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4장 용호가 따로 없이 천지를 노니나니
용호진서의 본문을 처음 펼쳤을 때, 운청산은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 구절구절이 너무 쉬워서 읽는 즉시 이해하고 체득할 수 있을 것이라 생각한 것이었다.
가장 먼저 익혀야 했던 것은 영통천망심법(靈通天綱心法).
천지령수(天池靈水)와 같은 용호파의 비전을 한없이 마실 수 있는 그릇에 해당하는 도구였다. 운청산이 과거에 귀곡산인으로부터 배웠던 모든 지식들과 용호파의 비전들을 이어주는 유일한 다리가 바로 영통천망심법이었다
호흡에서 시작하는 것은 여느 심법과 마찬가지. 영통한 기운을 불러들이기 위해 전신을 무극의 상태로 되돌리는 것도 곤륜의 심법과 다름없었다. 그러했기에 익히는 일이 어렵지 않으리라 생각했던 것이었다.
착각이었다. 운청산은 한 계절이 지나도록 진서의 처음 다섯 장을 넘겨보지 못했다. 그가 마찬가지라고 생각했던 모든 것들과 완전히 궤를 달리하는 것들이었다.
무공은 기운을 조금씩 쌓아가는 것, 그러나 영통천망신법의 묘의는 다 비웠다가 영력을 일시에 채우는 것이었다. 호흡은 삼매에 빠지는 도구일뿐 기운을 축적하는 방법이 아닌 것이었다.
익숙해지지 않았다. 그것이 사념이 되어 운청산의 진도를 가로막았다. 무려 삼 개월을 한 가지에 매진하고도 얻은 것이라고는 뼈와 거죽만 남은 앙상한 육신과 절망감뿐이었다.
그때 그를 다독인 이가 바로 당우리였다. 조급함을 버리라고 했다. 어디 갈 데라도 있느냐고 말하며 웃었다. 그때서야 운청산은 여유를 가지고 내면을 찬찬히 살펴볼 수 있었다.
조급해하고 있었다. 일단 할 수 있다 생각하니 하루라도 빨리 어머니를 다시 불러낼 수 있는 방법을 익히고 싶었고 하루라도 빨리 당우리를 고통에서 해방시켜 주고 싶었던 것이다.
운청산은 한결같던 수련을 멈추었다. 그리고 놀았다. 호연과 놀고 당우리와 놀고 금을 타면서 놀았다. 과거 그가 귀곡산인들에게 배웠던 지식들을 당우리에게 자랑하듯이 즐겼다.
보름이나 놀았을까. 운청산은 다시 차분한 마음으로 호흡했다. 호연이 알아서 물러서고 당우리도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 그리고 세상마저도 숨을 죽였다.
외부가 정(靜)해지자 내부 또한 동응하여 정을 찾아갔다. 안과 밖의 구분이 사라지니 형체 또한 의식에서 사라져 운청산은 마침내 선천(先天)이라고도 하고 무극(無極)이라고도 하는 상태에 빠져들었다.
시간의 흐름조차 잊었을 때 이해할 수 없는 얼이 벌어졌다. 무극화된 그의 안에서 먼지와 같은 빛이 반짝이더니 순식간에 무극을 가득 채웠다.
운청산은 관조의 눈을 뜨고 무극을 채운 빛을 살폈다. 밝고 어두운 기운이 교차하고 굳건하고 부드러운 기운이 뒤섞였다. 그리고 회오리처럼 휘돌다가 갑자기 폭발하며 하얀 빛을 뿜어냈다.
이루 말할수 없는 충만감 그리고 황홀함이 거듭해서 찾아오자 운청산은 관조의 눈을 유지하지 못하고 정신을 잃었다. 깨어나 보니 달라진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그러나 머리만은 방금 시원한 물에 담갔다 뺀 것처럼 맑고 깨끗했다.
운청산은 다시 청정한 눈을 감았다. 호흡에 몰입하는 순간 그토록 힘들게 찾아오던 완전한 충만감과 텅 빈 듯한 가벼움이 일시에 느껴졌다,
변화는 그때 일어났다 태허구전선공을 일으키지도 않았건만 중단전에 머물고 있던 구슬이 절로 황금빛을 발했고 그 순간 황홀하다는 말로는 감히 표현하지 못할 상쾌함이 전신으로 퍼져 나갔다. 동시에 두 용천혈을 통해 지기가 한없이 빨려 들어왔고, 그 어느 때보다도 강렬한 천계의 빛이 귀부의 천장을 관통하여 운청산의 두정에 내리꽂혔다.
육합의 모든 기운이 운청산의 한 몸에 집중되는 순간 천계의 빛이 그의 전신을 휘돌았다가 구슬에 닿고, 웅천에서 빨려들었던 지기가 하주의 기운을 북돋아 다시 구슬에 이르렀다.
하늘의 기운과 땅의 기운 그리고 운청산의 기운이 한꺼번에 뒤섞이니 황홀한 금빛 구슬이 깨지고 그 안에서 작은 아이가 깨어났다.
끊임없이 솟아올라 오는 지기가 아이의 발을 떠밀고 동시에 천계의 빛이 아비의 머리를 당기니 중단전에서 버둥대던 아이가 어느새 상단전으로 치솟았다.
개벽이었다. 두정이 크게 열리면서 여덟 영혼들이 사방으로 퍼지며 황홀한 눈빛으로 바라보고 그들 사이사이로 금빛 꽃잎들이 피어올랐다. 그리고 그 중심에서 아이가 몸을 내밀었다. 마침내 양신이 잉태된 것이었다,
기대하지 않았던 일이었지만 예상치 못했던 일도 아닌지라 운청산도 거기까지는 당황하지 않았다. 그러나 그가 통제할 수 없는 상태에서 변화는 계속되었다.
양신이란 것은 젖먹이와 같아서 매우 조심스러운 존재였다. 혼자서 자립할 수 있을 때까지 보살피고 단련시켜야 하는 존재였다. 적어도 삼 년은 아이처럼 키운다고 해서 그 기간을 젖먹이는 기간, 삼년유포(三年乳哺)라 불렸다.
그런데 운청산의 양신은 배고픔도 두려움도 모르는 것 같았다. 따로 돌보는 누군가가 있는 것처럼 태어난 순간부터 계속해서 올라가려는 듯 운청산으로부터 떨어져 나가려 했다. 마치 천계의 빛을 밧줄 삼아 하늘로 오르려는 것만 같았다.
‘아! 그렇구나. 심계가 지극히 고요하고 밝은 경지에 들어가 사물을 세심하게 그리고 바르게 관찰할 수 있는 상태에 이르면 천지에 가득한 것이 때를 기다렸다가 찾아온다 했다. 그것을 일러 영이라 했다. 영은 천지조화의 감춰진 이치를 훔쳐 내듯 깨달아 얻고 없는 것으로부터 있는 것을 찾아내어 잃지 않도록 하는 것이라 했다. 응해야 할 때에 자유롭게 응하고 고요해야 할 때 자유롭게 고요할 수 있는 것이 영이라 했다. 호랑이가 사람을 상하지 못하게 하고 용이 안개를 일으키지 못하게 하는 것이 곧 영이라 했다. 내 몸의 변화는 바로 영에 이끌린 것이리라. 무허무극의 상태에서 일어난 영이 태허구전선공에 의해 깨어나려던 양신을 이끈 것이리라.
이러한 변화는 운청산은 물론 귀곡산인조차도 예상하지도 그리고 기대하지도 않았던 것이었다.
운청산은 청정함을 유지하며 양신을 관조했다. 양신은 형체를 알 수 없는 포근한 기운에 안긴 채 천지육합의 모든 기운을 모유 삼아 점차 그 크기를 더해갔다. 그리고 어느새 여덟 영혼들처럼 세 자크기에 이르더니 마침내 운청산의 두정에서 벗어났다. 그리고 천계의 빛을 따라 세 자를 올라갔다/
그때였다. 지금껏 양신을 북돋기만 했던 형체를 알 수 없는 무엇이 양신을 쓰다듬고 달래어 운청산의 두정 안으로 돌려보냈다. 그리고 동시에 그것 역시 운청산의 머리 속으로 스며들었다.
운청산은 관조의 두 눈을 감고 현실의 외눈을 떴다. 눈을 잃은 이후로 왼쪽이 늘 그늘진 것만 같은 느낌이었는데 갑자기 보이지 않는 곳까지 보이는 것만 같았다.
