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3장 느리고도 빠른 길에 들어서서
호연은 반개한 눈을 한 채 황홀한 듯 운청산을 바라보고 있었다. 귀곡산인처럼 깊은 명상에서부터 뿜어져 나오는 선기가 아니어서 훔칠 수 없었지만 보는 것만으로도 기분이 좋아지는 모양이었다.
그런데 호연이 갑자기 눈을 치뜨며 뒤로 물러섰다. 지난 사흘간의 운공에서는 보지 못했던 것을 본 탓이었다. 운청산의 정수리에서 튀어나온 여덟 신명들이 만개한 인화처럼 팔방을 점하고 운청산을 바라보고 있었다.
잠깐 놀랐던 호연은 익히 그 존재를 알고 있었던 듯 다시 바닥에 배를 대고 편안한 감상의 자세를 취했다 그러나 호연은 편하게 누워 있을 수가 없었다. 운청산의 전신 모공에서 실날같은 청기가 뿜어져 나와 금세 하나의 구체를 이루어 귀부를 가득 채운 탓이었다.
초연은 멀리 귀부의 입구까지 도망쳐서 당황한 눈빛으로 운청산을 보았다. 그때 운청산의 주위를 휘돌던 푸른 빛 구체가 다시 흩어져 그의 전신으로 스며들었다.
운청산은 입가에 은은한 미소를 지으며 눈을 떴다. 여덟 신명들이 다투어 그의 눈앞으로 몰려갔다.
운현산이 입을 벌렸다.
‘어제만 해도 기운이 미미하기 그지없더니만 오늘은 견디기가 힘들어서 나와야 했다. 꽤 나아진 것이지?'
운청산이 외눈 주변에 주름을 만들며 고개를 끄덕였다.
‘어제까지는 약해지고 움츠러들었던 기로를 뚫고 다독이느라 기를 제대로 운용할 수 없었습니다. 이제는 마음 놓고 운공할 수 있게 되었으니 오늘내일 공을 들이면 예전의 공력을 팔구 할 이상 되찾을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운경산이 웃으며 입을 벌렸다.
‘그래. 우리도 느끼고 있다. 네 활력이 전해졌어. 보아라. 태청구전금액고의 기운을 나눠 먹고, 네가 공력을 회복하고, 귀곡의 선기까지 힘을 보태니 우리도 많이 달라졌구나.'
과연 그러했다. 한 자 반이 겨우 넘던 그들이 서너 살 어린아이만한 체구로 자라 있었다.
운청산은 문득 그의 회복이 당우리에게도 영향을 미쳤는지 궁금해졌다. 그는 목에 걸고 있던 화살촉을 오른 손바닥 위에 올려놓았다. 화살촉 표면의 차가운 한기가 사라지고 온기가 감돌자 당우리가 가슴 아래까지 모습을 드러냈다.
물을 필요도 없었다. 드러내지 않는다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잘 알고 있기 때문이었다. 운청산의 얼굴에 실망감이 드리워지자 여덟 신명들이 씁쓸한 미소를 지으며 그의 정수리 속으로 사라졌다.
운청산은 오른손을 턱 밑으로 가져가 당우리와 눈 높이를 맞추었다. 그리고 억지로 웃으며 말했다.
‘차라리 내 몸속에 머물지 그랬소? 내 기운을 마시면 금방이라도 신명을 되찾을 텐데.'
당우리가 웃으며 고개를 젓고서 입을 크게 벌렸다.
‘너무 욕심 부리지 말아요. 여기라도 머물 수 있으니까 같이 있을 수 있는 거잖아요. 아직은 아프지만 귀곡에 들어온 후로 조금씩 나아지고 있어요. 오래가지 않을 것 같아요.'
‘그렇소? 그럼 좀 보여주시오. 얼마나 아픈지 알고 싶소. 그만큼 나도 아프고 싶소.'
당우리는 갑자기 입을 삐죽 내밀고 고개를 세차게 저었다.
‘싫어요. 창피하란 말이에요.'
운청산은 눈물 그렁한 눈에 미소를 가득 담았다. 볼을 홀쪽하게 만들고 입술을 배죽 내미는 그 얼굴을 다시 볼 수 있게 된 것이 너무나 반가웠다.
운청산은 만질 수 없다는 것을 알면서도 당우리의 조그만 얼굴 윤곽을 따라 왼손 검지를 움직였다. 그의 외눈에서 고여 있던 눈물이 결국 흘러내렸다.
‘한 번만 이 볼을 쓰다듬어 볼 수 있으면 좋으련만...... 한 번만, 딱 한 번만 그대를 부둥켜안을 수 있으면 좋으련만......
당우리는 웃었다. 그리고 울었다. 운청산의 손가락 끝에 볼을 대고 비비듯 얼굴을 움직이며 투명한 눈물을 뚝뚝 떨어뜨렸다. 운청산은 그 눈물이라도 느껴볼 수 있기를 바라며 검지를 움직였다. 그러나 눈물은 원래부터 없는 것처럼 허공에서 사라져 버렸다.
당우리가 다시 미소 지으며 입을 벌렸다.
‘나만 가가의 손길을 느껴서 미안해요. 하지만 이젠 울지 말아요. 손가락에서 전해져 오는 기운이 따뜻하면서도 축축하단 말이에요. 알았죠?'
운청산이 억지로 웃자 당우리는 천천히 몸을 돌려 귀부의 입구에서 빤히 바라보고 있는 호연을 보았다. 그리고 다시 몸을 돌려 운청산에게 말했다.
‘호연 좀 불러봐요. 난 예뻐 죽겠는데 조 녀석은 날 무서워하는 것 같아요.'
‘조 녀석이라고 하지 마시오. 화낼 거요. 나보다 두 배는 오래 살았다오. 그리고 우리를 무서워하는 게 아닐 거요. 내 몸에 배인 피 냄새를 싫어하는 것 같소.'
운청산은 일단 대답하고 호연에게로 눈길을 돌렸다.
‘호연! 이리 와봐. 우리 친구잖아?'
호연은 운청산의 외눈을 빤히 바라보다가 천천히 다가왔다. 그러나 손이 닿는 곳까지는 다가오지 않았다. 처음 만났을 때처럼 그의 주위를 빙빙 돌 뿐이었다.
운청산은 호연이 다시 눈앞에 나타났을 때 부드럽게 말했다.
“호연! 나쁜 냄새를 풍겨서 미안하구나. 하지만 친구는 그런 게 아냐. 좀 싫어도 참아줘야지."
호연은 잠깐 운청산의 얼굴을 보고는 다시 그의 등 뒤로 돌아갔다가 다시 나타났다. 그 순간 호연의 탐스러운 은빛 꼬리들이 운청산의 무릎을 툭 건드렸다.
운청산의 입가에 포근한 미소가 어리는 순간 다시 한 번 그의 주위를 돈 호연이 마침내 그의 가부좌 튼 둔 무릎 위에 올라앉았다.
운청산은 왼손으로 호연의 목밀미를 부드럽게 쓸면서 오른 손등을 호연의 등에 대었다. 당우리가 함박웃음을 짓는 순간 호연도 지그시 눈을 감고 운청산의 애무를 즐겼다.
당우리가 운청산을 올려다보며 입을 벌렸다.
‘기분이 좋은가 봐요. 숨이 아주 느려졌어요.'
‘반선 할아버지는 호연을 귀찮아하고 태악 사부님은 아예 관심조차 없으시니 그동안 쓰다듬어 줄 사람이 없었을 게요.'
그때 호연이 귀를 쫑긋 세우고 눈을 분 후에 운청산의 무릎에서 내려섰다. 그리고 귀부의 입구를 바라보았다. 운청산도 자연히 그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청산."
태악 도인의 목소리였다. 운청산은 당우리에게 고개를 끄덕이고 일어섰다. 당우리가 다시 모습을 감추는 순간 운청산은 귀부 밖으로 뛰어나가 머리를 조아렸다.
다시 고개를 든 운청산의 두 눈에 이채가 어렸다. 태악 도인의 등 뒤에 의외의 인들들, 청학자와 청우자가 어던가 불편린 자세로 얼굴을 일그러뜨린 채 운청산을 향해 허리를 접고 있었다.
