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77화 (77/79)

제 7장 하늘이 내게 주신 명이 있어

  감숙성의 남단 벽구의 허허벌판에 점 하나가 보이는 듯 싶더니 동남쪽을 향해 맹렬한 속도로 움직였다. 점은 어느새 사람의 형상을 띠었다가 이내 어굴까지 확연하게 드러냈다. 운청산이었다. 

  운청산은 두 다리를 땅에 붙인 그대로 가만히 서 있었다. 그러나 이상하게도 그의 신형은 울렁거리는 땅을 타고 빠른 속도로 이동하고 있었다. 그 속도는 경신술을 펼친 것과는 비교할 수도 없이 빨라서, 운청산은 어느새 벽구의 외곽을 지나 감숙성과 섬서성의 경계 가릉강변에 이르러 있었다. 

  운청산의 신형이 가릉강 앞에 멈추어 섰다. 정확히 말하자면, 애초에 움직이지 않았으니 멈추어졌다는 것이 맞으리라.

  운청산이 가릉강의 짙푸른 물을 바라보는 순간 그의 옆 땅이 일렁이다가 사람 크기만하게 솟구쳤다. 하나의 흙 기둥에 불과했던 그것이 부분부분 떨어져 나가고 오므라들었다가 튀어나오기를 반복하여 이내 의관을 정제한 장년인의 모습으로 돌변했다.

  흙으로 빚은 장년인이 운청산에게 포권을 취하고 읍하며 말했다.

  “신축으로 말하는 분이여! 소관은 더 이상 그대를 모실 수 없소이다."

  운청산도 흙으로 빚은 장년인에게 포권을 취하고 읍하여 말했다.

  “관할을 벗어나지 못함을 잘 아고 있습니다. 예까지 편하게 데려다 주셨으니 감사할 따름입니다."

  “아니오. 한낱 자신에 불과한 이 몸이 어찌 천상의 요어로 말씀하시는 분의 부탁을 거절할 수 있겠소. 가시는 곳까지 모셔다 드리지 못함을 죄스럽게 생각하오이다."

  “수고를 끼쳤습니다. 관리하시는 땅이 늘 평안하기를 빌겠습니다. 그럼!"

  운청산이 다시 포권을 취해 인사하자 지신 또한 포권을 취해 보이고 땅속으로 스며들었다.

  ‘하! 그것참 편하군. 지신 둘을 불러내니 곤륜에서 감숙 땅 끝까지 겨우 반나절 만에 오는구나. 축지(縮地)가 곧 비보(飛步)인 줄 알았더니 이런 것도 있었어.'

  운명산이 감탄하자 운청산은 웃으며 설명했다. 

  ‘비보는 가장 기초적인 축지법이지요. 광활한 영토를 관할하는 대관(大官)인 지신에게 직접 부탁하는 것이 아니라, 부적을 이용하여 각 영역의 토지신과 산신들에게 도움을 구하는 것입니다. 토지신과 산신들이 비보를 행하는 사람의 걸음걸음을 떠받쳐 주어 빠르고 편하게 움직일 수 있도록 도와주는 것이지요. 그 외에도 제가 조금 전에 도움을 받았듯이 대관인 지신에게 바로 요청하는 신행(伸行)이 있고 지신이 아닌 풍신에게 도움을 구하는 풍축(風縮)이 있습니다. 이제 강을 건너야 하고 또다시 입산하여야 하니 풍축으로 움직일까 합니다.'

  운청산은 말을 끝내자마자 바로 검을 뽑아 들고 허공으로 치솟아올랐다. 십여 장을 솟구쳐 오른 순간 그는 붉게 달아오른 검을 부드럽게 휘돌렸다.

  운청산은 검첨에서 뽑아낸 붉은 기운으로 허공에 붉은 글씨를 쓰기 시작했다. 좌우로는 풍우(風佑)를 쓰고, 앞으로는 풍인(風引)을 쓰고, 뒤로는 풍추(風推)를 쓰고, 머리 위로는 다시 풍인을 쓰고 발 아래로는 풍봉(風捧)을 썼다. 그리고 신축으로 중얼거렸다. 

  “천지의 바람을 관장하는 풍신이여! 부탁하노니 나를 감싸고 나를 밀고 나를 당겨 사천 땅 검각산으로 데려다 주오."

  없던 바람이 불었다. 그 순간 허공에 또렷하게 남아 있던 붉은 글씨들이 부서지듯 가루로 화하여 순식간에 사라졌다. 

  운청산의 신형이 아래로 떨어지려는 순간 그의 발 아래서 돌개바람이 일더니 그를 떠받쳤고 다시 등 뒤에서 바람이 불어 그의 전신을 감쌌다. 

  운청산은 남쪽을 향해 검을 내뻗었다. 그 순간 바람으로 와서 그를 감싼 기운이 다시 세찬 바람으로 돌변하여 가릉강을 따라 빠른 속도로 남하했다. 

  늘 그렇듯이 새벽녘에 눈을 뜬 운검정은 가볍게 몸을 움직여 정신을 차리지 못하던 신경들을 일깨웠다. 그리고 또 늘 그렇듯이 창문을 열어 검각산을 바라보았다. 

  평생토록 가장 보람있었던 일을 꼽으라면 검각산의 요풍을 잠재운 것이었다. 가주의 자리를 벗어던지고 난 후 그나마 행복한 일이 있다면 운녹산이 푸르게 변화시킨 검각산을 바라보는 일이었다.

  운검정에게 있어서 검각산은 운가가 존재해야 하는 이유나 마찬가지였다. 힘을 가진 자가 약자에게 도움이 된다는 것, 운가가 있음으로 해서 천북 사람들이 평안하게 살아갈 수 있다는 것, 푸르른 검각산은 그 증거였다. 

  그 검각산에 변화가 생겼다. 아직 이렇다 할 변괴는 일어나지 않았으나, 운검정은 검각산의 푸른 숲이 내뿜는 공기가 더 이상 맑고 깨끗하지만은 않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무슨 일일까? 요기는 모두 퇴치되었다. 요기도 천지를 떠도는 기운이라 영구히 소멸시킬 수는 없다 하나 산산이 흩어놓았으니 다시 악기가 모이고 변고가 생기려면 오백 년은 더 지나야 할 것이라 했다. 더구나 탁탑참요검의 영력이 완전히 사라진 것도 아니며, 산신 또한 힘을 조금씩 되찾고 있다 하지 않았는가?"

  산 전체를 훑다가 숨은 듯 삐죽 머리만 드러낸 청림봉에서 멈춘 운검정의 노안이 세차게 흔들렸다. 그는 더 이상 견디지 못하고 검을 쥐었다. 

  산의 초입은 늘 그러하듯 풀 냄새 싱그럽고 벌레 소리 정겨웠다. 그러나 깊이 들어가면 갈수록 공기가 답답해지고 산다운 냄새와 소리도 사라져 갔다. 

  마침내 청림봉의 입구에 이른 운검정은 눈살을 찌푸렸다. 당연히 들려야 할 모든 소리가 숨을 죽이고 있었고 코끝에서는 비릿한 냄새가 감돌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산 전체에서 요악한 살기들이 흘러나와 신경을 건드렸다. 

  ‘분명히 무언가 있다. 흘리고 넘어가면 나중에는 걷잡을 수 없을지도 몰라.'

  가능하면 만사에 나서지 않으려 했다. 귀찮아서라기보다는 작은 일에라도 자신이 직접 나선다면 책임을 맡긴 운녹산이 쉽게 처신할 수 없는 탓이었다. 그래서 천하무림의 반이 천북에 모였을 때에도 그는 운녹산이 운가의 책임자임을 확신시켜 주기 위해 숨듯이 나타나지 않았던 것이다. 하지만 지금은 상황이 달랐다. 

  며칠 전까지만 해도 맑고 푸른 산이었다. 그런데 요 며칠 갑작스럽게 요기가 느껴졌다. 기우라고 생각했건만 직접 와보니 느낌과 다름이 없었다. 운녹산이 돌아온 후에 처리하려면 그때는 커다란 공력을 소모해야 할지도 모를 일이었다. 

  운검정은 일단 청림봉을 벗어나서 전신에서 자연스럽게 피어오르는 기세를 죽였다. 그리고 다시 청림봉 입구에 발을 들여놓았다. 미세하던 살기들이 살갗을 파고드는 것으로 모자라 끈적끈적한 시선까지 느껴졌다. 

