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화
너를 위해 준비했단다
무인이란 어떤 존재인가.
검 한 자루 달랑 들고 풍진강호(風塵江湖)를 질주한다.
채 피어나지도 못하고 목숨을 잃는 이가 대부분이나 절대 멈추지 않는다.
한마디로 낭만을 아는 자들이란 말이다.
곤륜파 역시 마찬가지였다.
비록 도사의 신분이지만 그들 또한 무림인. 어찌 낭만이 없으랴.
오랫동안 억눌려 왔던 그들의 본성이 정광으로 인해 깨어났다.
“멋진 건 좋은 거라고? 허허.”
“하하하. 도사라고 멋지면 안 될 이유는 없지요.”
“게다가 더 세다? 무량수불. 태상노군께서도 마다치 않으실 겁니다.”
부정적인 의견을 말하던 이들조차 웃음 섞인 소리를 내뱉자 기회를 노리던 운후가 거들었다.
“사내가 멋져 보이고 싶은 건 당연한 일 아닌가.”
누구보다 도사다운 운후가 멋을 논하다니.
한 노도사가 실소를 머금었다.
“허허. 사형께서 그런 말을 하실 줄 몰랐습니다.”
“왜? 나라고 사내가 아니겠나? 솔직히 말하지. 나는 본문의 선배들이 멋져 보여서 입문했다네. 자네들은 안 그런가?”
오지 중의 오지인 청해성에서도 끄트머리에 있는 곤륜파다.
만성적인 인재난에 허덕였으나 구파일방답게 제자를 함부로 뽑지는 않았다.
재능 있고 인성이 좋은 이들만 제자가 될 수 있다.
그것은 다른 문파도 마찬가지다.
그렇기에 이왕 들어갈 수 있다면 화려한 중원의 문파로 가는 이들이 많은 터, 굳이 곤륜에 입문하는 부류는 대부분 곤륜의 협의와 무공을 동경하는 자들이었다.
“멋이라…….”
그 무리의 우두머리인 장문인이 조용히 중얼거렸다.
“도사라고 멋지면 안 되냐고?”
좌중을 한 바퀴 둘러본 그는 정광을 바라봤다.
“나도 어린 시절엔 멋져 보이고 싶었다.”
장문인의 근엄한 얼굴에 옅은 미소가 걸렸다.
“솔직히 아직도 그런 마음이 남아 있지.”
그의 솔직한 말에 노도사들이 웅성거렸다.
“장문인께서 그런 말을 하시는 건 좀 그렇습니다.”
“허어. 외인이 들으면 비웃을까 걱정되오.”
장문인은 빙그레 웃었다.
“지금도 멋져 보이려고 무게 잡고 있소이다. 사형들, 사제들도 잘 아는 사실 아니오?”
노도사들은 장문인 운적의 과거를 떠올렸다.
그의 말이 맞았다.
그는 절대로 진중한 성격이 아니었거늘 지금은 누구보다 무거운 분위기를 내고 있었다.
언제부터였던가?
장문인이 되고부터?
아니었다.
그저 나이가 들며 그 나이에 맞게 변해갔다.
이제 보니 변한 게 아니고 변한 것처럼 보인 것일지도.
노도사들이 겸연쩍은 웃음을 지었다.
“헐헐. 오늘 크게 깨닫는군요. 저도 어렸던 시절과 별로 변한 게 없습니다. 아닌 척하고 있었을 뿐이에요.”
“낯이 뜨겁지만 나 역시 그렇네. 하하. 어째 헛산 것 같군그래.”
노도사들은 자신과 사형제들의 과거를 떠올리며 아련한 향수에 젖었다.
세속을 벗어나 도를 추구하는 그들이었지만 추억이란 버릴 수 없는 것이 아니던가.
지켜보던 정광은 감탄했다.
사손 앞에서 이리도 솔직한 모습을 보이다니, 정녕 도사다운 이들이었다.
곤륜은 역시 곤륜이구나.
이게 바로 명문정파의 본모습일까?
‘그럴 리가.’
