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화
그냥 되는데요
무공을 빨리 익혀서 여길 떠야 하는데…….
일단 뛰기라도 가능해져야 뭐라도 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지금의 정광은 무림 고수는커녕 젊은 여자들의 품에서도 벗어날 수 없는 신세였다.
“까아아! 어린 도사님!”
“어머! 너무 귀여워!”
곤륜을 방문한 여도우(女道友)들이 정광을 껴안고 난리를 쳤다.
놀랄 정도로 귀여운 얼굴. 그 작은 몸에 맞춰 입은 검소한 도복.
세상 어디에 이런 조합이 있을쏘냐.
그의 인기는 드높은 곤륜을 넘다 못해 하늘을 찌를 기세였다.
“꼬마 도사님. 도호가 뭐예요?”
“……줭광.”
“꺄아! 깨물어주고 싶어!”
진짜로 살짝 깨무는 여자도 있었다.
안 아팠다.
안 아프다 못해 기분이 좋았다.
이상한 분야에 눈을 뜬 건 아니었다.
단지 새로웠다.
과거 피의 길을 걸었으나 여자를 모르진 않았다. 아니, 오히려 수많은 여자가 그를 경배했다.
하지만 그건 모두 그의 직위 때문. 이렇게 그라는 존재를 순수하게 좋아해 주는 여자는 없었다.
환생하니 이런 세상이 펼쳐지는구나.
절로 원시천존을 중얼거리게 될 판 아닌가.
“언니. 이제 그만합시다. 그래도 도사님이시잖아요.”
“어휴. 그렇지. 죄송해요, 도사님. 또 봐요.”
여자들이 떠나면 공허해졌다. 이게 상실감이란 걸까?
모든 걸 가지고 있었고 없으면 빼앗던 전생에서는 느끼지 못했던 감정이다.
그러고 보니 영감이 죽었을 때 비슷했던 것 같기도 하고.
“……엉?”
정광은 깨달았다.
그의 전생은 생이라 부를 만한 것이 아니었음을.
아비를 지키기 위해 무공을 익히고 싸우고 죽인 게 전부. 그 자신을 위한 건 하나도 없지 않은가!
이렇게 억울할 수가.
아쉬웠던 사람 냄새는 질리도록 맡았다. 그래서 떠날 생각만 하고 있었는데 그 이유가 잘못됐다.
이제는 즐길 차례였다.
즐기기 위해서 떠나는 것이다.
세상에 나가서 무엇을 할 것인지 구체적인 목표를 정하기로 했다.
그런데.
안 해본 게 너무 많았다.
그렇다면?
이것저것 다 해보는 거다!
정광의 표정이 진지해졌다.
먼저 무공을 익혀야 한다.
금방 고수가 될 자신이 있었다.
왜?
천마신교의 교주였으니까.
그의 아비만 빼면 대대로 이어지는 천하제일고수의 직책 아닌가.
중원 무림 놈들은 인정 안 했지만 그럴수록 초라해지는 건 녀석들이다.
정광보다 약한 전대 교주들도 중원 무림을 갖고 놀지 않았었나.
뛰지 못하니 우선 마보라도?
이 몸으론 그것도 무리다.
운기조식부터 해야 할 터.
최대한으로 빠른 성취를 보려면 살혼심법(殺魂心法)으로 터를 닦고 아수라마혈공(阿修羅魔血功)으로 기둥을 세운 뒤 천마진천신공(天魔振天神功)을 씌워서…….
그때 그의 눈에 곤륜 도사들이 무공을 펼치는 모습이 들어왔다.
“하압! 일획절운!”
고고한 문사가 붓을 휘둘러 구름을 가르는 듯한 우아한 검초.
“후웁. 운룡승천!”
구름 속의 용이 하늘 높이 솟아오르는 것처럼 보이는 신비한 신법.
형편없는 실력이지만 무공만큼은 멋스럽다.
정광의 작은 입이 벌어졌다.
“아…….”
바로 이거였다.
전생처럼 일수천혈(一手千血)이니 진천마(眞天魔)니 피 냄새 풀풀 풍기는 별호로 불리긴 싫다.
저런 자세 나오는 무공으로 강호를 주유하는 게 바로 사내의 멋 아니겠는가.
운후가 했던 말이 떠올랐다.
