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72화 (72/79)

 종길은 곤륜으로 이르는 끝도 없는 계단 앞에 이두마차를 세우고 한숨을 내쉬었다. 하얀 입김이 연초 연기처럼 길게 뻗어 나갔다가 잠깐 동안 눈앞을 흐린 후에 사라졌다.

  사천과 곤륜이 아무리 멀리 떨어져 있다 해도 운청산이 온전했더라면 보름도 못 되어 도착했을 곳이었다. 종길 혼자 왔더라도 한 달 정도면 충 분히 이르렀을 곳이었다. 그런데 장장 세 달이나 걸려서야 도착할 수 있었다. 

  운청산 자신도 예상하지 못한 후유증 때문이었다. 며칠이면 회복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건만 상세는 날로 악화되어만 갔다. 내상을 제대로 치료하지 않고 오히려 무리하게 진원진기를 끌어와 임시변통한 것도 모자라서, 다시 무리하게 몸을 굴려 결국에는 전신의 기가 바닥을 드러낸 것이었다. 

  이유야 어찌 되었건 간에 종길은 나날이 쇠약해져만 가는 운청산을 돌보면서 때로는 쉬고 의원 찾기를 반복하다가 겨우 곤륜에 이른 것이었다. 

  종길은 살을 저미는 차가운 한기에 몸을 부르르 떨고서 장포를 목 위쪽까지 여미고 바닥에 내려섰다.

  뽀드득!

  얇게 깔린 눈이 비명을 질렀다.

  종길은 힘겹게 사지 관절을 비틀었다. 잔뜩 얼어 있던 뼈 마디마디가 부러질 듯 비명을 질렀다. 

  “에고고고고! 나도 오래 살기는 글렀구나. 겨우 이틀 마차를 몰았다고 이 지경이 되다니. 에효! 어쨌든 이제 좀 살 것 같네."

  식었던 말초에 온기가 감돌자 종길은 다시 한 번 한숨을 내쉬었다. 그리고 곤륜산을 향해 뻗은 돌계단을 올려다보았다. 

  “크! 여길 올라가야 한단 말이야? 청산을 업고? 죽었다."

  종길은 고개를 내젓고 나서 오른쪽 양털 장갑을 벗고 그 손을 품속에 넣었다가 뺐다. 그의 손에 들린 것은 차갑게 식은 장족 빵 한 덩어리였다. 

  종길은 빵을 입으로 가져갔다. 품속에 넣어둔 탓에 씹을 만은 했다. 그는 걸신들린 듯 빵을 먹어치우고서 마차의 문을 노려보았다. 갑자기 짜증이 치밀어 올랐다. 운청산의 몰골을 보기가 싫은 탓이었다.

  “하아!"

  종길은 한숨을 내쉬고 결국 마차의 문을 열었다. 운청산이 마차의 구석에 기대어 눈을 감은 채 오들오들 떨고 있었다. 이불로도 쓴다는 두터운 장포를 입혔고 그 위로 양털 이불까지 덮어주었건만 추위를 견디기가 힘든 모양이었다. 

 종길은 운청산의 움푹 들어간 두 볼과 파랗게 질린 눈두덩이 그리고 시커멓게 타서 보풀이 일어나는 입술을 외면하고 마차 안으로 들어갔다. 

  “임마! 일어나. 다 왔다."

  어떻게든 쾌활한 목소리를 내보려고 노력했건만 목소리 끝이 가늘게 떨렸다. 

  운청산이 힘겸게 눈을 떴다. 종길은 어쩔 수 없이 그 눈을 볼 수밖에 없었다. 종길은 아무런 의욕도 느낄 수 없는 그 눈을 바라보며 또 하나의 눈빛을 떠올렸다. 죽기 며칠 전에 보았던 그의 어머니의 눈빛이었다. 

  운청산이 입가에 힘겨운 미소를 담고 힘없이 말했다. 

  “다 왔어? 그래. 다 왔구나."

  종길은 일부러 운청산의 안대에 눈길을 주었다. 사천을 떠날 때보다 나아진 것이 있다면 옥구슬을 박아 넣고 안대를 씌운 왼쪽 눈밖에 없는 탓이었다. 그곳을 볼 때만 억지로라도 미소를 지을 수 있는 탓이었다. 

  종길은 차분히 양털 이불을 걷고 앙상한 운청산의 육신을 끌어안았다. 그리고 마차 밖으로 나와 그를 업은 후에 다시 양털 이불을 운청산의 머리 위까지 뒤집어씌웠다. 

  종길은 마차 안에서 다시 긴 끈을 꺼내 운청산의 엉덩이와 자신의 허리를 동시에 감고 마침내 참았던 눈물을 흘려보냈다. 두꺼운 장포를 입혔음에도 불구하고 운청산의 배가 그의 등을 찌르고 있었다. 한기를 참지 못하는 그의 떨림이 그대로 느껴졌다. 양털 이불까지 덮어씌웠음에도 공기처럼 가벼웠다. 

  종길은 손을 들어 눈물을 훔치고 첫 계단을 밟았다. 그리고 한 시간 반이 지났다. 

  “헉 ! 헉 ! 헉 !"

  종길은 토하고 싶었다. 공기처럼 가볍던 운청산이 천 근 쇳덩이로 변했고 게단 위에 쌓인 눈도 점점 두텁고 미끄러워져 그의 걸음을 지체시켰다. 산취까지 그를 괴롭혔더라면 곤륜의 산문을 밟아보지도 못하고 중간에서 얼어 죽어버렸으리라.

  종길은 엉금엉금 기어서 산문을 지나고 마침내 눈 덮인 곤륜의 전각들을 눈앞에 두었다. 그는 무릎을 꿇은 채 엎드려서 숨을 몰아쉬었다.

  뽀드득, 뽀드득.

  눈 밟는 소리가 조금씩 크게 들리더니 반가운 목소리가 들렸다. 

  “뉘십니까?"

  종길은 고개만 비틀어 눈 주위에 푸른 반점이 있는 그 도사를 올려다보고 말했다.

  “처.... 청인 진인을 좀."

  “사숙을 찾아오신 게군요. 부축해 드릴까요?"

  종길은 고개를 저었다. 

  “빠... 빨리 처... 청인......"

  “알겠습니다. 쉬시지요."

  젊은 도사는 갑갑할 만큼 느린 발걸음으로 걸어갔다. 

  반 각이나 지나서야 청인자와 그 젊은 도사가 함께 다가오고 있었다. 종길은 무릎을 꿇은 채 두 팔에 힘을 주어 겨우 일어나 앉았다. 순간 청인자가 눈을 휘둥그렇게 뜨며 걸음을 빨리했다.

  “아니, 이게 누구야? 감숙 촌놈이 예까지 어떻게?"

  종길은 숨을 몰아쉬며 힘겹게 말했다.

  “진인! 여기, 여기 청산이......."

  “응?"

  청인자가 의혹 어린 눈으로 종길의 오른손 검지를 따라갔다. 불룩한 등을 바라보던 청인자는 갑자기 눈을 치뜨고 양털 이불을 벗겼다. 

  “청산? 이놈이 청산?"

  그때 운청산이 힘겹게 눈을 뜨고 입가에 미소를 지었다.

  “외숙."

  청인자는 눈을 부릅뜨고 입 안 가득 바람을 넣어 왈칵 터져 나오려는 눈물을 참아냈다. 그리고 되삼켜진 눈물이 가슴속에서 흐르는 만큼 환히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왔느냐?"

  운청산이 다시 웃었다. 

  청인자는 연신 고개를 끄덕이면서 두 손을 운청산의 겨드랑이로 넣어 조심스럽게 그를 끌어안았다. 마치 아이처럼 운청산을 품에 안은 청인자는 앙상한 뼈마디가 손끝에서 느껴지자 눈을 질끈 감았다. 

  그때 영문을 모른 채 바라보고 있던 젊은 도사 송학이 갑자기 눈을 치뜨고 비명을 질렀다

  “소사숙조!"

  그 외침에 청인자가 눈을 떴다. 

  “호들갑 떨 것 없다. 잠깐 다녀올 곳이 있으니 그동안 손님 잘 모시고 있거라."

  푸른 반점의 도사 송학이 운청산의 얼굴을 다시 한 번 바라보고는 조용히 허리를 접었다.   청인자는 운청산을 업고 양털 이불을 뒤집어씌운 후에 종길을 응시했다. 종길은 겨우 정신을 추스른 듯 일어서며 물었다.

  “청산은 괜찮겠습니까?"

  청인자는 붉게 변한 눈가에 웃음을 드리우며 고개를 끄덕였다.

  “걸은 요 모양이지만 그래도 곤륜이야. 청만을 아끼는 신묘한 돌팔이가 있으니 걱정 말게. 하지만 며칠이나 걸릴지는 잘 모르겠구먼. 그동안 어디 가지 말고 기다리게."

  종길이 쓴웃음을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가라 하셔도 갈 곳이 없습니다. 전낭도 텅 비어버렸고."

  청인자는 종길의 어깨를 두드리고는 바로 몸을 날렸다.

제 2장  곤륜은 흐르는 물과 같으니

  운청산은 청인자에게 귀곡을 둘러찰 절곡진의 진입법을 가르쳐 주고는 안심한 듯 미소를 지으며 정신을 놓아버렸다. 

  “어르신! 반선 어르신!"

  청인자는 곡이 떠나갈 듯 고래고래 고함을 질렀다. 피를 토하는 그 목소리에는 이미 곤륜에서 보였던 그 침착함을 찾아볼 수 없었다. 

  반선 노인이 나왔다. 태악 도인도 동부에서 나섰다. 그리고 호연마저도 눈을 댕그랗게 뜨고 나왔다. 

  반선 노인과 태악 도인은 곡의 정숙함을 깨버린 청인자를 발견하자마자 얼굴을 구겼지만 곧 그가 곡 안에 들어와 있다는 사실에 놀라 의아함을 드러냈다. 

