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76화 (76/79)

제 6장  죽은 자 두 번 죽지 아니하니, 호각은 깨어지고

  검단협곡에 피바람 몰아치고 있던 그때, 운청산과 청인자는 학자 하나를 사이에 두고 정겹게 이야기하고 있었다. 워낙 오래간만이라 청인자는 싱글거리면서도 의아한 눈빛으로 운청산의 얼굴을 뚫어지게 바라보았다. 

  ‘아무리 봐도 모르겠단 말이야. 뭐가 달라진 거지?'

  전과 특별히 달라 보이는 것이 없었다. 독안을 가린 가죽 안대도 그대로였고 조금은 살이 붙었다 해도 예전보다는 홀쭉한 얼굴 또한 그대로였다. 전보다 조금 더 강인해 보인다 하면 그런대로 이해하고 넘어갈 것인데 그런 느낌은 아니었다. 

  청인자의 눈길이 운청산의 외눈과 입매에 동시에 머물렀다. 

  ‘그렇군. 달라졌어. 부드럽게 처진 눈매, 입가에는 미소가 어려 있구나. 무어라 할까? 여유가 맺혀 있다? 그래. 그런 것 같아. 독안인데도 한결 부드러워 보인다.'

청인자는 마침내 운청산의 변화를 발견하고 환하게 웃었다.

  “얼굴에 뭐 묻었습니까? 왜 그렇게 빤히 보며 웃으십니까?"

  운청산이 의아한 눈빛으로 물었다. 

  “그래. 묻어 있구나. 여유가 묻어 있어."

  얼굴로 손을 가져가던 운청산이 싱긋 미소를 지었다. 안 그래도 미소가 붙어 있는 얼굴이었다. 거기에 또다시 미소를 더하니 환하게 빛이 나는 것만 같았다. 

  청인자는 푸근한 마음으로 말했다. 

  “보기 좋구나. 안 그래도 외롭게 살아온 네 녀석이 눈마저 외롭게 되어 실의에 빠지면 어찌나 했다. 하지만 이젠 걱정할 필요가 없겠어."

  운청산은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외롭게 살았다니요? 그렇지 않습니다. 외숙이 게셨고 세 분 할아버지께서 늘 돌보아주셨습니다. 전 누구보다도 행복한 어린 시절을 보냈습니다."

  “그러냐? 그리 생각해 주니 고맙구나. 이제 청수를 만나도 당당할 수 있겠어."

  청인자가 기분 좋게 너털웃음을 터뜨리던 그때 운청산이 탁자를 내려다보았다. 그리고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청인자가 의아한 표정을 짓자 운청산이 말했다. 

  “외숙! 얼굴을 이리로."

  청인자는 영문도 모른 채 의자에서 일어나 탁자중앙으로 얼굴을 내밀었다. 운청산은 일어서서 두 엄지에 붉은 기운을 드리우고 청인자에게 눈을 감으라 한 후 그의 두 눈두덩을 쓰다듬었다. 

  “눈 뜨세요."

  눈을 뜬 청인자는 벌떡 일어나 급히 포권을 취했다. 운청산의 좌우로 운현산 등 여덟 영혼들이 늘어서서 그에게 포권을 취하고 허리를 접은 탓이었다. 

  “지금처럼 평온하게 지낼 수 있는 것은 모두 외숙 덕분이라 하십니다. 감사드린다고 전해달라시는군요."

  운청산이 운현산의 말을 전하자 청인자는 처음과는 달리 평온한 얼굴로 다시 한 번 여덟  영혼들에게 인사했다.

  청인자가 자리에 다시 앉아 탁자 위를 주시하며 물기 어린 눈에 미소를 드리웠다. 당우리의 손을 잡은 이청수가 웃으며 그를 바라보고 있기 때문이었다. 

  청인자는 오른손을 탁자 위에 놓았다. 당우리가 이청수의 손을 놓으며 운청산 앞으로 물러섰다. 이청수가 손바닥 위에 올라서자 청인자는 눈앞으로 손을 가져갔다. 

  이청수는 환하게 웃으며 청인자의 손바닥 위에서 절했다.

  “저를 이렇게 든든하게 키워주셔서 감사하다 하십니다."

  운청산이 말을 전하자 청인자는 고개를 저었다.

  “내가 무엇을 한 게 있어서. 나는 도대체 어찌해야 할지 몰라 늘 안절부절 못했었지. 하지만 청산은 키우기 쉬운 아이였다. 스스로 알아서 잘 커주었어. 난 한 게 없어."

  이청수가 고개를 저었다. 

  “숙부님이 아니 계셨다면 제가 세 분 어르신들에게 귀여움을 받으며 자랄 수 없었다 하십니다."

  “그래, 그래. 그렇다고 하자꾸나."

  운청산을 매개로 청인자와 이청수의 대화는 반 시진 동안이나 이어졌다. 청인자로서는 할 말이 없다 해도 계속해시 이청수를 보고 싶었으나, 운청산이 영안지술(靈眼之術)을 거듭 시술받은 피시술자는 장차 보기를 원치 않는 귀신까지 보게 된다 하며 만류했다. 

  청인자는 아쉬움을 감추며 운청산에게 물었다.

  “이제부터 무얼 할 작정이냐? 이제는 곤륜에서 살 테지?"

  운청산은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나가서 할 일이 있습니다."

  청인자는 눈살을 찌푸렸다. 

  “너 설마 또다시?"

  운청산은 여전히 웃는 얼굴로 고개를 저었다. 

  “같은 일이 될 수도 있으나 의미는 다릅니다. 세상의 일이란 바꿀 수 없는 것이 있고 바꿀 수 있는 것이 있습니다. 바꿀 수 없는 과거의 일에 연연하지 않을 것입니다. 미래를 행복하게 살 생각입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할 일이 있지요."

  “무슨 뜻인지 잘 모르겠구나."

  “하늘이 제게 능력을 주신 것은 제가 잘난 탓이 아닐 것입니다. 능력만큼 하늘을 대신하여 일하란 뜻일 겁니다. 하고 나서 떳떳하게 웃을 수 있는 일을 하려는 것입니다. 그리고 어머니와 숙부님들을 귀천시켜 드려야 하니 어차피 나가보아야 합니다."

  청인자는 한숨을 내쉬고 나서 담백하게 웃었다. 

  “네 뜻이 그러하다면 말리지 않으마."

  그때 방문 밖에서 인기척이 났다. 

  “사숙! 여기 계셨군요. 아! 사숙조께서도 계셨습니까?"

  송학은 문 앞에서 깊숙이 허리를 접었다. 

  “무슨 일이냐?"

  “종 소협께서 오셨습니다."

  “종 소협? 종길 말이냐?"

  송학이 미소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데리고 오지 그랬어?"

  “안 그래도 여기 와 있지요."

  종길이 문으로 얼굴만 내밀고 이빨을 드러냈다. 운청산은 이미 알고 있었다는 듯 빙그레 미소를 짓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종길은 방 안으로 들어서서 청인자에게 절하고 운청산의 손을 맞잡았다. 

  “좋아 보인다, 청산."

  “음. 헌데 두 분은 잘 모셨어?"

  “둘이라니. 세 분 모두 화장하여 감숙 본집에 모셔다 드렸다. 편히 승천하실 게야."

  청인자가 끼어들어 종길에게 자리를 권하며 물었다. 

  “그랬으면 됐지, 여긴 또 뭐 하러 왔나?"

  “에이! 벌써 잊으셨어요? 소개장 써주신다면서요."

  “아하! 그거? 그랬지."

  운청산이 의아한 눈빛으로 바라보자 청인자가 웃으며 대답했다. 

  “이 촌놈이 이제야 제 능력의 한계를 깨달은 게야. 뭐 해 먹고살아야할지 모르겠다기에 내가 마운 대협에게 소개장을 써주겠다 했었지. 일단 생각해 보겠다 하더니만 마음을 굳힌 모양이구나."

  운청산은 종길의 얼굴을 빤히 바라보았다. 그리고 웃으며 말했다. 

  “그래. 그쪽으로 가면 좋을 것 같구나. 네겐 의외로 재복(財福)이 있어. 일확천금할 팔자는 아니다만 일단 쌓이면 무너지지 않을거야. 열심히 배우고 한 길만 바라보고 가면 나중엔 대상(大商) 소리 들을 수 있을거다."