  운검정은 걸음을 옮겨 산 중턱에 이르렀다. 녹음이 점점 짙푸르러 가는데 평소와는 달리 음산하게 느껴졌다. 칙칙한 호흡 소리가 들리기 시작하더니 점차 가빠졌다. 조심스러우면서 재빠른 움직임 소리가 사방에서 흘러나오고 끈적거리던 시선이 축축한 물기가 되어 뚝뚝 떨어지는 것만 같았다. 

  운검정은 너무 짙어 검게 느껴지는 숲 앞 벌판에서 아무것도 모르는 사람처럼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그리고 의식적으로 등줄기를 움츠려 두려움의 기운을 몸 밖으로 흘려보냈다. 

  치치치치치칙!

  사방에서 고양이만한 들쥐들 수백 마리가 등시에 송곳 같은 이빨을 드러내며 나타나 위협음을 흘렸다. 

  ‘어찌 이런 일이! 이 많은 들쥐들이 회귀로 돌변할 만큼 요기가 창궐했단 말인가? 어떻게? 저놈들이 저만큼 켰다면 다른 놈들 또한 있으리라. 도대체 이 청림봉에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 것인가?'

  운검정은 서서히 포위망을 좁혀오는 회귀들을 보면서 회귀들 너머의 기운들을 살폈다. 숲 밖으로 몸을 드러내지는 않았지만 회귀들과는 비교도 할 수 없는 강하고 기분 나쁜 기운들이 느껴졌다. 몇몇은 아예 피에 굶주린 듯한 붉은 눈을 검은 숨 밖으로 드러내고 있었다.

  찌익!

  가장 덩치가 큰 회귀의 입에서 비단 찢어지는 듯한 소리가 터져 나오는 순간 수십 마리 회귀들이 일시에 달려들었다. 

  운검정은 일부러 기운을 다 드러내지 않고 검신에만 미약한 기운을 실어 원을 그리듯 주위에 방어막을 쳤다. 너무 강한 기운을 드러내면 다른 놈들이 정체를 드러내지 않고 숨을 가능성이 있는 탓이었다.

  회귀들의 움직임은 정교한 검세를 보는 것 같았다. 언뜻 보면 무질서하게 달려드는 것 같으나 수십 마리가 동시에 달려들면서도 단 한 번의 부딪침도 없었다. 그러나 운검정의 방어막 또한 최상의 수비식. 너무나 가늘어 쉽게 드러나지 않지만 한편으로는 너무나 촘촘하여 결코 들어가지 못할 방어막이었다. 

  처절한 비명 소리가 들렸다. 십여 마리의 회귀들이 운검정의 검세에 휘말려 피를 뿌리고 바닥에 떨어졌다. 그러나 그것을 확인한 운검정의 안색은 어두웠다. 

  ‘이놈들, 예전보다 훨씬 더 교활해졌구나. 어느 한 놈 벗어나지 못해야 마땅하건만 큰 놈들이 작은 놈들을 검세로 떨어내고 물러섰다. 힘이 많이 들겠어.'

  회귀들이 문제가 아니었다. 아무리 않다 해도 운가 사람들로 하여금 사냥하는 셈치고 몰아가면 어렵지 않게 소탕할 수 있으리라. 문제는 숲 속에서 눈치를 살피고 있는 커다란 놈들이었다. 

  ‘난감하구나. 이것들을 다 치우면 겁먹고 나타나지 않을 것인데...... 그렇다고 내가 숲으로 들어가서 잡아내기도 어려운 일. 어찌해야하는가?'

  해답을 찾을 겨를도 없었다. 일단 물러섰던 회귀들과 뒤에서 대기하고 있던 회귀들이 일시에 달려들었다. 운검정은 어쩔 수 없이 무극금정강기를 일으켰다. 

  그의 전신에서 금빛 실 같은 기운들이 흘러나오더니 난마처럼 뒤엉켜 금빛 원구를 이루었다. 그리고 그 빛을 더하여 사방으로 흩어졌다. 무극금정강기가 무려 삼 장이나 뻗어 나갔다. 거기에 휘말린 대부분의 회귀들은 비명도 질러보지 못한 채 가루가 되어 흩어져 버렸다. 

  남은 회귀들은 겨우 사오십 마리. 그것들은 단번에 이빨을 감추고 털을 눕히며 꼬리를 감은 채 사방으로 흩어졌다. 그 순간 숲 밖으로 드러나 있던 붉은 눈빛들이 하나씩 꺼져 결국은 모두 사라져 버렸다. 

  “어허! 이거 낭패로고. 저것들이 이제 몸을 숨긴 채 힘을 기를 터인데 알고도 찾을 방도가 없으니 이 일을 어찌할꼬?"

  그때 운검정의 등 뒤에서 갑자기 시원한 바람이 불었다. 갑작스러운 바람이었으나 운검정은 따로 경계하지 않았다. 산이 풍기는 요사한 기운과는 달리 머리까지 맑아지는 청량함이 느껴졌기 때문이었다.

  운검정은 바람이 멈춘 순간 천천히 몸을 돌렸다. 그리고 눈을 치었다. 

  “청봉?"

  왼쪽 눈에 가죽 안대를 대었으나 분명히 운청산이었다. 그러나 그는 당장 운검정을 바라보지 않았다. 허공을 바라보며 알 수 없는 이상한 목소리로 중얼거릴 뿐이었다. 

  운검정은 운청산이 갑자기 나타난 것과 연계하며 이유가 있을 것이라 생각하고 기다렸다. 그리고 잠시 후 운청산은 중얼거림을 멈추고 허공을 향해 포권을 취하며 허리를 접었다. 그 순간 잦아들었던 바람이 다시 일어나더니 순식간에 허공으로 사라져 버렸다. 

  운청산이 운검정에게로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 미소를 지으며 절을 올렸다.

  운검정은 우선 운청산의 눈이 그렇게 된 까닭부터 물어보려고 했으나 생각을 접었다. 한쪽 눈만으로도 두 눈의 반짝임을 그대로 드러내고 있었고 그 얼굴에 드러나는 여유로움 또한 전에 없던 것이기 때문이었다. 

  “네가 또 와주었구나."

  운검정은 반가움을 그대로 드러내며 운청산의 어깨를 쓰다듬었다.

  운청산은 좌우를 둘러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운검정에게 웃어 보이며 말했다. 

  “할아버님, 제가 잠시 얼굴을 만져 보아도 되겠습니까?"

  갑작스러운 일이었지만 싫다고 할 일은 아니어서 운검정은 고개를 끄덕였다. 

  “잠시만 눈을 감아주십시오."

  운검정이 눈을 감자 운청산은 붉게 변한 두 손 엄지로 그의 눈두덩을 쓰다듬었다. 

  “이젠 뜨셔도 됩니다."

  운검정은 가슴속에 의아함을 담아두고 눈을 떴다. 순간 그의 눈에 열 사람의 혼령이 또렷하게 보였다. 흠칫 놀라는 순간 열 혼령들이 얼굴에 미소를 담뿍 담은 채 절을 했다. 

  “너... 너희들은?"

  운검정은 믿어지지 않는다는 얼굴로 운청산을 주시했다. 운청산은 고개를 끄덕였다. 

  “맞습니다. 여덟 숙부님들과 제 어머니 그리고 당가의 영애이자 제 사람입니다."

  운검정은 다시 운현산 등을 하나하나 살폈다. 마지막 열 번째 영혼인 운초산까지 확인한 그의 눈에 물기가 어렸다. 

  운검정은 모두를 보며. 특히 운현산과 운경산을 주시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그래. 모두가 좋아 보이는구나. 청봉에게 매여서 승천하지는 못하나 너희들 모두가 신명을 되찾아 구천을 떠돌지 않는다는 소리를 들었다. 고맙구나. 이렇게 밝은 모습으로 다시 볼 수 있어서 정말 고마워."

  운청산은 한동안 운검정과 영혼들의 대화창구가 되었다. 처음에는 눈물로 시작된 대화가 차츰 정겨움으로 변했다. 할 말이 참으로 많을 것 같았는데도 불구하고 운검정과 운현산 등은 몇 마디를 교환한 후 미소만 지을 따름이었다. 

  대충 대화가 마무리된 듯하자 운청산이 청림봉을 둘러보며 말했다. 

  “요기가 상당하더군요."