  “엉? 이놈아! 너 여기 어떻게 들어왔어?"

  반선 노인이 묻는 순간 청인자는 운청산의 전신을 감싼 양털 이불을 바닥에 내동댕이치고 몸을 비틀어 보이며 울 것 같은 눈망울을 드러냈다. 

  “그놈 뭐야?"

  청인자는 아랫입술을 삐죽 내밀어 눈물을 참고 말했다. 

  “어르신! 이놈 청산입니다. 살려주세요."

  반선 노인과 태악 도인이 급히 달려와 운청산의 얼굴을 확인했다. 반선 노인은 그 즉시 청인자의 머리를 후려치며 소리쳤다. 

  “이놈아! 왜 거기 서 있어? 빨리 안으로 옮겨."

  청인자는 마침내 눈물을 쏟으며 급히 반선의 거처로 들어갔다. 청인자는 반선 노인의 황토 침상에 운청산을 내려놓았다. 반선 노인은 그 즉시 운청산의 차가운 팔목을 쥐었다. 

  청인자는 반선 노인이 진맥하는 동안 그의 등 뒤에 서서 쉬지 않고 두 손을 주물렀다. 반선 노인이 운청산의 팔목을 쉽게 놓지 못하자 청인자의 어깨가 바르르 떨리기 시작했다. 

  “어르신! 어르신! 우리 청산 괜찮겠지요? 살 수 있겠지요?"

  “시끄럽다. 이 호랑말코야. 정신 사나워 내가 먼저 죽겠다, 이놈아!"

  반선 노인이 날카롭게 소리치고 운청산의 팔목을 놓았다. 그리고 천천히 돌아서서 한숨을 내쉬었다. 

  “에휴! 정기는 허하고 사기만 실하니 심지만 남은 유등과 무엇이 다를까. 도대체 지 몸을 어찌 굴렸기에 이 꼴이 되어 돌아와?"

  청인자는 마주 잡고 있던 두 손을 부르르 떨며 무언가를 말하려 했으나 입술마저 떨려서 말을 내뱉지 못했다. 그는 대신 무릎을 꿇고 떨리는 손으로 반선 노인의 두 다리를 잡았다. 

  그때 태악 도인이 무표정한 얼굴로 물었다. 

  “살 수 있겠소?"

  순간 청인자는 반선 노인의 다리에 대고 있던 얼굴을 들어 올려다보았다. 반선 노인은 청인자의 이마에 손을 대고 두어 번 쓰다듬다가 슬쩍 뒤로 밀어버렸다. 

  “걱정 마, 이놈아! 청산은 내 손자나 다름없는 녀석이다. 내가 죽게 내버려 둘 성싶으냐?  없는 눈은 어떻게 해볼 도리가 없다만 몸은 예전보다 더 튼튼하게 만들어놓으마."

  청인자는 모로 기울어져 털씩 주저앉았고 태악 도인은 입술을 씰룩거리다가 무정한 목소리로 말했다. 

  “말할 만하다 싶으면 불러주시오."

  태악 도인은 운청산을 힐끔 보고서 두말 않고 나가 버렸다. 

  반선 노인은 주저앉은 채 한숨을 내쉬고 겨우 소매로 얼굴을 닦는 청인자를 안쓰럽게 바라보다가 품속을 뒤져 목곽을 꺼냈다. 

  반선 노인은 아쉬운 듯 목곽을 매만지면서 말했다. 

  “에잉! 아꼈다가 생색 낼 만한 놈에게 주려 했건만, 받아라."

  청인자는 반선 노인이 건네는 목곽을 두 손으로 받아서 살폈다. 

  “옛날에 네놈이 청산에게 먹이다 만 태청구전금액고다. 먹여놓으면 사나흘 후에는 어렵사리 움직일 수는 있을 게야. 기력이 있어야 치료도 할 수 있으니 우선 먹이고 깨끗이 씻겨서 데리고 오너라. 악취 때문에 머리가 지끈거린다."

  반선 노인은 청인자의 대답도 듣지 않고 운청산을 힐끔 보고는 방을 나섰다.

  반선 노인이 쟁반을 들고 들어섰다. 청인자가 허리를 접었고 운청산이 힘겹게 일어서려 했다. 

  “일어날 필요 없다. 옷이나 벗어라."

  운청산이 앞섶을 벌리고 바지를 내리자 반선 노인은 침상 한구석에 쟁반을 내려놓았다. 운청산이 살펴보니 밑바닥이 좁고 길이가 긴 쑥봉들이 담겨 있었다.

  “제가 구법(努法)을 쓸 만큼 상태가 나쁩니까?"

  약과 침으로도 안 되면 뜸을 쓴다는 내경의 말에 의거한 질문이었다. 

  반선 노인이 피식 웃으며 말했다. 

  “놈! 이제 좀 살 만하냐? 하기야 별 소득도 없이 태청구전금액고를 소비하였으니 그 정도는 되어야지. 어쨌든 상태가 안 좋은 건 네놈이 더 잘 알 거고, 해서 침법도 함께 쓸 요량이다. 힘이 좀 들겠지만 한 열흘 고생하다 보면 네놈 스스로 돌볼 수 있을 것이야. 그 뒤부터는 네가 알아서 할 탓이고."

  운청산은 아무린 걱정도 하지 않는다는 듯 힘없이 미소 지었다. 내경에 이르기를 침법과 구법은 함께 쓰지 못한다 했으나 그것을 시행하는 이가 반선 노인인데 무엇을 걱정하겠는가.

  반선 노인은 운청산의 머리에서부터 단전까지 일직선으로 쑥봉을 놓고 불을 붙였다. 

  “음! 향이 좋구나. 하기야 내가 만들었는데 어련하려고. 언제 캤는지 기억은 나지 않는다만 틀림없이 삼월 삼 일 좋은 날 해 뜨기 전에 캔 것이리라. 거기에 곱게 간 황을 섞어 정성을 다하여 만들었으니 좋지 않으면 이상하겠지."

  가만히 듣고만 있던 청인자가 말했다. 

  “금칠을 너무 두텁게 하면 표정이 없어진다 하던데 잘도 웃으십니다?"

  반선 노인도 인정한다는 듯 피식 실소했다. 그러나 한마디 하는 것은 잊지 않았다.

  “그래도 공부했다는 놈이 청산의 수명 하나 읽지 못하고 눈물, 콧물 다 빼더니 이제는 헤죽헤죽 웃기도 잘하는구나. 하기야 엉터리 관상 봐주고 돈 받아 처먹는 사이비 도사가 별수 있겠어."

  “사이비라니요? 사람을 볼 때는 심상이 첫째요, 다음에 사주를 보고 그 다음에 관상을 본다 했습니다. 관상만 가지고 제가 어찌 확신을 하겠습니까? 아시다시피 청산의 상은 이상합니다. 누구도 쉽게 읽을 수 없는 상 아닙니까?"

  청인자가 정색을 하고 말하자 반전 노인이 다시 피식 웃었다.

  “농이었다, 이놈. 나뿐만이 아니라 귀곡마저도 제대로 읽지 못했는데 네놈 주제에 청산의 상을 읽는다는 게 가당키나 하다더냐."

  “어? 그러고 보니 귀곡 어르신이 아니 보이십니다."

  청인자의 말에 운청산도 눈을 떴다. 그때 반선 노인이 운청산을 보며 대답했다.

  “그걸 이제 깨달았어? 잠시 다녀온다면서 출곡하더니 감감무소식이구나. 아! 나가면서 말하기를, 혹시 네가 돌아오면 귀부에서 거하라 하더라. 물론 쾌차한 후에 가야 해."

  운청산은 속으로 한숨을 내쉬었다. 비록 그를 곡 밖으로 내보낸 귀곡산인이었지만 그를 볼 수 없다 생각하니 서글프기 그지없었다. 더구나 당우리를 생각하면 어떻게든 귀곡산인의 도움을 얻어야 하는데, 없다 하니 아쉬운 마음도 서글픔에 못지않았다. 

  어느덧 시간이 흘러 한 치에 이르던 쑥봉이 사 분지 일로 줄었다. 운청산이 미간을 살짝 찌푸렸다. 그것을 본 청인자가 자기가 아픈 사람처럼 울상을 지으며 물었다.

  “아프냐? 많이 아파?"

  반선 노인이 혀를 찼다. 

  “쯧쯧쯔. 이 호랑말코야 너 지금 청산을 놀리는 게냐? 대신 아파줄 수도 없는 일인데 물어보면 뭐 해? 안 되겠다. 너 그만 나가거라."

  청인자가 입을 꾹 다물고 아랫입술을 내밀었다. 반선 노인이 그 얼굴을 보고 다시 혀를 판다. 

  “쯧쯧쯔. 귀밑머리 하얗건만 하는 짓이라고는...... 하여튼 곤륜 놈들은 하나같이 철딱서니가 없어."

  그때 문 여는 소리가 들리더니 태악 도인이 들어섰다. 청인자가 깊숙이 허리를 접었다. 그러나 뜸을 뜨고 있는 운청산은 일어서지 못하고 눈동자만 돌려 태악 도인을 바라보았다.

  “죄송합니다."

  태악 도인이 반선 노인의 옆에 서서 고개를 저었다. 

  “신경 쓸 것 없다."

  태악 도인은 잠깐 동안 운청산의 안색을 살피고 나서 반선 노인에게 물었다. 

  “오래 걸리겠소?"

  “열흘이면 혼자 상세를 돌볼 수 있을 게야. 보름이면 예전처럼 날아다니겠지."

  “수고하셨소."

  태악 도인이 무뚝뚝한 어조로 치하하자 반선 노인이 눈을 둥그렇게 치뜨고 그를 보다가 입가에 미소를 지었다. 

  태악 도인은 반선 노인의 눈길을 외면하고 다시 운청산을 바라보며 물었다.

  “누구냐?"

  운청산은 누구에게 당했느냐로 알아듣고 희미한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 

  “많습니다."