원래 백무극 일행이 곤륜을 떠난 것은 혈응이 곡을 나간 그날, 그러니까 나흘 전의 일이었다. 그러나 그것을 알려고도 하지 많고 알 수도 없었던 곤륜 사람들은 태악 도인이 먼저 나가 확인해 주었던 이틀 전에서야 꾸물꾸물 곡을 나갈 준비를 했다.
가장 먼저 나간 사람들이 바로 청학자와 청우자였다. 두 사람이 먼저 곡을 나가 백무극 일행의 족적을 들고 다시 격이목까지 가서 완전히 떠났다는 것을 확신한 것이었다. 그리고 어제서야 모두가 억지로 곡을 나섰다.
만약 태악 도인이 눈을 부라리지 않았다면 두 사람을 제외하고는 아무도 나가려 하지 않았으리라. 그 두 사람이 바로 청학자와 청우자였는데, 오히려 그들만이 곡에 남아 있으니 운청산으로서는 이상하게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나 운청산은 이유를 물어볼 수 없었다.
“오늘은 좀 어떠냐?"
“하루 이틀이면 전과 다름없을 것입니다."
태악 도인은 고개를 끄덕이고서 뒷짐을 진 채 들고 있던 책 한 권을 건냈다. 손아귀 그득 쥐고 있는 것이 족히 네 치는 될 것 같은 두꺼운 책이었다.
“귀곡 형님이 네게 남기신 것이다."
운청산이 공손히 받아 살펴보니 용호진서(龍虎眞書)라고 적혀 있었는데 풀고 묶기를 여러 번 한 듯 상당히 낡아 있었다. 그가 책 내용을 살펴보기도 전에 태악 도인이 말했다.
“한동안 본산에 가 있으려 한다."
순간 청학자와 청우자가 질끈 눈을 감으며 절망적인 표정을 지었다. 운청산은 그 얼굴만 보고도 대충 돌아가는 사정을 이해했다.
“오래 가 계시렵니까?"
태악 도인은 무정한 얼굴로 뒤를 돌아보고 나서 대답했다.
“오래 걸릴 것이다. 저 두 녀석들이 요즘 태허도룡검을 연구하고 있다기에 기특하여 시험을 해보았다. 큰일이다 싶더구나. 제대로 강한 것이 무엇인지도 모르는 놈들이 태허도룡검이라니, 가당키나 한 소라 내 비록 사문에 대한 정이 그리 깊지는 못한 인간이다만, 태을 사형을 생각해서라도 가만히 두고 볼 수가 없어. 그나마 낫다는 놈들이 저 지경이니 나머지는 보아서 무엇 하랴."
운청산은 안쓰럽다는 눈빛을 드리우며 청학자와 청우자를 바라보았다. 그 눈빛을 대하는 순간 안 그래도 절망에 차 있던 두 사람은 허공을 향해 고개를 겪고 한숨을 내쉬었다.
“알겠습니다. 뵈올 일이 생기면 올라가서 뵙겠습니다."
태악 도인은 고개를 끄덕이고 돌아서서 두 사람을 보았다.
“흥! 각오하고 있어라. 내 비록 나이가 들어 시비에 관여하고픈 마음이 사라졌다만, 시비를 걸어오는 놈들에게조차 쫓겨 다니는 제자들까지 보아줄 마음은 없다."
태악 도인은 운청산에게 건네던 무뚝뚝한 어조에 살기를 보태어 말하고 동부로 들어갔다.
청우자가 울상을 지으며 청학자의 멍한 얼굴을 바라보았다. 청학자는 고개를 저어 정신을 차리고 운청산에게 물었다.
“소사숙! 태악 사숙조께서는 어떤 방식으로 수련을 시키셨소?"
운청산이 웃으며 말했다.
“너무 걱정 마세요. 주로 비무로 실전과 같이 수련을 시키시지만 뼈가 부러지거나 조금 심하게 다쳤다 싶으면 며칠은 말로도 하시지요."
청학자는 말을 잃고 멍하게 운청산을 응시했다. 청우자가 한숨을 내쉬며 대신 말했다.
“그게 지금 걱정 말라는 소립니까, 아니면 놀리시는 겁니까?"
운청산은 무슨 뜻인지 잘 모르겠다는 듯 고개를 갸웃하고 덧붙였다.
“아! 밤에는 세심한 주의가 필요할 겁니다. 저도 횃불을 꺼두었을 때 자주 뼈가 부러졌었습니다."
청학자와 청우자는 서로를 마주 보고 울상을 지었다. 청학자가 말했다.
“허허허! 낮밤이 따로 없구나. 이거 어쩌나? 나도 이젠 늙어서 뼈 한번 부러지면 오래가는데......"
“나라고 다르겠소."
청학자가 무표정한 얼굴로 돌변하여 퉁명스럽게 말했다
“같이 취급하지 말라며?"
“지금 그런 걸 따질 때요? 생각 좀 하시오. 우리 이제 어찌하오?"
다시 한숨을 내쉬고 하늘만 바라보던 청학자가 잠자기 눈을 번득였다.
“사제! 어찌 우리만 강해질 수 있겠는가? 사숙조께서 바라시는 것은 우리가 강해지는 것이 아니라 곤륜이 강해지는 것일세. 사부님은 나이가 드셨으니 빼드리고 나머지는 모두 동참해야 할 일이야. 한 사람 한 사람 일 대 일 지도를 받으면 빨래 강해지겠지. 안 그런가?"
“아하! 사형! 오늘따라 영명해 보이시오. 그리만 한다면 사숙조께 직접 사사하는 영광이 두어 달에 한 번씩밖에 안 돌아오겠지만, 그래도 어쩌겠소? 곤륜 전체가 강해져야 하는 것을. 그리합시다. 일이 그리되도록 적극 추진해 봅시다."
청학자와 청우자가 감격하여 손을 굳게 맞잡았다. 그때 태악 도인이 검과 작은 보따리 하나를 든 채 동부에서 나와 바로 곡의 출입구로 걸어가며 소리쳤다.
“이놈 곤륜의 중추란 놈들이 왜 그렇게 굼떠? 너희들이 강해져야 곤륜도 강해질 터. 당분간은 너희 둘만 집중적으로 가르칠 것이다. 그러니 내 앞에서 미적대는 모습을 보이지 마라."
두 사람은 울상을 지으면서도 수염이 휘날리도록 뛰어갔다.
운청산은 자신을 힐끔 돌아보는 태악 도인에게 공손히 허리를 접었다. 태악 도인이 고개를 끄덕이고 진 안으로 들어갔다. 청학자와 청우자마저 사라지자 운청산은 용호진서를 받쳐 들고 귀부 안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석탁 앞에 차분히 앉아 첫 장을 펼쳤다.
용호파 이십팔대 전승자 귀곡이 선대로부터 물려받은 비전에 미천한 깨달음을 보태어 적다.
운청산은 오래간만에 귀곡산인의 글씨를 대하고서 반가운 미소를 지었다. 그리고 눈길을 아래로 내려 그에게 남기는 글을 읽었다.
청산에게
고약한 놈! 두 갑자가 넘도록 세상을 살아왔다. 불혹에 세상과 사람을 알게 되니 만사에 흔들리지 않고 두려워하지 않게 되었다. 뜻마저 세상과 동떨어져 귀곡을 만들어 들어앉고 보니 크게 넘치지도 부족하지도 않은 평안한 삶을 살 수 있게 되었다. 바라는 것이 있었다면 단 하나, 천명을 알고 싶은 욕구뿐이었다.
그런데 네 녀석이 나타났다. 네 처지가 호기심을 자극하기도 했고, 또 물려받은 것이 있으니 물려주는 것도 좋으리라 생각하여 기꺼이 맡았다. 허나 네 녀석이 심복지환(心腹之患)이 될 것을 당시의 내가 어찌 알았으랴.
흔들림없이 살아왔건만 네 녀석의 집착 어린 성취는 나를 불안하게 만들었다. 수시로 변하는 네 운명은 내 공부가 부족함을 느끼게 만들었다. 그리고 네 성취와 네 운명이 엮여서 만들어갈 불투명한 미래는 정에 흔들려 눈이 흐려진 나를 두려움에 빠뜨렸다.