  운검정이 정겹게 웃다가 눈살을 찌푸리며 말했다. 

  “너도 느꼈느냐?"

  “오면서 보았습니다."

  “보았다?"

  운검정은 되물으면서도 운청산이 갑자기 나타난 것과 혼령을 볼 수 있게 해준 능력을 떠올리며 수긍의 낯빛을 드러냈다. 

  “제가 오면서 검각산을 대충 훑어보았습니다만 요기는 오직 이곳에서만 유독 강하게 느껴졌습니다. 그래서 이곳으로 온 것이지요. 그 같은 경우는 자연스럽지 못합니다. 봉산결계의 기운이 남아 있다 해도 그것이 검각산을 봉하는 것이지 이곳 청림봉을 봉하는 것은 아닙니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이미 뭉쳐진 요기를 누군가가 풀어놓고 통제하고 있다는 뜻이 되겠지요."

  운검정은 눈살을 찌푸리며 물었다. 

  “누군가 통제하고 있다? 허면 산신은 무얼 하고 있단 말이더냐?"

  “움직일 수 없는 처지가 된 모양이지요. 일단 가보시지요."

  운청산은 대수롭지 않게 말하고 숲으로 손을 뻗었다. 운검정은 청하는대로 발걸음을 옮겼다.

  운청산은 마치 산의 구석구석을 다 알고 있는 듯 주저 없이 숲의 중앙으로 들어섰다. 운검정은 크게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들성들성하여도 나무들이 제법 많아서 예전과는 크게 달라졌지만 틀림없이 운녹산이 수청목에 달라붙은 팽후를 퇴치한 곳이었다.

  운청산은 그 가운데 가장 음산한 빛을 드러내는 나무의 주변을 둘러보다가 오른손 검지를 들어 빈 공터를 향해 휘돌렸다. 붉은 기운이 줄기줄기 뻗어 나가자 온천지가 불꽃 염(?)자에 휩싸이는 듯했다. 그리고 파지직 소리가 나며 뿌연 안개가 피어올랐다.

  불꽃 염 자들이 사라지고 안개가 걷힌 그 자리에 말라비틀어진 노인이 나타났다. 그러나 사람은 아니었다. 보이는 것이 미묘하게 달라서 운현산 등을 보는 것과 비슷한 느낌이었다. 운검정이 놀라서 눈을 치뜨는 순간 운청산과 노인이 서로에게 허리를 접었다. 

  “괜찮으십니까?"

  “신축으로 말하는 분이시여! 구해주셔서 고맙소이다."

  “어쩌다 그리되셨습니까?"

  검각산의 산신인 노인은 천기신사에게 당했던 일을 처음부터 차분히 말했다. 

  “선인께서 좀 도와주시구려. 결계에 갇혀 있다 보니 안 그래도 모자란 힘까지 모두 잃고 말았구려."

  운청산은 고개를 끄덕이고서 운검정을 보았다. 

  “아직은 보이시지요? 검각산의 산신이십니다."

  운검정은 노인에게 허리를 접어 보였다. 노민 또한 예를 행하고 운청산에게 말했다. 

  “산신이 자신의 산조차 제대로 통제하지 못하니 운 대협께서 노고가 많으십니다. 매번 이렇게 걱정을 끼쳐 드려 몸 둘 바를 모르겠소이다."

  운청산은 운검정에게 산신의 말을 전하고 천기신사의 일도 모두 전했다. 그때 산신이 다시 운청산에게 말했다. 

  “열나흘을 묶여 있었으니 내일이면 요기가 절정에 다할 것이오. 오늘 안에 어떻게든 그것들을 잠재워 두어야 하는데, 대충 보아도 모두가 몸을 숨긴 듯하니 어찌 찾아내야 할지 도무지 방도가 생각나지 않는구려."

  운청산은 산신에게 부드러운 미소를 지어 보이고 그와 운검정에게 다시 벌판으로 나가기를 청했다. 

  모두가 다시 벌판으로 나서자 운청산은 산신과 운검정에게 좌정하기를 청하고 운현산 등에게 말했다. 

  ‘제가 지금부터 청각을 불 것입니다. 산속에 숨어 있는 요물들이 감히 대항하지 못하고 나와서 엎드릴 것이니, 숙부님들께서 그것들의 몸속으로 들어가 요기를 흩어놓아 주십시오.'

  운현산이 물었다. 

  ‘우리가 그것을 할 수 있단 말이냐'

  운청산이 웃으며 두 손을 머리 위로 가져갔다. 순간 운청산의 여덟 손가락 끝에 맺혀 있던 여덟 영혼들이 예전과 같이 정수리에 이어졌다.

  ‘숙부님들이 저와 함께 수련한 것도 적지 않았고 제 몸속에 깃든 영 역시 요기를 간과하지는 않을 것입니다. 요기가 어디에 맺힙니까?'

  운현산은 자신도 모르게 이마를 짚었다. 운청산은 웃으며 고개를 끄덕이고 다시 말했다.

  ‘그 안으로 스며들어 그동안 닦은 영검으로 요기라고는 생각되는 기운을 베어버리면 될 일입니다.'

  ‘알겠다. 검각산은 우리의 놀이터였다. 이제 청소한다고 생각하면 즐거운 마음으로 행할 수 있겠구나.'

  ‘그리하시면 됩니다.'

  운청산은 운검정의 맞은편에 좌정한 후 품속에서 옥소를 꺼냈다. 그리고 산신과 운검정을 보며 말했다. 

  “이제 청각조를 불 것입니다. 놀람은 있을지언정 어려움은 없을 것이니 마음을 차분히 가라앉히고 앉아만 계십시오."

  산신이 놀라서 심호흡을 하고 가부좌를 틀어 앉았다. 청각조가 무엇인지 모르는 운검정 역시 산신의 태도를 보고 호흡으로 마음을 가라앉혔다. 

  청각조.

  궁상각치우 오음으로 제정된 음률 가운데 각음을 바탕으로 한 음률이었다. 오음을 바탕으로 한 음률들은 저마다 특색이 있고 저마다 뜻하는 바가 있는데, 특히 청각조는 선령선신을 부리고 귀신을 제압하는 천상의 곡조라 했다. 궁상치우의 사음을 바탕으로 한 음률은 술사들과 음률가들을 통하여 고대로부터 전해져 내려오나 청각조만큼은 전해지지 않았다. 이는 덕이 박한 이가 청각조를 불게 되면 오직 불길한 일만이 일어나는 까닭이었다.

  그러나 운청산은 이미 청각조를 경험한 바 있었다. 바로 삼청궁을 향하여 올라가던 그때, 선녀가 그를 맞고 온갖 상서로운 동물들이 나타나는 동안 천상의 악대가 불렀던 그 곡이 바로 청각조였다. 운청산은 그것을 재현하려는 것이었다. 

  운청산은 눈을 지그시 감고 정신을 집중하여 간절한 마음으로 청각조를 불기 시작했다. 

  옥소 소리가 흘러나오는 순간 갑자기 일진광풍이 몰아치고 땅이 들썩이며 뇌성벽력과 함께 폭우가 쏟아졌다. 그와 함께 사라졌던 회귀들이 기다시피 나타나 운청산의 주변에 엎드리고, 오 장이 넘는 대망이 나타나 똬리를 튼 채 오돌오돌 떨고, 붉은 기운이 감도는 은빛 여우가 불쌍한 눈빛을 드리운 채 세 개의 꼬리를 다리 사이로 말아 넣고 땅에 고개를 처박았다. 그 외에도 산에 사는 짐승들이 원래의 모습과는 조금씩 다른 모습으로 나타나 운청산의 주변에서 몸을 떨고 있었고, 나무 밑바닥에서도 원숭이 같은 것이 튀어나와 납작 엎드렸다.

  ‘가세요.'

  운청산의 영에 의해 밝은 정신을 유지하고 있던 운현산등은 운청산의 전언을 듣자마자 팔방으로 흩어졌다. 모여 있던 짐승들이 모두 눈을 부릅뜨고 두려움에 떨었으나 어떤 짐승도 감히 운현산 등의 진입을 거부하지 못했다. 

  운현산 등이 엎드려 있는 짐승들의 머리 속으로 파고들었다. 그때부터 검은 연기들이 피어올랐다가 연하게 흩어져서 땅속으로 스며들고, 요기가 발한다고는 생각할 수 없는 애절한 비명 소리도 계속해서 울려 퍼졌다. 비명을 내지른 짐승들은 어느새 짐승 본연의 모습을 되찾고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그러나 곧 음률이 발하는 기상에 놀라 다시 납작 엎드렸다. 

