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70화 (70/79)

다시 비명소리가 연이어 들려왔다. 백무극 등도 감히 무시할 수 없어 고개를 돌렸다. 한 사내가 동료들의 시신을 정리하고 있던 백의인 다섯을 죽이고 시신들을 넘어 다가오고 있었다.

“저-저놈이 어-어떻게?”

놀람이 너무 커서 모두가 얼어붙은 것 같았다. 모두가 죽은 시신을 보았었다. 연인과 함께 화살에 꼬치가 되었던 그 모습을 똑똑히 보았었다.

“손에 사정을 두었더냐?”

백무극이 백영담에게 차갑게 물었다. 백영담은 고개를 저었다. 겨우 삼십 장 앞이었다. 아무리 살살 쏜다 하여도 오호궁이라면 연약한 몸뚱이 두 개를 내버려둘 턱이 없었다.

고개를 젓던 백영담이 갑자기 눈을 부릅떴다. 흘려 넘긴 것이 있었다. 삼십 장 거리에서 쏘았다면 몸뚱이 두 개 정도는 꿰뚫는 정도가 아니라 커다란 구멍을 내고 수십 장 더 날아갔어야 정상이었다. 그런데 여인조차 뚫지 못하고 두 사람을 동시에 꿰어 놓았다.

백영담이 자신의 실수를 인정하려 했다. 그러나 말을 할 틈이 없었다. 천천히 걸어오던 운청산이 그를 보면서 갑자기 속도를 높였고 수 십 명의 백의인들이 삼각파도가 되어 동시에 그를 감싸듯 쇄도해갔다.

비명을 지를 수 있었다면 질렀으리라. 그러나 운경산이 할 수 있는 건 생각을 전하는 것뿐이었다.

‘현산 형! 또 다시 이런 짓을 벌리다니 녀석이 지금 제 정신이오, 아니오?’

운현산이 느끼는 것은 운경산 역시 느낄 수 있는 바, 그 역시 혼란스러울 수밖에 없었다. 생각을 해야 답을 할 텐데 느껴지는 것이라고는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감정의 색채들뿐이었다.

운현산은 억지로 대답을 짜내었다.

‘제 정신이 아닌 것 같다. 그 여인을 그리 쉽게 죽여 버린 것도 그렇고, 손에서 이는 경력의 색채 또한 평소의 청기와 달리 청홍기가 동시에 느껴졌다. 그리고 보아라. 지금 이 상황에서 웃고 있구나.’

모두가 운청산의 얼굴을 주목했다.

그랬다. 운청산이 제 정신일 리가 없었다.

식골령에서 사천의 백의인들을 막아섰을 때는 죽음을 각오하는 비장함과 함께 탈출하고자 하는 욕구가 동시에 느껴졌었다. 그리고 상대를 최소한으로 줄이기 위해 진을 치기도 했다. 적어도 뒷일을 생각하고 있었던 것이었다.

그러나 조금 전에는 달랐다. 그가 부상 입힌 백무강도 보였고, 그를 죽음의 문턱까지 내몰았던 백무극도 보였다. 그런데 그는 외눈으로 볼 수 있는 것은 한 사람뿐이라는 듯 오직 백영담만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백여 명의 백의인들이 오로지 그 한 사람만을 죽이려고 달려드는 순간에는 회색 빛 눈동자에 짜증을 드리우다가 다시 히죽거리고 있었다.

‘당 아가씨의 시신가지 업고 도대체 어쩌려고?’

낙천적인 천성을 지닌 운추산마저도 걱정이 가득한 눈빛으로 운청산을 주시했다.

그때였다. 운청산은 외눈을 번득이며 바닥을 훑어보았다. 거기에는 수백 자루의 병장기들이 굴러다니고 있었다. 백의인들의 도가 압도적으로 많았지만 칼과 창은 물론 당가의 암기들까지 널려있었다. 반 시진 전만해도 사천무림련과 백라천궁의 수천 무사들이 서로 칼부림을 하고 죽어나자빠졌던 장소인 탓이었다.

운청산은 또 다시 입술을 비틀어 히죽거리고 외눈을 번득여 다가오는 백의인들을 살폈다.

그들과의 거리는 불과 십여 장. 운청산은 다시 한 번 야릇한 미소를 짓고 오히려 앞으로 나가며 세차게 발을 굴렀다.

쾅!

엄청난 굉음과 함께 그를 중심으로 방원 오 장 안에 있던 수십 자루의 병장기들이 진흙들과 함께 허공으로 튀어 올랐다. 그 순간 운청산이 제자리에 휘돌았다. 진흙탕이 나선형으로 튀어 사방으로 흩어졌다. 그와 함께 운청산의 신형도 셋, 넷 종국에 가서는 일곱으로 갈라져 허공을 떠도는 병장기들 사이사이로 파고들며 앞과 좌우로 흩어졌다.

산형들로부터 꼬리처럼 팔랑거리는 당우리의 두 다리를 보며 운현산이 걱정했다.

‘당 아가씨의 시신이 짐이 되고 있다. 이미 진원진기마저 뽑아 공력을 되돌린 상태이니 회룡산형을 펼치면 아홉의 산형들이 떠돌아야 하거늘 일곱 뿐이야. 안 좋군.’

운현산의 걱정과는 달리, 운청산은 회룡산형을 펼친 후 바로 곤륜권장팔절 가운데서도 가장 화려한 초식이라는 천호만격을 연환했다. 순간 벼락같이 뻗어나가는 그의 두 손이 허공을 떠도는 병장기를 후려치고 휘돌렸다.

안 그래도 다가오던 백의인들의 발길을 멈춰 세우게 만들었던 병장기들이었건만 빛살처럼 날아들고 선풍처럼 휘도니 전진은커녕 몰러서기조차 어려웠다.

전좌후의 삼방에서 비명소리가 터지고 피가 튀었다. 운청산이 후려친 도검창에 꿰뚫리고 그가 휘돌린 도검에 목과 팔과 가슴이 베어진 이들이 흙탕물을 튀기며 널브러졌다. 그 순간에도 운청산의 신형들은 삼방을 휘저으며 병장기를 후려치고 휘돌리기를 멈추지 않았다.

운청산의 신형들이 하나로 합쳐졌다. 더 이상 다가오는 사람이 없었다. 오히려 십여 장을 더 물러나서 그와의 거리를 이십 장으로 늘려 잡았다.

운청산은 그의 앞으로 널브러져 있는 백의인들을 힐긋 보고는 또 다시 히죽거렸다. 그리고 손을 뻗어 지금껏 허공을 휘돌고 있는 푸른 수실이 달린 삼척 반의 청강검을 손 안으로 끌어 당겼다.

그는 오직 백영담이 서있는 방향만을 주시하며 검파를 쥐었다가 펴기를 반복했다. 몇 번을 거듭하여 손에 익숙해지자 발 앞에서 푸들거리는 백의인의 배를 밟고 허공으로 솟구쳤다.

*마지막이네요. 저녁에는 시간이 없을 것 같아 조금 일찍 올립니다.

*그동안 읽느라고 수고 많으셨다고 하면 제가 스스로에게 너무 섭섭하겠지요?^^;;;

그동안 오타 잡아주시거나 버그 찾아주신 분들께 한꺼번에 감사드립니다. 따로 답글 드리지 못했습니다만, 덕분에 수정할 때 많이 편했습니다. 꾸벅!

육 권은 가능하면 올해 안에 끝내서 빠른 시일 내에 낼 수 있도록 노력하겠습니다.

*운청산이 악선이 될 거라고 기대하시는 분이 있는 것 같습니다. -.-;;; 하지만 제 글 쓰는 성향을 아는 독자라면 그런 기대는 하지 않을 겁니다.

카리스마 만땅(^^;;;)의 캐릭터 또한 제 온유한 성격 상 무립니다. 어깨와 목에 잔뜩 힘준 채 오래 집중할 수 있는 스타일이 아닙니다.^^;;;

괴선의 怪자에 너무 많은 의미를 두지 마시기 바랍니다. 무협에서 괴는 보통 정사지간의 인물에게 별호를 부여할 때 많이 쓰지요. 앞으로의 운청산의 행보가 그런 성향을 띄기는 할 테지만 두드러지지는 않을 겁니다. 검선이면서 술선(術仙)이고 거기에 혼령들까지 주렁주렁 달고 다니니 괴선인가 보다, 정도로 해석하시면 족하겠습니다.

*오 권의 중반부까지는 다 읽은 것으로 생각하고 삭제합니다.

*이미 사 권까지 책으로 나간 상태이니 이제 뭔가 개선할 점을 발견한다 해도 늦었습니다만, 그래도 지금껏 읽으면서 아쉬웠던 점이나 껄끄러웠던 것들이 있으면 한 마디 남겨주시기 바랍니다. 다음 것을 쓸 때는 참고가 되겠지요.

만질 수 없어도 사랑은 여전히 따뜻하다.

백무극은 운청산의 눈빛을 직시하며 진저리를 쳤다. 그를 본 것이 채 두 시진도 지나지 않았는데 완전히 딴 사람이 되어있었다. 쓸데없이 부담스럽던 그 유순한 눈빛이 배고픈 야수의 눈빛으로 돌변해 있었다.

백무극은 갑자기 수하들이 양떼처럼 느껴졌다. 다른 누구도 아닌 곤륜의 호랑이였다. 그처럼 대책 없이 빠른 호랑이라면 일단 수하들 사이에 스며든 후에는 탈진할 때까지 따로 잡을 방도가 없으리라. 그가 지칠 때까지 감수해야 할 끔찍한 피해를 생각하니 백무극은 노호성을 내지르지 않을 수 없었다.

“비켜라.”

그와 수뇌진들을 보호하기 위해 앞을 가로 막았던 백의인들이 일시에 좌우로 갈라섰다. 순간 백무극과 백무강의 좌우에 서 있던 백라천궁의 내전과 외문의 수장들 넷이 거의 동시에 튀어나왔다.

전면에서 쇄도한 사람들은 둘. 운청산도 얼굴을 아는 철혈신전과 혈랑신전의 수장들인 백철후와 백낭우였고, 좌측에서 움직인 이는 귀주의 동북 일대를 장악하고 있는 북현신문(北玄神門)의 수장 백현월(白玄月)이었으며, 우측으로 휘돌아 움직인 이는 사천의 남쪽이며 운남의 북서 지방에 해당하는 대관 지역을 관할하고 있던 보존신문(保尊神門)의 수장 백명경(白命鏡)이었다.