그래서 인연이 없다는 핑계로 내쳤다. 그것도 모자라 네 숙부들에게 너의 성취를 막으라고 부탁까지 해놓고 내쳤다. 그 결과가 어찌 될지나 자신도 몰라놓고 그렇게 내치고 말았다.
청산!
태악이 네게 이 책을 전했다면 그것은 네가 심신에 크나큰 상처를 입고 돌아왔음에도 불구하고 네 고운 천성을 포기하지 않았다는 뜻일 테니, 결국 내 결정이 네게 상처를 입힌 것이 될 것이다. 미안하구나.
밑에 적지 않은 여백이 남아 있건만 귀곡산인의 글은 적다 만 것처럼 그렇게 끝나 버렸다. 그러나 더 많은 글이 있다 해도 운청산에게는 의미가 없었다. 그의 외눈에서 떨어지는 눈물방울이 눈을 흐리게 만들었고 그의 머리 속에서 스쳐 흘러가는 귀곡산인과의 추억이 생각마저 끊어버린 탓이었다.
그때 커다랗고 흐린 인영 하나가 눈에 고인 물방울 뒤로 나타났다. 운청산은 소매를 들어 눈물을 닦았다. 그 순간 인영이 또렷하고 작게 변해버렸다. 당우리였다.
‘요즘은 늘 우는군요. 운 가가는 바보에 울보예요'
운청산은 입가에 미소를 드리웠다.
‘이 눈물은 슬픔이 아니라 기쁨에서 기인한 것이오. 울어도 창피할 게 없소.'
당우리는 환하게 웃었다.
‘그래요. 좋은 분이네요. 그러고 보니 운 가가는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행복하게 어린 시절을 보냈군요. 재미있고 자상한 반선 할아버지, 겉은 무섭지만 속은 장난꾸러기 같은 태악 할아버지, 엄하지만 따뜻한 귀곡 할아버지. 그렇게 좋은 분들과 함께 살았어요. 청인자 외숙과 호연도 있고.'
‘그렇구려. 나는 남이 부러워할 삶을 살았소. 그런데 그것을 나는 모르고 있었소. 그런데 우리, 정말 많이 아프겠소.'
순간 당우리가 깜짝 놀라서 고개를 숙었다. 화살을 꽃은 그 모습 그대로 밖으로 나왔던 것이었다. 당우리는 급히 화살촉 속으로 가슴 아래를 묻었다.
운청산은 화살촉을 들어 눈앞으로 가져왔다.
‘쳇! 운 가가가 우니까 나도 모르게 나와 버렸잖아요. 이제부터는 기쁘면 웃어요.'
운청산은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하겠소. 그러니 우리도 아프면 아프다고 하시오. 웃는 척하지 말고. 숙부들이 말씀하시기를 당신들이 그대 처지였을 때는 무척 아팠다했소.'
당우리는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운 가가라면 아픔보다 행복이 클 때 울까요, 웃을까요?'
‘그렇소? 정말 그렇소? 그렇다면 나 또한 웃을 것이오.'
‘자! 이제 뒤를 봐요. 이렇게 끝날 글이 아니잖아요? 분명히 따로 말씀을 남기셨을 거예요.'
운청산은 고개를 끄덕이고 책장을 넘겼다. 과연 또 다른 글이 있었다. 비전의 술법이 아닌 운청산에게 남기는 글이었고 귀곡산인 그 자신의 깨달음에 관한 글이었다.
청산!
그렇구나. 나는 세상을 다 아는 척하던 바보였다. 한날한시에 난 쌍둥이조차도 그 운명이 갈라지거늘 한 몸속에 열 사람의 운명을 동시에 걸머진 네 운명을 내가 어찌 쉽게 읽을 수 있었으랴.
그랬구나. 과연 그랬어. 네가 어릴 적에는 너 하나의 운명조차 버거웠으니 내가 읽은 것은 그뿐이었을 것이나, 네 성취가 남달라지니 네 속의 다른 혼령들이 바라는 욕구 또한 그만큼 강해졌으리라. 그래서 네 운명을 능히 읽지 못한 것이리라. 결국 네가 세상에 나가야 했던 것은 너 자신의 운명뿐이 아니라 네가 짊어진 영혼들의 욕망까지도 해소시켜 주어야 하기 때문이리라.
헛배웠도다. 죽으면 끝이라 생각했거늘 인간의 욕구는 생사마저 뛰어넘는구나. 인간을 다 안다 하고 그들을 귀찮게 여겼던 것이 그 얼마나 크나큰 오만이었는고.
청산! 나는 지금 이 책마저 불살라 버리고 싶다. 깨달음을 얻는 것은 술법과는 하등 상관이 없는 일이었다. 아무리 배우고 익혀도 무언가 늘 하나가 부족하다 여겼거늘 그것이 인간을 무시하는 마음에서 온 것임을 이제야 알게 되었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책을 남기는 까닭은 네게 용호파의 진전을 이어 후대로 전할 의무를 지우고자 함이 아니다. 다만 그 하찮은 내용 속에 네 어미를 귀천시킬 방도가 들어 있는 탓이고 네 숙부들과 능히 마음을 나눌 길이 있는 탓일 뿐이다.
이미 기초가 되어 있는 너인지라 비록 책으로 엮어두었어도 배우는 것이 어렵지는 않으리라. 마음을 급히 먹어 전후를 뒤바꾸지 말고 처음부터 차분히 익혀라. 그리고 세상에 이롭게 쓰길 바라며 전할 사람을 만나지 못하면 굳이 전하려 하지 말아라.
귀곡 할아버지가 썼다.
할아버지. 그 말이 어찌 그리 어색하게 들리던지. 허허허!
먹물로 적힌 웃음이 소리가 되어 귓가에 쟁쟁거리는 것만 같았다. 운청산은 웃으며 책을 쓰다듬었다.
“열심히 익히겠습니다. 아시죠? 저 집착하면 성취가 남다르잖아요."
운청산이 각오를 다지듯 화살촉을 쥔 손을 주먹 쥐자 당우리가 손가락 틈새를 비집고 나와 두 주먹을 불끈 쥐어 보였다.
운청산이 그 모습을 보고 다시 웃으며 말했다.
‘열심히 하겠소. 잘하면 우리 그대와도 마음으로 통할 수 있을 거요. 그리고 그대의 상처를 빨리 치유시킬 방도를 찾을 수도 있을 거요'
‘못 찾아도 상관없어요. 난 이렇게 마주보면서 이야기하는 게 더 좋은걸요.'
운청산은 왼손 검지를 뻗어 화살촉을 쓰다듬었다.
운남의 북중부를 관통하는 용천강 상류 밀림 속에 작은 호수가 있다. 사람들이 들락거리지 않는 오지라서 그 존재 자체를 모르건만 그 호수 한가운데 사람이 만든 것이 분명한 건물 한 채가 있었다.
기이하게 생긴 건물이었다. 하얀 대리석으로 지은 거대한 원형의 건물인데, 지붕은 기와도 없이 평평하고 바닥은 물에 닿아 있는 것이 아니라 수십 개의 기둥으로 이루어져 있다. 중앙에는 흑백의 두 기둥이 자리하고 그 주위로 여덟 개의 기둥이 호위하듯 서 있고 전각의 외곽에는 다시 예순 네 개의 기둥이 전체를 떠받치고 있다. 그리고 그 각각의 기둥에는 뜻을 알 수 없는 붉은 글씨가 새겨져 있었다.
그 특이한 건물로 조각배 한 척이 다가가고 있었다. 그 배는 건물의 남쪽에서 출발하여 건물을 한 바퀴 돌고 다시 반원을 그린 후에 북쪽 기둥에 이르러 멈췄다.
그르르르륵!
“도착했습니다."
대리석 문이 열리고 사공이 말하는 순간 두 사람 정도 들어갈 수 있을 것 같은 선실에서 음양팔괘의 문양이 수놓아진 백의도포를 입은 사내가 나섰다. 바로 천기신사 백진궁이었다.
백진궁은 사공에게 고개를 까닥이고 손수 목곽 하나를 든 채 좀을 날려 건물 안으로 들어섰다.