  “정말?"

  운청산이 고재를 끄덕일 때 청인자가 덧붙였다.

  “이 친구야. 내가 괜히 마 대협을 거론한 것 같아? 비록 무인으로서의 자질은 모자라지만 상인으로는 본받을 만한 사람이야. 그 사람 밑에서 배우고 인정받을 수 있다면 제대로 된 상인이 될 수 있을 게야. 자네, 나중에 성공하면 우리 곤륜을 잊으면 안 돼. 알지? 상인은 돈으로 말한다."

  종길이 웃으며 말했다. 

  “신용이 아니구요?"

  “신용은 무슨 얼어죽을! 돈이야. 돈을 가져와라."

  세 사람이 기분 좋게 웃음을 터뜨렸다. 

  “아! 근데 사천은 난리가 난 것 같더라. 호북으로 돌아와서 눈으로 보진 못했는데, 섬서에서 들으니 무당과 화산은 물론 종남까지 참여한 것 같던데. 특히 화산 같은 경우는 섬서에서 된통 당해 가지고 문파를 통째로 옮기다시피 했다는 거야. 지금쯤 터졌을걸."

  운청산은 씁쓸하게 웃으며 청인자를 보고 다시 탁자 위를 보았다. 당우리가 슬픈 눈빛으로 고개를 숙였다. 

  ‘안 그래도 가보려 했소.'

  운청산이 고개를 드는 순간 청인자가 물었다. 

  “가려느냐?"

  “예."

  종길이 눈을 뚱그렇게 뜨고 소리쳤다. 

  “무슨 소리야? 너하곤 이제 상관없는 일이야. 정명단도 해체되고 산 사람들은 모두 뿔뿔이 흩어졌다 들었다. 살았는지 죽었는지 모르겠다만 이 대협도 아마 없을걸. 그러니 더 이상 상관하지 마."

  운청산은 미소 지으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아길! 걱정할 필요 없어. 외숙! 검을 좀 빌려야겠습니다."

  청인자가 고개를 끄덕였다. 

  운청산이 손을 뻗자 방구석에 걸려 있던 청인자의 검이 그의 손 안으로 빨려 들어갔다. 

  “태악 할아버지껜 말씀 올리지 마세요."

  청인자가 다시 고개를 끄덕이자 운청산은 그에게 허리를 접고 방을 나섰다. 

  “아길! 일 끝나면 감숙으로 보러 가마."

  “어? 보자마자 간단 말이야? 섭섭하네."

  운청산은 빙긋 웃어 보이고 사라졌다. 종길은 청인자를 보며 고개를 저었다. 

  “근데 청산이 놈, 뭔가 달라진 것 같지 않습니까? 뭐지?"

  청인자가 편안한 얼굴로 웃었다. 

  “한마디로 말하자면 여유라 할까나?"

  “아! 그렇구나. 편안해 보였어요, 진인처럼. 생각해 보니 닮았네, 두 사람."

  “그런가?"

  청인자는 기분 좋게 너털웃음을 터뜨렸다. 그러나 열린 방문을 향해 돌아가는 그의 얼굴은 웃음소리처럼 편한 것만은 아니었다. 

  백문정은 강시들과 마주치는 바람에 더 이상 앞으로 나서지 못하는 무림련 측 사람들을 바라보며 미소를 지으면서 동시에 미간에 주름을 잡았다. 

  “쯧! 아쉽군. 젊은 녀석들과 함께 와서 뒤섞였더라면 좀 더 혼란스러웠을 것인데......"

  백문정은 고개를 뒤로 돌려 명령했다. 

  “개인 간의 거리를 좁히게 만들어야 제대로 힘을 쓰지 못할 것이야.

  좌우에서 좀 더 밀어붙여라."

  두둥, 두둥, 두둥, 두둥, 두둥! 

  백문정의 명에 따라 대고 소리가 돌변하자 좌우에서 압박해 가던 백의인들이 일제히 달려들었다. 무림련 측에서 누군가가 소리치자 그들의 진형도 후면을 비운 사방진의 형태로 바뀌었다. 

  마침내 양측이 격돌했다. 검기도풍이 뒤섞이면서 피가 튀고 낮은 비명소리가 계속해서 이어졌다. 언뜻 보면 수가 많은 백의인들이 전장을 지배하는 것 같으나, 자세히 살펴보면 무림련의 예상처럼 찢기고 갈라져 무너지는 이들은 대부분이 백의인들이었다. 개개인의 실력이 미치지 못하는 까닭이었다. 하지만 백의인들은 물러서지 않았다. 오히려 동료들의 시신을 밟고 계속해서 무림련 측을 밀어붙였다. 

  “쯧쯔! 이거 초반부터 희생이 너무 큰 것 아닌가?"

  백무강이 눈살을 찌푸리며 말했다. 백문정이 차가운 웃음을 머금으며 대답했다. 

  “저들이 고수급들로만 나선 이상, 초반에 기선을 제압해야 돼. 끝장을 보는 싸움은 이곳이 아니라 검각산에서 벌어져야 하네. 밀려서는 안 돼. 지금 당장은 희생이 커 보여도 결국은 가장 경미한 희생이 될 걸세. 보게. 이제 시작하는구먼."

  백무강의 눈길이 다시 전장으로 돌아갔다. 

  무림련 측과 철골강시들이 뒤로 밀리고 다시 앞으로 나가기를 반복했다. 처음에 과도하게 힘을 쓰던 무림련 측이 유효한 타격 거리를 잡고 힘을 아끼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오륙 장에 이르는 검기도풍을 뿜어내었지만 일 장 정도로도 충분하다는 판단을 내린 듯 강기를 내뿜어 강시를 부수려고 노력하기보다는 접근을 막는 정도로 힘을 사용하고 있었다. 

  전면의 무인들이 무공을 펼친다기보다는 막대기로 더러운 똥이라도 걷어내듯 강시를 밀어내는 동안, 좌우의 무인들이 백의인들을 괴멸시키겠다는 의도로 보였다. 그리고 그 같은 의도는 성공적으로 실행되고 있는 것처럼 느껴졌다. 

  그때 뒤쪽에서 또 다른 강시들이 뒤로 퉁겨나는 강시들의 사이사이에 끼어들었다. 전면의 무림련 측 고수들이 기계적으로 병장기를 내뻗었다. 순간 강직된 채 껑충껑충 뛰어가던 강시들이 무릎 관절을 구부리더니 일제히 허공으로 튀어 오르면서 소매 속에서 두 자가 조금 못 되는 도를 꺼내어 휘둘렸다. 이 장이 넘는 도기가 뻗어 나가는 순간 무림련 측에서 헛바람이 터졌다. 무림련 측 고수들은 어쩔 수 없이 기세를 일으키지 못한 병장기를 내뻗었다. 

  쩌저저저저저정!

  비명이 터지고 기운과 기운이 부딪쳤다. 그리고 수백여 명이 서로의 반대쪽으로 피를 뿌리며 갈라졌다. 

  “됐어!"

  백문정과 백무강이 동시에 미소를 지었다. 자신들을 압도하던 무림련측이 단 한 번의 공격으로 삼백여 명 이상의 사상자를 낸 것이었다. 

  “강시들 속에 사람이 섞여 있다. 밀리지 말라. 뒤섞이지 말라."

  무림련 측의 당황한 목소리가 백문정과 백무강의 귀에까지 들려왔다. 그 순간 강시들 속에 섞여 있던 백라천궁의 사람들이 시커먼 옷을 벗어버리고 붉은 부적들이 덕지덕지 붙은 백의를 드러냈다. 그들은 거의 동시에 등 뒤에서 삼 척 반에 이르는 도를 꺼내 들고 흐트러진 전면의 방어선으로 쇄도했다.

  쩌저저저저정 !

  전열이 흐트러진 무림련 측이 뒤로 밀리려 했다. 그 순간 중앙에서 전면과 좌우를 보조하며 전체를 관장하던 수뇌부들이 일제히 진면으로 쇄도했다. 

