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8장 하늘도 땅도 모두 내 것이니
운녹산과 운청산은 어두운 방 안에서 탁자 하나를 사이에 두고 앉아 있었다. 어색한 공기가 흘렀다. 누구도 먼저 입을 열지 않았다. 두 사람 모두 어둠을 장애로 여기지 않는 이들이건만 그 어둠을 핑계 삼아 서로를 쳐다보지 않았다.
운청산은 처음 들어와 본 운녹산의 방에서 오직 한 가지, 벽 구석에 놓여 있는 장식용 화병만을 들어지게 바라보았다. 그런데도 운청산은 화병의 모양과 문양조차도 알지 못했다. 눈은 화병에 머물러 있어도 마음은 딴 곳에 가 있기 때문이었다.
‘기분이 묘하군. 과거는 다 잊었다 생각했는데 어째서 떠오르는 것은 모두 과거의 일뿐인가? 아직도 맺힌 게 있는 것인가? 근데 저것이 꽃과 나비인가? 어울리지 않아.'
화병에 새겨진 그림이 눈에 들어온 그 순간 낮은 목소리가 들렸다.
“나를 증오하겠지?"
의외였기에 운청산은 한동안 대답을 하지 못했다. 처음으로 화병에서 눈을 떼고 고개를 숙이고 있는 운녹산의 정수리를 응시했다.
운청산은 담담한 어조로 대답했다.
“증오할 만큼 잘 알지 못합니다."
“증오할 만큼 알지 못한다? 허허허! 그건 증오보다 더한 증오로구나."
운녹산은 여전히 고개를 들지 않았다. 왼손을 들어 이마를 쓰다듬었을 뿐이었다.
“어떤 분인지 알고는 싶었습니다. 저를 그리 대할 수밖에 없었던 이유를 직접 찾아보고 싶었습니다. 느껴보려고 했었습니다. 그래서 사천무림련에 들었던 것이지요."
운녹산은 이마에 대고 있던 왼손으로 얼굴을 비비고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피곤한 눈과 차분한 눈이 마주쳤다. 그 순간 운녹산은 다시 왼손으로 얼굴을 쓰다듬으며 시선을 감추고 맥없는 목소리로 말했다.
“미...... 아니다. 그냥 그런 사람이라고, 자기밖에 모르는 사람이라고 생각해라. 그냥, 그냥......"
운녹산이 다시 고개를 숙이자 운청산은 말없이 그의 정수리만 보았다. 한참 동안 침묵이 계속되었다. 그리고 처음과 같이 운녹산의 입에서 갑작스럽게 낮은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가문은 후계자에게 많은 것을 제공한다. 그리고 오직 한 가지 눈으로 바라보지. 기대. 당연한 일이지. 그러나 그 기대를 받아야 하는 사람에게는 그 눈들이 정녕 무섭다. 그 기대에 대한 대답은 오직 두 가지, 천재와 폐인뿐 중간이 없는 탓이다. 늘 쫓기는 것 같았다. 천재가 아닌 줄 알면서도 그런 척할 수밖에 없었다. 등 뒤에서 바라보는 눈들을 피해 늘 앞으로 나아가야만 했어. 주변을 돌아볼 용기도 없었고 여유도 없었다. 그렇게 달려가다 보니 대충 뜻대로 이루어지는 듯도 했다. 그래서 나 자신도 내가 척하는 인간이 아니라 능력이 있는 인간이라고 착각하고 살았나 보다. 자꾸만 자꾸만 더 나아가려 했지. 이렇게 막히지 않았다면 나는 죽는 날까지 돌아보지 않았을 것이다."
운녹산의 느리고 긴 넋두리에 운청산은 간단하게 대응했다.
“할아버지의 삶도 그러했습니까?"
아니라는 대답을 품고 있는 어조였다. 운녹산도 그것을 알아차리고 대답없이 낮은 신음성만 흘렸다. 그러나 결국 고개를 저었다.
“아닌 것 같구나. 늘 여유 있게 사셨던 것 같다. 그래서 오히려 내가 더 발버둥 친 것일까? 내가 그러하지 못했기 때문에? 모르겠다. 나는 주변 사람이 무서웠다. 현산, 현산을 알지? 동생인 현산도 무서웠다. 모두가 나를 내려다보면서 나보고 낫다, 잘한다 하는 것 같았다. 그래서 돌아보지 않았다. 무섭게 보이도록 노력했다. 계속해서 목표를 정하고 그것을 향해서 달렸다."
“목표? 욕망을 말하시는 겁니까? 이미 다 가지셔 놓고. 결국 자멸하신건가요, 밖에서만 구하려다가? 욕망을 먹는 아귀가 되셨군요. 아무리 먹어도 늘 부족한 것임을 모르고. 곁에서 찾고 안에서 찾으면 금방 채울 수 있는 것을 모른 채 말입니다."
운청산의 목소리는 담담했다. 그러나 내용은 자신도 모르게 질책으로 가득 차 있었다.
“허허허, 냉정하구나."
운녹산은 피곤한 눈에 쓸쓸함을 담아 운청산을 바라보았다.
“하지만 맞는 말이구나. 이렇게 된 이상 나는 아귀나 다름없어."
운녹산은 지금껏 드러내지 않았던 오른손을 탁자 위로 올렸다. 엄지와 검지 그리고 중지의 반이 날아가 버린 손, 더 이상 칼을 쥘 수 없는 손, 그것은 이미 무인의 손이 아니었다.
운청산은 그 손마저 담담한 눈으로 바라보았다.
“축하드립니다."
운녹산은 피곤한 눈에 의아함을 담았다. 운청산은 운녹산이 질문할 여유를 주지 않고 말을 이었다.
“이제 해방되셨군요. 더 이상 욕망을 먹지 않으셔도 될 테니 이제는 아귀가 아니신 겁니다. 지금부터는 쫓기지 말고 자유롭게 사세요. 운 자 녹 자 산 자, 이름을 지닌 사람이 말년을 편안하게 살다 갔다고 기억될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운녹산은 절망을 담아 고개를 저었다.
“실패함으로써 내 이름은 이미 더럽혀졌다. 이름의 미추는 그 사람의 살아온 나날로 정해지는 것. 되돌릴 수 없어. 난 끝났다."
운청산도 고개를 저었다.
“아직도 깨닫지 못하셨군요. 도대체 누구에게 기억되기를 원하십니까? 무정한 세상 사람들에게요? 그것이 도대체 무슨 의미가 있습니까? 마땅히 기억해야 하는 이들에게 아름답게 기억되세요. 아직 그러하지 못하다 해도 살아갈 나날이 있는 이상 노력하세요. 생각보다 어렵지 않을겁니다."
운녹산은 아무런 응답도 하지 않고 다시 고개를 숙였다.
운청산은 한동안 운녹산의 정수리를 바라보다가 조용히 일어섰다. 운녹산이 급히 고개를 들었다.
“가려느냐?"
운청산은 운녹산의 흔들리는 눈망울을 빤히 바라보다가 물었다.
“한 가지만 묻겠습니다. 어머니를 사랑하긴 하신 겁니까?"
운녹산의 얼굴에 경련이 일었다. 한동안 대답하지 못하다가 그 결국 고개를 저었다.
“난 네 어미를 사랑하지 않았다. 난 그저 동경(銅鏡)이었을 뿐이다. 마음이 없는 구리 거울. 결국 네 어미는 거울에 비친 자신의 마음을 내 마음으로 착각한 것뿐이야. 난 사랑을 모르는 사람이다. 그랬기에 너를 버린 것이 아니냐?"
말을 하는 운녹산의 입술은 계속해서 떨리고 있었다. 운청산은 말을 듣지 않았다. 대신 입술이 그려내는 통곡을 들었다. 그는 방에 들어온 이후 처음으로 희미한 미소를 지었다.
“아버지! 아버지라 불러본 기억이 없어서 어색하군요. 얼굴을 만져 봐도 될까요?"
운청산은 대답을 기다리지 않고 몸을 숙여 운녹산의 얼굴로 두 손을 뻗었다. 운녹산은 계속해서 얼굴에 대고 있던 왼손을 탁자에 내려놓고 눈을 감았다. 그의 두 눈두덩이 바르르 떨렸다.
운청산은 두 손 엄지로 운녹산의 떨림을 잡고 부드럽게 쓰다듬었다. 그리고 볼을 스치듯 쓰다듬고서 얼굴에서 손을 떼었다.
운녹산은 눈을 뜨지 못했다. 뜨는 순간 운청산이 가버리고 없을 것 같았기 때문이었다. 그때 운청산의 목소리가 들렸다.
“전 나가 있겠습니다. 마음을 가라앉히고 입술을 읽으시면 됩니다."
무슨 말인지 알 수가 없었다. 그래서 급히 눈을 떴다. 그리고 다시 찢어질 듯 부릅떴다.
“청수?"
운청산은 당황한 운녹산의 얼굴을 외면하고 방을 나섰다. 그리고 마루에 주저앉아 멍한 눈으로 달을 응시했다. 그때 방 안으로부터 운녹산의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아니야. 난 너를 사랑하지 않았다. 아니야. 내가 그렇게 느낀 것은 착각이었어. 넌 내가 약해졌을 때 드러낸 틈을 파고든 것뿐이다. 난 네가 싫었어. 너를 보면 약해져."