직접 손을 쓰려 했던 백무극이 미간을 찌푸리며 가슴까지 들어올렸던 두 손을 내렸다.

불안했다. 개개인의 실력이 운청산에게 못 미치는 것은 명백한 사실이었다. 합공이라면 결과는 다르겠지만, 그 와중에 천궁의 중추라 할 수 있는 인재들이 죽거나 크게 다치는 일은 그가 원하는 바가 아니었다. 하지만 이미 말릴 수 없는 상황이었다.

백무극은 언제든지 출수할 수 있도록 공력을 끌어올리며 네 사람과 운청산을 주시했다.

넷 가운데 앞서 달려간 이는 철혈신전주 백철후였다. 그는 운청산에게 바로 부딪치겠다는 기세로 전신을 붉은 기운으로 감싼 채 달려들었다. 운청산과의 거리가 십여 장으로 좁혀지는 순간 그가 먼저 솥뚜껑 같은 오른 주먹을 휘돌리며 내뻗었다.

우웅!

팔에서 묘한 소리가 울리는 순간 비와 피에 젖어 팔에 찰싹 달라붙어있던 옷자락들이 백철우의 팔을 비틀 듯 휘돌았다. 옷감 속에 스며있던 핏물이 주르륵 흘러내리는 순간 어깨부터 시작된 붉은 빛 기운이 파동 치며 뻗어나갔다.

백철후의 철혈회륜신권(鐵血廻輪神拳)이 시작이었다. 거의 동시에 백철후의 머리 위로 솟구친 백낭우가 낭아도를 십자로 휘둘러서 날카로운 검기를 쏟아냈고 좌우에서도 연속적으로 강력한 기운이 뿜어져나갔다.

백무극이 손바닥에서 요동치던 기운들을 늦추며 미간의 주름을 풀었다. 네 사람의 공세가 당장 물러서지 않으면 그 자신도 감히 견뎌내지 못할 정도라고 판단한 탓이었다.

그 순간 운청산의 오른쪽 입술 끝에 위로 말려 올라갔다. 그는 다시 바닥을 찍으려던 오른발을 비틀어 오히려 복사뼈까지 파묻고 백철후의 권력을 향해 검을 내뻗었다. 검신에 어려 있던 청홍 빛 기운이 권력을 마중 나가듯 뻗어나갔다.

모두가 눈을 부릅떴다. 물러서지도 앞으로 나아가지도 않았을 뿐만 아니라, 검을 휘두른 것도 아니고 오직 백철후의 권력에만 집중하여 내뻗었다. 누가 보아도 자살행위나 마찬가지였다.

괴이한 것은 그뿐이 아니었다. 그의 검에서 나온 검력은 지금껏 그가 보여 왔던 패도무쌍한 기운에 비한다면 너무나 얌전한 것이었다. 네 사람을 당적하기는커녕 백철후 한 사람마저 당해내지 못할 약한 기운이었다.

모두가 의아함을 넘어 당혹함을 드러낼 때, 운청산은 허리를 접어 몸을 낮추고 굳건하게 땅을 짚은 오른발 하나에 무게중심을 둔 채 왼발을 들었다. 그리고 내질렀던 검을 끌어당겼다.

그 순간 철혈회륜신권의 권력과 운청산의 검기가 부딪쳤다. 엄청난 폭음이 일어날 것이고 운청산은 나머지 세 사람들에게 난자되고 흩어질 것이다. 그러나 폭음은 일지 않았다.

권력은 백철후의 의중과는 하등 상관없이 운청산의 오른쪽으로 비켜나갔다. 그 순간 힘없던 검과 그의 전신에서 동시에 청홍빛 기운이 뻗어 나와 그와 당우리의 전신을 감쌌다.

췌르르르르륵!

오른발을 축으로 운청산의 신형이 팽이처럼 휘돌았다. 태청구벽기가 순식간에 부풀어 오르고 검강이 사방으로 휘돌았다. 그의 발끝에 닿아있던 땅이 안으로 파이면서 진흙탕 물들이 태청구벽기를 따라 감겨 올라갔다가 끝내 견디지 못하고 선풍에 말려 사방으로 튕겨나갔다.

사우팔절검의 절초들 가운데서도 가장 무모하다는 풍륜화망(風輪化網)!

사량발천근의 묘용을 응용하여 적의 힘으로 회전력을 얻어 공수를 겸하는 초식. 이론적으로야 가능했지만 실전에서 감행할 사람은 거의 없으리라. 만약 풍파투도라 불리었던 태악도인이 아니었다면 결코 만들어질 수 없는 초식이었다.

공격했던 이들이 눈을 부릅뜨는 순간 갑자기 칠 장으로 늘어난 운청산의 주변을 그물같이 감싸는 강기벽과 검강은 선풍과 함께 세 사람들의 기운들을 퉁겨내고 소멸시켰다.

“끄으윽!”

허공에서 내려 꽂히던 세 사람들이 철벽에 부딪친 듯 삼방으로 퉁겨났다. 왼쪽 손을 다시 내뻗으려던 백철후는 자신이 오히려 운청산의 공격에 일조했다는 것을 깨닫고 망연자실했다.

그때 운청산이 치켜들고 있던 왼발로 땅을 건드렸다. 순간 휘도는 팽이에 줄을 댄 것처럼 그의 신형이 허공으로 튀어 올라 백철후를 스치듯 지나쳤다.

백철후가 다급하게 주먹을 들어올렸으나 청룡구전이 더해진 운청산의 신형은 이미 그의 사정권에서 벗어나 백무극을 향해 내리꽂히고 있었다.

백무극은 당황하지 않고 연달아 두 손을 내뻗었다. 하얀 구슬 같은 기운들이 계속해서 튀어나갔다.

백양난첩장(白陽亂疊掌)!

백양천화신공(白陽天花神功)과 함께 백라천궁의 호궁무공 가운데서도 정화라 할 수 있는 장법. 극성에 달하면 열여덟 개의 장환을 연달아 뽑아낼 수 있다는 무공이었다.

열여덟 개의 장환이 동시에 허공을 휘돈다면 누가 있어 근접이나 할 생각을 하겠는가. 과거 멸청광자라고 불렸던 백무극의 사조 백천명(白天命)은 열두 개의 장환으로 청성을 뿌리째 흔들어놓은 적이 있었다.

방울방울 솟아난 여섯 개의 하얀 강기의 구슬들이 허공에서 내리꽂히는 운청산 한 사람에 집중되었다.

운청산은 검을 내뻗으려 하다가 갑자기 천근추를 펼쳐 바닥에 꽂히듯 떨어졌다. 그리고 땅에 닿자마자 바로 발목을 비틀어 한 사람에게로 날아갔다.

백무극이 입술을 질끈 깨물고 두 손을 허공에서 휘돌렸다. 여섯 개의 하얀 구슬들이 방향을 비틀어 운청산의 등을 따라갔다. 태청구벽기가 펼쳐지면서 그의 등 쪽으로 강기의 벽을 겹겹이 치기 시작했다. 첫 번째 구슬이 강기에 부딪혔다.

쾅!

입에서 한 줄기 핏물이 토해지는 순간 운청산의 신형은 기다렸다는 듯이 순간이동을 하여 다섯 개의 하얀 구슬들을 뿌리친 채 한 사람에게로 날아갔다. 바로 백영담이었다.

“피해라! 영담!”

백무강이 애타게 소리쳤다. 그러나 백영담은 점차 커져가는 운청산의 얼굴을 멍한 눈빛으로 바라볼 따름이었다.

저항을 해볼 수가 없었다. 시커멓게 뚫린 왼쪽 구멍과 이글거리는 오른쪽 눈을 정면으로 대하면서 자신이 얼마나 악착같은 인간을 적으로 만들었는지 확인했을 따름이었다.

“컥!”

운청산은 검첨으로 백영담의 마혈을 제압하고 왼손을 뻗어 목줄기를 쥐어 몸을 휘돌렸다. 급히 뒤를 따라오던 백무극은 두 손을 머리 위로 마구 휘돌려 운청산을 향해 뻗어냈던 장환들의 방향을 비틀었고 다시 소멸시켰다.

운청산은 백영담의 어깨 너머로 백무극을 주시하며 피가 범벅이 된 입술을 비틀었다.

“끄으으으윽!”

백영담의 입에서 듣는 것만으로도 가슴이 답답해지는 신음 소리가 흘러나왔다.

“크크크크!”

운청산은 피가 튀는 웃음소리로 신음소리를 죽여 버리고 눈물을 찔끔대는 백영담의 목줄을 더 세게 틀어쥐면서 물속으로 한 발 한 발 물러섰다.

거칠어진 물살에 이미 잠겨버린 선착장에 이르렀다. 백무극은 두 손을 치켜든 채 백무강의 눈치를 힐끔 보고서 아직 물이 차지 않은 선착장 근처까지 따라갔다.

콰콰콰콰콰콰!

본격적인 싸움이 시작된 듯 두 개의 물기둥들은 허공으로 삼십여 장이나 솟구쳐 올랐다가 물속으로 빠지기를 반복했다. 강바닥에 가라앉아있던 진흙들이 뒤집어져 금사강의 청류는 어느새 황톳물이 되어 있었고 그 물살도 수백 개 파랑으로 변해버렸다.

거센 물줄기가 운청산을 덮쳤다. 그의 어깨를 때리고 허리까지 잠겨들게 했다. 쓸려내려 갈만도 하건만 운청산은 선착장에 못 박힌 듯 꼼짝 않고 서있었다.

운청산은 다시 한 번 백영담의 어깨 너머로 미간을 잔뜩 찌푸린 채 망설이고 있는 백무극의 눈치를 살핀 후에 백영담의 목줄을 느슨하게 풀어주었다.

“켁! 켁! 켈록!”

눈물을 흘리면서 잔기침을 한 끝에 백영담이 겨우 운청산의 눈을 주시했다.

운청산은 엄지로 백영담의 인후혈을 쓰다듬으며 차가운 미소를 지었다.

“큭! 왜 반항하지 않았지? 했으면 더 재밌었을 텐데, 응?”

백영담은 죽음의 한 치 앞에 와있는 사람답지 않게 미소를 지었다.

“무력할 때도 죽이지 못했는데 펄펄 날뛸 때 반항해봐야 무엇하나?”