  강기성풍이 몰아치고 전면의 무림련 측 고수들과 뒤섞이려던 백의인들이 급히 물러섰다. 강시들이 터지고 베어졌다. 물러서는 백의인들의 옷이 피로 물드는 순간 강시를 벤 기운들은 그들에게마저 달려들어 살을 찢고 뼈를 갈랐다. 

  또다시 대고 소리가 급변하자 전면의 백의인들이 일제히 강시들 뒤쪽으로 물러섰다. 

  “쫓지 말고 전열을 정비하라."

  무림련 측이 다시 방어선을 구축하는 순간 백의인들은 완전히 뒤로 물러서고 강시들이 그 자리를 메웠다. 그리고 또다시 육십여 구의 강시들이 나타나 강시들 사이로 비집고 들어갔다.

  백문정이 전장 너머를 바라보며 미소를 지었다. 

  “호! 진궁이 나서니까 저쪽에서는 젊은 녀석들이 가세할 모양이야. 그런데 아쉽게도 당가는 움직이지 않으려나 보군. 지금 당장은 이 정도로도 좋아. 하지만 조금 있으면 그들이 필요하겠지? 방독인(防毒人)들을 전장 후위로 투입시켜라."

  다시 대고 소리가 울리자 물통 같은 것을 가슴 앞으로 맨 삼백여 명의 백의인들이 병장기도 없이 전장을 향해 뒤뚱뒤뚱 걸어갔다.

  “기주! 우리도 가야 하지 않겠습니까?"

  당유연의 동생이자 암호전주인 당유평이 오십여 장 앞쪽의 전장과 당유연을 번갈아 보며 다급하게 말했다. 그러나 당유연은 차가운 눈빛으로 전장과 그 너머를 살피며 천천히 입을 열었다. 

  “물러서고자하는 기미를 보이지 않아. 아직은 아닌 게야. 우리는 무림련의 마지막 보루일세. 섣불리 움직여서는 안 돼."

  “하지만 벌써 이 할을 잃었습니다."

  당유평이 널브러진 무림련 측 사람들을 바라보며 안타깝게 말했다. 

  “역시 생각처럼 되지는 않는군. 그렇다면 우린 더 더욱 물러서야 할 때를 생각해야 해. 그것이 내게 주어진 임무일세."

  “맞소. 최악의 사태를 대비해야 하오,"

  보천자가 당유연의 생각에 손을 들어주었다. 

  “헌데 진인, 저 철골강시는 어찌해 볼 도리가 없는 겁니까?"

  당유연이 묻자 보천자는 무거운 낯빛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아무리 철골이라 하나 검강에 견뎌내지는 못할 것이오. 보시오. 현상진인 등의 검력에 맞은 놈들은 모두 심한 타격을 입고 있소이다. 하지만 다른 이들이 저 같은 검력을 계속해서 사용할 수는 없는 일이지 않겠소? 이미 기세를 잃었소. 일단 물러서서 강시에 대한 대책부터 마련하고 다시 임하는 것이 좋을 것 같소만."

  그때 당유연이 문득 고개를 뒤로 돌렸다. 무림련의 젊은이들이 달려오고 있었다. 

  “더 이상 지켜볼 수만은 없다는 것인가?"

  당유연은 머리 속으로 젊은이들의 희생을 떠올리면서도 막을 수만은 없다고 생각했다. 당유연은 뒤에 도열해 있는 당가의 고수들을 헤치고 달려오고 있는 젊은이들을 맞았다. 

  “멈춰라."

  이천에 육박하는 젊은이들이 일제히 걸음을 멈추었다. 그들 가운데 수장 격인 청월자와 대원 그리고 운교인 등이 앞으로 튀어나왔다. 

  “어찌하여 막으십니까?"

  청월자가 묻자 당유연이 차가운 눈빛으로 젊은이들을 바라보며 말했다. 

  “막으려는 것이 아니네. 일견 불리해 보이나 피해가 큰 쪽은 오히려 저들. 지금 자네들이 저 속에 뒤섞이면 그대들의 선배들이 혼란에 빠질 것이네. 일자진을 치고 포위하는 방법을 쓰게. 안에서 밖으로 내철 때 자네들은 밖에서 안으로 몰아가게. 자리를 바꾸어 뒤섞이지 않도록 하게. 물러설 방도를 남겨놓고 냉정하게 대처해야 하네. 알겠는가?"

  젊은이들의 수장들이 단번에 알아들고 불타오르던 눈빛을 꺾었다. 당유연은 그 눈빛을 일일이 바라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혹시 신호전이 오르거나 본진에서 물러설 기미가 보이면 그 즉시 철수할 수 있게 대비하게. 내가 나설 때 자네들이 방해가 되어서는 안 돼. 알겠는가?"

  젊은이들이 다시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가게."

  청월자 등이 잠시 자기들끼리 말을 주고받은 후에 흩어졌다. 그리고 잠시 후 그들은 일자로 넓게 퍼져서 일정한 보폭으로 나아가기 시작했다.

  바로 그때 강시들과 맞붙은 전면의 방어선에서 변화가 일었다. 

  너무나 사실적인 분장과 연기 그리고 알고 싸웠어도 쉽게 처리하지 못할 정도의 고수들에게 당한 터라 무림련 측도 분명한 경각심을 가지고 있었다. 강시를 밀어내면서도 그 움직임을 세세히 살피고 즉시 방어와 공세를 되풀이할 준비를 하고 있었다. 

  그런 가운데 조금 느낌이 다른 강시들이 기존의 철골강시들 사이를 파고들었다. 기존의 강시들보다 몸의 상태가 나아 보였고 이상하게도 칙칙하고 암울한 눈이 순간순간 무겁고도 슬픈 빛을 드러내는 것만 같았다. 

  육십여 구쯤 되는 그것들을 상대해야 했던 무림련 측 사람들은 이격을 준비하는 마음으로 일격을 날렸다.

  따다다다다다당!

  철골강시를 두드릴 때보다 더 강한 쇳소리가 나면서 옷자락들이 터지듯 흘어지고 새까만 맨살이 드러났다. 그 한 번의 공격으로 무림련 측 고수들은 상대가 사람이 아님을 확인했다. 그리고 다시 밀어내기 위해 힘을 배가시켜 병장기를 휘둘렀다. 

  그때 강시들이 벼락같이 손을 내뻗었다. 무림련 측 고수들의 눈이 당혹감으로 물들었다. 강시라고는 생각할 수 없는 다른 손놀림이었다. 더구나 그 손에는 은은한 묵기까지 어려 있는 까닭이었다. 

  쩌저저저저정!

  강시들의 손바닥이 병장기에서 뿜어 나오는 기운들을 흩어버리고 직접 병장기에 맞닿았다. 병장기들이 산산이 부서져 흩어지는 순간 강시들의 다른 손이 다른 속도로 튀어나왔다. 

  “아아아아악!"

  전면의 방어선을 유지하고 있던 사람들 가운데 오십여 명이 동시에 비명을 내지르고 사방진 안으로 날아갔다. 그 순간부터 강시들의 움직임이 바뀌었다. 관절을 굽히지 못하는 것은 마찬가지였으나 철골강시와는 달리 허공을 떠다니는 유령처럼 부드럽게 선회하고 빠르게 움직였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마치 무공고수들처럼 두 손에서 이 장에 이르는 검은 경력을 내뿜었다. 

  놀란 수뇌진들이 일시에 달려들어 검강과 그에 비견되는 기운으로 새로 나타난 강시들을 후려쳤다. 

  따다다다다다당!

  십여 구의 강시들이 뒤로 튕겨 나갔다. 그러나 그들은 단번에 부서져버리던 철골강시들과는 달리 아무런 충격도 받지 않은 듯 다시 쇄도하기 시작했다. 

  수뇌진들은 힘을 배가하여 다시 병장기를 휘둘렸다. 그러나 이번에는 아예 좌우로 몸을 움직여 공적을 피하고 다시 전진했다. 그사이에 나머지 강시들이 전면의 방어선을 뚫었고 철골강시들이 그 뒤를 따랐다.

  그토록 방어선을 유지하려 했던 무림련 측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싸움의 양상은 결국 난전으로 치닫고 있었다. 방어선이 깨지는 것은 기정사실화되었고 그리되면 무림련 고수들은 안과 밖에서 동시에 적을 맞아야 했다. 그때 일자진을 치고 쇄도하던 무림련의 청년들이 좌우로 갈라져 좌우에서 공격하는 백라천궁 사람들의 배후로 쇄도했다. 