건물 안은 밖에서 보는 것보다 훨씬 기이했다. 끝에서 끝까지의 거리가 족히 오십 장은 되어 보이는, 쪼개어지지 않은 하나의 공간이었다. 하얀 대리석 벽과 천장에는 붉은 글씨들이 가득 차 있었고, 바닥의 정중앙에는 지름이 일 장에 이르는 태극이 그려져 있었으며, 그 주위에는 팔궤가 그리고 팔괘의 외곽에는 예순네 개의 금속관과 예순네 명의 백의도포사내들이 자리해 있었다.
백의도포의 사내들이 일제히 백진궁을 향해 허리를 접었다.
백진궁은 고개를 끄덕이며 중앙의 태극을 밟고 섰다. 그는 제자리에서 아주 느리게 한 바퀴를 휘돌면서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 백의도포 사내들을 일일이 확인했다.
백진궁의 두 눈이 잠란 동안 흔들렸다. 그러나 그는 곧 무정함을 되찾았다.
“오늘도 잘 견뎌주기 바란다."
백의도포사내들이 다시 허리를 접었다. 백진궁은 태극 문양의 중심에 앉아 목곽을 열고 법구들을 꺼내 들었다. 태극관을 쓰고 칠성법검과 제종을 두 손에 나누어 들었다.
“시작하자."
백진궁이 말하자 백의도포사내들 가운데 여덟 사람이 등 뒤의 통풍창을 닫아버렸다.
백진궁은 제종을 흔들면서 태극 문양의 테두리를 밟으며 천천히 걷기 시작했다.
딸랑! 딸랑! 딸랑!
“음백(陰魄)들이여! 음백들이여! 땅으로 돌아가야 마땅할 음백들이여! 그러나 돌아가지 못하는 음백들이여! 깨어나라! 이 종소리 듣거든 깨어나라!"
딸랑! 딸랑! 딸랑!
백진궁은 태극 문양의 테두리 돌기를 멈추고 태극의 중심으로 들어가 가부좌를 틀고 앉았다. 그가 눈을 감는 순간 금속관들이 미약한 소리를 내기 시작했다.
백의도포 사내들이 관 앞에 가부좌를 틀고 앉아 금속관의 위쪽에 위치한 부적을 Ep어낸 후 금속 뚜껑을 열었다.
휘유유유유유!
공기도 통하지 않는 밀폐된 공간이건만 갑자기 싸늘하고 축축한 바람이 떠돌았다. 바람과 바람이 뭉치고 또다시 뭉쳐 하나가 되었다. 그 바람은 곧 선풍이 되어 빠져나갈 곳이라도 찾는 듯 공간 구석구석을 휘돌았다. 바람이 벽에 부딪쳤다가 다시 안으로 물러나고 또다시 벽에 부딪쳤다. 그러나 그때마다 벽과 천장에 가득 찬 붉은 글씨들이 핏줄같이 두드러지며 바람을 퉁겨냈다.
끼이이이이이!
바람이 비명을 질렀다. 사람이 죽으면 혼은 하늘로 백은 땅으로 돌아가야만 안식을 찾을 수 있는데, 땅으로 통하는 길이 모조리 막혀 있으니 백들이 화가 나는 것은 당연한 일이리라.
딸랑! 딸랑! 딸랑!
다시 제종 소리가 들리는 순간 비명을 지르며 발광하던 바람들이 한꺼번에 백진궁을 향해 휘몰아쳐 갔다.
백진궁은 계속해서 종을 흔들며 동시에 머리 위로 칠성법검을 휘돌렸다. 순간 바닥의 태극 문양이 허공으로 치솟아 백진궁의 전신에 막을 씌웠다.
바람이 태극 문양의 막에 부딪쳐 물러났다. 그러나 재차 휘몰아쳐 태극 문양과 함께 백진궁의 주변을 휘돌았다. 그때 외곽에 있던 백의도포 사내들이 엄지손톱으로 중지를 긁어 피를 내고 두 손을 관 위에 올려놓으며 낮은 목소리로 합창했다.
“음백이여! 음백이여! 땅으로 돌아가지 못한 불쌍한 음백이여! 내게로 오라! 내가 그대의 혼을 채워주리니 내게로 오라!"
태극 문양의 막과 함께 휘돌 바람들이 잦아들었다. 바람은 다시 바람과 바람으로 갈라지고 또 갈라져 예순네 개의 바람으로 흩어졌다.
“후우우우우은 후우우우우우!"
관에 올려져 있던 백의도포 사내들의 두 손이 부르르 떨리면서 파랗게 질려가기 시작했다. 손이 오그라들고 핏줄이 툭툭 불거졌다. 곧 목이 창백해지고 그 기운은 얼굴까지 파고들었다. 두 뺨이 홀쭉하게 들어갔다.
입술에서는 피가 흐르고 안구는 금방이라도 튀어나을 것만 같았다.
“음백이여! 내 혼을 공유하리라 음백이여! 너와 함께 죽고 살리라."
백의도포 사내들의 목소리는 살아 있는 인간의 것이 아니었다. 지옥에 떨어진 인간의 고통스런 비명 소리였다.
백진궁이 눈을 번적 치켜뜨고 다시 한 번 칠성법검을 휘둘러 태극의 막을 갈가리 찢어놓았다. 순간 찢어진 태극의 막이 예순네 갈래로 흩어져 날아갔다.
퍼퍼퍼퍼퍼퍽!
백의도포 사내들의 가슴에 섬광이 일었다.
끼이이이이이이!
다시 바람의 비명 소리가 들리고 사내들의 안구가 들어가고 피가 멈추고 안색이 차츰 밝아졌다. 손까지 거의 원상을 회복하는 순간 사내들이 관에서 힘겹게 손을 떼어 뚜껑을 덮고 부적을 붙였다.
“흐어어어어어어!"
사내들의 입에서 동시에 바람 소리가 새어 나오는 순간 모두가 탈진하여 엎어졌다.
백진궁은 조용히 법구를 챙겼다. 그리고 눈을 감고 좌정한 채 기다렸다.
일각이 흘렀다. 부스럭거리는 소리가 나면서 백의도포 사내들이 하나 둘씩 일어섰다. 그들이 모두 일어서는 순간 백진궁도 목곽을 들고 일어섰다.
여덟 사내들이 통풍창을 열었다. 그리고 두 사내가 문을 열었다. 백진궁이 문으로 걸어갔다.
“오늘은 어떻던가?"
문을 열고 시립하여 서 있던 사내가 말했다.
“전과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제 몸이 갈가리 찢겨 나가는 것 같았습니다."
백진궁은 한숨을 내쉬고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가? 하기야 지금까지 그 누구도 성공하지 못했다는 금강차혼강시(金剛借魂彊屍)야. 당연한 일이겠지. 아직도 빼앗고 독점하고 싶은 게야. 혼도 아닌 백이니 그럴 수밖에. 모두에게 전하게. 신주를 단련하는 일에 게을리 하지 말라고. 아직 여덟 번이나 남았으니 강해져야 돼. 견디지 못하면 무의미한 죽음으로 남을 따름이야."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편히 가십시오."
“자네들도 편히 쉬게."
백진궁은 사내를 안쓰럽게 바라보고 대기하고 있던 배 위로 뛰어내렸다.
“어찌 된 일이야?"
웬만해서는 온화함을 잃지 않는 좌상 백문정이 노기를 드러냈다.
“죄송합니다."
백요산이 깊숙이 머리를 숙였다.
백문정이 탁자를 후려치며 낮게 소리쳤다.
“미안하단 소릴 듣자는 게 아니잖아? 왜 그런 일이 벌어졌는지를 묻고 있는 것이야. 곤륜을 어찌해 볼 수가 없어서 홧김에 저지른 일인가?"
“그럴 리가 있겠습니까? 지금 화산을 건드리면 안 된다는 것 정도는 저도 알고 소군도 아십니다. 우연히 길에서 마주쳤습니다. 모른 척 지나치려 했으나 그쪽 어린 놈들이 먼저 알아보고 공을 세우려는 듯 거칠게 몰아대서 어쩔 수 없이 손을 쓰게 되었습니다."
백요산의 대답이 끝나는 순간 백문정은 눈을 감았다.
