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9장 천지의 왕이 장강에 있으니 그 이름 독안괴선이라
무림련과 백라천궁의 싸움은 이상하게 끝났다. 운청산이 백천휘의 백의를 들고 홀로 나타나자 좌상 백문정과 천기신사 백진궁은 벼랑으로 몸을 던졌고 백라천궁은 약속대로 물러섰다.
무림련 측에서 뒤를 추격하려는 자가 속출했으나 운청산이 잔도의 한가운데 주저앉는 바람에 지체되었고, 그 와중에 운검정과 보천자가 먼저 물러서고 이상하게도 현상자가 물러섰다. 거기에 공명 선사와 신수 사태마저 가세하고 종남이 따르자 화산과 당가는 어찌할 수 없이 주저앉았다.
운청산은 문득 옥소를 꺼내 청상조를 연주함으로써 사람들의 분노를 가라앉히고 당유연 한 사람을 따로 청하여 남다르게 위로했다. 결국 당유연마저도 마음을 잡으니, 백라천궁과 무림련의 싸움은 그렇게 끝이 났다.
각 파는 마음의 상처와 육신의 피로를 안고 자 파로 돌아갔다. 그들뿐만이 아니었다. 백라천궁이 사천에서 물러나 운남의 오지로 숨어버리자 세상을 떠들던 점창의 제자들 역시 점 창산으로 돌아갔다.
한편 사람들의 원망과 찬사를 한 끝에 받아 독안괴선이라는 묘한 느낌의 별호를 얻은 운청산은 천하를 바쁘게 돌아다녔다. 그는 먼저 격전이 있었던 곳마다 돌아다니며 혼령들을 위로하여 귀천시키고, 점창산의 결계를 깨고 산의 정기를 되찾는 방법을 알려주었다. 그리고 한동안 세상을 떠돌아다니며 어려움에 처한 사람들을 돕는 것으로 세월을 보냈다. 그리고 그로부터 십오 년의 세월이 흘렀다.
승포를 입고 삿갓을 쓴 비구니와 이제 예닐곱쯤 되어 보이는 깜찍한 여자 아이가 손을 잡은 채 금사강변의 불일장과 금어향 사이를 지나고 있었다,
비구니가 갑자기 걸음을 멈췄다. 그리고 삿갓을 슬며시 들어 과거 정명단의 가건물이 있던 불일장의 좌측 공지를 바라보았다. 그사이에 여자아이는 땅바닥에 쪼그리고 앉아 땀을 닦았다.
“예향아! 가야지.”
비구니는 삿갓을 다시 내려쓰고 아이를 내려다보며 말했다. 아이가 울상을 지었다.
“사부님! 다리 아파요."
“음. 이거 어쩐다? 서두르지 않으면 오늘 안에 아미에 이르지 못할 텐데...... 할 수 없구나. 예향아, 이 사부는 먼저 갈 테니 너는 천천히 따라오너라."
비구니는 아이의 대답도 듣지 않고 먼저 걸었다.
“이이이잉!"
아이는 두 손으로 얼굴을 감싸고 울었다. 비구니가 돌아서서 삿갓을 슬쩍 들어 올리며 입가에 주름을 잡았다.
“이리 오너라. 업어주마."
아이는 금세 울음을 멈추고 쪼르르 뛰어가 비구니가 내민 등에 업혔다.
“에구, 요 녀석! 다리 아프다는 녀석이 빨리도 뛰는구나. 장차 관음사의 무맥을 이어야 할 녀석이 어리광이 이리도 심하니, 이 일을 어쩌누?"
여아는 대답하지 않고 비구니의 등에 뺨을 비볐다. 비구니는 다시 입가에 미소를 드리우며 서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그때 맞은편에서 득라차림의 소년이 다가와 물었다.
“스님! 금어향이 어딘지요?"
비구니는 삿갓을 들어 올리며 소년에게 미소를 짓고 금어향을 가리켰다. 소년은 멍한 눈으로 비구니의 얼굴을 보았다.
“빈니의 얼굴에 뭐가 묻었는가?"
순간 정신을 차친 소년이 눈을 치뜨고 고개를 저었다.
“아닙니다. 너무 예쁘셔서...... 결례했습니다.”
그때 소년 도사의 등 뒤로 노도사가 다가와 소년 도사의 뒤통수를 후려쳤다.