  “얼마나?"

  여전히 무뚝뚝한 어조와 표정이었다. 

  “사천 정도."

  순간 태악 도인의 눈가와 입술 끝이 씰룩거렸다. 

  “갚아줄 필요 없겠구나."

  “그쪽에서 원하는 일일 겁니다."

  태악 도인은 계속해서 꿈틀대는 눈과 입의 씰룩거림을 억지로 참아내고 다시 무뚝뚝하게 말했다. 

  “알겠다. 조리해라."

  태악 도인은 반선 노인과 청인자에게는 눈길도 주지 않고 돌아서서 나갔다. 그가 문을 닫고 나가자 반선 노인이 큭큭거리며 청인자를 바라보았다. 

  “크크크, 너 봤냐? 웃었다. 당장 칼 차고 나갈 기세더니만 사천이라니까 얼굴이 난리치려고 하지 않았냐?"

  “흐흐흐, 저도 사숙조께서 그런 표정 짓는 건 처음 봤습니다. "

  “그렇지? 금방 그 얼굴, 옛날의 풍파투도 그대로였다. 크크큭."

  두 사람 모두 신기해 죽겠다는 표정이었다. 그때 운청산이 말했다. 

  “할아버님. 이장(二壯)을......"

  “응? 아!"

  그때서야 반선 노인은 웃음을 멈추고 다시 뜸을 얹기 시작했다. 

  모두가 아쉬워했다. 겨우 팔 일을 머물렀을 뿐이지만 정이 든 것은 종길 역시 마찬가지였다. 구대문파의 제자 하면 당장 떠오르는 것이 절도(飾度)와 더불어 오만함이었건만, 곤륜의 제자들은 그 같은 선입견을 완전히 바꿔주었다. 

  구대문파의 제자들이 모닥불을 피워놓고 자신과 함께 둘러앉아 재미있게 이야기를 들어줄 줄은 꿈에도 생각지 못했었다. 물론 가난한 곤륜의 거친 음식이 기대와는 달만 사람이 좋으면 모 것이 좋다고, 금세 익숙해졌다. 거기에 청인자까지 합류하자 종길은 더욱 편한 마음으로 천외비처 곤륜의 생활을 즐겼다.

  그러나 좋다고 마냥 눌러 있을 수는 없는 일이었다. 청인자가 대엿새만 더 지나면 운청산을 볼 수 있을 거라 말했지만, 종길에게는 반드시 해야 할 일이 있었다. 바로 강정과 문취옥의 시신을 제대로 거두는 일이었다.

  오는 도중 운청산은 그 일을 하루도 빼놓지 않고 말했다. 비 오는 날에 땅을 파서 대강 묻고 무거운 돌을 오려둔 것이 마치 자신의 가슴에 돌덩이를 얹어둔 것만 같다고. 이야기만 들었는데도 종길의 마음 역시 운청산과 다름없었다. 그래서 종길은 운청산에게 인사도 못하고 언젠가는 다시 오겠다는 말만 남긴 채 곤륜을 떠나고야 만 것이었다. 

  종길은 한기에 몸을 부르르 떨면서도 고삐를 흔들었다.

  후두두두둑!

  말들이 치달렸다. 얼굴에 와 닿는 바람이 칼날같이 매서웠다. 그러나 종길은 속도를 줄이지 않았다. 십여 장 앞쪽의 산모퉁이를 돌아 백여 리만 더 가면 격이목에 닿을 것이고 거기라면 꽁꽁 얼어버린 몸을 훈훈하게 데울 수 있는 탓이었다. 

  “하!“

  모퉁이를 돌자마자 종길은 달리는 말에 속도를 더했다. 그때였다. 오른쪽 바퀴가 바위를 밟은 듯 마차가 기울면서 허공으로 솟구쳤다.

  쾅!

  마차가 땅에 내려서는 순간 종길의 몸뚱이가 튀어 오르려 했다. 그 순간 다시 우지끈 소리가 나며 오른쪽 바퀴가 부서져 튕겨 나갔다. 

  종길은 오른쪽으로 기울어졌다가 결국 마차 밖으로 튕겨져 나갔다. 그는 급히 몸을 휘돌려 겨우 바닥에 내려섰다. 그리고 정신없이 앞으로 달려가는 마차를 향해 몸을 날려 고배를 했다. 

  놀란 말들이 겨우 정신을 차렸다. 

  "휘유!"

  한숨을 내쉰 후에 마차를 살폈다. 그의 없는 재주로는 고쳐 볼 도리가 없이 부서져 있었다. 말은 곤륜 제자들이 인근에 맡겨 돌보아주어서 건강하나 마차는 눈비를 맞으며 한길에 방치되어 있었던 까닭에 부서져 버린 것이리라.

  “제기랄! 조금만 더 가면 되는데."

  아쉬웠다. 청인자가 쥐어준 돈은 겨우 은자 스무 냥. 비록 백 냥 밑으로는 팔지 말라며 준 곤륜삼 한 뿌리가 있었지만 제값을 받으려면 적어도 감숙에는 접어들어야 팔 곳을 찾을 수 있으리라. 그래서 우선 격이목에 도착하는 순간 말 한 마리와 마차는 팔아버릴 생각이었다. 그린데 코앞까지 와서 부서져 버렸으니 아쉬울 수밖에 없었다. 

  “에잉! 이왕 이렇게 됐으니 요기나 하고 가자."

  종길은 도를 꺼내어 마차 바퀴를 난도질했다. 부서진 조각들을 땔감으로 사용하여 불을 피우고 곤륜에서 얻어온 대나무 밥통을 불에 던져 넣었다. 

  종길은 불길로 두 손을 뻗어 비비며 입술에 침을 바르고 주위를 둘러보았다. 그러나 볼 만한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등 뒤는 이름 모를 곤륜산의 지산이고, 앞은 눈 덮인 벌판일 뿐이었다. 

  종길은 혀를 차고 불길을 헤쳐 대나무 밥통을 끄집어냈다. 

  “앗!앗!앗! 뜨거!"

  종길은 대나무 밥통을 바닥으로 던지며 두 손을 귀고 가져갔다. 그때 그의 두 눈에 무언가가 보였다. 격이목으로 향하는 그 길 멀리에 희뿌연 무언가가 어른거리고 있었다.

  “뭐야?"

  그것들이 조금씩 커져 가더니 대강의 형상을 드러냈다. 백의인들이었다. 

  종길은 경기를 일으키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흰옷만 봐도 치가 떨리는 그였다. 그런데 하루 종일 서 있어도 한 사람 만나기 힘든 곤륜 근동에서 백의인의 무리를 만난 것이었다. 

  “그놈들이 여기까지? 설마 청산을 잡으러 온 것인가?"

  이차 원정 때 운청산이 어떤 일을 했는지 알지 못하는 종길로서는 이해할 수가 없었다. 그는 차라리 백의인들이 앞으로 큰 걸림돌이 될지 모르는 곤륜을 치러 왔다고 이해하기로 했다. 

  종길은 급히 불을 밟아 끄면서 백의인들을 다시 확인했다. 

  “거리는 육칠백여 장? 속도는 다르지 않고. 보자. 사람은 대충 삼백? 사백? 에이! 모르겠다. "

  종길은 대나무 밥통을 주워 들고 말들을 풀었다. 그리고 마차 안으로 들어가 등짐을 꺼낸 후 말을 타고 왔던 길을 되돌아 달리기 시작했다. 

  “헉! 헉! 헉!"

  종길은 또다시 산문을 지나 엎어져 버렸다. 

  “종 소협!"

  송운이라는 청학자의 막내 제자가 급히 달려와 그를 부축했다. 

  “빠... 빨리 처... 청인 진인을. 어서!"

  송운이 고개를 끄덕이고 급히 태상궁으로 달려갔다. 청인자가 달려와 종길을 부축했다. 

  “이게 무슨 일이야?"

  말을 하려고 해도 입 안이 바짝 말라 말문이 터지지 않았다. 종길은 급히 주변의 눈들을 쥐어 입 안에 넣고 겨우 그가 본 것과 그의 생각을 말했다. 

  청인자는 눈을 질끈 감았다 종길은 곤륜이 걸림돌이 될까 봐 치러 온다고 예상했지만 청인자는 운청산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운청산으로부터 직접 저들이 갚아주고 싶어 할 것이라는 소리를 들었기 때문이다.

  청인자는 송운에게 소리쳤다. 

  “가서 타종해라!"

  송운이 야무지게 고개를 끄덕이고 몸을 날리자 청인자는 종길을 부축하여 태상궁 앞으로 날아갔다. 고사이에 종소리가 요란하게 산을 울렸다. 사람들이 여기저기서 모습을 드러내더니 어느새 팔십여 명 이상이 모여들었다. 

  청인자는 모두가 듣는 자리에서 운상자에게 자초지종을 설명했다. 

  “반 시진이면 오겠군 그래. 원시천존! 이 일을 어찌해야 합니까?"

  운상자가 미간을 찌푸리며 의견을 구하듯 청학자와 청우자 그리고 청인자와 청현자를 두루 살폈다. 청학자가 대표로 말했다. 

  “싸우지요, 뭐."

  종길은 청학자의 담담한 얼굴과 무덤덤한 어조에 놀라 눈을 치떴다. 그리고 곧 주변을 둘러보았다. 

  믿을 수 없는 일이었다. 수백 명의 적도들이 곧 산으로 들이닥칠 것이라 전했는데도 모두가 크게 긴장한 것 같지는 않았다. 싸우겠다는 의지를 불태우는 젊은 도사들은 나이답게 상기된 표정을 지었지만, 운상자와 청우자 그리고 청인자의 얼굴은 청학자와 별반 다르지 많았다. 

  운상자가 다시 미간을 좁히며 청학자를 노려보았다. 

  “그것밖에 할 말이 없어? 머리는 왜 달고 다니냐?"

  청학자가 청우자를 바라보며 중얼거렸다. 