  운현산이 마지막 팽후의 몸에 들어갔다. 나오니 팽후는 그 자체로 기화되어 흩어져 버렸다. 그 순간 운청산이 옥소에서 입을 떼고 눈을 떴다. 

  산신과 운검정의 입에서 한숨이 새어 나오는 순간 꼼짝 못하고 엎드려 있던 짐승들이 화들짝 놀라 사방으로 흩어졌다.

  운청산은 운현산 등을 바라보며 미소를 지었다. 

  ‘수고하셨습니다.'

  ‘수고는. 좋은 경험이었다. 네 영력이 내 속으로 파고들어 예리하면서 맑은 기운을 유지하게 해주더구나.'

  운현산 등은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으며 운검정을 바라보았다. 운검정 또한 모든 과정을 지켜본 듯 놀라면서도 기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운청산은 산신에게로 시선을 들려 말했다. 

  “이제 한동안은 걱정 없으실 겁니다."

  산신은 감격하여 포권을 취하고 허리를 접었다. 

  “기력을 되찾는 대로 오늘의 일을 반드시 하늘에 고하도록 하겠소이다."

  “그러실 필요 없습니다. 하늘이 제게 능력을 빌려주신 뜻이 무엇이겠습니까? 당연히 할 일을 한 것입니다."

  “아니오. 내 반드시 하늘에 고하고 천지에 가득한 선령선신들에게 알려 은공이 하시는 일이면 무엇이든 최선의 조력을 아끼지 말라 부탁할 것이오. 다시 한 번 은공께 감사드리오."

  “알겠습니다. 어쨌든 지금은 편히 쉬시고 기력을 되찾는 데 주력하십시오."

  산신은 힘없이 미소를 지으며 땅속으로 스며들었다. 

  “청봉아! 이게 어찌 된 일이냐? 아이들이 보이지 않는구나."

  운검정이 감자기 당황하여 주변을 두리번거리며 물었다. 운청산은 웃으며 대답했다. 

  “영안지술을 오래 유지하면 건강에 좋지 않습니다. 다음에 다시 영안을 열어드릴 테니 너무 아쉬워하지 마십시오."

  운검정은 쓸쓸히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운청산이 옥소를 품 안에 갈무리하며 말했다. 

  “아무래도 가보아야 할 것 같습니다."

  운검정이 놀람 반 섭섭함 반으로 표정을 짓고 말했다. 

  “온 지 얼마나 되었다고 벌써 간단 말이냐?"

  “하늘이 제게 능력을 주신 뜻이 있으니 마땅히 따라야 하지 않겠습니까? 이제는 아무런 의미도 없는 싸움을 멈추어야겠습니다."

  운검정은 잠시 생각에 잠겼다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검단협곡으로 간다는 말이었구나. 그런데 아무런 의미가 없다 했더냐? 그 많은 사람들이 서로 피 흘리며 싸우는데도 거기에 아무런 의미가 없단 말이지? 그래. 나 또한 그리 생각은 하고 있었다. 무력을 사용하는 일, 피 흘리는 일은 진정으로 지킬 가치가 있는 것을 지키기 위해서 행해져야 의미가 있겠지. 그러나 지금의 싸움은 그것이 아닌 듯하구나. 감정으로 인하여, 또는 오만과 욕심으로 인하여 시작된 일이다. 밖으로 드러나는 명분이 아니라 가슴이 말하는 대의와 명분에 따랐다면 좀 더 냉철하고 차분하게 그리고 쉽게 풀 수도 있었을 일이었다. 그것을 알면서도 일이 너무 커져서, 혼자서는 어떻게 해볼 도리가 없어서 보고만 있었다. 헌데 네 힘으로 그것을 할 수 있겠느냐?"

  운청산은 부드럽게 미소 지으며 대답했다. 

  “천명이 정녕 제 뜻과 같다면 그리되지 않겠습니까?"

  운검정도 웃었다. 

  “진인사대천명(盡人事待天命)이란 말이지? 그래. 가보거라. 아니다. 나도 같이 가겠다."

  운청산은 고개를 끄덕이고 손을 뻗어 운검정에게 앞서 가기를 청하였다.

  끊어질 듯 이어지는 간도 삼백 리. 가끔씩 넓은 길이 나오기도 하나 대개는 벼랑을 파서 길을 낸 잔도로 이루어져 있다. 

  그 금우고도의 남쪽 입구에 삼심여 명의 사람들이 잔도의 벽에 등을 기댄 채 눈을 감고 앉아 있었다. 운녹산 등의 무림련 수뇌들과 스물두어명의 장년 고수들이었다. 

  붉은 태양이 반대 편 산등성이에 머리를 내밀었다. 붉은 햇살이 세력을 뻗치자 몇몇 사람들이 눈살을 찌푸리며 눈을 떴다.

  운녹산은 무릎 위에 놓아두었던 애도 청룡을 집고 일어섰다. 그리고 어제까지만 해도 무너지지 많으리라 믿고 있던 검단협곡을 착잡한 눈빛으로 바라보았다. 

  ‘어쩌다가 이 지경까지 몰렸단 말인가? 하! 어리석구나. 계속해서 당해왔으면서 또다시 허를 찔려 물러섰다.'

  아무리 생각해도 이상했다. 크고 작은 싸움이 있었다지만 상대와 직접 맞부딪친 것은 단 세 번. 그 세 번의 싸움에서 운녹산 측은 언제나 상대보다. 적은 피해를 입었다. 그런데도 늘 몰리는 느낌이었고 결국 잔도까지 밀려나 있었다. 

  운녹산은 다른 사람이 듣지 못하도록 목까지 차 오른 한숨을 나누어 뱉었다. 

  ‘전력이 모자란 것은 아닐 것이다. 결국 죽기를 각오하고 싸우는 자들과 살아서 이득을 취하려는 자들의 마음가짐 차이인가? 꼭 궁지에 몰린 쥐새끼 같구나. 안 된다. 여기서 더 물러서면 내 대에서 운가가 끝장나는 것이나 다름없다. 오명을 쓰고 망혼이 되지 않으려면  죽기를 각오하고 싸워야 해.'

  순간 운녹산의 입가에 씁쓸한 미소가 어렸다. 

  ‘허허허! 우습군. 도대체 무엇을 믿고 그렇게 자신만만했던가? 무엇을 믿고 세상을 질타하지 못해 안달을 했던 것인가? 무엇을 믿고?'

  “허허허!"

  스스로를 비웃던 그 웃음소리가 자신도 모르게 밖으로 새어 나왔다. 

  생각해 보니 상대는 늘 그를 가지고 놀았다. 지략으로 달렸으면 무공이라도 나아야 할 텐데 그 또한 어금버금하여 한 치의 우위조차 자랑할 수 없는 처지었다. 그런데도 며칠 전까지 세상의 정점에 설 수 있을 것이라 자신하고 있었던 것이었다. 

  밀리던 사천무림련이 운가에서 힘을 정비하고 다시 전세를 역전시키는 것만으로도 세상의 이목은 운가와 자신을 주목할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결국 스스로의 목을 죄고 있었던 것이다. 

  “무엇이 그리 우습소?"

  당유연이 웃음소리를 들은 듯 옆으로 다가와 물었다. 

  “능력을 과신했던 어리석음을 비웃고 있었소. 최선을 다하지 않고 쉽게 얻으려 했던 나 자신을 꾸짖고 있었소이다."

  운녹산의 대답을 이해한 듯 당유연이 고개를 끄덕였다.

  “신수 사태를 제외하면 모두가 같은 잘못을 저지른 것이오. 나 또한 운남에서 얻을 이익만을 생각했었소. 결과가 어찌 되었소? 자식들을 잃고 가문의 반을 날려먹었소. 먼저 간 사람들을 볼 낯이 없구려. 허나 아직은 돌이킬 기회가 있소이다. 우선은 이곳을 반드시 사수해야 할 것이오."

  운녹산은 고개를 끄덕이며 잔도를 살폈다. 폭이 겨우 일 장, 높이 역시 일 장에 불과했다. 

  “점창산 때와는 입장이 바뀌었으니 그나마 다행이구려."

