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곤륜마협-8화 (8/569)

8화

진옥룡(眞玉龍)

곤륜산은 높고 험했다.

안 그래도 불만이 많았던 장대한 체구의 청년은 자신도 모르게 투덜거렸다.

“어쩌다 이런 궁벽한 곳까지…….”

그의 옆에서 걷던 중년인이 나직이 책망했다.

“말조심하거라. 곤륜이다.”

“숙부님, 제 말이 틀린 건 아니잖습니까?”

중년인 팽수원은 내심 고개를 저었다.

맞는 말이긴 하지만 이리도 경솔할 수가 있나.

‘너무 오냐오냐 키우셨어.’

그는 자신의 형이자 청년의 부친인 가주를 원망했다.

청년은 오만하고 조심성이 없었다.

무공 실력의 반만 철이 들었다면 가주가 매일같이 잔치를 열 것이 분명할 정도로.

늦둥이라 마냥 귀여워하고 다 받아줘서 이렇게 되어버린 것이니 남을 탓할 수도 없는 일이다.

가주가 고생 좀 시켜달라고 부탁하지 않았다면 절대 데려오지 않았을 터, 얼굴에 철판 깔고 거절했으면 좋았을 것을 괜히 승낙했다 후회하는 팽수원이었다.

“또 그러면 형님께 말씀드릴 것이니 그리 알거라.”

청년 팽강휘는 찔끔했다.

다른 이는 몰라도 부친만큼은 무서워하는 그였다.

“알겠습니다, 숙부님.”

“반드시 그리해야 할 것이야.”

안심이 안 되는지 한 번 더 다짐을 받으려는 팽수원에게 팽강휘는 그러겠다 대답했다.

하지만 그의 속은 부글부글 끓고 있었다.

‘좀생이 양반 같으니. 뭐 그리 큰 잘못을 했다고 또 이러는지 원.’

하북성에서 청해성에 이르는 기나긴 여정 동안 숙부는 그를 잡아먹지 못해 안달 난 사람 같았다.

그동안 쌓였던 울화를 조금 내비쳤다고 또 꾸중을 들으니 기분이 더 나빠질 수밖에.

묵묵히 산을 오르다 보니 심심해져서 풍경을 둘러봤다.

‘산세는 볼만하네.’

곤륜은 무척 높고 웅장했다.

어찌 보면 그의 가문인 하북팽가(河北彭家)의 기상과 비슷한 느낌이다.

‘그래 봤자지만.’

중원의 중심인 하북성과 오지인 청해성이라는 간극은 도저히 메꿀 수 없는 것 아닌가.

산을 오르는 사람들도 거친 옷차림의 사내들밖에 없을 정도다.

‘워낙 촌이어서 여자 구경하기도 힘들군.’

짜증을 삭히며 한참 걷자 저 멀리 거대한 일주문(一柱門)이 보였다.

짙은 운무에 가려져 신비하게까지 보이는 모습에 팽강휘는 조금이나마 감탄하게 됐다.

‘그래도 구파일방이란 말이군.’

일주문에 도착하자 의외로 약관 정도밖에 안 되어 보이는 도사가 홀로 서 있었다.

명문정파들은 보통 입구부터 위세를 보이기 마련인데 이곳은 뭔가 다른 점이 있는 것 같았다.

문을 드나드는 모든 이들에게 싱글벙글 웃으며 인사하는 모습이 정녕 도인답지 않은가.

‘세상에서 제일 행복한 사람의 미소가 저럴까?’

신기해하는 팽강휘와 달리 팽수원은 주의 깊게 도사를 관찰했다.

묘한 느낌을 받은 것이다.

‘만족감? 자신감? 행동거지 하나하나가 범상치 않군.’

왠지 모를 멋스러움이 주위 풍경과 무척 잘 어울렸다.

도사가 밝게 웃으며 인사했다.

“무량수불. 안녕하십니까?”

“안녕하시오.”

“무슨 일로 오셨습니까?”

“장문인을 뵈러 왔소이다.”

느닷없는 말에도 도사는 계속 미소를 지었다.

“그러시군요. 장문인께서는 지금 바쁘셔서 시간이 좀 걸릴 것 같습니다. 괜찮으신지요?”

명문정파의 수장이 바쁜 건 당연한 일이다.

하지만 팽수원은 기다리는 시간을 단축할 만한 신분이 있었다.

“물론이오. 나는 하북팽가의 팽수원이라 하오.”

청년 도사의 눈이 살짝 커졌다.