  “싸우자니까 싸우자는데 내가 뭐 잘못 말했나?"

  “이놈! 제자들 앞이다. 창피하지도 않으냐? 뭐 하러 쓸데없는 피를 흘려."

  운상자의 말에 청학자가 얼굴 반을 구겼다. 

  “제자도 피 보긴 싫습니다. 하지만 어떻게 합니까, 저쪽에서 하자는데?"

  잠깐 비무 치르듯 싸우고 말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아는 종길로서는 피가 마르지 않을 수 없었다. 종길은 다시 바닥을 훑어 눈덩어리를 입으로 가져갔다. 

  그때 운상자가 청인자를 바라보았다.

  “네 생각은 어떠냐?"

  종길은 급히 청인자에게로 눈을 돌렸다. 이상했다. 조금 전에 소식을 전해들을 때만 해도 난감한 표정을 짓던 청인자였전만 지금은 편하다 못해 느긋해 보였다. 

  청인자는 종길의 다급한 눈길은 아랑곳하지 않고 머리를 긁적이며 말했다.

  “간만에 다 같이 소풍이나 갈까요?"

  운상자가 또다시 얼굴을 구기며 말했다. 

  “소풍? 산을 비우잔 말이냐?"

  “뭐 어때요? 훔쳐 갈 것도 없는데. 기다리다 지치면 가겠지요, 뭐."

운상자가 허연 턱수염을 쓰다듬다가 다시 말했다. 

  “그런가? 하기야 객들이 와도 대접할 거라고는 차가운 검밖에 없으니 하지 않느니만 못하지. 근데 춥다고 불이라도 내면 어쩌나?"

  청인자가 피식 웃었다. 

  “무슨 걱정입니까? 어차피 수년 내에 무너질 건데. 그냥 편한 기분으로 떠나지요. 굴 파고 살아도 여기보단 따뜻할 겁니다."

  “그건 그렇구나. 근데 어디로 가야 하나?"

  “귀곡이요."

  운상자가 눈을 치떴다. 

  “받아줄까?"

  “산인께서 아니 계시니 그냥 드러누워 버려도 별문제 없지요. 태악 사숙조께서 계셔서 조금 껄끄럽긴 하지만 누가 죽는 것보단 낫잖아요."

  운상자가 결정했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순간 청학자가 박수를 치며 말했다. 

  “청인이 이렇게 현명한 줄 몰랐군. 결정! 청인을 차기 장문인으로 적극 추천합니다, 사부님!"

  “뭐라구요?"

  청인자가 청학자를 노려보았다 그때 청우자마저 만면에 미소를 드리우며 청인자의 어깨를 두드렸다. 

  “축하! 축하! 차기 장문인."

  “무슨 소리 하는 거예요?"

  청인자가 빽 소리를 지르는 순간 운상자가 고개를 끄덕였다. 

  “너희들이 그리 생각한다면 그렇게 해야지."

  “전 못합니다. 그걸 제가 왜 떠맡아요? 싫습니다. 저 같은 놈이 장문인을 맡으면 세상이 웃는다구요."

  청인자가 연신 고개를 내저으며 청학자와 청우자를 노려보았다. 청학자가 낮게 소리쳤다. 

  “나 청학이 좌청룡 되고."

  순간 청우자가 낮게 소리쳤다. 

  “나 청우가 우백호 되어 장문인을 보필하겠네. 걱정 접어두시게.”

  종길은 정말 이해할 수가 없었다. 급박한 시점에서 이런 장난 같은 일들이 구대문파에서도 신비지문이라 일컬어지는 곤륜에서 일어날 줄은 상상도 못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한 가지는 공감할 수 있었다. 책임자의 자리, 종길이라도 죽어도 앉지 않을 자리였다. 

  그때 운상자가 정리하듯 말했다. 

  “청우는 우선 산을 내려가 손님들이 어디까지 왔는지 확인해 보아라."

  청우자는 청인자의 어깨를 두드린 후에 허공으로 몸을 날렸다. 종길의 눈이 돌아갔다. 

  종길은 과연 곤륜이라고 생각했다. 가볍게 땅을 박찬 것뿐인데도 한번에 십삼사 장씩을 단축해 나갔고 서너 번 뛰는 것으로 사라져 버렸다. 

  “그리고 청학은 서고를, 청인은 먹을 것을 챙기는 게 좋겠군."

  “사부님!"

  청인자가 마음에 안 든다는 듯 소리치자 운상자가 웃으며 말했다. 

  “차기 장문인 이야긴 귀곡에 가서 하자. 일단 줄행랑부터 치고 보자꾸나."

  운상자에게서 줄행랑 소리를 듣게 되자 종길은 마침내 드러내 놓고 고개를 젓고 말았다. 

  청인자는 할 수 없이 청학자와 함께 사람을 나누어 움직였다. 운상자도 태상궁으로 들어갔다. 일각쯤 지나자 검 두 자루에 작은 책 보따리를 든 운상자를 필두로 곤륜의 제자들이 등에 한 보따리씩 지고 여기저기서 나타났다. 그리고 잠시 후 청우자가 돌아와 백의인들이 입구에서 십 리 쯤 떨어진 곳에 이르러 숨을 돌리고 있다고 전했다. 

  청인자가 나서서 이삿짐을 잔뜩 지고 있는 사람들을 둘러보며 말했다. 

  “귀곡은 태령봉 북쪽 끝에 있으니까 일단 여기서 삼삼오오로 흩어졌다가 그곳에서 만나자. 찾기는 쉬워. 갑자기 한 치 앞을 분간하지 못할 안개가 자욱하게 깔릴 테니까. 들켜도 상관없지만 되도록이면 발자국 남기지 말고 멀리 돌아서 오는 게 좋겠군."

  청인자는 두 손을 좌우로 펼쳐 흩어지라 명했다. 제자들이 사방으로 흩어졌다. 남은 사람은 운상자와 종길 그리고 청인자뿐이었다. 

  청인자가 뒤늦게 담을 넘는 청학자의 등을 바라보며 얼굴을 구겼다. 

  “쳇! 도망가 버리는군. 우리도 가지요."

  “잠깐만 기다려라."

  운상자는 책 보따리를 내려놓고 발자국이 없는 곳으로 움직여 몸을 띄웠다. 그리고 바닥을 내려다보며 부드럽게 검을 휘저었다. 검기가 바닥에 닿는 반동을 이용하여 단 한 번도 내려서지 않고 눈 위에 거대한 글씨들을 휘갈겨 쓴 운상자가 다시 원래의 자리에 내려서서 책 보따리를 들었다. 

  “왠지 불쌍하게 느껴지는 글이네요."

  청인자의 말에 운상자는 피식 웃으며 대답했다. 

  “객들이 그리 느껴주면 좋을 텐데...... 근데 검 한 번 휘둘렸다고 팔이 아프네. 에고고!"

  “쳇! 그냥 들라고 하세요."

  청인자는 책 보따리를 받아 들고 다시 말했다. 

  “그럼 제가 앞장서겠습니다."

  운상자가 고개를 끄덕이자 청인자는 그때까지도 운상자의 몸놀림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멍하게 서 있는 종길의 손을 잡고 몸을 날렸다. 

  백무극은 발을 멈춰 세우고 오른손을 들었다. 바로 십여 장 앞에서 끊이지 않을 것 같던 긴 석계가 끝나면서 금방이라도 부서질 것 같은 산문이 보였다. 

  백무극은 긴장된 눈빛으로 산문을 노려보다가 옆으로 고개를 돌렸다. 포근해 보이는 백의장포와는 어울리지 않는 칼날 같은 인상의 초로인이 목례해 보이고 손을 앞으로 뻗었다. 순간 두 백의장년인이 산문을 향해 날아갔다. 

  초로인은 다시 좌우로 손을 벌렸다. 뒤로 길게 늘어서 있던 사내들이 조용히 계단을 벗어나 좌우의 숲으로 흩어졌다. 

  산문을 지나쳐 곤륜의 전경을 확인한 두 장년인이 다시 내려왔다. 

  “기척이 없습니다."

  초로인이 백무극에게로 고개를 돌렸다. 

  “소군, 어차피 우리에게는 선택의 여지가 없습니다. 그냥 오르시지요.

  백무극은 자신이 너무 긴장하고 있다는 것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생사조차 모르는 이름 모를 곤륜의 청년 때문이었다. 처음 보았을 때는 단지 호기심의 대상, 두 번째 대했을 때는 짜증나는 존재, 그리나 세 번째 보았을 때는 죽이지 않으면 안 된다는 공포감을 주었던 인간이었다. 그런 그의 사문이면서 동시에 태을검선의 사문이기에, 그 같은 인간들이 흔하지 않다는 것을 알면서도 곤륜의 앞에서 숨을 죽이고 있었다.

  ‘이게 무슨 꼴인가, 여기까지 와놓고 몸을 움츠리다니? 이 정도까지 내가 그놈을 두려워했단 말인가? 보았지 않은가. 비록 그놈이 뛰어나긴 했어도 나머지 곤륜 제자가 모두 그놈 같은 것은 아니었다. 추태야. 천웅신전을 모두 이끌고 와놓고, 쯧쯧쯔.'

  백무극은 고개를 젓고 담백하게 웃으며 말했다. 

 “창피하네, 전주. 내 그대까지 끌어들여 놓고 이리 당당하지 못한 모습을 보이게 되는군.“

  초로인은 희미하게 미소를 지으며 허리를 접었다. 

  “별말씀을 다 하십니다. 천하의 곤륜입니다. 조심해서 나쁠 것은 없지요."

  백무극이 다시 미소를 지으며 초로인을 응시했다.

  천응신전의 전주 백요산(白夭山).

  옛 승천도의 이름을 되찾는 순간 음양팔괘 십대천병 기운데도 수좌의 자리나 마찬가지인 태양천병(太陽千兵)의 자리를 차지할 인물이었다. 

