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곤륜마협-1화 (1/569)

1화

여기가 어디 사람 사는 곳이더냐

구름과 맞닿을 정도로 높은 곤륜산 운화봉.

장년 도사가 검무를 추고 있었다.

웅장한 산악을 빼닮은 검술, 흘러가는 구름처럼 우아한 보법.

누가 봐도 감탄할 만한 절기들이 끊임없이 이어졌다.

“허허허.”

흐뭇하게 그 모습을 바라보던 노도사가 시선을 내렸다. 품에 안은 귀여운 갓난아이를 향해서였다.

“보이느냐? 이게 바로 곤륜이니라.”

명문 중의 명문인 구파일방(九派一幇)의 하나요, 도교의 성지인 곤륜파(崑崙派)였다.

노도사의 목소리에 자부심이 담겨 있는 건 당연한 일이었다.

“음? 이 녀석. 그 귀여운 얼굴이 왜 이리 뚱하게 변했는고?”

그는 안고 있던 아이의 얼굴을 들여다봤다. 지루하기 짝이 없다는 듯한 표정 아닌가.

“네 사부가 너를 위해 본문의 절기를 펼치고 있거늘, 마음에 안 드느냐?”

“……와앙.”

“호오. 멋지단 말이지?”

“……후우우.”

아직 돌도 안 된 정광(精光)이 긴 한숨을 쉬었다.

멋지긴 개뿔.

무공이 장난인가? 겉멋만 잔뜩 든 모습이라니.

노도사는 정광의 한숨을 오해했다.

“허허허. 걱정되느냐?”

장년 도사가 기합을 지르며 양팔을 벌렸다.

그는 대붕이 날개를 활짝 편 듯한 모습으로 허공에서 자유롭게 움직였다.

“괜찮다. 너도 언젠가 저렇게 하늘을 날 수 있게 될 게다.”

하늘을 난다고?

버둥거리는데?

정광은 진짜로 하늘을 날았었다.

“무슨 생각을 하길래 얼굴이 이리 의기양양하누?”

“……우웅.”

하지만 다 과거의 일. 지금의 정광은 말조차 제대로 못 하는 갓난아이였다.

“흐음. 네 사부가 흥이 잔뜩 올랐구나. 네 녀석에게 잘 보이고 싶은 게지.”

노도사의 말대로 장년 도사 허청은 혼신의 힘을 다하고 있었다.

너무 어려서 제대로 인지하지도 못할 제자이지만 좋은 모습을 보여주고 싶었기에.

하지만 불행하게도 그의 제자는 무공의 극의를 맛봤던 정광이었기에 감점만 될 뿐이었다.

“허어. 졸린가 보구나.”

정광은 노도사의 말처럼 졸려서 눈을 감은 게 아니었다.

사부가 된 이를 욕하고 싶지 않아서였다.

그래도 속에서 열불이 치미는 건 어쩔 수 없는 일. 왜 쓸데없이 진기를 낭비하는가?

허공에서 이동할 생각 말고 제대로 된 곳으로 먼저 뛰란 말이다.

길을 똑바로 가야지 엉뚱한 방향으로 갔다가 되돌리는 바보짓을 왜 하는지 원.

“타앗! 운룡대팔식(雲龍大八式)! 용행구천(龍行九天)!”

웅혼한 일갈과 함께 허청의 신형이 네 번이나 뒤집혔다.

아홉 번이어야 했으나 내공이 부족하여 네 번으로 끝난 것이다.

반사적으로 눈을 뜬 정광이 고개를 주억거렸다.

그래도 보긴 좋았으니까.

그가 비록 전생에 천마신교의 교주였지만 솔직히 이런 거만큼은 정파 놈들이 더 나았다.

무공이 적을 해치기 위한 것이라지만 천마신교는 너무 심하다.

노골적으로 죽이려고만 들어서 얼굴이 뜨거워질 정도다.

게다가 이름은 또 왜 다 그 모양인지.

아수라가 어쩌고 혈겁이 저쩌고. 피를 못 봐서 환장한 이름투성이다.

“합! 태허비검(太虛飛劍)! 용아초풍(龍牙招風)!”

저 봐라. 얘들은 다르다. 이름부터 그럴듯하지 않은가.

용의 이빨이 바람을 부른다! 그냥 쑤시는 초식일 뿐인데 때깔 나는 이름이다.

“허허허. 녀석, 눈 빛나는 것 보게. 그리 멋있더냐?”

한동안 웃던 그의 얼굴이 안타깝게 변했다.