운청산의 입술이 묘하게 비틀렸다. 웃음은 아니었다. 뭔가 못마땅한 기색이 완연했다.

“왜? 반항하지 않아서 못 죽이겠나? 프흐흐!”

백영담은 남의 죽음을 얘기하듯 편하게 웃었다. 순간 운청산의 눈빛에 붉은 기운이 감돌았다. 그는 정색을 한 채 검을 물속의 선착장 바닥에 꽂았다. 그리고 품속에 손을 넣어 반 자가 조금 넘는 오호전을 꺼내어 들었다.

“죽여야지. 암! 이제 죽일 거야.”

운청산은 넋두리하듯 말하고는 물속에 잠겨있던 화살촉을 물 밖으로 꺼냈다. 바로 그 순간 화살촉에서 잠깐 동안 묘한 광채가 어리는 것만 같았다. 그 광채는 운청산 뿐만이 아니라 백영담도 보았다.

그러나 운청산은 광채 이상의 것을 보는 듯 했다. 그는 놓아주었던 백영담의 목줄을 다시 움켜쥐고 소리 질렀다.

“왜? 어째서?”

백영담으로서는 이해할 수 없는 일이었다. 제 정신이 아닌 듯도 했지만 그렇다고 숨통을 막아놓고 왜 죽였냐고 묻는 것은 아닌 것 같았다. 왜냐하면 그의 번득이는 외눈은 백영담의 얼굴이 아니라 묘한 광채를 내는 화살촉으로 가있기 때문이었다.

이번에는 우는 듯한 목소리가 새어나왔다.

“왜? 왜 관두라는 거야? 우리야. 왜?”

그의 외눈에서 결국 눈물이 흘러내렸다. 그가 칭얼거리듯 말했다.

“우리. 그렇게 손짓만 하지 말고 입술이라도 읽게 해줘. 응? 어디?”

순간 운청산이 고개를 비틀었다. 그가 보는 곳은 두 개의 물기둥들이 엎치락뒤치락 거리면서 난리를 피우는 곳이었다.

“그러면 되겠어? 정말 그걸로 괜찮겠니? 해볼게. 그런데 당신은 항상 어려운 것만 해달라고 하더라.”

눈물이 줄줄 새는 눈과는 달리 그의 입술에는 부드러운 미소가 어렸다. 그와 함께 붉은 기운이 감돌던 잿빛 눈동자도 청명함을 되찾는 듯 했다.

운청산은 오른손 엄지로 화살촉을 쓰다듬다가 그것을 품속에 넣고 발 옆에 꽂아두었던 검을 쥐었다. 그리고 망설이는 눈빛으로 백영담을 바라보다가 말했다.

“당신을 내버려 두라더군. 하지만 난 온전히 보낼 수 없어. 당신의 운명은 당신 자신과 동료들의 손에 맡겨보도록 하지.”

운청산은 목줄을 쥐고 있던 손을 내려 그의 쇄골을 쥐었다.

뿌득!

쇄골이 산산이 부서졌다.

“이젠 활을 쏘지 못하겠지? 당신은 자신에게 어떤 가치를 두나? 그 가치에 따라 내가 잔인한 놈도 될 수도 있을 것이고 관대한 놈도 될 수 있겠지. 결정은 스스로 하도록!”

운청산은 백영담의 어깨 너머로 눈을 돌렸다. 백무극이 언제라도 출수할 수 있도록 두 개의 하얀 구슬을 손바닥 위에 얹어 놓은 채 이글거리는 눈빛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운청산은 미소를 지으며 몸을 뒤로 눕혀 강물 속으로 스며들었다. 그 순간 백무극이 허공으로 치솟았다. 그러나 그는 이내 방향을 바꾸어야 했다. 물살에 휩싸인 백영담이 순식간 떠내려가 버렸기 때문이었다.

백무극은 파랑을 찍고 물위를 세 걸음이나 연달아 걸어 백영담의 목덜미를 잡아채서 강변으로 몸을 날렸다. 그는 백영담을 백무강의 발아래 집어던지고 다시 운청산을 찾았다. 그러나 운청산은 물에 휩쓸려 가버린 듯 찾을 수가 없었다. 그는 결국 운청산 찾기를 포기하고 돌아섰다.

백무극은 백무강의 옆에서 어깨를 붙잡은 채 겨우 일어선 백영담을 못마땅한 눈으로 노려보았다.

“저항 한 번 해보지도 못하고 목줄을 잡혀? 바보 같은 놈! 환도를 잃은 네 사부를 생각지 않았다면 그놈과 같이 죽여 버렸을 것이다.”

백무극의 음성과 표정은 지금껏 그가 백영담을 대했던 것과는 천양지차였다. 너무나 차가와 과연 예전에 그리 친근하게 대했던 그 사람이 맞는지 의심해야 할 정도로 차가웠다.

백영담은 눈을 내리 깐 채 고개를 숙였다. 백무강이 이동침상에서 힘겹게 일어서서 허리를 접었다.

“죄송합니다. 소군!”

정상이 아닌 백무강이 허리를 접는데도 백무극은 그를 만류하지 않았다. 무강 아저씨나 무상이라는 호칭 대신에 네 사부라 칭한 것이 단순히 화가 나서 실수한 것만은 아닌 듯싶었다.

백무극은 실수가 아니었음을 확인시켜 주듯이 백무강을 차갑게 응시하고 돌아섰다. 돌아간 그의 시선이 닿은 곳은 백철후 등 네 사람이었다.

백철후를 제외한 세 사람의 몰골은 하나같이 형편없었다. 입가에 흘린 피를 닦지 못한 이도 있었고 심한 내상을 입은 듯 두 다리를 후들거리고 있는 이도 있었다.

백무극이 또 다시 미간을 찌푸리자 네 사람은 일시에 고개를 숙였다.

백무극은 눈을 감고 고개를 저었다.

“하아! 그놈 참! 예전에는 그저 그 나이에 대단한 정도라고 생각했었는데---. 고개들 들라. 그것이 어찌 그대들 잘못이겠는가? 그놈이 대단한 것이지.”

그때 천기신사가 옆으로 다가와 차분히 말했다.

“그렇습니다. 참으로 대단한 친구였습니다. 저번에는 미처 확인하지 못했습니다만, 오늘 보니 그 친구는 특이하게도 인간들을 수호정령으로 삼고 있었습니다. 결국 무인이면서 술사라는 뜻이지요. 그 나이에 그만한 준재를 길러냈으니 곤륜 또한 참으로 대단한 곳이지요.”

“술사이기도 하다? 그렇군. 이상한 방법으로 이상한 진까지 설치한 녀석인데 수호정령까지 달고 다닌다면 음양의 술법에 모두 달통했다는 소리군. 좋아. 결정했다. 사천공략이 끝나면 짬을 내어 곤륜으로 간다. 곤륜이 먼저 우리를 범했으니 사부님의 언약을 깨는 것이 아닐 터. 내 아예 곤륜의 씨를 말려버리리라.”

그 말을 하고 나서야 조금 마음이 풀린 듯 백무극은 강의 하류로 고개를 돌렸다. 수 길이 넘을 것 같은 파랑이 연속해서 하류로 밀려 내려가고 있었다. 그 정도만 해도 금사강 하류에 사는 사람들은 때 아닌 물난리를 만날 테니, 배들이 제 기능을 못하는 것은 의심할 여지도 없을 것이다.

그때 드드득, 소리가 나며 눈앞의 선착장이 세찬 파랑을 견디지 못하고 뜯겨져 떠내려가기 시작했다. 백무극의 입가에 만족스런 미소가 걸렸다.

그때 지금껏 백무극의 무거운 분위기에 눌려 입도 떼지 못하던 소불이 갑자기 소리쳤다.

“수왕천마?”

백무극은 무슨 뚱딴지같은 소리냐는 표정을 지으며 등 뒤의 소불을 돌아보았다. 그의 죽음은 그 자신은 물론 소불 그리고 혈응 역시 눈으로 확인한 것이었다.

그러나 백무극은 곧 소불이 보는 곳으로 시선을 돌리지 않을 수 없었다. 소불은 물론이고 혈응마저 입을 반쯤 벌린 채 한 곳을 보고 있기 때문이었다.

백무극은 찢어져서 피가 날만큼 눈을 치뜰 수밖에 없었다. 과연 수왕천마라고 착각할 만한 사람이 있었다. 백여 장 밖, 그것도 해일이라 불러도 모자라지 않을 거센 파도가 이는 강 한 가운데에 사람이 있었다.

그러나 수왕천마와는 다른 것이 있었다. 수왕천마는 잔잔한 호수 위에서 아무런 움직임도 없이 떠 있었지만, 지금 두 줄기 물기둥들이 치열하게 싸우는 곳으로 다가가는 이는 전신을 맹렬하게 휘돌리고 있었다. 그뿐이 아니었다. 그의 두 발 아래는 두 줄기 물살이 꼬인 듯한 오 장 가량의 물기둥이 있어서 그 어떤 파랑도 그를 물속으로 끌어내리지 못했다.

백무극은 안력을 돋워 사람을 자세히 살폈다.

“저-저놈은?”

분명히 운청산이었다. 백무극은 급히 천기신사를 돌아보며 물었다.

“저놈 술사라고 하지 않았나? 음도의 술법을 해제할 수 있는가?”

천기신사는 강하게 고개를 저었다.

“위치를 잘못 잡았습니다. 싸움을 멈추게 하려면 산룡이 돌아갈 자리를 마련해주어야 하는데 그리하려면 음도를 치고 결계를 풀어주어야 합니다. 저기서는 불가능합니다.”

백무극이 안도하는 그 순간에도 운청산은 계속해서 두 줄기 물기둥이 난리를 치는 곳으로 다가갔다. 물기둥들이 휘감겼다가 강으로 떨어지는 때마다 거대한 파도가 일었고 그때마다 운청산 또한 뒤로 밀렸지만 그는 쉬지 않고 조금씩 앞으로 나아가고 있었다. 그리고 마침내 새로이 일어선 두 줄기 물기둥의 십여 장 앞에 이르렀다.

쾅!

운청산이 검을 휘두르자 뇌성이 치면서 파란 청기가 두 줄기 물기둥 사이를 후려쳤다.

콰쾅!

치고 또 쳤다. 그러나 두 줄기 물기둥은 맞을 때에만 잠시 움질거렸다가 이내 다시 엉겨 붙었다.