처음 시작은 매몰찼으나 마지막 목소리에는 울음이 섞여 있었다. 운청산은 마루에서 일어나 마당으로 내려갔다.
“청수야. 청수야. 미안하다. 크흐흐흐흑!"
별달리 원망하지 않았던 만큼 그리움 또한 엷었던 아버지였다. 그래서 서로의 존재를 확연히 알고 대면했어도 어색했을 뿐 감정이 봇물처럼 솟구치지 않았다. 그래서 또한 아버지의 말들, 변명이라고 느끼면서 한편으로는 연민의 정을 느꼈던 말들을 냉정하게 응대한 것이었다. 그러나 막상 초라한 모습을 보고 그 흐느낌을 듣는 순간 가슴이 깨지는 듯했고 한편으로는 후련하기도 했다. 그러나 그 같은 회한 가득한 흐느낌은 그가 아닌 어머니 이청수를 향한 것. 운청산은 아예 공력으로 귀를 봉해 버렸다. 그때 운현산 등 여덟 영들이 미소를 지으며 나타났다.
‘잘했구나.'
운청산도 웃었다. 그리고 문득 생각난 듯 물었다.
‘어찌하시렵니까? 찾아가 볼까요?'
운청산의 시선은 그리움을 가장 많이 드러냈던 운명산에게 고정되어 있었다. 운명산이 씁쓸하게 웃으며 고개를 젓고 나머지 일곱 영혼들을 둘러보았다. 그리고 모두를 대변하듯 말했다.
‘그럴 필요 없다. 이제는 모두 잊고 잘들 살 게야. 쓸데없이 나타나 아픈 기억을 떠올려 주고 싶지 않구나.'
‘그러십니까? 생각이 바뀌시거든 말씀하세요.'
모두가 무겁게 고개를 끄덕이고서 서로를 바라보며 쓴웃음을 지었다.
백무강과 백무극 그리고 백진궁의 표정은 심각했다. 그러나 조금 전까지 가장 어두운 표정을 하고 있던 백문정은 걱정을 시원하게 털어버린 듯 밝아 보였다.
“어허! 왜 이렇게 얼굴들을 구기고 있어? 소군도 그만 심기를 다스리시지요."
백무극은 여전히 침울한 표정을 한 채 백문정을 바라보았다.
“문정 아저씨도 아까 그 광경을 보시지 않았습니까? 어찌 그리 편한 얼굴을 하고 계십니까?"
백문정은 빙긋 웃으며 윤기나는 은빛 수염을 쓰다듬었다.
“안 됩니다. 장차 천하를 다스릴 분께서 어찌 이리 풀죽어 있다는 말입니까? 그 아이의 능력이 생각보다 대단해 보이기는 하나 천군께서 직접 나서겠다 하셨습니다. 도대체 무엇이 걱정이십니까?"
“그 정도라면 사부님도 승패를 장담하실 수 없을 겁니다."
백문정은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잘못 판단하신 겁니다. 진궁이 술법이라 하였습니다. 소군께서는 진궁처럼 바람을 부릴 수 있습니까? 귀신을 부릴 수 있습니까? 못하는 게 있을 수 있습니다. 그렇다고 소군께서 진궁을 두려워하십니까? 잘 생각해 보시지요. 만약 소군과 우상을 상대할 수 있었다면 그 아이가 굳이 잔도를 무너뜨리고 물러설 필요가 있겠습니까? 결국 무공이 술법을 따라가지 못한다는 뜻이겠지요. 술법에 현혹되지 마세요. 이 늙은이도 그 아이를 보고 걱정이 태산 같았습니다. 이왕 길을 막아주었으니 그대로 고착화시키는 것으로 끝을 내려 했지요. 허나 천군께서 친히 나서신 이상 움츠러들 필요를 느끼지 못합니다."
백무극이 어렵게 고개를 끄덕이는 순간 백무강이 표한 눈빛으로 백문정을 바라보았다. 백문정은 그 눈빛에 담긴 의미를 안다는 듯 흐릿한 미소를 지었다. 그때 백진궁이 물었다.
“정녕 걱정하지 않아도 되겠습니까? 제가 검각산에 부린 술수는 이미 깨어졌다고 보는 게 옳습니다. 이젠 오로지 힘으로 맞서야 하는데, 그리되면 이겨도 남는 사람이 없을 것입니다. 저쪽 또한 더 이상 물러설 수 없는 입장이니 죽기를 다하여 저항하지 않겠습니까?"
백문정은 백진궁의 걱정스런 얼굴을 빤히 바라보다가 얼굴에서 웃음기를 거두었다. 그리고 백무강의 얼굴을 의미심장하게 바라보고 끝으로 백무극을 주시했다. 그런 시선의 변화만으로도 사람들의 시선은 백문정의 입으로 모였다.
백문정이 결심한 듯 백무극을 향해 입을 열었다.
“하! 이 늙은이는 사실 천군께서 도와주시리라는 기대를 하지 않았습니다. 소군께서 어찌 생각하실지 모르겠지만 천군께서는 승천도의 종지를 이어받으실 의향이 없으신 것 같습니다."
백문정은 잠시 말을 끊고 백무극의 표정을 살폈다. 벌컥 화라도 낼 줄 알았건만 백무극은 의외로 침착한 얼굴을 한 채 계속 말하라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백문정은 이채를 발하며 말을 이었다.
“불가능하다 생각하시는 것 같습니다. 시대가 다르니까요. 이 늙은이도 일부 동감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이 늙은이는 지금껏 많은 계획을 세우면서도 그 안에 그분의 존재를 고려하지 않았습니다. 사실 우상과 이 늙은이는 패왕의 기상을 지니신 소군을 주체로 천하를 장악하고 강제로라도 민선지도를 이루겠다는 생각을 하고 있었지요. 천하가 민선지도를 원치 않는다면 민선지도의 틀 안에 천하를 끓으면 되는 것. 그러나 이 늙은이의 생각을 역친이라 생각지 마십시오. 제게 그분의 의미는 천군 그 자체. 신은 굳이 모습을 드러낼 필요가 없지요. 존재만으로도 의미는 충분하니까요."
백진궁은 충격을 받은 것 같았다. 그러나 백무극은 이미 알고 있었다는 듯 담담한 표정을 유지했다. 백문정이 백진궁의 얼굴을 살피고 다시 백무극을 바라보며 말했다.
“그런데 그 젊은이의 등장으로 대계가 흔들릴 지경에 이르렀습니다. 낭패라고 생각했지요. 하지만 그것은 오히려 복이었습니다. 천군께서 직접 나서겠다고 하셨으니까요. 이 늙은이는 제법 통찰력이 있다고 자부하고 살았습니다. 허나 한 사람만큼은 아무리 지켜봐도 끝을 알 수가 없습니다. 바로 천군 그분이시지요. 이 년 전 천군께서 지나가듯 하신 말씀이 있습니다. 천군께서는 당신의 경지가 아마도 개조 되시는 백정휴 조사께서 말년에 이루셨던 그 경지에 들어선 것 같다 하셨습니다. 곧 천인합일 지경에 이르신 것이지요. 그러니 천군께서 직접 나서신 지금 이 늙은이는 애써 머리를 굴릴 필요가 없게 되었습니다. 오직 그분이 가시는 길을 따라만 가면 되니까요. 그러니 진궁 자네도 아무런 걱정 하지 말게."
백진궁은 지그시 눈을 감고 고개를 뒤로 꺾은 채 한숨을 내쉬었다. 가슴을 짓누르던 돌덩이가 시원하게 토해져 나오는 것 같은 한숨이었다.
백문정은 그런 백진궁과 씁쓸한 미소를 짓는 백무극을 응시하다가 백무강에게 물었다.
“그런데 어떤가? 며칠이나 걸릴 것 같아?"
백무강이 눈살을 찌푸리며 대답했다.
“대충 봐도 많이 내려앉혀 놓았더구먼. 하지만 길을 뚫는 것 자체는 오래 걸리지 않을 거야. 허나 강시들까지 모두 이동시키려 하면 깨끗이 뚫어야 할 터. 족히 대엿새는 걸릴 것 같아."
백문정은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조바심 내지 말게. 아이들 지치게 만들지 말고 천천히 해. 어차피 우리가 앞을 칠 때 요괴들로 하여금 뒤를 치게 하려 했던 진궁의 안배는 물건너간 것. 서두를 것이 무에 있겠나? 그동안 우리도 쉬자고. 소군께서도 마음을 좀 다스려야 하지 않겠습니까?"
백무극은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아저씨의 말씀으로 걱정이 모두 날아가 버렸습니다."
백문정도 고개를 저었다.
“아닐 텐데요. 틀림없이 분하실 텐데."
백무극은 눈살을 찌푸리고 고개를 뒤로 빼며 과장된 어조로 말했다.
“헛! 이래서 내가 문정 아저씨와 마주 앉기 싫다니까요. 나보다 나를 더 잘 아시니 무엇 하나 숨길 수가 없습니다. 그래요. 분합니다. 분해요. 충분히 강해졌다 생각했습니다. 사부님 앞에서 저들을 무릎 꿇려 보이려 했었습니다. 그러나 그 녀석이 또 내 앞길을 막는군요. 하지만 목적을 이룰 수 있다면 그 정도 분함은 참아야겠지요. 아니요. 분한만큼 노력할 것입니다. 반드시 극복해 낼 것입니다."
그 순간 모두가 기분 좋게 미소를 나눴다.