“무량수불. 위명이 자자한 팽가에서 오셨군요. 저는 정현이라 합니다. 사부님과 같은 배분이신데 말씀 낮추십시오.”

“그럼 그리하겠네. 허청 그 친구는 잘 있는가?”

“사백을 아십니까?”

“하하. 벗일세.”

“미처 몰랐습니다. 먼저 사백께 말씀드릴 테니 잠시만…….”

“사형!”

힘없는 외침과 함께 옷이 흠뻑 젖은 청년 도사가 비틀거리며 다가오고 있었다.

뭐 하다 온 것인지 그의 몰골은 무척이나 안쓰러웠다.

누가 봐도 동정심이 일어날 정도였는데 정현은 아니었나 보다.

못 본 척 외면하며 팽수원에게 쓸데없는 말을 열심히 했다.

“……하하. 잠시만 기다리시기엔 적적하시겠죠? 제가 말벗을 해드리겠습니다. 저희 곤륜을 소개해 드리자면…….”

“하아…….”

한숨을 쉰 청년 도사는 정현의 코앞에 얼굴을 들이밀었다.

“교대요.”

“음? 사제 왔나? 벌써 교대라고?”

“…….”

“허어. 안색이 안 좋군. 내가 계속 있을 테니 돌아가게나.”

“……지금 싸우자는 거요?”

“어허! 무슨 그런 말을! 걱정돼서 그러는 것 아닌가. 이 땡볕에 서서 손님들을 안내하는 건 무척 힘든 일이니 내가 사제 대신 하겠네.”

팽수원과 팽강휘가 하늘을 슬쩍 보니 짙은 구름이 가득했다.

게다가 산 전체가 운무로 휩싸인 지금, 땡볕이 웬 말인가?

아니나 다를까 사제라는 청년 도사의 이마에 핏줄이 튀어나왔다.

“유일한 휴식 시간을…… 진짜 해보자는 거군. 기다리시오, 내 막내에게 말해…….”

“어허허! 농이었네, 농! 어차피 손님들 방문을 알리러 들어가야 하니 사제도 수고하게나.”

“한시가 아까우니 빨리 수련에 참여하셔야 할 거요.”

“알겠네, 알겠어. 하아…….”

사제를 달랜 정현은 떨어지지 않는 발걸음을 억지로 떼며 안으로 사라졌다.

반대로 일주문을 지키게 된 청년 도사는 아까까지의 처참한 표정이 거짓이었다는 듯 싱글벙글 웃고 있었다.

그리고 예의 있게 인사까지 했다.

“무량수불. 정진이라 합니다. 안 좋은 모습을 보여 드려 죄송합니다.”

팽수원과 팽강휘가 마주 인사하며 가문과 이름을 밝혔다.

정진은 살짝 놀라면서도 아까의 정현처럼 계속 미소 지을 뿐이었다.

호기심이 솟은 팽강휘가 슬쩍 물었다.

“원래 곤륜 문인들은 이렇게 친절하십니까? 사람을 대함에 미소가 끊이질 않으시는군요.”

“네? 하하. 그렇게 보였다면 다행입니다.”

“실로 그래서 묻는 것입니다. 아까까지만 해도 무척 지친 얼굴이셨는데…….”

정진의 눈에 아픔의 빛이 떠올랐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그는 빙그레 웃으며 두 손을 모았다.

“무량수불. 제가 지금 있는 이곳이 바로 선계(仙界)입니다.”

팽강휘는 진심으로 감탄했다.

나이는 그와 비슷해 보이는데 진짜 도사 아닌가.

중원의 유명한 도가 문파 제자들을 여럿 만나봤건만 이런 이들은 없었다.

‘솔직히 도사라 하기도 뭐했지. 속인과 뭐가 다른지.’

팽강휘의 마음속에서 곤륜파에 대한 호감도가 대폭 상승했다.

그와 반대로 산전수전 다 겪은 평수원은 대충 감이 잡혔다.

‘말 그대로 이곳에 있는 것이 행복하다는 것 같군. 유일한 휴식 시간이라 했던가?’

정현이란 도사가 떠나며 지었던 표정, 그를 보고 빨리 가서 수련에 참여하라 했던 정진의 말을 떠올려 보면…….

‘음?’

갑자기 누군가 다가오는 게 느껴졌다.

아니, 다가온다기보다 무슨 신법이라도 펼치는 건지 몸이 쭉쭉 늘어나 순식간에 가까워졌다.