“이놈! 또 곤륜파 망신을 시켰구나. 미안하오, 스님!”
여승은 삿갓을 슬쩍 내리며 합장하여 허리를 접었다.
“먼 길을 오셨습니다. 곤륜이라. 돌아가시는 길도 무탈하시기를!"
여승은 다시 한 번 합장해 보이고 지나갔다.
“와! 무슨 스님이 저렇게 예쁘지요?"
“이놈아! 출가인이 여인의 미색에 무슨 관심이 그렇게 많아. 꼭 지 사부 닮아가지고, 쯧쯧쯔."
말을 그렇게 한 노도인도 다시 고개를 돌려 멀어진 여승을 바라보았다.
“허! 무슨 사연이 있기에 저런 미색을 지니고 승포를 입었을까? 십여년 전이라면 사천제일미 소리도 모자랐을 것 같은데, 아깝다. 아까워."
“쳇! 어르신도 마찬가지네요, 뭐."
노도사가 손을 번적 치켜들자 소년은 급히 내빼며 금어향을 향해 손을 뻗었다.
“어르신! 저기가 바로 제 고향, 금어향이래요."
노도사는 금어향을 향해 줄달음질쳐 가는 소년을 보며 빙긋이 미소 지었다.
“하기야 기억할 수 없겠지. 나이 넷에 떠난 고향을 어찌 기억할 것인가? 외조부는 살아 있다 했던가? 기쁘게 맞아주면 좋을 텐데....."
노도사는 빨리 오라고 손짓하는 소년을 향해 걸음을 재촉했다.
사천(四川)의 남중부 당가타(唐家陀).
별들이 속삭이는 소리가 들릴 것만 같은 시원하고 조용한 밤이다. 천지가 모두 정적을 원하는 이때, 일노일소가 어둠을 뚫고 나타나 정적을 깨버렸다. 금어향에 나타났던 그 노소였다.
“반선(半仙) 어르신! 분명히 손자 분이 이 근처에 사시긴 사십니까?"
소년이 의심스럽다는 어조로 물었다.
“잠깐만 있어봐, 인석아."
파의(破衣)에 가까운 도포를 입고 바랑을 멘 노도인, 반선 노인은 눈썹 위에 손을 붙이고 안력을 돋워 장강을 살폈다. 소년이 입술을 삐죽이며 반선 노인처럼 장강으로 시선을 돌렸다.
소년의 눈에 보이는 것이라고는 또 다른 은하수가 펼쳐진 장강의 검은 물결뿐이었다.
“쳇! 여기에 뭐가 있다고."
그때 반선 노인이 망망한 장강을 향해 손을 뻗었다.
“저기 있다."
소년은 눈을 치뜨고 반선 노인이 가리키는 곳을 뚫어져라 바라보았다.
그러나 역시 아무것도 찾아볼 수 없었다.
“있기는 뭐가 있어요?"
반선 노인이 소년의 뒤통수를 후려치고 말했다.
“이놈! 존장이 있다면 있는 거야. 버르장머리 없기는 지 사부와 똑같아. 가자"
머리를 쓰다듬던 소년이 어리둥절한 눈으로 반선 노인을 응시하며 물었다.
“가자니요? 아무것도 없는 저기 말입니까? 배는요?"
“겨우 저기 가는데 배가 왜 필요해?"
겨우 저기라는 말에 소년은 다시 강을 살폈으나 역시 아무것도 볼 수 없었다. 소년이 입술을 삐죽 내미는 순간 반선 노인은 소년의 오른 손목을 잡고서 바로 강물로 뛰어들었다.
“잠깐만요, 어르신! 잠깐만요!"
소년은 당황하여 잡힌 손을 뽑아내려고 안간힘을 쓰는 동시에 왼쪽 손을 휘저었다. 그러나 소년의 신형은 이미 강물 위를 날아가고 있었다.
“옷 말리기 싫거든 몸이나 가볍게 해, 인석아!"
반선 노인의 말에 소년은 될 대로 되라는 심정으로 곤륜의 비전 구전 태허선공을 끌어올렸다. 이십여 장을 난 반선 노인의 신형이 먼저 강물로 떨어졌다. 반선 노인은 강물 위에 떠다니는 별을 밟으며 다시 허공으로 솟아올랐다.
“읏, 차거!"