백무극의 입에서 미소가 감돌았다.

“아하하하! 무공으로 술법을 깨겠다? 결국 헛수고하고 있단 말인가? 어쨌든 대단한 놈이야. 이 풍랑 속에서 저 짓거리라니 수왕천마나 다른 바 없지 않은가?”

그 순간 운청산이 지금까지와는 그 기세가 완전히 다른 맹렬한 회전을 이루어냈다. 오 장에 불과하던 물기둥이 십여 장으로 솟구치고 아래로 향해 있던 그의 검 역시 맹렬하게 회전하여 강물을 빨아들이고 있었다.

“으아아아합!”

강변까지 들리는 기합성과 합께 십여 장이 넘는 물기둥이 강물과 분리되더니 허공으로 치켜 올라갔다.

쿠르르르르릉!

천둥과 뇌성이 이는 순간 물기둥은 두 물줄기들이 엉킨 상단을 횡으로 후려쳤다. 지금껏 단 한 번도 형상을 흐트러뜨리지 않았던 두 줄기 물기둥들이 네 조각으로 갈라져 강물로 떨어졌다. 거대한 네 조각의 물기둥들이 일시에 강에 떨어지자 엄청난 파도가 솟구쳤다. 그러나 그 파도가 사라진 후에는 언제 강이 일렁였냐는 듯 잔잔하게 변해버렸다.

“어떻게 된 거야?”

백무극의 목소리가 갈라졌다. 천기신사는 대답도 하지 못하고 눈만 치뜨고 있었다. 그때 운청산의 손에서 검이 뚝 떨어지더니 그를 받치고 있던 물기둥도 사라져버리고 그 역시 물속으로 풍덩 빠져 들어갔다.

“배! 배! 배를 대!”

백무극이 괴성을 내질렀다. 그러나 선착장마저 떠내려간 마당에 배가 남아있을 리가 없었다.

“저 놈, 저 놈을 잡아야 돼.”

그때 백무강이 힘겹게 다가와 말했다.

“소군. 진정하시지요. 기진하여 강에 빠져버린 놈을 무슨 수로 찾겠습니까? 우리에겐 아직도 남은 것이 있습니다. 우선 그쪽 결과부터 확인하시지요.”

백무극은 눈을 질끈 감았다가 세 번의 심호흡으로 평정을 되찾았다. 그가 눈을 떴을 때는 이미 냉정한 눈빛을 되찾은 상태였다.

“추태를 보였습니다. 여봐라! 무상 어르신을 뫼시어라.”

이동침상이 곧 다가왔다. 백무강은 백무극에게 허리를 접고 침상에 누웠다.

백무극은 더 이상 주위를 돌아보지 않고 먼저 몸을 날렸다.

열네 척의 배들 가운데 뒤로 쳐졌던 배와 규모가 작은 배 일곱 척이 가라앉았다. 작은 배들은 물살에 휩쓸려 버렸고 겨우 버티던 중형선 네 척은 폭발물에 의하여 옆구리에 구멍이 나서 가라앉았다.

용문비선을 비롯한 중형선 일곱 척에서 수십 개의 밧줄들이 쉬지 않고 강으로 떨어졌다가 낚시하듯 사람들을 건져냈지만 배 위로 끌어올려진 이들보다는 휩쓸려간 이들이 더 많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풍랑은 그치지 않았고 그 속에서 폭발물을 지닌 사람들이 또 다시 자유롭게 배를 향해 다가오고 있었다.

“벽수판을 거둬라. 배의 무게 중심을 낮춰.”

드르륵거리는 도르래 돌아가는 소리가 힘겹게 들리고---.

“대고를 쳐라. 배를 저어.”

둥둥둥, 대고 소리가 다시 힘을 북돋는 순간 노수들이 비명을 지르며 배를 저었다.

용문비선 일호의 책임자이자 용문수로표국의 국주인 곽동량이 찢어질 듯한 목소리를 계속해서 독려하자 배는 잠시동안 평정을 찾는 듯 했다. 그러나 그 순간 또 하나의 거대한 파도가 몰려왔고 배는 힘겹게 파도의 꼭대기에 올라갔다가 수 장이나 곤두박질쳤다. 배가 뒤집어질 듯 휘청거리다가 겨우 중심을 잡는 순간 또 다시 누런 황톳물들이 배를 덮쳤다.

“아아악!”

황톳물이 다시 배 밖으로 흘러나가는 순간 난간에 줄을 묶고 몸을 지탱하고 있던 노수들이 강으로 휩쓸려 나갔다가 겨우 배 위로 기어올랐다.

한편 호신강기를 운용한 채 배의 뒤쪽 난간을 붙잡고 서 있던 운녹산 등은 침중한 표정으로 따라오는 배들을 바라보고 있었다.

잠깐 사이에 또 한 척이 뒤집어지고 이제 겨우 여섯 척 남았다. 용문비선 사호마저 가라앉은 마당이니 조타술을 따질 문제가 아니었다. 오로지 하나, 세차게 일렁거리는 파도가 지날 때마다 드문드문 드러나는 어피인들이 문제였다. 그러나 배도 제대로 몸을 가누지 못하는 마당이니 속수무책으로 당하고 있을 수밖에 없었다.

그들이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최대한 빨리 노를 저어 어피인들이 따라오지 못하게 막는 것이 첫째요. 조금씩 방향을 틀어 배를 강변에 가져다 붙이는 것이 두 번째며, 조금이라도 더 살아남게 해달라고 기도하는 것이 마지막이었다.

그때였다. 배를 박살낼 만큼 높고 세찬 파도가 닥쳐왔다.

“이건 안 되겠소.”

운녹산이 소리치는 순간 현상자는 물론 운녹산과 신수사태 그리고 공명선사가 동시에 손을 뻗었다. 배의 후미를 후려치려던 파도가 네 사람의 장력에 맞고 흩어졌다. 그런데 그때 갑자기 파도가 숨을 죽였다.

네 사람은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서로를 보다가 눈빛을 빛냈다. 배가 흔들림을 멈추려는 순간 네 사람이 뱃전으로 뛰어갔다. 그들은 각각 밧줄을 몸에 묶고 반대쪽 줄을 난간에 묶는 즉시 강으로 뛰어들었다.

물제비가 날 듯 몇 개의 파문들이 이는 순간 운녹산 등이 배의 주변을 휘돌았다. 현상자의 검과 운청산의 도가 물 속에 반쯤 잠긴 채 바둑판 모양으로 물을 갈랐다. 신수사태의 창이 배 밑을 찔렀다. 공명선사가 물속으로 손을 넣자 물기둥들이 솟구쳤다. 그렇게 사천무림련의 네 수장들이 솔선수범하여 강 위를 종횡하자 물밑에서 시뻘건 핏물이 올라온 후에 곧 시커먼 옷을 입은 이들이 강물 위로 떠올랐다.

쾅! 쾅! 쾅!

물 위로 떠오른 가죽주머니들이 연속적으로 폭발하기 시작했다.

그렇게 움직인 이들은 사대수뇌들뿐만이 아니었다. 각각의 배에서 모두가 그들처럼 행동했다. 수십 명의 장년인들이 밧줄을 맨 채 배 주위를 달렸다. 물에 빠지려 할 때마다 배를 박차고 탄력을 얻어 다시 움직이고 때로는 배 위에서 사람들이 줄을 당겨 물에 빠지지 않도록 도왔다.

현상자가 소리쳤다.

“곽 국주! 배를 강변에 대시오.”

곽동량이 알았다 외치고 다시 소리쳤다.

“배를 강가로 댄다.”

그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대고 소리가 강 위를 떠돌았다. 순간 나머지 다섯 척의 배에서 모두 북소리가 울렸고 그때부터 우측 노들만이 힘차게 움직였다. 그 사이에 밧줄에 몸을 맡긴 채 강 위를 휘젓고 다니던 사람들이 떠다니는 사천무림련 사람들을 건져내기 시작했다. 그러나 그들이 건져낼 수 있었던 사람들은 겨우 수십 명에 불과했다.

마침내 배는 강변에 이르렀고 각각의 배에서 돛이 던져졌다. 서너 줄의 밧줄들이 강변과 배를 연결하는 순간 사람들이 일제히 줄을 타고 강변으로 내려섰다.

마지막까지 배에 남아있던 현상자가 곽동량에게 울 것 같은 얼굴로 말했다.

“오늘이 바로 우리 청성의 통한의 날이오. 얼마나 죽었는지 알아보기조차 두렵구려. 곽 국주! 우리가 이제 하선하니 저들은 더 이상 이 배를 공격하지 않을 것이오. 잠시 시간을 두었다가 급히 강을 내려가면서 구할 수 있는 사람들을 구해주시구려.”

곽동량은 눈을 질끈 감았다 뜨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지금 당장이라도 가겠습니다. 한 사람의 생명이라도 더 구할 수 있다면 제가 무엇을 두려워하오리까?”

현상자는 곽동량의 두 손을 그러쥔 채 말도 못하고 고개만 끄덕였다.

현상자마저 배에서 내렸다. 잠시 후 대고 소리가 울려 퍼지고 용문비선 일호를 필두로 하여 네 척의 배들이 강변을 떠났다.

걱정스러운 눈빛으로 강과 용문비선을 번갈아 바라보던 현상자는 배가 별 탈 없이 강의 중심에 진입하자 한숨을 내쉬고 돌아섰다.

현상자는 눈감지 않으려고 노력했다. 참으로 참담한 광경이었다. 사람들은 황톳물을 뒤집어 쓴 채로 정기를 잃은 눈빛을 하고 강변에 늘어져 앉아있었다. 그 수는 많아봐야 칠백. 구백이 출정했고 다시 아미와 당가의 고수 삼백이 가세했으니 머릿수만도 총 천이백이었건만 거의 반으로 줄어버린 것이었다.

현상자는 사람들을 외면하고 그나마 꼿꼿한 자세를 유지하고 있는 수뇌들을 바라보았다. 다행히 딴 배에 탔던 당유연도 그 자리에 있었다.

현상자는 그나마 위안을 얻고 그들에게로 걸어갔다.

운녹산이 말했다.

“곤음진인의 말씀으로는 풍랑은 술법에 의한 것이라 하더이다. 결국 우리가 저들의 철저한 계산에 농락당한 꼴이 되었습니다.”