인간의 본성은 그리 좋지 않다.
곤륜 도사들이 특별한 것이었다.
전생에 구파일방을 위선자들이라고 싸잡아 욕했던 과거가 조금, 아주 조오오금 미안해졌다.
정광이 그들을 둘러보며 흐뭇한 미소를 짓는데…….
향수에 젖어 있던 한 노도사가 갑자기 소매를 들어 눈물을 훔쳤다.
“안 좋은 기억이 났소. 진천마, 그 악적 때문에 사부님께서…… 흐흑.”
“아아. 그 대마두 때문에 비참하게 돌아가신 분들이 대체 몇이던가!”
“하늘도 무심하시지! 백수십 년이나 살다가 죽다니!”
“우리 곤륜이 이리 힘들어진 것도 모두 그자 때문이오!”
여기저기서 천마신교. 아니, 마교와 정광을 성토하는 말들이 쏟아져 나왔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흐뭇한 미소가 걸려 있던 정광의 얼굴이 썩어 들어갔다.
그 모습을 오해한 운후가 정광을 다독였다.
“내 너는 아무런 잘못이 없다 하지 않았더냐. 걱정 말거라.”
현생의 정광에게 하는 말이었지만 마치 전생의 그를 위로하는 것처럼 들렸다.
정광의 얼굴이 조금 펴졌다.
그래. 무슨 잘못을 했단 말인가.
멸문까지 안 가게 해준 것만으로도 감사해야 할 일이지.
하지만 운후의 혼잣말에 정광의 얼굴이 다시 구겨졌다.
“진천마…… 다행히 수명이 다해 죽었다 하나 그런 자가 또 태어난다면 어찌 막아야 할꼬.”
“…….”
다시 태어난 지 오래다.
어찌 막기는.
과거의 무공 경지까지 오르면 누구도 막을 수 없…….
“그래. 마침 원시천존께서 너를 보내주셨구나. 너라면 막을 수 있을 것이다.”
운후의 목소리에는 강한 울림이 있었다.
다른 이들도 동조하기 시작했다.
“만에 하나 그런 일이 생겨도 정광이라면 할 수 있지요!”
“멋지지만 오히려 더 강한 무공이라면 그럴 수 있습니다!”
“암. 그렇고말고!”
모두가 정광을 바라봤다.
그들의 눈빛에는 굳은 믿음이 담겨 있었다.
“정광아.”
장문인이 마무리를 지었다.
그의 목소리에는 태산 같은 기대감이 어려 있었다.
“너를 믿는다.”
* * *
며칠 전의 일을 떠올린 정광은 한숨을 내쉬었다.
그는 정신없는 나날을 보내고 있었다.
모두 그놈의 ‘멋진’ 곤륜 무공 때문이었다.
그를 둘러싼 장로들 중 하나가 물었다.
“정광아. 여기선 왜 이렇게 해야 하는 것이냐?”
“비룡출해의 초식은 말 그대로 바다에서 솟아오르는 기운을 담아야 하기에 힘차게 뻗어야…….”
“으음. 음양(陰陽)이 본디 하나이나 정(正)과 반(反)으로 나뉘기도 하니 바다가 음이요 용이 양이라, 서로를 밀어내듯이 강하게 펼쳐야 한다는 말이구나.”
“……네.”
“정광아. 이 자세가 맞는지 한번 봐다오.”
“맞긴 한데 오른발을 더 굽히고 부드럽게 하셔야…….”
“옳거니! 팔괘(八卦) 중 손(巽)의 이치가 녹아 있으니 더 굽히고 유연하게 들어가야 한단 말이렷다!”
“……네.”
“정광아. 이건 이렇게 해보는 건 어떨까?”
“그건 아니죠. 시범을 보여 드릴게요. 정반대로…… 이렇게 하는 겁니다.”
“아아! 목생화(木生火), 화생토(火生土), 토생금(土生金), 금생수(金生水), 수생목(水生木)이거늘 여기서는 상극으로 서로 제약하고 억제하는 것이구나. 목극토(木剋土), 토극수(土剋水), 수극화(水剋火), 화극금(火剋金), 금극목(金剋木)! 허허. 이제야 알겠다!”