‘태상노군의 뜻이니라. 원래부터 이리될 일이었던 게지.’
그래. 그래서 곤륜이었던 거다.
구파일방 중 가장 신비로운 문파 곤륜!
깡촌에 처박혀 있어서 그런 것이지만 어쨌든 세간의 인식은 그랬다.
중원에 나가서 천마신교의 무공을 썼다간 바로 무림공적(武林共敵)으로 찍힐 터. 벌떼처럼 달려드는 정파 놈들을 평생토록 지겹게 죽여야 할 것이다.
하지만 곤륜 무공이라면 얘기가 다르다.
이왕 하는 거, 웅장한 곤륜산의 정기와 신비로운 구름을 빼닮은 무공을 배우는 거다.
그리고 중원행!
곤륜 제자라는 것만으로도 화제가 될 것이다.
이 얼마나 희소성 있으면서도 자세가 나오는 일이냔 말이다.
무공을 수련하고 싶은 마음이 더 강해졌다.
이곳을 벗어나기 위해서뿐만 아니라 그저 무공 그 자체를 펼치고 싶은 마음이었다.
‘어라?’
이런 날이 올 줄이야.
전생에서는 교주의 아들이었기에 배워야 했다.
하다 보니 엄청난 재능이 있어서 계속하게 됐다.
귀찮아질 때쯤엔 아버지를 지키기 위해 계속해야 했다.
정광은 자신이 무공을 싫어한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아니었다.
머리로는 싫다고 생각했지만 몸은 좋아했던 것이다.
전생과 다른 점이 있다면 귀에 착착 감기는 이름, 멋진 자세가 나오는 명문정파의 무공을 배우려 한다는 것뿐.
되도록 빨리 시작해야 하는데.
“허어.”
골똘히 생각에 잠긴 그를 도사들이 안쓰럽게 바라봤다.
여도우들에게 시달려서 혼이 빠진 것으로 오해할 수밖에 없었다.
“네가 정말 고생이 많구나.”
허청이 정광을 어루만지며 쓴웃음을 짓는데.
“……사붕.”
“……!”
기적처럼 정광의 말문이 트였다.
“내공 배우공 시퍼영.”
곤륜이 뒤집혔다.
“이런 기사가!”
“벌써 이렇게 말을!”
“흐음. 보통 이때쯤 말하는 것 아닌가?”
“어? 그럴지도.”
숫총각 집단인 곤륜이 언제 아이를 키워봤으랴.
그래서 여도우들에게 물어봤다.
당연히 무지하다 못해 무식하다고 돌려 까였다.
“어머머. 어떻게 그런 말을.”
“이리 작은 걸 보면 돌도 안 된 것 아닙니까? 이 나이에 긴 문장을 정확히 발음하는 건 기적이랍니다.”
“어휴. 이래서 꼬마 도사님이 제대로 클 수 있을까?”
“우리가 자주 와서 도웁시다!”
곤륜파는 변방 중의 변방인 청해성에서도 끝자락에 자리해 극심한 인력난과 재정난을 겪을 수밖에 없었다.
그런 곤륜파에 갑자기 사람이 모이기 시작했다.
여자는 여자를 부르고 남자가 그 뒤를 따랐다.
험난한 곤륜산을 오르내릴 정도로 독실한 믿음을 가진 도우(道友)는 얼마 없거늘, 점점 불어난 것이다.
곤륜파에 활기가 돌았다.
사람이 오니 돈이 모이고 돈이 모이자 생활이 나아졌다.
근엄한 장문인조차 입가에 미소가 감돌 정도였다.
정광은 벌써 누구보다 많이 밥값을 하고 있었다.
“허허. 원시천존. 네가 본문의 복이로다.”
보통 아이라면 우쭐했겠지만 정광은 아니었다.
여자들로부터 관심받는 것도 처음 얼마 동안만 신선했을 뿐이다.
그의 머릿속엔 무공뿐이었다.
하지만 사부인 허청은 가르칠 생각이 없었다.
“사붕. 사붕.”
“아직 안 된다.”
“사붕. 배우공 시퍼영.”
“너무 어려서 안 된다니까. 지금은 많이 먹고 푹 자야 할 때야.”
지당한 말이긴 한데 하라는 대로 할 수야 있나.
정광은 주변을 관찰했다.
