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5장 사천을 뒤덮은 암운, 혈우를 뿌리고
“그래? 그렇겠군. 일단 천북까지 틀어쥐면 큰 힘 들이지 않고 방비할 수 있을 테니 원하는 만큼 내실을 기할 수 있을 게야. 백라천궁이 아닌 신승천도로 개파하기에 적절한 시기가 되겠군. 알겠네. 좌상의 말에 따르겠네."
백천휘가 흔쾌히 고개를 끄덕이자 좌상 백문정은 깊숙이 부복하며 감격에 겨운 목소리로 말했다.
“천군께서 친림하신다면 제자들이 감읍하여 용기백배할 것이옵니다."
백천휘는 흐릿한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백문정은 다시 한 번 깊이 부복하고 조용히 방을 나섰다. 그러나 방문이 닫히는 순간 급하게 상청궁을 빠져나와 대기하고 있던 백의인들에게 소리쳤다.
“천군께서 친정(親征)하실 것이다. 모두에게 알리고 준비하라 일러라."
백의인들이 급히 허리를 접고 아래로 몸을 날렸다.
백문정은 그때서야 한숨을 내쉬고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예리한 눈빛을 지닌 장년인들의 삼엄한 호위 속에서 백문정은 상청궁과 옥청궁 사이의 계단을 걸어 내려갔다. 그때 아래쪽에서 세 사람의 중년인들이 걸어 올라오고 있었다.
“응? 소군 아니신가?"
백문정이 중얼거리는 순간 그의 전후좌우에서 호위하던 장년인들이 급히 길 한쪽으로 비켜서며 허리를 접었다.
“소군! 이게 어피 된 일입니까? 천군을 배알하시려는 것 같은데 그 수염에 그 옷차림은......"
백무극이 빙긋 웃으며 말했다.
“아! 지금 막 출관한 터라 다듬을 새가 없었습니다. 내일 떠나는 일로 뵙고 오시는 길입니까?"
“그렇습니다만, 사실 천군께 친정해 주십사 하고 청해 올렸습니다."
백무극이 피식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안 될 걸 뻔히 아시면서."
“그리하마 하셨습니다."
“예? 뭐라 하셨습니까? 지금 허락하셨다 했습니까?"
백무극이 눈을 부릅뜨며 되묻자 백문정이 빙긋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설마?"
“이번 싸움의 의미를 말씀 올렸더니 흔쾌히 허하시더이다."
백무극은 텁수룩한 수염을 쓰다듬으며 말했다.
“잘됐습니다. 그럼 이렇게 급히 찾아뵐 필요도 없겠군요. 출정을 허락 받으러 가는 길이었는데."
백문정은 웃으며 아래쪽으로 손을 뻗었다.
“일단 같이 내려가시지요. 그 모습으로 나타나시면 천군께서 또 성급하게 군다시며 야단치실 겁니다."
백무극도 알고 있다는 듯 웃으며 다시 걸음을 되돌렸다. 두 사람이 나란히 걷고 그 뒤로 소불과 혈응이 따르자 호위무사들이 그 뒤를 따랐다.
“헌데 이번에는 꽤 오랫동안 폐관 수련 하셨지요? 성과를 보셨는지요?"
백무극이 미약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독한 마음 품고 들어갔었으니 성과가 있는 게 당연하지요. 다시는, 다시는 누구에게도 두려움을 느끼고 싶지 않으니까요."
백문정이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곤륜의 일은 들었습니다. 조금 알아봤는데, 그때 그 도사가 아마 태악자일 겁니다."
“태악자?"
“지금은 잊혀진 이름입니다만 한때 풍파투도라 불렀던 검광이지요. 태을자의 사제이기도 합니다."
백무극이 의아한 눈빛을 드러내며 물었다.
“그 정도 무위를 지린 태을자의 사제가 어피 잊혀질 수 있단 말입니까? 나와 백요산 전주가 최선을 다하지 않았다 하나 분명 맞상대를 했다면 한 사람으로는 도저히 이길 수 없는 상대였습니다. 무강 아저씨 또한 감당하지 못했을 겁니다."
백문정이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태을검선이라는 이름이 너무 큰 탓이겠지요. 그리고 너무 젊었을 때 모습을 감췄습니다. 지금 말씀하신 그 정도라면 검선은 못 되어도 검패 혹은 검왕 정도의 별호는 충분할 것인데, 풍파를 일으키는 싸움쟁이 도사라 불렸으니 당시로는 상대하기 껄끄러운 골칫거리 정도였겠지요."
“그때서야 백무극도 고개를 끄덕였다.
“헌데 어찌 아셨습니까?"
“세상에 나온 것은 아니나 곤륜에서는 활동을 하고 있는 모양입니다."
“허면 그 청산이라는 젊은 친구는?"
백문정은 말이 끝나기도 전에 고개를 저었다.
“이 늙은이도 궁금하여 알아보았는데 알 길이 없습니다. 소군처럼 수련하는 것일까요?"
백문정이 빙긋 웃자 백무극은 얼굴을 찡그렸다.
“하! 이거 웬만큼 자신감을 가지고 나왔건만 그리 말씀하시니 불안해집니다."
“허허허! 걱정하지 마세요. 소군의 자질은 제가 더 잘 압니다. 내심 소군께 불만이 많았습니다. 자질에 비해 노력이 부족하다 생각했으니까요. 해서 지난번 곤륜에서의 일은 오히려 다행이다 생각했지요. 이젠 걱정하지 않습니다."
백무극은 그래도 고개를 저었다.
“아저씨께서 그 친구를 직접 보지 않아서 그리 말씀하시는 겁니다. 마음이 편하지 않아요."
“알겠습니다. 허면 이렇게 하지요. 일단 이번 싸움이 끝나면 그때 다시 곤륜으로 가세요. 이번에는 진궁을 데리고 가시고 이왕이면 무강 그 친구와 함께 가세요. 소군께서 그리 불안해하시니 뿌리까지 뽑아버리는게 옳겠지요."
백무극이 고개를 끄덕이다가 갑자기 생각난 듯 물었다.
“헌데 이번 싸움에는 십 할 자신이 있으신 겁니까? 저들 또한 그동안 적지 않은 준비를 했을 텐데요."
“진궁이 금강차혼강시를 완성했습니다. 그리고 이 늙은이 또한 당가의 독에 대한 대비와 검단협곡 확보를 위하여 준비한 것들이 있지요. 금우고도, 그 기나긴 잔도. 저들은 이제 잔도를 전장으로 삼은 것을 후회하게 될 것입니다."
순간 백무극이 눈을 치떠 기쁨을 드러냈다.
“드디어 완성됐군요. 그렇습니다. 저들은 결코 잔도를 무기 삼을 수 없을 겁니다."
옥청궁의 후문을 앞두고 두 사람은 의미심장한 미소를 교환했다.
마주 보는 벽돌사이의 거리가 십 장이 넘는 넓은 공간 가득 하얀 연기가 차 있었다. 그냥하얀 연기가 아니라 하얀 뭉게구름이 태양을 감싼 듯 중앙으로부터 은은한 서광이 흘러나오고 있었다.
그 연기는 오랫동안 걷히지 않았다. 다만 아주 느린 심장의 박동처럼 잠시 네 벽에서 떨어져 중앙으로 모여 짙어졌다가 다시 벽으로 밀려가기를 반복할 따름이었다. 그렇게 단순한 변화만을 반복하던 하얀 연기가 서서히 움직이기 시작했다. 안개처럼 흩어져 있던 연기는 띠처럼 변하여 똬리를 틀었다가 와운(渦雲)처럼 공간을 휘돌면서 중앙부를 옥죄어갔다. 그리고 어느 순간 동굴 속으로 숨는 용처럼 사라져 갔다.
용과 같던 연기가 서서히 사라져 감에 따라 중앙에 형상이 드러나기 시작했다. 먼저 바닥에 접한 가부좌 튼 다리가 드러나고 가슴이 드러나고 사람의 입이 드러났다. 하얀 연기는 겨우 세 줄만 남아 가부좌 튼 사람의 얼굴과 머리 위를 휘돌다가 순식간 콧속으로 빨려 들어갔다.
은발사내 백천휘는 마침내 눈을 뜨고 조용히 일어섰다.
“이번 싸움이 내게 천명을 알려줄 것이라는 느낌이 드는구나. 하기야 더 이상 망설일 시간을 주지는 않으리라 천명을 모른다 해도 이번 싸움이 끝나는 그 순간까지 나의 길을 결정해야 한다. 무극의 그릇을 생각하면 사천으로 만족해야 할 테니 이번이 마지막 싸움이 되겠지. 그러나 나의 갈 길이 패도라면 첫 싸움이 될 것이다. 어느 쪽인가? 훗! 알게 되겠지."