“이 어린 것이 어쩌다가 홀로 산에 버려져 있었을꼬.”

그러게 말이다.

“그래. 허청이 널 발견한 건 태상노군의 뜻이니라. 원래부터 이리될 일이었던 게지.”

정광은 고개를 저으려다가 끄덕였다.

죽어서 그대로 끝인 줄 알았는데 눈 떠보니 갓난아이였다.

그런 그를 노도사 운후의 제자 허청이 발견해서 데리고 왔고.

말도 안 되는 일이 일어났으니 운후의 말처럼 신적인 존재의 뜻일지도 몰랐다.

“본디 너처럼 어린아이는 도호를 받을 수 없다. 하지만 일이 이렇게 됐으니 네게 기대를 걸게 되는구나.”

정광은 속으로 한숨을 쉬었다.

하아. 결국 그건가.

무림제일인이 되어 사문의 명성을 드높여 달라는 말…….

“바르게 커다오.”

“……웅?”

“허허. 녀석, 놀라기는. 너무 무리한 부탁이더냐?”

“…….”

“그래. 욕심이 과했구나. 사람마다 기준이 다른데 바르다는 건 정말 어려운 일이지.”

그의 눈매가 부드럽게 휘었다.

“정정하마. 네가 바르다 믿는 일은 끝까지 지키는 사람이 되어다오.”

그는 정광의 대답을 듣지 않고 머리를 부드럽게 쓰다듬었다.

“부탁한다.”

부탁이라기보단 그렇게 커줬으면 하는 바람이었다.

검을 갈무리하고 다가온 허청이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사부님. 정광이 너무 어려 걱정되니 그만 들어가시지요.”

“내 미처 그 생각을 못 했구나.”

운후는 정광을 품에 안은 채 일어섰다.

“제자가 안겠습니다.”

“괜찮다.”

“제자가 있는데 사부께서 어찌…….”

“허허. 아직 안을 힘이 있을 때 많이 안으려고 그러느니라.”

“무슨 말씀을 그리하십니까.”

운후는 말없이 빙그레 웃었다.

그를 보는 허청의 마음은 편치 않았다.

‘기력이 떨어지신 게 눈에 보일 정도구나.’

운후는 과거 서장 대마두와의 싸움에서 단전이 파괴되어 보통 노인과 별다를 게 없는 몸이 되었다.

허청이 정광을 핑계로 돌아가자고 한 건 운후를 걱정해서 그랬던 것이다.

그런 제자의 마음과 달리 운후는 정광을 걱정했다.

“앞으로 어떻게 먹일지 고민이구나. 요 며칠 동안은 도우들께서 도와주셨지만 계속 그럴 순 없는 일 아니냐.”

“사제들이 유모를 찾아왔다 했으니 가보시지요.”

“허어. 너희들이 벌써 다 컸구나. 나보다 낫다. 하하하.”

이미 장년을 지난 허 자 배였지만 그에게는 여전히 어린아이였던가.

사부의 은혜를 떠올린 허청의 눈이 붉어졌다.

그리고 태청전에 이르자 정광의 눈이 부릅떠졌다.

저게 유모라고?

눈을 감았다가 떠도 그대로였다.

사람일 줄 알았더니 웬 산양이 한 마리 서 있었다.

“오셨습니까, 사백.”

산양을 둘러싸고 있던 장년 도사들이 일제히 인사했다.

“허허. 귀한 분을 모셔왔구나.”

“간간이 들리시는 도우들께도 부탁드리겠으나 평시에는 산양의 젖이면 될 것 같습니다.”

“그래, 잘했다. 봐라. 이 녀석도 좋아하고 있지 않으냐.”

운후는 품 안에서 버둥거리는 정광을 보며 허허거렸다. 그런 운후를 보며 허청도 빙그레 웃었다. 다른 도사들도 기쁜 표정을 지었다.

오직 정광만이 외톨이가 된 기분이었다.

“허어. 아닌가? 기분이 상한 것 같기도 하고.”

걱정하는 운후를 보며 허청이 작게 웃었다.

“하하. 너무 세심하게 신경 쓰시는 것 같습니다.”

“그리 보이더냐? 허허. 내겐 정광과 너희가 큰 차이가 없는데.”

“…….”

그랬다.

운후는 오래전부터 모든 이에게 따뜻하게 대했었다.

도사들이 일제히 고개를 숙였다.

상황을 지켜보던 정광까지도 고개를 숙일 뻔했다.

덕으로 아랫놈들을 감화시키다니. 실로 대단한 양반 아닌가?