“허! 이 일을 어찌한다? 어린 놈들 일백으로 끝날 일을 잘못 손대서 화산 전체가 가세하게 되었어. 어찌한다?"
백요산은 책임을 통감한 듯 눈을 감고 고개를 숙인 채 기다렸다. 그러나 백문정은 한참 동안이나 눈을 뜨지 않았다. 침묵을 지키면서 탁자 위에 올려놓은 두 손을 놀릴 뿐이었다.
“하아! 소군께서는?"
백문정이 눈을 감은 채 물었다.
“다시는 다른 사람의 무공에 압도되고 싶지 않다시며 폐관에 들어가셨습니다."
백문정이 눈을 떴다. 기분이 풀린 듯 굳어 있던 낯빛을 풀고 고개를 끄덕였다.
“그나마 다행이로군."
백요산이 조심스럽게 물었다.
“화산의 일은 방도가 있겠습니까?"
백문정이 잠시 손가락으로 탁자를 두드리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애초 계획에는 없었던 일이네만 잘만 하면 전화위복으로 만들 수도 있겠어."
백요산이 의아한 눈빛을 드러내자 백문정이 미소를 지으며 말을 이었다.
“이번이 사천에서의 마지막 싸움이 될 것일세. 가장 중요한 것은 시간. 우린 시간이 필요해. 아무래도 철골강시들 가지고는 불안하거든. 이번 돌발 사태를 잘 마무리한다면 진궁에게 충분한 시간을 벌어줄 수 있을 거야. 게 누구 있느냐?"
중년 백의인 하나가 방문을 열고 고개를 숙였다.
“보존신문주를 불러들여라."
중년 백의인이 고해를 숙이고 다시 방문을 닫았다.
“명경에게 일을 시키시렵니까? 제가 한 일, 수습도 제가 하게 해주십시오."
백요산이 말하자 백문정은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자네 아이들은 섬서 쪽 일을 하기에는 적합하지가 않아. 그리고 따지고 보면 자네 잘못도 아니야. 소군께서 일을 벌이신 것이지. 자네는 그만 잊게. 아! 잊기 전에 곤륜 쪽 일을 말해 주고 잊게나. 굉장한 고수가 있었다고?"
백요산은 곤륜에서의 일을 차분하게 설명하기 시작했다.
운녹산은 뜻을 알 수 없는 묘한 표정을 단속하고 얼굴 전체에 힘을 주어 굳혔다. 그리고 문을 열고 방으로 들어섰다.
“제가 모셔놓고 오히려 늦었습니다."
운녹산은 자리에서 일어나 그를 맞는 사천무림련의 수뇌들에게 포권을 취해 보이고 손을 뻗어 앉기를 권했다. 그리고 그도 앉아 현상자와 나머지 사람들을 훑어본 후에 들고 있던 전서들을 자신의 앞에 내려놓았다.
모든 이들의 시선이 전서들로 향했다.
“화산에서 급전이 왔습니다. 우리 쪽에 합류하기로 되어 있던 매화검수 일백이 오는 도중에 괴적을 만나 몰살당했다는 내용입니다."
운녹산의 말이 끝나는 즉시 도호와 불호 그리고 탄식이 동시에 흘리나왔다. 잠시 후 현상자가 물었다.
“괴적이라? 잡았다 하오?"
운녹산은 천천히 고개를 저었다.
“한 사람도 살아남지 못하여 화산에서도 뒤늦게 안 모양입니다. 조사 결과, 당시에 삼시책의 백의인들이 근처를 지났다 하니 누군지는 대충 짐작이 됩니다만......"
공명 선사가 고해를 끄덕이며 말했다.
“당금 무림에서 화산을, 그것도 섬서 땅 안에서 건드릴 담량을 지린 자들이 누가 또 있겠소? 헌데 빈승은 의아함을 금치 못하겠소이다. 저들이 도대체 무슨 이유로 화산을 건드린 것인지?"
신수 사태가 말했다.
“끼어들지 말라는 경고요, 본보기가 아니겠습니까?"
현상자가 고개를 저었다.
“그리 생각하기에는 무리가 있소이다. 매화검수 일백을 죽인다고 해서 화산이 겁을 먹고 움츠려들겠소? 타초경사(打草驚蛇)라! 홍라교도 물러간 마당이니, 이번 일로 화산은 그동안의 미온적인 태도를 때리고 적극적으로 달려들 것이오."
당유연이 말했다.
“저들이 우리의 등 뒤에 나타난 것과 진배없는 일이오이다. 결국 수세에 몰려 있는 동안에는 섬서 쪽도 방비를 해야 된다는 소리겠지요. 이것을 노린 것이 아니겠습니까?"
운녹산이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후방까지 방어선을 넓히게 만들어 세를 분산시키려는 의도라 이 말씀이시지요? 그러나 검각산은 머릿수로 방비할 곳이 아니오이다. 강자 몇이 길을 막으면 그것으로 충분하지요."
모두가 고개를 끄덕이는 순간 운녹산이 전서의 첫 장을 뒤로 옮겨놓으며 말했다.
“그들의 의도가 무엇이든 간에, 화산의 슬픔과 분노가 묘하게도 우리에게는 힘이 될 것 같습니다. 아직 공식적인 의사를 밝히지는 않았습니다만 화산이 내릴 결론이야 뻔한 것이고, 종남 역시 가만히 있지는 못할 것입니다. 또 그동안 결정을 보류해 오던 무당도 화산의 소식을 들은 듯 곧 합류하겠다고 연락해 왔습니다. 이제 사천무림련은 무림련으로 탈바꿈하게 되겠지요."
남의 불행을 바탕으로 힘을 얻는 것인지라 모두가 표정을 드러내지 않고 고개만 끄덕였다.
현상자가 분위기를 바꾸듯 물었다.
“검단협곡 쪽에서는 별다른 연락이 없소? 뒤에서 그 난리를 피웠으니 앞에서도 무슨 일을 벌일 만한데?"
운녹산은 무당에서 온 전서를 뒤로 넘기며 마지막 전서를 힐끔 보고는 고개를 저었다.
“도발이 없는 것은 아니나 말 그대로 위협일 뿐, 대대적인 공세를 취하지는 않는다 합니다."
“어허! 이상한 일이로고. 시간을 끌면 끌수록 불리해지는 쪽은 저들이건만 움직이지 않는다니? 당최 의도를 헤아려 볼 수가 없구려."
현상자가 고개를 젓자 운녹산이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역사 이래로 사천이 전란에 휩싸인 적은 없습니다. 바로 이 검각산이 유일한 통로인 탓이지요. 저들도 그것을 아는 것입니다. 답답하지만 방도가 없는 게지요. 오면서 보셨다시피 검단협곡을 뚫는다고 해서 일이 쉬워지는 건 아니질 않습니까? 금우고도, 끊어질 듯 이어지는 잔도가 삼백리에 달하니 막는 쪽은 수월해도 공세를 펼쳐야 하는 입장에서는 엄두를 낼 수 없는 게지요. 결국 그들과의 결전은 우리의 전열이 완비되는 때 검단협곡과 면양현 사이의 그 고원에서 이루어질 것입니다."
모두가 동의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당유연이 물었다.
“그런데 저쪽 동향에 대해서는 별다른 소식이 없소이까?"
운녹산은 입맛을 다시며 고개를 저었다.
“간자를 넣어보려고 몇 차례나 시도해 보았으나 모두 실패했습니다. 상주하는 사람도 많고 오가는 사람이 많으니 어떻게든 접근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만, 생각보다 저들의 조직이 단단한 모양입니다. 조별로 움직이고 구역별로 접근할 수 있는 사람들을 한정하고 있답니다."
“음! 그리하면 생소한 사람이 나타나는 즉시 알아차릴 수 있겠구려. 결국 멀리서 지켜보는 수밖에 없겠소이다?"
현상자의 말에 운녹산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습니다. 결국 면양현과 청성에서 움직이는 물자와 사람의 이동정도밖에는 파악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방법을 강구해 보려고는 합니다만 우리 쪽에 그 방면으로 능한 사람이 없습니다. 드러나지 않은 속가제자들의 지칠적인 참여에 의지할 뿐이지요."