백천휘는 차가운 미소를 짓고서 방을 나섰다.
그가 상청궁의 연무장에 내려섰을 때의 일이었다. 옥청궁으로 내려가는 길에서 눈이 부시도록 찬란한 금빛의 살기가 일렁였다.
백천휘는 이채를 드리우며 오른손을 들었다.
“나설 것 없다."
아무도 없는 곳에서 누구에게 말을 한 것인지는 모르나 그 순간 금빛의 살기가 모습을 드러냈다.
금왕신마 금극현.
그는 무정한 금안으로 백천휘를 바라보다가 갑자기 쇄도했다. 그 순간 그의 두 손에는 이미 금빛 안개가 휘돌았고 두 사람 사이가 십여 장에 이르는 순간 금빛 안개는 가느다란 창으로 변해 백천휘의 이마와 가슴을 찍었다.
휘뤼뤼뤼뤼!
백천휘의 등 뒤에서 얼굴까지 하얀 천으로 감싼 두 사람이 갑자기 나타나서 백천휘의 앞으로 이동하려 했다.
“나설 것 없다 해도."
백천휘는 뒷짐을 쥔 채 차갑게 소리쳤다. 금방이라도 그의 앞을 막아설 것 같던 두 백의인이 좌우로 휘돌아 사라져 버렸다. 그때 두 줄기 금빛 장창들이 백천휘의 몸에 닿는 듯했다.
단번에 이마와 가슴을 관통해야 하리라. 그러나 결과는 달랐다. 금극현이 용을 쓰는 듯한데도 장창들은 백천휘의 이마와 가슴의 세 치 앞에서 꼼짝도 하지 못했다.
“쉑! 쉑! 쉑!"
눈을 치뜬 금극현의 입에서 쇳소리 섞인 가쁜 숨소리가 흘러나왔다. 그는 이미 죽어가고 있었다. 그랬기에 그가 얼굴도 모르고 모셔야 했던 주인이 어떠한 사람인지 확인하고 싶었던 것이었다.
금극현은 인정해야 했다. 적어도 무공만으로 따지자면 천군은 주인으로서의 자격이 충분했다. 아무리 지금 그의 능력이 점창산에서 보인 무위의 칠 할에도 못 미친다 하지만, 자연스럽게 일어나는 호신강기만으로 그의 공격을 막아내는 천군의 능력은 셋 아니, 다섯의 그가 있어도 결코 당해내지 못할 실력이었다. 무인임을 자처했던 금극현으로서는 상당히 만족스런 결과였다.
“잘못된 무공을 익혔구나. 죽고 싶을 만큼 괴로워 보여. 이제 그만 쉬어라."
백천휘가 부드럽게 말했다. 말이 끝나는 순간 그의 신형은 원래부터 그 자리에 있었던 것처럼 금극현의 앞에 나타났다.
백천휘는 금극현의 하얀 입술을 애처롭게 바라보며 오른손 검지로 그의 가슴을 지그시 눌렸다.
푸스스스스!
미처 거두어들이지 못했던 장창들이 일순간에 금빛 안개가 되었다가 허공으로 흩어져 버렸고 금극현은 그 자리에 주저앉았다.
“쿨룩!"
금극현이 기침을 하는 순간 시뻘건 핏물이 나와 백천휘의 백의로 튀었다. 그러나 핏방울들은 장창들이 그러했던 것처럼 그의 몸 앞 허공에서 아래로 주르륵 흘러내릴 뿐이었다.
백천휘는 뒷짐을 쥔 채 다시 붉은 입술과 인간의 혈색을 되찾은 금극현을 내려다보았다.
금극현이 웃으려는 듯 입술을 씰룩이다가 힘겹게 말했다.
“한 가지만 묻겠소."
백천휘가 고개를 끄덕이자 금극현이 가쁜 숨을 연달아 토해낸 후에 다시 말했다.
“나는 무엇을 위해 싸우고 무엇을 위해 산 것이오?"
백천휘의 입술 끝이 위로 말려 올라갔다.
“어려운 걸 묻는구나. 곧 내가 무엇을 위해 사는가를 묻는 것인데, 미안하다만 나도 그걸 아직 모르겠다. 이제야 알아보러 가는 중이구나."
금극현은 허망한 눈빛으로 백천휘를 보다가 웃음을 토했다.
“허허허! 숨조차 제대로 쉬지 못하고 가슴을 쥐어뜯어 가며 견뎠는데, 결국 혼이 없는 강시로 산 것인가?"
백천휘가 씁쓸하게 웃으며 물었다.
“미안하게 되었구나. 말해 보아라. 내가 어떤 결정을 내려야 네 혼을 되찾을 수 있을 것 같으냐?"
금극현은 고개를 저었다.
“이제 와서 그게 무슨 소용이오? 죽으면 모든 것이 끝인 것을."
“너를 위해 묻는 것이 아니다. 나 자신을 위해 묻는 것이야."
금극현은 웃으며 백천휘를 바라보았다.
“적어도 솔직한 주군이시구먼."
“자넨 버릇없는 수하고."
두 사람이 서로를 보며 웃었다.
금극현이 말했다.
“생각없이 그저 시키는 대로 싸움만 하고 살았소. 가능하다면 무인이 무인답게 살 수 있는 세상을 만들어주시구려."
백천휘가 난감한 듯 콧등에 주름을 잡았다.
“하! 일단 네 뜻은 알겠다. 하지만 어렵구나. 무인이 무인답게 사는 세상이 그러한 세상이 전에 있었단 승천당에 이름을 올린 모든 이들의 뜻을 이루어주는 것보다 더 어렵다. 생각해 보마. 그 결정이 곧 내 남은 삶의 방향이 될 테니 고민해 봐야겠지. 아직 할 말이 남았느냐?"
사람의 붉은 혈색을 되찾은 듯하던 금극현의 얼굴이 급격하게 창백해져 갔다. 그러나 금극현은 차가운 미소를 잃지 않고 말했다.
“처음부터 이렇게 챙겨주지 그랬소? 그랬다면 불만 없이 따랐을 텐데."
“그게 쉽지 않더구나. 나 자신을 챙기기도 바빴거든. 그래서 네 질문에 대답하지 못하는 것이 아니냐?"
“흐흐흐, 그도 그렇소. 이제 할 말 다 했소."
백천휘는 부드러운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내생에는 나처럼 태어나라. 네 삶이 남의 삶에 종속되지 않도록. 삶의 방향을 모른다 해도 다른 이에게 휘둘리지 않도록."
“내생이 있기는 하오?"
“있다고 믿는다. 그만 쉬어라."
금극현은 힘겹게 움직여 가부좌를 틀고 두 손을 무릎 위에 굳게 놓고는 백천휘를 바라보았다. 가만히 지켜보던 백천휘는 서서히 손을 뻗어 금극현의 두 눈을 감겨주었다.
백천휘는 다시 뒷짐을 쥔 채 허공을 바라보며 말했다.
“자네들도 쉬게. 따라올 필요 없어. 아! 그리고 이 친구, 고이 장사 지내주게."
백천휘는 대답을 듣지 않고 옥청궁을 향해 걸어갔다.
세상은 벌써 늦은 봄이 다 되었건만 운청산은 빙판이나 다름없는 만년설 위를 치달리고 있었다.
태악자를 찾아가 귀곡산인이 통천동에 있다는 것을 확인하고 대강의 지리를 들을 때만 해도 과연 그가 한 번도 가본 적이 없는 통천동을 찾을 수나 있을까 걱정했지만, 그는 단 이틀 만에 통천계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것은 태악자의 설명이 자세했던 탓이 아니었다.
영혼의 이끌림이라고나 할까. 그의 몸속에 깃든 영과 양신이 동시에 흥분하는 것만 같았다. 영과 양신은 태청지계의 신령한 기운을 품은 통천계를 향해 나침판처럼 방향을 제시하고 있었다.
“아! 저긴가?"
잠시 멈추어 선 운청산은 밝고 푸른 하늘 아래 은빛으로 반짝이는 통천계를 바라보며 미소를 지었다.
다시 몸을 날렸다. 그리고 반 시진도 못 되어 운청산은 통천계 아니, 통천동부가 있는 빙원 위의 작은 얼음 봉우리 앞에 이르렀다. 영과 양신이 동시에 멈추라고 소리치는 것만 같았다.
고개를 꺾어보니 삼십여 장 위쪽에 입구라 할 만한 구멍이 뚫려 있었다. 운청산은 바로 바닥을 적어 허공으로 솟구쳤다. 단번에 십여 장을 오르고 얼음을 차며 다섯 번 연달아 솟구쳐 입구에 이르렀다.