공명선사가 눈을 감고 불호를 외웠다.

“아미타불! 우리는 드러나고 저들은 어둠 속에 있는 형국이었으니 함부로 행동할 일이 아니었는데, 우리의 자만심이 지나쳤던 것 같습니다.”

그때 강 건너편을 바라보고 있던 신수사태가 금사강의 하류를 향해 손을 뻗었다. 모두가 그쪽으로 눈길을 옮겼다.

강변에 하얀 점들이 하나 둘씩 나타났다. 처음에는 몇 개의 점들뿐이었으나 곧 강변에 하얀 띠가 둘러질 만큼 많아졌다.

“저, 저것이 어찌된 일이오?”

당유연이 눈을 부릅뜨며 물었다. 그러나 아무도 대답을 하지 못했다.

강에 늘어선 하얀 점들은 적어도 일천이 넘을 것 같았다. 그러나 금강포구에서 사천무림련과 맞닥뜨린 사람들은 결코 아닐 것이다. 풍랑을 만난지 반 시진이 넘었다. 그 동안 떠내려 온 거리는 적어도 백이삼십 리. 금강포구에서 일천이 넘는 사람들이 벌써 도착했다는 것은 불가능에 가까운 일일 것이고 그렇다고 해도 하류가 아닌 상류에서 왔어야 했다.

현상자가 안력을 돋워 세세히 살폈다. 그리고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대다수가 쇠뇌를 들고 있구려. 아마도 바로 저 밑 금문협(金門峽)에서 올라오는 것일 게요. 배가 침몰하길 기다렸다가 살아남은 이들까지 남김없이 죽이려고 기다리고 있었던 것 같소이다.”

타당한 짐작이었다. 삼협과는 달리 양안(兩岸)의 높이가 이십여 장밖에 안되고 길이도 백여 장으로 짧고 폭은 반대로 넓어 팔십여 장이나 되니 협(峽)이라 부르기에는 모자란 감이 있었지만, 금문협은 어쨌든 금사강에서 그 폭이 가장 좁은 곳이었다. 그곳이라면 강 반대편까지 쇠뇌가 능히 그 위력을 발휘할 수 있을 것이다. 거기서 일천여 명이 일제히 쇠뇌를 쏜다면 쇠뇌살들은 피할 수 없는 폭우가 되리라.

운녹산이 탄식성을 내뱉고서 말했다.

“결국 저들이 노린 것은 점창이 아니었소이다. 우리가 큰 힘을 들이지 않고 저들을 토벌하려 했던 것처럼, 저들 역시 힘을 최대한 아낀 채로 사천무림을 얻으려 했던 것입니다.”

모두가 고개를 끄덕인 가운데 현상자가 말했다.

“저들의 외형이 날로 불어가고 있소이다. 지금까지 드러난 것만으로도 쉽게 승부를 보기 어려울 것 같소. 일단 돌아갑시다. 떠내려간 이들이 다 죽었다고 볼 수는 없을 것이오. 그들을 맞이해야 할 것이고 우리도 빨리 원기를 회복해야 할 것이오.”

현상자의 의견에 따라 사천무림련은 지친 몸을 이끌고 불일장으로 향했다.

언제 비가 왔었냐는 듯, 언제 풍랑이 일었느냐는 듯 하늘은 맑고 강은 잔잔했다. 그것이 못마땅했는지 때때로 선들바람이 불어 강을 건드렸다. 강물이 일렁이고 강변의 자주 빛 갈대들이 몸을 흔들었다. 그 갈밭 모래톱 끝에 운청산이 하반신을 강에 담근 채 모로 누워있었다.

여덟 영혼들이 운청산의 얼굴 근처에 모여 걱정스러운 듯 바라보고 있었다.

‘왜 안 깨어나지?’

운추산이 답답한 심정을 전하는 순간 운청산의 외눈에서 물기가 흘러내렸다. 왼쪽 눈이 있던 텅 빈 공간에서 흘러내리는 흙탕물과는 다른 맑고 투명한 물방울이었다.

“우리! 우리! 우리!”

운청산의 속눈썹이 바르르 떨리고 그의 손이 허공을 휘저었다. 그리고 마침내 눈을 떴다.

‘괜찮으냐?’

운경산이 눈앞으로 다가가 물었다. 그러나 운청산은 대답하지 않고 급히 품속부터 뒤졌다.

“있었구나. 다행이다. 있었어.”

운청산은 화살촉을 눈앞으로 가져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그 순간 그의 눈에서 힘이 쭉 빠졌다.

‘괜찮습니다. 제가 얼마 동안이나 이 상태로 있었던 겁니까?’

운경산이 전했다.

‘두 시진 정도? 완전히 탈진했었다.’

운청산은 흐릿하게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꺾었다. 해가 이미 서쪽으로 기울어 있으니 미시에 들어선 지도 꽤나 오래된 것 같았다. 그가 생각을 전했다.

‘지금도 천근만근인 것이 제 몸이 제 몸 같지 않습니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이미 진원진기마저 뽑아 쓴 마당에 사우팔절검의 마지막 초식인 사우진천하를 펼쳤으니 몸이 견뎌낼 턱이 없었다. 아무리 운청산의 몸이 단단하고 태청구전금액고의 공능이 대단하다 하여도 한동안은 공력을 일으키기는커녕 움직이기도 쉽지 않으리라.

운청산은 처음으로 힘겹게 일어나보려고 애를 썼다. 그런데 등이 너무나 무거웠다. 그 순간 그의 외눈이 다시 부릅떠졌다.

“우리!”

팔 하나 짚는 동안에도 바르르 떨리던 몸이었다. 그러나 그 순간은 용수철 튕기듯이 발딱 일어섰다. 그리고 잔뜩 물을 먹은 백의 밧줄을 풀어 당우리의 시신을 내려놓았다.

당우리의 시신을 눈으로 확인한 운청산의 신형이 허물어졌다.

“내가, 내가 도대체, 도대체 무슨 짓을 한 거야? 무슨 짓을 한 거야?”

운청산은 목이 꺾여 부러지고, 팔이 빠지고, 허리에 무수한 상처를 입고, 다리마저 퉁퉁 불어버린 당우리의 참혹한 시신을 붙잡고 대성통곡을 했다.

생각해 보면 너무나 당연한 결과였다. 유능제강은 오묘한 무공의 이치만이 아니다. 세상을 살아가는 처세의 교훈인 것만도 아니다. 사람의 육신 또한 그 이치를 따르는 것. 이미 부드러움을 잃어버린 시신을 업은 채로 청룡구전과 회룡산형으로 모자라서 풍륜화망에 이어 사우진천하까지 펼쳤으니 굳은 시신이 견뎌낼 턱이 없었으리라.

운청산은 쉴 새 없이 눈물을 흘리며 두 손을 더듬어 그녀의 머리를 바로 세우고 팔을 모으고 두 다리를 모아 붙였다. 그러나 당우리의 시신은 그가 마음속에 그린 대로 쉽게 형상을 이루지 못했다.

운청산은 실성한 사람처럼 품속을 뒤졌다. 그리고 겨우 화살촉을 꺼내 두 손으로 마구 비비며 중얼거렸다.

“미안하오. 미안하오. 우리. 나와 보시오. 내가 이렇게 용서를 빌고 있소. 제발 나와서 괜찮다고 말해주오.”

화살촉에 묘한 광채가 어렸다. 운청산은 화살촉을 받쳐 든 두 손을 부르르 떨며 당우리의 영혼이 나오기만을 기다렸다. 그러나 당우리는 끝내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

그 모습을 보고 있던 여덟 영혼들은 안타까운 마음에 그녀가 나오지 못할 것이라는 사실을 알리려고 계속해서 운청산의 얼굴 주변을 배회했다. 그러나 누구도 운청산과 눈을 마주치지 못했다.

여덟 영혼들도 당우리의 영혼을 틀림없이 보았었다. 그러나 그녀는 지금 나올 수가 없었다. 그녀는 여덟 영혼들처럼 완전한 신명이 아니었다. 그녀의 모습은 마지막 그 모습 그대로여서 배에는 검은 화살이 꽂혀있었고 입에서는 피를 흘리고 있었다. 그녀는 여덟 영혼이 혼귀로 있었을 때처럼 태양이 따갑게 내리쬐는 환한 대낮에는 나타날 수 없는 처지인 것이었다.

여덟 영혼들은 결국 운청산이 얼굴을 들 때까지 기다릴 수밖에 없었다. 시간이 흘렀다. 금사강의 물결처럼 흐르고 또 흘러 어느새 하늘에는 붉은 물이 들었다.

운청산은 근 한 시진 반 동안이나 두 손을 화살촉을 받쳐 들고 무릎을 꿇은 채 땅에 머리를 박고 울었다.

마침내 해가 서산을 넘었다. 운청산의 손에 있던 화살촉에서 미묘한 광채가 일었다. 여덟 영혼들은 즉각 변화를 알아차렸다.

‘어떻게든 알려줘야 할 텐데.’

운경산이 생각하자 운추산이 대답했다.

‘동시에 머리를 칩시다. 그 정도면 정신을 차리겠지요.’

모두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들이 일제히 쇄도하여 운청산의 정수리를 후려쳤다. 하나라면 운청산이 신경을 서야 겨우 알아차리는 미약한 힘이었지만 여덟이 모이니 제법 강한 힘이 되었다.

운청산이 고개를 들어 무의식적으로 화살촉을 살폈다. 그때 화살촉에서 당우리의 얼굴이 드러났다. 운청산은 너무나 반가워서 또 눈물을 흘렸다. 반면에 여덟 영혼들은 너무나 놀라서 눈을 치떴다.

당우리의 입에서 줄줄 흐르던 핏물이 어느새 사라지고 없었다.

‘하! 워낙 착한 아가씨다 보니 금새 신명이 깃드나 보네.’

운추산이 감탄하자 모두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나 운현산은 고개를 저었다.

‘형수처럼 반 신명인 게다. 아무리 천성이 착하다 해도 저렇게 빨리 신명을 되찾을 수는 없어. 그래서 낮에 나타나지 못한 것이고 지금도 얼굴만 드러낸 것일 거다. 청산이 또 다시 슬퍼하지 않게 가슴에 박힌 화살을 숨긴 것이야.’

모두가 다시 고개를 끄덕였다. 그때 당우리가 웃으며 입을 크게 벌리고 말했다.