운청산은 입가에 부드러운 미소를 짓고 귀부를 나섰다. 언제나 아름답고 포근한 귀곡이었지만 느낌이 확연하게 달라졌다. 세상이 노래한다는 귀곡산인의 뜻 모를 소리를 이제는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았다. 꽃 하나 이슬 한 방울마다 아름다운 영들이 자리하여 운청산을 경배하는 것만 같이 싱그럽게 보였다.
그때 여덟 영혼들이 무리 지어 운청산의 앞으로 다가왔다.
‘양신이 태어났구나. 축하한다.'
운현산이 대표하여 입을 벌리자 운청산은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숙였다.
‘혹시 새로 들어선 영이 보이던가요?'
‘무언가가 깃들었다는 것은 느꼈다만 형체는 없더구나. 너무나 따뜻하고 밝아서 너의 양신처럼 안기고 싶었다만 부드럽게 거절하는 듯하여 다가가지 못했다. 과연 네가 영통한 것이냐?’
‘아직은 아닌 것 같습니다. 영통의 매개가 될 수 있는 영이 깃든 것은 분명하지만 숙부님들과 여전히 얼굴을 마주 대하지 않으면 통하지 않는군요. 다만 숙부님들의 모습이 전보다 밝고 확연하게 보이는 것뿐입니다. 헌데 그것이 숙부님들의 접근을 거절했다면 될 곳이 없어진 것입니까?'
운현산 등의 여덟 영혼은 부드럽게 미소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끼어들 여지가 없다는 느낌이었다. 하지만 걱정할 것 없다. 우리는 이제 안이든 밖이든 상관없다. 당 아가씨와 둘이서만 있지 못하는 네가 오히려 불편하겠지.'
운청산은 쑥스러운 미소를 지으며 오른손으로 화살촉 목걸이를 부드럽게 쓰다듬었다.
운청산은 용호진서를 쓰다듬으며 한동안 망설였다.
무사무도(無師無道).
스승 없이 진도없다는 말처럼, 책을 보며 전에 이르러보지 못했던 경지를 가늠한다는 것은 참으로 어려운 일이었다. 변화를 느끼고 형체 없는 무언가를 맞아들이기도 했지만 그것으로 영통천망심범이 이루어진 것인지 확신을 할 수가 없으니 책장 넘기기가 두려운 것이었다.
운청산은 진서를 펴서 처음 다섯 장을 다시 읽었다. 그리고 고개를 저었다. 그러나 잠시 후 화살촉을 한 번 쓰다듬고서 빙긋 미소 지었다.
“내가 언제부터 해보지도 않고 먼저 망설였던가? 어디 갈 데도 없는데 안 되면 돌아가면 되지 않는가?"
운청산은 차분히 마음을 가라앉히고 여섯 번째 책장을 넘겼다. 용호파기문둔갑 비요편(秘要篇)이었다.
운청산은 일단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모르는 사람들에게는 기문둔갑 또한 도술이요 방술로 치부되지만, 원래 기문둔갑이란 천지자연의 오묘한 변화를 탐구하고 응용하려는 현자들의 학문이라고 보아야 옳으리라. 그것을 익히는데 필요한 것은 영력이 아니라 하늘과 땅의 마땅한 이치와 그 변화에 대한 학문적 이해였기에, 운청산은 한시름 놓고 내용을 살폈다.
책의 반 이상을 차지하는 방대한 분량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웬만한 기문술사들조차도 쉽게 읽어 내려갈 수 없을 정도로 기본을 건너뛰는 내용들이었다.
운청산은 기문둔갑 비요편을 일독하고서 중간중간 맥이 끊기는 듯한 느낌을 받고 재차 읽었다. 그리고 눈을 지그시 감고 과거에 그가 배웠던 기문학의 내용들을 더듬었다.
“아! 그래서 그리 말씀하셨구나. 내가 아니면 누구도 쉽게 이해하지 못하겠지. 건법 진인께서 읽으시려 해도 해독하기가 쉽지 않을 거야."
맥이 끊기는 부분들은 모두 상징적인 언어들로 이루어져 있었고 한 군데 막히면 뒤를 읽어 나갈 수 없도록 기술되어 있었다. 생각을 돌이켜 보니 그 상징적인 언어들은 이미 운청산이 알고 있는 것들이었다. 귀곡산인이 그를 가르치면서 늘 ‘이는 세상에 없는 말이다. 오직 용호파 일맥 안에서만 통하는 것이니 잊지 말아라' 하였던 것들이었다.
운청산은 또다시 침식을 잊고 기문들갑 비요편에 몰입했다. 그리고 불과 보름 만에 비요편의 마지막 장을 넘겼다.
책 전체의 반이 넘는 분량이었다. 서두르지 않았고 그렇다고 대충 넘어간 곳도 없었다. 처음 다섯 장을 네 달이 다 되도록 붙잡고 있었으니, 운청산으로서도 스스로의 진경에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운청산은 책을 덮고 기문학의 기본부터 용효파의 비전들까지 차근차근 떠올려 보았다. 성취가 의심스러워 혹시라도 간과하고 지나간 것은 없는지, 잘못 파악하고 있는 것은 없는지를 일일이 확인한 것이었다.
이상한 일이었다. 기억을 더듬는 순간 그동안 그가 배우고 익혔던 자구는 물론 도해와 이론들이 깔끔하게 정리되어 머리 속에 차곡차곡 쌓이는 것만 같았다. 글자와 귀곡산인의 설명이 도해가 되고 도해가 다시 뼈대가 되었다가 머리 속에서 형상화되었다.
운청산은 음양팔괘포천대진을 떠올려 보았다. 순간 그는 하늘 위에서 포천대진을 내려다보며 마치 장기나 두는 것처럼 손쉽게 파해해 나가고 있었다.
운청산은 내심 놀라워하면서 그가 지금 겪고 있는 새로운 경험이 어디에서 연유한 것인지를 헤아려 보았다. 그리고 한 가지 의문과 해답을 찾아냈다.
“그렇구나. 왜 영통천망심법을 처음에 두셨는가를 따져 보면 쉽게 짐작해 볼 수 있는 것을."
보름 동안이나 잠 한숨 자지 않고 기문둔갑의 세계에 빠져 있었다. 딴 짓을 한 것이라고는 태허구전선공을 일으켜 피로를 푸는 동시에 양신의 상태를 살피고 영통천망심법으로 영의 변화를 주시한 것뿐이었다. 그렇게 잠 한숨 자지 않고도 늘 시원한 물에 머리를 담갔다 뺀 것 같은 맑은 정신을 유지하고 있었다.
“무공과 다를 바가 없는 것이다. 곤륜의 무공이 태허구전선공을 기반으로 삼는다면 용호파의 비술 역시 영통천망심법을 근간으로 여기는 것이다. 양법에 해당하는 기문둔갑은 학문이니 심법의 영향을 덜 느낄 테지만 음법의 경우에는 절대적이라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운청산은 맑은 외눈동자에 미약한 흥분기를 드리우며 책장을 넘겼다. 어머니를 다시 만날 수 있는 방법, 당우리를 하루빨리 신명화시킬 수 있는 방법에 한 발 더 다가선 것을 아는 탓이었다.
일백여 명의 매화검수들이 사천으로 가는 도중 몰살당하는 참사가 벌어지자, 화산의 장문인 우현자는 새해 아침을 천북에서 맞이하기로 작정했다. 사천의 싸움이 끝나지 않는 한, 화산으로 돌아가지 않겠다고 다짐하기도 했다.
그러나 화산파는 쉽게 섬서를 떠나지 못했다. 정체불명의 백의인들이 또다시 섬서 곳곳에서 화산파 도사들을 죽이고 화산속가들의 사업장을 불태운 탓이었다.
정체불명이라 하나 그 정체를 짐작하지 못할 바는 아니었다. 상대가 일을 저지르는 목적 또한 짐작하고 있었다. 화산을 섬서에 묶어두려는 것이리라.
천북으로 가서 사천무림련의 싸움에 일조하는 것이 곧 핵심을 찌르는 것이었다. 그러나 우현자로서는 쉽게 결정을 내릴 수가 없었다. 계속되는 속가의 피해를 묵과할 수는 없는 일이기 때문이었다.