  “금강차혼강시?"

  보천자의 입에서 당황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보천자는 자친의 눈으로 보면서도 믿지 못하겠다는 듯 건곤파의 두 진인에게 고개를 돌렸다. 

  건법 진인과 곤술 도인은 보천자의 눈길을 의식하지 못한 채 앞만 바라보고 있었다. 그러나 그들은 전장을 보는 것은 아니라 그 너머 상대편 진영을 뚫어지게 보고 있었다.

  거기에는 새로 투입된 육십여 구의 강시들과 얼추 비슷한 수의 도사들이 신들린 듯 춤을 추고 있었다. 때로 손을 내뻗기도 하고 좌우로 몸을 흔들기도 하며 어떤 때는 앞으로 몸을 날렸다가 뒤로 날아가 나동그라지기도 했다. 

  보천자도 그들의 존재를 확인했다. 그는 곧 강시들과 그들을 번갈아 보았다. 그리고 한숨을 내쉬었다. 

  “금강차혼강시가 무엇입니까?"

  보천자는 당유연의 물음에 답하지 않고 급하게 말했다.

  “물리시오. 지금은 물러서야 하오."

  다시 물을 수 없을 정도로 다급하게 들렸던지라 당유연은 즉시 소리쳤다.

  “신호전을 올려라."

  그 즉시 두 개의 명적이 요란한 비명 소리를 내지르며 허공으로 솟아올랐다. 그것을 무시할 수 있는 이는 아무도 없었다. 막 싸움에 참여하려던 청년들이 썰물처럼 빠져나왔고 사방진을 힘겹게 유지하던 무림련의 좌우측 고수들도 급속히 전인으로 몸을 틀어 물러서는 전면의 고수들과 함께 일자진을 이루었다. 

  형세가 급변했다. 일천여 명 남짓 남은 무림련 측 고수들이 전방에 일자진을 치고 물러서고 그 뒤로 청년들이 붙어 나란히 뒤로 물러섰다. 백의인들 역시 강시들을 중심에 두고 좌우에 붙어서 일자진을 이루었다. 양측이 맞붙어 싸우는 와중에 무림련 측이 보조를 맞추며 뒷걸음질쳤다. 

  무림련 측이 시산혈하를 빠져나와 물러서는 순간 당유연이 소리쳤다.

  “퇴로의 안전은 우리가 맡는다. 준비하라."

  당가인들이 일제히 품속에 손을 넣었다. 그때 보천자가 말했다.

  “지금으로서는 금강차혼강시를 감당할 방도가 없소. 물러서는 데 주력하시오."

  검강으로도 무너뜨리지 못하는 괴물이었다. 당유연은 당가의 암기로 파괴시키지 못한다는 사실을 인정하고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세 분은 일단 물러서시지요. 나머지는 이 사람이 알아서 하겠습니다."

  보천자와 건곤파의 두 도인들은 순순히 고개를 끄덕이고 검단협곡을 향해 몸을 날렸다.

  당유연은 또다시 합세하려는 백의인들을 확인하고 손을 들었다. 전장의 격렬함과는 달리 북동쪽에서 불어온 미풍이 손을 쓰다듬었다.

  “북동풍이라. 하늘이 허락하는 일이니 쓸 수밖에."

  당유연은 흔들리는 눈빛을 바로잡고 손을 앞으로 내뻗었으며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당가의 고수들이 당유연의 걸음에 맞추어 진형을 유지한 채 나아갔다. 

  당유연이 걸으면서 말했다. 

  “지금의 바람이 변하지 않는다면...... 삼장무인연을 사용한다."

  당유연이 무거운 음색으로 말하자 당가 사람들의 눈빛이 흔들렸다. 그러나 그들은 다시 전장을 바라보며 허공으로 손을 들어 올려 바람을 매만졌다. 그리고 무겁게 걸음을 내디뎠다. 평소의 걸음보다 더 더디게 걸었건만 전장과의 거리는 겨우 이십여 장. 후퇴하는 속도가 빠른 탓이었다. 

  “밀어내어 공간을 만들어라."

  당유연이 소리를 내지르는 순간 진형을 유지한 채 방어에 치중하며 물러서던 무림련 측 사람들이 일제히 앞으로 나아가며 병장기를 휘둘렸다. 수천 줄기의 경력들이 허공을 가르는 순간 계속 전진하던 백의인들이 주춤하여 물러섰다. 

  “전력 후퇴!"

  백의인들이 뒤로 밀려나고 무림련 측이 동시에 훌쩍 뛰어 물러서니 일순간 양 진영 사이에 적게는 오 장 많게는 칠여 장가량의 공간이 생겼다. 

  그때 당가의 사람들이 손을 내뻗었다. 한 자가량의 대나무 통들이 포물선을 그리며 날아가 백의인들 사이로 떨어졌다. 

  “물러서라."

  당유연이 소리쳤고 백의인들 가운데 몇 사람이 같은 말을 되풀이했다. 그 순간 땅에 닿은 대나무통에서 시커먼 연기가 허공으로 솟구쳤다. 

  “방독인!"

  몇몇 백의인들이 소리치는 순간 연기는 바람을 타고 흩어졌다. 

  “흐아아아아!"

  연기에 닿은 백의인들이 전신을 쥐어뜯다가 칠공에서 피를 쏟으며 무너졌다. 

  당가가 독을 사용함에 있어서 우선적으로 고려하는 것이 있다면 그것은 바로 독을 사용한 후에 나타나는 후유증이었다. 여독으로 엉뚱한 사람 혹은 동식물에게 피해를 입힌다면, 어떠한 용도로 그 독을 썼던지 간에 비난을 면할 수 없으리라.

  당가는 연구에 연구를 거듭하여 마침내 특별한 독을 만들어냈다. 

  삼장무인연.

  세상은 모르나 당가의 독들 가운데 그 독력이 가장 지독한 독이었다. 그리고 뒤끝이 가장 깨끗한 독이기도 했다. 바람에 따라 흩어지는 정도는 달랐지만 대략 삼여 장을 흩어진 후에는 효력을 상실하고 사라져 버리는 독이었다. 

  삼장무인연은 그 지독한 독력으로 독가의 권위를 세워주면서 동시에 그 깨끗한 뒤끝으로 세상의 비난으로부터 자유를 주는 독이었다. 지금껏 오직 당가의 중지를 지키는 데만 사용되어 왔던 그 독이 마침내 세상에 첫선을 보인 것이었다. 

  무림련 측이 쉬지 않고 물러서는 가운데 당가 사람들이 그들과 교차하여 전면으로 나서면서 또 하나의 대나무 통을 던졌다. 

  연기가 사라진 직후 다시 앞으로 나오려 했던 백의인들이 급히 물러섰다. 연기가 피어오르고 또다시 처참한 비명 소리가 들려오는 그 순간 일단의 백의인들이 겁없이 앞으로 나왔다. 

  앞으로 나선 백의인들은 자신에게로 다가오는 연기를 노려보며 횃불을 입 앞으로 가져갔다. 

  화르르르르륵!

  그들의 입에서 불꽃이 분출되어 연기에 닿았다. 검은 연기는 치지직 소리를 내며 타올라 소멸되어 버렸고 그 순간 백의인들은 왼손에 들고 있던 줄을 입으로 가져가 방이 안으로 오그라들도록 무언가를 빨아들였다. 

  당유연은 방독인이라 불린 백의인들을 노려보며 천천히 뒤로 물러섰다. 백의인들이 다시 따라붙으려 했다. 그때 백라천궁의 진영에서 대고 소리가 울려 퍼졌다. 

  “왜?"

  백무강이 백문정을 바라보았다. 

  “더 이상 몰아세우는 것은 좋지 않아. 물러서기 어렵다고 생각하여 공세로 돌아서면 같이 죽게 될 걸세. 물러서려니 저 정도지, 만약 당가가 작정을 하면 삼백의 방독인으로는 막아낼 수 없단 말일세. 그리고 자넨 놀고만 있을 텐가? 나머지는 자네가 맡게."