검각산 남쪽에 자리한 귀갑봉(龜甲峯)은 금우고도와 검각산을 잇는 최초의 봉우리였다. 거북이 등껍질이라는 봉우리 이름처럼 칼날 같은 검각산의 기세와는 달리 바로 뒤에 있는 청림봉과 함께 완만한 지세를 이루고 있었다.
운청산은 가부좌를 튼 채 그 봉우리 정상에 앉아서 산 아래쪽을 내려다보았다.
양측을 떼어놓은 지 이레가 지났다. 잔도의 상층부를 열여덟 곳이나 붕괴시켜 길을 막아놓았건만 열일곱 군데가 정리되고 남은 곳은 잔도의 끝 그리고 귀갑봉의 초입에 해당하는 한 곳만 남아 있었다.
운청산은 쉬지 않고 막힌 곳을 뚫고 있는 백의인들을 바라보며 한숨을 내쉬었다.
‘한 시진이면 뚫릴 것 같구나. 길을 뚫는 것은 곧 끝장을 보겠다는 뜻. 무림련 측도 죽기를 각오하고 싸우겠다 하니 이를 어찌한다?'
운청산은 시선을 돌려 귀갑봉 중턱을 내려다보았다. 얼추 삼천은 될 것 같았다. 그 많은 사람들이 이제 곧 뚫릴 것 같은 잔도를 중심에 두고 부챗살처럼 퍼져 있었다.
운청산은 그들로부터 피어오르는 살기를 느끼며 또다시 한숨을 내쉬었다. 그때 아래쪽에서 운검정이 올라왔다. 운청산은 급히 자리를 털고 일어나 그를 맞았다.
“어찌 되었습니까?"
운검정은 무거운 표정으로 고개를 젓고 바위 위에 털썩 주저앉았다.
“화평에 동조한 사람은 무당의 보천 진인뿐이구나. 그 양반은 원래 피를 싫어하는 양반이라 결과를 예상하고 동조해 주었다만, 나머지 사람들은 이미 터전을 잃었거나 피를 많이들 보았으니 찬성하지 않는 것이 당연한 일일 것이다. 그들 모두 녹산이 불러 모은 사람들, 그 뒷감당을 해야 하니 이 할아비 또한 쉽게 사람들을 물릴 수 있는 입장이 아니다. 어떻게든 이 싸움을 멈춰야 하는데, 그러지 못한다면 본 가 또한 이 천북에서 떠나야 할 것인데......"
운검정이 무거운 한숨을 내쉬며 잔도를 바라보았다. 운청산도 한숨을 내쉬었다. 그의 말이 먹히지 않을 것 같아서 운검정에게 조정 역을 부탁한 것인데, 결과는 예상과 다르지 않았다.
‘하기야 싸움 이전의 상황으로 되돌리기 전에는 화평이 받아들여지지 않겠지. 결국 저들을 운남까지는 물려야 이 싸움을 끝낼 수 있으려나.'
운검정이 다시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청봉! 지금 이 상황에서 화평을 결의해 본들 아무런 소용이 없는 것 같구나. 저들은 금강차혼강시라는 것을 앞세우는데 보천 진인은 물론 건곤파의 두 진인들도 상대할 방도가 없다 하니 상대측 또한 화평을 받아들이지는 않을 것이다. 결국 싸우면 누구도 이기지 못하는 상황이 되어야 화평 또한 가능하겠지."
“금강차혼강시라 하셨습니까?"
“예순 구 정도 된다 하더라. 철골강시에 대한 대비책은 어느 정도 마련했지만 금강차혼강시란 놈들에 대해서는 속수무책이야. 그 수가 많지 않으니 일단 서너 명색 붙여 발을 묶는 방법을 쓸 모양인데 혼잡스러워지면 그게 가능할지 모르겠다."
“후!"
운청산과 운검정은 동시에 한숨을 내쉬었다. 운검정이 갑자기 웃으며 운청산의 얼굴을 빤히 바라보았다.
“조손의 입에서 나오는 것이 한숨뿐이로구나."
운청산도 빙긋 웃으며 말했다.
“너무 걱정하지 마십시오. 강시들은 제가 어떻게든 해보겠습니다. 그리되면 유리한 쪽은 무림련 측이니 그때 할아버님께서 다시 한 번 싸움을 멈추도록 설득해 주십시오."
운검정이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네 할머니가 지금의 너를 보았다면 마음 편하게 웃을 것이다. 마지막 가는 그날까지 네 걱정만 했느니라."
운검정은 포근한 눈빛을 드러내는 운청산의 어깨를 두드리고 일어섰다.
“곧 뚫리겠구나. 같이 가려느냐?"
“전 조금 더 있다가 내려가겠습니다."
운검정은 고개를 끄덕이고 먼저 산을 내려갔다.
운청산은 운검정이 사라질 때까지 바라보다가 신축으로 말했다.
“산신께서는 근처에 계십니까?"
잠시 후 땅이 일어났다가 다시 노인의 모습으로 화하여 운청산에게 읍했다. 운청산도 포권을 취해 읍한 후 살집이 붙고 윤기가 감도는 산신의 얼굴을 확인했다.
“좋아지셨습니다."
“모두가 은공의 덕이지요. 수삼 일 지나면 예전의 기력을 모두 찾을 수 있을 것 같소이다."
운청산은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이고 시선을 아래로 돌렸다. 산신도 무거운 표정으로 운청산과 같은 곳을 바라보았다.
운청산이 말했다.
“보시다시피 곧 싸움이 벌어질 것 같습니다. 저 많은 사람들이 또다시 피를 흘린다면 이제 겨우 안정을 되찾은 검각산이 다시 원귀들로 가득 찰 것입니다."
“후! 그래서 걱정이라오. 왜 이리 박복한지 모르겠소이다."
“한 가지 청이 있습니다."
“무엇이오, 은공? 이 늙은 산신에게 힘이 없음을 모르시는 분이 아니니 못할 일을 부탁하시지는 않을 터.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어떻게든 저 싸움을 막아볼 생각입니다. 제가 신호하면 이렇게 해주십시오."
운청산은 검으로 땅에 그림을 그렸다. 산신이 쉽게 이해하고 고개를 끄덕였다.
“그 정도라면 기력없는 이 늙은이도 어떻게든 할 수 있을 것이오. 내 미리 가서 준비를 하겠소이다."
운청산이 포권을 취하고 허리를 접었다.
“부탁드리겠습니다."
“그런 말씀 마시오. 결국은 이 늙은이를 위한 일도 되거늘, 어찌 부탁이 될 수 있단 말이오? 한 치의 오차도 없이 시행토록 노력하겠소이다."
산신은 예를 표하고 땅속으로 스며들었다.
운청산은 무거운 표정으로 거의 다 뚫린 입구를 바라보았다.
‘반 시진이면 싸움이 시작될 것입니다. 숙부님들께서 수고해 주셔야 겠습니다.'
운현산이 대표로 생각을 전했다.
‘운가를 위한 일 아니더냐. 우리는 기꺼이 너의 칼과 방패가 될 것이다 무엇이든 시켜다오.'
운청산은 운현산 등에게 계획을 말하고 아래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사부님, 조심하세요."
신수 사태는 나라연의 걱정스러운 얼굴을 쓰다듬으며 자애로우면서도 한편으로는 씁쓸한 미소를 머금었다.
“이것아, 지금 누가 누구를 걱정하는 게냐?"
신수 사태는 나라연의 머리를 다시 한 번 쓰다듬고서 제각기 자 파 사람들을 다독인 후 모여드는 수뇌진들과 합류했다.
나라연은 신수 사태에게서 시선을 거두고 잔도를 바라보았다. 바로 그 순간 벼랑 근처의 흙더미가 아래쪽으로 떨어져 내리면서 몇몇 백의인들의 모습이 드러났다.
“드디어! 일각이면 모두 치워지리라. 이곳은 피로 물들겠지. 살아날 수 있을까? 오늘로 관음사는 맥이 끊기는 것인가?"
부챗살처럼 퍼져 있어서 대부분의 사람들과 잔도 입구 사이의 거리는 이백여 장 정도 되었다. 폭약을 달아 날릴 수 있는 쇠뇌의 사거리를 생각한 포진이었다.
수뇌진들이 예상하는 상대방의 전술은 간단했다. 먼저 폭약을 사용하여 무림련 측의 입구 봉쇄를 차단하고, 그 다음으로 금강차혼강시를 투입하여 입구를 확보한 후에 철골강시로 공간을 넓히고, 그사이에 나머지 백의인들이 좁고 낮은 입구에서 벗어날 것이라는 생각이었다.
그래서 폭약을 피해 이백 장의 거리를 벌려준 것이었다. 좁은 곳을 미리 막지 않고 왜 공간을 주느냐에 대한 논란이 많았던 것 같으나 결국 막는 것이 문제가 아니라 싸워 이겨야 싸움을 끝낼 수 있다는 쪽으로 결론을 내린 것 같았다.
그러나 상대 또한 쉽게 자리를 잡을 수 없으리라. 전열의 후미에는 당가의 젊은이들이 삼장무인연을 장착한 화살과 활을 들고 포진하고 있었다.
상대에게도 호풍환우하는 술사가 있는 이상, 모두에게 돌아갈 해약도 없는 상태에서 당가의 독을 쓰기는 어려운 일. 그러나 진영의 중간에 떨어진 삼장무인연만큼은 위력을 발할 수 있으므로 상대가 취하게 될 방법은 강시를 먼저 내보내 최대한의 공간을 확보하는 것이리라.
