하면서도 장중한 것이었는데…….”

“내 제자가 바꾸었네.”

“……지금 뭐라 했나?”

허청의 표정이 무거워졌다.

그의 허리가 거목처럼 우뚝 서고 가슴은 평야보다 드넓게 펼쳐졌다.

‘이거 어디서 봤던 모습인데.’

팽수원의 기억이 맞았다.

허청의 입이 열리며 황당무계한 말이 튀어나왔다.

“고금제일천재인 내 제자가 곤륜 무공을 복원시킨 뒤 개량시키고 있다는 말일세.”

“말도 안 되는 소리!”

황당함을 참지 못하고 소리치던 팽수원의 눈에 그의 조카가 주먹을 내지르는 모습이 보였다.

“혼 좀 내주마!”

쓸데없는 말이 더해졌지만 시기, 자세, 위력 등 뭐 하나 나무랄 데가 없는 연환패왕권!

너무 제대로 펼쳐져 정광이 크게 다칠 것 같아 말리려던 그 순간,

투욱.

정광이 검지를 까딱거리던 왼손으로 팽강휘의 주먹을 우아하게 젖혔다.

쿵.

그의 오른발이 반걸음 나가며 위엄 있게 진각을 밟았다.

뽀각!

오른팔이 접히며 멋지게 솟아오른 팔꿈치가 팽강휘의 옆구리를 찔렀다.

“끄아아악!”

뻔히 보이는데도 피할 수 없는 연환식!

무언가 부러지는 듯한 소리와 함께 비명을 지르며 튕겨 나가는 팽강휘에게 정광의 신형이 쇄도했다.

“저, 저런!”

팽수원이 경악했다.

마치 구름을 쫓는 용과 같은 모습 아닌가!

정광은 진옥룡이라는 별호에 걸맞게 목소리마저 맑고 아름다웠다.

“이 꽉 깨무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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