백무강은 점차 사이가 벌어지는 두 진영을 보면서 코웃음 쳤다.

  “흥! 못 부려먹어서 안달이구먼."

  백문정이 빙긋 웃으며 고개를 뒤로 돌렸다.

  “모두에게 쉬라 하고 음도와 진궁에게 강시들을 물리라 하라."

  대고 소리가 바뀌면서 백의인 하나가 앞으로 뛰어 나갔다.

  백문정이 백무강을 바라보며 말했다. 

  “우선 협곡의 양안을 접수하고 저들을 잔도로 밀어붙이기만 하면 싸움의 반은 끝나는 거세. 소군의 경지가 이미 자네를 넘어섰어. 그러니 자네와 소군 그리고 요산과 철후 정도면 검각산까지 밀어붙이기는 어렵지 않겠지? 진궁이 이네 검각산에 수단을 부려놓았으니 그쪽에서 벌어질 마지막 싸움은 이곳보다 더 싱겁게 끌날 걸세."

  백무강이 고개를 끄덕이며 물었다.

  “그런가? 그렇다면 난 언제 시작해야 하는가?"

  백문정이 싱긋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 

  “지금 당장!"

  두 사람은 미소를 교환하며 전장을 바라보았다. 백의인들은 주저앉아 휴식을 취하고 있었고, 몇몇 도사들은 도주하려는 강시들을 쫓아다니며 이마에 부적을 붙이고 있었다. 그때 무림련 측은 이미검단협곡의 앞쪽까지 후퇴하여 전열을 정비하고 있었다. 

  “그럼 가볼까?"

  백무강이 앞으로 걸어갔다. 

  “수고하게."

  백문정의 말에 백무강은 돌아보지도 않고 손을 흔들어 보였다.

  전장의 혈향을 거두어가는 바람은 살랑거리는 북동풍이었다. 그런데 난데없이 검단협곡 사이에서 돌개바람이 일어 미약한 북동풍을 집어삼키고 남쪽으로 휘몰아쳐 내려갔다. 그 순간 남쪽에서 역시 세찬 바람이 일어 북쪽으로 몰아쳐 갔다.

  남풍과 북풍이 부딪쳤다. 바람들은 갈 곳을 모르고 뒤섞여 거리를 둔 두 진영 사이에 바람벽을 만들었다. 

  동서남북 사방에 검붉은 풍령기(風靈旗)를 꽂아두고 그 사이에서 눈을 감고 있던 보천자가 한숨을 내쉬고 눈을 떴다. 그리고 현상자를 바라보며 고개를 저었다.

  “부끄럽소만 저자의 술수는 이 늙은 도사가 따라가기 어렵소이다."

  현상자는 먼지와 풀들이 휘말려 소용도이치는 바람벽을 응시하다가 자신도 모르게 곤술 도인에게로 시선을 주었다. 곤술 도인은 무겁게 고개를 저었다. 

  “저자겠지요. 점창산에 음양팔괘포천대진을 친 자가."

  사람들이 새삼스럽게 천기신사를 바라보았다. 보천자가 풍령기 사이에서 밖으로 나서며 말했다.

  “금강차혼강시를 만든 자 또한 저자일 것이오."

  금강차혼강시라는 이름 자체를 아는 이조차 드물었다. 그러나 두 종류의 강시들을 모두 상대한 사람들이라 어느 것이 금강이라는 말에 어울리는지는 쉽게 짐작할 수 있었다.

  운녹산이 물었다. 

  “진인! 도대체 금강차혼강시가 무엇입니까? 어찌해야 처리할 수 있겠습니까? 아니지요. 어떤 방법을 써야 저 두 종류의 강시를 모두 상대할 수 있겠습니까?"

  보천자는 서두르지 않고 수뇌진들을 둘러보며 대답했다. 

  “철골강시는 여기 있는 분들이면 누구나 힘으로써 상대할 수 있을 것이오."

  그때 우현자가 끼어들었다. 

  “진인! 강시는 이성이 없어 적아를 분별치 못한다고 들었습니다. 헌데 저들의 강시는 우리만 공격했지요. 백의에 덕지덕지 붙은 부적 때문인 듯싶기에 그 모양새를 기억해 두고 있습니다만."

  보천자는 고개를 저었다. 

  “도움이 되지 않소. 부적을 쓸 때에 보호를 요청했던 신명(神名)과 그 축주의 내용을 알지 못하면 별무소용이오."

  현상자가 눈을 감으며 말했다. 

  “원시천존! 결국 힘으로 상대할 수밖에 없다는 소립니까? 그러기엔 수가 너무 많은데."

  보천자가 말을 이었다. 

  “그래도 상대할 방도가 있으니 다행이오. 금강차혼강시는 지금으로서는 처리할 방도가 없소이다. 원시천존! 금강차혼강시라니? 도대체 철심액에 담아둔 시신으로 음백을 어찌 잡아두었는지 알 길이 없구려."

  “무슨 말씀인지 모르겠습니다."

  운녹산이 다시 묻자 옆에서 듣고만 있던 곤술도인이 덧붙여 설명했다. 

  “빠른 시간 내에 강시대법을 펼치지 않는다면 이미 죽어버린 시신으로는 음백을 묶어둘  수 없소이다. 허나 금강차혼강시를 만들기 위해서는 강시가 아닌 시신을 오랜 시간 철심액에 담아두어야 하는 까닭에 음백의 보존이 어려워 사실상 제조가 불가능하다고 여겨져 왔지요. 하지만 그것이 가능하다 해도 제조 가능한 강시는 금강강시일 뿐, 금강차혼강시는 아니오. 금강차혼강시의 제조법은 더욱더 어렵소. 차혼이란 말에서 알 수 있듯이, 사람이 죽으면 혼은 그 즉시 육신을 떠나니 강시에게는 혼이 없소. 그 없는 혼을 살아 있는 사람이 채워주어야 금강차혼강시가 되는데, 강시와 혼을 공유하는 과정을 견뎌내는 일은 인간의 의지로 할 것이 아니라 했소."

  “그만큼 제조가 어려우니 특별한 점이 많겠군요?"

  “철심액에 잠깐씩 세 번 담구는 것만으로 철골강시 되오이다. 두 종류 모두 감당해 보았으니 강도의 차이는 느끼셨을 것이오."

  선봉에 섰던 수뇌진 모두가 고개를 끄덕였다. 

  “부수기가 그만큼 어려울 뿐만 아니라 차혼이란 말처럼 혼을 지닌 것이나 마찬가지여서 일반 강시에 비해 반응이 무척이나 다르오. 거기에 살아 있을 당시의 무공 수준에 따라 어느 정도 무공을 펼치는 것도 가능하오. 모두 보셨을 것이오. 상대 진영에서 흐느적거리듯 움직이던 도사들이 있었소. 그들이 바로 금강차혼강시에게 혼을 빌려준 이들이오. 그들의 생각에 따라 강시가 움직이니 적아분별 또한 뚜렷하고 병술에 따라 움직이는 것도 가능하오이다."

  현상자가 물었다.

  “그렇다면 상대할 방법이 전무하란 말이오?"

  곤술 도인이 고개를 저었다. 현상자는 보천자에게로 고개를 돌렸다.

  그 역시 고개를 저었다. 

  “혼의 주인을 죽일 수 있다면 금강차혼강시는 금강강시에 불과할 것이오. 철골강시만큼이나 둔해지겠지요. 허나 혼주(魂主)들은 적 진영 속에 있으니 현실적으로 어렵지 않겠소? 다른 방법이 있다면 관도에서 벼랑으로 떨어뜨리는 정도요. 정확히는 모르겠으나 혼주와 멀리 떨어져 있으면 혼을 공유할 수 없을 것이오."

  현상자가 주위를 둘러보며 말했다. 

  “어찌해야 되겠소? 우리에게 당가의 독이 있다면 저들에겐 강시와 폭약이 있소이다."

  당유연이 말했다.

  “저들이 북풍 안으로 들어서지 않는 이상 본가 또한 용독하기가 어렵소이다. 더구나 대량으로 살상할 수 있는 독의 사용은 자제해 왔고 그럴 일도 없었던 터라, 가진 양도 많지 않고 해약 또한 동료들에게 나누어 줄 만큼의 여유가 없소이다."