참으로 신기한 동부였다. 인공이 가미된 흔적은 전혀 없지만 어떻게 홀로 삐쭉 솟은 봉우리에 그같이 깊숙한 동부가 있는지 알 도리가 없었다. 어둡지도 않고 그렇다고 밝지도 않았지만 횃불 하나 없는데 은은한 빛과 함께 한없이 부드럽고 따뜻한 공기가 새어 나오고 있었다.
운청산은 등 뒤의 차가운 공기를 떨쳐 버리고 안으로 들어갔다. 일직선으로 뚫린 동부를 오여 장 들어가자 포근한 기운이 전신을 감쌌다.
“왔느냐?"
운청산은 놀라지 않았다. 오여 장 앞에서 동부는 끝을 드러내고 있었고, 끝에 자리한 작은 석단 위에 귀곡산인이 가부좌를 튼 채 앉아 있었다.
운청산은 서두르지 않고 사 장을 더 들어가 귀곡산인 앞에 서서 미소를 지었다.
“예. 왔습니다."
운청산은 차분히 절을 올렸다. 일 배, 이 배, 삼 배...... 그리고 구 배.
“설차 이십구대 전인 운청산이 스승님을 뵙습니다."
귀곡산인의 입가에 흐릿한 미소가 어렸다.
“파를 이어준다 하니 고맙구나."
운청산은 공손하게 무릎 꿇고 외눈에 물기를 드리운 채 웃으며 말했다.
“스승님이라 부르는 것은 지금이 마지막입니다. 제겐 할아버지가 더 좋습니다."
“아무려면 어떠냐. 네 맘대로 하여라. 어디 보자꾸나."
귀곡산인은 무심한 눈으로 운청산의 얼굴을 찬찬히 살폈다.
“참으로 공교롭게 되었구나. 영이 깃들 때 양신이 출신하였더냐?"
운청산은 곤륜으로 돌아왔을 때의 상태와 몸을 치유했던 과정 그리고 영이 깃들었던 때의 상황을 세세히 설명했다.
“비록 천지의 기운에 의지하는 바 없지는 않으나 양신은 네 몸 안에서 태어간 너의 것이라 할 수 있다. 그러나 영은 천지가 또 다른 모습으로 화하여 잠시 네 몸속에 거하는 것. 곧 네 몸속에는 지금 천지인이 동시에 존재하는 것이다. 그러나 그것들이 온전히 하나 되지 못한 상태. 이는 천지가 부모가 되어 갓 태어난 아이를 돌보느라 정신을 차리지 못하는 것
과 마찬가지인 것이다. 청산! 이곳의 기운이 귀곡의 그것과는 비할 바가 아니니 지금부터 태허구전선공에만 집중하여 연공하거라."
운청산의 외눈에 이채가 어렸다.
“영통천망심법이 아닌 태허구전선공입니까?"
“아이가 장성하지 않으면 부모는 노심초사할 수밖에 없는 존재. 먼저 양신이 자라야 영도 제 할 일에 전념할 수 있으리라."
청산이 고개를 끄덕이자 귀곡산인은 부드러운 목소리로 한마디 덧붙였다.
“운공하여 보면 알 것이다. 이곳의 기운과 태허구전선공은 참으로 잘 어울린다. 거기에 영이 제 할 일을 하고자 도울 것이니 결과를 보는 일은 생각보다 다를 것이다."
운청산은 가부좌를 틀어서 앉고 눈을 감았다. 그리고 호흡에 몰입하기 전에 귀곡산인이 전과 달리 부드러움이 두드러진다 생각하며 내심 미소를 지었다. 그 순간을 보고 있던 귀곡산인도 동시에 미소를 지었다.
귀곡산인은 동부의 천장을 뚫고 들어오는 청령한 빛이 운청산의 신형을 허공으로 잡아당기는 것을 보며 미소 지었다. 그의 눈이 운청산의 얼굴을 떠나 천장으로 옮겨졌다.
천계의 빛만큼이나 맑고 밝은 영과 양신이 서서히 포개어지면서 그 빛을 더해가고 있었다. 양신은 계속해서 그 크기를 늘여갔다. 그리고 마침내 운청산의 실체와 다름없는 크기로 자라 완전히 영과 포개어졌다. 그리고 서서히 내려앉아 운청산의 몸속으로 스며들어 갔다.
실체와 영과 양신이 완전히 하나가 되는 순간 운청산의 입가에 황홀한 미소가 감돌았다. 허공에 떠 있던 그의 신형이 가라앉으면서 천계의 빛도 점차 가늘어졌고 그 빛이 완전히 사라지는 순간 운청산이 눈을 떴다.
두 사람의 눈이 마주쳤다. 아무도 입을 열지 않았다. 서로를 보며 웃을 따름이었다.
두 사람의 얼굴에서 미소가 잦아드는 순간 귀곡산인이 물었다.
“하늘과의 연을 맺는 일에 두 번의 기회란 없다. 한 번 이어지면 끊어짐이 없으나 실패하면 그것으로 끝일 것이다. 그래도 지금 가보겠느냐?"
“예. 가보겠습니다."
귀곡산인이 고개를 끄덕이자 운청산은 다시 눈을 감고 영통친망심법을 떠올렸다. 단 두 번의 호흡으로 진공 속에 녹아든 운청산은 무엇이라 불러야 할지 모르는 양신과 영의 합일체 속으로 녹아들어 갔다.
다시 세상이 영안(靈眼)에 들어왔다. 그때는 이미 귀곡산인도 통친동도 사라지고 없었고 그에게 보이는 것이라고는 만년설 가득한 곤륜뿐이었다.
운청산은 한없이 비상했다. 곤륜이 점으로 보였다가 사라졌다. 그 순간 그의 주위로 오색 빛 구름이 몰려들고 사방에서 신묘한 가락이 들려왔다.
그때 놀라운 광경이 눈앞에 펼쳐졌다. 휘황찬란한 보관을 쓰고 하늘거리는 분홍빛 천라의를 입은 아름다운 여인이 그녀 못지않은 선녀들을 좌우에 대동하고 구름을 밟으며 다가오고 있었다.
그녀들의 뒤쪽에서 천상의 악대가 천상의 가락인 청각조(淸角調)를 연주하니 구름 속에서 용들이 모습을 드러내어 너울너울 춤을 추고 봉황이 나타나 날갯짓으로 장단을 맞추었다. 선녀들이 마침내 운청산의 발밑에 이르러 화사한 미소를 짓고 천라의를 휘날려 운청산에게 함께 춤출 것을 권하였다.
운청산은 무심한 눈으로 그 신묘한 광경을 보다가 고개를 들어 위를 살폈다. 계단처럼 이어진 오색 구름들 사이로 맑고 푸른빛이 새어 나와 하늘의 가없음을 드러내고 있었다.
운청산은 계속해서 청하는 선녀들의 손길을 뿌리치고 구름 위로 올랐다. 갑자기 먹구름이 모여들었다. 천둥 번개가 치고 그 사이로 무서운 눈을 치뜨는 신장과 흉측한 귀신들이 나타나 운청산을 위협했다. 십 장에 이르는 긴 손톱이 달린 시커먼 손을 뻗어 그를 찢어발기고 압사시킬 것처럼 휘둘렀다.
운청산은 선녀들에게 무심했던 것처럼 다시 먹구름을 뚫고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운청산의 영안은 한없이 올라가 구름이 끝나는 곳에 이르렀다. 보였다. 그 위에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아름다운 궁전들이 있었다. 한없이 밝으나 눈부시지 많은 후광에 감싸인 두 개의 궁전이 좌우에 있고 그 위로 또 다른 궁전이 자리해 있었다.
운청산은 머리 위를 스치고 지나가는 귀수(鬼獸)들을 뚫고 오직 그 궁전들을 향해 나아갔다. 그리고 마침내 궁전을 떠받치고 있는 구름 바로 아래에 이르렀다. 손만 뻗으면 구름을 잡고 신장과 선관들이 지키고 있는 궁전 앞에 이를 것 같았다.
운청산은 힘을 다하여 손을 뻗으려 했다.
“청산아!"
운청산은 갑자기 들려오는 목소리에 반응하여 고개를 숙였다. 궁전을 받치고 있는 구름의 바로 한 층 아래쪽 뭉게구름 위에서 검을 든 선풍도골의 노인이 그를 보고 있었다. 눈이 마주치자 노인은 부드러운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저었다.
운청산은 노인과 궁전을 번갈아 바라보며 망설였다.
“청산아! 아직은 아니구나."
그 목소리를 감히 거부할 수 없었다. 운청산은 고개를 숙이고 노인 앞으로 다가가 무릎을 꿇었다. 노인은 운청산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말했다.
“실망할 것 없느니라. 하늘과의 연이 이미 네게 이어졌으니 또 다른 기회가 있으리라. 기억하여라. 하늘과 통하는 이 목소리를 기억하여라."