백라천궁이 갑자기 등장하기 전까지 강호는 구파와 칠가의 세상이었다. 각 파의 성쇠에 따라 세력권이 늘기도 하고 줄기도 할 뿐, 싸움으로 영역을 늘리는 세상은 아니었다. 간자들을 키우고 운용할 필요성을 느끼는 이는 아무도 없었다.
운가가 해밀각을 운영하듯 각 파마다 정보를 다루는 부처가 없는 것은 아니지만, 그러한 조직에서 분석하는 정보들은 표국이나 각 파의 속가들로부터 들어오는 것이지 따로 간자들을 운용하여 얻는 것은 아니었다.
이제는 간자의 필요성을 느끼게 되었지만, 그 일을 수행할 능력자를 양성하는 일이 하루아침에 가능한 것이 아니어서 모두들 아쉬워할 따름이었다.
현상자가 말했다.
“이번 일이 끝나더라도 사천무림련은 존속시켜야 할 것 같소. 과거처럼 이름만의 조직이 아니라 사파가 손해를 감수하더라도 유사시를 대비하여 만반의 준비를 해둡시다."
모두가 통감한 듯 이견을 말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면양현과 검각을 잇는 유일한 통로, 검단협곡(劍斷峽谷).
검각산의 초입에 해당하는 검단협곡은 갑작스럽다 할 정도로 험한 곳이다. 천북고원이 시작되는 면양현에서 백여 리를 더 올라가면 이 검단협곡이 나오는데, 좌우 양안의 절애의 높이가 팔십여 장에 이르고 절애들 사이의 폭이 위쪽은 이십사오 장, 아래쪽은 칠 장에 불과했다.
섬서로 나가거나 반대로 사천으로 들어오는 사람이면 누구나 이 검단협곡을 지나야 하는데, 처음 오가는 사람이라면 답답할 정도로 좁은 길과 좌우가 잘려 나간 좁은 하늘 때문에 이십여 리 협곡를 지나는 동안 시종일관 불안해할 수밖에 없다.
자주 다니는 사람들 또한 불안해하기는 마찬가지였다. 낙석이라도 구를 때면 심장이 덜컥 내려앉을 수밖에 없어서 아무리 자주 오간다 해도 익숙해지기는 힘든 지형이었다.
사천에서 섬서로 통하는 최초의 통로인 검단협곡이지만 지금껏 전략적인 차원에서 그리 중요한 곳으로 취급받지 못했다. 그도 그럴 것이 섬서로부터의 침략을 막아야 했던 사천 사람들에게 검단협곡은 최후방에 속하는 곳이었다. 그래서 지금껏 검단협곡에 군인들이나 무인들이 상주했던 일은 단 한 번도 없었다.
그런데 얼마 전부 그 상황이 바뀌었다. 북쪽 섬서로부터의 침략이 아니라 사친에서의 복침을 막아야 하는 사천무림련으로서는 검단협곡이야말로 반드시 지켜내야만 하는 최전방이 되어버린 것이었다.
휘휴우우우우우!
천북에서 휘몰아치는 차가운 북풍이 검단협곡을 지나면서 괴성을 내질렸다. 딴 그래도 숲은 없고 바위만 가득하여 황량한 검단협곡인데 붉은 노을이 지고 바람 소리까지 가세하니 가슴속에 성에가 끼는 것 같았다.
“추워."
나라연은 헐렁하게 걸치고 있던 승포를 목 위까지 여몄다. 솜을 얇게 저미듯 넣어 누빈 승포라 제법 따뜻했다.
“풋!"
나라연은 왼 주먹을 입으로 가져가 새어 나오는 웃음을 막았다. 눈으로 보고 있는 곳은 검단협곡 아래쪽에 위치한 텅 빈 고원이었지만 머리 속에 떠오른 영상은 승포를 두고 벌였던 산수 사태와의 실랑이였다.
오늘 아침, 보름을 천북운가에서 지내고 다시 검단협곡으로 나오려는데 신수 사태가 추울 거라며 자신의 승포를 벗어 주었다. 나라연으로서는 얼굴을 찡그리지 않을 수 없었다. 아무리 옷차림에 별 신경을 쓰지 않는 그녀라고 경장 위에 승포를 입기는 싫었던 것이었다.
그냥 가겠다, 가져가라는 실랑이를 벌이던 중에 신수 사태가 말했다. 넌 아무거나 입어도 예쁘다고. 그 생각을 떠올리니 웃음이 나오지 않을 수 없었다.
나라연은 쌍연창을 오른팔 겨드랑이에 끼고 두 손을 넓은 승포의 소맷자락 안으로 교차하여 넣었다. 따뜻했다. 몸만 따뜻한 것이 아니라 가슴까지 포근한 느낌이었다.
나라연은 입가에 부드러운 미소를 머금고 고원을 주시했다. 그때 오른쪽 뒤편에서 부담스러운 시선이 느껴졌다. 그녀는 그것이 누구의 눈길인지 알고 있었다. 일 년 전부터 늘 그녀의 뒤를 따라다니던 두 사람의 시선, 당명인이 팔을 잃은 후 하나가 되어버린 시선이었다.
나라연은 돌아서지 않았다. 눈이 마주치면 어찌할 바를 모르는 사람이었다. 자신이 조금만 불안해해도 안절부절 못하는 사람이었다. 그러나 마음을 줄 수 없는 사람이었다.
‘미안해요. 내 마음속에는 이미 한 사람이 들어와 있어요. 당신에게 허락할 자리가 없군요.'
차라리 고백을 해주었으면 좋으리라. 딱 잘라 거절할 수 있었을 테니까. 그러나 그는 늘 다가오지 못하고 주변만 배회했다. 나라연이 그를 위해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오해를 사지 않도록 눈길을 주지 않는 것뿐이었다.
휘이이이이잉!
바람이 더 차가워졌다.
‘곤륜은 여기보다 더 춥겠지. 괜찮을까?'
종길에게 업혀서 불일장을 떠나던 그 모습을 잊을 수가 없었다. 완전히 망가져 놓고도 부드럽게 미소 짓던 그 얼굴이 너무나 슬퍼 보였다.
나라연은 입가에 씁쓸한 미소를 드리웠다.
‘생각해 보니 운강인 공자와 나는 같은 처지로구나. 딴 사람을 마음속에 품고 있는 사람을 사랑하고 있어. 우리야, 난 어쩌면 좋으니?'
나라연은 문득 언젠가 객잔에 머물다가 우연히 듣고 웃었던 이야기를 떠올렸다. 한 남자가 친구인 듯한 사람에게 털어놓은 짝사랑에 대한 고민이었다.
그 남자는 반취한 상태에서 말했었다. 사랑하는 만큼 겁쟁이가 된다고. 혹시 싫어할까, 혹시 거절할까 싶어 차마 말을 하지 못하겠다고, 거절당하면 죽고 싶을 거라고. 그때 친구가 한 말은 간단했다. 사랑은 원래 목숨 걸고 하는 거라고. 그러니 고백이나 하고 죽으라고.
‘우리야, 너 왜 죽었니? 지금 내가 사랑타령이나 할 때니? 왜 죽어서 날 이렇게 힘들게 하는 거야?'
당우리가 눈앞에서 방긋 웃는 것만 같았다. 나라연은 눈을 감고 고개를 저었다. 그때 뒤에서 희미한 발자국 소리가 들렸다가 점점 멀어져 갔다.
발자국 소리가 완전히 사라져 버리자 그때서야 나라연은 돌아서서 점이 되어버린 운강인을 돌아보았다.
‘우리가 살아 있었을 때 내게 말했다면 난 아마 흔들렸을 거에요. 하지만 지금은 어쩔 수 없군요. 몸은 도망쳐도 마음은 벗어날 수가 없으니 어쩌겠어요? 마음 먼저 떠날 수 있어야 비로소 완전히 떠날 수 있겠지요. 언제가 될지 모르겠군요. 운 소협! 당신에겐 정말 미안해요.'
나라연은 다시 돌아서서 노을 지는 하늘을 멍하게 바라보았다.
당명인은 목옥을 나와 벼랑으로 다가섰다. 왼쪽으로는 협곡의 한쪽을 이루는 벼랑이었고 앞으로는 고원이 내려다보이는 벼랑인데다가 풀 한 포기 없이 돌과 바위로만 이루어져 있어 삭막하기 그지없는 풍광이었다. 거기에 살을 에는 듯한 바람까지 불었다.