명문정파인 곤륜파의 대장로이자 곤륜삼성(崑崙三聖) 중 덕성(德聖)이라는 칭호가 아깝지 않다.

천마신교에서 원로랍시고 거들먹대던 수라마군(修羅魔君), 나찰신녀(羅刹神女) 같은 것들과는 비교도 안 되는 인품이었다.

이러니 천마신교라는 멀쩡한 이름이 있는데도 마교라고 욕을 얻어먹지.

이왕 이렇게 됐으니 정광은 솔직해지기로 했다.

천마신교. 좆 까.

애초부터 마음에 안 들었었다.

천륜만 아니었으면 진작 뛰쳐나왔을 정도로.

아비가 교주치곤 무공이 부실해서 지켜줘야 했다.

근데 또 명은 어찌나 긴지.

올해에는 가겠지, 내년에는 가겠지 하다 보니 정광은 소교주 노릇만 백 년을 해버렸다.

말이 백 년이지.

돌이켜 보면 참 다사다난했다.

독은 기본이요, 암습은 선물. 떼거리로 달려드는 건 연례행사였던가.

그걸 참으면 호구지.

깡그리 저 세상으로 보내줬다.

결국 모두가 납작 엎드렸다.

상대도 안 되는 것들이 백 년이 지나서야 포기하다니, 정말 독한 놈들이었다.

이제야 좀 편해지는가 싶었는데.

아비가 갑자기 죽었다.

정광은 교주 자리에 올랐다.

하기 싫었지만 백 년이나 버틴 게 억울해서 일단 해보기로 했다.

근데 일 년도 못 채우고 죽어버릴 줄이야.

자연사했으니 원한은 없었다.

아쉬운 게 있다면 사람 냄새가 궁금했다는 것 정도?

죽이고 경배받는 게 전부인 삶이 아니라 따뜻한 관계로 엮인 생활 말이다.

그래서 정광은 지금 만족했다.

이곳이 그런 곳이었으니까.

“하하. 사부님. 정광이 이렇게 웃을 줄도 아는군요.”

“허허허. 그렇구나. 녀석, 네 덕에 우리도 웃는 걸 알고 있누?”

모두의 웃음소리가 청정한 도관을 울렸다.

정광은 정말로 만족했다.

* * *

한 달도 안 되어서 생각이 바뀌었다.

여기야말로 사람 살 곳이 아니었다.

구파일방의 명성을 오래전부터 들어왔거늘 이게 뭔가?

명문정파란 족속들은 원래 다 이렇게 사는 것일까?

풀. 풀. 풀.

도사들의 밥상을 볼 때마다 한숨이 절로 나왔다.

노도사들이 솔잎을 씹으며 허허거리는 걸 보면 소름이 돋았다.

그뿐이랴. 의복도 가관이었다.

높은 산과 깊은 골짜기 때문에 칼바람이 몰아치건만 도사들은 얇은 도복 하나로 버텼다.

듣자 하니 사계절 내내 그 옷만 입는단다.

정광에게는 두툼한 솜옷을 입혔지만 나이가 차면 그도 저 꼴이 될 것이 명확했다.

게다가 고풍스러움을 뛰어넘어 쓰러져 가는 도관과 좁디좁은 방이라니.

곤륜파 도사들은 너무 없이 자라서 순박한 것이 분명했다.

그가 비록 사치를 즐기는 성품은 아니지만 전생에 살던 가락이 있지. 이렇게 살 수는 없지 않은가.

검소함을 넘어 궁핍한 삶이라.

없이 사는 것도 신선한 경험일 것 같아 감내해 보려 했는데…….

할 게 없었다.

그가 어려서 할 게 없는 것이 아니라 곤륜 도사들은 정말로 할 게 없었다.

기껏 한다는 게…….

“……그리하여 말하되 말한 바 없고, 행하되 행한 바 없으니…….”

망할 놈의 도경 읽기다.

“……무릇 도라 함은 맑기도 하고 탁하기도 하며 움직이기도 하고 고요하기도…….”

대체 무슨 소리냐?

“……공(空)으로서 공을 보니 공은 본디 공한 바가 아니요…….”

정광의 머리야말로 텅 비었다.

“……욕심이 생겼다면 이것이 곧 번뇌요, 번뇌와 망년된 생각이 몸과 마음을 괴롭히며…….”

이미 괴로웠다. 나가고 싶었다.

그에게 하는 말이 아닌 건 알지만 옆에서 듣기만 해도 토할 것 같은 느낌.

언제까지 이 뜬구름 잡는 소리를 들어야 할까?