운청산이 고개를 숙이자 노인은 부드럽게 물러서며 다시 말했다.
“보아라 청산!"
운청산이 고개를 드는 순간 노인이 검을 뽑아 들고 구름을 밟아 나갔다. 허공을 휘돌던 노인이 검을 세차게 내뻗으니 그 밑으로 천둥이 치고, 부드럽게 휘저으니 그 밑으로 바람이 불고, 세차게 또 부드럽게 내뻗고 휘저으니 비가 되고 구름이 되었다.
“음이 양과 화합하지 아니한즉 요란한 바람이 되고, 양이 음과 화하지 아니한즉 어지러운 우뢰가 되고, 음과 양이 화한즉 서리 되고 눈도 되고, 양과 음이 화한즉 이슬도 되고 비도 된다."
검을 휘두르며 노래를 부르는 노인의 발 밑으로 청룡이 모습을 드러내고 노인의 검을 따라 구름 속에 숨었다가 다시 노인의 검을 따라 노인의 신형을 휘돌았다.
“하늘에는 지극한 정기가 있고 땅에는 지극한 순수함이 있으니 사람이 이를 거역하지 않고 그 뜻에 따르면 천지가 어찌 따로 놀겠는가. 천지만물의 생함과 쇠함은 모두 천지의 기류 변화에 따른 것이다. 찾아라. 천지만엽이 어디에서 나온 것이냐. 처음에 하나였던 것이 둘로 나뉘고 그것이 서로 엉켜 변화하니 만사만유(萬事萬有)가 모두 거기서 나오는 것이다. 만류가 귀일하는 곳, 태허에 이르면 자연히 천룡이 따르고 악룡이 굴복하리라."
순간 노인의 검이 갑자기 몰려든 먹구름을 갈랐다. 순간 시뻘건 우뢰가 번득이고 천둥이 쳤다. 그리고 운청산의 주변에 있던 모든 구름들이 사라졌다.
운청산은 벌거벗은 채 홀로 천공에 떠 있었다. 노인을 찾아 두리번거렸지만 보이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운청산은 눈을 감았다. 노인의 목소리를 떠올리고 검을 떠올렸다. 순간 그의 벌거벗은 몸뚱이가 부스러져 먼지가 되어 흩어졌다.
운청산의 영안은 밝은 빛으로만 남은 그의 육신이 계속해서 흩어져 천지에 그물을 치듯 뻗어 나가는 것을 보았다.
운청산은 더 이상 허공을 떠돌 필요가 없음을 깨닫고 땅으로 이어지는 한 줄기 빛을 따라 내려갔다. 청해가 보이고 곤륜이 보였다. 그리고 통천계가 보였고 그의 육신이 보였다. 운청산은 스스럼없이 그의 육신 속으로 스며들어 갔다.
그가 눈을 뜨기 바로 직전에 마주 앉아 눈을 감고 있던 귀곡산인이 씁쓸한 미소를 지으며 먼저 눈을 떴다. 그리고 운청산이 눈을 떴다.
“어떻더냐?"
귀곡산인이 이상한 목소리로 물었다. 바로 이청수나 운현산등과 대화할 때 쓰던 그 목소리였다. 예전에는 알아듣지 못하던 그 목소리를 듣는 순간 운청산은 동류의 목소리로 대답했다.
“태을 어르신을 뵈었습니다."
“거기서 멈춘 것을 후회하지 않느냐?"
“그리하라신 이유가 있겠지요."
“그리 생각하면 되었다."
귀곡산인은 부드럽게 미소 지으며 평상시의 목소리로 돌아와 말했다.
“그 아이를 이리 주겠느냐?"
운청산은 문득 지난 십여 일 동안 외면해 왔던 화살촉을 바라보다가 부드럽게 매만지며 목걸이를 벗었다.
“이젠 제가 할 수 있습니다."
“내가 해주고 싶구나. 넌 네 어머니나 뫼셔라."
운청산은 미소를 지으며 목걸이를 건넸다. 그리고 오른손을 등 뒤로 돌려 허리를 짚었다가 다시 앞으로 내뻗었다.
그의 손가락 끝에 이청수가 환한 미소를 지으며 서 있었다. 그때 귀곡산인이 목걸이를 다시 되돌려주었다. 당우리가 온전한 모습으로 화살촉 위에 서서 웃고 있었다.
오른손에는 이청수가 왼손에는 당우리가 서 있고 그 주위에는 운현산등이 서 있었다. 모두가 하나같이 환한 미소를 짓고 있었다. 그들이 모두 귀곡산인을 향해 절했다.
귀곡산인은 흐뭇한 미소를 짓고 고개를 끄덕인 후에 운청산에게 물었다.
“거기서 멈춤으로써 지금의 네 처지는 참으로 모호하게 되었다. 신선지도와 인간지도의 갈림길에 서 있다고 보아야 옳으리라. 너는 어느 쪽을 택하겠느냐?"
운청산은 대답 대신 먼저 물었다.
“신선이란 무엇입니까?"
“인간이 한계를 넘어 이를 수 있는 마지막 경지다. 완성된 존재, 시공을 초월하는 존재, 동요하지 않는 존재다."
“동요하지 않는 존재? 무엇으로부터 동요하지 않는다는 겁니까?"
“현상으로부터 아니, 모든 변화로부터 동요하지 않는 그래서 늘 안정적인 존재다."
“고독하게 느껴집니다."
“되려는 자에게는 고독이나 된 자에게는 자유다. 인세의 모든 감정들이 하찮게 여겨지지."
“이기적입니다. 다 아는자, 힘을 가진자가 세상을 하찮게 여긴다면 인간에겐 아무런 도움도 되지 않는 존재가 아닙니까?"
“인간의 눈에는 분명 이기적인 존재다. 하지만 신선은 현재를 살면서도 머리 속으로는 삼생을 사는 존재이다. 현생의 고통이 전생의 업보이며 내생의 기쁨임을 아는 존재지. 꽃이 지고 달이 기운다고 불쌍해 보이더냐? 곧 다시 피고 찰 것을 알기에 동요하지 않는 것 아니냐? 같은 이치니라. 세상의 일에는 나쁜 것도 없고 좋은 것도 없다. 신선이란 모든 것을 알고서 평범하게 받아들이는 존재다. 인간이면서 인간이 아닌 존재라서 인간이라면 누구나 안타까워하고 바꾸어보러 하는 것에도 별다른 감흥을 느끼지 못하지. 인간에게는 무정하고 야속하게 느껴질 테지만 천지가 원래 그렇게 돌아가는 것이니 동요하지 않는 것이다."
운청산은 그의 앞에 서 있는 영혼들을 바라보며 씁쓸한 미소를 짓고 고개를 저었다.
“신선지도를 걷는다면 현생의 인연들은 모두 부질없게 느껴지겠군요?"
귀곡산인은 흐릿한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신선의 반열에 들어서면 자연히 그리된다."
“그렇다면 전 신선이 되지 않겠습니다. 다 아는 사람은 꿈도 꾸지 못할 겁니다. 꿈이 없는 삶은 재미없습니다."
운청산은 말끝에 당우리를 바라보며 빙그레 미소를 지었다 꿈이 없는 삶은 재미없다. 과거 당우리가 그에게 한 말인 탓이었다.
귀곡산인도 웃음을 더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 대답할 줄 알았다. 청산아! 너도 알다시피 신선이 되는 사람은 많지 않으나 되는 방법은 무수히 많다. 반선, 태을 그리고 나만 해도 모두 다른 길로 같은 곳을 가려고 했다. 우리 세 사람은 모두 서로의 길에 확신을 가지고 있었지만 그것을 최선이라고 말하지는 못한다. 그러나 오직 하나, 모두가 최선의 길이라고 동시에 인정하는 것이 한 가지 있느니라. 신선 중에 가장 어렵고 가장 귀한 신선은 적덕선이라는 사실이다. 하늘과의 연은 이미 이어진 것, 네가 그 길을 가거라."
운청산은 밝게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되었다. 가보아라."
운청산은 섭섭함을 드러내지 않고 조용히 미소를 지으며 절을 올렸다. 그리고 동부 밖으로 나서서 하늘을 바라보다가 정수리로 두 손을 뻗으며 그 기묘한 목소리로 말했다.
“이게 좋겠지요?"
그가 다시 손을 내리자 늘 정수리에 이어져 있던 운현산 등이 운청산의 여덟 손가락 끝에 맺혔다. 그는 목걸이를 이청수가 자리한 오른손으로 옮겨 쥐고 내려다보았다. 운현산 등이 그를 들러선 가운데 이청수와 당우리가 손을 잡고 그를 올려다보며 미소를 지었다.