결국 당가를 제외한 무림련 측의 대비는 우선적으로 강시들에게 집중되었다. 강시가 사라지면 수적으로도 크게 밀리지 않는 무림련 측이 전체 무위에서는 앞선다고 판단한 까닭이었다.
무림련 측의 강시 대비책은 간단했다. 철골강시들의 강직된 움직임을 고려하여 그들이 넓게 퍼질 수 있는 거리인 오십여 장 앞에 수십 개의 깊고 큰 구덩이를 파고 기름을 채워 넣었다. 그리고 철골강시를 무공으로 제압할 수 없는 젊은 사람들은 각자의 무기 외에 철봉 혹은 철승을 지참하였다. 베지 못해도 타격으로 혹은 밀어서 구덩이에 빠뜨릴 수는 있기 때문이었다.
나라연에게 주어진 임무가 바로 그것이었다. 몸놀림이 고수 못지않고 지각을 가진 금강차혼강시를 제외한 나머지 철골강시를 구덩이로 밀어붙이는 것. 수뇌진들은 그 일의 성패에 따라 싸움의 승패가 정해질 것이라 했다.
나라인은 쌍연창을 거칠게 휘어잡고 돌아섰다. 그리고 얼굴이 반쪽이 되어버린 관음사의 비구니들을 바라보았다. 겨우 일곱. 나머지는 검단협곡을 벗어나지 못했다.
나라연은 애써 미소를 지었다.
‘사저 사매들, 오늘이 마지막 싸움이 될 거에요. 우리 반드시 살아남아요.'
비구니들은 나라연의 미소가 하는 말을 쉽게 알아듣고 해맑게 웃었다.
나라연과 비구니들은 창을 가볍게 부딪쳐 서로를 격려했다.
“뚫렸다."
누군가가 외쳤다.
나라연은 급히 돌아섰다. 과연 잔도를 막고 있던 흙더미들이 모두 치워져 있었다.
길게 드러난 백의인들의 행렬.
나라연은 쿵쾅대는 심장의 고동을 다스려 보려고 했다. 쉽지 않았다. 오히려 입 밖으로 튀어나올 것 같았다. 근처의 젊은이들에게서 흘러나오는 긴장감이 여실하게 느껴지는 탓이었다. 그 순간 백의인들의 급격한 움직임이 보였다. 잔도의 벽으로 붙어선 백의인들이 줄지은 개미 떼처럼 뒤로 물러서고 있었다.
그리고 종소리가 들려왔다.
딸랑! 딸랑! 딸랑!
검은 득라를 입은 도사들이 종을 치며 앞으로 나섰다. 그 뒤를 따라 수백 구의 묵빛 강시들이 열을 지어 껑충껑충 앞으로 나오고 있었다.
가장 먼저 잔도의 입구 앞에 나선 것은 움직임이 부드러운, 그러나 사람이 아닌 것이 분명한 금강차혼강시들이었다. 그것들은 따로 인도하는 이도 없건만 알아서 움직이고 있었다.
“서둘지 말라. 전열을 유지하여 오직 철골강시들만 상대하라."
현상자의 목소리가 들려오자 나라연은 자신의 임무를 다시 한 번 되새기며 폭발할 것 같던 긴장감을 누그러뜨렸다.
후우! 후우! 후우!
그녀의 주변을 감싸던 긴장된 호흡 소리도 조금씩 잦아들었다. 바로 그때.
“무슨 짓인가? 멈추게."
현상자의 호통 소리에 무림련 측 사람들이 일시에 한 사람에게 시선을 모았다. 독안의 도사 한 사람이 전열을 벗어나 앞으로 나아가고 있었다.
나라연은 찢어질 듯 눈을 부릅떴다. 그가 와 있던 것을 들어서 알고는 있었다. 독안이 되었다는 것도 알고 있었다. 그러나 도포를 걸치고 있을 것이라고는 상상도 하지 못했었다.
놀라서 부릅떴던 나라연의 눈이 가늘어지고 그 눈에서 쓸쓸한 빛이 새어 나왔다.
‘그런가요? 결국 그 길을 택했나요?'
나라연은 씁쓸한 미소를 지으며 미약하게 고개를 저었다. 그리고 다시 운청산을 주시했다.
정확히 표현할 수는 없었지만 달라진 것은 독안과 도포만이 아니었다.
그의 전신을 감싸는 범접할 수 없는 기운과 구름을 밟는 듯한 부드러운 움직임은 예전에 그녀가 알았던 그리고 남몰래 알고자 하였던 운청산이 아니었다. 바로 앞에서 손을 뻗어도 잡을 수 없을 것 같은 분위기였다.
안 그래도 멀게만 느껴지는 그가 조금씩, 조금씩 나라연에게서 멀어져 갔다. 사람들에게서 멀어져 갔다. 그리고 천지에 혼자 존재하는 것처럼 홀로 구덩이들 앞에 버티고 섰다.
“놔두시오."
운검정이 모두를 위압하는 눈빛을 드러내며 말했다. 뒤늦게 합류했다지만 운검정은 무림련 측 최고의 어른이었다. 나이는 물론 배분 또한 보천자와 함께 가장 높은 사람이었다.
현상자 등은 당장 반발하지 옷하고 믿을 수 없다는 눈빛으로 운검정을 주시했다.
운검정은 차분한 눈빛으로 모두를 둘러보며 말했다.
“한 사람 정도 나섰다고 이천팔백 명이 이룬 전열이 흐트러지는 일은 없을 것이오. 더군다나 저 아이는 지금 우리가 별다른 대책을 세우지 못한 금강차혼강시를 처리하려는 것. 내버려 둡시다."
순간 못마땅한 눈빛으로 운검정을 바라보던 수뇌진들이 눈을 치뜨며 운청산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수뇌진들이 금강차혼강시를 상대하기 위하여 마련한 대책은 군룡전급 고수 세 명씩을 할당하여 강시들의 발을 묶는 것이었다. 그사이에 철골강시를 모두 처리하고 그 후에 백의인들을 상대하려 한 것이었다.
하지만 거기에는 문제가 많았다. 먼저 이백여 명의 고수들 역시 발이 묶이는 것은 마찬가지고 더군다나 상대가 가만히 두고 볼 턱이 없는 일이었다. 그러나 그 외에 뾰족한 방법을 찾지 못하고 있었다. 그런데 운청산이 그것을 해결해 준다면 전력의 손실을 크게 줄이게 되리라.
보천자가 눈살을 찌푸리며 물었다.
“저 아이의 남다른 술법을 이미 견식하기는 했습니다만, 금강차혼강시는 그리 쉽게 처리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도대체 무슨 방법으로 처리하겠다 하던가요?"
그러나 운검정은 그것까지는 알 수 없다며 고개를 저었다.
곤술 도인이 끼어들었다.
“저 친구는 용호파와 곤륜파의 진전을 한 몸에 지니고 있습니다. 과거 금사강에서도 술법의 진원지를 모른 채 힘으로만 산룡과 수룡의 싸움을 저지한 바 있지요. 할 수 있다고 나섰다면 분명히 방법이 있을 겁니다."
“그게 정말이오?"
보천자가 믿을 수 없다는 듯 눈을 치뜨며 운청산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그때 금강차혼강시들이 입구를 벗어나고 있었다.
“왜 가만히 서 있기만 하는가? 정녕 무공으로 상대할 생각인가?"
사람들에게 믿으라 했던 곤술 도인의 눈빛이 곤혹스럽게 변했다. 무공으로 상대한다는 것에는 그 역시 회의적이었다. 그러나 운청산의 태도는 차분하기 그지없었다.
“허어! 이거 일이 이상하게 돌아가는군, 저 아이 혼자 나섰다? 어찌하려는 것인가? 어찌하오리까, 천군?"
백문정이 고개를 돌려 공손하게 물었다. 백천휘는 운청산을 바라보며 희미한 미소를 짓고서 대답했다.
“강시 따위는 의피가 없어. 무얼 하려는지 보고 싶군. 예정대로 해보게."
백무강이 놀라서 백천휘를 곁눈질했다. 금강차혼강시의 유용성은 이미 검단협곡에서 입증된 일이었다. 그 자체로 많은 활약을 할 수는 없었지만 상대방 진영을 교란시키고 고수급들의 발을 묶어들 수 있는 훌륭한 전술적 도구였다. 현상자마저 부수지 못한 것이니 백무강으로서도 쉽게 감당할 수 있다고 자신할 수 없건만, 백천휘는 무용지물 취급을 하고 있었다.
백무강은 부드러운 미소를 머금고 있는 백천휘의 입술에서 시선을 떼고 백문정의 대답을 기다렸다. 그가 반대할 것이라고 생각한 것이었다. 그러나 백문정은 환한 미소를 머금고 허리를 접었다.
“진궁, 시작하게. 음도, 금강차혼강시가 모두 나가면 지체 없이 철골강시들을 풀어놓도록."
천기신사 백진궁과 음도가 동시에 허리를 접었다. 잠시 후 입구에 머물러 있던 금강차혼강시들이 일제히 쏟아져 나갔다. 그것들은 운청산이 있는 곳뿐만 아니라 좌우로도 넓게 퍼지려 했다.