“……네. 다행이네요.”
정광은 모든 것을 도가 사상에 맞춰 정리하는 노도사들에게 질려 버렸다.
그래, 이해는 한다.
그렇게 이론을 정립해야 꼬장꼬장한 도사들이 받아들이기 쉽겠지. 후세에 남기기도 좋고.
본능적으로 이래야 한다고 생각했던 것들을 체계적으로 정리할 수 있었으니 정광에게도 도움이 되는 일이었다.
여기까지는 좋은데.
정광아.
정광아.
정광아.
끝이 없었다.
머릿속에서 환청이 들릴 지경이었다.
곤륜에 제대로 된 무공을 돌려주려고 그가 자처한 일이긴 했다.
그래도 이건 아니지 않은가.
빨리 떠나기 위해 서둘러 진행하려 했었지만, 이렇게까지 고되게 할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
일수천혈, 또는 진천마 같은 무시무시한 별호로 불렸던 그의 입에서 약한 소리가 나올 정도였다.
“……오늘은 여기까지 하죠.”
“허어. 벌써?”
“이런. 한참 탄력을 받았는데.”
“하하. 우리 건강을 생각해서 하는 말이더냐? 걱정하지 말고 계속하자꾸나.”
늦게 배운 도둑질이 무섭다더니 늙어서 멋을 찾게 된 노도사들은 지칠 줄을 몰랐다.
오히려 뽀송뽀송했던 정광의 앳된 얼굴에 눈그늘이 내려앉을 정도였다.
이가 갈렸다.
이대로 가다간 천수조차 못 누리고 과로사할지도 몰랐다.
전생에서 본인이 저지른 짓이 있으니 노도사들을 두들겨 패긴 좀 그렇고, 문제의 근원인 놈들에게 살심이 솟았다.
천마신교…… 신교는 개뿔, 그냥 마교지. 어쨌든 그 새끼들, 싹 다 밀어버릴까?
아니다.
그러려면 아무리 정광이어도 많은 시간이 필요하다.
차라리 원래 계획대로 곤륜을 키워놓고 떠나는 게 낫다.
하지만 이런 식이면 피곤한데.
멋진 곤륜, 멋진 도사, 강하고 멋진 무공을 주장한 건 그였기에 설렁설렁 할 수도 없고…….
‘잠깐만…….’
언제부터 이렇게 남을 위했지?
받아낼 건 받아내야 하지 않나.
다음 날 아침, 정광은 퀭한 눈으로 노도사들에게 말했다.
“곰곰이 생각해 봤는데요.”
노도사들이 눈부신 속도로 붓을 들었다.
“그래. 어서 말해 보아라.”
“이번엔 무엇인고. 운룡십삼검(雲龍十三劍)? 상청인(上淸印)?”
“그보다 어제 네가 풀이했던 용형보(龍形步)의 구결이 좀 의문인데 물어봐도 되겠느냐?”
노안을 번뜩이며 달려드는 노도사들에게 정광은 힘주어 말했다.
“이러다간 제가 죽을 것 같네요.”
“……왜?”
정광은 어이가 없었다.
왜라니?
몰라?
진심으로?
가만히 보니 진짜 모르는 모양이다.
“저 지금 열세 살이에요.”
“그렇지.”
“한창 클 때잖아요.”
“당연하지.”
“근데 지금 보세요. 잠도 못 자고 무공만 파고 있네요. 이래서야 어디 제 명까지 살겠어요?”
그제야 노도사들은 정신을 차렸다.
“허어. 우리가 대체 무슨 짓을 한 건가.”
“그러게 말일세. 욕심에 취해서 어린 정광을 괴롭히다니.”
“부끄럽도다. 정녕 부끄럽도다.”
“정광아. 미안하다. 우리가 잘못했다.”
어린 정광을 혹사시킨 것은 부정할 수 없는 잘못이었다.