  모두가 아쉽지만 수긍한 듯 고개를 끄덕였다. 만약 당가가 오늘처럼 대량 살상을 위해 독을 뿌려댔다면 그 결과는 당가의 무림재패가 아니면 무림공적 당가의 멸망으로 끝났을 것이다.

  “본가가 건재했더라면 충분히 대응할 수 있었을 것을......"

  당유연도 아쉬운 마음을 드러냈다. 

  “적도들과 공멸할 수는 없는 일. 일단은 물러서는 수밖에 없겠습니다. 다행히 우리가 유리한 고지를 차지하고 있고 삼백여 리에 이르는 잔도가 남아 있으니 그 동안 그랬던 것처럼 섣불리 덤벼들지는 못하겠지요."

  운녹산의 말에 수뇌진들은 한결같이 등 뒤에 자리한 검단협곡을 바라보았다. 근 일 년에 가깝도록 적들의 발걸음을 묶어둔 곳이었다. 

  “강시라도 바위에 짓눌리면 옴짝달싹 못할 것이오. 우리는 일단 이곳에서 물러나서 강시들을 상대할 비책부터 연구해 보아야겠소. 혹시 이곳이 뚫린다 하여도 잔도라면 강시들도 힘을 쓰지 못할 터."

  보천자의 말에 모두가 동의를 표하였다. 보천자는 협곡 뒤쪽에서 다시 풍신을 청하겠다며 건곤파의 두 진인과 함께 먼저 검단협곡 안으로 들어갔다. 뒤이어 운녹산이 명하자 무림련 사람들도 차분히 협곡 안으로 들어갔다. 마지막 남은 수뇌진들도 한 사람씩 물러섰다.

  마지막까지 남은 사람은 현상자 한 사람이었다. 그는 바람벽을 뚫고 백무가을 직시했다.

  ‘정녕 잔도가 우리에게 유리한 장소일까? 저들의 수뇌가 백철휘라 했지. 과연 저자가 백철휘 본인이 맞는가? 저자의 도법이 대단하긴 하였으나 멸청광자의 수법과는 거리가 멀었다. 만약 저자가 백철취가 아니라면, 잔도가 우리에게 유리하게 사용되지만은 않을 것인데.'

  현상자는 고개를 저었다. 기우라 생각했다. 지금 같은 큰 싸움에 수뇌가 나서지 않을 턱이 없다고 생각했다. 

  현상자는 문득 고개를 뒤로 돌려 검단협곡 위를 바라보았다. 오백여명이 상주해 있었다. 그 정도면 검단협곡을 막기에는 충분한 인원이었다. 그러나 거의 대부분이 각 파의 젊은 영재들이라고 했다. 

  ‘곡을 지나자마자 저 위부터 보강해야겠군.'

  현상자는 다시 한 인 백무강을 노려보고 협곡 안으로 들어갔다.

  동서남북 사방에 자리한 네 장의 부적 사이에서 가부좌를 틀고 앉아있던 천기신사가 입술에서 한 줄기 핏물을 흘리며 눈을 떴다. 

  “보천자라 했지. 놀랍군. 검파 무당에서 저만한 술사가 나오다니 정말 놀라워."

  천기신사는 도포로 핏줄기를 닦아내고 검단협곡 앞쪽에서 자신을 노려보고 있는 보천자에게 포권을 취해 보였다. 보천자도 천기신사에게 고개를 끄덕였다. 

  “괜찮은가?"

  백무강이 깃발 바깥쪽에서 물었다. 천기신사는 창백한 얼굴에 미소를 지으며 깃발 바깥쪽으로 걸어나갔다. 

  “괜찮습니다. 허나 저쪽에서 먼저 시작한 일이라 이 이상 무립니다."

  백무강이 웃으며 그의 어깨를 두드렸다. 

  “이걸로 충분하네. 저들이 북풍을 일으키려 한 것은 당가의 독을 사용하기 위한 것일 터. 그것을 저지한 것이고 우린 이제 비인전을 사용할 충분한 거리를 확보했어. 헌데 저 협곡의 길이는 어느 정도 되던가?"

  “대충 이십여 리는 될 것 같더이다."

  “이십여 리라? 제법 길구먼. 뒤에서는 협곡 위쪽으로 오르내리기 쉽게 보이던가?"

  “예. 저쪽의 지대가 더 높아서 이곳과는 달리 완만한 구릉처럼 보였습니다."

  백무강은 눈살을 살짝 찌푸리며 생각에 잠겼다가 홀로 중얼거렸다. 

  “사십여 리면 길게 잡아야 반 시진 정도인가?"

  “무슨 말씀이신지?"

  “피해를 덜 입고 이기겠다는 생각을 하는 한 물러설 것이야. 근 일 년동안 우리가 겁먹은 척 묶여 있었으니 저들은 자신들이 나서지 않는 이상 또다시 소강 상태가 될 것이라고 생각하겠지. 그때가 바로 우리가 협곡을 공략할 때야. 아! 이 말은 좌상이 했네. 틀려도 내 책임이 아니야."

  백무강이 말을 끝내고 빙긋 미소를 지은 지 일각도 지나지 않은 때였다. 

  “물러서는군요."

  고개를 끄덕인 백무강은 현상자마저 자리를 뜨고 난 후 다시 한참을 기다렸다가 소리쳤다. 

  “좋아. 때마침 바람벽도 만들어졌으니 연기를 피워라. 그리고 비인전(飛人箭)을 준비하라, 서둘러. 시간이 없다."

  백의인들이 앞 다투어 습기 품은 풀들을 모아 불을 피웠다. 하얀 연기가 바람을 타고 날아가 바람벽에 부딪쳤다. 연기와 바람벽이 뒤섞이자 뿌연 안개가 낀 듯 두 진영 사이를 가렸다. 

  “비인전을 준비하라! 전진!"

  백무강이 앞장섰다. 그 뒤로 백의인들이 따르고 본진으로부터 말들이 끄는 거대한 노들이 뒤따랐다. 

  네 마리의 말들이 끌고 네 개의 수레바퀴로 움직여야 할 정도의 크기였다. 당가가 점창산에서 사용한 상자노와는 비교할 수 없는 거대한 노였다. 그러한 노들이 육십여 개나 되니 구르는 바퀴 소리만으로도 지축이 흔들리는 것만 같았다. 

  쿠르르르르르!

  바퀴 소리 따라 먼지들이 일고 그 먼지들이 남풍에 휘말려 바람벽에 가 닿았다. 뿌연 안개가 더욱 짙어졌다. 그리고 마침내 바퀴 구르는 소리가 멈췄다. 그러나 곧 도르래 돌아가는 소리가 바퀴 구르는 소리보다 더 시끄럽게 들려왔다. 시위가 당겨지고 높이가 조절되었다. 그리고 두 명의 장정들이 동시에 들어야 하는 희한하게 생긴 화살들이 장전되었다. 

  백무강이 비인전이라 부른 그 화살은 길이가 일 장이 넘었고 두께가 두 팔로 껴안으면 겨우 손끝이 닿을 정도로 두꺼웠다. 그러나 큰 대나무를 쪼개어 촘촘하게 이어 붙인 것이라 보기만큼 무겁지는 않은 것 같았다. 대나무를 얇게 저미듯 잘라 전우를 만들고 살대의 중앙에는 일곱 장에 이르는 긴 홈이 패어 있었다. 

  백무강이 앞으로 나섰다. 순간 일백팔십 명의 백영무단 무사들이 그 앞에 도열했다. 

  “너희들의 성패(成敗)에 따라 이 싸움의 성패 또한 갈라진다. 천군께서 보고 계시니 알아서 잘 하리라 믿는다. 무운을!"

  “천군께 영광을!"

  일백팔십 명의 무사들이 일제히 소리치자 백무강은 고개를 끄덕이며 돌아서서 검단협곡을 바라보고 소리쳤다. 

  “가라!"

  예순 명의 사내들이 먼저 흩어져서 예순 개의 거대한 노로 움직였다. 그들은 거의 동시에 비인전 중앙에 패인 홈에 엎드렸다. 

  “쏴라!"