‘운 가가. 괜찮아요. 울지 말아요. 노군께서 뭐라 하셨던가요? 죽음은 휴식이라 했잖아요. 나 이제 운 가가의 품에서 편하게 쉴래요. 그러니 더 이상 슬퍼하지 말아요.’

운청산은 거듭해서 고개를 끄덕이며 화살촉 눈앞으로 가져갔다. 당우리가 천천히 손을 뻗어 운청산의 눈물을 쓰다듬었다. 그녀의 손이 눈물 속으로 쑥 들어가 버렸다.

당우리는 미소를 지었다.

그녀의 모습을 보고 있던 운현산이 고개를 저었다.

‘저때는 아파서 웃기도 힘들 텐데 잘 참는군. 휴우!’

그때 당우리가 다시 운청산의 눈물을 닦아보려 하며 입을 벌렸다.

‘날 잃어버리지 말아요. 항상 안고 있어야 해요. 안 그러면 화낼 거예요.’

운청산은 또 다시 말하지 못하고 고개만 끄덕였다.

‘눈물을 닦아요. 내가 닦아 주고 싶은데 안되네요. 그리고 다른 때처럼 바보같이 웃어 봐요.’

운청산은 그녀가 시키는 대로 눈물을 닦고 힘겹게 웃었다. 그리고 말했다.

“그대의 머리카락 몇 가닥을 가져야겠소. 괜찮겠소?”

당우리가 고개를 끄덕였다.

운청산은 당우리에게 쉬라 하고 그녀의 시신을 조심스럽게 들어 강으로 들어갔다. 황톳물 가득한 몸을 깨끗이 씻기고 자신도 씻었다. 그리고 당우리의 머리카락 몇 가닥을 여기저기서 조금씩 뽑았다. 그렇게 하는 동안 그는 점차 평정을 되찾고 끝내는 억지가 아닌 부드러운 미소마저 되찾았다.

꼬박 하루를 걸어 불일장에 도착한 사람들은 자리를 불문하고 드러누워 버렸다. 현상자 등은 미루어 놓았던 피해 상황을 억지로라도 파악해보려 했지만 기진맥진한 사람들을 보고는 또 다시 미루었다.

그나마 위안이 되는 것도 있었다. 죽었으리라 생각했던 사람들 가운데 그 풍랑을 견뎌내고 복귀한 이들이 있다는 것이었다. 겨우 서른일곱에 불과했지만 그래도 시간이 지남에 따라 더 많은 사람들이 돌아올지 모른다는 희망을 가질 수 있는 계기가 되었다.

죽은 자를 떠올리는 낮은 흐느낌들과 의외의 생환을 반기는 벅찬 울음소리가 겹치고 잦아지면서 세 시진이 흘렀다.

현상자 등은 더 이상 기다릴 수 없다는 판단 하에 피해 상황을 파악했다.

청성 도사 일백다섯, 아미 승려 칠십팔, 운가 고수 오십칠, 당가 고수 구십삼. 사대파 소속 사망자 혹은 실종자의 수자였다. 노호단 구, 정명단 삼십이, 관음사 십일. 나머지 사람들은 생존자 수자였다.

예상을 했던 일이었다. 그러나 결과를 알고 나자 사천무림련 사람들은 애써 참았던 통곡소리를 흘려내지 않을 수 없었다. 눈물뿐이 아니었다. 그 안에는 아들의 죽음을 견디려는 피눈물이 있었고 아비의 복수를 다짐하는 처절한 목소리도 있었다.

그것이 끝이 아니었다. 아미의 소식이 전해졌다. 삼백의 백의인들이 난입하여 일백이 넘는 아미승들을 죽였다는 소식이었다. 백의인 삼백이 모두 죽었다는 소식 또한 같이 전해졌으나 그 수자가 무슨 의미가 있을까. 아미 승려들의 대범창이 흘러나왔다.

그러나 그 또한 끝이 아니었다. 마침내 당가의 소식마저 전해졌다. 당유연이 유일하게 나이를 잊고 재롱을 떨어야 하는 존재 하수원의 죽음과 당가의 참화 소식은 당유연을 비롯한 당가 사람들의 넋을 앗아버렸다.

반 시진 후, 탁자에 엎어져 꼼짝을 하지 않던 당유연이 붉은 눈을 드러내고 넋이 나간 그대로 챙길 것도 없는 짐을 챙기는 시늉을 했다. 그리고 현상자 등에게 인사 한 마디 하지 않고 문을 열었다.

“멈추시오. 당 가주!”

운녹산이 소리쳤다. 순간 당유연이 붙잡고 있던 문틀을 부셔버리고 돌아섰다.

“지금 멈추라 했소? 지금 분명히 내게 멈추라 했소이까? 멈췄소이다. 무엇이오?”

당유연이 눈을 부릅뜨고 운녹산을 노려보았다. 그러나 운녹산은 냉정하게 가라앉은 눈빛으로 당유연의 눈을 직시하며 차분히 그리고 또박또박 말했다.

“올 것을 기대하며 기다리고 있을 것이오. 지쳤다는 것을 알고 쾌재를 부를 것이오. 그래도 당장 가시겠소?”

당유연의 눈빛이 흔들렸다. 운녹산은 그 순간을 놓치지 않고 다시 말했다.

“하수인들 몇을 죽이고 당가의 문을 영원히 닫으시려는 것이오? 그것이 과연 노 태태께서 원하시는 것이라 생각하시오?”

순간 당유연은 또 다시 혼을 잃은 눈빛으로 어깨를 축 늘어뜨렸다.

“모르겠소. 모르겠소. 나도 내가 어찌해야 할지 모르겠소이다. 내가 가문을 이 지경으로 만들다니---.”

당유연이 넋두리하는 순간 피해의 경중은 다르지만 동병상련의 처지에 놓인 공명선사와 현상자 그리고 신수사태가 눈을 감았다. 그때 운녹산이 당유연이 앉아있던 그 의자를 부드럽게 끌어 권했다.

당유연은 어깨를 늘어뜨린 채로 발을 질질 끌어 의자에 털썩 주저앉았다.

운녹산은 한동안 침중한 기운을 참아내다가 결국 먼저 입을 열었다.

“사천무림 전체가 큰 위기에 봉착했습니다. 지금 당장 입은 피해의 경중이 다르다 하나 결국 위기는 모두에게 공통된 것. 우리는 어렵더라도 지금 당장 결정을 내려야 합니다.”

현상자가 한숨을 크게 내쉰 후 눈을 뜨고 운녹산을 바라보았다.

“무엇을 결정하는 것이오?”

“당장 싸울지, 아니면 나중에 싸울지를 결정해야겠지요.”

순간 공명선사와 신수사태는 물론 넋을 잃은 것 같던 당유연마저 눈을 부릅뜨고 운녹산을 직시했다. 당유연이 크게 노한 듯한 목소리로 소리쳤다.

“그게 도대체 무슨 소리요? 싸움을 미루자는 말이오?”

운녹산은 크게 심호흡하고 당유연을 직시한 후 나머지 사람들을 천천히 둘러보았다.

“의기와 분노만으로 싸울 상대가 아닙니다. 냉정하게 대처해야 합니다. 모두 보셨지 않습니까? 점창에서 사천이요, 금사강에서 일천이었습니다. 거기에 지금 죽고 없다지만 아미에 삼백과 당가에 삼백이었습니다. 지금 드러난 것만으로도 승패를 쉽게 점칠 수 없는 상황인데 상대에 대해서는 아직도 모르는 바가 많습니다. 묻겠습니다. 당장 통쾌하게 복수를 하고 죽음으로써 조상영령들에게 사죄를 하시겠습니까? 아니면 분노를 참고 힘을 길러 복수를 한 후에 다시 문파와 가문을 재건하시렵니까?”

운녹산은 다시 사람들을 훑어보았다. 현상자 등은 운녹산의 눈을 외면했다. 아예 눈을 감아버렸다.

이미 선택은 정해져 있었다. 그러나 개인적으로는 원하지 않는 결정이었다. 하지만 반드시 그리 해야만 하는 결정이었다.

각파 내에서 하나같이 심하게 반발하리라. 그러나 그것을 억누르고 이성적으로 행동하도록 설득해야 하는 것이 바로 수장의 일이었다.

현상자가 다시 눈을 뜨고 운녹산의 냉정한 눈을 주시했다.

‘제일 가벼운 피해를 입은 탓인가? 어찌 나보다 더 냉정하단 말인가? 어허! 이거 내가 도사될 사람이 아니었나보구나. 원시천존! 과연 그러합니까? 그렇지. 그러하군. 난 도사가 아니었어. 도사들이 살 터전을 만들라고 길러진 무인인 것이야. 허허허허!’

현상자가 내심의 허탈한 웃음을 숨기고 운녹산에게 말했다.

“구체적으로 어찌하자는 것이오? 이제 우리가 섣불리 도강하지 못하는 것은 분명한 일이오. 그런데 운 가주의 고견대로 참고 힘을 기르려 해도 쉽게 방법이 떠오르지 않는구려.”

모두가 눈을 뜨고 운녹산을 주시했다.

“본산의 제자들까지 모두 거두어 천북으로 가시지요.”

순간 공명선사와 현상자 그리고 신수사태가 믿을 수 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그게 무슨 말이오? 아미를 버리란 말이오? 청성을 버리란 말이오?”

현상자는 운녹산에게 연신 고개를 가로저어 보였다. 말도 안된다는 표정을 지은 것은 집 자체가 사라져버린 당유연 역시 마찬가지였다.

운녹산이 여전한 기색으로 말했다.

“한 파의 정신은 사람에게 깃들어 있는 것이지 땅과 건물에 있는 것은 아니겠지요. 아미와 청성을 그대로 두고 우리끼리 뭉친다고 해보시지요. 저들이 공세로 돌아선다면 어찌 하시겠습니까? 아미를 지키고 청성을 버립니까? 아니면 반대로 할까요? 땅은 다시 찾으면 됩니다. 건물은 다시 지으면 됩니다. 그러나 사람은 그리 할 수 없습니다. 누군가에게 뜻을 넘기기 전에는 불가능하지요. 천북이라 한 것은 그곳이 이 사람의 터전인 탓이 아닙니다. 오직 그곳만이 화산을 불러들일 수 있고 무당의 도움을 구할 수 있는 곳인 까닭입니다. 오직 그곳만이 한길만 막으면 난공불락의 요새가 되는 까닭입니다. 우리가 모두 천북에 자리한다면 상대는 무주공산 사천을 차지하겠지요. 그러나 그렇게 되면 상대 또한 밝은 곳으로 몸을 드러내지 않을 수 없을 것입니다.”