  곧 천군과 백무극 그리고 좌우 친위인 좌우상을 제외하고는 태음천병(太陰天兵)이 될 천기신사와 함께 승천도의 최고위직 인사인 것이었다. 순수한 무공으로 따지자면 우상과 백무극도 쉽게 자신할 수 있는 사람이 아니었다.

  백요산이 이끄는 천응신전의 고수들 또한 간단한 이들이 아니었다. 숫자는 겨우 삼백칠십여 명에 불과하나 질적인 면에서는 우상의 백영무단과 함께 수위를 다투는 이들이었다. 

  백무극은 든든함을 느끼며 힘차게 걸음을 옮겼다.  백요산이 따라 움직이고 소불과 하얗게 질린 혈응이 힘겹게 뒤따랐다. 그리고 좌우에서 백의인들이 일제히 걸음을 옮겼다. 

  첨병의 말처럼 아무도 없었다. 보이는 것이라고는 눈 덮여 그나마 보기가 나은 낡은 전각들뿐이었다. 

  백요산은 칼날 같은 기세를 드리우며 눈앞의 전경을 들러보면서 좌우로 손을 뻗었다. 백의인들 십수 명이 연무장 가장자리를 돌아 전각들을 살피기 시작했다. 

  백요산은 전각에 들어갔다가 다시 나오는 백의인들을 보며 눈살을 찌푸리고 말했다.

  “소군, 정말 사람이 없는 것 같습니다."

  백무극도 눈살을 찌푸렸다. 그때 소불이 한 걸음 나서며 말했다. 

  “소군, 저기 뭔가 써진 것 같습니다."  

  백무극은 소불의 손길을 따라 시선을 옮겼다. 소불의 말대로 말도 안되는 크기의 글씨들이 눈 위에 써져 있었다. 한 글자가 사람 크기만하니 오히려 알아보기가 어려웠던 것이었다.

  백무극 등이 일제히 태상궁 앞으로 다가가 운상자가 남긴 글을 읽어나갔다. 

  먼 길 오셨구려. 헌데 어쩌오? 곤륜은 너무 가난해서 객들처럼 많은 사람들을 대접할 수 없다오. 면목도 없고 해서 그냥 피하니 용서해 주시구려.

  우리는 가실 때까지 산에서 오들오들 떨고 있을 모양이니, 피곤하더라도 가급적 빨리 돌아가 주셔야 우리가 동사(凍死)를 면할 수 있겠소이다. 오실 때처럼 편히 가시오.

  가난한 곤륜의 장문인 운상이 쓰오.

  “하하하! 하하하하하!"

  마음에 걸리는 것을 치워 버리겠다는 생각으로, 패왕이 되겠다는 마음을 굳힌 기념으로 결정한 원정이었다. 천북의 길목이 막힌 탓에 삼협을 지나 호북으로 돌아온, 스물닷새의 강행군 끝에 도착한 곤륜이었다. 그런 그를 맞이한 것이 곧 부서져 버릴 것 같은 전각 몇 채 뿐이니 백무극으로서는 허탈한 웃음을 터뜨리지 않을 수 없었다.

  “우웩! 우우우우우웩!"

  갑자기 들려온 헛구역질 소리에 백무극은 언짢은 기색을 드러내며 고개를 돌렸다. 그러나 곧 눈을 감고 고개를 저었다. 혈응이 산취를 견디지 못하고 무를 꿇고 앉은 채 속을 비워내고 있었다. 

  백무극은 심호흡으로 날카로워진 감정을 다독이고서 소불에게 말했다. 

  “등이나 두드려 주게."

  소불이 송구스럽다는 표정으로 허리를 접어 보이고 혈응에게 다가가 등을 두드렸다. 백무극은 계속해서 들려오는 구역질 소리를 무시하고 수하들에게 보고를 받는 백요산을 불렸다.

  “이대로 물러선다면 두 달을 공치게 되는 것이네. 그럴 수는 없는 일. 이합집산하는 무리들이 아닌 이상 흩어진 듯 보여도 틀림없이 한곳에 모여 있겠지. 한 놈이라도 찾게. 그러면 나머지도 찾을 수 있을 게야."

  백요산이 허리를 접었다. 그는 수하들을 둘러보며 이십여 명의 장년인들을 따로 뽑아 두 무리로 나누고 말했다. 

  “발자국이 깊은 무리들을 골라 그들만 쫓아라. 결국에는 모두를 찾게 될 것이다. 찾게 되거든 부딪치지 말고 일단 돌아오너라. 불가피한 경우에는 신호전을 올리도록."

  이십여 명의 백의인들이 좌우로 흩어졌다. 그들이 시야에서 사라지자 백요산이 백무극에게로 되돌아와 태상궁을 향해 손을 뻗으며 말했다. 

  “일단 안으로 드시지요."

  백무극은 씁쓸하게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지금은 했네. 답답해서 싫을 거야. 근데 전주, 내가 세상을 모르는 것인가? 설마 이렇게 아무렇지도 않게 산을 비워 버릴 줄은 상상조차 못했었네. 비록 소수라 하나 천하의 곤륜일세. 자존심도 없는 것인가?"

  “저로서도 이해가 안 되는 일입니다. 청성의 경우라면 전략적인 후퇴로 보아줄 수 있겠지만, 곤륜은 우리와 싸워보지도 않았습니다. 산을 비웠다는 것은 미리 대처할 수도 있었다는 뜻일진대, 무작정 도주한다는 것은 정녕 곤륜의 이름에 어울리지 않는 일이지요."

  약간의 위안이 되었다는 듯 백무극이 씁쓸한 미소를 짓는 순간 백요산이 다시 말했다. 

  “그런데 음식이 될 만한 것들은 모두 거두어간 모양입니다. 우리가 가진 것은 이틀 치 건량뿐인데, 어찌할까요? 아이들 몇이라도 격이목으로 보내오리까?"

  백무극은 대답을 미루고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시간이 벌써 미시에 이르러 있었다. 더구나 산에서는 해가 빨리 지리라.

  “찾는다 해도 익숙지 않은 곳이니 싸움은 내일 아침까지 기다려야겠군. 그리되면 여유는 하루뿐. 일백도 안 된다니 시간이야 걸리지 않겠지만 여유가 없는 상황에 직면하는건 싫어. 두엇 보내게. 결과를 보기 전에는 내려가지 않을 것이야."

  백요산이 허리를 접으려는 순간 한동안 잠잠했던 혈응이 다시 헛구역질을 하기 시작했다. 

  운청산은 전신에 침을 꽂고도 아무렇지도 많은 듯 외눈을 말똥말똥하게 뜬 채 반선 노인을 바라보았다. 

  반선 노인은 보기 드물게 엄숙한 표정으로 두 손바닥을 펼쳐 운청산의 나신을 쓰다듬듯 휘저었다. 

  반선 노인의 두 손에서 나은 온화한 기운에 휘감긴 운청산은 갑자기 피부가 팽팽하게 당겨지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 전신의 모공이 활짝 열리는 듯한 시원한 느낌이었다. 

  반선 노인이 두 손을 오므리며 다르게 휘저었다. 마치 무언가를 잡아채는 듯한 움직임이었다. 

  반선 노인은 운창산의 나신 위에서 손을 거두고 계란을 움켜쥔 듯한 두 손을 뒤집어 펼쳤다. 순간 심광 같은 빛이 번득였다가 사라졌다.

  “흠! 사기가 거의 다 빠진 듯하구나."

  운청산 또한 같은 느낌이었다. 시침할 때마다 전신이 아프면서도 시원해지던 그 느낌이 하루하루 줄어들고 있었다. 그리고 첫날은 반선 노인의 손 위에서 한참 동안 타오르던 사기들 역시 섬광이 이는 짧은 순간에 타올라 버렸다.

  “시침법을 쓸 때는 자침(刺鍼)도 중요하지만 발침(拔鍼) 또한 중요하다. 너무 느리게 빼면 정기마저 빠져나와 오히려 상세가 악화되고 반대로 너무 빠르게 빼면 피부에 사기가 남아 종기가 생긴다. 지금 침이 다지는 느낌을 유념해 두어라."

  반선 노인은 운청산의 나신 위로 다시 두 손바닥을 뻗어 부드럽게 휘저었다. 반선 노인의 두 손이 지나가는 순간 운청산의 전신에 빽빽하게 꽂혀 있던 침들이 하나하나씩 순차적으로 빠져나와 그의 손바닥에 달라붙었다. 

  “후우!"

  운청산은 시원하면서도 차갑지 않은 청량함을 맛보며 한숨을 내쉬었다. 비록 시침 전보다 힘은 없었지만 기분만큼은 날아갈 것만 같았다.

  그가 일어나 앉아 청인자가 새로 마련해 준 도포를 걸치는 동안 반선노인은 침을 갈무리하면서 물었다. 

  “세상에 나가 있는 동안 진전을 즘 보았더냐? 예상보다 훨씬 더 빠르게 회복하는구나."

  “기주의 빛깔이 투명하고 부드러운 금빛을 띠는 듯했습니다."

  반선 노인이 눈을 둥그렇게 치뜨며 웃었다.

  “호오! 그렇게나? 양신이 생기는 일도 멀지 많았구나. 그래서 이렇게 빨리 회복되고 있어.  되었다 더 이상 내 도움이 필요치 않아. 오늘부터는 귀부에서 머물면서 네 힘으로 공력이나 회복하여라."

  운청산은 도포의 앞섶을 완전히 여미고 반선 노인을 마주 보며 절을 올렸다. 

  “할아버님, 감사합니다."

  간단한 인사였지만 그의 절하는 모습과 어조에서는 말로 표현하지 못하는 감정이 여실히 드러나 있었다. 

  반선 노인은 운청산의 어깨를 두드리고 나서 그를 일으켜 세웠다. 

  “내가 남이냐, 이놈아? 네 녀석은 우선 살부터 즘 찌워야겠다. 강시 같아서 보기가 즘 그렇구나."

  운청산은 홀쭉한 뺨에 공기를 머금고서 웃었다. 