  백무강이 명령하자 예순 개의 거대한 노들이 백영무단의 무사들을 태운 예순 개의 거대한 비인전을 토해냈다. 비인전들은 일제히 허공으로 솟구쳐 검단협곡 위쪽으로 날아갔다.

  백무강이 다시 돌아섰다. 

  “눈앞의 바람벽을 지나면 맞바람이 분다. 혹시라도 독연에 노출되지 않도록 주의하고 최대한 다른 속도로 달려 절애에 가서 붙도록. 공격!"

  백무강이 소리치며 앞으로 나아가자 방독인들이 뒤따르고 물에 젖은 천으로 얼굴 전체를 가린 일천에 가까운 백의인들이 일제히 계곡 아래쪽으로 달려갔다. 그들이 막 바람벽을 통과하는 순간 두 번째 비인전들이 그들의 머리 위를 스치고 지나갔다. 

  운강인은 말발굽 소리에 놀라 나라연에게로 향해 있던 시선을 앞으로 돌렸다. 바람벽이 뿌연 안개 끼듯 흐려져 시야를 가리고 있었다. 

  “안 보여. 어했든 뭔가 하려는 것 같은데, 또 무슨 술수를 부리려는 거야?"

  운강인이 말하자 당명인이 건너편 절애까지 들리도록 크게 소리쳤다.

  “삼장무인연 준비!"

  순간 활을 든 오십여 명의 녹의 젊은이들이 절벽 앞쪽까지 나아가 시위에 화살을 걸었다. 

  그때였다. 오십여 장 앞쪽 바람벽 뒤에서 투퉁 소리가 연이어 들렸다. 그리고 뿌연 바람벽을 뚫고 거대한 화살들이 날아올랐다.

  사람들은 잠시 동안 멍한 눈으로 비인전을 바라보았다. 도저히 하늘을 날 수 없을 것 같은 거대한 화살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화살들은 두 절애 위로 솟구쳤다가 사람들의 머리 위에서 힘을 잃고 포물선을 그렸다. 그 순간 하얀 그림자들이 화살에서 떨어져 나와 공중제비를 돌면서 바닥에 내려섰다. 

  촤촤촤촤촤촤촹!

  병장기 뽑히는 소리에 놀ks 사람들이 하얀 그림자를 주시했다. 그 순간 붉은 도기가 솟구쳤다. 

  “적이다. 잡아!"

  운강인이 먼저 검을 뽑아 들고 앞으로 쇄도했다. 당명인이 장삼을 벗어 던지고 녹의를 드러낸 채 뒤따르고 운가의 청년들과 나라연 그리고 관음사 비구니들이 그 뒤를 따랐다. 화살을 든 당가 사람들을 제외한 나머지 사람들이 모두 백의인들을 향해 쇄도하고 있었다. 

  겨우 삼십여 명의 장년인들. 활을 든 채 절애 아래쪽을 주시하는 당가의 청년들을 제외하더라도 이백이 넘으니 머릿수로는 상대가 되지 않았다. 그러나 그들 하나하나가 내뿜는 도기는 운강인의 백색 검기에 상당하는 기운을 품고 있었다. 

  운강인은 자신에게로 다가오는 백의인을 노려보며 보폭을 크게 늘였다. 비호답풍의 기세로 단번에 백의인과의 거리를 좁힌 운강인의 검에서 날카로운 검기가 줄기줄기 뻗어 나왔다. 

  백호참마검의 삼대절초 가운데 하나인 호조단망(虎爪斷?)을 맞닥뜨리고도 백의인은 차가운 안색을 유지한 채 도를 휘돌렸다. 순간 그의 전신을 찢어놓을 것 같던 하얀 검기들이 선풍처럼 휘도는 붉은 도기에 휘말려 소멸되었다. 

  운강인은 입술이 터져라 깨물고 뒤로 휘돌았다. 그 순간 수십 개의 세침들이 백의인의 전신 구석구석으로 날아갔다. 

  백의인이 도를 휘돌려 붉은 도막을 쳤다. 

  치치치치치치칭!

  세침들이 사방으로 흩어지는 순간 백의인이 도기를 거두었다. 그때 뒤로 물러났던 운강인이 다시 땅을 박차고 백의인의 주변을 휘돌았다. 

  까가가가가강!

  미처 기세를 발하지 못한 백의인의 도가 직접 운강인의 검기에 부딪쳤다. 도가 조각조각 부서지는 순간 운강인은 어느새 당명인의 옆에 내려섰다. 그 순간 백의인의 전신에서 핏물이 새어 나왔다. 

  운강인이 당명인과의 합작으로 겨우 한 명의 백의인을 죽였으나 전세는 그다지 낙관적이지 못했다. 벌써 수십 명의 무림련 측 청년들이 피를 뿌렸고 백의인들의 수는 별달리 줄어든 것 같지 않았다. 

  투투투투투퉁!

  활시위 놓는 소리가 연이어 들렸다. 당명인은 급히 고개를 돌렸다. 삼장무인연이 쏘아졌다는 것은 아래쪽으로도 또 다른 공격이 시작되었다는 뜻이기 때문이었다. 

  당명인은 또 다른 상대를 향해 몸을 날리는 운강인과 절벽 쪽을 번갈아 바라보면서 입술을 깨물었다. 그때 또 다른 비인전들이 당명인의 머리 위를 스치고 지나갔다. 

  당명인은 스치듯 나라연을 보았다. 십여 명의 비구니들과 함께 대여섯명의 백의인들을 상대로 분전하고 있었다. 수십 자루의 환영을 이루는 비구니들의 창을 막아내던 백의인 하나가 나라연의 창끝에서 뿜어져 나온 기운에 난자되었다. 나라연은 또 다른 백의인과 비구니들의 싸움터로 몸을 날렸다. 

  당명인은 다시 협곡의 건너편을 살폈다. 그쪽의 상황도 자신이 있는 곳과 별다르지 않았다. 

  ‘이곳을 지키는 일을 너무 쉽게 생각했어. 일백이 넘는데 그 하나하나가 강인과 호각을 이룬다. 매번 상식을 깨뜨리는군. 이렇게 되면 벼랑 끝에 쌓아둔 바위들도 무용지물. 거기에 신속한 지원을 기대할 수도 없는 처지다.'

  바로 그 순간 검단협곡 안쪽에서 세찬 바람이 불었다. 당명인으로서는 원인을 알 길이 없었지만, 그것은 보천자가 협곡 안쪽에서 다시 호풍령(呼風靈)의 술법을 부린 탓이었다. 

  당명인은 또 다른 백의인과 호각을 다투는 운강인을 힐끔 보고 소리쳤다. 

  “당가인들은 후퇴하여 바람을 등져라."

  세 번째 삼장무인연을 날리려던 스물다섯 명의 당가 사람들이 일제히 활을 거두고 품속에 손을 넣으며 전장을 우회하기 시작했다. 절애 건너편의 당가 청년들도 동시에 물러섰다. 그때 머리 위로 또다시 비인전이 스치듯 지나갔다. 

  두 절애 위를 합하여 일백팔십. 이제 백의인의 전력이 검단협곡 위에 상주하고 있던 오백여 명의 젊은이들과 대동소이해져 버렸다. 당명인은 절망적인 눈빛으로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수천 명의 백의인들이 일제히 검단협곡의 입구를 향해 달려오고 있었다.

  파파파파파파팍!

  절벽 바로 아래쪽에서 익숙한 소리가 계속해서 들려왔다. 줄을 매단 쇠뇌살이 절벽에 박히는 소리였다. 평소라면 코웃음 치고 끊어버렸을 테지만 지금은 그것을 할 사람이 없었다. 

  ‘이렇게 무기력하게 무너지고 마는가?'

  당명인은 발 아래 놓인 바위를 아래로 밀어버리고 다시 전장을 바라보았다. 호각을 유지하던 양측의 균형이 서서히 깨지기 시작했다. 당명인이야 알 도리가 없었지만 상대는 백무강 직속의 백영무단이니 어쩌면 당연한 일이었다. 

  당명인은 즉시 몸을 솟구쳐 운강인과 나라연 사이를 스치며 오른손을 내뻗었다. 수십 개의 비침이 절묘하게 백의인들만 노리고 날아갔다. 붉은 도기가 솟구치고 비침이 튕기고 하얀 검기와 창영이 난무했다. 

