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곤륜마협-3화 (3/569)

3화

화려해도 잘 때릴 수 있다

정광으로서는 당연한 일이었다.

만류귀종(萬流歸宗)이라, 모든 흐름은 하나로 귀결되는 법.

곤륜 무공이 마공과 차이가 있다고는 하나 어차피 무공 아닌가.

이미 걸었던 길을 다시 가는 건데 호들갑 떨기는.

살기 짙은 마공과 달리 곤륜 무공은 멋스러워서 좋았다. 익히는 재미도 쏠쏠했고.

물론 다 좋은 건 아니었다.

제대로 팰 줄만 알면 되지, 인의예지신엄용(仁義禮智信嚴勇)이 뭐가 어째?

뭔가 있어 보이려고 배배 꼰 구결은 또 왜 그리도 많은지.

진의만 파악하고 걸러 들으니까 참을 만하긴 했다.

하지만.

‘천장지구천지소이능장차구자이기불자생고능장생(天長地久天地所以能長且久者以其不自生故能長生)…….’

도사로서 의무적으로 배워야 하는 도경 한 구절만 떠올려도 머리가 지끈거렸다.

역시 떠나야 하는 팔자다.

그래서 비전 내공심법을 빨리 가르쳐 달라고 한 건데.

“아아. 원시천존이시여.”

운후는 물기 어린 눈으로 엉뚱한 말을 중얼거렸다.

“정광을 보내주셔서 감사합니다.”

구파일방의 일원이지만 소림, 무당 등에 비해 많이 처진다고 평가받는 곤륜이다.

그런 곤륜에 신룡이 나타났다.

천하제일인!

이런 아이가 천하제일인이 안 되면 누가 되겠는가!

진인(眞人)이라 불리는 운후였지만 사문의 영광이 눈앞에 어른거리자 흥분을 감출 수가 없었다.

심지어 몸까지 부르르 떨렸다.

“곤륜이…… 대곤륜이…….”

정광은 운후를 보며 속으로 혀를 찼다.

쯧쯧. 풍을 맞았나?

나이도 얼마 안 먹고 덕도 있는 양반이 어쩌다가…… 어?

정광은 흠칫했다.

이건 말로만 듣던 동정심 아닌가.

곤륜의 가르침에 감화된 것일까.

제발 단칼에 죽여달라고 빌던 놈들을 삼 일 밤낮으로 자근자근 밟아주던 그로선 장족의 발전이었다.

뭐 그건 그거고.

쓸데없는 동정심이었나 보다.

자세히 보니 운후의 광대가 승천하고 있었다.

누가 봐도 좋아 죽을 것 같은 표정 아닌가.

“……사조님?”

“아아. 이런 날이 올 줄이야…….”

“사조님!”

“아! 그래! 왜 그러느냐?”

“상청무상신공이요.”

곤륜의 비전 절기를 과자 하나 달라는 것처럼 말하다니.

경을 칠 일이지만 운후의 반응은 달랐다.

“그랬지! 잠시만 기다리거라!”

그는 내공을 상실한 사람답지 않게 바람처럼 사라졌다.

그가 찾아간 이는 장문인이었다.

“장로들에게 긴히 할 말이 있소.”

“사형. 무슨 일로 그러십니까?”

“본문에 경사가 났소이다. 모두 모이면 말하겠소.”

노도사들이 모였다.

운후가 애써 담담한 표정을 지으며 선언했다.

“정광이 소청기공을 깨우치다 못해 태청을 이루었네.”

“…….”

아무도 대답하지 않았다.

그게 가당키나 한 말인가.

운후는 진인답게 이해해 줬다.

“이럴 게 아니라 가서 직접 확인하게나.”

노도사들이 우르르 몰려갔다.

그들은 정광을 둘러싸고 날카로운 눈빛으로 관찰했다.

난데없이 구경거리가 된 상황.

정광이 떨떠름한 얼굴로 운기를 하자…….

“무량수불!”

“아아! 태상노군이시어!”

“정말로 태청이 아닌가!”

난리가 났다.

“태청기공을 홀로 익히다니! 옥심귀일공을 전수해야겠군요!”