결국 우현자는 천북으로의 이동을 잠시 미루고 섬서의 민생부터 안정시키기로 했다.
우현자는 우선 사천무림련에 사정을 설명하고 양해를 구했다. 그리고 무당에 연락하여 호북에서 섬서로 들어오는 길목을 막아줄 것을 청하고 대규모 토벌대를 구성했다.
화산을 대표하는 네 도인, 화산사검(華山四劍) 가운데 우현자 본인을 제외한 삼검이 모두 출산했다. 그 밑으로도 열혈의 젊은 제자들을 모두 남겨놓고 장년 제자들만 출산시켰다. 그 수가 모두 이백칠십. 장년 제자들의 그 같은 대규모 출산(出山)은 전례가 없는 일이었다.
산을 떠난 토벌대의 결의와 기세를 보아서는 길어봐야 보름이면 섬서의 안정을 되찾을 수 있을 것 같았다. 우현자의 기대 또한 그러했고 토벌대 또한 그렇게 생각했었다.
섬서성 남서쪽 끝 가릉강.
지친 기색이 완연한 사내들 이십여 명이 강 및 관도를 따라 질주하고 있었다. 대부분이 눈에 띄지 않는 평범한 청의면복을 입고 있었지만 하나같이 도파에 흰 천을 감은 도를 들고 있었다.
앞서 달리던 장년 사내가 손을 들어 모두의 걸음을 멈춰 세웠다. 모두가 두 손으로 무릎을 짚고 허리를 수그려 가쁜 숨을 몰아쉬었다.
장년 사내는 흔들리는 눈으로 그들이 지나쳐 온 길을 바라보았다. 보이는 것은 봄바람에 흔들리는 강변의 갈대들뿐, 따라오는 사람들은 없었다.
장년 사내는 다시 앞을 바라보았다. 삼십여 장 앞 작은 구릉의 뒤쪽으로 섬서와 사천을 경계 짓는 미창산맥(米倉山脈)이 웅자를 드러내고 있었다.
“멀어봐야 오십 리. 저곳에 들어가 한동안 몸을 숨길 것이다. 조금만 더 참아라."
가쁜 숨을 고르던 청년과 중년 사내들이 겨우 고개만 들어 눈빛으로 알았다는 표시를 했다.
장년 사내 백시우는 입술을 질끈 깨물었다.
‘지난 네 달 동안 잘 버텨왔건만 한 번의 실수로 이런 지경에 이르다니.....'
백시우는 백라천궁 산하 보존신문의 몇 안 되는 일대제자였다. 그리고 섬서 땅에 발을 디딘 삼백여 보존신문 사람들의 수뇌부 오인 가운데 한사람이기도 했다.
그가 받은 명령은 최대한 오래 살아남아 화산을 섬서 땅 안에 묶어두는 것이었다.
최대한 오래 살아남는다.
결국 죽으라는 소리였지만 이미 백가 성을 받은 그로서는 두려운 명령이 아니었다. 최대한 오래도록 살아남으라는 명이 오히려 의외였을 뿐이었다.
어됐든 백시우는 지난 네 달 동안 섬서 땅을 신출귀몰하면서 화산파에 피해를 입히고 또 아직까지 살아 있었다.
이백칠십에 이르는 화산파 고수들의 출산도 그다지 두렵지 않았다. 상대적으로 고수가 적으니 맞서 싸운다면 백이면 백 몰살을 당할 전력이지만 백시우 등에게는 맞설 이유가 없었다. 상대는 그 모습이 쉽게 구별되는 도사들. 상대가 적으면 무리 지어 상대하고 많으면 흩어져서 도주하면 그뿐이었다.
그런데 어제저녁에 돌이킬 수 없는 실수로 저지르고 말았다 작지 않은 마을마다 화산의 도사들이 눈에 불을 켜고 다니는 터라 백시우 등은 삼삼오오 흩어져서 한동안 섬서와 타 성의 경계를 떠돌았다. 그리고 감숙으로 넘어가는 경계 마을인 백수향(白水鄕)에서 간만에 회합을 가졌다.
모인 이들은 모두 여든일곱 명. 섬서로 들어온 이들 가운데 서쪽에서 활동하던 사조와 백시우가 맡은 오조의 조원들이었다. 네 달 동안이나 계속된 화산파의 끈질긴 추적에도 불구하고 칠 할 이상 살아남은 것이었다.
동료들의 생사를 확인하고 기쁨에 젖어 있는 그 순간 하필이면 화산파의 도사 셋이 눈에 띄었다. 그렇게 적은 숫자로 돌아다니지 않는다는 것을 말면서도 백시우 등은 그들을 주시하지 않을 수 없었다. 나타난 곳이 채 이백 호도 되지 않는 작은 마을이어서 사람들의 동향을 손쉽게 파악할 수 있는 탓이었다.
의심에 의심을 더하여 살폈지만 또 다른 도사 무리들은 발견할 수 없었다. 백시우 등으로서는 자신들을 대도(大都)에서 발견할 수 없자 외곽의 작은 마을까지 살피러 다닌다고 결론 내릴 수밖에 없었다.
활동을 잠정 중단한 것이 오래되기도 한 터라 백시우 등은 간만에 일을 벌이기로 했다. 백시우 등은 새벽까지 기다려도 별다른 징후를 발견하지 못하자 마침내 화산파 도사들이 머무는 작은 객잔을 급습했다.
그것은 너무나 뼈아픈, 돌이킬 수 없는 실수였다. 준비하는 이들에게 끈질긴 인내를 요구하는 함정이었다. 아무리 해도 꼬리조차 잡을 수 없자 대도들을 드러나게 휘저어놓고 따로 외곽에 함정을 판 것이었다.
객잔의 점소이부터 주방장과 주인은 물론 투숙객들마저 모두 화산파 도사들이었다. 미끼가 되었던 도사들을 포함하여 모두 열서너 명은 되는 것 같았고, 객잔을 포위했던 백시우 등의 등 뒤에서 다시 십수 명의 도사들이 튀어나왔다.
서른에 여든일곱 명. 머릿수로 따지자면 붙어볼 만하다지만 상대는 화산의 일대제자들, 계란으로 바위 치기라는 사실은 백시우 등이 먼저 알고 있었다.
백시우는 도주하라고 소리칠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그 자신도 정신없이 뛰었다. 죽는 것이 무서운 탓이 아니었다. 가능하면 오랫동안 살아남으라는 명령 때문이었다.
객잔으로 들어간 스무 명의 동료들이 모두 죽었고 밖에서 도사들을 마주한 동료들도 반수 이상 죽었다. 그들이 화산파의 발목을 잡고 있는 동안 백시우와 열아홉 명의 사오조 혼성 조원들만 살아남은 것이었다.
백시우는 눈을 치뜨고 왔던 길을 다시 되돌아보았다. 멀리 십여 리 정도는 환히 보이는데도 추격자들의 모습은 아직 보이지 않았다. 그렇다고 안심할 수는 없는 일이었다.
백시우는 겨우 숨을 돌리고 허리를 편 수하들에게 말했다.
“반 시진만 더 가자. 일단 미창산 안에 들어서면 한동안은 마음 편히 쉴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다시 흩어져서 한중(漢中)으로 들어간다. 마지막 한 사람이 남을 때까지 임무는 계속되어야 해."
사내들이 모두 고개를 끄덕였다.
백시우는 몸을 돌려 바닥을 찍었다. 그가 앞서자 모두가 급히 뒤따랐다. 그러나 그들은 채 두 발도 떼지 못했다.
구릉 위로 청남색 도포를 입은 도사들 열다섯이 마중 나오듯 모습을 드러냈다.
등 뒤로 드러나는 검자루 끝에 푸른 실로 만든 매화 모양의 수실.
화산파의 도사들이었다.
“애써 더 갈 필요 없다."
중장년인이 대부분인 도사들 뒤에서 초로의 도사 한사람이 앞으로 나서며 차갑게 말했다.
초로의 도사를 확인한 백시우는 절망했다.
“우학자? 길목을 막고 있었던가? 살아남기 힘들겠구나."
백시우는 고개를 저으며 낮게 중얼거렸다. 지난 네 달 동안 세 번을 스치듯 살핀 사람이었다. 몰래 다가가 암살해 보려 했지만 결국 엄두조차 내보지 못한 사람이었다.
무곡검(無曲劍) 우학자.