운청산은 밝게 웃고 허공으로 몸을 날렸다. 운청산과 열 신명들이 밝은 웃음을 터뜨리며 빙원을 가로질렀다.
“허허허! 그 녀석 요란하게도 가는구나."
귀곡산인이 미소를 짓는 순간 방금 운청산이 떠났던 그 자리에 한 줄기 빛이 내러앉더니 곧 선풍도골의 노인으로 화하여 안으로 들어왔다.
귀곡산인은 놀라는 대신 얼굴을 찌푸렸다.
“예끼! 못된 사람! 어찌하여 선연이 닿은 사질의 앞길을 가로막은 것인가?"
노인은 빙긋이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사질은 무슨! 그런 연을 따졌다면 내가 어찌 내 제자의 죽음을 보고만 있었겠는가? 땅에서의 내 인연은 이미 다한 것. 슬퍼할 일도 아니었고. 헌데 자네는 왜 신선이 되면 좋은 점은 따로 말하지 않고 저 아이가 적덕선의 길을 가도록 유도했나?"
“적덕선이야 말로 진선임을 아는 까닭이지."
“그런데 왜 야단인가? 어차피 그 길을 갈 아이라서 막았을 뿐인데."
“하필이면 저 아이에게 궂은일을 시키려 하니 그러지."
노인은 미소를 지으며 콧방귀를 꼈다.
“흥! 조금 전까지 신선은 무정하고 이기적인 존재라고 말해 놓고서 금세 이렇게 말을 바꾸나? 자기 제자라고 무척이나 아끼는구먼. 과연 예전의 귀곡이 아니야. 얼어 죽는 생명이 있다고 천지가 돌보냐 했던, 그 차갑던 사람이 누군지 모르겠구먼. 다 제 노릇이란 것이 있지 않은가? 저 아이를 부려먹기에는 지금 저 경지가 딱 좋아 삼청궁에 이르렀다면 자네처럼 세상을 등질 것이고 그리되면 현세에 어디를 가서 저만한 아이를 또 찾는단 말인가?"
귀곡산인은 찌푸려진 얼굴을 펴며 물었다.
“누가 발단 선관 아니랄까 봐 말은 잘하는구먼. 헌데 저 정도로 정말 충분한가?"
“그건 나도 모르네. 하지만 삼청궁에 이르면 과한 건 분명하지. 어찌 되겠지."
“쯧! 참으로 무책임한 말을 하는구먼."
귀곡산인이 다시 얼굴을 찌푸리는데도 노민은 여전히 웃을 따름이었다.
“인세가 마무리 복잡하다 하나 천지 운행의 틀을 벗어난 적이 있던가? 모자라면 누가 또 채워주겠지. 그건 그렇고 자넨 계속 여기 있을 것인가? 올라가지 않으려나?"
귀곡산인은 고개를 저었다.
“여기 있을 생각은 없어. 하지만 아직은 올라가고 싶지도 않아. 내 성격에 자네처럼 말단 선관 노릇을 쉽게 견딜 수 있을 성싶은가? 또 모르지. 반선이 올라갈 작정을 하면 그보다 조금 먼저 올라갈지."
노인은 빙긋 웃으며 뒤돌아졌다.
“역시 자네나 반선 같은 존재들은 문제야. 자기 마음대로 또 언제든지 삼청궁을 들락거릴 수 있으면서 책임은 맡으려 하지 않으니 내가 늘 바쁘지. 어쨌든 또 보세."
“잘 가게."
노인은 원래 없었던 존재처럼 사라지고 귀곡산인 역시 아무런 일도 있었다는 듯 눈을 감았다.
운청산이 통천계를 떠난 그 다음날, 그러니까 오월에 접어든 지 스무여드레째가 되는 날이었다.
여느 때와 같이 검단협곡의 아침이 밝았다. 별다른 걱정이 없다면 누구나 좋아할 아침이었다.
하늘은 눈이 시리도록 푸르렀고 적당하게 건조한 바람은 양을 쓰다듬듯 살랑거렸다. 내륙은 벌써 그늘을 찾아야 할 만큼 더울 테지만, 고원에 자리한 검단협곡은 눈부신 got살과는 달리 기분 좋을 정도로 포근했다.
“피 흘리기는 너무 눈부신 아침이로군."
백천휘는 백라천궁의 진영에서 몇 발짝 벗어나 뒷짐을 친 채 검단협곡을 바라보았다. 왼쪽에 서 있던 백문정이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저들은 그렇게 생각지 않는가 봅니다."
백천휘가 미소를 지을때 백문정을 보았다.
“저들이 나을 것을 확신하는가?"
“화산과 무당 그리고 종남이 합세했습니다. 전 무림의 반이 모인 것이니 저들로서는 더 이상 시간을 끌 이유가 없지 않겠습니까? 그리고 진궁이 저들의 이동을 확인했습니다. 엊저녁에 이미 저 협곡 안쪽까지 이르렀다 합니다. 우리와는 달리 협소한 장소라 많은 사람이 오래 머물 곳은 못 되지요. 결국 치겠다는 뜻. 곧 모습을 드러낼 것으로 생각됩니다."
“진궁이 또 쓸데없이 심력을 소모한 모양이구먼. 때가 되면 자연히 알 일인데."
우측에 서 있던 백무강이 말했다.
“천군께서 친히 나와 계시니 조바심이 인 모양입니다."
백문정이 웃으며 덧붙였다.
“검각산에 해둔 일이 있는데 그것이 제 노릇을 하려면 사나흘 안에 싸움이 벌어지는 게 좋다 했습니다."
백천휘가 부드러운 미소를 지었다.
“그런가? 어쨌든 난 참관만 할 것이야. 그대들도 나를 의식할 필요 없어. 지루하지 않으니 때가 되면 소신껏 알아서들 하게."
백부강과 백문정이 가볍게 허리를 접었다. 그때 백천휘의 눈에 이채가 어렸다.
“그렇군. 저기 나오는군."
좁은 협곡을 통하여 수십 개의 깃발들이 먼저 나오고 그 뒤로 계속해서 사람들이 쏟아져 나왔다. 그들은 협곡의 앞쪽으로 넓게 퍼져 일자로 포진했다.
“우리도 돌아가 볼까?"
백천휘가 말하자 백무강과 백문정은 동시에 뒤쪽으로 활을 뻗어 먼저 가기를 청했다.
현상자가 먼저 앞으로 걸어나오자 나머지 수뇌들도 따라나섰고 지금껏 볼 수 없었던 네 명의 노도사들도 함께 나왔다. 바로 화산 장문인 우현자와 무당의 보천자와 장로 상명자 그리고 종남의 장로 금학자였다.
“저들은 과연 무엇을 믿고 저리도 당당한 것인가?"
현상자가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눈빛으로 상대의 진영을 살폈다. 그 같은 의문은 헌상자만의 것이 아니었다. 비록 천북까지 패퇴하였다. 하지만 힘이 모자라 진 것이라고는 생각지 않는 사친무림련의 수뇌들 모두가 한결같이 같은 의문을 느끼고 있었다.
“어떻습니까, 진인? 빈도가 보기에는 특별한 것이 없습니다만."
현상자가 보천자에게 물었다. 사실은 물을 필요도 없는 일이었다. 두 진영 사이에 존재하는 것은 시야가 훤하게 트인 삼십여리의 넓은 고원뿐이었고, 만약 그 사이에 무언가 수를 썼다면 협곡 위쪽에 상주해 있던 이들이 발견하지 못했을 턱이 없었다. 그 사실을 뒤받침에나 해주듯 보천자가 창노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장문인! 저들 뒤쪽으로는 모르겠으나 당장은 특별히 거슬리는 것이 없구려. 허나 저들 진영의 공기가 그리 밝지 않아 별로 좋은 기분은 아니구려."
현상자의 눈길에 건곤파의 두 진인에게로 돌아갔다. 건곤파의 두 진인들도 동의를 표하자 모두가 안도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운녹산이 말했다.
“술수가 많은 이들입니다. 나와서 맞서주면 싸우되 너무 깊이 늘어가지는 않는 것이 좋겠군요. 이 사람의 생각으로는 당가는 싸움에 참여하지 말고 만약의 사태에 대비하는 것이 좋을 것 같습니다."
당유연이 차갑던 눈에 노화를 일으키며 운녹산을 노려보았다. 그러나 그는 화를 내기 전에 먼저 삭이고 차분히 이유를 물었다.
운녹산이 당유연을 직시하며 말했다.
“그간 당가가 입은 피해를 고려한 것이 아니오이다. 이같이 감출 것이 없는 지형에서의 싸움은 고수의 수가 승패에 직접적인 영향을 미치는것. 우리 쪽에 고수가 월등히 많다는 것을 알 텐데도 저리 당당하다는 것은 믿는 구석이 있다는 뜻 아니겠소. 만약 도검으로 상대할 수 없는 상황이 일어나면 우리 쪽에서 대응할 수 있는 이들은 당가 사람들뿐이외다. 당 가주의 분노를 모르는 바 아니나 전체를 위해 보천 진인과 건곤파 두 진인을 모시고 뒤에 남아주시오."