바로 그때 운청산이 세차게 땅을 굴렸다. 순간 천지가 진동하는 굉음과 함께 입구에서부터 구덩이까지 땅이 울렁거리기 시작했다. 그리고 마침내 땅이 일어나 두 줄기 토담을 쌓았다. 길이는 기름 구덩이까지 오십장, 넓이는 이십여 장, 토담의 높이는 오 장에 이르렀다. 토담을 부수지 않으면 강시들이 나아갈 길은 운청산이 있는 전면밖에 없었다.
“호오! 대단하군. 다른 이들의 개입을 막고 혼자 감당할 모양이야. 진궁! 꽤나 거창한 술법 같은데?"
백진궁은 운청산을 바라보며 고개를 젓고 쓴웃음을 지었다. 그리고 백천휘의 물음에 답하였다.
“저것은 신축을 얻은 자만이 할 수 있는 일이옵니다. 저 또한 할 수 있으나 먼저 많은 공을 들여 산신을 소환하고 애써 부탁해야 하며 행하려는 뜻이 산신의 뜻과 배치되지 않아야 가능합니다. 그러나 저 친구는 무공을 펼치듯 바로 이루어내는군요. 저 친구 앞에서는 이제 그 어떤 술법도 펼쳐 낼 수 없게 되었습니다."
백천휘는 백진궁의 도포 속에 감추어진 손을 보는 듯한 눈길을 거두며 말했다.
“그런가? 자넨 더 이상 술법을 펼칠 필요 없어. 지금까지 잘해왔네. 이젠 내가 맡음세. 그런데 길을 막았다고 다 된 것은 아닐 터, 어찌하려나?"
백천휘는 다시 호기심 어린 눈빛으로 운청산을 바라보았다. 궁금한 것은 백진궁 역시 마찬가지였다. 아무리 신축을 안다 하지만 인간의 혼에까지 영향을 미칠 수 있는 것은 아니라고 알고 있기 때문이었다.
금강차혼강시들이 갑자기 솟구쳐 오른 토담을 향해 손을 뻗었다. 시커먼 묵기가 토담에 부딪치는 순간 흙이 튀고 곧 이어 깊은 구멍이 파였다.
그러나 그 구멍은 순식간 채워져 토담은 금세 원상을 회복했다. 수십 차례 반복해도 뚫리지 않자 금강차혼강시들은 결국 운청산을 향해 뛰어왔다.
운청산은 금강차혼강시들을 바라보면서 생각을 전했다.
‘음백은 이미 타인의 혼을 받아들이는 데 익숙해졌으니 고통은 오래가지 않을 것입니다. 저는 따로 신경 쓸 필요 없습니다. 가세요.’
운청산의 정수리에서 운현산 등이 튀어 나갔다. 대상은 다르지만 이미 검각산에서 한 번 경험해 본 일이었다. 그들은 선두에서 다가오는 여덟 구의 금강차혼강시들의 머리 속으로 거침없이 파고들었다.
빠른 속도로 다가오던 여덟 구의 금강차혼강시들이 갑자기 멈추어 서더니 자신의 머리를 붙잡고 제자리를 뱅뱅 돌았다.
운청산은 문득 시선을 돌려 잔도 위에서 제자리 뛰기를 하고 있던 예순네 명의 도사들을 바라보았다. 그들 가운데 여덟 사람이 머리를 쥐어짜며 주저앉았다. 그러나 나머지 사람들은 여전히 제자리에서 뛰고 있었다.
운청산은 눈길을 거두고 허공으로 손을 뻗었다. 청인자의 볼품없는 청강검이 그의 손 안으로 빨려 들어갔다. 그 순간 십여 구의 금강차혼강시들이 쇄도했다.
운청산이 검을 세차게 내뻗었다.
쩡!
순간 한줄기 바람이 검신을 감돌다가 운청산의 부드러운 움직임을 따라 근동의 풍령들을 모두 이끌어 검을 따라 휘돌았다.
휘류류류류!
바람 소리 거칠어져 가면서 바람이 신이 난 듯 선풍을 일으켰다. 거세진 바람은 토담에 부딪쳐 더욱더 거칠어져 갔고 곧 이어 토담 안이 거센 바람에 휘말렸다.
다가오던 금강차혼강시들의 누더기 옷이 바람에 휘말리더니 조각조각 찢어졌다. 곧 이어 금강차혼강시마저 더욱 거세게 휘도는 바람에 휘감겨 운청산의 주변을 돌았다가 다시 뒤로 튕겨나 나뒹굴었다. 수십 차례 시도를 해보아도 결과는 마찬가지였다. 그 어떤 금강차혼강시들도 운청산의 곁으로 다가서지 못했다. 그저 비틀거리며 운청산의 주변을 한 바퀴 돌고 나동그라질 뿐이었다.
운청산은 손아귀 안에서 검파를 휘돌려 검신 끝에 선풍을 달아 매어놓고 다시 잔도를 바라보았다. 머리를 쥐고 바닥을 뒹굴던 도사들 가운데 벼랑 가까이에 있던 이들 넷이 아래로 떨어졌다. 그리고 잠시 후 나머지 넷도 축 늘어져 버렸다. 그 순간 토담 안에서 비틀거리며 돌아다니던 여덟 구의 금강차혼강시들의 모공에서 환한 빛이 새어 나왔다가 사라졌다.
“끄아아아아아아!"
여덟 구의 금강차혼강시들이 머리를 붙잡고 널브러졌다. 그것들은 쉬지 않고 경련을 일으키다가 사지를 뻗었다. 그리고 잠시 후 두 손으로 땅을 짚고 힘겹게 일어섰다.
운청산은 다시 다가오는 금강차혼강시들을 휘감아 뒤로 퉁겨내고 검풍을 가라앉혔다. 그 순간 여덟 구의 금강차혼강시들이 갈지자로 비틀거리면서 운청산에게로 걸어왔다.
십여 장 앞까지 다가온 여덟 구의 금강차혼강시들은 점차 몸의 중심을 잡고 똑바로 걷기 시작했다.
‘어떻습니까?'
운현산이 대표로 생각을 전했다.
‘기분이 더럽구나. 화주에 만취한 다음날 새벽 같은 기분이다.'
‘안 됩니다. 마땅히 쉴 자격이 있건만 죽어서도 쉬지 못하는 격입니다. 불쌍하게 여기고 다독여 주어야 화합할 수 있습니다.'
잠시 후 여덟 구의 금강차혼강시들이 손발을 휘저어보더니 이내 부드러운 움직임을 보여주었다.
‘관절이 뜻대로 움직이지 않아 영 어색하구나.'
운명산의 말에 운청산은 빙긋이 웃으며 대답했다.
‘저들의 움직임 못지않습니다. 저들은 멀리에서 조종하고 숙부님들은 안에서 통제하니 금방 더 나아지실 겁니다. 금강석을 깰 수 있는 것은 금강석뿐. 다독여 화합하고 차분히 살펴서 깨뜨릴 방법을 찾아보세요. 그들 또한 쉬고 싶을 테니 방법을 알려줄 것입니다.’
운청산은 두 손을 정수리 위로 뻗어 여덟 영들을 잇는 영줄을 엄지를 제외한 여덟 손가락으로 옮겼다. 그리고 토담을 만든 이후 처음으로 전진했다.
쾅!
그가 세차게 첫발을 내딛는 순간 든든하게 좌우를 막아주던 토담들이 부드러운 호선을 그리며 좌우로 움직였다. 계속해서 물러나던 토담은 구덩이 바로 뒤쪽까지 물러서서 부챗살 모양으로 방벽을 쳤다. 순간 금강차혼강시들에게 막혀 나오지 못하고 제자리에서 뛰고 있던 철골강시들이 쏟아져 들어왔다.
운청산은 계속해서 전진하여 금강차혼강시와 철골강시들 안으로 뛰어들었다.
“허허허! 용호파! 나를 허무하게 만드는구나. 칠십 평생을 일도에 매진했건만 이제 스물다섯밖에 안 된 저 아이의 능력에도 못 미친단 말인가"
보천자는 허탈한 웃음을 흘렸다. 운검정이 옆에서 위로했다.
“진인도 아시지 않소? 저 아이, 태생부터가 보통 사람들과 다르오. 저 아이의 몸속에 깃들어 있는 여덟 영혼들은 내 아들과 조카들. 결국 저 아이에게는 숙부와 당숙들이 되오. 거기에 곤륜과 용호파의 진전이 이어졌으니 어쩌면 당연한 일 아니오? 그리고 아까 그 검풍은 내게서 비롯된 것이라오. 허허허!"
운검정의 웃음소리는 보천자와 달리 웃음 본연의 뜻을 가득 품고 있었다. 보천자는 가로 주름 가득한 운검정의 얼굴을 바라보며 쓴웃음을 짓고서 운청산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운청산의 팔방을 점한 여덟 구의 금강차혼강시들은 처음에는 막기에 급급하더니만 이내 막고 치기를 거듭했다. 그러다가 갑자기 움직임이 빨라지더니 서로 자리를 바꾸고 도와주고 물러서기를 반복했다.
“하! 저것은 본가의 태을구성진 아닌가? 어색하긴 해도 틀림없이 태을구성진이야."
운검정이 기쁨과 놀람을 동시에 드러냈다. 과연 진을 펼치기 시작하니 처음의 위태해 보이던 광경들을 더 이상 볼 수가 없었다. 여유가 생긴 여덟 구의 금강차혼강시들이 본격적으로 공격에 들어갔다.