화산 장문인 우현자의 막내 사제이면서 화산을 대표하는 네 명의 검사 화산사검의 막내이기도 했다. 성격이 차고 직선적이어서, 별호마저도 굽은 곳이 없다 하여 무곡검이었다.
그가 백의인들을 차갑게 노려보며 말했다.
“얌전히 포박을 받을 생각은 없겠지?"
우학자는 기대도 하지 않는 눈빛으로 백의인들을 살폈다. 순간 절망에 물들어 있던 백의인들의 눈에서 비장한 빛이 드러났다.
“흥! 그럴 테지. 또다시 천군을 들먹이며 달려들겠지. 정체를 모르는 것이 아닌 터, 어차피 네놈들과는 볼일 없다. 피를 보고 싶은 놈들은 마음껏 저항하라."
백시우는 우학자의 차가운 눈빛을 마주 보며 오히려 살기를 드리웠다.
‘오래 견뎠지? 이제 쉬어도 상관없을 거야.'
백시우는 도파를 잡으며 낮게 소리쳤다.
“섬서 땅에 발을 들인 그 순간 너희들의 이름은 이미 승천당에 올랐다. 이제 두려워할 필요가 없어. 천군께 영광을!"
순간 그의 등 뒤에 서 있던 사내들이 일제히 도를 뽑으며 소리쳤다.
“천군께 영광을!"
그 합창을 신호로 백시우 등이 먼저 쇄도했다. 도를 내뻗는 순간 바로 도기가 일어 일장을 뻗어 나왔고 백시우의 도는 거기에 또다시 강렬한 기운을 보태었다.
쭝!
우학자도 차가운 미소를 지으며 검을 뽑으며 왼발로 바닥을 찍었다.
취뤼뤼뤼뤼뤼!
세차게 내지른 검이 붉은 기운을 드리우는 순간 검신 전체가 요동을 쳤고 붉은 기운들이 줄기줄기 뻗어 나갔다.
백시우의 도강이 점점 더 강한 기세를 내뿜을 때 우학자의 검에서 뻗어 나온 붉은 기운들이 수십 재의 매화꽃으로 만발하여 도강과 부딪쳤다.
쾅!
두 기운이 소멸되는 순간 우학자와 백시우의 신형이 엇갈렸다. 백시우는 급히 되돌아섰으나 눈을 부릅뜬 채 멈춰 섰고, 우학자는 쉬지 않고 앞으로 나아가 계속해서 검을 휘둘렀다. 붉은 매화우에 휩싸인 우학자가 스치고 지나가자 네 명의 중년인들이 피를 뿌리며 쓰러졌다.
우학자는 천천히 돌아서서 백시우와 눈을 마주했다. 순간도장을 찍은 듯 붉은 매화 한 송이가 백시우의 이마에서 도드라지고 선혈이 콧등을 타고 흘러내렸다.
“어... 어떻게?"
백시우 역시 애초부터 자신이 우학자의 상대가 되지 않는다는 것은 알고 있었다. 그러나 지금처럼 납득할 수 없이 무너지리라고는 생각도 못했었다.
하지만 우학자에게는 너무나 당연한 결과였다. 발검과 동시에 암향부동(暗香浮動)이 발동했고 백시우의 도강을 막은 것은 그 후에 펼친 매화검의 절초 매영난세(梅影亂世)였던 것이었다.
백시우는 무릎을 꿇었다가 앞으로 엎어졌다. 우학자는 그에게서 눈길을 거두고 다른 이들을 살폈다. 굳이 전세를 살필 이유가 없었다. 기세가 아무리 세차다 해도 실력의 차이는 극복할 수 없는 일이기 때문이었다.
우학자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몇몇 도사들이 당장이라도 끝낼 수 있는 상황에서 머뭇거리고 있었다. 이해를 못할 상황은 아니었다. 아무리 대충 상대해도 질 수가 없는 상황에서 상대의 목숨을 뺏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리라.
“어차피 온전하게 보내줄 수는 없는 일이다. 손속에 쓸데없는 인정을 남기지 마라."
지난 네 달 동안 겪어본 사내들은 참으로 모질었다. 손끝에 작은 상처만 나도 그 순간에는 심한 고통을 느끼는 것이 사람이다. 하물며 팔다리가 잘려 나가는 고통은 얼마나 혹독하겠는가. 적어도 일순간은 움츠러드는 게 정상이리라. 그러나 지금 상대하고 있는 이들은 달랐다. 움직일 수만 있다면 그 즉시 달려들었다. 그것을 미처 몰랐던 화산 제자들 몇몇이 방심하고 있다가 목숨을 잃은 적도 있었다. 그것을 상기한 우학자가 차 갑게 호통 치자 제자와 비무하듯 방어만 하던 몇몇 이들이 세차게 검을 내질렀다.
우학자는 착잡한 눈빛으로 널브러진 시신들을 살폈다.
“한 녀석도 살려달라고 애원하지 않았다. 도대체 어떤 교육을 받았기에 이토록 젊은 녀석들이 죽음의 두려움마저 감출 수 있단 말인가?"
우학자는 고개를 젓고 제자들로 하여금 시신을 정리하라고 지시했다. 그리고 다시 중얼거렸다.
“이걸로 대충 소탕이 된 것이면 좋겠는데, 이합집산하기를 거듭하던 녀석들이어서 그 수를 가늠키가 어려우니....... 일단 제자들을 거두자고 해야겠다. 그래야 또다시 움직이는 놈들이 있는지 확인해 볼 수 있겠지."
우학자는 짐작할 수 없었지만 섬서 땅을 짧은 백라천궁의 사람들 삼백여 명 가운데 살아남은 이들은 책임자를 잃고 갈 곳을 모르는 다섯 청년들뿐이었다.
섬서를 스치는 바람에 훈기가 실리는 오월 초순의 일이었다.
오월에 들어선 지도 벌써 열나흘이 지났다. 사천 내륙에는 벌써부터 죽의가 날개 돋친 듯 팔린다고 하는데 천북으로 들어가는 입구 검단협곡의 바람은 그저 기분 좋게 시원한 정도였다.
그 바람에 떠밀리듯 짙은 남색의 장포를 입은 노인이 검단협곡을 통과하고 있었다. 노인은 양쪽 절벽 위에서 수십 쌍의 망설이는 눈빛이 쏟아지는지도 모른 채 등 뒤에 커다란 나무 상자 하나를 메고 대나무 지팡이에 의지하여 힘겹게 걸음을 떼었다.
검단협곡이 끝나는 지점이자 천북으로 향하는 절벽 길의 시작 지점에 이르는 순간 다섯 장년인들이 노인의 앞을 막아섰다. 순간 노인이 대나무 지팡이를 앞으로 내뻗고 동시에 뒤로 물러서면서 거리를 두었다.
“다가오지 마시오. 저주를 받을 것이오."
노인의 두 눈에서 두려움을 읽은 장년인들은 우호적인 미소를 지으며 멈춰 섰다.
“노인장! 두려워 마시오. 우리 천북운가 사람들이오."
선두의 장년인이 부드럽게 말했음에도 노인은 두려운 기색을 거두지 못했다.
“천북운가? 나는 당신들을 두려워하는 것이 아니오. 이 늙은이의 몸에 깃든 저주가 당신들을 해할까 봐 두려운 것이라오."
장년인들은 눈을 둥그렇게 뜨고 서로를 바라보았다. 그때 선두의 장년인들이 여전히 웃는 얼굴로 말했다.
“알겠소. 노인장! 다가가지 않을 테니 안심하시오. 대신 내가 묻는 말에 대답이나 해주시오."
노인은 그때서야 지팡이를 내리고 고개를 끄덕였다.
“무엇이든 물어보시오. 안 그래도 이 늙은이는 천북운가에 신세를 져야 할 몸이니 운가 사람이 묻는다면 기꺼이 대답하겠소."
선두 장년인은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으면서도 차분히 질문했다.
“어디 사는 뉘시오?"
“면양현 북쪽 끝 마을에 사는 고두응이오."
“면양현 북쪽 끝 마을? 허면 마을 위에 머물고 있는 백의인들과 면식이 있소이까?"
순간 고지식해 보이는 노인의 얼굴에 부드러운 미소가 감돌았다.
“물론이오. 참으로 고마운 양반들이오."