  당유연이 의아한 듯 잔도를 살피며 물었다. 

  “무슨 뜻인지 잘 모르겠소."

  “이곳은 저들의 손길이 미치지 못한 곳, 무공 외의 술수를 부리기가 쉽지 않소. 또한 우리 쪽은 검을 주로 사용하는 사람이 많은 반면, 저들이 주로 쓰는 무기는 도요. 그런데 오른손이 벽으로 가니 불편하지 않겠소? 점창산에서는 내가 저들의 입장이어서 도를 쓰지 못했소이다."

  당유연은 벼랑 바깥쪽으로 오른손을 휘둘러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 이점이 있었...... 드디어 오는구려."

  운녹산도 당유연의 가라앉은 시선을 따라 검단협곡 쪽을 주시했다. 

  산등성이까지 빽빽하게 자리한 수천 명의 백의인들 가운데 좁은 잔도로 들어선 이들은 모두 해서 여섯 명에 불과했다. 도를 한 노인이 두 명에 적수공권인 듯한 장년인과 중년인이  각각 한 명씩 그리고 나머지 별달리 강한 기세가 느껴지지 않는 장년인 두 명이 전부였다. 

  “생각보다 더 적은 규모로 오는구려. 하기야 나설 수 있는 사람은 양측 모두 한 명씩뿐이니 여섯이면 충분하겠지."

  현상자가 운녹산의 옆에 이르러 중얼거리듯 말했다. 

  현상자는 십여 장 앞에 이른 상대측 사람들을 차분히 살피다가 눈살을 찌푸렸다. 선두의 백무강과 나란히 선 의외의 젊은 인물 때문이었다. 

  ‘그렇군. 금사강에서 저들의 책임자로 나선 젊은이였던가? 헌데 나란히 선다?’

  그때 백무강이 마치 옆집에 바둑이나 두러 온 사람처럼 부드러운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밤새 안녕들 하신가? 앉아서 주무시는 모습들이 비장해 보이더구먼."

  현상자는 대답하지 않고 백무강을 노려보았다. 그때 백무강의 옆에 서있던 백무극이 빙긋 웃으며 말했다. 

  “제 눈에는 초라해 보였습니다만."

  순간 현상자 등의 눈에 노화가 치밀었다. 그때 백무강이 백무극에게로 고개를 돌리며 온화한 어조로 말했다.

  “그리 보이셨습니까, 소군?"

  백무강의 표정을 보고 공손한 어조를 듣는 순간 현상자는 절로 감기는 눈을 억지로 치떠야 했다. 공대하며 소군이라 불렀다. 그렇다면 그 위로 또 다른 이가 있다는 뜻. 결국 천군은 백무강이 아니라는 뜻이었다. 

  ‘이렇게 되면 하늘에 비는 수밖에 없군. 지위는 지위일 뿐 실력이 아니게 해달라고.'

  그렇게 자위할 수밖에 없었다. 현상자는 내심 무림련의 그 누구도 자신을 능가하지 못할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그런데 백무강은 자신과 차이가 없는 고수. 만약 소군이라는 젊은이나 천군 백천휘가 지위에 걸맞은 실력을 가지고 있다면 무림련은 금우고도의 삼백 리 잔도를 유리하게 사용할 수 없으리라. 한 사람으로 만 명을 막아내는 것이 아니라, 만 명이 한 사람을 막아내지 못할 수도 있으리라.

  “허! 아무리 싸우는 상대라 해도 너무 심하게 무시하는구먼. 아예 상대를 해주지 않아. 좋아. 삼백 리라 했던가. 갈 길이 머니 바로 시작하세. 누가 먼저 나서려나?"

  현상자는 고개를 돌려 수뇌진 뒤쪽에 있는 장년인들에게 말했다. 

  “그대들은 물러가 있으시게."

  모두가 군소리 없이 십여 장 뒤쪽으로 빠졌다. 그때 공명 선사가 나섰다.

  “빈승이 먼저 막아보리다."

  백무강은 백무극을 향해 빙긋 웃으며 말했다.

  “막아보겠다? 소굴의 말씀대로 초라하게 느껴지는군요. 태산도 무너뜨린다는 아미신승 공명의 입에서 막아본다는 소리가 나오다니, 쯧쯧쯔. 이보게, 철후. 어떤가? 신승께서 적수공권으로 나서시니 자네가 편히 쉬게 해드리려는가?"

  철탑과 같은 거한 백철후가 웃으며 고개를 숙여 보이고 앞으로 나섰다.

  공명 선사는 모욕적인 언사를 듣고도 차분하게 가라앉은 눈빛으로 철혈신전주 백철후를 바라보면서 다시 삼 장을 나아갔다. 백철후 또한 앞으로 나섰다. 

  공명 선사는 두 발을 자연스럽게 벌리고 두 손을 모아 합장하여 금강수미신공을 돋웠다. 바로 그 순간에 백철후가 오른팔을 비틀 듯 내뻗었다. 나선형의 권력이 다른 속도로 두 사람 사이의 공간을 가로지르는 순간 선기를 빼앗긴 공명 선사는 합장한 두 손을 앞으로 내뻗었다. 

  쾅!

  철혈회륜신권과 금강수미장이 공명 선사의 바로 앞에서 부딪쳤다. 

  쿵쿵!

  공명 선사는 잔도가 울렁거릴 정도로 큰 소리를 내며 두 발짝 뒤로 물러섰다.

  선기를 잡았다 생각한 백철후는 다시 한 발 크게 내디디며 왼 주먹을 내뻗었고 연달아 한 발을 더 내디뎌 오른 주먹을 휘둘렸다. 

  공명 선사는 백철후의 일격을 향해 오른손을 내뻗어 허공에 동그라미를 잇달아 그렸다. 늘어져 있던 승포의 소맷자락이 팔에 휘감기는 순간 백철후의 일격은 공명 선사의 이화접목에 휘말려 벼랑 바깥쪽으로 흘러갔다. 그 순간 공명 선사가 다시 왼손을 부드럽게 말아 쥐고 앞으로 내뻗었다.

  쾅!

  콰쾅!

  백철후의 이격과 공명 선사의 금강수미장이 엇부딪치면서 백철후의 발 앞쪽과 공명 선사의 머리 위쪽에서 동시에 폭음이 일고 먼지가 흩뿌려졌다. 

  뒤에서 지켜보는 운녹산으로서는 이해를 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그는 이미 점창산에서 공명 선사의 공력을 목격했었다. 오행마궁주 두 사람의 합격을 견뎌낸 공명 선사가 오행마궁주 한 사람보다 크게 뛰어나 보이지도 않는 백철후에게 밀린다는 것이 이상하게 보였던 것이었다. 

  바로 그때 공명 선사의 승포가 풍선처럼 부풀어 올랐다. 

  “하아아합! 금.강.반.야!"

  쿵!

  기합성에 이어 관도를 무너뜨릴 것 같은 공명 선사의 진각이 이어지고 동시에 오른 손바닥이 내뻗어졌다.

  쾅!

  그러나 공명 선사가 내뻗은 격공장은 엉뚱하게도 백철후와 잔도 사이에서 폭발하듯 그 기운을 드러냈다. 

  백철후는 빙긋 웃으며 엉겁결에 펼친 호신강기를 거두고 왼 주먹을 들어 올렸다. 바로 그 순간 땅이 쩌저적 갈라지며 조금 전 두 사람이 격돌하면서 후려친 바닥을 함몰시켰다. 그리고 그와 동시에 잔도에 부딪쳤던 격공장의 기운들이 튕겨져 나와 백철후의 오른쪽 어깨를 후려쳤다. 

  백철후는 왼쪽 발밑이 무너져 내리는 순간 왼쪽으로 기울어졌다가 다시 파동 치는 공기에 밀려 벼랑 쪽으로 쓰러졌다. 백철후는 눈을 부릅뜨고 공명 선사를 바라보았다. 그때 공명 선사가 차가운 눈빛으로 그를 직시하며 그의 왼쪽 무릎을 향해 오른손 중지를 퉁겼다. 

  “으아합!"

  이미 벼랑 바깥으로 상반신이 내밀려 있던 백철후는 금강지에 격중되는 순간 기합도 아니고 비명도 아닌 묘한 소리를 내뱉는 동시에 공명 선사를 향해 권력을 내뿜고 벼랑 아래로 떨어졌다. 