“정광의 말 못 들었나? 깔끔하게 한 번에 가도록 상청무상신공을 가르치세!”

반대하는 이도 있었다.

“모든 이가 좋아하진 않을 것 같습니다만.”

명문정파요 세속을 벗어난 도인들이라 하나 어차피 인간이다. 시기와 질투가 있을 수밖에 없을 터.

장문인이 정리했다.

“정광의 경우는 다르오. 그렇게 합시다.”

장로급이나 되어야 익히게 되는 상청무상신공이다.

그것이 정광에게 전수됐다.

장문인의 말이 맞았다.

처음에는 이런저런 잡음이 나왔으나 정광의 놀라운 성취에 쥐 죽은 듯이 사라져 버렸다.

압도적인 재능 때문에 모든 부정적인 반응이 사그라든 것이다.

내공에서만 그런 것이 아니었다.

거의 모든 문파는 입문 제자에게 권법부터 가르친다. 그럼으로써 팔다리를 움직여 몸을 단련하고 쓰는 법을 익히게 한다.

곤륜 역시 마찬가지였다. 제일 기본인 사로권(四路拳)을 통해 사방으로 나아가고 물러나며 공수의 기본 원리를 깨우치게 한다.

말이 깨우친다지 그 개념을 몸에 입히는 것인데 정광은 진짜로 깨우쳐 버렸다.

텅.

작은 발이 진각을 밟는다.

휭.

고사리 같은 정권이 허공의 일점을 찌른다.

스윽. 사악.

짧은 두 다리가 전후좌우로 움직이며 안정된 보법을 밟는다.

“…….”

“…….”

운후와 허청은 지켜보기만 할 뿐 다른 말을 할 수 없었다.

정광도 할 말이 없었다.

너무 쉬웠으니까.

하지만 침묵이 길어지자 참다못해 입을 열었다.

“사조님. 사부님. 끝났는데요.”

두 사람은 그저 고개를 주억거릴 뿐이었다.

“다음은 뭐예요?”

다음이라니? 기본이 얼마나 중요한데 벌써 다음 단계를 얘기한단 말인가?

불호령이 떨어질 일이었지만 완벽히 해낸 정광에겐 그럴 수 없었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그의 경악스러운 재능은 모든 무공에 통용된다는 사실이 드러났다.

권법, 장법, 검법, 보법, 경신술 등 무엇 하나 그 오의(奧義)를 놓치는 법이 없었다.

운후의 머릿속에 머지않은 미래가 그려졌다.

‘이 아이는 용이 될 것이다.’

아득히 오래전 개파조사(開派祖師)께서 도를 얻으셨을 때 곤륜산에 한 마리 용이 날았다고 한다.

그의 생각에 정광은 그 용이 될 수 있는 아이였다.

* * *

세월이 흘렀다.

열세 살이 된 정광은 귀여운 아이가 아니라 아름다운 소년이 되어 있었다.

곤륜을 드나드는 사람들은 하나같이 이렇게 말했다.

‘곤륜산에 옥룡이 있다.’

산을 오르는 사람들이 더 많아졌다. 청해성은 라마교가 성행하는 지역이었는데 그 신도들도 조금씩 올 정도였다.

“꺄아아! 정광 도사님!”

“이것 좀 드시어요! 열심히 만들어왔답니다!”

“날이 추워서 담비 털옷을 준비했습니다! 이걸 입으시지요!”

미소년 도사 정광은 언제나 그랬듯 짧게 답했다.

“무량수불. 고마워요.”

환호성이 곤륜을 울렸다.

“꺄아아아아아!”

도사들이 싱글벙글한 얼굴로 그 모습을 바라봤다.

곤륜은 정광 덕분에 살림살이가 점점 나아지고 있었다.

그만큼 정광도 하루가 다르게 커갔다.

몸은 물론 무공 역시 그랬다.

그래서 알게 됐다.

곤륜 무공 이거. 좀 이상하다.

내공심법이나 초식에 담긴 진의를 들여다보면 이런 식으로 펼치는 게 아닌데. 더 화려하고 우아해야 하는데 왜 이렇게 변한 걸까?