  “그래. 고 정도는 되어야지 사람 같겠다."

  그때였다. 밖에서 두런두런 말소리가 들리는 것 같았다. 그렇게 의식하는 순간 실제로 수십 마디 탄성들이 들려왔다. 반선 노인은 눈을 둥그렇게 뜨고 운청산을 마주 보았다. 두 사람을 제외하면 곡 안에는 태악 도인과 호연뿐인데 밖에서 들리는 소음은 그들이 만들어낼 수 있는 소리가 아니었다. 

  “어르신!"

  청인자의 목소리가 들리는 순간 반선 노인이 오만상을 찡그렸다.

  “저... 저놈이 또! 아니지. 한 놈이 아닌데."

  반선 노인은 참지 못하고 밖으로 뛰어나갔다. 문을 벌컥 여는 순간 여든 명이 넘는 곤륜 제자들이 일제히 허리를 접으며 합창하듯 소리쳤다. 

  “반선 어르신을 뵙습니다!"

  반선 노인은 입을 적 별린 채 대충 모여 서 있는 곤륜 제자들을 훑어보았다. 그리고 곡 한쪽에 어지럽게 널려 있는 식기들과 식재료들 그리고 책 보따리들을 바라보며 기가 막힌다는 표정을 지었다가 결국 눈을 감았다. 

  반선 노인이 다시 눈을 떴다. 그의 눈빛이 차갑게 변해 있었다. 

  “네놈들! 이게 무슨 짓거리냐?"

  차가운 목소리는 모두를 향한 것이었으나 그의 두 눈만은 청인자의 얼굴을 찢어버릴 듯 노려보고 있었다. 그뿐이 아니었다. 태악 도인까지 반선 노인의 옆에 서서 한광 어린 눈빛으로 곤륜문도들을 살펴보고 있었다. 

  두사람의 눈빛이 하도 무서워서 곤륜파 사람들은 태악 도인과 운청산에게 예도 올리지 못하고 어깨를 움츠렸다. 

  “대답하라. 이게 무슨 짓이야?"

  반선 노인이 청인자를 노려보며 다시 노성을 토하자 청인자는 슬금슬금 움직여 운상자의 등 뒤로 숨으면서 두 손으로 그의 등을 부드럽게 떠밀었다. 

  “이... 이놈아!"

  운상자가 난처한 기색을 드러내며 청인자를 향해 고개를 돌렸지만 그는 모르는 척 외면했고 그때 이미 운상자의 신형은 반선 노인의 앞에 이르러 있었다. 갑자기 목표를 잃은 반선 노인의 시선은 자연스럽게 운상자의 얼굴에 꽂혔다. 

  운상자는 어색한 미소를 지으며 입을 벌렸다. 

  “저, 어르신! 피치 못할 사정이 있어서 이렇게 어르신의 청정에 누를 끼치게 되었습니다. 이게 어떻게 된 거냐 하면 말입니다. 고... 곤륜에......"

  “이 늙은 원숭이야! 용건만 간단히!"

  반선 노인이 다시 소리를 지르자 운상자는 한쪽 눈을 감고 경기를 일으키들 떨다가 태악 도인의 눈치를 살폈다. 순간 태악 도인의 눈썹이 위로 치켜져 올라갔다. 

  “곤륜에 적도가 난입했습니다. 아마도 청산 사제에게 앙심을 품고 온듯."

  순간 반선 노인이 노기를 거두고 태악 도인을 바라보았다. 그러나 곧 고개를 돌려 말했다. 

  “혼구멍을 내서 쫓아버리지 않고 천 년 곤륜을 비우고 도망쳐 왔단 말이냐? 네가 그러고도 정말 곤륜의 장문인 맞아?

  그 순간 운상자는 움츠러들어 있던 몸을 펴고 반선 노인을 지그시 바라보며 엄숙한 어조로 말했다.

  “말씀이 지나치십니다, 어르신! 천 년 곤륜을 이어 나가는 것은 땅이 아니라 사람이요 정신이지요. 빈도는 가병불상지기(佳兵不祥之器)라 하신 노군의 가르침에 따라 스스로를 굽히고 싸움을 피하여 사람부터 살리고자 할 따름입니다. 예. 말씀처럼 피하지 않고 싸울 수도 있겠지요. 허나 백을 죽이고 열이 죽는다면 그것을 승리라고 할 수 있습니까. 죽음이 두려운 바는 아니나 피할 수 있는 일을 애써 행하여 헛된 죽음을 자초할 필요는 없는 일인 것입니다. 어르신께서는 정녕 저 어린아이들이 피 흘리기를 바라십니까? 정녕 곤륜산이 피로 물들기를 바라십니까?”

  반선 노인은 입을 꾹 다물고 실눈을 뜬 채 주춤거렸다. 그러나 곧 눈을 부릅뜨며 붉게 물든 손을 들어 올렸다. 

  “이... 이 어린것이 껍질 좀 쭈그러들었다고 이제 나를 가르치려 들어"

  운상자는 금세 태도를 바꾸어 몸을 움츠렸다. 

  “그냥 즘 봐주세요. 청인만한 놈들이 사백 넘게 몰려왔단 말입니다. 가면 나가겠습니다."

  “다 늙은 것이 간살스럽기는...... 징그럽다."

  반선 노인은 손을 내리고 얼굴을 찌푸리며 운청산을 되돌아보았다. 

  “예까지 쫓아오는 걸 보니 너 정말 징그럽게 끈질긴 놈들을 건드렸나보구나."

  운청산이 말없이 얼굴을 찡그리며 웃었다. 만선 노인은 의견을 구하기 위해 태악 도인에게로 고개를 돌렸다. 

  반선 노인은 태악 도인의 옆얼굴을 보며 고개를 저었다. 

  “너 지금 웃는 거지? 너도 철 좀 들어라."

  태악 도인은 씰룩거리던 눈과 입술을 단속했다. 그리고 무표정한 얼굴로 말했다. 

  “어쩔 수 없는 상황. 허락해 주시오."

  “난 몰라. 귀곡이라도 돌아오면 어쩌려고?"

  “돌아오지 않을 것이오."

  반선 노인이 의아한 표정을 지으며 물었다. 

  “그걸 니들이 어찌 알아?"

  “직접 들었소."

  “그래? 그건 나중에 듣기로 하고 난 모르니 네가 알아서 해. 청산도 더 이상 내 도움이 필요치 않으니 나는 연단실로 들어가련다. 하지만 시끄럽게 구는 놈이 있으면 나와서 죽여 버릴 거야."

  말속에 이미 승낙의 의미가 들어 있는지라 곤륜 사람들은 일제히 안도의 한숨을 내쉬고 미소를 지었다. 그때 반선 노인이 청인자를 노려보았다. 

  “너지? 네놈이 여기로 오자고 꼬였지?"

  청인자는 미소 어린 얼굴을 굳히고 입을 꾹 다문 채 고개만 저었다.

  “너, 한 번만 제대로 걸려라. 그때는 정말 죽여 버린다."

  반선 노인은 주먹을 쥐어 부르르 떨어 보이며 찬바람이 돌도록 돌아섰다. 반선 노인이 사라지자 모두가 다시 태악 도인에게 허리를 접었다. 그리고 운청산을 향해 예를 표했다. 운청산 또한 운상자에게 예를 표하고 나머지 사람들에게도 미소를 지었다. 

  종길의 얼굴도 보였다. 태악도인이 있으니 당장 반갑게 달려가지는 못했지만 운청산은 고마움이 그대로 드러나는 눈빛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종길 역시 기운을 차린 운청산을 보며 연신 고개를 끄덕였다. 

  “어찌해야 하겠느냐?"

  태악 도인이 운청산에게 물었다. 고개를 돌려 얼굴을 보니 무표정하다 해도 눈만은 마치  ‘내가나가서 혼내줄까' 하는 빛을 드리우고 있었다. 

  운청산은 미소가 번지려는 얼굴을 굳히고 말했다.

  “한 번 상대해 주면 자신들이 기대한 결말이 나기까지 끝도 없이 몰려들 사람들입니다. 그냥 며칠 두고 보시지요. 따뜻한 곳에서 살던 사람들이라 얼마 버티지는 못할 것입니다."

  태악 도인은 감정을 드러내지 않고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운상자를 바라보며 차갑게 말했다. 

  “시끄럽게 굴지 마라."

  태악 도인마저 그의 거처 안으로 들어가 버렸다. 운상자는 한시름 놓았다는 듯 한숨을 내쉬고 중얼거렸다. 

  “그래도 장문인인데 대우 좀 해주시지. 아니야. 바랄 걸 바라야지."

  운상자가 고개를 젓고서 운청산에게 미소 지었다. 

  “사제, 좀 괜찮은가?"

  “걱정을 끼쳤습니다. 이제 다닐 만합니다."

  운상자는 노안에 따뜻함을 그득 담은 채 운청산의 어깨를 두드리고는 바닥에 털썩 주저앉았다. 

  “이놈들아! 떠들면 그 순간에 쫓겨나게 생겼다. 조용히들 지내. 청인! 나머지는 너 알아서 하거라."

  청인자는 운청산에게 빙긋 웃어 보이고 운상자에게 말했다. 

  “할 게 뭐 있어야지요. 여긴 따뜻하니 아무 곳에나 자리 펴면 잘 수 있습니다."

  “이놈아! 밥은 먹여야 할 것 아니냐?"

  “그것도 아무 곳에나 솥 걸면 되지요."

  “하여튼 네놈이 알아서 해."

  운청산이 청인자에게 말했다. 

  “외숙! 반선 할아버지께서는 연단실에 들어가면 한동안 나오지 않을거라 하셨으니, 장문인께서는 할아버지 집에 머무시면 될 것 같습니다."

  “넌 어쩌고?"

  “전 오늘부터 귀부에서 머물며 회복 수련에 들어갈 생각입니다."

  “알겠다. 그리하마. 가서 쉬어라."