반선 노인보다 뒤늦게 물에 떨어진 소년은 무릎까지 물에 빠졌다가 다시 당겨져 허공으로 치솟았다. 비 오기 전날의 제비처럼 강물을 밟고 백여 장을 지나자 반선 노인과 소년은 강 한 가운데 떠 있는 작은 섬에 도착했다.
밟을 때마다 한 치씩 푹푹 빠지는 것으로 보아, 섬이라기보다는 상류에서 떠밀려 내려온 모래들이 쌓여 만들어진 모랫등 같았다.
소년으로서는 어리둥절할 수밖에 없었다. 땅을 밟기 바로 전까지만 해도 강물 말고는 아무것도 안 보였기 때문이었다.
“이게 도대체......?"
소년이 난데없이 나타난 육지를 두리번거렸다. 분명히 모랫등이었다.
물과 육지가 맞닿는 곳곳에 사람 키보다 큰 돌 기둥이 삐죽 솟아 있는 것 말고는 특별한 것이 없었다. 소년이 질문을 던지려는 순간 반선 노인이 소리쳤다.
“이놈아! 나 왔다."
만선 노인은 소년을 뒤에 남겨두고 모랫등의 중앙으로 걸어갔다. 소년은 그를 따르면서 눈을 비볐다. 아무리 봐도 비가 많이 내리면 금방이라도 물에 잠길 높이의 작은 모랫등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한가운데 덩그렇게 목옥(木屋)까지 지어져 있었다.
문이 열리고 중저음의 듣기 좋은 목소리가 들렸다.
“오셨습니까?"
도포 차림에 검을 맨 중키의 사내였다. 산발하여 얼굴을 반쯤 가린 탓에 소년으로서는 나이를 짐작할 수 없었다. 사내는 걸음을 빨리하여 반선 노인의 두 손을 반갑게 잡고서 허리를 접었다.
소년은 한동안 이방인이 되어 두 사람 사이에 오가는 말들을 들으며 멍하게 서 있었다. 마침내 두 사람의 친밀한 인사말들이 끝나고 사내가 소년에게로 고개를 돌렸다.
소년은 그때서야 인사할 기회를 잡고 포권을 취한 후 허리를 접었다.
“곤륜 제자 송현(松玄)이......"
소년은 인사를 끝마칠 수 없었다. 사내가 오른손을 뻗어 머리를 쓰다듬었기 때문이었다.
“됐다. 잘 자랐구나."
아직 연소하다지만, 태을검선과 독안괴선을 연이어 배출한 당대의 명문 중의 명문 곤륜의 장문제자였다. 신분을 안다면 누구도 무시할 수 없는 존재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내는 소년을 어린아이 취급했다. 그러나 소년은 어떤 거부감도 느낄 수 없었다. 그저 포권을 취한 채 멍한 눈빛으로 사내의 머리카락 사이로 드러나는 얼굴을 응시했다.
언뜻 보아서는 서른 대여섯 정도의 평범한 얼굴이었다. 그러나 왼쪽 눈을 가로지르는 검은 안대와 그린 듯 뚜렷한 이마의 한 줄 주름살 그리고 입가에 맺힌 부드러운 미소가 함께 어우러지자 소년은 그 얼굴을 평생 잊지 못할 것이라고 확신했다.
사내가 다시 반선 노인에게로 고개를 돌렸다. 소년은 아쉬웠다. 조금 더 그 얼굴을 바라보고 싶었다.
“어디 가는 길이더냐?"
반선 노인의 말에 정신을 차린 소년은 다시 사내의 옆모습을 바라보았다. 사내가 말했다.
“삼협(三峽)에서 약속이 있습니다."
“간만에 본 이 할아비보다는 약속이 더 중하겠지?
사내가 웃으며 말없이 고개를 숙였다.
“며칠이나 걸릴 건데?”
“내일 아침에 돌아오겠습니다.”
천 리가 넘는 삼협과의 기리를 생각하면 눈을 까뒤집어야 했으리라.
그러나 반선 노인은 대수롭지 않게 여기며 손을 저었다.
“다녀오너라. 아! 이 집 떠내려가는 건 아니겠지?”
사내는 대답없이 미소 지으며 다시 허리를 접었다. 그리고 소년에게 눈인사를 보내고 몸을 날렸다. 사내의 신형이 부드럽게 날아올랐다고 느끼는 순간 어느새 소년의 시야에서 사라져 버렸다.