시간이 흐르자 여덟 구의 금강차혼강시들이 펼치는 태을구성진은 그진 본연의 구성과 사뭇 달라졌다. 운청산의 두 손 끝이 떨리고 거기에 천기구궁신보가 더해져 변화에 변화를 거듭했다. 변화가 너무 많아 오히려 산만하게 느껴졌고 나중에는 아예 진을 펼치는 것 같지도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단 한 구의 강시들도 운청산을 공격하지 못했다.
철골강시들은 아예 견뎌내지 못했다. 부딪치는 족족 팔이 떨어져 나가고 머리가 터져 버렸다. 금강차혼강시라고 다를 바가 없었다. 음백들로부터 약점을 들은 듯, 여덟 구의 금강차혼강시들이 돌아가면서 머리만 골라 연달아 대여섯 번씩 후려치자 결국에는 목이 꺾이고 안구가 터지고 머리가 깨어져 중심을 잃고 제자리를 맴돌았다. 그런 움직임이라면 아무리 단단한 금강차혼강시라도 위협이 될 수는 없으리라.
그토록 처리하기가 곤란했던 금강차혼강시들이건만 운청산에 의하여 벌써 구 할이 무너져 남은 것은 일곱 구뿐이었다. 철골강시 또한 마찬가지였다. 벌써 오 할 가까이가 팔다리를 잃거나 바닥에서 뒹굴고 있었다.
운청산의 주위에 자리한 금강차혼강시들의 몸놀림이 한정 없이 나아지고 있으니 나머지 또한 오래 버티지 못할 것 같았다.
수뇌진들은 고개를 저으면서도 기쁨을 감추지 못했다. 강시만 없으면 맞붙어서 질 까닭이 없기 때문이었다.
그때 갑자기 종소리가 들려오면서 철골강시들이 물러서기 시작했다.
그 순간에도 운현산 등이 깃든 여덟 구의 금강차혼강시들은 남은 일곱 구의 금강차혼강시들을 따라가 머리를 깨뜨려 버렸다.
그 넓은 벌판에 서 있는 이는 운청산과 여덟 구의 금강차혼강시밖에 없었다.
“와아아아!"
뒤에서 함성이 터졌다. 수뇌진들이 먼저 앞으로 나오고 나머지 사람들도 전열을 흐트러뜨리지 않는 가운데 전진했다. 운청산은 급히 뒤돌아서서 땅을 굴렀다.
쾅!
그 순간 오 장에 불과하던 방벽이 십여 장으로 불어나 길을 막았다.
무림련 사람들이 당황하여 멈추어 섰다. 방벽을 타 넘은 이들은 오직 십여 명의 수뇌진들뿐. 그들이 운청산 앞으로 다가왔다.
현상자가 노화 어린 눈빛으로 운청산을 노려보며 말했다.
“무슨 뜻인가? 이제 다 이긴 싸움이네. 설마 운 대협 말씀처럼 화평하라는 것은 아니겠지?"
운청산은 깊이 가라앉은 눈으로 현상자를 마주 보다가 아무런 말없이 돌아서서 잔도를 바라보았다. 그때 십여 명의 백의인들이 앞으로 나섰다.
운청산은 유독 한 사람, 은발은염의 장년인을 주시했다. 잘생겼다기보다는 아름답다는 말이 어울릴 그 장년인의 입가에 부드러운 미소가 어렸다.
“자네가 그 늙은이들에게 화평하라 했었나? 화평. 좋은 말이지. 허나 양자가 동의해야 가능한 것 아닌가? 난 그렇게 못하겠는데."
거리가 삼십여 장에 이르렀다. 입을 벌린 것 같지도 않고 목소리가 큰 것 같지도 않았다. 그런데도 수뇌진들뿐만이 아니라 방벽 뒤의 다른 무림련 사람들에게까지 또렷하게 들리는 목소리였다.
“할아버님, 어떻습니까?"
운청산이 느닷없이 물었지만 운김정은 무리 없이 대답했다.
“어렵겠구나. 나로서는 감당할 수 없는 인간이야."
운청산은 백의인 백천휘에게 가볍게 목례하고 뒤돌아섰다. 그리고 현상자 등의 수뇌진을 두루 살펴보고 말했다.
“감당하실 수 있겠습니까?"
현상자등은 선뜻 대답하지 못했다. 운청산이 바라보고 있는데도 백천휘의 눈에서 눈을 떼지도 못하고 있었다. 그러나 당유연이 곧 운청산에게로 눈길을 돌려 말했다.
“자네가 없었으면 이 정도도 되지 못했겠지. 허나 죽을 때까지 싸워야겠네. 화평을 받아들일 수 없어."
당유연의 눈은 복수의 불길로 이글거리고 있었다. 돌아가도 맞아줄 아낙네조차 없는 사람들, 당가였다. 그렇게 따지면 이번 싸움에서 가장 큰 피해를 입은 이가 당유연이리라.
“나도 그리할 수 없네."
현상자가 말했고 우현자가 이어 같은 뜻을 표명했다. 운청산은 눈을 감아 그들의 눈길을 외면했다.
그때 백천휘가 말했다.
“자네, 우선 그 강시들부터 좀 풀어주겠나? 그 안에 내가 귀여워하던 아이가 있어서 말이야. 편히 쉬게 해주고 싶어."
운청산이 다시 돌아서서 고개를 끄덕였다.
‘나오세요.'
잠시 후 운현산 등이 여덟 구의 강시들 정수리에서 힘겹게 빠져나왔다.
운청산은 손을 머리 위로 올려 여덟 영혼들을 정수리 안으로 들여보냈다.
‘수고하셨습니다. 쉬세요.’
그 순간 혼을 잃고 제자리에서 맴돌던 강시들이 수뇌진들에게로 달려들었다. 수뇌진들이 급히 뒤로 물러섰다. 바로 그때 백천휘가 두 손을 내뻗었다.
두 줄기 하얀 기운이 허공을 가로질러 운청산의 곁을 스치고 지나갔다. 그 기운들은 여덟 구의 강시들을 순식간 꿰뚫었다. 여덟 구의 강시들은 하얀 백룡과 같은 거대한 기운에 꿰어 허공에서 꿈틀거렸다.
백천휘는 운청산에게 미소를 지으며 주먹을 쥐었다가 활짝 폈다. 마치 두 마리 백룡 같은 하얀 기운이 허공에서 흩어지는 순간 여덟 구의 강시들도 산산조각이 나서 사방으로 흩어졌다.
현상자 등은 입을 벌린 채 하얗게 질려 있었다. 한 구조차 제대로 처리하지 못했던 금강차혼강시들이었다. 운청산도 술법을 이용하여 쉽지 않게 처리한 것들이었다. 비록 혼이 다진 금강차혼강시라도 단단하기는 마찬가지. 그러한 마물들을 힘들이지 않고 일수에 날려 버렸으니 절망할 수밖에 없으리라.
현상자는 하늘을 올려다보며 한숨을 내쉬었다.
‘저자는 이미 인간이 아니다. 우리들 모두를 혼자서 감당할 수 있으리라. 싸우면 누구도 살아남지 못한다. 오늘 강호의 반이 무너지게 되리라. 아니 종국에는 무림 전체가 무너지리라.'
그때 운청산이 백천휘를 바라보며 말했다.
“운남으로 물러나 주시오. 점창도 돌려주고 싸움 이전으로 돌아가 주시오. 그리하면 나와 곤륜도 더 이상 개입하지 않겠소."
순간 백천휘의 뒤에 있던 이들 모두가 웃음을 참느라 고개를 돌렸다. 백천휘 역시 흐릿한 미소를 지었다.
“광오하군. 자네가 무슨 자격으로? 아니지. 능력이나 있으면서 하는 말인가? 기껏 하늘을 날고 땅을 일으키는 재주를 믿고?"
운청산은 담담한 표정으로 백천휘와 그의 등 뒤에 서 있는 이들을 둘러보며 선언하듯 말했다.
“거기 누가 있어 하늘을 날고 땅을 일으킬 수 있단 말인가? 이는 오직 하늘이 용납하고 땅이 인정한 인간만이 행할 수 있는 일. 천지가 모두 내게 응하고 있음이니 이는 곧 천명이 내게 있음이라. 나 운청산, 이제 하늘의 뜻에 따라 천하에 고하노니 오늘부로 하늘도 땅도 모두 나의 것이다. 그대들은 이제 떠나라. 나의 산하를 피로 더럽히는 자들을 더 이상 용납치 않으리라."
웃음을 거두지 못하던 이들 모두가 갑자기 변한 운청산의 어조에 흠칫하는 순간, 하늘에서 한줄기 서광이 내려와 운청산의 전신을 감싸고 땅에서 붉은 기운이 솟아올라 구름처럼 그의 신형을 감돌았다.
백천휘의 뒤에 있던 모두가 웃음을 잃었다. 백천휘의 무위를 보고도 흔들리지 않는 운청산의 표정과 그를 감싸는 분위기가 과거를 떠올리게 한 탓이었다. 모두가 비웃을 때 오직 쌍수만으로 천하를 놀라게 했던 전대 천군의 당당한 모습을 떠올린 것이었다.
“하늘도 땅도 모두 자네의 것이다? 하하하하! 걸작이군. 걸작이야."