그래도 정상은 참작되는 게, 무인에게 무공이란 목숨보다 소중한 것이다.
수십 년 동안 익혀온 무공을 발전시킬 기회를 얻었는데 정신없이 달려들지 않을 무인이 어디 있겠는가.
도사의 신분이라 해도 무인이기에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그렇게 그들은 자신들을 위로하며 말을 이었다.
“그럼 앞으로 강론 시간을 반 시진쯤 줄일까?”
“잠자리가 불편한 것 같은데 더 좋은 방으로 옮겨주마.”
“몸이 허해 보이는구나. 그것…… 흠. 흠. 알지? 그것도 좀 하거라. 곤륜은 그리 꽉 막힌 곳이 아니니라.”
정광은 이를 지그시 물었다.
반 시진 줄여서 뭐가 바뀌는데?
잠자리? 곤륜의 방이야 거기서 거기 아닌가.
육식은 정 자 배 같이 어린 이들은 예전부터 몰래 해오던 거고.
그가 원하는 건 이런 것들이 아니었다.
정광은 당당히 말했다.
“영약 좀 주세요.”
“……뭐라?”
“영약이요. 건강도 건강이지만 내공이 약해서 못 펼치는 무공 천지네요. 이래서야 어느 세월에 무공들을 전부 손보겠어요?”
“…….”
노도사들은 서로를 바라봤다.
그리고 다시 정광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그중 한 명이 풀죽은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미안하구나.”
“……네?”
“본문에 영약은 없단다.”
“……네?”
정광은 어이가 없었다.
여기는 곤륜 아닌가?
구파일방 중 한 자리를 당당히 차지하는 곤륜.
좀…… 아니, 많이 검소하게 생활하긴 하지만 영약이 없다고?
이거 주기 싫어서 사기 치는 거 아니야?
아니면…….
“농담이시죠?”
“……정말 미안하다.”
노도사들의 눈은 정말 슬퍼 보였다.
그들은 힘없는 발걸음으로 떠나갔다.
정광은 왠지 모를 찝찝함을 느꼈다.
마치 가난한 집안의 철없는 꼬마가 불쌍한 할아비에게 무리한 요구를 한 것 같지 않은가.
“에라 모르겠다.”
정광은 벌렁 드러누웠다.
저절로 눈이 감겼다.
오랜만에 꿀잠을 잘 수 있을 것 같았다.
* * *
-정광아!
-정광아!
-정광아!
꿀잠은 개뿔.
꿈에서도 노도사들이 그를 부르는 소리가 들렸다.
“정광아!”
“정광아!”
“정광아!”
아니었다.
현실이었다.
겨우 눈을 뜨자 그를 둘러싸고 있는 노도사들이 보였다.
“하아…… 네. 시작하죠.”
자포자기의 심정으로 일어난 그를 한 노도사가 들쳐 메었다.
“그래! 시작하자!”
“네?”
노도사들은 곤륜 일절 운해비영(雲海飛影)을 펼쳐 순식간에 삼청전(三清殿)에 도착했다.
그곳에는 수많은 노도사가 결연한 표정으로 기다리고 있었다.
“……뭐 하시는 거예요?”
정광이 황당한 심정을 감추지 못하고 물으니 운후가 대답했다.
“우리가 너무 무심했구나.”
“……네?”
“네게 큰 짐을 지워놓고 그저 얻을 생각만 하고 있었다.”
정광은 당황했다.
맞는 말이긴 한데 분위기가 너무 비장하지 않은가.
운후가 무겁게 말을 이었다.
“너를 위해 준비했단다.”
“……네?”
“영약보다 나을 것이니 너무 침울해하지 말거라.”
“……네?”
운후가 장문인을 바라봤다.
장문인이 고개를 끄덕였다.
“시작하십시오.”
운후가 정광을 바로 앉히더니 가부좌를 틀게 했다.
그리고 한 자씩 힘주어 말했다.
“정신을 똑바로 차려라. 절대로 입을 열거나 말을 해선 안 된다.”
서, 설마 이거…….
그건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