  운청산이 다시 운상자에게 읍하고 나서 바라만 보고 있던 종길에게 다가가며 손을 뻗었다. 종길은 울 것 같은 얼굴에 미소를 지으며 그 손을 굳게 잡았다.

  “진궁 그 친구가 없는 이상 방법이 없습니다, 소군."

  백요산은 한 치 앞도 알아볼 수 없는 안개를 바라보며 고개를 저었다. 틀림이 없는 말이었다. 보이는 것이라고는 쾌청한 하늘과는 어울리지 않는 짙은 안개뿐이었다. 갑작스럽다는 것, 그것은 자연스럽지 않다는 뜻이리라. 진법이라고 생각했다. 희생을 감수하고 들여보낸 이들이 수시진이 지나서야 엉뚱한 곳에서 넋을 잃은 채 튀어나왔으니 진법이 아닌 다음에야 그러할 리 없으리라.

  진퇴유곡!

  백무극으로서는 환장할 노릇이었다. 지금의 장소를 찾아내는 데만도 이틀이 걸렸다. 거리상으로는 걸어서 반나절이면 충분히 올 수 있는 곳이었지만, 곤륜문도들의 종적을 따라 산을 빙빙 돌다가 겨우 찾는 바람에 시간이 걸린 것이었다. 

 상대를 만날 수 있었다면 버린 시간을 아쉬워하지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상대가 나오지 않는 한 만날 수조차 없는 상황이니 죽을 맛이었다. 그렇다고 포기할 수도 없었다. 지금 포기하고 당장 다른 일에 몰두할 수 있다면 했을 것이다. 그러나 아무것도 이루지 못한 상태에서 청해를 가로지르고 감숙을 지나 섬서로 가서 다시 호북으로 내려가야 했다. 거기서 배를 타고 사친으로 돌아가야 하니 다시 한 달을 허송세월해야 했다. 

  ‘젠장! 모든 것이 엉망이로군. 제대로 되는 일이 하나도 없어. 어찌한다?'

  백무극은 두 주먹을 불끈 쥐고 안개를 꿰뚫어 보기라도 하겠다는 듯 노려보았다. 그러나 그는 곧 눈을 감고 고개를 저었다.

  마음을 안돈시킨 백무극은 고개를 들어 구름 한 점 없는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이제 막 미시나 되었겠군.”

  백요산이 고개를 끄덕였다. 백무극은 몸을 돌려 그의 뒤쪽에 모여 서있는 백의인들을 살폈다. 눈빛의 강렬함은 여전했지만 뺨이 부르트고 입술이 갈라진 모습은 대동소이했다. 눈빛도 백무극이 보기 때문에 일부러 기세를 일으킨 것일 수도 있으리라.

  “후우! 전주, 백여 명이 닷새가량 먹으려면 어느 정도의 식량이 있어야 할 것 같은가?"

  백요산이 눈을 빛내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군요. 오래 버틸 수는 없을 겁니다. 기다리다 보면 반드시 나오는 놈이 있겠지요."

  백무극의 반응은 백요산의 예상과 달랐다. 백무극은 밝지 않은 표정으로 고개를 저었다. 

  “이미 이곳에 진이 설치되어 있는 상태. 비축 식량이 없으리란 법은 없겠지. 앞으로 두 시진만 버린다가 오늘은 일단 철수하세. 수하들을 편히 쉬게 하고 내일부터 이틀만 더 기다리겠네. 그 안에 방도를 찾지 못한다면 돌아가야겠지."

  백무극은 말을 끝내자마자 혈응을 살폈다. 적응이 된 것인지 아니면 산의 아래쪽으로 내려온 까닭인지 알 수는 없었지만 혈응의 표정은 평소와 다름없었다. 

  “혈응!"

  혈응이 즉시 달려와 백무극에게 읍했다.

  “이젠 괜찮나?"

  “죄송합니다."

  혈응이 고개를 숙었다. 

  “좋아. 소불!"

  소불도 달려왔다.

  “두 사람은 미끼다. 나머지는 위쪽에서 몸을 숨긴 채 휴식을 취한다."

  혈응이야 할 말이 없겠지만 소불로서는 억울한 일이었다. 그도 춥고 지치기는 마찬가지였다. 그러나 백무극의 음성이 너무나 차가워 투정 부려볼 엄두도 내지 못하고 고개를 숙이고 말았다. 

  백무극은 찬바람을 일으키며 돌아서서 산을 올랐다. 삼십여 장을 올라가 버리자 소불과 혈응으로서는 백무극 등의 종적을 찾을 수가 없었다. 

  소불은 두 손을 비비며 언덕을 조금 올라가 안개의 십여 장 앞쪽 눈바닥 위에 털썩 주저앉았다.

  “쳇! 이게 다 자네 탓이야."

  혈응이 소불을 노려보다가 결국 그의 옆으로 다가와 주저앉으며 퉁명스럽게 말했다.

  “미안!"

  순간 소불이 입을 동그랗게 말면서 눈가에 웃음을 드리우고 혈응의 옆얼굴을 바라보았다. 혈응은 그 눈을 바라보지 않고 안개를 뚫어지게 보았다.

  소불은 혈응의 어깨에 손을 올리며 말했다.

  “그냥 해본 소리야. 자책하지 말게. 자네 혼자서 감당 못할 놈이 나올지도 몰라 나를 옆에 붙여놓으신 게지. 그리고 자네니까 믿고 맡기신 게야."

  혈응은 아랫입술을 삐죽 내밀면서 말했다.

  “앞으로 높은 곳에는 못 따라오게 하시겠지?"

  소불은 다시 두 손을 비비며 말했다.

  “내가 아나? 어쨌든 자네도 큰일이야. 천북 고원도 제법 높은데 거기서도 산취를 일으키면 어쩌나?" 

  혈응은 암담한 듯 눈을 감고 한숨을 내쉬었다. 바로 그때였다.

  뽀드득!

  소불과 혈응은 눈 밟는 소리를 향해 본능적으로 시선을 돌렸다. 안개 밖으로 노도사가 몸을 드러냈다. 눈이 마주쳤다. 숨어 있다가 나선 것이니 사람과 마주쳤으면 놀라는 것이 당연하리라. 그러나 노도사의 눈빛은 무정할 따름이었다.

  혈응과 소불은 노도사가 자신들의 존재를 알고 나왔다는 것을 깨닫고 본능적으로 몸을 일으켜 세웠다. 그 잠깐 사이에 혈응의 손은 품속으로 들어갔고 소불의 손은 도파를 쥐고 있었다.

  모든 일이 동시에 일어났다. 혈응이 품속에서 혈조를 착용하고 다시 손을 뺀 것과 소불이 도를 뽑은 것 그리고 삼십여 장 위쪽에서 백무극과 백요산이 몸을 날린 것도 동시에 일어난 일이었고, 노도사가 바닥을 찍어 쇄도한 것 역시 동시의 일이었다.

  그러나 간발의 차로 가장 먼저 일을 벌인 사람은 노도사 태악 도인이었다. 소불과 혈응 역시 간단한 고수가 아니건만 공력을 일으키는 그 짧은 순간에 태악 도인은 어느새 십여 장을 단축하여 파랗게 물든 두 손을 들었다.

  소불과 혈응은 이제 겨우 기세가 일어나는 자신들의 병기를 어쩔 수 없이 내뻗었다. 태악 도인은 오른손을 그대로 내뻗어 소불의 도를 후려치고 왼손을 휘돌려 혈응의 혈조를 빨아 당겼다.

  쩌저저저정!

  소불의 도신이 으깨어지면서 사라져 버리고 혈응의 팔목이 태악 도인의 왼손에 잡히는 순간, 소불은 피를 토하며 눈 속에 처박혔고 혈응은 눈을 감으며 허물어졌다. 그러나 혈응은 주저앉을 수도 없었다. 어느새 번쩍 들려서 태악 도인의 왼쪽 어깨 위에서 늘어져 버렸다.

  바로 그때 이십여 장을 내려왔다가 다시 허공으로 튀어 오른 백무극과 백요산이 동시에 손을 내뻗고 도강을 뿌렸다.

  콰콰콰콰쾅!

  엄청난 굉음이 울리는 순간 고이 잠들어 있던 눈들이 튀어 올라 앞을 분간하지 못할 정도의 눈보라가 되어 허공을 휘돌았다.

  백무극과 백요산은 강한 반탄력에 뒤로 밀려 그들이 마지막 밟았던 땅에 다시 내려섰다. 그리고 점점 잦아드는 눈보라 속을 뚫어지게 바라보았다.

  잠시 후 눈보라가 가라앉고 시야가 트였다. 백무극과 백요산은 혈응을 어깨에 짊어진 태악 도인을 발견할 수 있었다. 언제 꺼내 들었는지 알 수도 없는 검을 늘어뜨리고 안개에 몸을 반만 감춘 채 태연하게 서 있었다.

  태악 도인은 경악에 찬 백무극과 백요산을 차가운 눈으로 바라보며 말했다.

  “낚시질은 서투나 무공은 제법이군. 청산이 말리지 않았다면 사려 보내지 않았으리라."

  순간 백무극과 백요산이 정신을 차리고 다시 몸을 날리려 했다. 그러나 그때는 이미 태악 도인이 안개 속으로 스며든 후였다.

  백무극은 털썩 주저앉아 버렸다. 그리고 멍한 눈으로 안개를 바라보았다.

  ‘저 인간은 또 뭔가? 최근 들어 좌절만 거듭하고 있다. 항상 곤륜이 내 앞을 막고 있어. 젊은 놈의 경우는 그래도 나았다. 계획 밖의 일이었으니까. 허나 방금 그 늙은이의 일은 다르다. 모든 것이 내 예상대로 맞아떨어지는 듯하더니 끝에 가서 틀어져 버렸다. 더구나 그 무공은? 천응 신전주와 나를 동시에 퉁겨나? 태연한 척한 것이 아니었다. 그 인간은 조금의 손해도 보지 않았어. 그런 힘이 있으면서 피하는 건 또 무슨 뜻인가? 상대할 가치도 없다?'