반가운 외침도 함께였다.

“수원! 자네가 왔는가!”

팽수원의 눈매가 살짝 휘었다.

그의 친우 허청의 목소리가 분명했다.

십오 년 전 중원에서 만나 의기투합했던 그를 이제야 보게 되다니.

반가운 마음에 대답하려던 팽수원의 얼굴이 묘하게 굳어졌다.

조금 전 정진이 왔을 때와 흡사한 모습이라 할까. 달려오는 허청의 몰골이 형편없었다.

하지만 얼굴만큼은 돌아가신 부모님을 뵌 것처럼 눈부시게 빛나고 있으니 도무지 알 수가 없는 노릇이었다.

“어이쿠! 이 친구. 그간 고생 많았나 보군. 왜 이리 살이 빠졌나.”

허청이 다짜고짜 얼싸안으며 하는 말에 팽수원이 대꾸했다.

“자네야말로 왜 이 모양인가. 뭐 하다 왔길래?”

“……하하. 별것 아니네. 어서 들어가세.”

허청은 팽수원, 팽강휘와 인사를 나누며 걸음을 옮겼다.

“바쁜 자네가 나를 보려고 왔을 리는 만무하고, 무슨 일인가?”

“허어. 이 친구 섭섭하기는. 다른 용무도 있지만 자네를 보고 싶어 내 직접 왔다네.”

“어이쿠. 내가 실언했군. 그래, 가주님과 어르신들은 잘 계시는가?”

“너무 잘 계셔서 탈이지.”

“역시 팽가야. 자네 조카의 헌앙한 모습을 보니 앞날도 걱정 없겠어.”

빈말이 아니었다.

팽강휘에게서 풍기는 기세는 나이와 어울리지 않게 뛰어났다.

“앞에서 너무 추켜세우지 말게나. 구룡사봉(九龍四鳳) 중 패룡(覇龍)이라 불리지만 아직 한참 멀었네.”

“오호! 후기지수(後起之秀) 중 제일이라는 구룡사봉의 일원이라! 약관을 갓 넘긴 나이에 대단하구만!”

“허어. 아니래도.”

팽수원은 오랜만에 만난 친우에게 슬그머니 조카를 자랑했다.

미덥지 않은 면도 있지만 무공 실력만큼은 진짜였다. 앞으로 팽가의 얼굴이 될 아이이니만큼 다른 이들에게 좋은 인상을 줘야 했다.

‘흐흐흐.’

덕분에 팽강휘는 기분이 아주 좋아졌다.

‘항상 까탈스럽던 숙부도 나를 인정하시는구나.’

올라가려는 입꼬리를 억지로 참는 그를 보며 팽수원은 내심 고개를 저었다.

‘이런. 괜한 말을 했군. 기를 죽여야 하는데…….’

이왕이면 또래가 그래주는 게 더 효과적일 터, 팽수원은 혹시나 싶어 허청에게 물었다.

“자네 아직 제자를 안 받았는가?”

“하하. 오래전에 받았지. 올해로 지학(志學)이 되었다네.”

“허어. 이 친구. 좀 데리고 놀러 오지 그랬나? 어쨌든 축하하네.”

“그래. 언제 한번 자네 집에 신세를 져야지. 고맙네.”

“수련은 잘 따라오나? 하긴, 자네 제자라면 당연히 영민하겠지.”

“하하. 내가 따라가기 바쁘다네.”

“그래, 그럴 만도…… 응?”

무심코 고개를 주억거리던 팽수원은 귀를 의심했다.

잘 따라오냐 물었더니 자기가 따라가기 힘들다?

그의 황당해하는 얼굴을 보며 허청이 대소를 터뜨렸다.

“하하하! 뭘 그리 놀라나?”

“……내가 제대로 들은 건가?”

“당연하지.”

“……대체 무슨 의미인가?”

허청이 걸음을 멈췄다.

그의 허리가 곤륜산처럼 꼿꼿이 서고 가슴은 청해호보다 넓게 펼쳐졌다.

“내 제자는 천재 중의 천재 정도가 아니라 고금제일(古今第一)천재라네.”

“…….”

“…….”

“아, 자네 조카가 용이라 했지? 내 제자는 진짜 용일세. 껄껄.”

팽수원도 팽강휘도 입만 뻐끔거렸다.

아니, 다른 그 누가 이 자리에 있다 해도 뭐라 말할 수 있겠는가.