장년인들의 얼굴에 차가운 기색이 감돌았다. 그러나 노인은 그것을 깨닫지 못한 듯 말을 이었다.
“가난한 사람들에게 먹을 것을 나눠주고 병자들을 치료해 주며 도사들까지 보내 귀신을 쫓고 복을 빌어준다오. 마을 사람들 모두가 그들을 좋아한다오. 이 늙은이는 말이오, 자의 반 타의 반으로 벌써 십삼 년 동안이나 마을 끝에서 홀로 살았소. 그런 이 늙은이를 찾아와 말동무해 준 이들이 바로 그 사람들이오."
노인의 말이 끝나는 순간 장년인들은 얼굴에 어렸던 차가운 기운을 거두었다. 그들 또한 소문을 듣고 있었다. 그리고 그 소문의 진상에 대해 토론을 하기도 했다.
장년인이 다시 물었다.
“그런데 노인장은 무슨 일로 여길 지나려 하시오? 그 나이에 가기는 너무 험한 곳이라오."
노인은 대답을 주저하다가 지팡이를 든 채 두 팔을 허공으로 뻗었다. 장년인들은 잠시 긴장했으나 노인의 몸에서 기세가 드러나지 않아 이내 차분한 눈으로 노인을 살폈다. 그리고 두 눈을 치떴다.
“바로 이것이오. 이것이 이 늙은이의 몸에 깃든 악귀의 소행이오."
소매가 흘러내리면서 속살이 드러났는데 보기에 끔찍할 정도로 추했다. 제대로 된 살 한 점 볼 수 없었다. 온통 부스럼이었고 군데군데 진물이 흘러내리고 있었다.
노인은 왼손으로 오른팔 소매를 어깨 위까지 들춰 보이며 말을 이었다.
“이 두 팔뿐만이 아니라오. 얼굴과 손발을 빼고는 전신이 모두 이렇게 변해 버렸소. 죽을 용기가 없어 겨우겨우 살아 나가고 있는데, 며칠 전에 백의도사가 찾아왔소. 그가 말했다오. 병이 아니라 악귀의 소행이라고. 악귀를 제거해 주고 싶기는 한데 몸속 깊은 곳에 숨어 있어서 자신의 능력으로는 꺼낼 수 없다 했소. 자진할 용기가 없으니 차라리 죽여달라고 애원했소. 그랬더니 한 가지 방도를 일러줍디다. 악귀의 정체는 팽후라는 놈이라 하면서 검각산 다섯 번째 봉우리인 청림봉으로 가라 했소. 운가 사람들이라면 당신들도 알겠구려. 과거 그곳에 엄청난 악기를 지닌 팽후 한 마리가 살았는데 운씨 세가와 무당의 도력 높으신 진인께서 그놈을 참살했다 들었소. 맞소이까?"
노인이 말한 정도는 천북 사람이면 누구나 다 알고 있는 사실이었다. 당금의 가주 운녹산이 전신의 털을 모조리 태워 한참이나 인구에 회자되었던 유명한 이야기였고, 사람들로 하여금 털이 나나 안 나나를 가지고 내기를 걸게 만들었던 사실이기도 했다.
선두의 장년인이 은근한 미소를 지으며 물었다.
“그런데 그게 노인장의 저주와 무슨 상관이오?"
“팽후란 놈은 원래 사람의 몸에는 깃들지 않는다 했소. 나무에 기생하는 악귀인데 잘못 들어와 나갈 길을 잃고 만 것이라 했소. 만약 이 늙은이가 청림봉에 가서 만월이 뜨는 순간 산신을 청하고 지성껏 빌면 팽후또한 만월의 이끌림을 받아 내 몸 밖으로 나올 것이라 하는구려."
순간 장년인들이 일제히 같은 생각을 떠올리며 눈살을 찌푸렸다.
“그럼 노인장이 낫겠다고 청림봉을 다시 요마의 소굴로 만들겠다는 것이오?"
노인은 고개를 설레 흔들며 옆으로 기다란 대나무 등짐을 내려놓았다. 그리고 보이라는 말도 하기 전에 그것을 풀어 보였다. 온갖 제구들과 술병 그리고 과일과 같은 제물들이 들어 있었고 미리 써둔 부적들도 보였다.
“제 몸조차 쉽게 건사하지 못하는 이 늙은이가 왜 이 무거운 것들을 들고 가겠소? 아까 산신을 청한다 하지 않았소? 그것이오. 운씨 세가의 노력과 무당의 높으신 진인의 도력 때문에 산은 이미 영력을 되찾은 상태라 했소이다. 내 몸속에 깃든 작은 악귀의 힘으로는 거기에 대항할 수 없을 뿐더러 과거를 읽은 팽후는 땅속 깊은 곳으로 숨으려 할 것이라 했소. 그때 산신께옵서 팽후 놈을 간단히 제압할 수 있을 것이라 하오. 그러니 청림봉에 악귀를 풀어놓는 것은 아닐 것이오."
노인은 할 말을 다 했다는 듯 풀어놓은 짐들을 주섬주섬 챙겨 들었다. 그리고 처분만 기다린다는 눈빛으로 장년인들을 살폈다.
장년인들은 난감한 표정을 지었다. 아무리 살펴보아도 힘없는 시골노인이었다. 그리고 절박한 사정을 지니고 있는 노인이었다. 그러나 적의 말을 믿고 온 사람이었고 일이 잘못되면 검각산에 다시 요풍을 몰고 올지도 모르는 사람이었다.
그때 노인이 한마디 덧붙였다.
“가지 못하게 하려거든 이 자리에서 이 늙은이를 죽여주시오. 이제 더는 외로워서 살 수가 없소. 미쳐서 사람들에게 미움받으며 살고 싶지도 않소."
노인의 부드러운 협박에 장년인들도 흔들린 것 같았다.
“어쩌나? 내 듣기로 검각산의 요풍은 수백 년 동안 악귀가 쌓이고 쌓여 마침내 불어닥친 것이라 했네. 설마 사람 하나 지배하지 못하는 힘없는 팽후 한 마리로 인해 일이 벌어지겠는가?"
모두가 미약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때 뒤에 있던 장년인이 말을 덧붙었다.
“그 곤술 도인이라는 양반도 있고 보천 진인께서도 곧 당도하실 모양이니 문제가 생기면 처리할 수 있지 않겠나?"
선두의 장년인이 마침내 고개를 끄덕였다.
“좋소. 보내 드릴 테니 혹시라도 나중에 문제가 생길 것 같으면 운가사람 아무에게나 자초지종을 상세히 설명해 주셔야 하오."
노인은 울 것 같은 얼굴로 연신 고개를 끄덕였다. 그때 선두의 장년인이 품속에서 줄이 달린 대나무 청패 하나를 꺼내어 노인에게 던져 주었다.
“그것을 목에 걸고 가시면 오가는 동안 막는 사람이 없을 것이오."
노인이 다시 고개를 숙여 감사의 뜻을 표하자 장년인들은 한쪽으로 물러서서 길을 터주며 말했다.
“노인장! 꼭 낫기를 바라겠소."
노인은 길을 지나간 후에도 몇 차례나 돌아서서 고개를 숙었다.
홀로 청림봉에 오른 노인은 과거 거대한 수청목이 불타 버렸던 그 자리를 찾아 새로 심은 나무에 기대어 앉았다. 그리고 지그시 눈을 감으니 그대로 잠이 들었다.
석양이 깔리고 한쪽에서는 만월이 머리를 내밀었다. 노인은 눈을 뜨고 등짐을 내렸다. 노인은 위 뚜껑이 아닌 하단부를 열었다. 그리고 그 안에서 도관과 도포 그리고 칠성법검을 꺼내어 들었다.
도관을 쓰고 도포를 입으니 노인은 천기신사 백진궁 본래의 면목으로 화하였다.
백진궁은 대나무 등짐을 제단으로 삼고 그 위에 제물을 진설했다. 그리고 검을 들고 물러선 후 품속에서 봉투를 꺼내어 땅바닥에 내용물을 조금씩 흘려놓기 시작했다.
봉투에서 나온 것은 백토, 땅 위에 그린 것은 칠성이었다.
백진궁은 제단 앞으로 가서 향을 사르고 절을 올린 후 다시 물러서서 백토로 그린 칠성을 천천히 밟아 나가기 시작했다.