“춥군."
당명인은 멀리 협곡 아래쪽을 바라보며 장포의 옷깃을 여몄다. 그는 오른손에 와 닿는 장삼의 두께를 느끼며 미소를 지었다.
발목까지 오는 긴 장삼은 사천 사람들이 즐겨 입는 얇은 장삼이 아니었다. 사천의 겨울은 그리 춥지도 않고 길지도 않기 때문에 사천 사람들은 대개 무릎까지 오는 단삼을 입는 것이 보통이고 그것이 아니라면 홑겹의 얇은 장삼을 입었다. 더구나 당명인 같은 무인에게 있어서 장삼이란 남과 달라 보이지 않도록 입는 장식품이나 마찬가지였다.
그런데 지금 그는 필요에 의해서 면을 몇 겹 겹쳐 누빈 두터운 장포를 입고 있었다. 살을 에는 듯한 고원의 찬바람에 익숙하지 않은 데다가 오랫동안 움직이지 않고 상주하는 탓이었다. 그래서 지금 당명인과 함께 검단협공의 절애 위에서 상주하고 있는 오백여 무인들은 하나같이 두꺼운 장포로 몸을 감싸고 오리처럼 뒤뚱뒤뚱 걸어다니고 있었다.
당명인은 자신의 맵시가 엉망일 것이라는 생각과 함께 a고까지 여몄던 장포를 느슨하게 만들었다. 그리고 왼쪽으로 고개만 숙이면 협곡 바닥을 볼 수 있는 단애의 낭떠러지 바로 앞 바위 위에 걸터앉았다.
“저기도 이곳처럼 추울까?"
삼십여 리 앞쪽 공지에 무수한 막사들이 쳐져 있었다. 그곳이 바로 백라천궁의 주둔지였다.
완만한 경사의 고원 지대를 사이에 둔 삼십여 리의 거리, 뛰어 내려가면 일각이면 충분한 거리였고 올라온다 해도 반 시진이 안 걸릴 거리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토록 치열하게 싸웠던 양측은 사 개월 동안이나 큰 싸움 없이 대치 상태를 유지하고 있었다.
사천무림련은 아직 십 할 승리를 자신할 만한 전열을 구축하지 못했고, 상대는 지리적으로 너무나 불리하여 섣불리 움직이지 못하는 까닭이었다.
“하! 이 싸움을 도대체 언제 끝낼 수 있을까?"
당명인은 상대의 진영을 바라보며 천천히 고개를 저었다. 흰옷만 보아도 살심이 치솟는 그였지만, 한편으로는 더 이상 당가 사람들의 죽음을 보고 싶지 않았다.
‘이제는 보지 않으리라. 누군가 죽어야 한다면 내가 먼저 죽으리라. 이 의수를 달 때부터 내 운명은 이미 그렇게 정해져 있는 것이다'
당명인은 오른손으로 차가운 철의수를 어루만졌다.
“여기 있었나?"
당명인은 입가에 씁쓸한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돌렸다.
“운 형은 또 왜 나와?"
운강인도 희미한 미소를 지으며 당명인의 맞은편 바위 위에 털씩 주저앉았다. 두 사람은 서로를 응시하며 다시 한 번 미소를 교환했다.
서로를 연적이라 생각하며 은근히 무시하고 미워하던 두 사람이었다. 그런데 언제부턴가 두 사람은 서로의 동의도 구하지 않고 둘 사이의 차가운 벽을 동시에 허물어 버렸다.
운강인이 당명인의 얼굴을 한참이나 바라보다가 피식 웃음을 흘렸다.
“왜 그러나?"
당명인이 묻자 운강인은 오른손 검지와 중지를 들어 보이며 말했다.
“아는가? 나는 수십 번 아니, 수백 수천 번 이 두 손가락으로 나 소저를 바라보는 그 두 눈을 찔러 버리고 싶었어."
“흠! 자네는 손가락이었나? 손가락과 암기, 어느 쪽이 더 아플까?"
운강인은 내용과는 다른, 너무나 담담한 당명인의 반응에 놀라 눈을 치떴다가 결국 빙긋 웃었다.
‘저 눈이었다. 저 친구에게 다가갈 수밖에 없었던 이유. 솔직한 눈, 슬플 때 참지 않고 울 수 있는 눈. 연적에 대한 증오심마저 죽여 버리는, 속마음을 드러내 놓으며 같은 종류의 인간이라고 말하는 눈. 언제부터였을까? 그래, 금사강의 일이 끝난 후부터였지. 어떨까? 지금의 내 눈도 저러할까?'
그때 당명인이 피식 웃으며 말했다.
“자네, 그런 눈으로 보지 말게. 나도 가슴이 두근거리니 누가 보면 오해하기 딱 좋겠어."
운강인은 기가 막힌다는 표정을 지었다가 결국 실소했다.
“나도 자네 눈이 싫어. 꼭 내 눈을 보는 것 같아서."
“그렇지? 자네도 그리 느끼고 있었어. 근데 이해할 수가 없군. 자네는 나와 달라. 무엇을 잃었기에 그런 눈을 하고 있는가?"
“그 눈의 의미가 결국 상실이었군."
운강인은 잠시 말을 끊었다가 다시 당명인을 바라보며 말했다.
“난 자네처럼 눈에 띄게 잃은 것은 없어. 잃은 것이 있다면 사람을 아니, 한 사람을 향한 마음을 잃었지. 믿고 따르고 의지하던, 그래서 그와 같이 되고자 했던 내 마음. 그것을 잃고 나니 어디로 가야 할지를 모르겠군. 한낱 투정일 수도 있어. 그러나 그 사람이 흔하다고 한 것이 내게는 생명과 바꾸어도 아깝지 않을 귀하고 유일한 것이니 어쩔 수 없구만. 생각이 다르면 가는 길도 달라야 하는 법 아닌가. 난 그렇다 치고 자네에게 그 팔이 그렇게 큰 상처가 되는가?"
당명인은 씁쓸하게 웃으며 철의수를 드러내 보였다.
“무인으로 살아왔네. 죽고 다치는 것 정도는 각오하고 있었지. 그리고 이게 보이는 것처럼 불편하지는 않아. 게다가 나름의 이점도 있지. 자네야 부정하겠지만 지금 나와 싸우면 죽는 이는 자네야. 그뿐이 아니지. 이안에는 당가의 삼대절독이 들어 있네. 많지는 않지만 그것만으로도 삼사백여 명은 능히 죽일 수 있을 게야. 결국 이 팔이 내게 주는 것은 강함과 고민 그리고 약간의 슬픔뿐이야."
“고민과 슬픔?"
“강해진다는 것에 대한 고민이지. 독이든, 기계의 힘이든, 무공이든 결국은 사람을 죽이기 위한 수단으로 사용되는건 똑같지 않나. 노력하지 않았는데도 난 더 많은 사람을 죽일 수 있게 되었어. 그게 과연 강해진 것일까? 해서 내가 내린 결론은 힘을 가지고도 사용하지 않는 사람이 진정한 강자라는 것이야. 그리고 슬픔은...... 아, 이거 쑥스럽구먼. 그게 말이야, 사랑하는 사람을 아는 순간에도 이 팔만큼은 들어 올리면 안된다는 생각을 하게 되더군. 한참 끓어오르는 순간에 찬물을 끼얹는 결과가 생길지 모르지 않는가? 그리고 오른쪽 손가락들이 시리다고 아우성쳐도 마주 비빌 손가락들이 없다는 정도겠지."
당명인은 장난스럽게 말했지만 그의 눈을 바라보고 잇던 운강인으로서는 웃어줄 수가 없었다.
맞는 말이었다. 지금껏 무공이 아닌 독과 암기로 세가를 이루었다고 은근히 무시하고 경원했지만, 경지에 이르지 못한 그로서는 이십 년이 넘도록 닦은 무공 역시 효율적인 살인술일 뿐이었다. 결과는 같은 것. 결국 당가를 경원한 것은 두려움 때문이리라. 만약 당가가 세상의 비난을 무시하고 행동했다면 천하를 지배했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그런 면에서 보면 당명인의 말처럼 당가는 강자라 할 수 있었다.