검술을 수련하는 이, 권법을 익히는 이, 경공술을 펼치는 이의 모든 동작이 머릿속에 담겼다.
하지만 내공심법 없이 펼치는 초식은 아무런 가치가 없는 법.
정광은 항상 함께 있는 허청의 호흡을 흉내 냈다.
들이마시고 내쉬고.
횟수와 운율에 차이가 있을 뿐 기본 토납(吐納)은 이 두 가지 행동으로 이루어진다.
이것이 더 복잡해져서 효율을 높이는 게 내공심법이었다.
우선은 기본이면 충분했다.
단전을 발견하고 기를 느끼는 게 첫걸음이었으니까.
정광은 바로 단전을 찾았다.
산속에 홀로 방치되어 위험한 상태였던 그를 곤륜의 어른들이 내공을 써서 치유했었기에 그의 밭은 시작부터 넓고 두터웠다.
그 밭에 하나의 씨앗이 뿌려졌다. 그가 발견한 기 한 톨이었다.
장마가 끝나니 한 톨이 두 톨로.
낙엽이 지자 두 톨이 네 톨로 불어났다.
눈이 내린 뒤에는 여덟 톨이.
꽃봉오리가 피자 열여섯 톨이 되는 건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그렇게 세월이 흘렀다.
다섯 살이 되었을 때 정광의 단전은 풍작을 맞이했다.
고급 내공심법이 아닌 기본 토납만으로 이루어낸 성과였다.
이토록 기초에 충실한 이는 세상에 없을 터, 정광도 만족했다.
이때쯤 그는 아주 또렷한 발음으로 자기 생각을 자유자재로 말하고 있었다.
주변 사람들도 어느덧 익숙해져 그것을 당연하게 받아들이고 있었다.
‘슬슬 가르칠 때가 됐구나.’
때가 왔음을 느낀 허청은 정광을 앞에 앉히고 무겁게 말했다.
“무공 수련을 시작하겠다. 내공심법의 기틀부터 닦자꾸나.”
준비된 남자 정광은 고사리손을 불끈 쥐었다.
드디어 시작인가.
좋아. 허접한 건 건너뛰자.
그러자면 최소한…….
“태청기공(太淸氣功)인가요?”
“무어라? 하하하. 기본 토납부터 시작해야지. 바르게 숨 쉬는 법을 배우는 게 우선이다.”
“그건 이미 할 줄 아는데.”
“……뭐?”
“단전을 좀 넓히고 진기도 적당히 쌓았어요.”
“말도 안 되는…… 어디 보자.”
진기를 불어넣어 제자의 단전을 확인한 허청은 뒤로 넘어갈 뻔했다.
이리도 튼실한 기초라니!
이렇게 두터운 양이라니!
아무리 많은 진기가 쌓인다 해도 남김없이 수용할 수 있는 거대한 그릇! 게다가 벌써 많이 쌓인 상태 아닌가!
“어, 어떻게…….”
“사부님이 호흡하시는 걸 보고 흉내 냈죠.”
허청을 따라 해서 곤륜의 호흡을 깨달은 정광이었다.
“그래서 이 수준에 올랐다고? 말도 안 된다!”
“되는데요.”
“…….”
허청은 반박할 수 없었다.
직접 확인한 일 아닌가?
한참을 혼란스러워하던 그는 결국 깨달았다. 그리고 아까의 정광처럼 주먹을 불끈 쥐었다.
‘내 제자가 천재다!’
애초에 똘똘하고 말문도 빨리 트인 제자였기에 자랑스러웠다.
그래도 이런 천재일 줄이야! 그것도 그냥 천재가 아니고 진짜 천재 중의 천재!
사부로서의 의무를 다해야 했다.
바로 자랑이다!
온 곤륜을 뛰어다니며 자랑했다!
“사제! 정광은 진짜 천재라네!”
“사질! 네 사제가 진짜 천재다!”
다들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이런 생각을 하면서.
‘이런 팔불출을 봤나.’
허청은 바보가 아니어서 그들의 속마음을 눈치챘다.
하지만 화나지는 않았다.
그의 수양은 그 정도로 낮지 않았…… 아니, 그의 제자는 진짜 천재였으니까!
그는 정광을 안고 장로전으로 달음박질쳤다.
“사부님! 사숙님!”