“들으시오. 들으시오. 검각산의 산신은 들으시오. 만신의 신하 백진궁이 칠성을 밝고 태산에 이르러 산신들의 대왕이신 태산부군(泰山府君)의 뜻을 받자왔으니 검각산의 산신은 모습을 드러내시오. 급급여율령!"
칠성을 일곱 번이나 반복하여 밟은 백진궁은 다시 제단 앞으로 다가가 바닥에 놓인 흙 접시를 제단 뒤쪽에 놓고 두 개의 술병 가운데 하나의 마개를 열었다. 그리고 품속에 양손을 넣어 각각 두 장의 부적을 꺼내 들고 제단 앞에 가부좌를 틀어 앉았다.
잠시 후 놀라운 일이 벌어졌다. 백진궁의 맞은편에 놓인 흙 접시를 방석 삼아 흐릿한 노인의 영상이 자리 잡은 것이었다.
“도사여! 무슨 일로 나를 불렀는가?"
백진궁은 부드러운 미소를 지으며 이상한 목소리로 말했다.
“모셨으니 우선 술부터 올리리다."
백진궁은 마개를 딴 술병을 제단 위의 빈 잔으로 가져갔다. 그리고 술잔에 술을 따르는 척하면서 노인의 다리 위로 쏟아 부었다.
“으응? 이건 술이 아니라 물이로구나."
노인이 깜짝 놀라 일어서려는 순간 백진궁은 손가락 사이에 끼우고 있던 네 장의 부적을 접시의 사방에 집어 던졌다. 순간 네 장의 부적들은 흐릿한 물기둥으로 화하여 마치 쇠창살같이 노인을 가두었다.
노인은 포기하고 물 위에 주저앉으며 백진궁을 노려보았다.
“이게 무슨 짓인가? 신벌을 모르지 않을 터. 인간이 신령을 이리 대하고도 무사하길 바라는가?"
순간 백진궁은 미소를 지으면서 노인의 맞은편에 앉은 후에 두 팔을 들어 올려 보여주고 말했다.
“자신의 힘으로는 영지마저 지키지 못하는 힘없는 산신이여! 그대에게 이 병을 고쳐 줄 능력이 있는가?"
노인은 깜짝 놀라며 부르짖었다.
“그대! 이미 신벌로 몸을 망쳤거늘 어찌하여 또다시 죄를 짓는가? 더구나 이번에는 대신(大神)이신 태산부군의 존명을 빙자하였으니 지옥의 나락에 떨어져도 할 말이 없을 것이로다."
“나 자신의 영달을 위한 것이 아니로다. 천하를 위한 신념의 소산이니 지옥에 떨어진들 내가 어찌 후회하리오."
백진궁의 확고한 눈빛을 대한 노인은 설득을 포기한 듯 눈을 감았다. 그리고 한동안 꼼짝도 하지 않았다.
백진궁은 서두르지 않았다. 그가 말없이 기다리니 노인은 할 수 없이 눈을 뜨고 말했다.
“그대의 말처럼 이 늙은이는 영지조차 지키지 못한 힘없는 산신! 그런 나를 도대체 무슨 까닭으로 이렇게 가두어두는가?"
백진궁은 다시 미소를 짓고 품속에서 두 줄의 철사로 이어진 두 개의 명경을 꺼내 들었다. 그리고 그것을 목걸이처럼 걸어 가슴과 등에 한 개씩의 명경을 대었다.
백진궁은 다시 마개를 따지 않은 술병을 들어 보이며 말했다.
“이 안에는 그동안 내 동료들이 천하를 떠들며 모은 잡귀들이 들어 있소. 나 이제 그것들을 이곳에 풀어 검각산 깊은 곳으로 흩어진 악기를 섭취하게 할 것이오. 이곳 청림봉을 과거로 되돌릴 것이오."
순간 노인이 눈을 부릅뜨며 외쳤다.
“안 된다. 그리하면 내 너를 용서하지 않으리라. 천신께 고하여 팔열팔한 지옥을 두루 경험하게 하리라."
백진궁은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그대에게 천계에 도달할 힘이 있다면 고하시오. 그래도난 할 것이오."
“어리석은 인간! 인간의 삶이란 스쳐 지나가는 점에 불과한데, 어찌하여 그 잠깐의 영화를 위해 제 발로 지옥의 불구덩이 속으로 들어가려 한단 말인가? 정녕 어리석도다."
백진궁은 씁쓸한 미소를 지으며 술병의 마개를 쥐고 말했다.
“신념이 강한 인간은 원래 어리석을 정도로 외골수인 것을 모르시오?"
그 말을 끝내는 그 순간 백진궁은 마개를 뽑아 병을 뒤집었다. 병 속에서 작게 말린 종잇조각들 수백 개가 쏟아졌다. 백진궁은 그것들을 제단 위에 놓고 부싯돌로 불을 놓았다.
노인이 다시 눈을 감는 순간 종이들이 타오르면서 시커먼 연기를 내뿜었다. 그 연기들은 하늘로 올라가지 않고 오히려 제단 주변을 휘돌다가 백진궁에게로 다가올 듯하더니 명경 앞에서 급히 물러섰다가 다시 아래쪽으로 낮게 깔렸다. 그리고 잠시 후 사방으로 흩어져서 사라졌다.
“이젠 돌이킬 수 없게 되었소."
노인이 다시 눈을 치떴다.
“아니다. 부적 속에 금제되어 있던 악귀들이니 당장은 제 힘을 발휘하지 못한다. 나를 풀어다오. 아직은 내가 제압할 수 있으니 제발 풀어다오. 그리만 해준다면 천신께 네 죄를 고하지 않을 것이다."
백진궁은 담담하게 웃었다.
“풀어드릴 것이오. 그러나 지금은 아니오. 보름! 보름 후면 자연히 금제가 풀릴 것이니 답답해도 조금만 참으시오."
보름의 시간이 지나고 나면 악귀들이 이미 강한 힘을 얻어 결계에 갇혀 힘을 소진한 산신으로서는 어찌해 볼 도리가 없으리라.
노인은 부들부들 떨었다. 그때 백진궁이 입술을 깨물고 하얗게 질린 채 앞으로 엎어졌다.
“으으으으으으으으으!"
백진궁은 낮은 신음성을 토하면서 두 손으로 자신의 목을 옥죄었다. 그리고 잠시 후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차분하게 일어나 앉았다.
백진궁은 뻣뻣하게 느껴지는 두 손을 눈앞으로 가져갔다. 부스럼이 손등까지 침범해 있었다. 두 발등의 느낌도 마찬가지였다. 그리고 목 또한 같은 느낌 이었다.
“앞으로 얼마나 살 수 있을까? 운남의 일도 끝냈으니 남은 생명이 일년만 된다면 여한을 남기지 않을 텐데. 검각산의 산신이여! 너무 걱정 마시오. 곧 다시 올 것이오. 그때 다시 악귀들을 거둘 것이니 한동안만 숨어서 지내시구려."
백진궁은 고개를 설레 흔드는 노인을 무시하고 주변을 정리한 후에 옷을 갈아입고 다시 명경을 걸쳤다. 그리고 노인을 향해 읍해 보이고 산을 내려가기 시작했다.
산신 노인이 보통 사람들에게는 들리지 않을 목소리로 고래고래 고함을 했다.
“이놈! 백진궁! 내 반드시 너의 죄상과 이름을 천신께 고하고 말리라! 지옥에 떨어뜨리고 말리라!"
백진궁은 돌아보지도 않고 가볍게 손을 저을 뿐이었다.
그로부터 이틀이 지난 이른 아침.
면양현의 불쌍한 시골 노인을 통과시켰던 장년인은 엉터리 도사를 만났다며, 아무런 효험도 보지 못했다며, 죽여달라고 애걸복걸하는 노인을 달래느라 한참 동안 고생했다. 그러나 그는 모르고 있었다. 생동하는 봄을 맞아 다시 푸름을 자랑해야 할 검각산의 나무들이 청림봉을 중심으로 급격하게 말라 죽어가고 있다는 사실을.
기문둔갑 비요편 다음 장, 즉 용호진서의 후반부 술법편에는 방대한 도가의 술법들을 망라하고 그것을 다시 세 편으로 나누어 일목요연하게 정리하고 있었다.
먼저 일편에서 나열하고 있는 것들은 술법이라기보다는 알아서 행하면 하지 않는 것보다 나을 것 같은 도사의 행법에 가까웠다.