소년은 아쉬워하다가 갑자기 눈을 치뜨며 반선 노인에게 급히 물었다.
“손자 분이 혹시, 혹시 전 무림에 ‘하늘도 땅도 모두 내 것이니 더 이상 피 흘리는 일을 용서치 않겠다’ 천명(闡明)하시고 강호의 혼란을 일거에 종식시킨 바로 그 독안괴선(獨眼怪仙) 사숙조 본인이십니까?”
반선 노인은 대수롭지 않게 말했다.
“보고도 몰라?"
소년은 입을 쩍 벌리고 사내가 사라진 허공을 바라보다가 감격하여 급기야는 눈물을 줄줄 흘렸다.
“그분이셨구나. 드디어 만나뵈었어. 본 파의 보물이시며 강호무림의, 아야!"
소년이 뒤통수를 매만지며 반선 노인을 흘겨보았다.
“이놈! 반응이 과하다. 저놈은 그런 언동 싫어해."
소년은 눈물을 닦고 반짝이는 눈망울을 일렁이며 반선 노인에게 말했다.
“저렇게 훌륭한 분의 조부님 되셨군요. 존경합니다."
반선 노인은 어이가 없다는 눈으로 소년을 바라보다가 피식 헛웃음을 내뱉었다.
“에휴! 이놈마저도 독안괴선의 조부라야 존경해 주는구나."
소년이 환하게 웃다가 갑자기 생각난 듯 물었다.
“어? 그럼 반선 어르신과 제 사부님은 사돈지간이네요?”
반선 노인은 눈을 둥그렇게 치뜨며 소년을 쳐다보았다.
“넌 정말 아무것도 모르는구나. 네 사부 놈의 성격이면 수십 번도 더 떠들고 남았을 텐데?”
“저분 명호만 나오면 곧 만나게 해주마, 하시고는 홀린 듯 웃기만 하시던데요. 어르신! 저분 이야기 좀 해주세요.”
반선 노인은 목옥을 향해 걸어가며 말했다.
“그래? 들려줄까? 에이! 말자. 이틀 밤낮으로 얘기해도 모자랄 텐데 시작하면 입만 아프지. 네 사부도 아마 그래서 제대로 말하지 않았을 거야.”
소년이 반선 노인의 뒤를 쪼르르 따라가며 그의 팔에 매달렸다.
“어르시인!”
반선 노인은 소년의 팔을 떨쳐 내며 귀찮다는 듯이 말했다.
“알았다, 알았어. 어차피 밤새 할 일도 없을테니 이야기해주마. 일단 들어가자.”
목옥 안은 초라하다는 말이 무색했다. 의자는 커녕 침상조차 없었고, 보이는 것이라고는 통나무 바닥, 천장, 사방의 벽, 낡은 도포 한 벌 그리고 구석에 놓인 목궤 하나가 전부였다.
반선 노인은 목궤를 열어 내용물을 살폈다. 소년이 반선 노인의 어깨너머로 살펴보니 벽곡단(?穀丹)이 수백 알 들어있었다.
“허! 이놈이 이제는 곡기(穀氣)마저 완전히 끊어버렸나?”
홀로 중얼거린 반선 노인은 목궤를 덮고 그 위에 엉덩이를 걸쳤다. 소년이 초롱초롱한 눈망울을 드러내며 반선 노인의 맞은편에 앉았다.
만선 노인은 싱긋 미소를 지으며 입을 열었다.
“자! 어디서부터 시작해야 할까? 그렇지! 우리가 곤륜 사람이니 곤륜에서 시작하면 되겠구나.”
소년의 침 삼키는 소리를 들으며 반선 노인은 지그시 눈을 감고 아련한 기억을 더듬기 시작했다. 그리고 잠시 후 눈을 뜨고 소년의 초롱초롱한 눈을 마주했다.
“이놈! 지금부터 노도가 하는 이야기는 네가 이미 그 대강을 들었을 수도 있지만, 강호의 비사(?事)도 다수 포함되어 있다. 안다고 함부로 나불대면 아니 된다 알겠느냐?"
소년은 기꺼이 고개를 끄덕였다. 반선 노인은 다시 눈을 감으며 이야기를 시작했다.