“그래, 무슨 일이냐?”
“놀라지 마십시오!”
“허어. 무슨 말을 하려고?”
“제 제자가 천재입니다!”
“……그, 그래. 영특한 아이지.”
노도사들은 허허거리며 고개를 주억거렸다.
무릇 자기 새끼는 다 예뻐 보이는 법, 제자 자랑을 하겠다는데 그걸 어찌 막겠는가?
진중한 허청이지만 제자를 사랑해서 눈이 머는 건 똑같구나 싶었다.
“정광은 관례대로 가르쳐선 안 됩니다. 천재에게 맞는 가르침을 주어야 합니다.”
“……그래. 그래. 그러자꾸나.”
“소질, 농을 하는 것이 아니옵니다.”
“허허. 알고 있다.”
어색하게 웃는 그들을 바라보던 허청이 빙긋 웃었다.
그 웃음은 그야말로 자신감 그 자체였다.
“증명해 드리지요.”
당연히 증명은 그가 아닌 정광의 단전이 했다.
기를 흘려 넣은 노도사들이 두 눈을 부릅떴다.
단전의 광활함과 튼튼함이 상식 밖의 것 아닌가! 그 속에 담긴 내공의 양은 또 어떻고!
“무, 무량수불…….”
“허어. 어찌 이런 일이.”
“태상노군께서 곤륜을 굽어살피시는구나!”
노도사들은 고심했다.
겨우 다섯 살 난 아이에게 비전 내공심법을 전수하는 게 옳은 일인지. 아무리 천재라 해도 위험한 건 아닐지.
운후가 나서서 정리했다.
“내가 허청과 함께 돌보지.”
“사형께서 말씀입니까?”
“허허. 단전이 파괴되었지만 기를 느끼고 가르칠 순 있다네.”
“그런 뜻으로 여쭌 게 아닌 걸 아시잖습니까.”
결국 노도사들은 동의했다.
정광에게는 태청기공(太淸氣功)이 아닌 소청기공(小淸氣功)을 전수하기로 결정되었다.
아무리 천재라 해도 정도가 있는 법, 차근차근 단계를 밟아 내실을 다져야 하기 때문이다.
운후와 허청은 열정적으로 지도했다.
그리고 정광은 그 열정 이상으로 모든 것을 흡수해갔다.
“허허허.”
너털웃음을 짓는 운후에게 허청이 물었다.
“왜 그러십니까, 사부님?”
“네 제자 때문에 그런다.”
“정광이요? 혹 무슨 잘못이라도…….”
“잘못이라. 내 밑천을 매일 털어가는 게 잘못이라면 잘못이겠지.”
“하하하. 그런 말씀이셨군요.”
운후와 허청이 마주 보며 껄껄 웃었다.
사손이자 제자인 정광의 성장이 너무나 기꺼웠다.
그 어린 나이에 말도 안 되는 성취를 보이다니, 이런 기특한 아이가 또 어디 있겠나.
그런데 딱 삼 년 뒤였다.
정광이 고개를 갸우뚱하더니 운후에게 말했다.
“사조님.”
“허허. 그래, 말하거라.”
“소청은 다 이루었는데 궁금한 게 있어서요.”
“하하. 그래. 소청을…… 뭐? 소청을 이루었다고?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를…….”
“되는데요.”
“……한번 해보거라.”
운후가 정광의 명문혈에 손을 댔다.
정광이 운기를 시작하자 그의 눈이 점점 커졌다.
‘소주천도 아니고 대주천을?’
순식간에 대주천을 이룬 정광이 다음 단계로 나아갔다.
진기가 돌고 돌아 합쳐지며 소청(小淸)이 아닌 태청(太淸)을 이루었다.
‘말도 안 돼!’
운후가 경악하는데 정광이 운기를 멈췄다.
시작도 마무리도 뜻이 서면 이루어지는 의념의 경지였다.
“사조님. 이게 태청이죠?”
운후가 얼빠진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태청기공은 배울 필요 없겠네요. 한 번에 가게 상청무상신공(上淸無上神功) 가르쳐 주세요.”
“어, 어찌한 것이냐?”
“그냥 되는데요.”
“……그냥 된다고?”
운후가 간신히 물은 말에 정광은 순진무구한 얼굴로 대답했다.
“저는 돼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