예를 들자면 입산 전에 악귀를 보지 않기 위해 행하는 우보법(禹步法), 거울을 사용하여 귀신이나 산신의 장인을 피하는 법인 명경법(明鏡法), 귀신이 두려워하는 소리를 내는 고치법(固齒法), 흉사악재에서 벗어나기 위해 행하는 타천종(打天鐘), 사기를 떨쳐 내기 위한 퇴천경(槌天磬) 등이었다.
그 같은 술법들은 특별한 수련을 요하는 것이 아니어서 그 내용과 방법을 알면 민간에서도 능히 사용할 수 있는 것들이었다.
이편에서 접한 내용들은 조금 더 전문적인 것들로서 운청산이 아는 듯도 하고 모르는 듯도 한 주문과 부적 등에 관한 것들이었다.
아는 듯하다는 것은 그 내용들이었다. 한동안 청인자를 따라 세상을 떠돈 운청산인지라 세상에서 통용되는 금주(禁呪), 즉 천재지변과 같은 재앙을 막고 장수를 빌고 복을 구하는 주문이나 부적의 대강은 알고 있었다. 그뿐만이 아니라 요괴나 악귀 망령들을 퇴치하는 퇴마부, 즉 부록(符?) 또한 쓸 수는 있었다. 특히 파재구복(破災求福)의 부적 같은 것은 청인자를 대신하여 그가 직접 쓰기도 하였다.
그런데 알 수 없는 것은 분명히 다른 무엇이 있을 것인데 귀곡산인의 저술에서도 운청산이 아는 것 이상은 적혀 있지 않다는 것이었다.
운청산은 의아해하면서 삼편을 펼쳤다.
“아! 문외불출(門外不出) 용호비전(龍虎秘傳)?"
느긋하던 마음이 점점 다급해져 가고 있던 때였다. 진서의 남은 분량은 얼마 되지 않는데 그가 간절히 배우고자 하는 내용들은 좀처럼 나오지 않는 탓이었다. 그런 때에 비전이라는 문구를 발견하니 가슴이 뛰지 않을 수 없었다.
운청산은 심호흡으로 마음을 진정시키고 서두를 읽기 시작했다.
천하 도처에 호풍환우한다는 무리들이 많고도 많으나 그 내용을 살펴보면 잡술로써 혹세무민하는 것이 보통이고 뛰어나다 하는 이들의 술법 또한 대동소이하여 특별하다 할 것이 없다.
그 까닭은 무엇인가. 그것은 그들이 사람들을 놀라게 하는 기상천외한 방법과 보기에 화려한 이술에만 현혹되어 진정한 법을 이루기 위한 근간을 세우지 못한 탓이다.
여기 일맥단전으로 천 년을 이어온 용호파의 기본이요 전부인 세가지 보배를 전하니 후인은 삿된 곳에 쓰기를 두려워하며 오직 비인부전의 원칙에 따라 기환의 진법을 전승시키라.
운청산은 고개를 들고 책을 덮었다. 망설여진 것이었다. 귀곡산인이 운청산에게 남긴 권두의 글과는 달리, 용호비전을 배움과 동시에 의무를 지어야 하기 때문이었다.
“중요한 것이 아니니 굳이 전할 필요 없다 하셔놓고 왜 달리 말씀하시는가?"
그때 운현산이 어깨에서 내려와 말했다.
‘입장이 다른 탓이다.'
‘무슨 뜻입니까?'
‘전하지 말라 하신 뜻은 네게 할아버지 되시는 분이 손자에게 전함으로써 이미 단전되었다 여기신 탓이고, 전하라 하는 지금의 내용은 용호파의 전인이 된 입장으로서 제자에게 전해야 할 책임을 다하신 것이다.
선후(先後)로 따지자면 지금이 선이요 네게 사사로이 전한 글이 후. 즉 이 책을 쓸 당시만 해도 용호파의 전인 된 입장을 더 중히 여기셨다는 뜻이겠지. 후에 달리 생각하신 것이다. 내 생각에 넌 지금의 글에서 자유로워도 된다.'
‘정녕 그리 생각하십니까?'
운현산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때 화살촉에서 당우리가 나와 운현산에게 허리를 접었다.
운현산이 미소를 지으며 당우리를 보자 운청산도 화살촉을 들어 눈앞으로 가져갔다.
‘뭘 그렇게 심각하게 생각해요? 세상천지에 사람이 얼마나 많은데 제자 하나 못 구하겠어요?'
‘하지만 난......'
운청산이 말도 하기 전에 당우리는 고개부터 저었다.
‘안 돼요. 안 된다구요. 이제 스물다섯이에요. 그 나이에 이 산속에서 썩겠단 말인가요? 다른 사람이 알지 못하는 것을 배운 사람은 당연히 의무를 지게 되는 거에요. 배운 것을 세상에 이롭게 써야지요. 의술로써 내가 못한 일을 운 가가가 술법으로 대신해 줘야 해요. 알았죠? 그리고 말이에요. 난 아직 소주(蘇州), 항주(杭州)도 못 가봤어요. 동정호(洞庭湖)도 보고 싶고 황산(黃山)도가보고 싶다구요. 가보고 싶은 곳이 얼마나 많은데 여기만 있겠다는 거예요? 아! 또 있어요. 전 말이죠. 제자를 데리고 다니면서 이것저것 가르쳐 주는 사부의 모습이 너무 보기 좋은 거 있죠. 운 가가도 그거 꼭 한 번 해봐야 돼요. 알았어요?'
운청산은 쓴웃음을 지으며 운현산을 보았다.
그때 당우리가 운청산의 눈동자 앞으로 손을 흔들며 또다시 말했다.
‘나 어머니가 무척 보고 싶어요.'
운청산은 부드럽게 미소 지으며 수십 차례 고개를 끄덕였다.
‘자아! 그럼 공부하세요.'
당우리는 환하게 웃고는 돌아서서 여덟 영혼들에게 절하고 화살촉 안으로 사라졌다. 순간 운현산 등도 눈앞에서 사라져 운청산의 양 어깨에 내려앉았다.
운청산은 다시 책을 폈다.
용호파에는 세 가지 보배가 있다. 그 첫 번째는 필법이며 두 번째는 율여고 그 마지막이 보배 중의 진보인 영통한 마음이다.
그 구절을 읽는 순간 운청산은 천둥 벼락을 맞은 듯한 충격에 휩싸였다. 지금까지의 내용들은 운청산에게 있어 그리 생경한 것이 아니었다. 그것을 읽음으로써 그의 머리 속에 제자리를 찾지 못하고 엉켜 있던 과거의 지식들을 체계적으로 정리했을 뿐이었다. 이제야 마지막 몇 장을 남겨두고 진정한 비기를 배운다 생각했는데, 그것이 필법과 율여라면 그 역시도 새로운 것이 될 수 없었다.
운청산은 귀곡산인과의 지난날들을 되새겨 보았다.
“아! 그렇구나. 많은 것들을 가르쳐 주셨지. 엄격하셨지만 모른다고 크게 야단치지는 않으셨다. 하지만 글씨와 음과 소리를 가르치실 때에는 혹독하다 싶을 정도였다. 알겠다. 이제야 왜 그리하셨는지 알겠다. 나는 애초부터 용호파의 전인인 것이다."
운청산은 고개를 끄덕이며 다음 내용을 살폈다.
글씨는 말을 대신하는 단순한 도구가 아니다. 마음을 다한 글씨는 능히 귀신을 누르고 신령을 부릴 수 있는 힘을 지닌다. 그러한 글씨를 일러 대개는 신지문이라 부르는데, 본 파가 계승한 필법의 정확한 이름은 따로 구천팔록진서(九天八?眞書)라 한다.
구천팔록진서는 원래 본 파의 조사께서 천상의 문서를 엿보시고 따라 하신 것이다. 이로써 부적을 쓰고 축주를 드니 천지에 가득한 귀신과 신령들이 모두 두려워하며 고개를 숙였다. 그래서 이 구천팔록진서를 본 파의 첫 번째 보배로 삼는다.
다만 후인이 경계해야 할 것이 하나 있으니 필법을 남용하지 말라는 것이다. 구천팔록진서는 천상의 서법. 남용하는 자에게는 신벌이 따르리라. 진서를 쓸 때에는 반드시 간절히 구하는 마음으로 정성을 다하되 뜻을 쓰려 하지 말고 단번에 마음을 담으라.