“독안괴선이라는 명호가 강호를 진동한 것은 아직 십오여 년도 지나지 않았으나, 무림에 풍파의 조짐이 드러난 것은 이미 칠십여 년 전의 일이었다. 멀리 청해(靑海)에 떨어져 있는 우리 곤륜과 강호의 풍파와는 하등 상관이 없다고 생각했지만, 곤륜 또한 그 풍파에서 벗어날 수 없었느니라.”
마음속으로 이야기를 정리하던 반선 노인은 문득 소년의 아비 악동삼의 이야기를 해주어야하는지 고민에 빠졌다. 그것을 모르는 소년 송현은 안 그래도 초롱초롱한 눈에 기대와 재촉의 빛을 더했다.
운청산은 무산과 삼협의 물줄기가 맞닿는 신녀봉 끄트머리 바위에 이르렀다. 이상했다. 약속이 있다 했는데 아예 사람이 다니지 못하는 삼협의 절벽 끝에 가부좌를 틀고 앉아버렸다.
운청산은 별이 반짝이는 소리와 물소리 그리고 숲에서 흘러나오는 소리를 들으며 입가에 부드러운 미소를 지었다.
“운 선인! 내가 좀 늦었군요.”
운청산은 서두르지 않고 일어나 뒤돌아섰다. 선녀를 방불케 하는 아름다운 여인이 미소를 짓고 서 있었다. 운청산은 정중하게 포권을 취해 보이고 말했다.
“운청산이 무산신모(巫山神母)를 뵙습니다."
여인은 따듯한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삼협의 검은 물줄기를 바라보며 말했다.
.“장강용왕(長?龍王)은 아직인가 보오?"
운청산은 씁쓸한 미소를 지으며 삼협의 거친 강물을 바라보았다.
“아직 저에 대한 화가 덜 풀리신 모양입니다."
여인은 혀를 차며 고개를 저었다.
“쯧쯧쯔, 옹졸하기는...... 약속을 했으니 아마 왔을 것이오. 숨어서 다 듣고 있을 것이오."
운청산도 짐작은 한다는 듯 미소를 지었다. 여인이 강물을 노려보며 호통 쳤다.
“빨리 안 나타나요? 나를 계속 기다리게 한다면 장강용왕 그대의 옹졸함을 천지만신(天地萬神)에게 다 알릴 거에요. 빨리 나와요."
물줄기가 허공으로 솟구쳤다. 그 물줄기들이 다시 강으로 돌아가는 순간 삼십여 장이 넘는 청룡이 물속에 꼬리를 담근 채 운청산을 노려보고 있었다.
운청산이 예를 행하려는 순간 여인이 쌍심지를 켜며 소리쳤다.
“누구 앞에서 지금 위엄을 세우겠다고 그 꼴을 하고 나타나요? 제 모습을 드러내요."
청룡은 밑에서부터 운무를 일으켜 몸을 감추었다가 용포를 입은 장년인의 모습으로 변하여 운청산 앞에 내려섰다.
“운청산이 용왕을 뵙습니다."
“흥! 난 자네와 할 말 없네."
장년인은 운청산의 눈길을 외면했다.
“십 년도 더 된 일이에요. 운 선인이 몇 차례 사과를 했건만 용왕은 어찌 그리 옹졸하게 구는 겁니까? 오늘도 화해하지 않는다면 내 다시는 당신을 보지 않겠어요."
여인이 고개를 홱 돌려 버리자 장년인은 얼굴을 찡그리며 사정조로 말했다.
“신모! 내 아들놈이 아직도 이 친구를 보면 무서워서 숨는단 말이오. 아무리 이 친구가 선경에 이르렀다지만 여전히 인간이오. 그런데 금사강을 관장하는 신관이란 놈이 인간을 무서워한대서야 말이 되오? 아예 바보로 만들어놨는데 내 어찌 화가 나지 않겠소?"
“흥! 아들 잘못 키운 건 생각도 않는군요. 한 번 따져 볼까요? 그날 그 일로 인해 수많은 생명들이 수귀가 되었다면 누가 그 문책을 받았을까요? 문책은 차치하고, 그 많은 원혼들이 금사강을 혼탁하게 만들어 놓았다면 금백(金伯)이 지금 편하게 잠이나 잘 수 있을 것 같은가요? 그것을 막아준 이가 바로 운 선인이에요. 그런데도 밉다? 정말 못났군요."