고민하는 그의 귀에 사숙들의 대화가 들어왔다.

“사형. 마교가 잠잠해서 다행이긴 한데 걱정이 되는군요. 오히려 더 불안하지 않습니까?”

“자네도 그런가? 나도 그렇다네.”

“언제 또 발호할지 모르니 가끔 섬찟합니다.”

“그래도 진천마(眞天魔)가 죽었으니 한동안은 조용하지 않겠나?”

“그렇긴 하군요. 만악의 근원이라는 그자가 없으니 이제야 좀 살 만한 세상이 온 것 같습니다.”

“휴우. 그가 소교주로 있을 때 본문을 침공한 기록을 보면 치가 떨리네. 쓰러지신 분들을 생각하면 눈물이 앞을 가려.”

“그러게나 말입니다.”

두 도사는 정말로 눈물을 글썽거렸다.

지켜보던 정광은 황당했다.

만악의 근원?

내가?

미친 듯이 날뛰는 애들 단속하느라 허리가 휘었었는데 대체 무슨 개소리를…….

“아.”

수하들이 곤륜을 치는 걸 허락해 달라며 징징대던 기억이 떠올랐다.

‘소교주님! 곤륜 말코 도사 놈들, 손 좀 봐줘야겠습니다!’

‘왜?’

‘놔뒀더니 너무 커서요.’

‘상대도 안 되는데 뭐 하러.’

‘본교의 위엄도 떨칠 겸, 좀 밟아줘야 하지 않겠습니까.’

‘영감한테 말해.’

‘교주님은 소교주님한테 물으시라던데요?’

모든 걸 그에게 떠미는 아비 때문에 조금 짜증이 났었다.

귀찮아서 그러라고 했었던가.

그래도 수하들이 곤륜을 잡아먹고 기세등등해 할까 봐 적정선에서 멈추게 했다.

그래.

그거면 됐잖아.

그런데 무슨 만악의 근원씩이나…….

“백 년 동안 일곱 번이나 쳐들어오다니! 피에 굶주린 살인귀들 아닙니까.”

“후우우. 마교와의 최전선에 있는 본문으로선 어쩔 수 없는 일 아니겠나.”

정광은 뒤통수를 벅벅 긁었다.

일곱 번이나 그랬던가?

미친놈들. 적당히 좀 하지.

시끄럽다고 그냥 다 두들겨 팰 걸 그랬다.

반항하면 더 패줬을 텐데.

덤비려면 덤비라지.

내가 바로…….

“만악의 근원 진천마 때문에 근 백 년간 본문 무공에 살기가 담기게 됐다더군.”

“휴우. 그럴 수밖에요. 실전적이고 효율적인 면을 살려야 했을 겁니다.”

“도문답지 않은 무공이라 평하는 자도 있으니 참 안타까운 일일세.”

“허어. 마교 놈들과 부대껴 본 적도 없는 이들이 그리 말하면 안 되지요.”

정광은 뒤통수를 긁던 손으로 목을 긁기 시작했다.

무공이 이 꼴로 변한 것도 그의 탓이란다.

“너무 상심하지 말게. 그래도 곤륜은 곤륜 아니던가.”

“하하하. 물론입니다. 곤륜은 높고 넓어 모든 것을 포용하니 뭘 걱정하겠습니까?”

껄껄 웃던 사숙이 옆에 있던 정광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그래서 정광도 곤륜에 오게 된 것일 겁니다.”

다른 사숙도 거들었다.

“하하. 정광아. 우리는 너를 믿고, 네 사형들을 믿는단다.”

덕담이 쏟아졌다.

“너는 진천마 같은 악적을 처단하는 협객이 될 것이다.”

“하하. 뿐입니까? 정광이라면 세상을 구할지도 모르지요.”

진천마보고 자신을 처단하는 협객이 되란다. 세상까지 구하고.

당사자는 그럴 의지가 전혀 없었다. 그저 빨리 중원으로 나가서 재밌게 놀 생각뿐이었다.

분명 그랬는데.