  공명 선사는 다시 기마 자세를 한 채 합장했고 그 순간 금빛 찬란한 광채가 그의 전신을 감쌌다. 

  퉁!

  백철후의 마지막 권력이 금강수비신공에 의한 호신강기에 퉁겨져 소멸되었다. 공명 선사는 합장을 한 채 두 다리를 모으고 한숨을 내쉰 후에 불호를 뇌까렸다. 

  “아미타불!"

  공명 선사가 그 한 수를 위해 공을 들이기 시작한 것은 처음 격돌 때부터였으나, 바닥이 무너지고 격공장이 터지고 백철후가 벼랑 아래로 떨어진 것은 뒤에서 지켜보던 백무강과 백무극도 어찌할 수 없을 만큼 순식간에 일어난 일이었다.

  백무강은 지금껏 여유롭던 표정을 차갑게 굳히고 공명 신사를 노려보았다. 

  “권력을 엇나가게 받아친 것조차 계산이었나? 자비로운 부처의 얼굴을 한 채 여우같이 간교한 술수를 부리는구나. 땡추!"

  공명 선사는 시선을 조금 비틀어 검단협곡에서 바라보고 있는 백의인들을 보면서 말했다. 

  “민승은 오늘 오랫동안 싸워야 할 것 같구려. 그리고 싸움을 힘으로만 하는 것이 아니라고 가르쳐 준 사람이 바로 그쪽인 것 같소만."

  백무강은 차갑게 코웃음 치고는 도파로 손을 가져갔다. 

  챙!

  땅!

  뽑는 순간 도신이 잔도의 벽에 부딪쳤다. 백무강은 머리 위까지 치켜든 도를 신경질적으로 휘둘러 다시 벽을 후려쳤다. 

  땅!

  “흥분하지 마세요, 무강 아저씨! 아무래도 불편하신 것 같으니 차라리 내가 나서는 게 낫겠군요."

  백무극이 백무강의 가슴을 부드럽게 뒤로 밀면서 앞으로 나섰다. 그 순간 신수 사태가 앞으로 나섰다. 

  “이번에는 빈니가 상대해 보겠습니다."

  그때 운녹산이 잔도의 벽을 흘끔 보고서 다시 신수 사태의 창을 바라보며 말했다.

  “사태께서는 이곳에서 싸우지 않는 것이 좋겠습니다. 이 운 모가 나서지요. 선사! 잠시 호흡을 가다듬으시지요."

  공명 선사는 잔도의 벽을 스치듯 바라보고서 돌아섰다. 운녹산이 고개를 끄덕이고 공명 선사와 자리를 바꾸었다. 

  챙!

  도를 뽑아 바닥을 겨눈 채 두어 걸음 더 나간 운녹산은 백무극을 차갑게 노려보며 말했다. 

  “무기를 뽑게."

  백무극은 흐릿한 조소를 머금고 다시 한 발 나서서 두 사람 사이의 거리를 오 장으로 좁히며 말했다.

  “무기가 없는 게 낫지 않겠소?"

  백무극은 한광이 도는 눈빛으로 운녹산을 노려보며 백무강이 도로 후려쳤던 잔도의 벽을 주먹으로 후려쳤다. 순간 운녹산이 왼발을 들어 올려 부드럽게 포물선을 그리며 잔도를 향해 내찼다. 

  쾅!

  폭음과 함께 단면이 심각형인 거대한 돌 기둥이 부러져 바닥으로 떨어졌다. 

  “잔머리부터 굴리지 말게. 나도 도를 쓰는 사람. 그 정도는 눈치 채고 있었네."

  백무강이 마치 짜증난 듯 두 번의 칼질을 한 뜻은 무형의 기로써 뽑을 때 아래서 위쪽으로, 다시 내려쳐서 위에서 아래로 벽에 기둥을 만들기 위해서였다. 백무극이 쉽게 그 뜻을 이해하고 벽을 후려침으로써 튀어나온 기둥으로 운녹산을 벼랑까지 밀어버리려 했었다. 그러나 백무극이 이해한 것은 운녹산뿐만이 아니라 공명 선사도 이미 눈치 채고 있었던 것이었다. 

  백무극은 콧등에 주름을 잡으며 미소 지었다. 

  “그렇구려. 손 안 대고 코 한 번 풀어보려 했는데. 할 수 없지. 그럼 손을 대야지."

  백무극은 손바닥을 위로 하여 두 손을 들었다. 순간 운녹산의 도신에서 무극금정강기의 기운이 밖으로 드러났다. 

  백무극은 금빛 기운이 폭발할 듯 감도는 운녹산의 도를 바라보며 빙긋 미소 지었다. 

  “오라! 이제 보니 상식적으로밖에 생각하지 못하는 사천무림련의 군사 운 대협이여셨구려. 흥! 오른손이 벼랑 쪽이라고 쾌재를 부르셨겠지만 그 또한 짧은 생각. 당신이 전력을 다할 수 있는 공격이라고는 끊어지는 횡도뿐. 그러나 난 두 손이 자유롭지, 이렇게."

  말을 마치는 순간 백무극의 두 손에서 주먹만한 하얀 구슬 같은 기운이 솟아올랐다. 

  말이 많다고 소리치려 했던 운녹산은 오히려 눈을 치뜨고 입을 다물었다. 두 개의 구슬들, 그것은 두 개의 도환이나 마찬가지였다. 자유롭게 움직일 수 있고 마음껏 도를 휘두를 수 있는 곳이라면 어렵지 않게 상대할 수 있을 테지만 한정된 공간 안에서는 상대하기 까다로운 일임에 틀림없었다.

  ‘무극금정강기를 믿는 수밖에.'

  운녹산은 두 개의 구슬들을 주시하며 도를 옆으로 뻗었다. 

  쭝!

  도신을 감돌던 금빛 기운이 도강을 이루며 오 장을 뻗어 나갔다. 금빛 도강이 횡으로 휘둘러지는 순간 백무극은 반격을 펼치지 않고 가볍게 물러섰다. 

  쾅!

  잔도의 벽에서 돌가루가 튀고 먼지가 피어올라 백무극의 신형이 흐려졌다. 그 순간 운녹산이 도를 뽑듯 반대로 휘둘렸다. 

  쩡!

  또다시 돌가루가 튀고 뿌연 먼지가 안개처럼 피어오르는 순간 기묘한 소리가 울려 퍼졌다. 운녹산은 입술을 깨물었다. 그가 기대하던 소리가 아니었다. 

  먼지가 가라앉으면서 백무극의 모습이 확연하게 드러났다. 그는 왼손으로 칠 장 가까이 늘어난 도강들 쥔 채 미소 짓고 있었다. 정확히 말하면 금빛 도강과 백무극의 손 사이에는 하얀 기의 구슬이 끼어 있었다. 

  “크흐흐! 잔머리 굴리지 말라 한 양반이 누구시더라? 흥! 이제 보여주지. 이 좁은 길이 결코 당신들의 편이 될 수 없음을 확인시켜 주겠어."

  백무극이 오른손을 내뻗었다. 하얀 구슬이 운녹산의 얼굴을 향해 뻗어나왔다. 운녹산은 도를 회수하지 않은 채 왼손을 내뻗었다. 폭음이 터지는 순간 운녹산은 낮은 신음을 흘리며 뒤로 물러섰다. 그러나 그 또한 그냥 밀리지만은 않았다. 그의 도강이 갑자기 십여 장 가까이 늘어났다가 어느새 작은 구슬로 화하여 백무극의 뒤통수를 노렸다.

  그러나 백무극 또한 예상을 한 듯 몸을 슬쩍 비틀면서 가슴을 가로지른 채 뻗고 있던 왼손을 뒤로 돌렸다.

  쾅!

  백무극의 뒤에서 폭음이 터지는 순간 그는 두 발을 바닥에서 뗐다. 충격파가 몸을 가볍게 하여 허공에 떠 있던 그의 신형을 앞으로 밀었다. 그는 충격에 의하여 자연스럽게 앞으로 돌아온 왼손을 오른손과 교차시키며 장심에서 또다시 하얀 구슬을 토해냈다. 그리고 또 토해내고 또다시 토해냈다. 

  운녹산의 눈을 부릅떠졌다. 젊은이의 손에서 여섯 개의 장환을 동시에 보게 될 것이라고는 생각조차 하지 못했던 탓이었다. 백무극은 급히 뒤로 물러서면서 쉬지 않고 팔목을 비틀어 도강으로써 두 개의 원을 연이어 그렸다. 