백천휘가 맑게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그 한번의 웃음소리로 분위기가 다시 바뀌었다. 혹시나 하여 불안함을 드러내던 백무극 등이 다시 웃음을 흘렸다.
그들뿐만이 아니었다. 거우 안색을 되찾은 현상자등도 운청산의 등을 바라보며 어이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운청산은 모든 이들의 비웃음을 담담히 받아넘기고 하늘을 향해 손을 뻗었다. 청인자의 검이 다시 그의 손 안에 들어갔다.
붉은 기운이 일순간에 검끝을 빠져나와 붉은 운무가 되더니 태양마저도 붉게 물들고 이내 천지가 온통 붉게 물들었다.
‘천신지령이여! 이들이 눈뜨게 하소서. 이들에 의해 천지를 떠도는 억울한 영혼들을 이들 모두가 보게 하소서.’
다른 사람들은 알아들을 수 없는 신축이 천지를 울리자 갑자기 사람들의 머리 위에서 수백 수천의 귀신들이 나타나 허공을 휘돌았다. 그것들이 서로 뒤엉켜서 물어뜯고 할퀴었다.
사람들이 눈을 휘둥그렇게 떴다. 그 순간 귀신들이 자신들끼리 싸우는 것으로 만족하지 못하고 사람들에게 달려들었다.
“으아아악!"
“싫어. 저리 가!"
사람들이 머리를 쥐어 싸고 주저앉았다. 그때 운청산이 우렁차게 소리쳤다.
“보이는가? 나와 그대들이 죽인 자들이다. 자신이 죽었다는 사실도 모른 채 아직도 그대들과 함께 서로를 죽이려 하고 있다. 언제까지 서로 죽
여야 만족할 것인가?"
운청산은 다시 백천휘를 보았다. 백천휘는 귀신들을 보고 있지 않았다. 오직 운청산 한 사람만을 바라보며 미소를 짓고 고개를 저었다.
“그만 거두게. 이런다고 내 마음이 변하지는 않아."
운청산은 한숨을 내쉬고 붉은 운무를 검 안으로 빨아들이면서 중얼거렸다.
‘천지신령들이시여! 이들을 눈감게 하소서. 고통받는 영혼들을 외면하게 하소서.’
사람들이 겨우 정신을 차리고 일어난 그때 백천휘가 돌아서서 백무극 등에게 말했다.
“보았느냐? 내가 저 아이의 능력을 너무 만만하게 봤구나. 내가 있으면 저들이 모두 죽고 저 아이가 있으면 너희들이 설 자리가 없다. 우리 두 사람이 모두 없어지면 너희와 저들 모두가 죽겠지. 무극! 좌우상!"
그들이 동시에 허리를 접었다. 백천휘는 웃으며 말했다.
“그럴 일은 없겠지만 저 아이 혼자 내려오면 이대로 운남으로 돌아가라. 저 아이가 살아 있는 동안은 천하를 웅패할 꿈도 꾸지 말라. 허나 내가 내려오면 이 땅에는 오직 승천도만이 존재할 것이다."
백무극 등이 공손하게 허리를 접고 잔도 위로 물러섰다. 백천휘가 돌아서서 운청산에게 말했다.
“이보게, 천지를 다 가진 청년! 이런 이목들 앞에서 광대놀음하기는 싫다네. 다 치워 버리고 싶어. 하지만 그리하면 화내겠지? 적당한 장소가 있는가?"
운청산은 가볍게 목례하고 현상자에게로 돌아섰다.
“들으셨습니까? 만안 싸우신다면 저는 곤륜으로 돌아가겠습니다."
현상자는 운청산의 협박에 무겁게 고개를 끄덕였다. 운청산은 다시 당유연을 보았다. 그도 고개를 끄덕였다.
운청산은 마지막으로 운검정에게 미소를 지으며 읍했다.
“다녀오겠습니다."
“무운을! 할 말이 그뿐이구나."
운검정이 어깨를 토닥이며 고개를 끄덕였다.
운청산은 백천휘에게 눈짓을 하고 먼저 몸을 날렸다. 단걸음 날아간 거리가 삼십여 장. 백천휘는 빙긋 웃으며 운청산의 뒤를 한 치의 모자람도 없이 따라갔다.
현상자는 멍한 눈빛으로 두 사람이 사라진 방향을 바라보며 중얼거렸다.
“태을검선에 이어 또다시 곤륜에 기대는구나. 그가 내려오지 못한다 해도 대곤륜의 위대함은 변함이 없으리라."
청림봉의 공지에 이른 두 사람은 십여 장의 거리를 두고 마주 섰다.
“자네, 기분 나쁜 사람이야."
운청산이 희미한 미소를 지으며 물었다.
“광오하단 말씀이십니까?"
백천휘의 말투가 부드러워지자 운청산의 말투도 달라졌다.
백천휘는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나도 모르는 천지의 일을 다 아는 듯해서 말이야. 묻겠네. 나는 이렇게 되도록 운명 지어진 사람이라고 생각하고 살았네. 그런데 왜 안 된다는 것인가?"
운청산은 미소를 지으며 반문했다.
“그걸 왜 제게 묻습니까? 이미 알고 계신 듯한데."
“내가 안단 말인가?"
“개인이 욕망을 추구하는 데에도 한계가 있지 않습니까? 그 욕망이 천명과 합치될 때에만이 순리라 할 것입니다. 천하를 움켜쥔 지배자들의 욕망이 그러하였습니다. 만인혈을 요구한다 해도 그 희생으로 천만인이 행복할 수 있다면 하늘도 그 욕망의 성취를 허락하지요. 그러나 지금은 때가 아닌 것 같습니다. 그걸 모르셨다면 일부러 실력을 보이지 않으셨겠지요. 실력을 드러내 보이시면서 상대에겐 감당하지 못할 위협을 그리고 수하들에게는 당장 싸우지 않아도 이긴다는 안도감을 주셨습니다. 결국 싸우지 않고 끝내고 싶으신 것 아닙니까?"
백천휘는 눈을 둥그렇게 뜨고 운청산을 보다가 웃으며 고재를 저었다.
“아니네. 설마 내가?"
“맞습니다. 오랫동안 망설이셨지요. 그 실력이 일 년 전이라고 달랐겠습니까? 그때 저는 겨우 검을 알아가던 때였습니다. 기우가 없었다면 이 자리에 서지도 못했을 것입니다. 망설이지 않으셨다면, 그래서 그때 직접 나서셨다면 어르신은 이미 천하를 가지셨을 겁니다. 그것이 비록 천명과 어긋나 한때의 영화로 끝날지라도, 그 끝에 후회만 남을지라도 군림하셨을 테지요. 무엇이 그렇게 어르신을 망설이게 했습니까?"
운청산의 물음에 백천휘는 투정 부리는 아이처럼 눈살을 찌푸리고 콧등에 주름을 잡았다.
“자네 정말 못마땅해. 남의 속을 다 들여다보고 있으면서 오히려 묻는군."
그렇게 말하면서도 백천휘는 승천도와 개조와 종지 그리고 백정휴가 남긴 말을 간단하게 들려주었다.
“그 미혹이라는 말이 지금껏 나의 발목을 붙잡고 있다네. 개조 그분과는 다른 인간이니 삶의 방식 또한 달라도 문제가 없다 생각하면서도, 한편으로는 그 경지에 달한 인간이 어째서 마지막에 미혹이라는 말을 남겼는지 이해를 할 수 없었어. 마지막에 가서 후회할 것이라면 천하를 가져서 무엇 하나? 도대체 그 숭고한 삶을 살았던 분이 무엇 때문에 그런 생각을 했는지 그 답을 알지 못한다면 더 나아갈 수 없다고 생각했지. 하지만 세상은 혼자 사는 게 아니네. 원하지 않더라도 해야 할 수밖에 없는 경우도 있지. 그래서 난 지금껏 방관했네. 내 제자가 패왕이 되고자하기에 그에게 내가 져야하는 짐을 떠맡기려 했어. 이제 알겠는가? 답해주게."
운청산은 고개를 끄덕이다가 생각을 가다듬었다.
“제 소견으로는 백정휴 조사란 분이 마경에 빠졌던 것 같군요."
백정휴가 호기심 어린 눈빛으로 말했다.
“입마경? 특이한 해석이군. 결국 민선지도는 마경이다?"
“그렇습니다. 원래 신선지도를 추구했던 분이 아닙니까?"
“그렇지. 그게 어떻단 말인가?"
“제 스승께서 말씀하시기를, 신선은 이기적이라 하셨지요. 주위를 둘러보지 않고 오직 개인의 완성을 이룬 사람이라 하셨습니다. 그렇게 이룬 완성의 경지는 변화에 동요없는 평정이라 하셨지요. 현생을 살면서 머리 속으로는 삼생을 사는 사람, 당장의 아픔이 과거의 업보요 미래의 기쁨인 것을 아는 사람, 모든 욕망이 부질없다는 것을 아는 사람, 그래서 만사를 평범하게 대하는 존재가 곧 신선이라 하셨습니다. 어르신의 조사께서는 신선경에 이르지는 못했으나 마지막에 결국 의미를 깨달으신 것 아닐까요? 마는 아름다운 모습으로 다가온다 했습니다. 결국 민선지도의 뜻은 좋았으나 후에 그 결과가 좋지 못할 것임을 예견하시고 후회를 하셨던 것이라 생각합니다."