좀 찜찜한 건 어쩔 수 없는 일, 정광은 서고에 들어가 무공 비급의 주석들을 살펴보았다.

그의 배분으로는 기초 무공만 훑어볼 수 있었는데 아까 도사들이 했던 말들은 사실이었다.

비급에 적힌 주석들을 보니 근 백 년 동안 무공 해석이 미묘하게 바뀌어 있었다.

그가 천마신교의 소교주 자리에 있었을 때와 아주 딱 맞아떨어졌다.

“환장하겠네.”

머릿속 생각이 육성으로 튀어나왔다.

그만큼 곤륜이 답답했다.

간결하고 투박하게 다듬는다고 실전에서 더 강해지는 게 아니거늘 이 무슨 미련한 짓이란 말인가.

그냥 넘어가려니 곤륜은 그를 거두어주고 길러준 사문이었다.

정광은 모두의 기대와 사랑을 받았다.

정 자 배의 사형들은 시기하기엔 너무 빠르게 커가는 그에게 자신들을 투영하며 응원하고 있었다.

허 자 배 역시 마찬가지였다. 곤륜에서 막내인 정광을 아들처럼 생각했기에 모든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

마지막으로 운 자 배의 경우에는 고리타분한 잔소리를 하지만 정광을 끔찍이 아끼다 못해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기세였다.

그들을 떠올리니 한숨이 나왔다.

성품이 선하지만 앞뒤가 꽉 막힌 도사들이다.

너희들의 무공이 잘못됐다고 어찌 알려줘야 하나.

답은 하나였다.

전생에서도 그랬듯이 몸으로 알려줄 수밖에.

화려하고 우아한 초식으로 실전적인 초식을 제압해 주면 될 것이다.

“잠깐.”

사형들과의 대련에서 그랬다간 자만심에 젖었느니 예의가 없느니 소리를 듣기 딱 좋은데.

그럼 사숙들과의 대련에서?

더 바보짓이다.

기사멸조의 죄가 어쨌느니 난리가 날 게 뻔했다.

그런데 정광은 원래 그런 걸 따지는 성격이 아니었다.

“아, 몰라.”

그나마 만만한 쪽부터 해치워 버리기로 했다.

“대사형!”

듬직한 성격과 성실함으로 신망을 받는 정 자 배의 대사형 정우였다.

“오! 막내 왔구나. 무슨 일이냐?”

“대련 부탁드려요.”

“하하. 좋아! 얼마나 늘었는지 한 번 볼까?”

잠시 뒤. 정우는 입을 떡 벌렸다.

대련을 시작한 지 얼마 되지도 않아 배에 일격을 맞은 것이다.

귀여운 막내 사제였는지라 방심했고 내공 없이 초식만으로 상대했다지만…….

정광은 팔다리가 짧아 권법을 제대로 펼치기도 힘든 열세 살 아이 아닌가.

“하아. 하하하.”

너무 어이가 없다 보니 헛웃음이 나왔다.

“너 이 녀석. 정말 대단하구나.”

“뭘요.”

“헌데 초식을 너무 화려하게 펼치는구나. 사백이나 사백조께서 꾸중하시지 않으셨느냐?”

“이런 식으로 한 건 처음이에요.”

“역시 그렇군. 훌륭했지만 그래선 안 된다. 어르신들께 크게 경을 치게 될게야.”

“사형을 때렸는데요?”

“……음. 그건 그렇다만.”

“그럼 원래대로 해볼게요.”

정광은 화려했던 아까와는 달리 간결하고 투박하게 변형된 초식을 펼쳤다.

현재 곤륜의 초식이었다.

“그렇지! 바로 그거다!”

정우가 정광을 칭찬하며 어렵지 않게 막아냈다.

“대사형. 쉽게 막으시잖아요.”

“하하. 그거야…… 어?”

“다시 아까처럼 해볼게요.”

정우는 십초도 안 되어 다시 일격을 맞았다.

“이, 이건 대체…….”

정광은 어이없어하는 정우에게 빙긋 웃어 보였다.

“거봐요. 화려해도 잘 때릴 수 있잖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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