현상자가 한마디 거들었다.
“일리가 있는 말씀이오. 아무리 생각해도 질 까닭이 만무하오만 만약을 대비하여 누군가는 한발 떨어져 냉정한 눈으로 전장을 살필 필요가 있소이다. 원거리 대응이 가능한 당가라면 민도는 믿고 뒤를 맡길 수 있을 것이오."
그것은 아부가 아니었다. 모두가 무가와 무파의 무림인들이었다. 비록 싸움이 무림에서는 흔하지 않은 전쟁의 양상을 띠고 있지만, 결말을 내는 일만큼은 무림인의 방식을 고집하는 사람들이었다. 이긴 자가 강한 게 아니라 강한 자가 이기는 것이 당연하다고 생각하는 사람들, 그래서 강자를 숭앙하는 사람들이었다.
그런 사람들을 곤혹스럽게 만든 것이 운남에서의 두 차례 싸움이었다. 만약 그 싸움에서 당가와 또 한 사람의 희생과 수고가 없었다면, 지금 이 자리에 없는 사람들도 많을 것이고 이렇게 대담한 공세를 준비할 수도 없었을 것이다. 오히려 불안에 떨며 검단협곡 사수에 만전을 기하고 있었으리라.
당유연도 그 진심을 읽고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소. 뒤는 이 사람이 맡겠소이다."
현상자가 다시 정리하여 말했다.
“그럼 뒤는 당 가주께 맡기고 우리 조금 더 나아가 저들의 반응이나 살펴봅시다."
모두가 동의를 표하자 현상자는 손을 뻗으며 앞으로 걸어갔다. 그 순간 당가의 고수들을 제외한 각 파를 대표하는 고수 일천오백이 보조를 맞추어 천천히 걸어 내려갔다.
“사부님! 무사하셔야 합니다."
나라연은 지그시 입술을 깨물고 신수사태를 내려다보았다. 그녀가 서있는 곳은 아홉 달이 넘도록 상주하고 있는 검단협곡의 우측 절애 꼭대기였다. 거기에는 그녀 말고도 열 명의 관음사 비구니들이 낮은 불호를 외우며 서 있었다.
그녀들뿐만이 아니었다. 오백여 명의 각파의 젊은이들이 있었고 그 왜 지금껏 천북에서 머물러 있던 젊은 영재들 역시 싸움에 참여하지 말고 모두 검단협곡 입구에서 대기하라는 명을 받았다. 싸움에 참여하는 이들은 군룡전급에 해당하는 각 파의 고수들 일천육백여 명뿐이었다.
그 같은 명이 내려온 것은 뒤늦게 참여한 화산 장문인 우현자의 제안에 따른 것이었다. 열혈의 젊은이들로서는 납득하기 어려운 일이었지만, 일백여 젊은 매화검수들을 잃고 장년 고수들로만 토벌대를 조직하여 별 피해 없이 성과를 거둔 우현자로서는 당연한 제안이었다.
자식과 제자를 앞세우고 싶지 않은 것은 아비와 스승의 당연한 바람. 우현자의 제안은 별다른 토론 없이 받아들여졌다. 그렇게 하는 것이 오히려 싸움에만 전념할 수 있다는 판단도 한몫 했으리라.
보고만 있어야 하는 나라연은 자신도 모르게 쌍연창을 굳게 쥐었다.
일천오백의 군룡전급 고수들. 천하무림의 삼 분지 일과 싸워도 될 전력이었다. 그러나 상대 진영에 늘어선 백의인들의 수는 대충 세어도 사천 이상이었다.
숫자로 싸우는 싸움이 아니라는 것을 알면서도 당장 눈으로 보기에는 불리해 보이니 나라연으로서는 불안할 수밖에 없었다. 더구나 스승 신수 사태를 보좌하는 이들은 겨우 네 명의 장년 비구니들뿐이었으니 나라연으로서는 당장이라도 뛰어 내려가고 싶은 심정이었다.
“연아! 네 성정을 아니 싸움을 피하여 도주하란 말은 하지 않겠다. 그러나 살아남으려고 노력은 해다오. 어찌하여 이 지경에 이르게 되었는지 모르겠다만, 아무튼 너뿐이다. 이 사부에게 불상사가 일어난다면 관음사의 무맥(武脈)을 이어줄 사람은 너뿐이야. 자중자애(自重自 愛)해 다오."
어제저년 신수 사태가 그녀의 손을 붙잡고 간곡하게 당부하지 않았더라면 나라연은 참지 못하고 스승에게로 날아갔으리라. 나라연은 어깨가 뻐근하도록 창을 굳게 쥐었다.
그때였다. 무림련의 전열 폭에 맞추어 두텁게 일자로 포진하고 있던 백의인들이 느린 북소리에 맞춰 천천히 마주 나오기 시작했다. 양측의 거리는 아직 이십오여 리가 넘었지만 비슷한 속도로 서로에게 나아가고 있으니 이각 정도면 마주치게 될 것 같았다.
상대가 마주 다가온다는 것을 확인한 무림련 측에서 보폭을 넓혀가기 시작했다. 상대가 진영을 벗어나 양측 모두의 손을 타지 많은 고원으로 나온다는 사실을 정면 승부하겠다는 뜻으로 받아들인 것이었다.
무림련이 보폭을 넓혀가자 뒤에서 기다리고 있던 일백여 당가 사람들 역시 앞으로 나아가기 시작했다. 그러나 상대의 보폭은 여전했다. 전면에 백의인들이 빽빽하게 서서 전전하고 있기 때문에 맞은편에서는 볼 수 없을지도 모르지만 뒤쪽으로는 수백 개의 나무 상자 같은 것들이 동시에 옮겨지고 있었다.
불안했다. 여기저기서 나름대로 전력 분석하는 소리들을 들어도 그렇고 자신의 판단 또한 장소가 드넓은 천북고원이라면 무림련의 압도적인 승리였다. 그런데도 상대가 정면으로 다가서고 알 수 없는 나무 상자들을 옮기고 수까지 많으니 점차 불안해졌다.
‘밑에서는 보이지 않을 것이다. 알려줘야 하는데......'
나라연은 입술을 씹으며 망설이다가 결국 땅에 닿아 있던 쌍연창을 들었다. 바로 그때 반대 편 절애에서 대초명적 한 발이 비명을 토하며 당가사람들이 나아가는 곳으로 날아갔다. 당가의 누군가가 허공으로 치솟아 명적을 잡아챘다.
나라연은 발을 다시 바닥에 붙인 후 당가의 움직임을 살폈다.
당가의 누군가가 질풍처럼 앞으로 나아가 수뇌진들을 따라잡았다. 그 사이에 나머지 당가 사람들도 속력을 더하여 앞서 가는 이들의 삼십여장 뒤쪽까지 따라붙었다. 그 순간 일렬로 나아가던 전면의 사람들이 속도를 죽이고 사이를 좁힌 후 다시 포개어져 이 열로 움직였다.
진세의 변화를 보고 나라연은 일단 안심했다. 일천오백여 무림련 사람들은 각 파의 장년 고수들, 그들 가운데 그 누구도 나라연이 무시할 수 있는 존재는 없었다. 모를 때라면 몰라도 알고 간다면 어떠한 상황에도 대비할 수 있으리라 여긴 것이었다.
양측의 거리가 점점 좁아져 마침내 이백여 장에 이르렀다.
촤촤촤촤촤촤촹!
무림련의 수뇌진들이 병장기를 뽑는 순간 일천오백의 무림련 고수들도 거의 동시에 병장기를 뽑아 들었다.
“우와! 끝내주는구나."
나라연 근처에 서 있던 이들이 눈을 치뜨며 탄성을 내질렸다. 이 열로 늘어선 일천오백여 고수들이 동시에 얼 장이 넘는 기운을 뿌리며 위압적으로 나아가니 장관은 장관이었다. 그러나 그 같은 탄성은 곧 닥칠 피의 혈풍을 생각지 않음이니 나라연으로서는 눈살을 찌푸릴 수밖에 없었다.
바로 그때 상대편 진영의 뒤쪽에서 북소리가 바뀌었고 그 순간 전진하던 이들이 일제히 발걸음을 멈추었다. 그리고 첫 열 일천여 명 정도의 백의인들이 반무릎을 끓으며 쇠뇌를 들어 올렸다. 드디어 무림사에 보기드문 대결전의 장이 오른 것이었다.
“으응?"