운청산으로서는 고개를 끄덕이지 않을 수 없었다. 청인자를 따라다니며 자주 부적을 썼다. 몸에 익은 구천팔록진서법이니 당연히 법에 따라 썼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부적들이 별 효험을 갖지 못한 것은 마음을 담아 일필휘지로 써 내려간 것이 아니라 책을 보고 따라서 그렸기 때문이리라.
운청산은 용호진서를 옆으로 밀어두고 석탁 아래서 문방사우를 꺼냈다. 먹을 갈아둔 후에 지그시 눈을 감고 호흡을 가다듬었다. 그리고 다시 눈을 뜨고 붓을 들어 단숨에 폐(閉) 자를 써서 문 쪽으로 집어 던다. 하얀 종이가 잠시 펄럭이는가 싶더니 어느새 동부 안은 빛 한 점 새어 들어오지 않는 컴컴한 공간으로 변했다.
운청산은 금을 무릎 위에 얹어두고 지그시 눈을 감은 후에 용호파의 두 번째 보배인 율여에 대하여 떠올렸다.
궁상각치우는 잡소리 없는 동정음양(動靜陰陽)의 진정한 성음(聲音)이니 이 법을 선천수(先天數) 오행에 더하여 궁토(宮土), 상금(商金), 우수(羽水), 각목(角木), 치화(緻火)로 나눈다. 천지의 소리가 많다 하나 모두 여기서 비롯된다.
어느 천지의 변화가 선천오행의 기운을 벗어날 수 있으랴. 궁상각치우 다섯 성음을 상생상극의 법칙에 따라 조화 반목시키면 그것이 곧 천지 변화와 음양강유에 맞물리어 천지가 성음에 따라 울고 웃을 뿐만 아니라 귀신과 신령조차도 성음을 감당하지 못하리라.
율여를 통하면 역으로 곧 천지만물의 변화를 통하는 것이다. 새소리, 바람 소리는 물론이고 천지의 변화하는 소리 하나하나의 의미를 능히 알 수 있으니 이로써 호풍환우하는 일 따위는 어렵지 않게 행하리라.
운청산이 금에 손을 얹고 다시 호흡을 가다듬는 순간 화살촉으로부터 당우리가 나오고 여덟 영혼들이 기대에 찬 눈으로 주시했다.
운청산은 마침내 손을 놀려 청상조(淸商調)를 탄주했다. 상음이 밝고 청량하게 이어지자 당우리와 운현산 등은 희열에 찬 눈빛으로 몸을 움찔거리고 밖에 있던 호연마저도 촐랑거리며 안으로 들어왔다.
청상조가 이어지는 동안 듣고 있던 이들은 모두 희희낙락한 표정을 지우지 못하고 어깨를 들썩였다. 그리고 탄주가 끝나고도 그 여운을 버리지 못하여 실실거리기를 멈추지 않았다.
그때였다.
“청산! 네 이놈!"
운청산은 갑자기 들려오는 반선 노인의 화난 목소리에 놀라 금을 옆으로 내려놓고 급히 뛰어나갔다. 그 순간 반선 노인이 운청산 앞에 내려섰다.
“무슨 일이십니까? 제가 무슨 잘못이라도?"
반선 노인은 운청산의 의아한 눈빛을 바라보며 한숨을 내쉬고 고개를 저었다. 그리고 노화가 사라진 목소리로 말했다.
“이놈아! 네놈 덕에 지난 두 달의 적공(積功)이 물거품이 되었다. 사전(四轉) 연단을 처음부터 다시 하게 되었어. 무슨 놈의 금음이 그 모양이냐? 에휴! 말을 말자."
운청산은 그때서야 자초지종을 파악하게 되었다.
두 달 전, 구전태청금액고의 삼전 연단을 마치고 잠시 나왔던 반선 노인은 운청산이 귀곡산인의 진전을 익히고 있음을 확인하고 하루 만에 다시 사전 연단에 들어갔었다. 그런데 조금 전 금음 소리에 흔들려 연단에 집중하지 못하고 시기를 놓쳐 버린 것이었다.
“죄송합니다."
운청산은 어찌할 바를 모르고 허리를 접었다.
반선 노인은 고개를 젓고서 운청산의 어깨를 두드렸다.
“되었다. 그게 어디 네 잘못이더냐? 내게 집중력이 부족했음이니 어제 넘어갔다 해도 결과는 실패였으리라. 그리고 내게 두 달 정도의 시간은 의미가 없어. 헌데 이상하긴 이상했다. 소리를 질러도 연단실에서는 듣지 못하는데, 금음 소리는 어찌하여 새어 들어왔을까?"
운청산은 쑥스럽게 웃으며 말했다.
“다음부터는 동부를 페하고 탄주하도록 하겠습니다."
“음! 그렇게 해주려무나. 하지만 오늘은 이왕 나왔으니 간만에 풍류나 즐겨볼까."
운청산은 웃으며 동부 안으로 들어가 금을 들고 귀곡의 중앙 연못가에 닿았다. 반선 노인이 연못가 바위 옆에 기대어 앉자 호연이 그 옆에 드러누웠다.
또다시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 마지막 삼보를 알게 되면 그가 진정으로 원하는 일을 행할 수 있을 것이라 생각했건만 삼보에 대한 설명은 달랑 한 장뿐이었고 그것이 바로 용호진서의 마지막 장이었다.
필법과 율여는 용호파의 보배라. 그러나 세 번째 보배야말로 보배중의 진보이니 그것은 곧 영통한 마음이다. 그것에 이르는 길은 이미 설한 바 있다.
영통천망심법. 오로지 일심으로 심법을 갈고닦으면 영이 하늘에 닿고 천지에 뻗어 마음이 일면 곧 뜻이 통하리라.
후인은 오로지 심법 한 가지를 잊지 말라. 영통한 마음은 곧 필법으로 드러나고 율여로도 드러나며 또한 하늘로부터 신축(神祝)을 내려받는 길이 되리로다.
운청산은 마음을 차분히 가라앉히고 생각에 잠겼다.
“결국 배우는 것이 아니라 마음을 갈고닦아 깨닫는 것이로구나. 만류귀일. 하나로 돌아간다 하는 것이 결국 영통천망심법인가."
운청산은 씁쓸하게 웃음 지으며 진서의 마지막 장을 쓰다듬었다.
신축을 얻어야 했다. 그래야 원하는 것을 얻으리라.
태평경(太平經)에서 말하기를, 하늘에는 신성한 요어(窈語)가 있어 때로 사람에게 그 말을 내려받게 하는데 이는 곧 신관이 기에 응하여 왕래하는 것과 같다 했다. 신관으로부터 전해 받는 그 신성한 연어가 바로 귀신신령을 부린다는 신축이었다.
이 신축에도 여러 단계가 있는데 그 사람의 그릇에 따라 등급이 정해져 부릴 수 있는 귀신과 신령이 달라진다. 그러나 이 신축을 얻었다는 사람에 대한 소문은 있지만 지금껏 세상에 나선 자는 아무도 없었다. 그래서 대부분의 방술사들은 귀신신령을 직접 부릴 수 있는 이 신축의 대안으로 다만 의사 소통이 가능한 무축(巫祝)을 익힌다 했다.
그러나 운청산만은 신축을 얻은 사람을 알고 있었다. 귀곡산인 그가 운청산의 어머니 이청수 그리고 운현산 등과 통하던 그 이상한 말소리가 바로 신축이었으리라.
운청산은 마지막 책장 뒤에는 뒷표지밖에 없음을 알고도 책장을 넘겼다. 그리고 다시 웃었다. 미련을 버리지 못해서 넘긴 것인데 거기 귀곡산인이 남긴 한마디가 있었던 것이었다.
기어이 여기까지 왔더냐? 그럼 오너라.
어디로 오란 말도 없이 오라 했다. 그러나 운청산은 어디로 가아 할지 알고 있다는 듯 반선 노인에게 편지를 남긴 후에 석탁을 정리하고 용호진서를 품속에 갈무리한 후에 귀곡을 벗어났다. 사친무림련을 떠난 지 아홉 달이 지난 후였고, 귀곡에 든 지도 여섯 달이나 지난 후의 일이었으며, 검단협곡에 막 전운이 감돌기 시작하던 오월 열닷새의 일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