  세 명의 백의인들이 피를 뿌리고 쓰러지는 것을 확인한 당명인은 운강인 옆에 내려서서 다른 속도로 말했다.

  “틀렸다. 올라오고 있어. 우리가 막을 테니 사람들을 물려."

  운강인은 입술을 깨물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당명인이 바람이 부는 쪽으로 빠져나가는 순간 운강인이 소리쳤다. 

  “물러선다. 바람을 등져라."

  운강인은 자리를 바꾸지 못하는 비구니에게로 달려가 상대 백의인에게로 검을 내뻗었다.   순간 백의인이 몸을 휘돌려 반월의 도기를 뿌려서 창영과 운강인의 검기를 동시에 퉁겨냈다. 

  바람을 등지고 일선의 진형을 이룬 무림련 측이 이 인 일 조가 되어 백의인들을 밀어내고 급히 물러섰다. 그러나 백의인들은 악착같이 쫓아왔다. 그때 뒤로 물러섰던 당가의 청년들이 비침을 던지며 무림련 측 사람들의 사이사이에 끼어들었다. 백의인들이 할 수 없이 물러섰다. 

  “던져!"

  당명인의 목소리가 들리는 순간 당가의 청년들이 들고 있던 화살을 손으로 던졌다. 백의인들의 바로 앞에 떨어진 화살의 꽁무니에서 시커먼 연기가 피어오르더니 바람을 타고 백의인들을 덮쳤다.

  백의인들이 급히 뒤로 물러섰으나 연기는 이미 그들을 지나쳐 허공에서 사라졌다. 

  “끄으으으으으!" 

  백의인들은 도를 내던지고 목을 잡은 채 꼬꾸라졌다. 예순 넘게 남아있던 백의인들이 순식간에 삼십여 명으로 줄어들었다.

  “쏴!"

  당명인의 목소리가 다시 울려 퍼졌다. 

  퓨퓨퓨퓨퓨퓨퓽!

  백의인들이 일제히 붉은 도기를 흩뿌리며 급히 물러섰다. 그러나 당가인의 손에서 발사된 것은 이십 장 안이라면 호신강기마저 꿰뚫는다는 당가의 금용암기 무형뇌전이었다.

  다시 비명 소리가 울려 피지고 백의인들은 열한 명밖에 살아남지 못했다. 무림련 측 사람들이 다시 쇄도하려 했다. 

  “멈춰!"

  당명인이 소리를 치는 순간 절벽에서부터 하얀 그림자들이 계속해서 솟구쳐 올랐다. 

  “던져!"

  당명인이 다시 소리쳤다. 손으로 던진 화살들이 포물선을 그리며 벼랑쪽으로 날아갔다.     바로 그 순간 새로 올라온 백의인들 가운데 가슴에 물통 같은 것을 멘 이들이 급히 달려와 독을 뿜어내는 화살을 향해 불을 내뿜었다. 

  치치치치칙!

  독연이 불에 타오르는 동안 방독인이라 불리던 십여 명의 백의인들이 목을 붙잡고 무릎을 꿇었다. 그들은 죽어가는 순간에도 통에 연결된 관 끝에 불을 놓았다. 

  불꽃이 순식간 일어나더니 사람을 불태웠다. 그때 뒤따라 올라봤던 백의인들이 그 화염 뒤로 늘어섰다. 

  그때 세 명의 백의인들이 불꽃을 넘어 내려섰다. 바로 백무강과 철혈신전주 백철후 그리고 백요산이었다. 

  백무강은 전장을 훑어보고 나서 차가운 눈빛으로 당명인 등을 노려보았다. 

  “쏴!"

  퓨퓨퓨퓨퓨퓨퓨퓽!

  또다시 무형뇌전이 발사되었다. 그 순간 백무강과 백요산이 동시에 도를 횡으로 휘둘렀다. 붉은 도기가 해일처럼 일어났다가 사라졌다. 

  뒤쪽의 백의인들 몇몇이 낮은 신음을 토하고 쓰러졌지만 백무강 등 세 사람은 여전히 서 있었다. 그들이 붉은 도기가 일렁거리는 도를 늘어뜨린 채 천천히 앞으로 걸어나왔다. 

  “던져!"

  당명인은 당가인들의 손에 쥐어진 화살이 마지막 한 발임을 확인하고 소리쳤다. 그 순간 다시 도기가 허공을 가득 메웠다. 화살들이 땅에 닿지도 못하고 허공으로 튀어 검은 안개를 내뿜다. 그때 앞으로 나오던 세 사람에게서 붉은 호신강기가 흘러나왔다. 

  삼장무인연은 호신강기의 주변을 휘돌다가 사라져 버렸다.

  “강인! 가랏! 너희들도 가!"

  운강인이 놀라서 눈을 치떴다. 그러나 그 순간 당명인이 철의수를 들어 올려 오른손으로 팔과 의수의 연결 부위를 쥐었다. 

  끼르륵!

  운강인은 당명인의 행동과 이상한 소리를 듣는 순간 눈을 질끈 감고 소리쳤다. 

  “후퇴!"

  무림련 측 사람들이 다른 속도로 뒷걸음질쳤다. 제자리에 남아 있는 사람은 오직 한 사람, 당명인뿐이었다. 

  백무강은 도를 들어 올려 움직이려는 백의인들을 멈춰 세웠다. 그리고 오른손으로 의수의 검지를 위로 꺾는 당명인을 주시했다. 

  “녹의? 방독인!"

  방독인들이 급히 앞으로 튀어나오고 백무강과 백요산 그리고 백철후가 본능적으로 호신강기를 일으키는 순간, 당명인은 흐릿하게 미소 지으며 의수를 허공으로 치켜 올렸다. 

  퓻! 

  미약한 소리와 함께 꺾어진 검지에서 붉은 모래 같은 것이 뭉쳐진 채 일직선으로 날아갔다. 그것들은 방독인들과 백무강의 머리 위를 넘는 순간 안개처럼 흩어져 아래로 꺼지면서 동시에 바람을 타고 벼랑 쪽으로 날아갔다. 

  백무강이 당황한 눈빛으로 고개를 꺾었다가 중지를 겪고 있는 당명인을 향해 몸을 퉁겼다. 

  퓻!

  또다시 기묘한 소리가 나면서 이번에는 검은 액체가 백무강에게로 날아갔다. 백무강이 허공에서 도를 내리찍듯 휘둘렀다. 붉은 무지개 같은 도홍이 검은 먹들을 갈랐다. 도홍은 약지를 꺾으려는 당명인의 오른손과 철의수마저 동시에 스치고 지나쳤다. 

  화르르륵!

  도홍에 의해 두 줄기로 갈라진 점은 기운이 도풍에 짓눌려 방독인들의 발 앞에 떨어지자 네 명의 방독인들이 급히 불길을 내뿜었다. 

  “크아아아아아아!"

  백무강은 두 손을 모두 잃은 당명인에게서 눈을 떼고 고개를 돌렸다. 먼저 날아간 오독단혼사(五毒斷魂沙)에 의해 수십 명의 백의인들이 거품을 물고 나뒹굴었다. 

  백무강이 뒤를 바라보는 동안, 두 팔을 모두 잃은 당명인은 피를 줄줄 쏟으면서도 흐릿한 미소를 지었다.

  ‘식골마정액(食骨摩精掖)을 쓰고도 제대로 효과를 보지 못하다니, 아쉽군. 하지만 됐어. 적을 죽이는 것보다 동료를 살리는 게 더 좋아'

  백무강이 노기에 찬 눈빛을 당명인에게로 돌리는 그 순간 당명인은 반대로 고개를 뒤로 돌렸다. 운강인 등은 이미 점이 되어 있었다. 아무리 뛰어난 경공술을 지닌 자라도 따라잡지는 못하리라.

  당명인은 창백한 얼굴에 또다시 미소를 드리웠다. 

  “아버지, 저 최선을 다했습니다. 아버지의 아들로서, 무인으로서 그리고 한 여인을 사랑하는 남자로서. 장하지요? 안녕히!"

  바로 그 순간 붉은 도기가 당명인의 목을 스치고 지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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