여인이 대답해 보라는 듯 고개를 뒤로 꺾고 내려다보는 자세를 취하자 장년인은 미간을 찌푸리며 머리를 긁적였다.
“끙! 그게 그렇게 되는 것인가?"
잠시 후 장년인은 운청산을 옆으로 흘겨보며 퉁명스럽게 말했다.
“용건이 뭔가?"
운청산은 다시 포권을 취하면서 말했다.
“두 분께 청이 있습니다."
여인이 온화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말씀해 보시오. 운 선인의 부탁이니 가능하면 들어드리겠소."
“삼협을 조금만 넓혀주셨으면 합니다."
여인이 눈을 치떴다. 그러나 그녀의 반응은 약과였다. 장년인은 아예 얼굴을 구기며 눈에 도가를 불러일으켰다. 그가 막 소리를 치려는 순간 여인이 먼저 물었다.
“음! 과연 우리 둘의 도의가 필요한 일이군요. 헌데 넓혀달라는 이유가 무엇이오?"
“한마디로 너무 위험합니다. 장마철이 되면 사람들이 아예 오가기를 포기합니다. 사람이 없으면 신 또한 없는 것입니다. 부탁드립니다."
운청산이 다시 포권을 취해 깊숙이 허리를 접었다. 여인은 심각하게 고려하는 듯 생각에 잠겼다. 그러나 장년인은 즉시 고개를 저으며 말하려 했다.
그때 여인이 다시 그의 입을 막았다.
“도대체 어느 정도나 넓혀달라는 말이오?"
“많이는 필요없습니다. 신모께서는 삼십 장이 안 되는 곳만 없애주시고 용왕께서는 그것으로 바닥을 평평하게 골라주시면 좋겠습니다."
“음! 그 정도면 내게 별다른 타격이 없소. 알고 하시는 소리겠지요?"
여인이 환하게 미소 지었다. 그 때 장년인이 세차게 고개를 저었다.
“안 돼, 안 돼. 삼협을 넓혀놓고 바닥까지 골라준다면 인간들의 두려움이 줄어들겠지. 그리되면 용왕의 존재 자체를 잊고 말 거야. 난 그렇게 못하네."
운청산이 말했다.
“사람들에게 용왕님과 신모님을 모시는 사당을 크게 짓고 매년 정하시는 때에 넉넉한 공물을 바치라고 전하겠습니다."
장년인은 얼굴을 구기며 볼을 긁적이다가 운청산을 보며 빙긋 웃었다.
“좋네. 그렇게 함세. 대신 자네도 내 부탁 하나 들어주게."
운청산은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장년인이 말했다.
“아들놈을 보낼 테니 가끔씩 놀아주게. 더 이상 자네를 보고 경기 일으키지 않게 말이야."
“기꺼이 그렇게 하도록 하겠습니다."
장년인은 흐릿하게 웃으며 몇 차례 고개를 끄덕이고 나서 여인에게 말했다.
“먼저 가오. 가끔 놀러 오시구려. 마누라가 기다리는 눈치더이다."
여인이 입도 가리지 않고 환하게 웃었다.
“나도 보고 싶으니 일간 들른다고 전해줘요."
장년인은 미소를 남기고 물속으로 뛰어들었다.
“감사합니다, 신모. 영지를 줄이는 일인데 기꺼이 들어주시고, 화해까지 키셔주시니 어찌 보답해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호호호. 그깟 귀퉁이 몇 조각 떼어낸다고 표시나 날 것 같아요? 그리고 용왕 또한 기회를 엿보고 있었을 거에요. 그대가 장강에 머무는 것을 묵인하는 이유가 뭐겠어요? 될 일이 되는 겁니다. 그런데 운 선인!"
“예. 하교하시지요."
운청산이 포권을 취하고 여인의 다음 말을 기다렸다.
“하교라니? 당치도 않아요. 그냥 묻고 싶은 것이 있는데, 도대체 언제까지 땅에 머물러 있을 작정인가요? 위에서는 빨리 올라오길 기다리는 눈치던데?"
운청산은 쑥스럽게 웃으며 오른손으로 목에서 달랑거리는 화살촉을 부드럽게 감싸 쥐었다.
“오호호호. 내가 이래서 운 선인을 좋아한다니까. 하지만 신명이 땅에 너무 오래 머물러 있으면 안 된다는 건 알지요?"