백천휘는 뒤통수를 크게 얻어맞았다는 듯 눈을 치떴다가 호탕하게 웃으며 말했다.
“명쾌한 해석이군. 어떤가? 자네도 신선지도를 걷는 사람인가?"
운청산도 웃으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저는 그것이 재미없다 대답했고, 스승께서도 제가 이기적인 신선지도를 추구할 재목이 못 된다 하셨습니다. 적덕선이 되라 하셨지요. 저도 그쪽이 좋습니다."
“덕을 쌓아 신선이 된다? 그것이 민선지도와 다른 점이 무엇인가?"
“자유로움이지요. 남을 바꾸려고 노력하는 것이 아니라 남을 도움으로써 스스로를 돕는 것이 적덕선이라고 생각합니다."
“그 또한 좋은 대답! 많이 배웠어. 내가 이긴다면 심각하게 고민해 보아야겠구먼. 좋은 선생이었네만 양보할 생각은 없어. 어린 자네에게 무공까지 뒤진다면 그동안의 수련이 너무 허무해. 각오하게."
운청산은 백천휘의 어느새 차갑게 변해 버린 눈을 보며 피할 수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는 웃으며 하늘을 바라보았다. 푸른 하늘에 청룡이 떠다니고 있었다. 베어져 피를 흘리는 적룡이 눈물을 흘리고 있었다.
운청산은 손을 뻗어 직접 검파를 잡았다. 그리고 부드럽게 뽑아 땅을 겨누고 백천휘를 향해 고개를 숙였다.
“부탁드립니다."
백천휘도 포권을 취해 보이고 두 손을 가슴까지 들어 올렸다 순간 그의 두 손에서 하얀 뭉게구름 같은 기운이 뭉클뭉클 흘러나와 그의 전신을 똬리 틀듯 휘감았다.
그 같은 기운은 본 적이 없었다. 그가 최강이라고 생각하는 태악 도인의 기세도 백천휘의 기세에는 비할 바가 아니었다. 그러나 운청산은 차분하게 검을 내뻗을 따름이었다.
'건단곤예(乾端坤倪). 처음이 곧 끝이기에 처음도 없고 끝도 없다. 네가 할 일은 근원으로 돌아가는 것. 하나에서 둘이 쪼개져 나온 것이니 상대와 나를 하나로 돌려보내면 되는 것이라. 상대가 장하면 나는 부드럽고 상대가 유하면 나는 강하되, 제압이 아니라 화합에 이르는 적절한 힘을 안배하는 것. 나는 곧 태허에 이르리라‘
백천휘는 무언가 불편한 듯한 기색으로 가만히 기다렸다. 똬리를 튼 그의 기세들이 쉬지 않고 그의 몸을 취감아 폭발을 할 것만 같았다.
“준비가 된 것인가?"
운청산은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백천휘는 슬며시 손을 들어 올리며 눈살을 찌푸렸다. 아무리 보아도 공력 한 올 끌어올리지 않은, 텅 빈 듯한 모습이었다.
“난 모르네. 갈 것이야."
말을 끝맺는 그 순간 백천휘는 바로 손을 뻗었다. 그의 전신을 감고 있던 백룡이 손끝을 따라 뇌전처럼 운청산에게로 달려들었다. 그 순간 운청산은 부드럽게 검을 내뻗어 달려드는 백룡의 정수리를 찍고 몸을 휘돌리며 뒤로 검을 내뻗었다.
백룡은 운청산을 물지 못하고 그의 결을 스치고 지나갔다. 그러나 이내 검끝을 따라 다시 운청산에게로 달려들었다. 그러나 이번에도 마찬가지였다. 낚싯줄에 매달린 물고기처럼 운청산의 검끝을 따라 움직일 뿐이었다.
백천휘는 안색을 바꾸고 왼손을 내뻗었다. 또 한 마리의 백룡이 운청산의 가슴을 노리고 들어왔다. 운청산은 이미 잡아채고 있던 백룡을 다가오는 백룡을 향해 내뻗었다.
쾅!
두 줄기 기운이 부딪치면서 청림봉의 나무들이 잎을 떨어뜨렸다.
운청산은 검을 휘돌려 두 기운이 부딪친 후 허공을 떠도는 여기(餘氣)를 빨아들였다. 그의 검을 따라 다시 백천휘의 기운이 돌고 바람이 따라 돌고 나뭇잎들이 같이 휘돌았다.
백천휘는 새로이 기운을 일으켜 열 손가락을 동시에 퉁겼다. 손목을 비틀어 다시 퉁기고 또다시 퉁겼다. 수십 줄기 기운들이 어떤 것은 직선으로, 어떤 것은 부드러운 포물선과 반원을 그리며, 또 어떤 것은 느리고 또 어떤 것은 빠르게 운청산을 향해 날아갔다. 운청산의 입장에서는 허허벌판에서 우박을 맞는 것 같으리라.
그러나 운청산의 표정에는 흔들림이 없었다. 그의 전신에서 푸른 기운이 흘러나와 몸을 감싸는 순간 그의 신형이 제자리에서 휘돌았다 동시에 그의 검이 허공에 그물을 치듯 흔들렸다.
바람을 가르는 소리와 함께 운청산을 향해 날아가던 하얀 기운들이 그물에 걸려 멈칫거렸다. 그 순간 운청산이 검을 잡아 때듯 당겨 부드럽게 휘돌렸다. 고기를 가득 잡은 그물을 끌어 올리듯 운청산이 허공에 그린 그물이 백천휘의 기운을 모아 가두고 운청산의 검첨을 따라 그의 주위를 맴돌았다. 청기와 백기들이 뒤섞이고 어느새 하나의 기운이 되어 운청산을 보호하듯 원을 그렸다.
백천휘는 운청산의 검첨을 따라 휘도는 기운을 보고서 이미 승패가 났음을 깨달았다.
‘나는 이미 초식이 필요없는 경지에 이르렀다. 부드러움과 강함, 노도와 춘풍은 물론 이 두 손으로 천지의 모든 변화를 일으킬 수 있다. 그러나 그 어떤 변화를 일으킨다 해도 저 아이에겐 소용이 없는 짓이리라. 저 녀석은 나와 싸우는 것이 아니다. 그저 변화의 근원에 자리하고 있을 뿐이다. 저것이 바로 태허도룡검인가?’
백천휘는 씁쓸하게 웃고 두 손을 거두고 말았다. 태을검선이 백천휘 그의 사부의 수강을 가지고 놀다가 끝내 되돌려주었듯이 운청산이 검을 뻗는 순간 그 역시 피를 토하고 말리라. 그러나 백천휘가 미리 그린 그림과는 달리, 운청산의 검첨에서 떠돌던 기운이 씻은 듯이 사라져 버렸다.
“시작을 했으면 끝을 봐야지, 왜 멈추었는가? 자네 쪽에서 보면 나는 만사만악의 근원. 혈겁의 원흉이요, 곤륜의 전대 장문인과 그 제자들을 죽인 흉수야. 나를 죽여야 세상이 조용해져."
“만사만악의 근원은 화합하지 못하여 편을 가르는 것입니다. 그때부터 반목하여 다투게 되지요. 해와 달, 낮과 밤, 양과 음이 편의상 구별된다 하나 그것들은 서로 반목하지 않습니다. 서로의 모자란 부분을 채워 완전해지고자 할 따름이지요. 죽음 또한 마찬가지입니다. 죽음은 끝이 아니라 내생의 시작일 뿐. 분노할 일도 슬퍼할 일도 아니지요. 제가 천지의 왕을 자처하며 나선 뜻은 편을 갈라 한쪽의 이익을 대변하고자 하는 것이 아닙니다, 천지가 하나이듯 사람 또한 더불어 사는 것이 옳은 듯하여 제가 할 수 있는 만큼 해보자는 의도일 뿐입니다. 어르신은 이같이 간단한 이치를 외면하지는 않으실 분. 싸움을 멈추게 하셨을 때, 이미 그 이치를 깨닫지 않으셨습니까? 수련에 익숙한 분이시니 깨달은 것을 행하는 일이 어찌 어렵겠습니까? 득선하십시오."
운청산은 깊숙이 허리를 접어 보이고 돌아섰다.
“잠깐! 이것 가져가게."
운청산이 돌아서는 순간 망사와 같은 하얀 장포가 부드럽게 날아왔다.
“가진 게 옷뿐이군. 그걸 보여주게. 그러면 군말없이 돌아들 갈 걸세."
운청산은 말없이 웃으며 목례했다.
백천휘는 운청산이 완전히 사라질 때까지 보고 있다가 주위를 한 바퀴 휘돌면서 한숨을 내쉬었다.
“허! 막막하구나. 모든 일을 주위에서 다 해줘서 어찌 살아야 할지도 모르겠어. 걸음마부터 다시 배워야 하는가? 어디로 가야 하는가?”
말은 그렇게 해놓고도 백천휘는 아이처럼 밝게 웃었다.
“극현이었지, 아마? 자네 뜻을 이루어줄 수가 없구먼. 아니지. 자네가 말하는 세상이 어떤 것인지 아직도 모르겠어. 하지만 천지를 다 가신 저 아이가 장차 만들 세상에서는 무인이 무인답게 살 수 있지 않을까? 그렇군. 곤륜으로 가볼까?”
백천휘는 웃음소리만 남긴 채 북쪽으로 사라져 버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