유일하게 계속 말할 수 있는 허청이 제자 자랑을 이어나가려는 그때,

“오늘은 여기까지 하겠습니다!”

“우와아아아아아!”

청아한 소년의 목소리에 이어 곤륜을 뒤흔드는 함성이 울려 퍼졌다.

팽수원과 팽강휘가 놀라서 고개를 돌려보니 높은 담이 쳐진 곳이 보였다.

연무장인 듯싶었는데 그 담 위로 수많은 인영이 날아오르기 시작했다.

“하압! 운룡출해(雲龍出海)!”

“무량수불. 신룡선무(神龍旋霧)!”

“으라랏! 용유자휘(龍遊紫徽)!”

팽 씨 숙질은 자신들의 머리 위를 훨훨 넘어가는 노도사들을 황당한 눈빛으로 바라봤다.

곤륜파가 자랑하는 경공술, 운룡대팔식(雲龍大八式) 아닌가!

그것도 저렇게 필사적으로 펼치는 모습이라니!

끝이 아니었다.

대문이 열리며 중년 도사들이 쏟아져 나왔다.

그들은 노도사들처럼 무공 이름을 외칠 기력은 없는지 미친 듯이 발만 놀리고 있었다.

그야말로 필생의 공력을 담아서!

금안행운(金雁行雲), 비룡축전(飛龍逐電) 등, 역시 곤륜파를 대표하는 경신술들이었다!

“허어…….”

“이게 대체…….”

눈이 부실 정도로 대단한 절기들의 향연이 순식간에 끝났다.

팽 씨 숙질은 활짝 열린 문 안을 바라봤다.

그곳에는 젊은 도사들이 바닥에 쓰러져 꿈틀거리고 있었다.

“수, 숙부. 저기 토하고 있는 자, 아까 일주문에서 만났던 정현 도사 아닙니까?”

“맞다. 무슨 영문인지 모르겠구나. 이보게, 허청. 어찌 된 일인지 알려줄…… 응? 자네, 갑자기 왜 훌쩍 뒤로 뛰나? 무슨…… 커헉!”

“으악!”

어디에 숨어 있었던 것일까?

어떻게 이목을 속이고 있었을까?

“꺄아아아아!”

수많은 여자가 튀어나와 팽씨 숙질을 밀치며 뛰어갔다.

그 방향의 끝에는 문에서 나오고 있는 한 소년 도사가 있었다.

“사, 사람인가?”

“시, 신선?”

팽 씨들은 경악했다.

소년의 눈부시게 아름다운 외모에 짙은 운무가 어우러져 몽환적인 분위기를 자아내고 있었다.

“어머! 어머! 역시 오늘 같은 날이 대박이라니까!”

“누가 아니래! 매일 폭우가 내려서 운무가 끼었으면 얼마나 좋아!”

여자들은 달려든 기세가 무색하게 소년 도사와 일정 거리에서 멈춰 섰다.

“꺄아악! 나 좀 봐줘요!”

난입을 시도하는 이도 있었다.

“어딜 감히!”

하지만 ‘진옥룡수호단(眞玉龍守護團)이라 쓰인 천을 팔에 감은 여자들의 조직적인 움직임에 좌절해야 했다.

“제발 이러지 마라니까! 당신 같은 사람들 때문에 우리까지 욕먹잖아!”

“우리만 먹으면 다행이지. 진옥룡의 명성에 누를 끼치면 가만두지 않겠다!”

무심한 표정으로 그 광경을 지켜보던 소년 도사가 입을 열었다.

“누나들, 목에 뭐 걸렸어요?”

“아니요!”

“그런데 왜 자꾸 꺄악거려요?”

“옥룡님 때문에요!”

소년 도사가 한숨을 쉬자 여자들은 난리가 났다.

“정광 도사님! 이것 좀 드세요. 제가 밤새 만들었는데 입에 맞으실…….”

“흥! 소채 따위를 준비하다니. 맨날 풀만 드시는데 고기를 드려야지! 제가 마침 돼지를 잡아서…….”

“이것들이! 청정한 도문에서 뭐 하는 짓이야! 드리려면 나처럼 금원보를 준비해야지!”

정광은 고개를 절레절레 젓다가 사부 허청을 발견했다.

허청은 그를 가리키며 팽 씨 숙질에게 자랑스럽게 소개하던 참이었다.

“저 녀석이 바로 천재 중의 천재를 뛰어넘는 고금제일천재인 내 제자라네. 짧게 진옥룡(眞玉龍)이라 부르게나. 으하하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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