이게 무림 문파라고?

아니! 도관이다!

정광이 부들부들 떨자 도경을 읽던 허청이 머리를 쓰다듬었다.

“이런. 너무 삼매경에 빠졌었군. 어디 보자. 소변을 싼 건 아니고…… 답답한 게냐?”

“웅. 웅.”

“하하. 그래. 나가자꾸나.”

그는 정광을 안고 천천히 걸었다.

여기저기서 사형제들과 사질들이 반갑게 인사를 했다.

“사형. 이거 섭섭합니다. 정광만 데리고 어딜 가십니까?”

“사백. 제가 사제랑 놀아줄게요. 정광아, 안녕! 너도 그게 좋지?”

“하하. 그냥 산책하는 거니 신경 쓰지 말거라.”

소용없었다.

도교의 성지이자 무림명문인 곤륜에 언제 이렇게 귀여운 어린아이가 있었던가.

모든 이의 사랑을 한 몸에 받게 된 정광은 힘든 나날을 보내야 했다.

유일하게 그를 귀찮게 안 하는 건 유모인 산양이었다.

쭉. 쭈욱. 쭉.

아니, 오히려 정광이 젖을 빨아 귀찮게 했지만 산양은 아무런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먼 산을 무심한 눈빛으로 바라볼 뿐이었다.

‘아!’

정광은 깨달았다.

이 녀석. 곤륜에서 지내더니 도사처럼 되어버린 것이구나.

정광도 여기서 오래 있다간 이렇게 될지도 몰랐다.

어서 떠나야 한다.

그런데 어떻게?

뒤집기야 화경의 경지에 이르렀지만 걷기 시작한 지도 얼마 안 됐는데?

답은 뻔했다.

무공이었다.

“음? 갑자기 왜 그런 표정을 짓느냐?”

허청은 산양의 젖을 빨다 말고 이맛살을 찌푸리는 정광을 걱정스럽게 바라봤다. 아무리 봐도 어딘가 아픈 모습 같았다.

“안 되겠구나. 사숙을 봬야겠어.”

정광은 어리둥절했다.

응? 나 괜찮은데?

허청이 정광을 안은 채 경신술을 펼쳤다. 무림 일절 풍운보(風雲步)였다.

아직 어린 정광은 머리가 흔들려 어지러웠다. 하지만 타고난 총각이자 아직도 총각인 허청이 아이의 몸을 이해할 수는 없는 일. 사숙인 운연에게 도착했을 때 정광은 눈이 뒤집힌 상태였다.

“네가 제자를 잡는구나! 어서 내려놔라!”

안색이 핼쑥해진 허청이 재빨리 정광을 내려놨다.

쿵!

“끄앙!”

“어허!”

“저, 정광아! 괜찮느냐?”

너 같으면 괜찮겠냐는 말이 목구멍까지 올라왔다.

그가 사부만 아니었으면. 늙어 죽은 아비보다 훠어얼씬 잘해주지만 않았다면 진짜 그냥.

눈물을 글썽거리면서도 울지 않는 정광을 보며 운연이 감탄했다.

“무량수불. 어린 것이 심지가 굳건하구나.”

“기대되는 아이입니다.”

“거참. 네가 이런 팔불출이 될 줄이야.”

허청이 머쓱하게 웃는 사이 운연은 정광을 살폈다.

“흐음. 별다른 이상이 없는데?”

“정말입니까, 사숙?”

“…….”

“죄, 죄송합니다.”

“되었다. 제자를 어지간히도 아끼는구나.”

운연은 정광의 뒤통수에 난 혹을 부드럽게 쓰다듬었다.

“걱정 말거라. 혹이야 금방 나을 터. 내부의 혈맥은 사형들이 내공으로 씻어냈으니 누구보다 건강히 클 것이야.”

“휴우우. 감사합니다, 사숙.”

“그러고 보니 정광 이 녀석. 부쩍 큰 것 같은데?”

“하하. 그렇지요? 그뿐만이 아닙니다. 소질이 도경을 읽을 때면 어찌나 열심히 듣는지 이마에 주름이 잡히곤 합니다.”

“무어라? 하하하. 곤륜에 참도사가 나왔구나.”

정광은 아직도 뒤통수가 아팠지만 그들은 훈훈했다.

그날 밤, 정광은 방 천장을 우러러보며 결심했다.

물이 너무 맑으면 물고기가 살 수 없는 법, 여기가 어디 사람 사는 곳이더냐.

세속의 때가 필요했다.

무공을 빨리 익혀서 여길 떠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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