운녹산은 다시 사람들의 반응을 살폈다. 모두가 다시 한숨을 내쉬고 눈을 감았다. 그러나 이번에는 오래가지 않았다. 현상자가 눈을 뜨고 말했다.

“결정을 하루만 미룹시다. 일단 자파의 사람들을 다독이고 의견을 수렴할 시간을 가지는 게 좋겠소.”

현상자의 의견에 모두가 동의했다.

운녹산은 사람들에게 먼저 나가기를 권했다. 공명선사와 신수사태가 당유연을 위로하며 함께 나갔고 그 뒤를 현상자가 따랐다.

운녹산은 현상자의 늘어진 어깨를 바라보며 고개를 저었다.

‘일이 왜 이렇게 되어버린 건가? 젊은 녀석들에게 무인의 기질이나 심어주고 간단히 끝내려 했건만, 완전히 수렁에 빠져버렸다. 후우! 그나마 다행인 것은 본가의 피해가 적었다는 것, 그리고 타파에게는 선택의 여지가 없다는 것 정도겠지. 그래. 현실을 인정하면 다행이라고 해야겠지. 혼자 발을 뺄 수도 없는 처지에서 최선이라고 할 수 있겠지. 어찌한다? 어떻게든 화산이나 무당을 끌어들여야 하는데, 어찌한다?’

운녹산은 결론을 내리지 못하고 고개를 저으며 현상자의 뒤를 따랐다.

운녹산이 내가를 벗어나면서 걸음을 빨리하여 현상자와 보조를 맞추었을 때의 일이었다.

사람들이 둥그렇게 원을 그린 가운데 그 안에서 울음 섞인 욕설이 흘러나왔다.

“이게, 이게 무슨 꼴이야? 이 개자식아!”

격타음이 들리고 미약한 신음소리가 연이어 들렸다.

수뇌들이 모두 눈살을 찌푸렸다. 동료, 선배들과 가족들이 무수히 죽어가고 있는 때였다. 경건한 마음으로 죽음을 애도하고 앞으로 있을 싸움을 대비하여 지친 몸을 쉬어주어야 할 때였다. 그런 때에 싸움이나 벌이고 있으니 안 그래도 복잡한 심사가 뒤틀리지 않을 수 없었다.

수뇌들은 사람들을 뚫고 앞으로 나아갔다. 모두가 다시 눈살을 찌푸렸다. 싸움이 아니었다. 일방적인 구타로 봐야 했다. 그것도 당가의 자제인 당명인이 누더기가 된 청의에 산발을 한 사람을 무릎 꿇려놓은 채 주먹으로 치고 발로 밟았다.

수뇌들은 알 수 없다는 표정으로 조금 더 자세히 살폈다. 이상한 광경이었다. 당명인은 때리면서도 울고 청의사내는 맞으면서도 벌떡벌떡 일어나 다시 무릎을 꿇었다.

이상한 것은 그뿐이 아니었다. 그렇게 때릴 정도면 화가 많이 났다는 것인데, 당명인은 쇠로 된 의수가 달린 왼손을 쓰지 않았고 공력도 돋우지 않았다.

보다 못해 당유연이 말리려고 입을 열려했다. 그때 당명인이 힘이 빠진 듯 때리기를 멈추었다. 그리고 청의사내 앞에 털썩 무릎을 꿇고 멱살을 움켜쥐며 흐느꼈다.

“왜 살려서 데리고 오지 못했어? 왜? 너 강하잖아, 임마. 왜 넌 살아와놓고 이 아이는 이런 꼴로 만들었어? 왜? 으흐흐흐흑.”

당명인은 고개를 숙인 채 꼼짝 하지 않고 앉아있는 사내 운청산의 가슴에 얼굴을 묻고 오열했다. 차라리 운청산이 못된 놈이었으면 좋았으리라. 당우리가 그간의 사정을 알려주지 않았으면 좋았으리라. 그랬다면 아무런 생각도 않고 죽여 버렸으리라. 그렇게 할 수 없는 당명인은 그 울분을 운청산의 가슴에 풀지 않을 수 없었다. 평생 그 안에 맺히라고. 평생 동생을 잊지 말라고.

그때 수뇌들은 당명인의 말을 듣고서 두 사람의 왼쪽에 놓여 있는 통나무를 바라보았다. 언뜻 보아서는 한 아름의 통나무를 반으로 쪼개어 속을 파고 그 안에 이름모를 여러 종류의 들꽃들로 가득 채워 놓았을 따름이었다. 그러나 분명히 ‘이 아이’라고 말했다. 그렇다면 손으로 만든 꽃관이라는 소리였고 때린 이가 당명인이었으니 십중팔구 당가의 사람이리라.

당유연은 멍한 표정으로 발을 끌어 관 앞으로 다가갔다. 그리고 꽃 속에 누워있는 사람의 얼굴을 확인했다.

“어! 이게, 이게, 이게---.어어허 이게---.”

당유연은 그 많은 사람들 앞에서 바닥에 털썩 주저앉았다. 그리고 부르르 떨리는 두 손으로 관속에 누워있는 당우리의 얼굴을 힘겹게 붙잡았다.

“으어어, 우리야. 이게, 이게 무슨---. 아니야. 내 꾀꼬리가, 내 꾀꼬리가 왜 이런 꼴로---. 아니야.”

당유연은 소리를 지르며 벌떡 일어섰다. 그리고 운청산에게로 걸어가 당명인의 어깨를 붙잡고 뒤로 던져버렸다. 당명인이 벌렁 나자빠지는 순간 당유연은 운청산의 멱살을 붙잡아 위로 들어올렸다.

마침내 산발한 머리 사이로 운청산의 얼굴이 드러났다. 하루 만에 반쪽이 되어버린 얼굴, 맞아서 엉망이 되어버린 가운데서도 창백한 기운을 드러내는 안색, 휑하게 뚫린 왼쪽 눈, 그리고 총기는 잃고 눈물만 그렁한 오른쪽 눈을 보는 순간 당유연은 고개를 저었다. 멱살을 잡은 손을 힘없이 내리고 비틀거리며 걸었다. 사람들이 일제히 길을 터주었다.

“어허허, 어허허허허허!”

당유연은 울음도 그렇다고 웃음도 아닌 묘한 소리를 남긴 채 술 취한 사람처럼 비틀거리며 사라져 버렸다.

혼자된 운청산은 당유연이 멱살을 놓은 순간 허물어진 그 자세대로 멍하게 앉아있었다. 그때 사람들 사이에서 종길이 걸어 나왔다. 그는 당우리의 얼굴을 힐끔 보고서 운청산의 곁에 쪼그리고 앉았다. 그리고 운청산의 어깨를 다독이며 부축하여 일어서려 했다.

“포구에서 자네를 보지 못해 이상타 했네. 이거 내가 사람을 잘못 봤구먼. 중책을 맡을 그릇이 아니건만 무공에 혹하여 잘못 택했어.”

종길이 고개를 들어 목소리의 주인공을 확인했다. 운녹산이 바로 앞까지 다가와 차가운 눈빛으로 내려다보고 있었다.

“실망했다. 뛰어난 청년이라고 생각했는데 공사조차 구분하지 못하는 철부지였다니. 사랑 놀음 따위로 책임을 도외시한 망나니였다니. 아는가? 정명단의 생존자가 마흔도 못된다. 당연한 일이겠지. 책임을 맡은 자가 사랑 타령하느라 세월 가는 줄 몰랐으니 마흔 명도 많다 해야겠지.”

차가운 눈빛에 비웃음까지 감돌았다. 그때 이정으로부터 들은 바가 있어 그것이 사실이 아님을 알고 있는 공명선사가 다가왔다.

“운 가주! 그것이---”

그러나 운녹산은 손을 뻗어 공명선사의 말을 막고 다시 차갑게 말을 이었다.

“책임자가 공사 구분조차 못했으니 군율에 따라 엄히 처벌해야 마땅하리라. 그러나 그전에 쌓은 공이 있으니 그것으로 상쇄하겠다. 가거라. 다시는 사천무림련에 발을 들이지 말라.”

그때 이글거리는 눈빛으로 운녹산을 노려보던 종길이 느닷없이 소리쳤다.

“시끄럽소. 적어도 운가 사람인 당신은 그런 말을 할 자격이 없소이다.”

운녹산에게 하오잡배나 다름없는 종길이 시끄럽다는 말을 입에 담았다. 운녹산으로서는 도파에 손을 얹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나 뒷말 때문에 빼지를 못하고 종길을 노려보았다.

“무슨 뜻이냐?”

종길은 도파에 얹어진 운녹산의 오른손을 보면서 코웃음 쳤다.

“원래 시비를 싫어하는 청산이오. 그가 왜 사천무림련에 투신했는데? 바로 운가 때문이오. 운가의 누군가를---.”

그때 운청산이 고개를 숙인 채로 힘없이 손을 뻗어 종길의 입을 막았다. 그리고 공허한 목소리로 말했다.

“당장 떠나겠습니다.”

그 순간 종길이 운청산의 손을 뿌리치고 소리쳤다.

“임마! 운청산! 말을 해. 네 잘못이 아니잖아? 씨팔! 왜 네가 이런 엿 같은 대우를---.”

종길은 말을 마칠 수 없었다. 운청산이 종길을 바라보고 흐릿하게 웃음 지으며 고개를 저었기 때문이었다.

휑한 눈과 어우러진 너무나 슬픈 미소를 보는 순간 종길은 입술을 깨물었다.

“젠장!”

그러나 운녹산에게는 그것만으로도 충분했다. 분명히 이청산이 아닌 운청산이라고 불렀다. 한때 했던 의심, 그러나 이내 까맣게 지워버린 의심이 확신으로 되살아났다.

“네, 네가 정녕---.”

무수한 영상과 생각들이 한꺼번에 교차했다.

천진한 이청수의 얼굴, 애타게 부르는 그 목소리, 운현산의 얼굴과 환성(幻聲), 목숨을 구해주고 절벽으로 떨어지면서 그를 바라보던 운청산의 기이한 눈빛과 껍질을 뒤집어 쓴 듯 했던 그 무표정한 얼굴. 그 모든 것이 하나 되어 운녹산의 머릿속을 흩트려 놓았다.