  백무극이 눈을 질끈 감은 그때 백요산이 마음을 읽은 듯 위로하여 말했다. 

  “서툰 낚시질이라 했습니다. 그 늙은 도사가 모든 것을 예상하고 또 대비하고 있었다는 뜻이지요. 그리고 우리 또한 최선을 다했던 것은 아니지 않습니까? 그만한 무공을 가진 자가 있는데 피하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 것이겠습니까? 그만한 인간이 더는 없다는 뜻이겠지요."

  백무극은 한숨을 내쉬어 마음을 안정시키고 일어섰다. 

  “그렇게 생각하는가?"

  백요산이 고개를 끄덕였는데도 백무극은 고개를 저었다.

  “모르겠네. 일단 곤륜으로 돌아가세."

  백요산은 말없이 고개를 끄덕이고 뒤에 서 있던 백의인들에게 눈짓했다. 두 백의인들이 정신을 잃고 쓰러져 있는 소불을 들었다. 

  태악 도인은 혈응을 바닥에 내려놓고 운청산에게 물었다. 

  “집어오기 딱 좋게 서 있더구나. 됐느냐?"

  운청산은 혈응을 보는 즉시 그를 알아보았다. 사유하에서 봤던 사람이었다. 그 얼굴이 인상적이어서 잊기 힘든 사림인데다가 운청산이 백무극을 볼 때마다 항상 곁에 있었던 터라 더욱 쉽게 알아보았다. 

  “예. 이 사람이면 됩니다."

  태악 도인은 알겠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고 동부를 향해 걸어갔다. 그러나 몇 발자국 가지 못하고 돌아서서 말했다. 

  “두 녀석은 한꺼번에 상대하기가 껄끄러웠다."

  운청산은 희미한 미소를 지었다. 태악 도인이 무슨 의미로 그런 말을

했는지 알아들었기 때문이었다. 

  “한 사람에게는 밀리지 않았습니다."

  태악 도인의 입술이 씰룩였다.

  “그러냐? 나머지는 네가 알아서 해라. 아! 그놈 곧 깨어날 것이다만 두어 시진은 힘쓰지 못할 게야."

태악 도인은 할 말을 다 했다는 듯 동부로 들어가 버렸다. 그 순간 운상자와 청학자를 비롯한 네 사형제들이 운청산의 주변으로 다가왔다. 

  “허! 그놈 참 고약하게 생겼도다."

  운상자가 먼저 입을 떼자 청학자가 말했다. 

  “그렇긴 합니다만 사부님이 그런 말씀 하시는 건 좀 듣기 그렇군요."

  “뭐야, 이놈아! 이젠 아주 가지고 놀려고 하는구나." 

  그때 청인자가 끼어들었다. 

  “운 자 상 자의 의미가 무엇이더라?"

  “이것들이 아례 작당을 하여......"

  운상자는 말을 맺지 못했다. 혈응이 신음성을 터뜨리며 눈을 뜬 때문이었다. 

  혈응은 잠시 혼몽한 눈빛을 드러냈다가 곧 어리둥절한 기색으로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그와 운청산의 눈이 마주쳤다. 순간 혈응은 눈을 찢어져라 치뜨고 본능적으로 두 손을 들려 했다. 그러나 그의 두 손은 가슴으로 옮겨가고 얼굴은 일그러졌다. 

  “혈을 잡지는 않았으나 아직 힘을 쓰진 못할 것이오."

  혈응은 포기한 듯 눈을 감았다. 

  “배고프시오?"

  운청산의 뜬금없는 질문에 혈응은 다시 눈을 뜨고 그를 바라보았다. 그때 운청산은 혈응의 대답도 듣지 않고 뒤로 손짓했다. 송운이 몇 개의 단으로 쌓여 있는 목궤들 가운데 작은 것 하나를 들고 다가왔다. 운청산은 목궤를 열어 알이 굵은 단환 하나를 꺼내어 혈응에게 내밀었다. 

  “벽곡단이오. 사양하지 말고 드시오. 맛은 없으나 한동안 허기를 느끼지는 않을 것이오."

  혈응은 운청산의 눈을 직시하며 고개를 저었다. 

  “놀리지 말고 어서 죽여라 "

  운청산도 고개를 저었다. 

  “곧 돌려보내 드릴 것이오. 가서 윗분께 그냥 돌아가라 하더라고 전하시오. 내가 아직은 몸이 성치 않으나 이틀이면 예전과 다름없어질 터. 그때가 되어도 미련을 버리지 못한다면 여기 이분들과 함께 밤에만 찾아갈 것이오. 그리되면 무사히 돌아갈 수 있는 사람은 몇 되지 못할 것이니, 숙고하셔야 할 게요."

  “청산! 나도 한마디 해야겠다."

  청인자가 끼어들어 혈응에게 무표정한 얼굴을 들이밀고 말했다. 

  “대낮이라고 당당하게 맞서지 못할 우리가 아니다. 하지만 소득도 없이 그냥은 못한다. 싸우고 싶으면 돈을 가지고 와라. 천만 냥이다. 알겠느냐? 그러면 기꺼이 싸워주겠다."

  그 순간 운상자가 청인자의 뒤통수를 후려치고 웃는 낯으로 혈응 앞에 나섰다. 

  “이보게. 내가 바로 곤륜의 장문인 운상일세. 가서 윗분께 전해주게. 떠날 때는 불 같은 거 지르지 말고 고이 가시라고. 다 쓰러져 가지만 그래도 그마저 없으면 우린 추워서 살 수가 없다네. 알겠는가? 그냥 가자고 하시게. 만에 하나 곤륜이 뜨거워지는 불상사가 일어난다면 우린 낮에 쫓고 밤에 뒤를 칠걸세. 청해를 무사히 빠져나갈 사람은 몇 안 될걸. 서로 좋은 게 좋은 거 마닌가? 알겠지?"

  운상자는 말을 마치는 순간 슬며시 손을 뻗어 혈응의 수혈을 짚었다. 그리고 만면에 드리웠던 미소를 거두고 말했다. 

  “되었다. 들을 것 듣고 볼 것 보고 느낄 것 느꼈을 테니 이만 내보내."

  청인자가 다시 앞으로 나셨다. 그는 목궤에서 다시 벽곡단 한 알을 꺼내 혈응의 입속에 넣어주고 그를 들쳐 멘 후 귀곡 밖으로 나갔다. 

  혈응은 넋이 나간 얼굴로 벽곡단을 우물거리면서 태상궁으로 걸었다. 번을 서던 백의인들이 그를 발견하고 달려왔다.

  혈응은 그때서야 정신을 차리고 바닥에 주저앉아 눈으로 얼굴을 씻었다. 이상하게 산취를 느낄 수가 없었다. 그러나 그는 그 사실을 느낄 틈도 없이 백무극에게로 달려갔다. 

  “눈은커녕 봄날이더라? 온천이 샘솟는데다가 벽곡단까지 잔뜩 쌓여있더라? 거기다가 싸우고 싶으면 돈을 달라?"

  백무극은 혈응의 가감없는 보고를 받고서 계속 반문하다가 결국 눈을 감았다. 그리고 다시 중얼거렸다. 

  “그놈, 그러니까 청산이라는 그놈이 사천무림련이 아닌 이곳에 있었다? 상처를 입은 듯했으나 이틀이면 나을 거라 했다? 하하해 하하하하하하! 이거 완패로군. 그 말이 당장 진실이든 아니든 간에 시간이 흐르면 결국 진실이 될 터. 이제는 잘해봐야 양패구상인가?"

  백무극은 눈을 감은 채 고개를 저었다. 고지식한 혈응은 뜻을 이해하지 못했지만 그는 밤에만 공격하겠다는 것이 무슨 뜻인지 확실하게 알고 있었다. 

  식골령을 넘기 전 그 어둠 속에서 무슨 일이 일어났던가. 사천이나 되는 백라천궁 사람들이 청산이라는 무명의 곤륜청년 한 사람에게 조롱을 당했었다. 어찌해 보지도 못하고 수백 명의 부상자들을 뒤에 남겨둔 채 전진해야만 했다. 그런데 운청산 같은 능력자들이 몇 더 있을 것 같은 곤륜이 밤에만 공격한다면 그 결과가 어찌 될 것인가는 명약관화한 일이었다. 더구나 신범제일 곤륜. 작정하고 도주하면 잡을 방도가 없으리라. 결국 그들의 호언장담처럼 청해를 벗어날 수 있는 사람은 몇 되지 않으리라.

  “하하하! 내가 너무 쉽게 생각했어. 전주!"

  “예, 소군!"

  “완패로세. 돌아가야겠어. 어두위지기 전에. 그들 말대로 불장난은 하지 말고."

  백요산은 이유를 묻지 않고 바로 허리를 접었다 그 순간 백의인들이 부산하게 움직였다. 백무극 또한 태상궁을 벗어나 밖으로 나섰다. 

  무극은 혈응을 응시하며 씁쓸하게 웃었다. 

  “벽곡단이 산취에는 특효인가 보군."

  “예? 아! 잘 모르겠습니다."

  “쯧. 농담도 못 알아듣고. 그래서 내가 소불과의 대화를 즐기는 걸세. 가서 소불이나 돌보게. 많이 다쳤어."

  혈응은 겸연쩍은 얼굴로 허리를 접고 소불에게로 갔다. 

  백무극은 금방이라도 부서져 버릴 것 같은 태상궁을 돌아보며 낮게 중얼거렸다. 

  “고맙다고 해야 하나, 곤륜? 배운 게 많았어. 이제 나 강해질 것이다. 다시는 두려움에 억압받지 않을 것이야. 그때가 되면 하늘에 날을 수 있도록 뜨겁게 태워주마. 곤륜!"

  백무극은 차갑게 미소 짓고 산문을 지나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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