  그러한 급한 움직임을 운녹산만이 보인 것이 아니었다. 그의 삼 장 뒤쪽에 시 있던 이들이 모두 운녹산과 같은 속도로 물러서고 있었다. 

  콰콰콰콰파콰쾅!

  사 장을 뻗어 나갔던 운녹산의 금빛 도강이 연이은 폭음과 함께 조금씩 줄어들었다. 동시에 운녹산의 악다문 입술 사이로 핏줄기가 뿜어져 나왔다. 

  현상자가 물러서기를 멈추고 앞으로 나아가려 했다. 그 순간 백무극이 입가에 차가운 미소를 머금으며 왼손을 비틀어 운녹산의 왼쪽 잔도의 벽을 연달아 후려치기 시작했다. 

  콰콰콰콰콰쾅!

  “이렇게, 이렇게 아래로 떨어뜨리셨던가? 똑같이 대우해 주겠어."

  돌가루가 튀어 계속해서 정신없이 물러서는 운녹산의 신형을 후려쳤다. 운녹산의 신형이 조금씩 벼랑쪽으로 밀려가는 중인데도 현상자는 끼어들 여지를 찾지 못했다. 계속해서 벽을 후려치고 있는 장력이 앞으로 나아가는 길을 차단하고 있었다. 그뿐만이 아니라 그 공세가 하도 가공하여 섣불리 도와주려 했다가는 자신의 기운으로 운녹산을 죽일지도 모르는 상황이었다.

  속수무책이 되어버린 현상자는 문득 백무극의 공세에서 과거를 떠올리고는 치를 떨었다. 

  ‘여섯 개 아니, 여덟 개던가? 소군이라는 젊은 것이 저러하니 천군이란 인간은 과거의 그  멸청광자에 비견되리라. 천군이라는 자가 저곳에 있다면 결과는 명약관화한 것. 이곳이 아니더라도 나로서는 막아낼 도리가 없다.'

  “으아아아합!"

  그때 운녹산이 기합성을 터뜨리며 천근추로 몸을 내리누르고 호신강기를 거두어들여 일 장으로 줄어든 도강에 힘을 보탰다. 

  쾅!

  또다시 운녹산의 도강과 백무극의 하얀 손이 부딪쳤다. 

  “흥! 소리를 지른다고 문제가 해결되는 건 아니지. 당신들은 애초부터 장소를 잘못 택했어. 협곡 앞에서 죽자 사자 싸우는 게 차라리 나았어."

  백무극은 태연하게 말을 끝내고 차가운 눈빛으로 운녹산의 도강을 밀었다. 

  파파파파파팟!

  백무극의 손과 운녹산의 도강 사이에서 불꽃이 튀었다. 그리고 도강이 조금씩 줄어들었다. 

  쿠쿵!

  운녹산이 다시 뒤로 물러섰다. 도를 빼보려 했으나 그것조차 쉽지 않았다. 빼는 순간 하얀구슬이 그의 가슴을 후려칠 것 같았다. 백무극은 비웃음을 담은 눈빛으로 바라보며 천천히 걸음을 옮겨 벽에 등을 대었다. 그리고 서서히 도를 향해 손을 뻗었다. 

  두 걸음을 더 물러선 운녹산의 왼쪽 발이 벼랑 끝에 걸렸다. 

  “운 가주! 견디시오."

  현상자는 소리를 치는 동시에 검결지를 지은 오른손을 백무극에게로 뻗었다. 그의 허리에 걸려 있던 이 장의 소검이 빛살처럼 뻗어 나갔다. 

  “이기어검?"

  백무극이 현상자를 겨눈 채 놀리고 있던 오른손에서 세 개의 장환을 연달아 뽑아냈다. 

  쾅!

  첫 번째 장환이 소검과 부딪히는 순간 백무극은 오른손을 비틀었다. 두 번째 장환이 선회하여 허공에서 멈칫거리는 검신을 후려쳤다. 검이잔도의 벽에 박혔다. 그때 백무극이 다시 손을 휘돌리니 세 번째 장환이 또다시 검을 후려쳐 부러뜨려 버렸다. 

  백무극은 다시 두 개의 장환을 뽑아내어 현상자를 놀리듯 운녹산과 잔도의 벽 사이로 서서히 장환을 내뻗었다. 

  운녹산의 애도 청룡에 남아 있는 도강은 겨우 일 장, 거기에 한 발만 더 밀리면 낭떠러지로 떨어질 수밖에 없는 처지였다. 

  참으로 허망했다. 마음먹고 나서기만 하면 사천제일세를 이루는 일은 여반장이라고 생각했건만 새파란 중년인에게 밀려 백척간두의 위기에 처해 있었다. 다른 장소에서는 밀리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할 수 있는 상황이라면 위안이 될지도 모르겠으나 솔직히 그마저도 자신이 없었다.

  허탈하여 웃음이 나려 했다. 

  ‘이렇게 버터는 것이 꼴불견으로 보일까? 이대로 벗어던져 버릴까? 그리하면 마음이 편해질까? 교인은? 그리고 강인은 어찌 될까? 흐흐흐. 낙오자가 별 걱정을 다 하는구나.'

  운녹산은 웃음과 함께 남은 기운을 거두어들였다. 순간 청룡이 피를 토하며 울부짖었다. 도신이 부서지고 도파가 깨어졌다. 오른손이 터져버렸고 그의 신형이 허공으로 밀려났다.

  “운 가주!"

  누군가가 부르긴 불렀는데 그저 귓가에 앵앵거리는 모깃소리처럼 들려왔다. 

  ‘이렇게 죽는구나. 발버둥이었어. 무엇을 증명하겠다고 그렇게 살았을까?'

  운녹산은 허공에서 하늘을 바라보며 미소를 지었다. 그때였다. 천둥같은 목소리가 귀청을 울렸다. 

  “녹산! 몸을 가볍게 하라."

  녹산! 자신을 그렇게 부를 수 있는 사람이 천하에 몇이나 될까. 단 한사람, 오랫동안 그 이름을 부른 적이 없었지만 아버지 운검정뿐이었다. 

  그 목소리가 운녹산에게 생기를 불어넣었다. 벼랑과의 거리는 벌써 오여 장, 손을 뻗는다고 닿을 거리가 아니었지만 운녹산은 운검정이 시키는 대로 몸을 가볍게 하고 허공에서 몸을 뒤집어 누워 있던 자세를 선 자세로 바꾸었다. 왼손으로 아래쪽을 향해 연이어 격공장을 터뜨려 낙하속도를 줄이면서 운검정을 찾았다. 

  쉽게도 찾았다. 뒤쪽으로 처져 있던 이십여 명의 장년 고수들 뒤에서 두 사람이 달려오고 있었다. 익숙한 모습의 운검정과 또 한 사람 도포를 입은 독안의 청년이었다. 

  ‘청봉! 네가 여기 어떻게?'

  그 순간 운검정과 운청산이 동시에 그를 향해 검결지를 내뻗었다. 그리고 두 자루의 은빛 검들이 그에게 날아왔다. 두 자루의 검은 운녹산의 두발 아래를 받쳤고 그 순간 운녹산은 본능적으로 도약하여 벼랑과의 거리를 좁혔다. 

  운검정과 운청산이 다시 손을 휘돌렸다. 두 자루 검이 허공을 휘들아 다시 운녹산의 발  아래로 들어갔다. 또다시 허공으로 도약한 운녹산의 눈앞에 신수 사태의 검은 창이 보였다.    운녹산은 창을 잡고 잔도 위로 뛰어올랐다. 

  두 자루의 검이 허공을 휘돌아 이제 막 무림련 측 장년 고수들을 지난 운검정과 운청산의 손아귀로 빨려 들어갔다. 

  그렇게 운검정과 운청산이 운녹산을 구할 동안 양측은 모두 싸움 중이라는 것을 잊은 듯 멍하게 보고만 있었다. 

  운검정과 운청산은 사람들을 지나쳐 앞으로 나아갔다. 현상자마저 지나쳐 선두에 선 두 사람이 백무극을 직시하는 순간 그가 입가에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또 너냐?"

  운청산은 차분한 눈빛으로 백무극을 주시하며 말했다. 

  “이쯤에서 그만둠이 어떻소?"