하지만 강함에 대한 결론보다도 더 크게 운강인의 마음을 울린 것은 슬픔에 관한 것이었다. 넋을 잃은 채 나라연을 바라보던 당명인의 눈빛이 언제부턴가 변해 있었다. 눈길이 머무는 것은 마찬가지였지만 이내 딴 곳을 바라보고 있었다.
“자격지심 아닌가? 나 소저 또한 무인일세. 그런 것에 그런 것에 연연하지 않을
것이야."
운강인은 연적에게 쓸데없는 말을 하는 것이라 생각하면서도 참지 못하고 말을 꺼내고 말았다.
당명인이 빙긋 웃었다.
“어? 마음에도 없는 소리 하지 말게나. 나 아직 포기한 거 아니야, 내 운명이 이길지 내가 이길지 몰라서 잠시 관망 중일 따름이지."
운강인은 얼굴을 찡그리며 웃었다.
“그럼 자네가 잃은 것은 대체 무엇인가? 지인의 죽음인가?"
당명인은 고개를 끄덕이다가 다시 저었다.
“잘 모르겠어. 동생과 할머니의 죽음이 내게 큰 상처가 된 것은 사실이네. 그런데 그 죽음의 원인을 따져 보니 결국 아버지에게로 돌아가더군. 이 싸움이 순수하게 대의나 협의를 위한 것이면 괜찮을 텐데 그것이 아닌 것을 알고 있으니 문제가 되는군. 난 이미 무인의 마음을 잃었네. 백의인들을 만나게 되면 싸우게 될 테지만 내가 들게 되는 칼은 복수심일 뿐, 협의심은 아닐 거야. 강자는 힘이 있어도 사용하지 않는 자라고 결론을 내려놓았으니 손에 피를 묻히면 묻힐수록 괴로움만 늘어갈 거야."
“자네 다 켰군. 난 덩치만 커다란 아이나 마찬가진데 자넨 어른의 고민을 하고 있어."
두 사람은 서로를 바라보며 웃다가 동시에 고개를 저으며 외면했다. 그리고 잠시 침묵이 흘렸다.
휘휴우우우우!
말소리가 끊기니 바람 소리가 다시 기승을 부렸다. 당명인은 자신도 모르게 옷깃을 여몄다.
바로 그 순간 바람 소리를 찢으며 그보다 더 예리하고 시끄러운 소리가 울려 퍼졌다.
휘이이이이이이잉!
명적 소리였다.
당명인은 가만히 소리에 귀를 기울이고 있다가 네 번의 숨을 더 토해내고 운간인을 응시했다.
“한 번으로 끝이로군. 소규모라! 결국 오늘도 장난이 일 따름이야."
명적 소리였다.
당명인은 가만히 소리에 귀를 기울이고 있다가 네 번의 숨을 더 토해내고 운강인을 웅시했다.
“한 번으로 끝이로군. 소규모라! 결국 오늘도 장난일 따름이야."
운강인이 눈살을 찌푸리며 물었다.
“며칠 만이지?"
“닷새."
“이번엔 좀 오래 쉬었군. 가볼까? 그래도 돌 몇 개는 굴려줘야지 저놈들도 움직인 보람을 느끼지 않겠나?"
당명인은 먼저 움직이는 운강인의 뒤를 따라 앞쪽으로 향했다. 두 사람이 검단협곡의 초입이 내려다보이는 곳에 이른 순간 그들 뒤로 많은 사람들이 움직였다. 그들뿐만이 아니었다. 건너편 절애 위에서도 사람들이 부산스럽게 움직이고 있었다. 그러나 그 누구도 초초해하지는 않는 것 같았다.
운강인은 절애 끝에 놓인 둥근 바위 위에 발을 올려놓으며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뭘 그리 두리번거리나? 나 소저, 자네 본가로 갔잖아."
당명인이 또 다른 바위 위에 발을 올리며 웃었다.
운강인은 실소하며 말했다.
“오늘 왔네."
“그래? 어쩐지 둘러보더라."
두 사람은 웃으며 동시에 절애 아래쪽으로 고개를 내밀었다. 이마에 차가고 예리한 한기가 감돌았다. 당명인이 철수를 내뻗고 운강인이 도를 휘두르는 순간 아래쪽에서 날아온 쇠뇌들이 힘없이 떨어졌다. 그때 수백의 백의인들이 협곡의 초입에 이르러 다시 쇠뇌를 쏘았다.
밧줄을 단 쇠뇌들이 거의 동시에 절애의 중간쯤에 꽂혔다. 그 순간 백의인들이 밧줄을 잡고 허공으로 치솟았다.
“굴려."
당명인과 운강인은 동시에 발에 힘을 주어 돌을 굴렸다. 주변 사람들도 돌을 굴렸다.
두 사람은 다시 고개를 숙여 절애 아래쪽을 내려다보았다.
“바보 아냐? 도대체 어떤 놈이 수하들에게 저 짓을 하라고 시키는 걸까?"
당명 인은 동료들을 업고 물러서는 백의인들을 바라보며 고개를 저었다.
“이곳에 돌이 지천이라는 것을 모르나 보지. 아마 돌을 소모시키려는 걸 거야. 이럴 때 취화발향전이 있었으면 좋았을 텐데......"
운강인이 아쉬워하자 당명인이 말했다.
“그게 지난번 점창산에서 다 써버려서 말이아. 그걸 만들기가 쉽지 않아. 재료 구하기도 어렵지만 제조 설비도 없거든."
“아쉽군."
운강인은 입맛을 다시다가 스스로도 모르게 주위로 시선을 돌렸다.
당명인이 웃으며 말했다.
“차라리 고백해 버리지 그러나?"
운강인은 씁쓸한 미소를 머금으며 고개를 저었다.
“지금 같은 때에 고백 같은 걸 한다면 내심 한심한 놈이라고 비웃을걸."
“쳇! 그리되길 원한 건데, 아쉽군. 연적 하나 그냥 보내 버릴 수 있었는데."
당명인이 장난스럽게 말했지만 운강인은 씁쓸함을 지우지 않고 말했다.
“자네 혹시 그녀와 얼굴을 마주한 적이 있는가?"
“단둘이서 말인가? 없어. 당최 떨려서. 자신도 없고."
“난 있네. 슬펐어. 분명히 내 얼굴을 보는 것 같으면서도 더 먼 곳을 바라보는 것 같은 느낌이었어. 나를 앞에 두고 딴 사람을 생각하는 듯한 그 눈빛만 생각하면 서러워서 눈물이 날 것 같았네."
운강인은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당명인이 위로하듯 말했다.
“다른 사람을 생각한다? 아닐걸. 관음사의 비구니들이 몇이나 남았는가? 겨우 열넷이야. 그런 상황에서 남녀 간의 감정을 품는다는 것은 사치가 아닐까? 나와 같은 처지. 그래서 나 또한 그녀를 향한 마음을 잠시 접어둘 수 있는 것이네."
“큭! 이번에는 자네가 쓸데없는 위로를 하는군. 나 역시 포기한 거 아니야. 때를 기다리는 거지."
당명인은 웃으며 운강인의 어깨를 두드렸다.
“흐흐흐. 나도 자네를 위로한 게 아니야. 나 자신을 위로한 것이지. 자네 말대로라면 내 입에서 곡소리가 나을 테니까. 어쨌든 언젠가는 반드시 내가 자네의 뒤통수를 칠거야. 각오하고 있어."
“내가 하고 싶은 말이야."
두 사람은 마주 보고 웃었다. 그때 산 밑에서 또다시 명적 하나가 울면서 날아올랐다. 그것을 신호로 절애 끝에 줄지어 서 있던 사람들이 하나둘씩 물러서기 시작했다.
당명인은 이제는 어두워서 보이지 않는 상대 진영을 바라보았다.
‘오지 마라. 죽이고 싶지 않고 죽고 싶지 않다. 나도 아프게, 죽도록 사랑해 보고 싶다. 제발 오지 마라.'
“뭐 하나? 그만 가자고."
운강인의 목소리를 듣는 순간 당명인은 굳어진 얼굴을 풀고 돌아서서 웃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