운녹산이 상대의 쇠뇌를 보고 눈살을 찌푸리는 순간 현상자가 허공으로 검을 치켜 올리며 소리쳤다.
“멈춰라!"
일친오백여 명의 무림련 고수들이 일제히 발걸음을 멈춰 세웠다. 바람에 휘날리는 백염과는 달리 칼날 같은 눈빛을 드리우고 있던 우현자가 현상자에게 의아한 눈빛을 보냈다.
화산 장문인 우현자로서는 의문을 가지는 것이 당연한 일이었다. 상대가 든 무기는 쇠뇌. 일천오백 고수 그 누구도 안중에 두지 않는 무기였다. 코앞에서 날아온다 해도 막아내지 못할 것이 아니니 오히려 질풍노도처럼 몰아쳐 순식간에 대세를 결정지을 기회로 보였다.
“무슨 까닭입니까?"
현상자는 우현자에게 고개를 돌리며 말했다.
“저들은 우리를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도 쇠뇌를 들이댄다면 섣불리 달려들어서는 안 되겠지요."
간단한 대답이었지만 우현자도 일파의 장문인이며 뒤로 늙은 너구리소리를 듣는 사람이어서 말귀를 쉽게 알아들었다.
“조심해서 나쁠 것은 없겠군요."
현상자가 고개를 끄덕이고서 운녹산을 주시했다.
“어찌해야 하겠소?"
운녹산은 수뇌진 모두를 훑어보고서 양측 사이의 공지를 바라보았다. 모두의 시선 또한 그쪽으로 옮겨갔다.
“점창산의 일을 기억하십니까?"
공명 선사가 미간을 모으며 대답했다.
“땅굴을 파서 기습을 하고 또 폭약을 터뜨렸던 그 일들을 말씀하시는게요?"
“그렇습니다. 대치 상태로 꽤 오랜 시간을 지내왔습니다. 자신들 진영에서부터 땅 밑을 파왔다면 협곡 위쪽에서는 알아차릴 수 없겠지요."
우현자가 고개를 끄덕였다.
“음! 일리가 있소이다. 그럼 어찌해야 하겠소?"
운녹산은 그때 그들이 대처했던 방법을 우현자와 금학자 그리고 무당의 장로 상명자에게 간단히 설명했다.
잠시 후 무림련의 전열이 팔 열 횡대로 다시 정비되었다. 각 개인의 거리는 이 장, 한 줄에 이백여 명이 조금 못 되니 사백여 장을 늘어선 모양이었고 두 번째 열은 그 사이사이에 어긋나게 섰다. 그렇게 팔 열을 나눈 무림련의 고수들이 다시 전진하기 시작했다.
쿠쿠쿠쿠쿠쿵!
첫 열이 동시에 오른발을 바닥에 찍었다. 땅이 쩌저적 갈라지는 그 순간 두 번째 열이 급히 앞 사람들 사이를 빠져나가 병장기로 삼 장이 넘는 기운들을 뿜어내는 병장기로 땅을 긁으며 뒤로 빠졌다. 다시 엇갈리는 순간 땅을 내디뎠던 첫 열의 사람들이 또다시 일 장이 넘는 보폭으로 땅을 찍었다.
그렇게 십여 장을 전진하자 첫 두 열은 뒤쪽으로 물러나 마지막 두 열을 이루고 기운을 회복했다. 세 번째와 네 번째 열 사람들이 다시 같은 일을 반복했다.
백문정은 옆에 서 있는 백무강을 보며 미소를 지었다.
“곧 땅이 꺼지겠군. 보게, 이 사람아! 한 번 당한 놈들이라서 두 번 속이기는 어렵다고 했지? 미숙한 젊은 녀석들은 남겨두고 왔고, 또 예측까지 하고 있는 데다가 하나같이 고수들이라 터뜨려도 당하는 자가 몇 없을 게야."
백무강이 눈살을 찌푸리며 말했다.
“끙! 지금 머리 잘 돌아간다고 자랑하는 건가?"
“허허! 내가 자네에게 자랑할 게 그뿐인 걸 어쩌나. 완력으로 붙으면 한칼에 양단날 테니, 같이 전장에 나와서 당당하려면 그거라도 자랑해야지."
백무강이 어치구니 없다는 표정을 지었다가 결국 웃음을 터뜨렸다. 그때 백문정이 다시 전장으로 시선을 돌리며 말했다.
“그걸로도 좋아. 적어도 기력을 소모시키면 발걸음도 늦추지 않는가. 쇠뇌로 장난치는 일이나 음도가 하려는 일이나 모두 시간이 필요해. 득달같이 달려들면 뚜껑 열어보기도 전에 당하기 십상이네. 잘된 일이지. 그리고 옆에서라도 터져 주면 조금 더 시간을 벌 수 있을 거야. 무기가 없는 것을 보니 뒤에 처진 놈들은 당가 놈들인 것 같군. 그들까지 뭉쳐서 왔으면 아주 좋았을 텐데, 아쉽군."
백무강이 모두 알아들었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보게. 진궁이 준비하는구먼."
백문정의 말에 백무강이 앞으로 나간 이들 가운데 가장 뒤쪽에 서 있는 천기신사 백진궁을 주시했다. 그를 비롯한 주변의 백의도사들이 일제히 두 손을 모아 결인을 짓고 낮은 목소리로 중얼거리고 있었다.
“흠! 과연 어느 정돌까? 오행신궁의 신마급 정도 되려나?"
백무강의 물음에 백문정이 고개를 갸웃거리며 대답했다.
“공들인 세월이 다른데 설마 그 정도까지 되겠나. 다만 진궁이 장담하기를 방어력만큼은 천마급 못지않을 것이다 했네. 뭐라더라? 자네가 전력으로 칼질을 해도 어렵지 않게 견뎌낼 거라 했지, 아마?"
“정말인가? 무시무시하구먼. 그런 것들이 모두 예순넷이라? 어쨌든 재미있겠어."
그때 진을 형성한 채 성큼성큼 압박해 오던 무림련의 고수들이 어느새 일백여 장 앞까지 다가섰다.
백문정이 말했다.
“드디어 시작이구먼. 힘을 믿고 병략병술을 무시하는 바보들에게 뜨거운 맛을 보여줘 볼까?"
“자네 지금 날 놀린 게지?"
“어허! 반응이 과하네, 이 친구야. 우리도 가볼까?"
두 사람이 막 앞으로 나가려는 그 순간 쇠뇌 발사되는 소리가 연이어 들려왔다.
백이십여 장 앞까지 전전했을 때의 일이었다. 누군가가 큰 소리로 외쳤다.
“피가 터져 올랐다."
그 소리를 듣는 순간 현상자가 소리쳤다.
“바닥을 횡으로도 그어라!"
말을 할 필요도 없었다. 첫 열이 다시 한 번 걸음을 내딛는 순간 갈라지기만 하던 땅바닥이 밑으로 꺼졌다. 이미 대비하고 있던 사람들은 일제히 허리를 뒤로 젖히며 움직임을 멈추었고 이 열에 있던 이들이 낮게 몸을 날려 꺼진 자리 위를 휘돌며 병장기로 십자를 그렸다. 다시 흙바닥 에서 흙먼지가 튀면서 여기저기에서 피가 솟구쳤다.
병장기를 휘둘렀던 이 열의 고수들이 땅에 내려서자마자 뒤로 퉁기듯 돌아왔고 첫 열 사람들이 꺼진 곳을 뛰어넘어 다시 일보를 내디뎠다. 그렇게 이십여 장을 전진했을 때의 일이었다.
퓨퓨퓨퓨퓨퓨퓽!
쇠뇌살들이 먹구름처럼 날아왔다. 그러나 누구도 긴장된 모습을 보이지 않았다. 일반적인 쇠뇌의 사정거리는 삼백여 장에 이른다 했다. 그러나 위력을 담아 일직선으로 날릴 수 있는 거리는 백여 장. 힘을 잃어가는 쇠뇌살 따위에 동요를 보일 정도의 사람들이 아니었다.
선두에 선 이들이 걸음을 멈추고 병장기를 휘돌렸다. 저마다의 기운이 원반을 이루어 전신을 가리는 순간 먹구름이 일시에 사라져 버렸다.
무림련 사람들은 아무런 일도 없었다는 듯 다시 땅을 구르며 앞으로 나아갔다. 삼 보를 전진할 때마다 먹구름이 일렁였다. 그러나 그것으로는 무림련 사람들의 걸음을 멈춰 세울 수가 없었다.
이십여 장을 다시 전진하여 상대와의 거리가 팔십여 장에 이른 순간이었다.
퓨퓨퓨퓨퓨퓨퓽!