  백무극의 입꼬리가 올라갔다. 

  “그렇게는 못하겠구나. 나도 못하지만 죽어간 형제들이 허락하지 않을 것이다."

  백무극은 손바닥을 위로 하여 두 손을 들어 올렸다. 그 순간 하얀 구슬들이 방울방울 솟아올랐다. 여섯 개가 솟고 또 두 개가 솟고 다시 두개가 더 솟았다. 열 개의 장환이 두 손바닥 위에서 천천히 맴돌았다. 

  <할아버님, 일단 떼어놓아야 할 것 같습니다. 제가 벼랑으로 떨어진다 해도 걱정하지 마시고 사라들을 물려주십시오.>

  운검정은 놀라서 눈을 치뜨고 운청산의 옆얼굴을 바라보았다. 그러나 그 외눈이 너무나 차분하게 가라앉아 있자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이상한 기분이었다. 한없이 어리게만 보여야 할 손자였다. 더구나 가주의 자리를 내어놓고 오히려 큰 진보를 이룬 상태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운청산이 말하자 그 말에 따를 수밖에 없었다. 단순히 믿지 못할 광경을 보았던 탓은 아니었다. 운청산의 말에는 묘한 힘이 있었다. 

  운검정은 순순히 물러서서 현상자의 옆에 섰다. 바로 그때 백무극이 손을 내뻗었다. 

  운청산은 백무극을 보지도 않고 스스로 허공으로 솟구쳐 올랐다. 그것은 백무극도 예상하지 못한 일이어서 눈을 부릅떴다. 그 순간 그의 손놀림에 따라 놀던 장환들이 소멸되어 버렸다. 

  “무... 무슨 짓을?"

  운녹산이 눈을 부릅떴다. 그때 운청산은 어느새 검을 뽑아 들고 백무극과 운검정 사이로 내리찍듯 휘둘렀다. 

  콰르르르르릉!

  뇌성벽력과 풍우가 일시에 몰아치는 듯하더니 백무극과 운검정 사이의 잔도 상단이 무너져 내려 두 진영을 완전히 차단했다. 

  백무극은 본능적으로 그 소리의 의미를 깨달았다. 두 마리의 용을 잠재웠던 소리. 그 소리가 나지 않았다면 지금의 싸움은 없었으리라. 이미 금사강에서 끝난 싸움이었으리라.

  그때 운청산의 신형이 아래로 떨어졌다. 백무극 일행과 현상자 측 사람들이 일제히 잔도 끄트머리에 서서 아래를 내려보았다. 추락하는 운청산이 발악을 하듯 검을 사방으로 휘둘렀다. 그리고 곧 점이 되어버렸다. 

  백무극 측은 멍한 표정으로, 현상자 측은 안타까운 눈빛으로 시선을 거두려 했다. 바로 그때 작아지던 점이 다시 또렷하게 드러나더니 점차 사람의 형상으로 변해갔다. 

  “뭐... 뭐야?"

  백무극이 중얼거리는 순간 현상자 일행이 일제히 물러서기 시작했다. 운청산이 허공에 정지한 채 백무극을 바라보았다. 거리는 십여 장. 백무극이 장환을 통제할 수 없는 거리였다. 능력 여부를 떠나서 백무극은 운청산을 공격할 생각조차 못하고 있었다. 허공에 떠 있다는 것, 그것은 그가 천하무적이라고 생각하는 스승의 능력으로도 불가능한 일이었다. 

  운청산은 눈을 부릅뜨고 입을 벌린 채 마주 보고 있는 백무극을 외면하고 북쪽으로 검을 뻗었다. 그 순간 그의 신형이 부드럽게 앞으로 나아갔다. 

  그때부터 연이어 뇌성벽력이 이어졌다. 운청산이 거듭해서 사우진천하를 펼쳐 잔도의 상부를 계속해서 붕괴시켜 버린 것이었다.

  백무극은 또 다른 벽력성을 들으면서 힘없이 쪼그려 앉았다. 그리고 느릿하게 말했다. 

  “아저씨, 저놈은 도대체 뭡니까? 인간 맞습니까?"

  백무강은 대답하지 못했다. 정확히 말하자면 넋이 나가 아예 듣지를 못했다. 그러나 백무극 또한 대답을 기대한 것은 아닌지라 그저 두 손으로 바닥을 매만질 따름이었다. 

  그때 뒤에서 유쾌한 목소리가 들렸다. 

  “저 친구더냐?"

  백무극이 벌떡 일어나 비명을 지르듯 소리쳤다.

  “사부님!"

  백천휘는 빙긋 미소를 지으며 백무극의 어깨를 토닥였다. 그리고 뒤를 따라온 천기신사 백진궁에게 물었다.

  “허공에 머문 것이 무공이라면 나 또한 불가능할 일. 자네가 보기는 어떤가?"

  백진궁은 허리를 접으며 확신이 어린 목소리로 대답했다. 

  “술법이옵니다. 축지술의 일종으로 풍축이라 하지요."

  “풍축? 허면 자네도 가능한가?"

  백진궁은 고개를 저으며 대답했다. 

  “저로서는 어림도 없는 일입니다. 풍축은 풍신을 부리는 신술입니다. 저같이 호풍하는 술자들이 적지는 않으나 그것은 모두 천지에 가득한 풍령을 부리는 일. 풍축과는 차원이 다르지요. 풍축을 행하려면 신축을 얻어야 하는데, 저로서는 견식조차 처음이옵니다. 전에 용호파의 기진을 펼쳤는데, 이제 보니 일맥으로 전해지는 용호파의 계승자인가 봅니다."

  “용호파? 진도(眞道)에 이른 유일한 기환선문?"

  백진궁은 대답없이 허리를 접었다. 

  백천휘는 운청산이 사라진 방향을 바라보며 미소를 지었다.

  “그것이 술법이었다? 이보게, 우상! 뭐 하는가? 길을 뚫게. 그것이 무공이었다면 청성마저 포기하고 운남으로 돌아가야 할 것이나, 술법이라 하니 이제 내가 직접 그 친구를 만나봐야겠어."

  백무강은 그때서야 정신을 차리고 허리를 접었다. 백천휘는 미소를 지으며 백무극의 어깨를 다시 한 번 토닥거리고 나서 검단협곡 쪽으로 걸어갔다. 

  “청산이라 했던가? 이름이야 어쨌든 무극의 말이 맞았어. 술법이든 무공이든 간에 대단한 친구야."

  백진궁이 뒤를 따르며 호기심 어린 어조로 물었다. 

  “소군은 뭐라 평했는지요?"

  “뭐라더라? 하하하하! 그래. 괄목상대의 뜻을 알려주려고 태어난 녀석이라 했던가? 대곤륜이라더니, 과연 곤륜의 품은 광대하지 않은가. 사부님 대에는 무공으로 태을을 내더니, 이번에는 술법으로 저 젊은 친구를 냈어. 천지간에 따로 노는 음양은 없다 하더니만, 역시 세상은 재미있군. 그런데 어느 쪽이 음이고 어느 쪽이 양일까? 아쉽게도 사부님이 음이었으니 나 또한 그러할까? 자네 생각은 어떤가?"

  “변화하지 않는다면 그것은 이미 음양이 아니지요."

  “그런가? 하하하하!"

  백천휘는 웃음꽃을 흩날리며 눈살을 찌푸리고 있는 좌상 백문정을 향해 걸어갔다. 뒤에 남은 백진궁은 끝도 없을 것 같은 잔도를 바라보며 중얼거렸다. 

  “그 젊은이가 신축을 얻었다면 검각산의 안배도 십중팔구 발각이 되었으리라. 그렇다면 이제 내가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지켜보는 것뿐인가? 별달리 술법을 사용치 않아 곤륜이 용호파의 비전 한 조각을 주운 것뿐이라고 생각했었다. 그러나 이제 분명해졌다. 그 청년은 틀림없는 용호파의 직계. 하필이면 용호파가 곤륜에 자리를 잡고 있었다니, 불안하구나. 더구나 그 친구는 술법을 쓰는 와중에 무공을 펼쳤다. 상단전과 하단전을 자유자재로 운용한다는 뜻. 술사들에게는 불가능한 경지. 괜찮을까? 아니지, 내가 어찌 저분의 능력을 의심한단 말인가? 불경(不敬)이로다."

  백진궁은 머리를 세차게 흔들고 백천휘의 뒤를 따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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