운청산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그때가 되면 함께 올라갈까 합니다."
여인은 다시 한 번 방긋 웃고는 흐릿하게 흐려져 갔다.
“또 봅시다. 운 선인!"
“살펴 가시지요."
운청산이 고개를 드는 순간 여인은 완전히 사라졌다.
‘이렇게 하면 토가족들도 조금은 혜택을 받을 수 있겠지. 사당은? 그렇지. 당가와 용문수로표국에 부탁하면 되겠구나.'
그때 당우리가 화살촉 밖으로 나왔다.
‘어머니도 크게 기뻐하실 거에요.'
운청산은 미소를 지으며 손바닥을 펼쳤다. 당우리가 그 위에 올라섰다.
‘근데 운 가가. 운 가가도 대신(大神)과 대관(大官)을 차별해요?'
운청산이 눈을 둥그렇게 뜨고 물었다.
‘그게 무슨 뜻이오?'
‘예전에 숙부님들 귀천하실 때 묘족의 수령신에게는 호통을 쳤잖아요? 근데 왜 장강용왕께는 예의를 다하여 청했지요? 수령신은 대관급 신려이고 장강용왕은 대신급 신령이라 그런 거예요?'
운청산이 웃으며 대답했다.
‘경우가 다른 것이오. 수령신은 직권을 남용했소. 사람들로 하여금 자신을 떠받들게 하기 위해서 일부러 병을 주고 사람을 부렸소. 그뿐만이 아니라 자신의 기분에 따라 승천하려는 혼들을 봉인시켰소. 신권을 사사로이 쓴 것이오. 허나 오늘은 다르오. 천지가 원래 그렇게 생긴 것을 사람을 위해 바꿔달라 청한 것이오. 그러니 내가 설설 길 수밖에 더 있겠소?'
‘하지만 운 가가를 위해 청한 것은 아니잖아요?'
‘왜 아니겠소? 우리도 어머니가 기뻐할 거라 하지 않았소? 그런 것이오. 삼협은 토가족의 생활 터전. 개인적으로 토가족 사람들에게 은혜를 갚고 싶다는 마음도 없지 않았다오.'
당우리도 이해했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운청산은 웃으며 말을 바꾸었다.
‘우리! 반선 할아버님이 오셨으니 모시도 어디 놀러나 갑시다.'
당우리가 기쁨에 찬 얼굴로 물었다.
‘이번에는 어디를 갈 건데요?'
‘어디를 가고 싶소?'
‘음, 강남은 다 다녀왔으니 이번에는 강북으로 가요. 거기서도 운 가가가 할일이 많을 거예요. 아! 안 되겠다.'
‘응? 안 되다니?'
운청산이 눈을 동그랗게 치뜨며 묻자 당우리는 가슴 아프도록 시린 미소를 지었다.
‘닷새 뒤가 제 기일이잖아요.'
‘아차! 그렇군. 장인어른을 뵈러 가야 되는군. 우리! 이번에 가면 제발 할 말만 하고 끝내시오. 잘못하다가는 장인어른 돌아가실 때 온통 귀신들만 보실 것이오.'
당우리는 얼굴을 찡그리면서도 웃었다. 한 번 가면 최소한 세 번 이상 영안지술을 펼쳐 달라고 청했기 때문이다.
당우리가 웃음을 거두고 정색을 하여 다시 말했다.
‘그런데 운 가가! 천북에는 가보지 않을 건가요? 십 년도 넘었잖아요?'
운청산은 부드러운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저었다.
‘모두 잘 지내는 것을 아는데 굳이 가볼 필요가 있겠소? 내가 나타나면 교인 형과 강인 형이 오히려 어색해한다오.'
당우리는 운청산의 얼굴을 탐색하듯 바라보았다. 그리고 그 얼굴에 한점 거리낌도 없는 해맑은 미소를 발견하고 방긋 웃었다.
장강 어디엔가 천지의 왕이 살고 있다. 통치하지도 군림하지도 않는, 나라도 없고 신하도 없는 그였지만 그를 아는 이들은 그가 자신의 의지에 따라서 천지에 가득한 영신들과 소통하며 진정한 자유를 누리는 천지의 왕임을 부인하지 않는다. 그의 이름 바로 독안괴선(獨眼怪仙) 운청산이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