백라천궁 측은 아무런 효과도 발휘하지 못하는 쇠뇌살들을 또다시 날렸다. 무림련 사람들은 짜증난 얼굴로 다시 병장기를 휘돌렸다. 시커먼 쇠뇌살들이 다시 이백여 개에 이르는 원반들에 부딪쳤다.
콰콰콰콰콰콰쾅!
엄청난 폭음이 일고 이백여 개에 이르는 원반들이 일시에 사라졌다. 병장기들이 허공으로 튀어 오르고 첫 열에 서 있던 이들이 피를 토하며 뒤로 물러섰다.
그 순간 시차를 두고 쏘아진 쇠뇌살들이 이 열을 향해 날아들었다. 쇠뇌살에 폭약이 달려 있다는 것을 알게 된 이 열 사람들은 세찬 기운을 내뻗어 쇠뇌살들을 퉁겨냈다.
콰콰콰콰콰콰쾅!
또다시 폭발음이 허공을 찢어놓았다. 뒤로 퉁겨졌던 첫 열의 사람들이 일어섰다. 피 흘리며 힘겹게 얼어서는 사람들도 몇 있었지만 대부분이 엉덩이를 털고 가볍게 일어셨다. 쇠뇌살에 실을 수 있는 폭약의 양이 한정적일 수밖에 없는 탓이었고, 한편으로는 검기도풍으로 막고 있었기 때문에 중상을 입은 이들이 몇 되지 않았던 것이다. 쉽게 일어선 이들은 바닥에 나뒹구는 자신의 병장기를 찾아 들고 마지막 줄로 다졌다. 상처가 큰 사람만이 뒤로 다졌다. 그러나 그때부터가 시작이었다.
날아오는 쇠뇌살들을 가볍게 볼 수 없게 된 무림련 사람들은 오는 족족 기운을 멀리까지 내뻗어 통겨내야만 했다. 폭약을 품지 않은 것도 있었지만 그들로서는 모두 폭약을 실은 것으로 볼 수밖에 없었다.
병장기를 휘돌려 막는 것과 기운을 멀리까지 내뻗어 쇠뇌살을 내치는 것은 효율 면에서 완전히 다른 일이었다.
“이래서는 저들에게 이르는 순간 기력의 반을 소모하겠소."
우현자가 날아오는 쇠뇌살 하나를 쳐내며 난감한 표정으로 말했다.
“속도를 높여야겠습니다."
종남의 금학자마저 동조하자 현상자와 운녹산의 눈이 마주쳤다. 운녹산이 고개를 끄덕이고 소리쳤다.
“번갈아가며 치달려라."
그때부터 다섯 보씩 반복하여 걷고 자리를 바꾸던 이들이 한 번 만에 자리를 바꾸었다.
쿠쿠쿠쿠쿠쿠쿵!
쿠쿠쿠쿠쿠쿠쿵!
뿌연 먼지가 일어나는 순간 그 뒤로 세 번째와 네 번째 열이 바로 앞으로 나아가 다시 땅을 찍었다. 땅이 꺼지는 것 따위는 신경도 쓰지 않았다. 세 호흡에 한보씩 나아가던 것이 반 호흡에 처리되었다. 무림련 고수들의 교차는 마치 달리는 마차 바퀴처럼 다른 속도로 이루어졌다.
마침내 오십여 장 거리에 이르러 상대 진영의 목소리까지 들리는 순간 무림련 고수들의 눈빛은 차갑게 불타올랐고 그들의 병장기에서 뿜어져 나오는 기운 역시 배가되었다.
그때였다.
“쏴라!"
쇠뇌살들이 날아오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그러나 그와 비슷하나 또 다른 소리가 들려왔다. 쇠뇌를 든 이들의 뒤쪽에서 시커먼 먹구름이 일어 포물선을 그렸다가 무림련 사람들의 머리 위로 떨어져 내렸다. 화살이었다.
첫 열의 고수들이 쇠뇌살을 막는 순간 뒤쪽에 있던 이들이 허공으로 병장기를 내뻗었다. 각각의 기운이 뒤섞이는 순간 천둥이 치면서 우산을 펼친 듯 일천오백여 고수들의 머리 위를 강기의 막이 둘러쳐졌다.
콰콰콰콰콰콰쾅!
폭발음과 함께 강기의 막 또한 사라지는 그 순간 또다시 그들 좌우에서 엄청난 폭발이 일어나고 땅이 뒤집히면서 모래먼지가 안개를 이루었다.
운녹산이 소리쳤다.
“좌우에서는 터졌으나 앞에서는 터지지 않았소이다. 저들과 가까운 곳. 폭약을 매설하지 못한 것 같소이다."
모두가 무슨 뜻인지를 금방 알아차렸다.
현상자가 소리쳤다.
“전속 전진!"
오십 장. 일천오백의 고수들이라면 많이 잡아도 열 번 뛰는 것으로 이를 수 있는 거리었다. 일단 상대와 뒤섞이는 순간이면 그것으로 승패가 결정될 것이라고 생각하던 무림련 사람들은 현상자의 명이 떨어지는 순간 일제히 땅을 찍었다.
일천오백의 무림고수들이 동시에 먼지바람을 뚫고 허공으로 튀어 올랐다. 그 순간 상대측 진영에서 북소리가 급박하게 바뀌었고, 쇠뇌수들이 일제히 쇠뇌를 집어 던지고 도를 뽑으며 좌우로 물러섰다.
허공을 가로질렀다가 다시 바닥을 밟는 운녹산의 두 눈에 수백 개의 나무 상자들이 보였다. 그 나무 상자 뒤쪽으로 검은 도복을 입은 이들이 눈을 감은 채 진언을 외우는 모습도 보였다.
운녹산이 땅을 않고 다시 튀어 오르는 순간,
콰콰콰콰콰콰쾅!
관처림 생긴 나무 상자들의 뚜껑이 벼락을 맞은 듯 쪼개어지고 튀어올랐다.
모래먼지를 타고 풍겨오는 악취, 너덜거리는 시커먼 옷들, 아무것도 느낄 수 없는 죽은 눈빛 그리고 및긴 옷 사이로 드러나는 상처들. 그 상자 안에서 튀어나온 것은 시체라고 불러야 옳을 무엇이었다.
그것들이 햇빛을 받아 포효하며 갈 곳을 모르고 사방으로 휘돌았다. 그러나 계속해서 들려오는 주문에 머리를 쥐어뜯었고, 백의인들의 옷에 큼지막하게 붙어 있는 부적들을 외면했다.
결국 그들이 목표로 삼은 것은 정면에서 다가오는 무림련의 고수들. 그것들은 껑충껑충 뛰어 쇄도하는 무림련 고수들을 마중 나갔다. 관절을 굽히지 않고 움직이는 것이 우스꽝스럽게도 보였지만 한 걸음에 이 장을 뛰니 쉽게 웃을 상황이 아니었다.
그러나 그 정도 움직임에 동요를 보일 정도의 사람들이 아니었다. 무림련의 고수들은 땅에 내려서는 즉시 검기도풍을 일으켜 강시들을 후려쳤다.
따다다다다다다당!
앞으로 나서던 강시들이 뒤로 통겨져 나뒹굴었다. 그러나 이내 오뚝이처럼 일어서서 다시 앞으로 나왔다. 그들의 움직임은 처음과 다르지 않아서, 검기와 그와 비견되는 기운에 적중되어 놓고도 별다른 충격을 받은 것 같지 않았다.
“철골강시?"
무림련 사람들 대부분이 얼굴을 찌푸렸다. 도대체 몇 구나 되는지 알 수 없을 만큼 꾸역꾸역 모여들었다.
그렇다고 무림련 사람들이 두려움에 위축된 것은 아니었다. 짜증난다는 눈빛이었다. 그도 그럴 것이 숫자가 아무리 많다고 해도 강시들의 강직된 움직임이 무림련 고수들에게 위협이 될 수는 없는 탓이었다.
무엇보다도 거리가 달랐다. 강시들에게는 팔 길이가 공격할 수 있는 거리의 전부였지만 무림련 사람들에게는 병장기가 있고 거기서 뿜어져 나오는 경력이 있었다. 쉽게 부수지 못한다고 해도 밀어낼 수는 있는 일이니 한 번의 공격조차 받을 까닭이 없었다.
문제는 질풍처럼 달려 상대방의 진영을 태풍처럼 휘저어놓으려던 계획과는 달리 전진하는 속도가 지체되고 있는 것과 쓸데없는 힘을 소모하는 것이었다.
그때 북소리가 바뀌면서 처음으로 강시가 아닌 사람들이 나섰다. 삼천이 넘는 백의인들이 백의의 앞과 뒤에 부적을 붙인 채 좌우에서 무림련 사람들을 압박했다. 오백에 다시 오백을 보탠 강시들이 전면을 막고 있으니 뒤를 제외한 삼면이 막혀 버린 것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