운녹산은 주춤주춤 물러섰다. 그리고 연방 고개를 저었다.

그러나 운청산은 운녹산을 바라보지 않았다. 손을 올려 가슴에서 달랑거리는 화살촉을 매만지며 부드러운 미소를 지었다.

‘가야지. 귀곡에 가면 우리도 금방 신명을 되찾을 거야. 귀곡 할아버지에게 청하여 목소리도 들어볼 수 있을 거야. 여기서 내가 더 할 일은 없어. 가야지. 곤륜으로 돌아갈 거야.’

운청산은 부드럽게 웃으며 종길에게 손을 뻗었다.

“아길! 좀 도와줘야겠다. 힘이 없어.”

종길은 아예 그의 앞으로 다가와 그를 강제로 업었다.

“젠장! 뭐가 이렇게 가벼워? 가자. 가버리자. 내가 데려다 줄께. 청인자 어르신이 있는 곤륜까지 무사히 데려다 주마.”

종길이 첫 발을 내디뎠다. 그때 연신 고개를 저으며 물러서는 운녹산과는 반대로 앞으로 나선 이가 있었다. 바로 곤음도인이었다.

“잠깐만!”

“젠장! 또 뭡니까?”

종길이 신경질적인 대꾸를 하며 돌아섰다. 곤음도인은 화내지 않고 운청산을 바라보았다.

운청산이 힘겹게 고개를 들어 마주보자 곤음도인이 물었다.

“자네가 풍랑을 멈춘 것인가? 그렇게 쉽게 끝날 일이 아니었어.”

순간 주위에 있는 모두가 눈을 부릅떴다. 만약 그때 풍랑이 멎지 않았다면 살아남은 사람이 별로 없었을 것이라는 것을 인식하고 있는 탓이었다. 사람들이 모두 운청산의 입을 주시했다.

운청산은 어루만지고 있던 화살촉을 바라보며 희미한 미소를 지었다. 그리고 고개를 저었다.

“제가 한 게 아닙니다.”

곤음도인은 다 짐작하고 있다는 듯 빙긋 미소를 지었다.

“그런가? 그 동안 수고 많았네. 자네에게 곤륜은 따뜻한 곳이겠지? 가서 편히 쉬게.”

곤음도인은 운청산에게 정중하게 포권을 취했다.

‘우리에게도 따뜻한 곳이 될 겁니다.’

운청산은 곤음도인에게 힘겹게 목례하고 종길에게 갈 것을 부탁했다. 종길이 걸었다. 둘러서 있던 이들이 일제히 좌우로 물러서서 길을 터주었다. 그리고 말없이 포권을 취하고 읍해 보였다.

풍랑을 멈춘 이가 운청산이 아니더라도, 적어도 점창의 산정 위에서 폭발을 알아채고 재빨리 대책을 세워 많은 목숨을 구한 이가 그임을 아는 탓이리라.

그렇게 운청산은 혼란 속을 헤매는 운녹산을 뒤로 하고 사천무림련을 떠났다.

*          *          *

좌상 백문정은 해독전서를 다 읽고 탐스러운 백염을 쓰다듬으며 떨떠름한 표정을 지었다.

“뭔데 그러십니까?”

맞은편에 앉아있던 백무극이 묻자 백문정은 아예 전서를 넘겨버렸다. 전서를 읽는 백무극의 표정은 수차례나 연이어 바뀌었다. 처음에는 놀라서 눈을 치뜨고 곧이어 입맛을 다시고 마지막으로는 좌상 백문정처럼 찜찜하다는 듯 미간을 찌푸렸다.

“사천무림련은 전체가 당가타로 이동하고, 아미에 이어 청성마저 산을 비운다? 도대체 무슨 의도일까요?”

백문정은 확신하지 못하겠다는 듯 고개를 젓고 백염을 매만지며 생각에 잠겼다. 그때 백무극이 눈을 치뜨며 말했다.

“혹시 사천을 다 먹어라?”

백문정이 여전히 떨떠름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 것 같습니다, 소군.”

“그런데 왜 그런 표정을 지으십니까? 우리가 원하는바 아닙니까?”

백무극이 의아한 표정으로 물었다. 백문정은 고개를 끄덕이면서도 표정을 버리지 않았다.

“금사강의 일이 만족스럽게 성취되지 않아 이 늙은이는 어찌해야 할지 갈피조차 못 잡고 있었습니다.”

백무극이 이해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원래 계획은 금사강에서 사천무림련을 몰살시키고 뿔뿔이 흩어진 사개 파를 각개격파해서 힘을 아낀 채 사천을 얻으려 했던 것이었다. 그런데 별 것 아니라고 생각했던 젊은 녀석 하나 때문에 금사강의 일은 성패를 말할 수 없는 애매한 결말을 보게 되었다.

가진 힘 가운데 많은 부분을 드러내 보였으니 사천무림련은 더 이상 공세를 취하지 못할 것이고, 그렇다고 지금 상태에서 역으로 공세를 취하자니 그 결과가 너무나 뻔히 보였다.

공멸이 아니면 엄청난 피해를 감수해야 하는 신승(辛勝)!

강호가 사천에 한정된다면 피해를 감수할 수도 있겠지만 사대파가 무너지면 다음에는 강호무림 전체를 상대해야 했다. 그런 상태에서 사천무림이 충격적인 결단을 내린 것이었다.

백문정이 말을 이었다.

“아미와 청성이 터전까지 버린다면 결국 사천무림련이 갈 곳은 천북 뿐이지요. 막기 쉽고 물러나기도 쉬운데다가 도움받기도 쉬운 곳이니까요. 자, 이제 우리는 어찌해야 할까요? 바늘이 있는 것을 알면서도 방석을 차지해야 하겠습니까?”

백무극이 눈살을 찌푸렸다.

“아직 남은 힘이 있으니, 진다고 생각해서 물러서려는 건 아니겠지요?”

백문정이 고개를 끄덕였다.

“우리와 같은 생각이지요. 잠시의 수모를 참음으로써 이기되 성세를 유지하겠다는---. 그렇지 않다면야 금사강이 아니라 점창산에서 바로 싸움이 벌어졌을 테지요.”

백무극은 왼손 검지로 콧수염을 고면서 중얼거렸다.

“수성만 하고 앉아있을 놈들은 아닐 테고---, 결국 계륵이네. 아! 모르겠어. 어찌하시렵니까?”

백문정은 미간을 찌푸리면서도 웃었다.

“일단 천군의 뜻을 받들어야 되겠지만, 허락하신다면 계륵이라도 먹을까 합니다. 뽑지는 못해도 바늘이 어디 있는지는 알 수 있으니 조심하면 되지 않겠습니까? 어차피 우리도 공세를 취할 수 없는 입장. 일단 사천을 접수한 후 천북의 길목을 막고 천하의 정세를 살피며 삼협의 물길도 주시해면서 힘을 키워야겠지요. 마침 천기신사로부터 좋은 소식이 들어왔으니 사천의 민심이나 살피면서 한 일 년 정도만 소강상태를 유지해 보지요.”

백무극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면서 말했다.

“말 나온 김에 가시지요.”

백문정이 눈을 치뜨고 너털웃음을 터뜨렸다.

“어디를요? 천군께 가자는 말씀이십니까?”

“왜 아니겠습니까? 쇠뿔도 단김에 빼라하지 않았습니까?”

백문정이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너무 급하십니다, 소군. 세세한 계획부터 짜놓고 아뢰어도 늦지 않습니다.”

백무극이 얼굴을 찌푸리자 백문정이 자리에서 일어섰다.

“이왕 일어섰으니 우상 병문안이나 가볼까요? 천북의 길목을 막는 일은 결국 그 친구 차지가 될 것인즉 그가 쾌차했을 때 천군을 뵈옵기로 하지요.”

“알겠습니다. 가시지요.”

두 사람이 나란히 방을 나섰다.

오 권 끝

도 서 명 : 괴선 6권

지 은 이 : 임준욱

펴 낸 이 : 서경석

출 판 사 : 도서출판 청어람

출판년도 : 2004년 2월 6일

봉 사 자 : 이민희

  <지은이 소개/ 임준욱>

  무협작가 임준욱의 스타일은 ‘성장물'이다. 몇 안되는 듯싶지만 꾸준하고 알찬 그의 작품 목록을 보면, ‘촌검무인'하나를 제외한 나머지 모두를 ‘성장물'로 분류할 수 있다. 소년이 청년이 되고, 결혼도 하고, ‘직업인'으로 살아가기도 한다.

  그렇게  “사는 이야기"를 쓰는 사람이 임준욱인데 특히 ‘무림인'의 이야기이다.

  1999년 <진가소전>으로 데뷔하여 대표작으로 <농풍답정록> <건곤불이기> <촌검무인> <괴선> 등이 있다.

  <차례>

  제1장 세상이 바뀌어도 곤륜은 변하지 않는다.

  제2장 곤륜은 흐르는 물과 같으니 

  제3장 느리고도 빠른 길에 들어서서

  제4장 웅호가 따로 없이 천지를 노니나니

  제5장 사천을 뒤덮을 암운, 철우를 뿌리고

  제6장 죽은 자 두 번 죽지 아니하니, 호각은 깨어지고

  제7장 하늘이 내게 주신 명이 있어

  제8장 하늘도 방도 모두 내 것이니

  제9장 천지의 왕이 장강에 있으니 그 이름 독안괴선이라

  <소개글>

  운명이여, 비켜라! 나 이제 꿈꾸노라! 

  하나의 육체, 열 사람의 영혼. 수령신의 저주로 나면서부터 아홉의 다른 영혼들을 품게 된 운청산. 자신의 영혼을 지키기에도 힘겨워 꿈을 꾸지 못하는 존재.

  마침내 연이 닿아 어머니의 영혼과 조우하고 여덟 혼령을 봉인하게 되는데...

  평온을 되찾은 운청산은 강호로 나서고, 세상을 배우고 사랑을 얻으며 마침내 꿈을 꾼다.

  그러나 봉인은 이미 깨어지도록 예정된 것. 운청산의 봉인은 언제쯤 풀릴 것인가?

  그 봉인이 풀리는 날, 괴선의 검은 하늘을 놀라게 하고 땅을 평정하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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